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만약 이번주에 휴가를 간다면 가방에 제일 먼저 챙겨넣을 책은 <아듀 데리다>(인간사랑, 2013)다. 데리다의 죽음에 부친, 그를 추모하는 철학자들의 글모음으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지젝, 랑시에르, 바디우 등의 추모사도 포함돼 있다. 편자는 코스타 두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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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데리다 자신이 '추모사' 전문이었기에, 코스타 두지나는 서문 격의 글에서 '데리다의 추모사'를 데리다적 스타일로 해명한다. <아듀 데리다>란 번역본 제목이 예고됐을 때, 나는 데리다가 쓴 <아듀>인 줄 알았는데(레비나스를 추모하는 책이다), <아듀 데리다>(2007)가 따로 있었다. 아마도 오래전에 복사라도 해두었을 성싶은데, 지금 원본을 따로 찾을 수 없다(하드카바 원서는 너무 비싸서 구하기 어렵다). 그래서 당장 읽는다면 번역본으로만 읽어야 하는데, 다행히 번역이 좋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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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표지에는 지젝이 데리다에게 보내는 추모사, '차연으로의 복귀를 청하는 호소'에서 한 대목이 실렸는데(아무래도 국내에선 지젝이 대세 철학자인지라) 이런 대목이다(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데리다와 내가 한 배를 타고 있음을 발견한 지금, 관계를 조정하고 때늦은 연대감을 표명할 때가 된 듯하다. 데리다의 작품들과 씨름하는 많은 페이지들을 썼고, 이제 데리다의 인기가 시들해지는 지금이 어쩌면 데리다가 차연이라고 부른 것과 내 작품의 친연성을 지적함으로써 그에 대한 기억에 경의를 표할 때인 듯하다. 생애 마지막 20년 동안 데리다는 해체가 과격하면 할수록 어떻게 그것이 해체의 내적 조건, 즉 정의에 대한 메시아적 약속에 더 의존할 수밖에 없는지 강조했다. 이 약속이야말로 바로 데리다적인 신념이 대상이다. 데리다의 궁극적인 윤리적 원칙은 이 신념만큼은 환원 불가능하며 '해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데리다는 온갖 종류의 역설을 허용할 수 있다.
데리다와의 오랜 불화를 접고 '때늦은 연대감'을 표명하고 있는 추모사. 차연(데페랑스)으로의 복귀를 호소하는 글답게 지젝은 마지막에 데리다의 차연을 이해하지/수용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지를 그답게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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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의 말처럼 욕동의 진짜 목적은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을 끊임없이 맴도는 것이다. 처음으로 성관계를 가진 어느 바보에 대한 유명한 음담패설에서 여자는 그에게 무엇을 할지 정확하게 말해준다. "내 다리 사이에 이 구멍이 보이지? 그것을 여기에 넣어, 이제 깊숙이 밀어넣어, 이제 빼, 밀어넣어, 빼, 밀어넣어, 빼..." 잠깜만'하고 바보가 여자에게 물었다. "결정을 해! 넣어 아니면 빼?" 바보가 미처 알아채지 못한 것은 바로 미결정 그 자체, 반복되는 망설임 속에서 만족을 얻는 욕동의 구조이다. 다시 말해서 바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데리다의 차연이다.
두 철학자와 동시대를 살았고, 살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13. 07.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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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짐작에 지난 일년 정도 기간에 구입한 데리다 관련서들이다. 베누아 페터즈의 전기 <데리다>는 결정판 전기라 할 만한 분량을 자랑하는데 평도 좋다(놀랍게도 저자는 비평가이면서 만화작가이자 소설가이다). 데리다의 독자라면 필수 소장 아이템. 읽는 건 '휴가' 때나 가능하다는 게 문제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