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 3회

'로쟈와 함께 지젝 읽기' 3회분을 발췌해놓는다. 역시나 전문은 창작블로그의 연재공간에서 읽어보시면 된다. 연재에는 매회 따로 제목이 붙지 않는데, 이 발췌는 제목을 붙이면서 관련서의 이미지를 링크해놓으려는 목적도 갖는다.  

이제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에서 첫 번째로 읽을 책은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인간사랑, 2003)이다. 원제는 워쇼스키 형제의 영화 <매트릭스>(1999)에서 따온 <실재의 사막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Welcome to the desert of the real!)>(2002)이다.(...)  



지젝의 분석과 성찰을 따라가보기 전에 제목의 핵심인 ‘desert of the real’이란 말부터 따져본다. 이 영어 표현에서 ‘of’는 동격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실재라는 사막’ 혹은 ‘실재계라는 사막’이란 뜻이다. 또 다른 궁금증. ‘더 리얼(the real)’이란 말의 번역은 ‘실재’도 되고 ‘실재계’도 되는가? 그렇다. 가급적 난해한 철학 용어나 정신분석 용어는 피하려고 하지만 불가피한 경우는 어쩔 수 없이 확인하고 넘어가야겠는데, ‘the real’이 그런 경우다. 일단은 ‘실재’나 ‘실재계’란 말이 나오면 ‘the real’의 번역어라고 생각하시는 게 좋겠다(전공자들은 ‘실재’란 번역을 선호하지만 실상 일반 독자가 읽는 번역서에서는 ‘실재계’란 말이 더 자주 나온다. 그런 사정을 고려하여 이 연재에서는 맥락에 따라 이 두 번역어를 혼용할 예정이다).

철학에서건 정신분석에서건 대부분의 개념어는 짝을 갖는다. ‘남자’ 하면 ‘여자’, ‘감성’ 하면 ‘이성’을 떠올리게 되는 식이다. 먼저 ‘실재계’는 라캉 정신분석학에서 인간존재의 현실을 구성하는 세 가지 차원, 곧 상징계(the Symbolic), 상상계(the Imaginary), 실재계(the Real)의 하나이다. 기본 개념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숙지해두는 게 좋겠다. ‘실재계(R)-상징계(S)-상상계(I)’의 머리글자를 차례로 따서 ‘RSI 상항조’라고도 부른다. 다르게는 ‘실재-상징적인 것-상상적인 것’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또 상상계를 라캉의 ‘거울 단계’와 연관지어 ‘영상계’라고 옮기는 경우도 있으나 여기서는 상용되는 용례에 따른다. 일간지 같은 데서야 이런 전문 용어들과 마주칠 기회가 거의 없지만, 영화잡지나 문예지의 경우엔 사정이 달라서 어느 정도 ‘독자’ 흉내를 내려면 ‘RSI’ 정도는 알아두는 게 좋다. 가령, 영화평론가들의 좌담에서라면 기탄없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지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정성일 평론가의 대답이다.

“지젝이 영화에 대한 깨우침을 준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영화가 지젝에게 지혜를 베풀어준 셈이지요. 지젝 자신도 점점 영화에서 멀어지고 있고요. 어쩌면 영화는 지젝에게 자기 철학을 알리기 위한 전술의 도구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에게 영화는 자기의 RSI 매트릭스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상자였던 셈이지요. 그는 라캉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영화를 동원했지 그 역은 아니었습니다.”(<씨네21> 763호)

이 인용문에 대해 조금 부언하자면, 영화는 지젝에게 “자기 철학을 알리기 위한 전술의 도구”라기보다는 “라캉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였고, 이 점은 영화평론가의 ‘발견’이 아니라 지젝의 직접적인 ‘고백’이다. 그는 “나는 라캉의 개념들을 본질적으로 저급한 대중문화의 개념들로 제대로 번역해낸 다음에야 비로소 그 개념들을 제대로 파악했다고 확신했다”라고 스스로 털어놓았다. 그가 말한 ‘저급한 대중문화’의 표본은 물론 할리우드 영화들이다. 게다가 지젝은 오페라광이긴 하지만 결코 ‘시네필’은 아니다. 그 점이 시네필 평론가로선 불만스러울 수 있겠지만, 지젝 자신이 “점점 영화에서 멀어지고” 있을 만큼 애초에 가까웠던 것도 아니다. 참고로, 2003년 방한했을 때 한 대담(『당대비평』 24호)에서 그 많은 영화를 다 보면서 언제 글을 쓰느냐는 질문에 지젝은 이렇게 답했다.

“천만에요. 제가 분석하거나 해석하는 영화들의 3분의 1도 보지 않았을 겁니다. 예컨대 저는 로셀리니의 작품을 한 편도 보지 않았으며, 영화관에 가는 것도 그리 즐겨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극장에 갈 시간이 부족하다고 이야기하는 편이 정확하겠네요. 영화를 직접 보지 않더라도 중요한 영화 텍스트에 대한 대부분의 분석이 책의 형태로 이미 나와 있기 때문에 연구에 큰 지장을 주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말하자면 지젝의 ‘작업 비밀’이다. 그럼에도 영화가 지젝에게 의미를 갖는다면, 그것은 영화 텍스트가 “이데올로기와 일상적 삶이라는 텍스트의 비밀을 응축해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데올로기와 일상적 삶’의 분석이지 ‘영화’가 아니다. 국내에는 ‘철학책’들보다 먼저 소개된 지젝의 ‘영화책’들, 예컨대 <삐딱하게 보기>(시각과언어, 1995),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한나래, 1997),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새물결, 2001) 등을 읽을 때는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다시 인용으로 돌아가면, ‘RSI 매트릭스’라는 것이 바로 ‘실재계-상징계-상상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요즘은 허다한 영화비평에서, 심지어는 영화 저널리즘에서도 라캉과 지젝의 용어들이 활용되기에 이 정도는 아는 체를 해주셔야겠다. 그렇게 셋이 짝지어 다닌다면, ‘실재계’만 분리해서 알 수 없으므로 통째로 챙겨두도록 한다. 라캉 입문서인 <HOW TO READ 라캉>(웅진지식하우스, 2007)에서 체스 게임을 예로 들고 있는 지젝을 따라가보자.  

체스를 하기 위해 따라야 하는 규칙은 체스의 상징적 차원이다. 순전히 형식적인 상징적 관점에서 ‘기사’는 이것을 둠으로써 일어날 수 있는 변동 안에서만 정의된다. 이 상징적 차원은 상상적 차원과 명확히 대비된다. 상징적 차원에서 각각의 말들은 특유의 형태를 가지며 서로 다른 이름(왕, 왕비, 기사)으로 개별화된다. 그래서 규칙은 같지만 서로 다른 상상계, 즉 ‘메신저’ ‘러너’ 따위의 이름으로 불릴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실재계는 게임의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연속적인 환경의 전체집합이다. 경기자의 지능이나 경기자를 당황하게 하고 갑자기 게임을 중단시키는 예기치 못한 침범 같은 것이다.(18~19쪽)

나부터도 체스에 익숙하지 않으니 ‘효과적인’ 예는 아니지만, 어쨌든 상징계란 체스 혹은 장기의 규칙 같은 것이다. 어떤 말이 어떻게 이동할 수 있는가는 이 규칙에 의해서 정의된다. 상징계는 ‘현실’을 관장한다. 상상계는 ‘기사’가 ‘메신저’로 불릴 수도 있는 또 다른 가상적 게임의 세계다. 규칙을 떠나서, 혹은 규칙을 무시하고 말이 이렇게 가면 좋겠다고 소망하는 것 따위는 상상계에 속한다. 물론 이 상상적인 것이 공유되고 새로운 규칙으로 수용된다면 그것은 새로운 상징계로 등록될 수 있다. 한편 실재계는 인용문에서 “게임의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연속적인 환경의 전체집합”이라고 정의됐는데, ‘연속적인 환경’은 ‘우발적인 상황(contingent circumstances)’의 오역이다. 장기를 두고 있는 상황에서 걸음마를 하는 아이가 다가와 판을 뒤엎는다든가 하는 ‘예기치 못한 침범’이 바로 실재다. 그것은 게임을 한순간에 무효화하면서 진지하게 게임에 임하던 경기자들을 허탈하게 만든다(하지만 동시에 해방시킨다!). 실재는 상징계에 구멍을 내는 송곳이며 그 구멍 자체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9·11이라는 스펙터클은 자본주의적 상징계의 구멍을 낸 실재의 침입이기도 하다. 뒤엎어진 판을 다시 정돈하여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현재의 게임을 계속해야 하는지, 현재의 사회적 좌표계를 계속 유지해야 하는지 자문하게 하는 사건이다. 물론 그러한 질문과 대면하는 일은 두렵다. 그것은 마치 폐허가 된 ‘실재의 사막’과 대면하는 일과 같다. 그래서 부정하거나 회피한다. 그럴 때 우리가 주로 동원하는 것이 ‘환상’이다. 공격받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대테러전쟁에 나설 수밖에 없다는 믿음이 그러한 환상의 대표적 사례다. ‘빨간 약’(현실) 대신에 ‘파란 약’(환상)을 선택하는 것이다.(...) 

10. 0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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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0-08-20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질문 하나 드려도 되요? 저는 실재계가 진실의 핵심부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고 사회적 좌표를 흔드는 것은 허상과 허위로 가득한 현실에서 실재를 목격하고 난 결과론적인 것으로 이해했었는데 완전히 잘못 알고 있었던 건가요?

로쟈 2010-08-20 23:28   좋아요 0 | URL
흠, 실재와의 조우 자체가 사회적 좌표에 대한 충격인데요. 그래서 가장 흔한 조어가 '외상적 실재'란 말이고요. 어떤점에서 잘못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신 건지요? 실재는 상징계에서 좌표값을 갖고 있지 않기에 표시되지 않고, 의미를 부여받지도 못합니다. 말 그대로 간극이고 구멍이죠. 그게 우리말 '실재'와 충돌하는 의미 같기도 합니다. '진짜로 있는 것'이 구멍이라고 하면 잘 이해가 안되죠.^^;
 
슬로베니아 라캉학파

'지젝 읽기'를 연재하다 보니 여느 때보다도 더 자주 '지젝'에 관해 검색해보게 되는데, 지젝이 편집한 <사랑의 대상으로서 시선과 목소리>(인간사랑, 2010)가 출간됐다. 그의 두 번째 아내였던 레나타 살레츨과 같이 편집 책임을 맡은 SIC시리즈의 첫 권으로 나왔던 책이다. 원저는 1996년에 나왔으니까 상당히 '오래된' 책이다.   

라캉주의 연구서라고 분류할 수 있을 텐데, 전체 8편의 논문 가운데 지젝과 그의 동료 돌라르가 두 편씩 싣고 있기에 필자는 모두 6명이고, 엘리자베스 브론펜(취리히대)와 프레드릭 제임슨(듀크대)을 빼면 모두 '슬로베니아 라캉학파'의 구성원들이다(이 시리즈가 듀크대학에서 나오는 건 제임슨이 힘을 쓴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목차는 이렇다.  

1부 시선 목소리
1. 대상 목소리. 믈라덴 돌라르
2. 철학자의 맹인벽. 알렌카 주판치치
3. 죽이는 시선, 시선 안에서 죽이기: 마이클 파웰의<피핑 톰>. 엘리자베트 브론펜
4. "나는 눈으로 너를 듣는다"; 또는 보이지 않는 주인. 슬라보예 지젝

2부 사랑의 대상들
5. 첫눈에. 믈라덴 돌라르
6. 서구 주체성의 성적 생산, 혹은 사회민주주의자로서의 성 아우구스티누스에 관하여. 프레드릭 제임슨
7. 당신을 포기하지 않고는 당신을 사랑할 수 없어요. 레나타 살레츨
8. “성적인 관계는 없다” 슬라보예 지젝  

러시아에서는 '류블랴나학파'라고도 부르는 '슬로베니아 라캉학파'는 처음 지젝과 돌라르, 두 사람이 만든 '슬로베니아 이론정신분석학회'를 맹아로 한다. 한 대담에서 밝힌 것이지만, 기존의 '정신분석학회'와의 충돌을 피하고자 앞에다 '이론'을 덧붙였다. 국내에는 도서출판b를 통해서 '총서'가 나오기도 한 이 학파 멤버들의 책을 내친 김에 나열해 본다. 공통적인 건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새물결, 2001)으로 원래는 슬로베니아어판으로 나왔던 책이다. 나중에 서구 이론가 3명이 가세하여 재편집된 영어판으로 다시 나왔고, 이들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지젝이 이론정신분석학회의 회장을 할 때 부회장을 한 믈라덴 돌라르(회원은 사실 둘 뿐이었다!)의 책으론 지젝과의 공저 <오페라의 두 번째 죽음>(민음사, 2010)이 나와 있다. 지젝이 바그너, 돌라르가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각각 맡아 쓴 책이다. 돌라르의 다른 책으론 <목소리뿐(A Voice and nothing more)>(2006)이 영어본으로 나와 있다.   

 

알렌카 주판치치의 책으론 공저로 <성관계는 없다>(도서출판b, 2005) 외, 칸트와 라캉을 다룬 <실재의 윤리>(도서출판b, 2004), 니체 연구서 <정오의 그림자>(도서출판b, 2005) 등이 소개돼 있다.  

 

그리고 살레츨의 책으론 <사랑과 증오의 도착들>(도서출판b, 2003)이 소개돼 있는데('살레클'로 처음 표기됐지만 이후엔 '살레츨'로 표기한다), 그녀가 편집한 <성구분>, 그리고 저서로 <불안에 대하여> 등이 더 소개됨직하다. <암흑지점>(도서출판b, 2004)의 저자 미란 보조비치가 그밖의 멤버이지만 <사랑의 대상으로서 시선과 목소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책은 내일쯤 구해서 읽어볼 참이다... 

10. 08. 15. 

 

P.S. 테리 이글턴의 서평집 <반대자의 초상>(이매진, 2010)에는 1997년에 쓰여진 지젝에 관한 서평('즐겨라!')도 들어 있는데, 그가 동구권 출신이란 점을 강조하는 대목에서 이런 부분이 나온다. 

"지젝은 루블랴나(*류블랴나)의 라캉주의자라는 거대 권력 집단의 일원으로서 새로운 슬로베니아에 강력한 정치적 이해관계를 지닌 인물이다."(312쪽)

사소하긴 하지만, 류블랴나의 라캉주의 그룹을 '거대 권력집단'이라고 칭한 건 오류이다(앞에서 지적한 대로 처음엔 회원 둘인 학회였다!). "a high-powered circle of Ljubljana Lacanians'를 그렇게 옮긴 것인데, 나라면 '뛰어난 역량을 지닌 류블랴나 라캉주의 그룹'이라고 옮기고 싶다. 실제로 구성원들이 모두 뛰어난 역량을 지닌 철학자에다 정신분석가들이다. 다른 대목의 번역은 무난하므로 '옥에티'라고 해야겠다('폐제(foreclosure)'를 '압류'라고 옮긴 것도 실수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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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6 0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6 0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살으리랏다 2010-08-18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 이매진에서 일하고 있는 최대연이라고 합니다. 몇 개월 전에 한겨레 문화센터에서 번역 관련한 강연하실 때 잠시 만나뵌 적이 있는데.. 기억하실런지요. 지적해주신 부분, 감사합니다. 다음 2쇄를 찍을 때 수정하겠습니다. 다음 주, 텍스트에서 주최하는 대담 때 가볼 생각인데, 그날 또 인사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cdy0283@naver.com

2010-08-17 16: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 2회

자음과모음의 연재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2회를 발췌해놓는다. 전문은 링크해놓았다. 어제 3회분 원고를 쓰려고 했지만 컨디션 난조로 아직 보내지 못했는데, 오늘은 매듭을 지어야겠다. 2회에서는 2003년 지젝의 방한 기억과 함께 '피상적' 만남의 의의를 다뤘다. 3회에선 '실재계'(혹은 '실재')라는 말과 '사라진 잉크'에 대해서 다룰 계획이다.

 

지난 2003년 가을에 방한하여 다섯 차례의 강연을 가진 바 있는 지젝은 또 생각이 달라서 “한국과 슬로베니아 두 나라가 깜짝 놀랄 만큼 서로 유사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의 강연문을 담은 책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철학과현실사, 2005)의 머리말에 나오는 내용이다.(...)

지젝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이국 땅에 있으면서 또한 고국에 있다는 야릇한 이 동시적인 체험 속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어떤 오래된 물음과 부딪혀야 했다. 어떻게 해야 우리는 자신의 장벽을 넘어 타자에게 이르고, 특히 다른 인종에게까지 손을 건넬 수 있는 것일까?” 지젝은 세 가지 만남의 사례를 든다. 

첫 번째는 유럽문학에서 진정한 전쟁 체험으로 치켜세워진다는 참호전에서의 조우다. 적군 병사의 얼굴을 직접 대면한 상태에서 상대방을 찔러 죽이는 것을 말한다. 이런 종류의 ‘신비한 피의 성찬식’은 싸움이 더 이상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막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영적으로’ 정당화하기까지 한다. 대표적으로 들 수 있는 사례가 독일의 작가이자 사상가 에른스트 융어(1895-1998)의 회고록이다. 이 책은 아직 우리말로 번역돼 있지 않아서 내가 대신 떠올리게 되는 건 레마르크가 1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 쓴 <서부전선 이상 없다>(1929)이다. 개인적으론 고등학교 때 삼중당문고로 읽었던 작품인데, 여기에도 주인공 파울 보이머의 참호전 경험이 묘사돼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참호가 아니라 포탄 구덩이에 빠져 있던 주인공이 어둠 속에서 같은 구덩이에 굴러 떨어진 적군을 죽이게 된 경험이다.   

“나는 생각이 마비되어 아무런 결심을 할 여유도 없이 미친 사람처럼 그자를 쿡 찔러본다. 몸이 움찔움찔하다가 축 늘어져서는 푹 꺾이는 느낌만 들 뿐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손이 끈적끈적하고 흥건히 젖어 있다.” 

하지만 적군의 숨이 금방 끊어지진 않아서 보이머는 한동안 그와 대면하게 된다. 공포로 응집된 그의 시선을 보면서 보이머는 ‘아니야, 아니야’라고 속삭인다. 그는 상대방의 공포를 누그러뜨리고는 흙탕물이지만 입술에 물을 적셔주고 상처에 붕대를 감아주려고 애쓴다. 보이머의 휴머니즘? 하지만 보다 실상에 가까운 것은 포로로 잡힐 경우를 대비한 계산이었다. “나는 어쨌든 이 일을 해야 한다. 내가 포로로 잡힐 경우 이들이 내가 그를 도와주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를 총살시키지 않도록 말이다.” 부상당한 적군 병사는 한나절 이상을 신음하다가 결국 숨을 거둔다. 아마도 그가 결정적인 부상을 입지 않았더라면 포탄 구덩이 속에서 둘은 서로의 눈을 마주보면서 가차 없이 상대방을 죽여야 하는 운명에 처하지 않았을까. 그것이 ‘레알 전쟁’이니까. 하지만 우리가 기대하는 만남은 아니다.   

두 번째로 지젝이 드는 사례는 살인의 체험을 숭고한 경험담으로 고양시키는 몽매주의 이데올로기보다는 조금 고상한 쪽이다. 1942년 12월 31일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에 러시아의 배우와 음악가들이 위문공연차 도시를 찾았다. 스탈린그라드는 독일군에 포위된 상태였는데, 바이올린 연주자 골드슈타인이 연주를 시작하자 사격은 돌연 중단됐다. 연주가 끝나자 러시아쪽 진영은 정적에 휩싸였고, 얼마 후 독일군 진영의 확성기에서 더듬거리는 러시아어가 흘러나왔다. “바흐를 더 연주해주시오. 쏘지 않겠소.” 골드슈타인은 다시 바이올린을 집어들고 바흐의 가보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물론 연주가 진행되는 동안은 독일군과 러시아군은 상대방을 쏘지 않았다. 하지만 연주가 끝나자마자 사격은 다시 시작됐다. 이 연주가 궁극적으로 양측의 사격을 막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지젝은 그 연주가 너무 고상하고 심오했기 때문은 아닐까라는 의문을 던진다. 왜 그런가. “어떤 일이 이루어지는 데 필요한 것은 그보다 훨씬 더 표면적이고 피상적인 어떤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반면에 보편적 인간성을 발견하게 해주는 좀더 효과적인 체험은 시선의 교환이라는 보다 단순한 모양새를 취할 수도 있다. 사실 <서부전선 이상 없다>에서도 파울 보이머는 상대방의 시선을 정면으로 응시하자 ‘아니야, 아니야’라며 살해할 의도가 없다는 걸 내비쳤는데, 그 경우에도 그의 ‘보편적 인간성’이 ‘계산’보다 먼저 작동한 것은 아니었을까.  

지젝이 세 번째로 드는 사례는 바로 그와 관련된 것이다. 얼마 전 월드컵이 개최됐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예전에 일어난 일인데, 반인종차별 시위 도중에 백인 경찰이 흑인 시위자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던 때였다. 한 경찰관이 곤봉을 손에 들고 흑인 부인을 뒤쫓아 가고 있었는데, 예기치 않게도 부인의 신발 한 짝이 벗겨졌다. 그러자 경찰관은 자동적으로 ‘깍듯한 예의(good manners)’를 지켜 신발을 주워 그녀에게 건넸다. 그 순간 두 사람은 시선을 교환하고 자신들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깨닫는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예의를 차린 다음에는 다시금 그 부인을 쫓아가 곤봉으로 내리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경찰관은 그래서 가볍게 목례를 한 다음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이 일화에서 지젝이 끌어내는 교훈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 경찰관이 갑자기 자신의 선한 본성을 발견했다는 데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즉, “그래, 인간의 본성은 원래 선한 거야!” 따위의 깨달음은 이 일화와 무관한 또 다른 몽매주의다.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로 그 경찰관은 전형적인 인종주의자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 하지만 그러한 자신의 생각이나 신념에 대해 승리를 거둔 것은 그가 받은 ‘피상적인’ 예절 교육이라는 게 지젝의 판단이다. 백인 경찰관과 흑인 부인은 단지 신발을 건네주고 받으며 눈빛만을 교환했을 뿐이지만, 이 ‘피상적인’ 접촉에 의해서 두 사람이 살고 있는, 서로 전혀 소통되지 않는 두 사회적-상징적 세계의 장벽이 일시적으로 중지됐다. “그것은 마치 어떤 또 다른 세계, 유령적인 세계로부터 손 하나가 불쑥 삐쳐 나와 그들의 일상적 현실로 들어온 듯한 사건이다.” 이것을 지젝은 달리 ‘마술적 마주침’이라고도 부른다. 그의 기대는 물론 오늘날의 세계에서 그러한 마주침이 더 많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마주침이 ‘리얼한 만남’이나 ‘고상한 만남’이 아닌 ‘피상적인 만남’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이 요점이다.    

나는 ‘교양’의 경우에도 사정은 비슷하지 않은가 싶다. 우리가 깊은 예술적 교양, 인문학적 교양을 갖추지 못해서 서로 마음의 장벽을 쌓고 사회적 분리벽을 만들며, 서로 무시하고, 곤봉으로 패고 칼로 찌르는 것은 아닌 듯싶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깊이’가 아니라 ‘넓이’다. 피상적이더라도 널리 공유될 수 있는 제스처(눈짓)와 의무적인 예절이 필요하다. 더불어, 피상적인 교양이 필요하다. 가령, 지하철에서 지젝의 책을 손에 들고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 내가 느끼는 ‘피상적인’ 친밀감이 우리에겐 더 많이 필요하다. 그 옆에 평소 지젝을 많이 읽었고 나름대로 비판적인 식견까지 갖춘 대학교수가 앉아 있다고 치더라도 우리의 친밀감은 어제 처음 지젝의 책을 사들고 오늘 전철간에서 들춰보고 있는 사람을 향한다. 우리가 아무 대화 없이 눈짓만을 교환한다손 치더라도 그 피상성은 우리를 하나로 묶어줄 수 있다.(...) 

10. 0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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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2 15: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2 2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faai 2010-08-12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쪽'에 댓글 달았던 사람입니다. 저쪽 글에는 원래 글에 없던 오타가 생겼기에 비밀 댓글로 제보했죠. 지금은 수정이 되었네요.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떤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될지도 기대가 크고요. ^^

로쟈 2010-08-12 21:33   좋아요 0 | URL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2010-08-12 2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3 23: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8-14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화가 참 흥미진진합니다.고상함보다는 피상적인 것에 가치를 두어야 한다...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하는군요.

레마르크 소설 중에 독일과 소련의 막바지 전투를 다룬 '사랑할 때와 죽을 때'가 재미있었습니다.레마르크는 '서부전선 이상없다'보다 2차대전을 다룬 작품들의 구성이 더 나은 것 같아요.

로쟈 2010-08-14 11:12   좋아요 0 | URL
저는 <서부전선>이 더 재미있었는데, 아마 제 또래가 주인공이어서였겠지요...

노이에자이트 2010-08-14 18:33   좋아요 0 | URL
그래요... '서부전선 이상없다'를 좋아하는 이들이 참 많군요.저는 레마르크 소설 중에서 '사랑할 때와 죽을 때'가 제일 재미있었어요.
 
"공산주의를 재발명하라"

기획회의(277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격주로 쓰는 서평거리로 이번에 고른 건 지젝의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창비, 2010)이다. 리뷰가 별로 없는 책을 고른다는 게 한 가지 원칙이었지만, 이번엔 충분하지 않은 책이란 원칙을 적용했다. 많이 주목받은 편이지만, 그래도 충분한 건 아니라는 게 나의 판단이다. 그렇다고, 이 리뷰가 부족한 부분을 다 채워주는 건 아니다. 나머지는 '당신'의 몫이다(개인적으론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연재에서 이 책도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기획회의(10. 08. 05) 세계의 종말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처음에는 대중문화로 철학을 더럽히는 ‘MTV 철학자’였다. 이제는 ‘현존하는 가장 위험한 철학자’이다. 가공할 만한 열정으로 시대를 사유하고 있는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을 가리키는 말이다. 어느 샌가 국내에서도 단기간에 가장 많이 번역된 철학자가 됐기에, 그의 책이 한권 더 소개되는 일이 더이상 ‘뉴스’는 아니다. 하지만 그의 독자들에겐 언제나 ‘흥분’되는 일이다.  

 

21세기 첫 십년의 교훈을 되새겨보는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또한 예외가 아니다. 제목에서 ‘비극’과 ‘희극’은 각각 그 첫 십년을 열고 마감하는 두 사건, 2001년 9월 11일의 공격과 2008년의 금융붕괴를 가리킨다. 헤겔의 말대로 철학이 ‘개념으로 포착한 자기 시대’라면, 지젝이야말로 그러한 정의에 가장 충실한 철학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우리가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지 포착하여 보여준다. 

책은 두 가지 목표에 따라 2부로 구성돼 있다. 1부에서는 현재 진행 중인 세계 금융위기를 통해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유토피아적 핵심을 분석하고, 2부에서는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새로운 형태의 공산주의적 실천이 어떻게 가능한지 탐색한다. 물론 그가 제시하는 건 중립적인 분석이 아닌 대단히 ‘편파적인’ 분석이다. 진리란 편파적이며, 진정한 보편성은 오직 편파성을 통해서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이 지젝의 오랜 주장이다. 이러한 입장을 확인해둠과 동시에 지젝이 자신의 핵심적인 테제를 끌어내고 있는 농담 한 가지를 음미해보는 것도 좋겠다.  

농담의 배경은 몽골 지배하에 있던 15세기 러시아이다. 한 농군이 아내와 함께 시골길을 걸어가다 말을 타고 오던 몽골의 전사를 만나게 됐다. 이 전사는 농군의 아내를 강간하겠다고 이르고는 “땅에 흙먼지가 많으니 내가 네 아내를 강간할 동안 네놈이 내 고환을 받치고 있어야겠다. 거기가 더러워지면 안되니까!”라고 덧붙였다. 몽골군이 일을 마치고 떠나자 농군은 웃음을 터뜨리며 기뻐했다. 아내가 어이없어 하며 뭐가 기뻐서 난리냐고 묻자 농군은 이렇게 답했다. “그놈한테 한방 먹였다고! 그놈 불알이 먼지로 뒤덮였던 말이야!”  

현실사회주의 체제하에서 반체제인사들이 놓인 곤경을 잘 보여주는 이 농담이 지젝은 오늘날의 비판적 좌파에게도 잘 맞아떨어지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래서 포이어바흐에 관한 제11테제를 그는 이렇게 비튼다. “우리의 사회들에서 비판적 좌파는 지금까지 권력자들에게 때를 묻히는 데에 성공했을 뿐이나, 진정 중요한 것은 그들을 거세하는 것이다.”  

그 ‘거세’는 어떻게 가능한가. 일단 ‘20세기 좌파정치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야만 한다. 지젝이 베케트의 말을 인용하며 다시 강조하는 그 교훈이란 “다시 시도하라.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이다. 혁명의 과정이란 점진적 진보가 아니라 몇번이고 시작을 반복하는 운동이다. 그리하여 다시 소환되는 것이 ‘공산주의적 가설’이다. 지젝의 절친한 동료이기도 한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아주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다.  

“공산주의적 가설은 여전히 올바른 가설이며 나로서는 그외의 어떤 올바른 가설도 발견할 수 없다. 만일 이 가설이 포기되어야 한다면 집단행동 차원의 어떤 일도 행할 가치가 없다. 공산주의의 관점 없이는, 이 이념 없이는 역사적, 정치적 미래의 어떤 것도 철학자의 흥미를 끌 만한 종류가 되지 못한다.”  

물론 공산주의 이념에 계속 충실하기만 한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 이념에 실천적 긴박함을 부여하는 적대를 역사적 현실 안에서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의 세계자본주의 체제에는 어떤 적대가 내재해 있는가. 지젝은 네 가지를 꼽는다. 다가오는 생태적 파국의 위협, 소위 ‘지적 재산권’과 관련한 사유재산 개념의 부적절함, 새로운 과학기술 발전의 사회․윤리적 함의, 새로운 장벽(Walls)과 빈민가라는 새로운 형태의 아파르트헤이트 생성. 이러한 파국적 위협과 불평등, 그리고 분리에 맞선 투쟁이 공유하는 것은 ‘공통적인 것’(the commons)을 둘러막는 자본주의의 논리를 그대로 방치할 경우 인류가 파멸해 봉착할 수 있다는 자각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커다란 시장의 실패”로도 불리는 기후위기도 빼놓을 수 없겠다. 때문에 ‘세계시민성’과 ‘공통관심’을 바탕으로 “시장메커니즘을 조절하고 제압하면서 엄밀하게 공산주의적인 관점을 표현하는 세계적 정치조직을 창설할 필요”가 제기된다. 그것이 ‘세계의 종말’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다(<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에 이어서 지젝이 올해 펴낸 두툼한 책 제목이 <Living in the End Times(종말의 시대 살아가기)>이다).  

지젝의 공산주의론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구별이다. 역사가 에릭 홉스봄이 한 칼럼에서 “사회주의는 실패했고 자본주의는 파산상태다. 다음에 올 것은 무엇인가?”라고 던진 질문에 대하여 그 답이 ‘공산주의’라고 그가 말하는 이유다. 지젝이 보기에, 세계자본주의 체제가 내속적인 장기적 적대를 넘어 존속하면서 동시에 공산주의적 해결책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모종의 사회주의를 재발명하는 것뿐이다(공동체주의나 포퓰리즘, 아시아적 자본주의 등). 경제적 자유주의의 보루 미국에서조차 자본주의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를 재발명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될 정도다. “미국은 더욱더 프랑스처럼 될 것”이라는 일종의 ‘유러피언 드림’이 그것이다. 또는 빌 클린턴이 추천사를 쓰기도 한 <박애자본주의>(사월의책, 2010) 같은 책을 그 징후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이 내세운 모토가 “승자만을 위한 자본주의에서 모두를 위한 자본주의로”이다.   

하지만 사회주의에는 ‘포함된 자’와 ‘배제된 자’ 사이의 핵심적 적대를 다루지 않는다. 그럴 경우 “생태학은 지속가능한 발전의 문제로 변하고, 지적재산권은 복잡한 법률적 사안으로, 유전자공학은 윤리적 쟁점으로 변한다.” 더불어 빌 게이츠는 빈곤과 질병에 맞서 싸우는 ‘위대한 인도주의자’가 되며, 미디어 제국을 동원하는 루퍼트 머독은 ‘위대한 환경주의자’가 된다. 그때 사회주의는 이제 더이상 공산주의의 ‘낮은 단계’가 아니며, “공산주의의 진정한 경쟁자, 공산주의에 대한 가장 큰 위협”으로 등장한다.   

곧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유일하고 진정한 양자택일은 ‘사회주의냐 공산주의냐’이다. 혹은 보수적 헤겔과 아이티의 헤겔, 노년 헤겔주의와 청년 헤겔주의 사이의 선택이다. 물론 지젝이 어느 편을 들고 있는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굿바이 미스터 사회주의>(그린비, 2009)라는 네그리의 책 제목을 그는 이렇게 완성한다. “잘 가시오, 사회주의 씨…… 어서 오시오, 공산주의 동지!”  

10. 08.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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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공갈 자본주의냐 공산주의냐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11-06 07:09 
    주말 북리뷰에서 새로운 관심도서가 눈에 띄지 않아서(리처드 슈스터만의 <몸의 의식>(북코리아, 2010) 같은 책을 나는 어제 손에 넣었다) 차라리 이번주 '장정일의 책속 이슈'를 스크랩해놓는다. 지젝의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를 다루고 있어서다. 나도 '사회주의냐 공산주의냐'란 서평을 쓴 적이 있지만, '책속 이슈' 곧 책의 핵심을 잘 짚어주고 있다.&#
 
 
미지 2010-08-06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공산주의, 사회주의, 자본주의의 관계가 명쾌하게 정리가 되는군요.
그리고 더 중요한 건, 비판적 좌파의 한계와 자본주의 권력자들을 거세하는 문제에 대한 얘기 같습니다. 감전된 느낌인데요...
음--- 일단 읽어보며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저는 요즘 일상 속의 자본권력과의 투쟁 상태에 있는데요... 매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종말의 시대 살아가기도 좋은 번역이 나오길 바랍니다.

로쟈 2010-08-06 23:07   좋아요 0 | URL
네, 흥미롭게 읽으실 수 있을 거예요.^^

마태우스 2010-08-07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환, 거세 등이 나오는 농담이 현실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읽어봐도 잘 모르겠어요. 권력자에게 때를 묻히는 것에 만족한다라, 흐음. 그리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에 대해서는 한번도 생각 안해봤었는데, 사회주의는 공산주의처럼 공동노동을 안하는 건가요? 아무튼 제가 공부를 많이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공, 내공을 쌓자...!

로쟈 2010-08-07 12:32   좋아요 0 | URL
책의 2부를 대충 읽어보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사회주의/공산주의 관계에 대해서도 다양한 입장이 있는데, 지젝은 거기에 자신의 입장을 보태고 있습니다...

yamoo 2010-08-07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논했다면 그냥 정치학교과서 정도에 그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내용인지 궁금하긴 합니다만, 지젝의 책은 번역도 번역이려니와 잘 안읽힙니다. <까다로운 주체>를 너무 힘들게 읽어서 인지 다음 책들은 그냥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ㅎㅎ <신체없는 기관>은 좀 나았지만 여전히 가독성은 떨어지고...여기저기 들뢰즈와 지젝에 대한 무성한 논의만 듣네요~ 에휴~

로쟈 2010-08-07 12:26   좋아요 0 | URL
그건 어려운 책들이고요, <처음에는>도 번역본만 읽기엔 까다로운 대목도 있지만, 비교적 잘 읽히는 편입니다. 일단 분량이 부담스럽진 않지요...

Jade 2010-08-07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저도 처음으로 지젝을 읽어보려고 저 책 읽고 있는데, 앞부분을 읽으며 글이 참 섹시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ㅎㅎㅎ 물론 어려운 부분은 머리를 쥐어 뜯고 있지만 --;; 이럴때 로쟈님 서평을 보니 완전 좋은데요! ㅎㅎ

로쟈 2010-08-07 15:51   좋아요 0 | URL
도움이 되신다면 저도 좋습니다.^^
 

내주부터 매주 두 차례(화, 목)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http://blog.aladin.co.kr/zizek)이 연재된다. 자음과모음의 웹진 형태로 알고 있는데, 연재 공간이 벌써 만들어져 있기에 깜짝 놀랐다. 한창 첫 연재분 구상을 하던 차였기 때문이다. 대략적인 소개가 이미 나갔지만 조금 보충하자면 이런 취지다.  

'첫 십년의 교훈'?! 지젝의 최근작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의 서론 제목이다. 돌이켜 보면, '9.11' 특별한 날짜로 시작된 2000년대의 첫 십년은 그 직전 1990년대의 10년만큼이나 다사다난했으며 세계정세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고 우리의 일상과 생각에도 자극과 충격을 주었다. 과연 세계는 어떻게 달라졌으며, 우리는 이 첫 십년을 어떻게 이해하고 인식할 수 있을까? 슬라보예 지젝은 아마도 이 문제가 가장 골몰해온 철학자라고 할 수 있을 텐데, 나는 그가 동시대의 철학자로서 개념적으로 파악한 지난 첫 십년을 <실재의 사막으로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국역본은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 <이라크>,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라는 세 권의 책을 되읽어나감으로써 정리해보려고 한다.
이런 기획을 잡은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그의 책이 더 많이, 더 잘 읽히면 좋겠다는 바람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작업과 열정에 대한 경의의 표시다. 내게 이 일을 수행할 역량이 있다고 믿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 책임은 있다고 믿는다. 책임이란 '응답'이니까. 또한 '첫 십년의 교훈'을 잘 되새긴다면, 우리가 '다음 십년'은 혹 더 잘 생각하며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을 해야 한다, 생각을 해야만 갈 수 있다."라고 홍상수 영화의 주인공은 되뇌인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지젝을 읽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하여 우리는 '여배우' 대신에 '지젝'을 만날 참이다. 바야흐로 개봉박두! 많은 기대와 지도편달을 부탁드린다... 

10. 08.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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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03 0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3 0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포지 2010-08-03 0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주 두 번씩 지젝에 대해서 페이퍼를 써야 한다는 말인가요? ... 아 저로선 생각만해도 멀미가 나는 스케쥴이네요...

로쟈 2010-08-03 11:28   좋아요 0 | URL
그나마 몇가지 아이템 가운데 가장 편하다고 생각한 게 '지젝 읽기'였어요.^^;

마태우스 2010-08-03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전문가이신 로쟈님의 면모를 볼 수 있겠군요. 그거 다 읽으면 저도 지젝 좀안다고 딴데가서 우겨도 되는 거겠지요?

로쟈 2010-08-03 17:02   좋아요 0 | URL
전문가라는 건 어폐가 있지만, 가장 반기는 독자 중 한 사람인 건 맞을 것 같고, 그에 대한 '책임'입니다.^^;

2010-08-03 19: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3 2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4 0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4 1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바다 2010-08-04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대되는 연재로군요. 로쟈님의 '지젝 이해'에 대해 전모까지는 아니더라도 부분적인 이해는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는 번역본에 문제가 많다고 지적하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 연재에서 문제있는 부분들의 교정도 볼 수 있는지요?

로쟈 2010-08-04 11:45   좋아요 0 | URL
네 불가불 그렇게 진행할 예정입니다. 버리기엔 아까운 책이어서요...

2010-08-05 14: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5 15:1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