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램의 하나로 <지젝의 기묘한 이데올로기 강의> 상영과 토크 행사가 있었다. 게스트로 참여하면서 부담이 없진 않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청중이 함께해 주어서(게다가 열띤 질문까지 해주어서) 예정 시간보다 늦게 끝나고 몇 분과는 뒤풀이까지 가졌다. <지젝의 기묘한 영화 강의>처럼 이 영화도 DVD판으로 출시되기를 기대한다. 더 많은 사람이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아래는 영화제 웹진에 쓴 짤막한 리뷰이다(아래 이미지는 영화 <풀 메탈 재킷>의 한 장면 속에 들어간 지젝). 토론토국제영화제에서의 포스터와 러시아 포스터를 사이에 집어넣었다.  

 

 

소피 파인즈의 <지젝의 기묘한 이데올로기 강의>(2012)는 <지젝의 기묘한 영화 강의>(2006)에 이은 지젝과의 두 번째 작업이다. 초점은 ‘영화’에서 ‘이데올로기’로 옮겨왔지만, 이 두 편의 다큐영화는 마치 형제 혹은 자매처럼 여겨진다. 영화에 대한 지젝의 관심과 열정적인 분석이 주로 이데올로기에 대한 징후적 독해로 나아간 걸 고려하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이데올로기를 내놓고 드러내는 이데올로기적 영화도 있지만, 보통 영화는 이데올로기를 은밀하게 감추고 있는 가장 강력한 매체다. 하지만 동시에 이데올로기를 폭로하는 매체이기도 하다. 

 

 

‘이데올로기 강의’의 서두에서 지젝은 존 카펜터의 <화성인 지구정복(They Live)>(1988)을 숨은 걸작이라고 치켜세운다. 영화에서 떠돌이 '나다'가 우연히 발견한 선글라스는 지구의 황량한 진실을 보여준다. 영화에서 그것은 대부분의 지구인들의 정체가 인간의 탈을 쓴 외계인이라는 사실이지만, 동시에 이 영화는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신랄한 폭로이면서 탐욕적인 소비주의 문화에 대한 통렬한 풍자다. 바로 그런 맥락에서 지젝은 <죠스>에서 <풀 메탈 재킷>을 거쳐 <택시 드라이버>까지,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타이타닉>을 거쳐 <시계태엽 오렌지>까지, 더불어 2011년 노르웨이에서 벌어진 극우주의자의 테러 학살극과 영국에서의 폭동을 찍은 뉴스 필름까지 종횡무진, 자유자재로 인용하면서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 돼 있는지를 설명한다.

 

이러한 작업과 분석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조금 거슬러 올라가자면,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체제 경쟁, 이데올로기 경쟁의 역사는 종말을 고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과 함께 ‘이데올로기의 종말’이 선언되었고 자유민주주의가 모든 정치체제의 마지막 형태가 될 것이라는 예언도 곧바로 등장했다. 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고삐 풀린 자본주의’가 질주했고 신자유주의는 ‘글로벌 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강화되었다. 전 지구적 차원에서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은 극대화되고 그에 따른 고통도 심화되었다. 하지만 2001년의 9.11 테러는 이러한 흐름이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직시하게 해주었다.

 

그리하여 ‘역사의 종말의 종말’과 ‘이데올로기의 종말의 종말’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현주소다. 그 무엇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9.11 테러와 뒤이은 이라크 전쟁, 그리고 2008년에 들이닥친 세계 경제 위기 등등. 우리 시대의 철학자로서 지젝은 이 모든 사건과 오늘의 현실을 헤겔 철학과 라캉 정신분석의 개념을 동원해 충실히 기록하고 해명하면서 우리 시대의 인식적 지도를 그려왔다.

 

 

 

역사적 사건들의 기억을 봉쇄하고 그 의미를 희석시키는 것이 지배이데올로기의 작업이라면, 지젝은 거꾸로 그 사건들을 전 지구적 자본주의라는 총체적 현실과 관련하여 재구성하고 재배치한다. 지젝은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과 대중적 환상 혹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정신분석적 폭로를 통해 우리의 현실이라는 좌표를 어떻게 변경할 수 있을지 끊임없이 탐문해왔다. <지젝의 기묘한 이데올로기 강의>는 그러한 작업의 압축판이면서 우리의 현실을 새롭게 사유하도록 자극하는 ‘빨간 알약’이다.

 

13. 04. 28.

 

 

P.S. 거의 대부분의 책에서 지젝은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다루지만, 제목에서 특칭하고 있는 책을 고르자면 데뷔작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번역본이 절판된 이 책은 개역판이 나온다고 한다)과 방한 강연집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 외 <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Mapping Ideology)>(1995/2012)가 있다. 핵심적인 이데올로기 문헌들을 지젝이 편집한 것으로 서론과 마지막장에서 지젝 이데올로기론의 골자를 읽을 수 있다. 이 또한 빠르면 올해 안에 번역본이 나올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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