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지젝의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창비, 2010)를 다시 손에 들고 2부를 읽고 있다. 다른 일들에 밀려 완독하지 못했었는데, 서평을 염두에 두고 마저 읽기로 마음먹어서다. 언론리뷰를 다시 찾아보니까 주로 1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1부 '멍청아, 그건 이데올로기야!'는 세계금융위기와 자본주의 분석에 할애돼 있고, 2부 '공산주의적 가설'은 말 그대로 재발명되어어야 할 공산주의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 가장 자세한 리뷰이면서 동시에 2부의 내용도 챙기고 있는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책에 대한 관심도 다시금 부추길 겸해서.
추락하는 여객기 안에서 어떤 자세로 몸을 웅크리느냐는 아무 의미가 없다. 예고된 재난을 외면하는 것은 파국을 막는 데 방해가 될 뿐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말한다. “우리는 가능성의 차원에서 우리의 미래가 끝장나게 돼 있다는 것, 파국이 우리의 운명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인정을 바탕으로 운명 자체를 변화시킬 행위를 수행하는 데 나서야 하며, 그럼으로써 하나의 새로운 가능성을 삽입해야 한다.” 이 그림은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의 원서 표지를 재구성한 것이다.
경향신문(10. 07. 03) 지금 좌파가 해야할 일은?
한국의 어느 인문학 독자가 1990년대 말 10년짜리 우주여행이 걸린 복권에 당첨됐다고 치자. 10년 만에 지구로 귀환한 그는 당연히 한국의 서점을 찾을 것이고, 전에 보지 못했던 거대한 괴물과 대면하게 될 것이다. 괴물의 이름은 슬로베니아 출신으로 ‘현존하는 가장 위험한 사상가’로 소개되는 슬라보예 지젝(사진)이다. 1949년에 태어나 현재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 대학 철학교수인 그는 60여종의 책을 썼는데 국내에 소개된 것은 공저를 포함해 40종 가까이 된다. 2종을 제외하곤 모두 2000년 이후에 번역됐다. 1년에 3~4종씩 소개된 셈인데 외국 사상가 가운데 이처럼 단기간에 여러 책이 집중적으로 번역된 사례가 또 있을까 싶다. 그런데 대중적으로 인기있는 작가라고 해서 대중이 이해하기 쉬운 작가라는 뜻은 아니다. 헤겔과 라캉,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바디우와 랑시에르 등 근현대 서구 사상가들을 종횡으로 가로지르며 쏟아내는 분석과 비평이 어지럽다. 그리고 그의 대표작이라는 책들은 왜 이리도 두꺼운지….
지젝이 2009년에 쓴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는 ‘지젝 읽기’에 도전했다가 쓴맛을 봤던 독자들이 눈여겨볼 만한 책이다. 고맙게도(?) 분량이 짧다. 한손에 들어오는 크기의 판형에 본문이 308쪽이다. 그리고 2007~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라는 현재진행형의 현실 문제 분석에서 출발하고 있어 피부에 와닿는 감촉이 까칠하다. 마지막으로 실패한 기획으로 치부되는 공산주의에 관한 새로운 비전을 대담하게 제시하고 있어 왜 그에게 ‘가장 위험한 사상가’란 별명이 붙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그는 이 책에서 2007~2008년의 금융위기를 2001년 9·11테러라는 비극에 이은 희극으로 규정한 뒤 금융위기에 관한 미국 우파와 좌파가 만들어낸 풍경을 분석하고 꼬집었다. 우리가 익히 알듯이 금융위기가 터지자 부시·오바마 행정부는 대대적인 구제금융안을 내놓았다. 그런데 공화당 보수파 정치인들은 이것이 ‘사회주의적’이라며 비난했다. 지젝이 보기에 이런 주장은 모순이자 필연이다. 부자를 망하지 않게 돕는 것에 사회주의 딱지를 붙이고, 마치 전에는 국가의 개입이 없었던 것처럼 비난하는 것은 모순이다. 현실 자본주의에서 금융경제가 붕괴했을 때 실물경제가 타격을 받는 것이 뻔한데 이를 구분해 실물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는 것은 기만이다. 한편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자본주의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부차적이고 우연적인 일탈 때문이라고 설명해온 지배이데올로기의 반복이라는 점에서 필연이다.
재미있는 것은 좌파 혹은 진보진영의 반응이었다. 구제금융안을 격렬히 비난하면서 결과적으로 보수파와 같은 자리에 서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오바마 정부를 지지해야 했던 민주당원과 은행 국유화를 대안으로 생각했던 진보인사들은 구제금융안을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지젝은 좌파가 보여준 이런 혼란이 위기의 본질과 지배이데올로기의 변주를 파악하지 못한 데에서 기인한다고 비판했다. 자본주의는 언제나 위기를 안고 있는 형식이며, 국가는 자본의 순환을 돕는 상부구조라는 점을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지젝은 현재의 위기가 새로운 공간을 열어줄 것이라는 좌파의 기대를 순진하고도 근시안적인 기대로 치부한다. 그는 오히려 인종차별과 전쟁의 증가, 제3세계 빈곤의 증대, 빈부격차 심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그가 이 대목에서 ‘현대 자유시장의 역사는 충격 속에 씌어졌다’는 나오미 클라인의 저서 <쇼크 독트린>을 인용한 것은 일리가 있어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좌파가 해야 할 일은 냉소적 현실주의에서 벗어나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결함을 끈질기게 제기하고 지배이데올로기에 맞서는 새로운 서사를 만들고 확산시키는 것이라고 지젝은 말한다. 결국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공산주의가 다시금 문 앞에 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실패의 끝지점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출발점으로 돌아가 몇번이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 ‘새로운 공산주의’를 위한 좌파의 자세여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20세기에 등장했던 공산주의와의 결별을 말하는 것이다. 지젝은 우리가 의존할 ‘대타자’는 없다고 주장한다. 역사의 ‘진전’을 담당할 특권계급은 없으며 우리 스스로가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모든 민중의 프롤레타리아화’는 어떻게 가능할까. 지젝은 지적재산권, 개발과 환경파괴, 유전공학 등을 통해 자본주의가 문화와 인간의 내면, 외면을 전면적으로 사유화하고 있다면서 이는 프롤레타리아화 과정에 다름 아니라고 말한다. “세계 자본주의에서 ‘살아 있으면서 죽은 자들’, 신자본주의적 ‘진보’의 뒤에 남겨진 모든 자들, 쓸모없고 무가치하게 된 모든 자들, 새로운 조건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든 자들을 재통합하는 기획은 어떠한가?”
현직 대통령을 비판하는 글을 인터넷에 올렸다는 이유로 잡혀가는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지젝이 내건 ‘새로운 공산주의의 재발명’이라는 구호 자체가 ‘불온’하게 들릴 수 있겠다. 그리고 그가 열의에 차서, 때로는 환희에 휩싸여 설명하는 공산주의의 새로운 주체와 작동방식을 애써 따라가 보지만 ‘어떻게?’와 ‘과연 그럴까?’란 질문이 떠오르기도 한다. 번역자인 김성호 서울대 영문과 교수는 이런 의문의 원인을 이 책이 가진 ‘애매함’ 때문이라고 말한다. 지젝이 재규정한 프롤레타리아가 구체적으로 누구인가, 다양한 주체들을 어떻게 묶어낼 것인가 등에 대해 애매하게 처리했다는 것이다. 한권의 책에서 구체적인 전략과 전술, 세세한 지침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오히려 급진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행동에 나서는 것이 이 ‘위험한 사상가’의 책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자세로 보인다. 그리고 빠진 ‘구체’를 채워나가는 것은 파국으로 치닫는 세계의 위기를 목도한 모든 이들의 몫일지 모른다.(김재중기자)
10. 07. 18.
P.S. 기사에서 역자의 말을 재인용한 '애매함'이 아마도 서평의 시발점이 될 거 같다. 과연 그런가, 다시 생각해볼 작정이다. 한편, 지젝의 신간 <종말의 시대 살아가기>도 지난주에 손에 들었는데, 이 또한 번역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