라캉이나 지젝 관련으론 오랜만에 적는 듯싶다. 관련서들이 눈에 띄어서인데, 백상현의 <라캉 미술관의 유령들>(책세상, 2014)이 그 중 하나다. 아직 미출간으로 책이나 저자에 대한 정보가 뜨지 않았지만 '그림으로 읽는 욕망의 윤리학'이란 부제는 내용을 어림하게 해준다. 라캉과 미술에 관한 책은 처음이 아니기도 하고.

 

 

가령 국내서로는 조선령의 <라캉과 미술>(경성대출판부, 2011)이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고, 번역서로는 다리안 리더(대리언 리더)의 <모나리자 훔치기>(새물결, 2010)가 미술에 대한 흥미로운 라캉주의적 독해를 보여준다.

 

 

미술에 한정하지 않으면 라캉 관련서로 숀 호머의 <라캉 읽기>(은행나무, 2014)도 얼마전에 다시 나왔다. 라캉 입문서에 속하는 책이다. 그리고 국내 학자들의 글모음으로 <라캉과 지젝>(글항아리, 2014)도 최근에 나왔다. "한국에서 2000년대 이후 가장 뜨거운 문화 현상의 하나이자 무시하기 힘든 지식권력이 되어버린 슬라보예 지젝 현상에 대해 한국의 소장 연구자들이 전문가적 안목으로 진지한 탐문과 논쟁을 시도하는 첫 작업"이다.

 

 

지젝 자신의 책으론 <사건>(2014)이 최신간인데(공식적으로는 이달에 나온 책이다), 내가 갖고 있는 펭귄판에는 '내 인생의 사건인 젤라(Jela)에게'라는 헌사가 붙어 있다. 덕분에 알게 된 사실인데, 지젝은 슬로베니아의 젊은 여기자인 젤라 크레치치와 지난해에 결혼했다. 나는 네번째 결혼이 아닌가 싶은데, 위키피디아에서는 세번째라고 한다. 젤라 크레치치는 1979년생으로(지젝은 1949년생이다) 2013년 줄리언 어산지와의 인터뷰로 유명해졌다고. 2009년에는 지젝의 친구이기도 한 믈라덴 돌라르의 지도로 류블랴나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논문의 주제가 '철학과 영화'였군. 지젝이 심사위원의 한 명이지 않았을까?). 지젝의 <사건>은 '사건 이후' 첫 책이라고 할까.   

 

가을에는 라캉과 지젝 읽기에도 시간을 좀 할애하려고 한다. 선택이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기에 내겐 강요된 선택이기도 하다...

 

14. 0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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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에는 슬라보예 지젝이 방한하여 경희대에서 집중강좌를 진행한다고 들었는데, 그와는 별도로 지젝의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읽기 강좌가 개설되기에 소개한다. 수유너머N의 '강독강좌'인데, 1월 8일부터 2월 5일까지 5회에 걸쳐서 매주 수요일 저녁 7시 30분에 수유너머N 대강당에서 이루어지며, 최진석 박사가 강의한다(http://www.nomadist.org/xe/lecture/1616345). 미하일 바흐친 전공자로서 그렉 램버트의 <누가 들뢰즈와 가타리를 두려워하는가?>(자음과모음, 2013)와 미하일 리클린의 <해체와 파괴>(그린비, 2009) 등을 옮기고, <불온한 인문학>(휴머니스트, 2011) 등을 공저한 전력을 갖고 있다. 

 

 

 

사실 이번 겨울에 비슷한 강의를 나도 진행할 뻔했는데(미국문학 강의로 방향을 틀었다), 이젠 수고를 덜어도 되겠다. 저자 직강에다가 입문 강의까지 마련돼 있으므로 지젝을 읽어보려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14. 01.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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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의 <헤겔 레스토랑>(새물결, 2013)을 읽다가 플라톤의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분석에서 막힌 이후로(막혔다는 게 <파르메니데스>를 먼저 읽어야 했다는 뜻이다) 한동안 지젝을 손에 들 여유가 없었는데, 며칠 전부터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새물결, 2013)을 다시 펼쳐보고 있다. 새 번역본은 진즉에 구했지만 막상 펼쳐볼 짬은 잘 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지젝 입문서를 문의하는 이들에게 이 책을 종종 추천하면서, 나도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

 

 

한국어본으로는 물론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인간사랑, 2002)도 갖고 있지만 (어디에 두었는지 보이지 않아) 비교해보지 않아서 번역이 얼마나 개정/개선됐는지는 알지 못하겠다. 사실 인간사랑판과 같이 읽던 영어본도 찾지 못해서 새물결판을 표지 갈이를 하고 새로 나온 영어본과 같이 읽는다. 같은 책을 한국어판과 영어판 모두 두 종씩 갖고 있는 셈. 게다가 나는 이 책을 러시아어판으로도 읽었으니 나름 애장서라 할 만하다. 아래가 1999에 나온 러시아어본인데, 요즘은 구하기 어려운 희귀본이 된 듯싶다.

 

 

다시 읽으면서 두 가지를 느꼈다. 한 가지는 내겐 지젝의 책이 일종의 진정 효과가 있다는 것. 아마도 기독교인이 복음서를 읽으며 느낄 법한 진정 효과가 이렇지 않을까 싶다. 마음이 혼란하거나 울적할 때 차분하게 가라앉혀 준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흠, 가장 좋은 상태의 번역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렇지 않은 대목도 있다는 것. 오탈자나 오역이 교정되지 않아서다.

 

번역본 244쪽에서 "따라서 주체-텍스트와 그것에 대한 외부의 해석 사이의 고전적 대립이 포스트-구조주의에서는 이미 그 자신의 해석이라 할 무한한 문학 텍스트의 연속성으로 대체된다."는 문장이 나오는데, '주체-텍스트'는 'object-text'(대상-텍스트)를 잘못 옮긴 것이다. 이건 단순 오역이라 원문과 대조하는 확인과정만 거쳤다면 교정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단순 오역이라도 독자에게는 큰 혼선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보다 좀 더 문제적인 오역도 나온다. 그래서 이 페이퍼까지 적게 된 것인데(이 책을 추천했으니 보증도 해야 하므로), 라캉의 실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제공하는 대목에서다. 인용하면 이렇다.

라캉의 전체 요점은 실재란 이러한 쓰기의 불가능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재는 초월적 실정성을 가진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접근할 수 없는 단단한 중핵처럼 상징계 너머 어딘가에 존속하고 있는 일종의 칸트적 '물 자체'이다. 그것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어떤 중심적 불가능성을 각인하는 상징적 구조 내의 구멍, 곧 공백이다.(274쪽)  

문제의 구절은 "실재는 일종의 칸트적 물 자체이다"라는 대목이다. 지젝의 독자라면 대번에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원문은 정반대로 적혀 있다. 전후 문장의 원문은 이렇다.

the Real is not a transcendent positive entity, persisting somewhere beyond the symbolic order like a hard kernel inaccessible to it, some kind of Kantian 'Thing-in-itself' - in inself it is nothing at all, just a void, an emptiness in a symbolic structure marking some central impossibility. (195쪽) 

"일종의 칸트적 '물 자체'"라는 보어도 "초월적 실정성을 가진 실체"와 마찬가지로 "실재는 -이 아니다"(the Real is not)에 걸리지만 좀 멀리 있는 탓인지 역자가 간과하여 정반대로 옮겼다. 이것도 실수로 봐야겠지만, 보통 이런 유형이 번역본에서 읽을 수 있는 가장 안 좋은 오역이다. 정반대로 옮긴 것이기 때문에.

 

뒷표지의 소개 문구이기도 하지만 '지젝에 대한 최고의 입문서!'로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은 "지젝 사유의 원형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대표 데뷔작"이다. 중요한 건 번역본도 그 원형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거꾸로 예전 번역판의 오역이 고스란히 새 번역판에도 남아 있다면, 이건 좀 문제가 있다.

 

잘못된 건 하나라도 교정하고 새해를 맞는 게 좋을 듯싶어서,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시간을 몇 분 쪼개 썼다. 이제 한 시간여 남았다. 식탁에 싱싱한 시간이 새로 차려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새로운 시간, 새로운 책들로 모두에게 풍성한 새해가 되시길...

 

13. 12. 31.

 

 

 

P.S. 덧붙여, 개정 번역판임에도 찾아보기가 없는 건 유감스럽다.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 <소송>이 예전 번역본 제목인 <심판>으로 돼 있는 것도 새 번역본답지 않게 '올드'하다. 게다가 주인공 이름은 '요제프 K'가 아닌 '조세프 K'로 표기돼 있다. 역자나 편집자나 <소송>도 읽지 않은 건지 아니면 무슨 소신을 갖고 있는 건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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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미출간도서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책은 슬라보예 지젝의 <가장 숭고한 히스테리환자>(인간사랑, 2013)다. 지젝의 정신분석 박사학위논문인 걸로 아는데(내가 알기에, 아직 영어판으로는 나오지 않았다. 부분적으로는 번역돼 있지만), 번역 대본은 2011년판으로 돼 있다. 2011년에 개정판이 나온 듯한데 초판은 1988년에 나왔다(아래 오른쪽 표지).

 

 

새로 나온 2011년판의 표지를 찾아보니 앞뒤가 아래와 같다. 부제까지 포함하면 <가장 숭고한 히스테리환자: 헤겔이 지나간다>이다.

 

 

 

영어 데뷔작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새물결, 2013)이 1989년에 나왔으니까 <가장 숭고한 히스테리환자>는 그보다도 더 빨리 나왔다. '슬라보예 지젝의 기원'이라고 할까. 부제도 '라캉과 함께 한 헤겔'이니까 가장 최근에 나온 <레스 댄 낫씽(Less Than Nothing)>의 원형으로도 읽을 수 있으리라.

 

 

'철학자 지젝'과 진지하게 조우할 의향이 있는 독자라면(나부터가 그렇지만) <가장 숭고한 히스테리환자>에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을 거쳐 <헤겔 레스토랑><라캉 카페>에 이르는 여정에 도전해봄직하다. 현재까지는 '지젝의 시작과 끝'이다...

 

13.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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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과 존 밀뱅크의 공저 <예수는 괴물이다>(마티, 2013)가 출간됐다. 밀뱅크는 영국 노팅험 대학의 종교학 교수로 "근대 사회와 현대 신학의 문제를 근대 이전의 기독교 전통으로 답하려는 급진 정통주의 운동의 대표적 사상가"로 소개된다.

 

 

 

책의 원서는 몇년전에 구입했고, 번역이 진행중인 것도 몇년 전에 알았지만 그간에 잊고 있었기에 출간 소식은 갑작스럽고 반갑다. 사실 지젝의 세번째 방한에 맞춘 듯이 보이니 때맞춰 나온 것이긴 하다. 책소개는 간략하게만 뜬다.

지젝에 따르면 기독교는 신 자신이 곤경에 처했다고 말하는 종교다. 이는 기독교에 대한 이단적 독해가 아니라, 기독교가 전하려는 메시지가 바로 신 자신의 곤경이라는 뜻이다. 기독교의 진정한 계시는 신의 무능함, 신의 비존재를 계시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피안의 하나님은 없다. 욥이 전하는 그리스도의 절규대로 신은 신 자신과 분열된다. 그리스도를 괴물이라 부르는 까닭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아무런 보증도 없는, 다시 말해 큰타자의 보증이 없는 ‘사랑’의 몸짓이다. 이 큰타자의 죽음을 대면하는 몸짓, 이것이 지젝이 말하는 무신론적 기독교이다.

 

 

사실 지젝의 기독교론은 중간중간에 다른 책들에서도 읽을 수 있었고, 좀더 본격적으로 다룬 책으론 <죽은 신을 위하여>(길, 2007)이 이미 번역된 바 있다. 그 연장선상에서 읽을 수 있는 책. 이 주제에 관해서는 아담 코츠코의 <지젝과 신학>(2008)도 참고할 수 있으며, 지젝과 밀뱅크가 편집에 관여한 <신학과 정치적인 것>(2005)도 요긴한 참고문헌이다(묵직한 앤솔로지다). 아무려나 언제든 읽을 용의가 있는 책이 출간되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난이도를 검토해보고 강의에서도 내년에는 강의의 커리로도 다루려고 한다. 미리 반가움만 적는다...

 

13. 10.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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