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 2회

자음과모음의 연재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2회를 발췌해놓는다. 전문은 링크해놓았다. 어제 3회분 원고를 쓰려고 했지만 컨디션 난조로 아직 보내지 못했는데, 오늘은 매듭을 지어야겠다. 2회에서는 2003년 지젝의 방한 기억과 함께 '피상적' 만남의 의의를 다뤘다. 3회에선 '실재계'(혹은 '실재')라는 말과 '사라진 잉크'에 대해서 다룰 계획이다.

 

지난 2003년 가을에 방한하여 다섯 차례의 강연을 가진 바 있는 지젝은 또 생각이 달라서 “한국과 슬로베니아 두 나라가 깜짝 놀랄 만큼 서로 유사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의 강연문을 담은 책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철학과현실사, 2005)의 머리말에 나오는 내용이다.(...)

지젝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이국 땅에 있으면서 또한 고국에 있다는 야릇한 이 동시적인 체험 속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어떤 오래된 물음과 부딪혀야 했다. 어떻게 해야 우리는 자신의 장벽을 넘어 타자에게 이르고, 특히 다른 인종에게까지 손을 건넬 수 있는 것일까?” 지젝은 세 가지 만남의 사례를 든다. 

첫 번째는 유럽문학에서 진정한 전쟁 체험으로 치켜세워진다는 참호전에서의 조우다. 적군 병사의 얼굴을 직접 대면한 상태에서 상대방을 찔러 죽이는 것을 말한다. 이런 종류의 ‘신비한 피의 성찬식’은 싸움이 더 이상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막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영적으로’ 정당화하기까지 한다. 대표적으로 들 수 있는 사례가 독일의 작가이자 사상가 에른스트 융어(1895-1998)의 회고록이다. 이 책은 아직 우리말로 번역돼 있지 않아서 내가 대신 떠올리게 되는 건 레마르크가 1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 쓴 <서부전선 이상 없다>(1929)이다. 개인적으론 고등학교 때 삼중당문고로 읽었던 작품인데, 여기에도 주인공 파울 보이머의 참호전 경험이 묘사돼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참호가 아니라 포탄 구덩이에 빠져 있던 주인공이 어둠 속에서 같은 구덩이에 굴러 떨어진 적군을 죽이게 된 경험이다.   

“나는 생각이 마비되어 아무런 결심을 할 여유도 없이 미친 사람처럼 그자를 쿡 찔러본다. 몸이 움찔움찔하다가 축 늘어져서는 푹 꺾이는 느낌만 들 뿐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손이 끈적끈적하고 흥건히 젖어 있다.” 

하지만 적군의 숨이 금방 끊어지진 않아서 보이머는 한동안 그와 대면하게 된다. 공포로 응집된 그의 시선을 보면서 보이머는 ‘아니야, 아니야’라고 속삭인다. 그는 상대방의 공포를 누그러뜨리고는 흙탕물이지만 입술에 물을 적셔주고 상처에 붕대를 감아주려고 애쓴다. 보이머의 휴머니즘? 하지만 보다 실상에 가까운 것은 포로로 잡힐 경우를 대비한 계산이었다. “나는 어쨌든 이 일을 해야 한다. 내가 포로로 잡힐 경우 이들이 내가 그를 도와주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를 총살시키지 않도록 말이다.” 부상당한 적군 병사는 한나절 이상을 신음하다가 결국 숨을 거둔다. 아마도 그가 결정적인 부상을 입지 않았더라면 포탄 구덩이 속에서 둘은 서로의 눈을 마주보면서 가차 없이 상대방을 죽여야 하는 운명에 처하지 않았을까. 그것이 ‘레알 전쟁’이니까. 하지만 우리가 기대하는 만남은 아니다.   

두 번째로 지젝이 드는 사례는 살인의 체험을 숭고한 경험담으로 고양시키는 몽매주의 이데올로기보다는 조금 고상한 쪽이다. 1942년 12월 31일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에 러시아의 배우와 음악가들이 위문공연차 도시를 찾았다. 스탈린그라드는 독일군에 포위된 상태였는데, 바이올린 연주자 골드슈타인이 연주를 시작하자 사격은 돌연 중단됐다. 연주가 끝나자 러시아쪽 진영은 정적에 휩싸였고, 얼마 후 독일군 진영의 확성기에서 더듬거리는 러시아어가 흘러나왔다. “바흐를 더 연주해주시오. 쏘지 않겠소.” 골드슈타인은 다시 바이올린을 집어들고 바흐의 가보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물론 연주가 진행되는 동안은 독일군과 러시아군은 상대방을 쏘지 않았다. 하지만 연주가 끝나자마자 사격은 다시 시작됐다. 이 연주가 궁극적으로 양측의 사격을 막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지젝은 그 연주가 너무 고상하고 심오했기 때문은 아닐까라는 의문을 던진다. 왜 그런가. “어떤 일이 이루어지는 데 필요한 것은 그보다 훨씬 더 표면적이고 피상적인 어떤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반면에 보편적 인간성을 발견하게 해주는 좀더 효과적인 체험은 시선의 교환이라는 보다 단순한 모양새를 취할 수도 있다. 사실 <서부전선 이상 없다>에서도 파울 보이머는 상대방의 시선을 정면으로 응시하자 ‘아니야, 아니야’라며 살해할 의도가 없다는 걸 내비쳤는데, 그 경우에도 그의 ‘보편적 인간성’이 ‘계산’보다 먼저 작동한 것은 아니었을까.  

지젝이 세 번째로 드는 사례는 바로 그와 관련된 것이다. 얼마 전 월드컵이 개최됐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예전에 일어난 일인데, 반인종차별 시위 도중에 백인 경찰이 흑인 시위자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던 때였다. 한 경찰관이 곤봉을 손에 들고 흑인 부인을 뒤쫓아 가고 있었는데, 예기치 않게도 부인의 신발 한 짝이 벗겨졌다. 그러자 경찰관은 자동적으로 ‘깍듯한 예의(good manners)’를 지켜 신발을 주워 그녀에게 건넸다. 그 순간 두 사람은 시선을 교환하고 자신들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깨닫는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예의를 차린 다음에는 다시금 그 부인을 쫓아가 곤봉으로 내리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경찰관은 그래서 가볍게 목례를 한 다음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이 일화에서 지젝이 끌어내는 교훈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 경찰관이 갑자기 자신의 선한 본성을 발견했다는 데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즉, “그래, 인간의 본성은 원래 선한 거야!” 따위의 깨달음은 이 일화와 무관한 또 다른 몽매주의다.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로 그 경찰관은 전형적인 인종주의자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 하지만 그러한 자신의 생각이나 신념에 대해 승리를 거둔 것은 그가 받은 ‘피상적인’ 예절 교육이라는 게 지젝의 판단이다. 백인 경찰관과 흑인 부인은 단지 신발을 건네주고 받으며 눈빛만을 교환했을 뿐이지만, 이 ‘피상적인’ 접촉에 의해서 두 사람이 살고 있는, 서로 전혀 소통되지 않는 두 사회적-상징적 세계의 장벽이 일시적으로 중지됐다. “그것은 마치 어떤 또 다른 세계, 유령적인 세계로부터 손 하나가 불쑥 삐쳐 나와 그들의 일상적 현실로 들어온 듯한 사건이다.” 이것을 지젝은 달리 ‘마술적 마주침’이라고도 부른다. 그의 기대는 물론 오늘날의 세계에서 그러한 마주침이 더 많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마주침이 ‘리얼한 만남’이나 ‘고상한 만남’이 아닌 ‘피상적인 만남’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이 요점이다.    

나는 ‘교양’의 경우에도 사정은 비슷하지 않은가 싶다. 우리가 깊은 예술적 교양, 인문학적 교양을 갖추지 못해서 서로 마음의 장벽을 쌓고 사회적 분리벽을 만들며, 서로 무시하고, 곤봉으로 패고 칼로 찌르는 것은 아닌 듯싶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깊이’가 아니라 ‘넓이’다. 피상적이더라도 널리 공유될 수 있는 제스처(눈짓)와 의무적인 예절이 필요하다. 더불어, 피상적인 교양이 필요하다. 가령, 지하철에서 지젝의 책을 손에 들고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 내가 느끼는 ‘피상적인’ 친밀감이 우리에겐 더 많이 필요하다. 그 옆에 평소 지젝을 많이 읽었고 나름대로 비판적인 식견까지 갖춘 대학교수가 앉아 있다고 치더라도 우리의 친밀감은 어제 처음 지젝의 책을 사들고 오늘 전철간에서 들춰보고 있는 사람을 향한다. 우리가 아무 대화 없이 눈짓만을 교환한다손 치더라도 그 피상성은 우리를 하나로 묶어줄 수 있다.(...) 

10. 0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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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2 15: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2 2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faai 2010-08-12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쪽'에 댓글 달았던 사람입니다. 저쪽 글에는 원래 글에 없던 오타가 생겼기에 비밀 댓글로 제보했죠. 지금은 수정이 되었네요.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떤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될지도 기대가 크고요. ^^

로쟈 2010-08-12 21:33   좋아요 0 | URL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2010-08-12 2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3 23: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8-14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화가 참 흥미진진합니다.고상함보다는 피상적인 것에 가치를 두어야 한다...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하는군요.

레마르크 소설 중에 독일과 소련의 막바지 전투를 다룬 '사랑할 때와 죽을 때'가 재미있었습니다.레마르크는 '서부전선 이상없다'보다 2차대전을 다룬 작품들의 구성이 더 나은 것 같아요.

로쟈 2010-08-14 11:12   좋아요 0 | URL
저는 <서부전선>이 더 재미있었는데, 아마 제 또래가 주인공이어서였겠지요...

노이에자이트 2010-08-14 18:33   좋아요 0 | URL
그래요... '서부전선 이상없다'를 좋아하는 이들이 참 많군요.저는 레마르크 소설 중에서 '사랑할 때와 죽을 때'가 제일 재미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