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주간경향(1004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지젝 방한기 <임박한 파국>(꾸리에, 2012)을 다뤘다.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멈춰라, 생각하라>(와이즈베리, 2012),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궁리, 2012)와 함께 '3종 세트'로 읽는다면 지젝 입문뿐만 아니라 현단계 세계정세에 대한 입문으로도 최적이라고 생각한다. 내년에는 좀더 두꺼운 책들이 번역돼 나올 전망이다...

 

 

 

주간경향(12. 12. 11) 붕괴 직전에 놓인 자본주의

 

<여름 인상에 대한 겨울 메모>라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유럽 여행기 제목을 빌리자면 <임박한 파국>은 ‘여름 강의에 대한 겨울 결산’에 해당하는 책이다. 지난 6월 말 방한한 지젝은 홍세화 진보신당 전 대표, 설치미술가 임민욱씨와 인터뷰를 하고 두 차례 대중강연을 가졌다. 이 ‘결산 보고서’에는 당시 인터뷰, 강연 내용, 청중과의 질의 응답, 그리고 방한 일정을 조율하고 진행했던 이택광 교수의 후기가 담겼다.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철학자’ 지젝이 우리에게 남긴 메시지는 무엇이었나? 먼저 제목 그대로 ‘임박한 파국’에 대한 주의의 환기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은 아직 해소되지 않은 상태다. 지젝은 단도직입적으로 지금의 자본주의 시스템이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려운 붕괴 직전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 그 자신 현장에서 즉석연설을 하기도 했던 2011년 가을 월가 점령시위도 이러한 구조적 위기상황에 대한 통찰에 빚지고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자본주의의 종말 이후를 상상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데올로기적으로 봉쇄돼 있기 때문이다.

 

가령 자본주의의 실상은 무엇인가. 지젝은 할리우드 코미디 영화에 나온 유머를 예로 든다. 주인공이 카페에 가서 크림 없는 커피를 주문하지만 크림이 다 떨어지고 우유만 있기 때문에 크림 없는 커피는 없고 우유 없는 커피만 있다는 게 웨이터의 대답이다. 크림 없는 커피나 우유 없는 커피나 똑같은 커피지만 무엇이 없느냐에 따라 커피의 종류가 달라진다. 그렇게 부재 혹은 부정은 정체성을 구성한다. 지젝은 자본주의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글로벌 자본주의는 중국, 북유럽 등 성공한 국가들뿐만 아니라 국가 기능이 망가져 있는 콩고와 같은 나라도 포함한다. 자본주의의 대표적 성공사례인 애플은 어떤가. 아이패드의 위탁제조업체가 중국에 공장을 둔 폭스콘이다.

 

 

가혹한 노동조건으로 인한 중국 노동자들의 연쇄 자살로 큰 물의를 빚은 곳이기도 한데, 폭스콘의 대만인 회장은 “매일 100만 마리의 동물들을 관리하느라 골치가 아프다”고 말했다. 그래서 타이베이 동물원 원장에게 자문을 구하려고 했다나. 폭스콘은 새로운 성공신화를 쓴 애플의 이면이다. 중요한 것은 폭스콘이 없는 애플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오늘의 자본주의는 그러한 어두운 이면과 배제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다.

 

임박한 파국에 직면하여 당연히 요구되는 과제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숙고다. 지젝은 오늘날 좌파의 임무는 답이 아니라 정확한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막다른 골목에 도달할지라도 과거의 해법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과거에 대한 어떤 노스탤지어도 거부해야 한다는 게 지젝의 입장이다. 그는 ‘거대한 혁명’에서 가능성을 찾지도 않는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광장에 모이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 뒤에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가 더 중요하다. 좌파의 고민은 거기에서 시작되어야 하며, 도그마적인 사고를 지양하고 이상주의와 결합된 실용주의적 정신이 필요하다고 지젝은 말한다.

 

지젝의 생각이 우리 현실에는 어떤 효용을 가질까. 당신의 이론도 스타벅스 커피처럼 소비되는 것 아니냐는 한 청중의 질문에 지젝은 그럴 수도 있다고 흔쾌히 인정한다. 하지만 지난 6월 총선이 있던 그리스에서 지젝은 농담이나 던지는 ‘미친 철학자’가 아니라 급진좌파연합의 ‘비밀스런 멘토’로 지목돼 공격받기도 했다. 똑같은 지젝이지만 우리에겐 ‘스타벅스 철학자’와 ‘가장 위험한 철학자’란 다른 종류의 선택지가 주어진 셈이다.

 

12. 12.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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