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한국의 닮은꼴에 대해선, 보다 정확하게는 한국의 ‘미국 추종주의’에 대해선 따로 생각해볼 문제이지만, 강준만 교수의 <미국사 산책>에서 실마리는 얻을 수 있다. “2002년 갤럽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48퍼센트가 창조론을 믿는 반면 진화론 신봉자는 그 절반 수준인 28퍼센트에 불과했다. 악마(evil)의 존재를 믿는 미국인은 68퍼센트나 됐다. 종교는 미국의 탄생 이래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미국을 이해하는 알파이자 오메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머리말) 우리에겐 아직 창조론/진화론 신봉자에 대한 데이터가 없는 듯하지만, 종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미국 못지않다는 점에서는 음미해볼 만한 대목이다. 비슷한 점이 많은 김에 아예 ‘미국 되기’를 열망해야 할까. 태극기와 성조기를 열렬히 같이 흔들면서 말이다.

사람의 시각은 제각각이어서 러시아문학을 공부한 나는 러시아와 한국의 역사적 운명이 서로 많이 닮았다고 생각한다. 각각 몽골과 일본이라는 이민족의 장기적인 지배를 받았다는 것이 이유다. 스케일은 물론 다르다. 한쪽은 13세기 중반부터 240년간 지배받았고, 다른 한쪽은 20세기 초반에 36년간 지배받았으니까. 지난 2003년 가을에 방한하여 다섯 차례의 강연을 가진 바 있는 지젝은 또 생각이 달라서 “한국과 슬로베니아 두 나라가 깜짝 놀랄 만큼 서로 유사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의 강연문을 담은 책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의 머리말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유인즉, “한국은 슬로베니아보다 20배 이상 인구가 많다 해도, 우리 두 나라는 모두 강대한 세 이웃 국가에 둘러싸여 있다. 슬로베니아의 경우는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남슬라브 국가들이 그런 이웃에 해당한다. 우리 두 나라는 모두 이 이웃 국가들이 끊임없이 가하는 압력에 시달려왔고, 때로는 이 국가들에 의해 식민지화되기도 했다.” 한국의 두 이웃나라는 물론 중국과 일본을 염두에 둔 것이겠다. 거기에 근대 이후에는 미국과 러시아가 보태져서 소위 ‘주변 4강’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 우리의 지정학적 현실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웃 국가의 침략을 받았지만 뒤끝이 잔혹한 내전이었다는 점에서도 슬로베니아와 한국은 서로 닮았다고 지젝은 말한다. 때문에 한국을 방문하는 동안 이방인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친척’을 만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는 게 지젝의 방한 소감이다. 너무 피상적인 관찰과 인상에 근거한 것일까? 하지만 중요한 것이 이 ‘피상성’이라면 어쩔 텐가. 

지젝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이국 땅에 있으면서 또한 고국에 있다는 야릇한 이 동시적인 체험 속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어떤 오래된 물음과 부딪혀야 했다. 어떻게 해야 우리는 자신의 장벽을 넘어 타자에게 이르고, 특히 다른 인종에게까지 손을 건넬 수 있는 것일까?” 지젝은 세 가지 만남의 사례를 든다.    

 

 

첫 번째는 유럽문학에서 진정한 전쟁 체험으로 치켜세워진다는 참호전에서의 조우다. 적군 병사의 얼굴을 직접 대면한 상태에서 상대방을 찔러 죽이는 것을 말한다. 이런 종류의 ‘신비한 피의 성찬식’은 싸움이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하도록 막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영적으로’ 정당화하기까지 한다. 대표적으로 들 수 있는 사례가 독일의 작가이자 사상가 에른스트 융어(1895~1998)의 회고록이다. 이 책은 아직 우리말로 번역돼 있지 않아서 내가 대신 떠올리게 되는 건 레마르크가 1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서부전선 이상 없다>(1929)이다. 개인적으론 고등학교 때 삼중당문고로 읽었던 작품인데, 여기에도 주인공 파울 보이머의 참호전 경험이 묘사돼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참호가 아니라 포탄 구덩이에 빠져 있던 주인공이 어둠 속에서 같은 구덩이에 굴러 떨어진 적군을 죽이게 된 경험이다.  

 

   
 

나는 생각이 마비되어 아무런 결심을 할 여유도 없이 미친 사람처럼 그자를 쿡 찔러본다. 몸이 움찔움찔하다가 축 늘어져서는 푹 꺾이는 느낌만 들 뿐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손이 끈적끈적하고 흥건히 젖어 있다.

 
   

 

하지만 적군의 숨이 금방 끊어지진 않아서 보이머는 한동안 그와 대면하게 된다. 공포로 응집된 그의 시선을 보면서 보이머는 ‘아니야, 아니야’라고 속삭인다. 그는 상대방의 공포를 누그러뜨리고는 흙탕물이지만 입술에 물을 적셔주고 상처에 붕대를 감아주려고 애쓴다. 보이머의 휴머니즘? 하지만 보다 실상에 가까운 것은 포로로 잡힐 경우를 대비한 계산이었다. “나는 어쨌든 이 일을 해야 한다. 내가 포로로 잡힐 경우 이들이 내가 그를 도와주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를 총살시키지 않도록 말이다.” 부상당한 적군 병사는 한나절 이상을 신음하다가 결국 숨을 거둔다. 아마도 그가 결정적인 부상을 입지 않았더라면 포탄 구덩이 속에서 둘은 서로의 눈을 마주보면서 가차 없이 상대방을 죽여야 하는 운명에 처하지 않았을까. 그것이 ‘레알 전쟁’이니까. 하지만 우리가 기대하는 만남은 아니다. 

두 번째로 지젝이 드는 사례는 살인의 체험을 숭고한 경험담으로 고양시키는 몽매주의 이데올로기보다는 조금 고상한 쪽이다. 1942년 12월 31일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에 러시아의 배우와 음악가들이 위문공연차 도시를 찾았다. 스탈린그라드는 독일군에 포위된 상태였는데, 바이올린 연주자 골드슈타인이 연주를 시작하자 사격은 돌연 중단됐다. 연주가 끝나자 러시아 쪽 진영은 정적에 휩싸였고, 얼마 후 독일군 진영의 확성기에서 더듬거리는 러시아어가 흘러나왔다. “바흐를 더 연주해주시오. 쏘지 않겠소.” 골드슈타인은 다시 바이올린을 집어 들고 바흐의 가보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물론 연주가 진행되는 동안은 독일군과 러시아군은 상대방을 쏘지 않았다. 하지만 연주가 끝나자마자 사격은 다시 시작됐다. 이 연주가 궁극적으로 양측의 사격을 막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지젝은 그 연주가 너무 고상하고 심오했기 때문은 아닐까라는 의문을 던진다. 왜 그런가. “어떤 일이 이루어지는 데 필요한 것은 그보다 훨씬 더 표면적이고 피상적인 어떤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반면에 보편적 인간성을 발견하게 해주는 좀더 효과적인 체험은 시선의 교환이라는 보다 단순한 모양새를 취할 수도 있다. 사실 <서부전선 이상 없다>에서도 파울 보이머는 상대방의 시선을 정면으로 응시하자 ‘아니야, 아니야’라며 살해할 의도가 없다는 걸 내비쳤는데, 그 경우에도 그의 ‘보편적 인간성’이 ‘계산’보다 먼저 작동한 것은 아니었을까. 

지젝이 세 번째로 드는 사례는 바로 그와 관련된 것이다. 얼마 전 월드컵이 개최됐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예전에 일어난 일인데, 반인종차별 시위 도중에 백인 경찰이 흑인 시위자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던 때였다. 한 경찰관이 곤봉을 손에 들고 흑인 부인을 뒤쫓아 가고 있었는데, 예기치 않게도 부인의 신발 한 짝이 벗겨졌다. 그러자 경찰관은 자동적으로 ‘깍듯한 예의(good manners)’를 지켜 신발을 주워 그녀에게 건넸다. 그 순간 두 사람은 시선을 교환하고 자신들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깨닫는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예의를 차린 다음에는 다시금 그 부인을 쫓아가 곤봉으로 내리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경찰관은 그래서 가볍게 목례를 한 다음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이 일화에서 지젝이 끌어내는 교훈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 경찰관이 갑자기 자신의 선한 본성을 발견했다는 데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즉, “그래, 인간의 본성은 원래 선한 거야!” 따위의 깨달음은 이 일화와 무관한 또 다른 몽매주의다.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로 그 경찰관은 전형적인 인종주의자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 하지만 그러한 자신의 생각이나 신념에 대해 승리를 거둔 것은 그가 받은 ‘피상적인’ 예절 교육이라는 게 지젝의 판단이다. 백인 경찰관과 흑인 부인은 단지 신발을 건네주고 받으며 눈빛만을 교환했을 뿐이지만, 이 ‘피상적인’ 접촉에 의해서 두 사람이 살고 있는, 서로 전혀 소통되지 않는 두 사회적-상징적 세계의 장벽이 일시적으로 중지됐다. “그것은 마치 어떤 또 다른 세계, 유령적인 세계로부터 손 하나가 불쑥 삐쳐 나와 그들의 일상적 현실로 들어온 듯한 사건이다.” 이것을 지젝은 달리 ‘마술적 마주침’이라고도 부른다. 그의 기대는 물론 오늘날의 세계에서 그러한 마주침이 더 많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마주침이 ‘리얼한 만남’이나 ‘고상한 만남’이 아닌 ‘피상적인 만남’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이 요점이다.

나는 ‘교양’의 경우에도 사정은 비슷하지 않은가 싶다. 우리가 깊은 예술적 교양, 인문학적 교양을 갖추지 못해서 서로 마음의 장벽을 쌓고 사회적 분리벽을 만들며, 서로 무시하고, 곤봉으로 패고 칼로 찌르는 것은 아닌 듯싶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깊이’가 아니라 ‘넓이’다. 피상적이더라도 널리 공유될 수 있는 제스처(눈짓)와 의무적인 예절이 필요하다. 더불어, 피상적인 교양이 필요하다. 가령, 지하철에서 지젝의 책을 손에 들고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 내가 느끼는 ‘피상적인’ 친밀감이 우리에겐 더 많이 필요하다. 그 옆에 평소 지젝을 많이 읽었고 나름대로 비판적인 식견까지 갖춘 대학교수가 앉아 있다고 치더라도 우리의 친밀감은 어제 처음 지젝의 책을 사들고 오늘 전철간에서 들춰보고 있는 사람을 향한다. 우리가 아무 대화 없이 눈짓만을 교환한다손 치더라도 그 피상성은 우리를 하나로 묶어줄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말하자면, 앞으로 동행하게 될 <로쟈와 함께 지젝 읽기>가 목표로 하는 것은 ‘깊이 읽기’가 아니라 ‘피상적인 읽기’다. 더 깊이 읽는 건 각자의 몫이자 자유이다. 하지만 내가 기대를 거는 ‘마술’은 피상적인 읽기와 조우를 통해서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그게 나의 믿음이다. 이 믿음이 어디까지 우리를 데려다줄 수 있을까. 당신도 궁금해하면 좋겠다. 이제 다음 회부터는 걸음을 ‘실재계의 사막’으로 옮겨놓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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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피상적 교양의 필요성에 대하여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8-12 09:39 
    자음과모음의 연재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2회를 발췌해놓는다. 전문은 링크해놓았다. 어제 3회분 원고를 쓰려고 했지만 컨디션 난조로 아직 보내지 못했는데, 오늘은 매듭을 지어야겠다. 2회에서는 2003년 지젝의 방한 기억과 함께 '피상적' 만남의 의의를 다뤘다. 3회에선 '실재계'(혹은 '실재')라는 말과 '사라진 잉크'에 대해서 다룰 계획이다.   지난 2003년 가을에 방한하여 다섯 차례의 강연을 가진 바 있는 지젝은 또
  2. 몽매한 지젝
    from Null Model 2010-08-21 15:28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 2회 로쟈는 지젝의 주장이 매우 놀랍고 참신하다는 듯이 소개하고 있지만, 집단 간에 적절한 접촉이 갈등이나 차별을 감소시킬 수 있다는 이야기는 이미 1954년에 고든 올포트가 제안한 것이고 그 후로도 산더미 같은 연구가 쌓여있다. 참고: 접촉 가설(contact hypothesis (위키피디아) 지젝의 주장은 접촉 가설의 아주 조잡한 버전에 불과하다. 지젝이 말하는 '마술적 만남'에는 사실 마술적일 게 아무...
  3. 동전의 앞과 뒤
    from Null Model 2010-09-06 19:26 
    몽매한 지젝에 달린 댓글: Commented by 다시다 at 2010/09/06 17:11 모 든 접촉이 모든 차별을 없애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왜' 라는 게 끼어들 여지가 있는 게 아닐까요? 로자가 인용한 대목에서 지젝은 리얼함이나 고상함보다 오히려 피상적인 접촉이 상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아이러니를 강조하는데, 이건 제가 과문해서 그런가 신선하게 느껴지는데요. 지젝의 주장이 과학적으로 증명 가능한 옳은 주장인가 하는 비...
 
 
2010-08-12 1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2 1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박미지 2010-08-12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읽었습니다 로쟈님! 이거 '피상성'에 대한 굉장한 반전인데요..머리 한 대 맞은 느낌입니다. 겸허해지네요. '먼저 사람이 되라'는 흔한 말이 의미하는 것도 아마 타자와 더불어살기 위해 알아야 할 것들을 알아라, 예의를 배우고 교양을 넓히라는 뜻이었던 것 같습니다..

로쟈 2010-08-13 23:26   좋아요 0 | URL
반전이야 지젝을 읽다보면 페이지마다 나옵니다.^^;

kkr3316 2010-08-20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상적만남
마술적 마주침 에대해 생각해봐야겠습니다

독자 2010-08-21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이추판다님의 비판에 대한 반론 기대해보겠습니다

로쟈 2010-08-22 08:32   좋아요 0 | URL
먼댓글 말씀이시죠? 접촉가설에 대한 소개로 읽었습니다. '피상적 만남'마저도 아주 드문 일이란 걸 새삼 깨닫게 됩니다...

독자 2010-08-22 23:54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지젝에 대해 인지부조화가 일어나지 않는 방식으로 독해하셨군요

흠흠 2010-08-22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진화론 [신봉자] 라니..;;

이런

2010-08-23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지젝의 <혁명은 다가온다> 를 발췌하셨군요...저 진짜 이런데 글 안 남기지만 너무 답답해서 남깁니다. 일반독자들을 위해 쉽게 쓰시겠다는 의도는 충분히 짐작하지만 이런식의 글은 오히려 독자들에게 지젝에 대한 오해만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위의 아이츄판다님처럼요. 지젝의 "피상성"은 오히려 "형식"으로 생각하는 게 온당합니다. 우리의 신념이나 의미(있는 내용)가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이아니라 아무 의미없는 순수형식이 내용을 바꿀수있고 이때 진짜 타자와 접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도 오래전에 읽은책이라 다시 찾아봐야하겠지만 기억나는 건 그렇습니다. 또한 "마술적 마주침"이라는 건 로자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마음만 먹는다고 이뤄지는 게 절대 아닙니다. 지젝의 "마술적 마주침"은 진짜 타자와의 대면입니다. 상징계의 무너짐이라는 마주하기 끔찍한
경험이기도 하고요. 어쩌면 그게 지젝이 말하는 혁명의 순간일지도 모르고요. 쉽게 쓰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정확히 쓰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원고 기대하겠습니다.

다케조 2010-10-31 12:19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원문 글을 쓰신 분도 피상성은 내용과 상반된 기표로 쓰신 듯 하고 마주침이 마음먹은 대로 일어난다는 표현은 안 하셨는데요..

조교 2010-09-13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예의'에 대해 심한 반감을 가지고 있던 저였는데 (그건 껍질에 불과하다는...) 생각의 전환이 일어나는군요. 번번히 일어나는 반전 기대하겠습니다. ㅎㅎ
무엇보다 넓게, 피상적으로 지젝을 읽어가자는 로쟈님의 말씀이 깊이에의 강요가 아니라 참 좋군요.

dbdic 2010-09-24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소 지젝을 많이 읽었고 나름대로 비판적인 식견까지 갖춘 대학교수가 앉아있다고 치더라도 우리의 친밀감은 어제 처음 지젝의 책을 사들고 오늘 전철간에서 들춰보고 있는 사람을 향한다... 닭살돋는 포착입니다. 공감이에용 ㅇㅇ, 이미 추석은 지나부렀고 돌아오는 설날엔 식구들에게 선물로 지젝 한권씩 들려서 피상적인 친밀감이라도 만들어야겠습니다.


빠삐용 2010-10-04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사회학자가 말했다던 '약한 고리'가 떠오르네요. 깊이 읽기보다는 피상적 읽기라는 게 말이죠. 한 지역 내에 구성원끼리 끈끈한 관계라하더라도 다른 지역과 연대가 전무하다면 주장하는 바를 공론화시키고 협력을 이끌어내기 어렵지만, 지역 내 관계가 긴밀하지 않더라도 약한 고리로 타지역과 연결돼 있다면 지역 내 이슈를 타지역원의 지지를 받아 성취할 수 있다는 말이죠. 앞으로 지하철의 동승한 사람이 펼쳐든 책에 더 관심을 갖게되겠어요^^

다케조 2010-10-31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레비나스의 생각과 비슷한가요? 그 피상성이라는 게 결국 타자의 얼굴인지...예절이란 일반적으로는 상징계의 일부라고 볼 수 있을 텐데 그 피상성을 생각해 보면 실재가 되버리는군요...아무튼 지젝의 번역서를 혼자 볼 때는 정리가 안되는 게 많았는데 이 글은 그에 비해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는 듯 합니다. 인터넷에서 지젝 관련 글을 만나다니 정말 반갑네요. 즐겨찾기에 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