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감옥에서 다시 원고 감옥으로 이감해가는 중에 잠시 풍경을 내다보는 기분으로 페이퍼 하나를 적는다. 엊그제 새로 번역된 토마스 만의 <마법의 산>(세창출판사, 2013)을 구입했는데, 물론 그간에 <마의 산>이라고 번역된 작품이다. 개인적으로는 일역본 제목에서 온 <마의 산>이 평소에 좀 어색하다고 생각해온 터라 개명된 제목이 오히려 더 나아 보인다(영어본의 제목도 그냥 'The Magic Mountain'이다).

 

 

역자는 <마의 산>을 <마법의 산>이라고 옮기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적었다(하권의 역자해설, 663쪽).

이제까지 독일어로 Zauberberg(영어로 Magic Mountain)는 '마의 산'으로 번역되어 왔다. 그러나 역자는 이 번역이 오류라고 생각하여 '마법의 산'으로 옮겼다. 마(魔)는 악마라는 뜻으로 오해될 소지가 많으며, 이렇게 되면 소설의 내용까지도 전도될 위험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토마스 만은 이 소설에서 무시무시한 산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자주 언급하였듯이 '연금술적인 신비'와 '마법'이 작용하는 산을 다루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단순했던 주인공이 정신적으로 성숙해지고 고양되는 소위 '교양소설' 내지 '발전소설'의 양상을 서술해 나간다.

시간을 내서 <마법의 산>으로 읽어보고픈 생각이 든다. 그렇게 새 번역본을 접한 김에 또 생각난 책은 얼마전에 첫 권이 나온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펭귄클래식, 2013)다. 물론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새 번역본이다. 언제 완간되는지는 모르겠지만 표지만 보면 다섯 권짜리로 나오는 듯도 싶다. 민음사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경합을 이룰 책(두 역자는 모두 프루스트 전공자이며, 김화영 교수의 번역본까지 가세하게 되면 언제가는 3파전이 벌어질지도 모르겠다. 원로 불문학자의 번역으론 김창석, 민희식 교수의 번역본도 있다).

 

 

역자는 '잃어버린 시간' 대신에 '잃어버린 시절'이라고 옮긴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시간’이라는 것은 광대무변한 공간 속에 처한 무시무종의 질료세계에서 포착되는 물리적 이동 및 변화 현상을 기술하기 위하여 고안된 합의개념일 뿐, 즉 공간 및 그 속에서 부유하는 질료덩이들에 종속되는 개념일 뿐, 그 독립된 실체가 없는 일종의 허개념입니다. 따라서 ‘시간’이라는 것은 잃거나 되찾을 수 있는 그 무엇일 수 없습니다. 반면 ‘시절’이란 하나의 오성(감각 및 인지의 주체)이 이미 겪은 실존의 퇴적물이며, 그 ‘시절’은 오직 질료적 접촉에 의해서만 필연적으로 부활하는, 그리고 전적으로 주관적인 새로운 정서적 국면입니다. 물론 그 ‘시절’ 또한 엄밀히 말해 우리의 염원이나 의지에 따라 되찾을 수 있는 무엇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계시(쏘크라테스적 의미로써의 계시) 혹은 영감처럼 번개가 명멸하듯 우리를 스쳐갈 뿐, 따라서 그것을 ‘찾는다’ 하는 말은 그러한 계시에 귀 기울인다는 정도의 뜻을 가질 수 있을 듯합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시절’은 ‘시간’과 달리, 기다림이나 명상 혹은 모색의 대상일 수 있습니다. 여하튼 작품의 말미에서 주인공은 ‘잃어버린 시절(le temps perdu)’이 곧 ‘옛날(les jours anciens)’을 가리킨다고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번역어는 ‘롤랑의 노래’나 ‘니벨룽겐의 노래’, ‘음유시인’, ‘서사시’ 등처럼, 우리가 외래 문물을 받아들이던 초기에 오역된 숱한 말들 중 하나일 듯합니다.

그렇게 해명은 하고 있으나 개인적으론 동감하기 어렵다. '시간'이란 허개념이고 '시절'이 주관적, 정서적 국면을 지시하기에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라고 하는 게 옳다는 얘기지만, 이미 '잃어버린 시간'이란 말에 역사적, 문화적으로 축적된 정서적 국면이 내재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이질적인 개명으로 카뮈의 <이방인>을 <이인>(문학동네)이라고 옮긴 경우도 떠올려볼 수 있다. 두 경우 모두 역자의 깊은 주관적 소신을 반영하고 있지만, 나로선 모두 동의하기 어렵다. 

 

이 두 가지 개명된 제목에 대해 각기 다른 느낌을 갖는 것은 나만의 주관 탓일까...

 

13. 0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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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 때문에 손에 잡은 책은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민음사, 1998)이다(내가 갖고 있는 건 1쇄다). 영역본을 옮긴 <니체, 철학의 주사위>(인간사랑, 1993) 외 영어본과 러시아어본까지 모두 갖고 있는 책이지만 부분적으로만 읽고는 말았다. 번역이 별로 탐탁지 않다는 것도 독서를 계속 미룬 이유다. 그러다 <도덕의 계보학>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다시 읽는 김에, 그리고 두달 전 박찬국 교수의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 읽기>(세창미디어, 2012)도 나온 김에 다시 손에 들었다. 틈나는 대로 조금씩 음미하며 읽어볼 참이다(천천히 읽기, 곧 '지독'이 목표다).

 

 

오늘도 몇 페이지 읽다가 어이없게 번역된 대목을 발견하고 웃음이 나왔는데, 다른 대목도 아니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용한 부분이다. 니체의 복수주의(pluralism)를 설명하면서 들뢰즈는 자기만이 유일신이라는 어느 신의 말을 듣고서 신들이 웃다가 죽었다는 대목을 인용한다("신들은 죽었다. 하지만 자기만이 유일하다고 말하는 어떤 신의 이야기를 듣고서는 웃다 죽었다."). 이게 <니체와 철학>에는 이렇게 옮겨졌다.

"신들이 존재하건, 단 하나의 유일신도 존재하지 않건, 소위 그것이 신(성) 아닌가?"(21쪽)

대체 무슨 말인가? 이 대목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3부 '변절자들'에 나오는 것인데, 신들 가운데 한 신, "분노의 수염을 단 늙은 신, 질투의 신"이 "신은 유일하다. 그대는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신을 가장 잘 부정하는 말'을 하자 다른 모든 신들이 웃어대더니 몸을 흔들어대며 소리친다. 

 

 

"신들이 존재하지만, 하나의 신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바로 신성함이 아닌가?"(펭귄클래식판, 292쪽)

"신들은 존재하지만 유일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신다운 일이 아니겠는가?"(한길사판, 264쪽) 

"신들은 존재하지만 유일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신성함이 아닌가?"(민음사판, 324쪽)

일단 손에 잡히는 번역본들과 대조해보더라도 <니체와 철학>의 번역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알 수 있다. 자신이 없다면 다른 번역본을 참고할 수도 있었을 텐데, 무슨 만용인가. 니체의 가장 간명한 주장도 이해하지 못하고 <니체와 철학>을 옮기다니! 독자들이 웃다가 나자빠질 일이다. 참고로 <니체, 철학의 주사위>에서는 이렇게 옮겼다. "이러한 신성은 엄밀히 말해서 유일신 이외의 신들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26쪽) 역시나 만족스럽지는 않지만('아닐까?'가 아니라 '아닌가?'라고 옮겨야 한다. 조롱의 뉘암스를 담고 있기에), <니체와 철학>만큼 헛다리를 짚지는 않았다.

 

혹 1쇄라서 그런가 싶어서 일단 개정판도 다시 주문했다(개정판은 2001년에 나온 걸로 돼 있다). 선량한 독자들을 위해서라도 번역상태에 대해서 꼼꼼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12. 0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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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이론적 쟁점과 번역비평의 실제를 두루 다룬 책이 출간됐다. 정혜용의 <번역 논쟁>(열린책들, 2012). 국내에서는 드문 번역학 전공자의 저작이라 더욱 눈길이 간다. 소개기사를 옮겨놓는다.

 

 

ㅌㅇㄹ

경향신문(12. 01. 07) “번역은 원작을 주체적으로 읽고 모국어로 새로 쓰는 작업”

 

‘원문에 없는 말을 조작·날조했다. 번역을 각색 정도로 착각한 듯하다.’ 몇 년 전 유명 번역가에게 쏟아진 비판이다. 한국의 번역 비평 담론 중 98%가 부정적 평가를 담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그 비평의 81%는 가독성과 충실성이 기준이라고 한다. 가독성은 의미가 통한다면 원문을 희생하더라도 우리말로 잘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역론에 가깝고, 충실성은 원문을 글자 그대로 옮겨야 한다는 직역론에 가깝다. 최근에 벌어진 스티브 잡스 전기의 오역 논란도 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번역논쟁>(열린책들)을 내놓은 정혜용 박사(45·사진)는 이런 이분법적 논의를 거부한다. 그는 “직역이나 의역이 따로 있다기보다 최상의 번역이 존재할 뿐”이라고 말했다. 번역은 원어를 그에 상응하는 다른 언어로 맞바꾸는 작업이 아니라 번역가가 자신을 둘러싼 사회문화적 환경 속에서 “주체적으로 텍스트를 읽어내 모국어로 새로 쓰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번역의 대상이 단어나 자구 하나하나가 아니라 ‘텍스트 전체’라는 것은 정 박사가 말하는 핵심이다. “번역자들은 작품 전체를 번역합니다. 미시적인 부분만 평가하면 받아들이기 어렵죠.”

전문번역가인 정 박사는 불문학 전공자로 프랑스에서 번역학 박사를 취득한 흔치 않은 이력을 갖고 있다. 번역의 실천·이론 양면을 경험한 셈이다. 독특한 경험의 소유자인 그는 ‘객관성’이라는 이름으로 일률적 기준에서 번역을 평가하는 학계의 정량적 방식이나 ‘원서를 읽는 게 낫다’는 식의 인상평가를 모두 비판한다.

 


문학작품, 그중에서도 속담이나 언어유희의 번역을 보면 정 박사의 논의가 두드러진다. 그는 언어유희의 극한을 만날 수 있는 프랑스 작가 레몽 크노의 <지하철 소녀 쟈지>를 번역한 경험을 예로 든다. 이 작품에는 등장인물이 ‘입다’라는 동사를 쓰다가 프랑스어의 복잡한 어미변화 때문에 헤매는 장면이 나온다. 정 박사는 원문과는 차이가 있지만 언어유희의 효과를 살리기 위해 ‘착복-착의-착수-착란’으로 이를 바꿔 번역한다.

속담 번역도 비슷하다. ‘곰은 잡지도 않고 가죽 먼저 팔 수는 없지’라는 프랑스 속담을 어떻게 옮길 것인가. 의역의 입장에서는 우리 속담인 ‘김칫국부터 마신다’로 옮기면 이해가 쉽다. 그러나 그 순간 20세기 초의 프랑스 산골이라는 배경은 사라지고 만다. “지나친 의역 또한 강대국의 자국 문화중심주의 산물이죠. 낯섦 그 자체를 즐기는 것도 외국문학을 읽는 이유인데요.”

 

 


두 사례는 직역이니 의역이니 하는 평가가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 박사는 번역을 “원작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재창조해내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특히 문학번역은 하나의 ‘작품’이라는 생각이다. “문학 작품을 보고 왜 이렇게 썼어 하는 식으로 비평하지 않잖아요. 원작에 대한 이해와 분석을 확실하게 한 뒤 문학성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교환해야죠.” 정 박사는 “작가와 원작은 경외감을 가지고 대하면서 번역가에게는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는 풍토”가 문제라고 말한다. 책에 소개된 프랑스 학자 앙투안 베르만의 번역 논의는 이렇다. “번역 작품을 온전한 문학 작품으로 인정하여 그 번역 시스템을, 번역가의 글쓰기 방식을, 그의 번역관을, 번역 기획을 물으며, 번역 주체가 서 있는 번역 지평을 묻는다.” 정 박사가 ‘골방에 틀어박힌’ 번역가들의 연대를 꿈꾸는 번역·출판기획네트워크 ‘사이에’의 위원으로 활동하는 것도 그 실천의 일환이다.(황경상 기자)

 

12. 01. 07.

 

 

 

P.S. 번역이론과 비평을 다룬 책들은 간간이 출간되고 있는데, <번역 논쟁>의 책갈피에는 열린책들에서 나온 몇권의 번역 이론서가 소개돼 있다. 움베르토 에코의 <번역한다는 것>,로렌스 베누티의 <번역의 윤리>, 쓰지 유미의 <번역과 번역가들> 등이다. 번역의 '존재'에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같이 참고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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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진즉 구했지만 나중에 읽을 책으로 제쳐놓은 것 가운데 하나는 고전학자 헤르만 프랭켈의 <초기 희랍의 문학과 철학>(아카넷, 2011)이다. 평판이 높은 책인데, 전공학자의 서평이 올라와 있어서 해가 가기 전에 스크랩해놓는다.

 

 

교수신문(11. 12. 26) 사상의 숲과 나무를 동시에 보여주는 '최고의 정신사'

 

새로 나온  헤르만 프랭켈(1888~1977)의 『초기 희랍의 문학과 철학』(이하 『초기희랍』)은 20세기 서양고전학 연구의 기념비적 저술이다. 특히 기원전 5세기 이전 희랍의 시문학과 사상에 관한 연구로서 『초기희랍』은 독보적이다. 1951년 초판 이래 거듭된 중판은 이 저술의 퇴색되지 않는 가치를 증거한다. 『초기희랍』이 ‘최고의 전문가적 역량’, ‘대단히 명료한 기술’, ‘상상을 통한 고대 세계와의 진정한 공감’이 결합된 ‘최고의 정신사’(Geistesgeschichte of the best kind)라는 H. Lloyd-Jones의 평가는 전혀 과장이 아니다. 

 

호메로스에서 핀다로스에 이르기까지 희랍의 정신사가 『초기희랍』의 주제다. 이 시기를 기원전 4~5세기 고전기의 선행 단계 정도로 보는 사람들도 많지만, 프랭켈은 그런 목적론적 접근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에 따르면 기원전 8세기 이후의 3세기는 고전기의 꽃을 피우기 위한 맹아의 시기가 아니라 특유의 순수성과 활력을 지닌 그 자체로서 완결된 시기다.

 

서술 방식도 『초기희랍』은 독특하다. 이 저술은 고전기 이전 희랍 세계에서 활동했던 주요 시인과 철학자를 망라하지만, 창작의 사회적 조건, 개별 시인과 철학자의 정신세계, 그들 사이의 영향 관계를 사전적·연대기적인 기술이 아니라 작가들이 남긴 단편과 작품들에 대한 엄격하고 치밀한 분석을 통해 드러낸다. 분석에는 언어, 문체, 공연 형태와 같은 표현 형식, 작품의 구성과 내용, 다른 작가와의 비교 등 작품 이해에 필요한 모든 관점이 동원된다. 그렇다고 독자가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초기희랍』은 “서양고전문헌학 전공자들뿐만 아니라 비전공자들을 위해” 쓰인 책이기 때문이다. 텍스트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통찰을 제공하는 연구서이자 희랍 사상의 깊은 심연으로 안내하는 교양서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한다는 점은 『초기희랍』이 지닌 최고의 장점이다.  

 

집필과정에 '수수께끼의 해답' 있어

어떻게 하나의 저술이 초기 희랍 사상의 숲과 나무를 동시에 보여주면서 전문가와 비전문가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을까. 이 수수께끼의 해답은 그 집필 과정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프랭캘은 『초기희랍』을 1931년 괴팅엔에서 처음 구상해 1948년 캘리포니아에서 마무리했다. 이 책은 1951년 미국고전학회의 지원을 받아 독일어로 출간됐다. 2500년 이전의 정신사를 다루는 이 저술은 2차 세계 대전 전후의 착종된 현대사의 산물인 셈이다. 책을 처음 구상할 당시만 해도 프랭켈은 아직 독일에서 활동 중이었다.

 

그는 유서 깊은 고전학자의 집안에서 태어나 당대 최고의 고전학자들에게서 교육을 받았다. 유대인 혈통 때문에 대학에서 정식 교수 자격을 얻지 못한 그는 1935년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다. 이 망명객은 스탠포드 대학에서 교수직을 얻지만, 당시 미국의 서양고전학은 아직 걸음마 수준이었다. 프랭켈은 독일에서 시작한 연구를 계속하는 한편, 자신의 연구 내용을 그리스어를 모르는 미국의 학생과 동료들에게 전달해야 했다. 저자는 어디서도 자신의 개인적인 감상을 드러내지 않지만, 독자는 어디서나 시대의 고난과 역경에 맞서 연구자의 소명을 다한 위대한 고전학자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전체가 9장으로 이루어진 『초기희랍』은 서사시 시기(1장~3장), 상고기 전기와 이행기(4장~6장), 상고기 후기(7장~8장)로 나누어 초기 희랍 문학의 발전 과정을 추적한다. 저자는 발칸 반도에 현존하는 구술 서사시를 준거로 삼아 서사시 소리꾼의 사회적 기능, 공연 형태, 언어, 문체, 전승 형태 등에 초점을 맞추어 『일리아스』의 출현 과정을 해명한 뒤, 『일리아스』에 나타난 신들과 인간의 세계로 눈을 돌린다. 신들은 ‘세계힘’들의 형상화이고 인간은 이런 세계힘들이 겨루는 열린 장으로 드러난다.

 

『오뒷세이아』에서는 『일리아스』에 나타난 서사시 본연의 문체나 긴장감이 감소하면서 서사시 소멸의 징후가 감지된다. 한편, 헤시오도스의 ‘교훈체 서사시’는 시인의 사상가적 역량과 태도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호메로스의 ‘이야기 서사시’와 구별된다. 『신들의 계보』는 이오니아 철학의 선구적 형태이고, 『일들과 날들』은 자연과학적 사유의 단초를 담고 있다. 

 

4장 이하에서 다루는 상고기 문학은 문체와 내용에서 서사시 문학과 뚜렷하게 대비되는데, 예컨대 절대적 현재성의 관점, 서정시적 자아의 등장, 양극적 대립성의 원리 등이 이 시기 문학의 특징이다. 크게 보면 상고기 문학은 다양한 운율의 서정시를 통해 현실에 맞선 영웅적 자아의 모습을 노래한 아르킬로코스에게서 시작돼 사랑, 전쟁, 술자리의 노래 속에 음악 정신을 구현한 사포와 알카이오스, 인간의 한계를 부각시킴으로써 고전기 인문 정신을 선취한 시모니데스를 거쳐 상고기 세계관을 정교한 형태의 합창시에 압축한 핀다로스에 이르러 완결된다.

 

물론 상고기의 정신은 철학의 영역에서도 관철된다. 상고기 전기 이후 ‘위기의 시기’에 출현한 ‘순수철학’은 크세노파네스, 파르메니데스를 거쳐 헤라클레이토스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장르의 경계를 넘어서 사상의 교차점을 찾아내는 프랭켈의 저술에서 우리는 여느 문학사나 철학사도 제공하지 못하는 통찰과 만날 수 있다.  

 

한국 서양고전학 수용 수준 한단계 높여

번역자들은 인용된 1차 자료들을 포함해서 방대한 원문을 유려한 우리말로 옮겼고 수많은 전문 용어들에 대한 기품 있는 우리말 표현을 만들어냈다. 번역자들이 성의껏 옮긴 원서의 ‘지식지도에 의한 색인 A’는 독자들이 희랍 문학과 사상의 전체 흐름을 조망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서둘러 출판한 탓인지 실수들이 없지는 않다. 시들이나 단편들, 특히 시모니데스의 시편들에 대한 번역에도 더 조탁이 이뤄졌다면 좋았을 것 같다.

 

조판에도 더러 손질할 부분이 있다. 번역서에는 원서의 장절 면주가 불완전하게 실려 있고, 역주와 원주에 일련번호가 붙어 혼란을 준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초기희랍』은 기념비적 저술에 대한 뛰어난 번역임에 틀림없다. 이 번역은 우리나라의 서양고전학 수용 수준을 한 단계 높일 뿐만 아니라 서구 정신사에 대한 우리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본다.(조대호_연세대 철학과)  

 

11.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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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번역자'로 단연 꼽을 만한 이는 사마천의 <사기>를 완역한 김원중 교수다. <본기>, <세가>, <열전>에 이어서 이번에 <표>와 <서>를 마저 번역 출간했기 때문이다.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할 만한 일을 혼자 힘으로 오랜 노고 끝에 완결지었으니 경의를 표할 만하다. 안 그래도 여름에 <사기>의 앞에 나온 세 권은 구입을 했는데, 이제 마저 짝을 맞춰놓아야겠다.

  

한겨레(11. 10. 08) “14년 걸려 중국서도 드문 ‘표’ 번역까지 했죠”

중국 역사서 최고 고전인 <사기>처럼 유명한 책도 없지만, 이 책을 제대로 읽어본 사람은 거의 없다. 52만6500여자에 달하는 <사기> 전체를 우리말로 완전하게 옮긴 번역본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용을 추리고 다듬은 편집본들만 접할 수 있었을 따름이다. 



중문학자인 김원중 건양대 교수(사진)가 최근 <사기 표(表)>와 <사기 서(書)>를 번역 출간해, 14년 동안 이어오던 <사기> 완역의 대장정에 마침표를 찍었다. <사기>는 ‘본기’ 12편, ‘표’ 10편, ‘서’ 8편, ‘세가’ 30편, ‘열전’ 70편 등 전체 130편으로 이뤄져 있다. 김 교수는 1997년 <사기 열전>(2권)을, 지난해에는 <사기 본기>와 <사기 세가>를 번역했고, 이번에 <표>와 <서>를 출간해 비로소 <사기>의 모든 것을 우리말로 옮겼다.

지난 5일 만난 김 교수는 “20여년 동안 나름의 소명의식을 가지고 번역에 매달렸다”며 “끝내고 나니 100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갈 정도로 후련하다”고 말했다. 이번 번역으로 김 교수는 ‘혼자 <사기>를 완역한 학자’, ‘<삼국지>와 <사기>를 함께 완역한 학자’ 등 다양한 수식어를 얻게 됐다. 일본과 미국에서도 홀로 사기를 번역한 사례는 없으며, 중국에서 이 고전을 현대 중국어로 옮기는 작업은 국가 주도로 여러명의 학자가 참여해 이뤄지고 있다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특히 이번에 번역한 ‘표’는 ‘본기’, ‘세가’, ‘열전’에 분산된 역사적 사실 관계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표로 정리한 기록물로서, 중국에서도 번역된 사례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김 교수는 혼자 번역에 매달려 이 대장정 같은 작업을 마쳤다. 중국 중화서국에서 냈던 <사기> 표점본(고문에 구두점을 찍은 판본)을 바탕삼았는데, 철저히 원전 중심주의를 지키면서도 가독성 높은 번역을 추구했다고 한다. 중학교 2학년 수준에서 번역된 말을 이해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잘된 번역의 기준으로 삼았다는 것. 또 우리나라만의 번역 정체성을 살리고픈 마음에 중국어·일본어 번역본은 거의 들여다보지 않았다고 한다.

번역에 대한 집념은 국내 번역 현실을 우려하고 고민하는 데에서 나왔다. 중국의 ‘24사(史)’ 가운데 현재 우리말로 완역된 작품은 자신이 번역한 <사기>와 <삼국지>뿐이다. 일본에서는 <한서>, <삼국지> 등이 이미 오래 전에 완역돼 있었으며, <표>를 포함한 <사기>의 완역도 지난해에 이뤄졌다.

김 교수는 “국내엔 저보다 높은 실력을 가진 분들이 훨씬 많다”며 “문제는 학자들이 번역에 매달릴 수 있게 만들어주는 학문적 토양”이라고 지적했다. 아직도 번역을 학문적 성과로 인정해주지 않는 등 학문 제도 자체가 바뀌지 않으면 꼭 필요한 번역본이 나오기 힘들다는 것이다. 스스로도 “<사기>를 번역하면서 백번도 더 때려치우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렇지만 이미 <사기>에 깊이 매혹돼 어쩔 도리가 없었다고 한다. “사마천은 왜 진시황을 살해하려다 실패한 형가의 이야기, 곧 실패담을 굳이 써넣었을까요? 아내의 충고를 듣고 태도를 바꾼 안자의 마부 이야기 같은 소소한 이야기들은 왜 써넣었을까요? 이런 것들을 생각해보면 ‘통고금지변’(通古今之變), 곧 2500년 역사를 통해 인간의 흥망성쇠를 밝히고 만사의 근본과 핵심을 파악하고자 했던 사마천의 뜻을 다시 새길 수 있습니다.” 때문에 그는 ‘한 권으로 읽는’, ‘하루 만에 끝내는’ 등의 제목이 붙은 편집본을 봐서는 고전을 제대로 배울 수 없다고 말한다. 글쓴이의 의도를 생각하며 글 전체를 천천히 읽어내려갈 때 비로소 그 심오한 뜻을 깨칠 수 있다는 것이다.(최원형 기자) 

11. 10. 08.  

P.S. 국내에선 <사기> 완역에 도전한 학자가 한 명 더 있다. <사기> 전문가 김영수 교수도 <본기1>(알마, 2010)을 펴내면서 장정에 들어간 상태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 또한 완결되기를 기대하면서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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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1-10-08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도장이나마 다 찍은 줄 알았는데 '표'와 '서'가 또 나왔군요. 저는 책을 읽고 나니 책속의 이야기보다 사마천에 대해 두고 두고 생각하게 되더라구요.

로쟈 2011-10-09 11:54   좋아요 0 | URL
네, 대단하긴 하죠. 중국사를 통틀어 최고의 역사서를 써냈으니 말이에요...

미국사람 2011-10-11 0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원중 교수가 사기완역이라는 대단한 일을 해냈군요. 번역을 업적으로 생각해주지 않는 한국의 풍토는 빨리 바뀌어야합니다.

미국에서는 인디아나대학에서 8권짜리 완역이 나와있어요. Ssu ma Ch’ien (1994), The Grand Scribe’s Records (1994 부터 2008년까지 간행) 학술서적이라 가격은 권당 100불 정도이니 일반인이 사서 볼 수 있는 책은 아닙니다만 도서관에는 상당히 깔려 있더라구요. 읽어보려했더니 지명과 인명이 중국발음인데다 한자가 전혀 병기가 안되어있어서 두어페이지 읽고 그만두었읍니다. (항우나 유방같은 이름의 중국발음을 알아야 읽을 수 있읍니다.) 다만 주석까지 빼곡히 달려있어서 우리의 일반 번역서와는 비교가 안되는 높은 수준입니다.

일본쪽 사기 번역은 찌꾸마 문고 쪽이 (史記 全8巻)』小竹文夫・小竹武夫 共訳、筑摩書房〈ちくま学芸文庫〉、初版1995年) 쉽게 구할 수 있는 책입니다. 사기 연구서적 쪽으로 가면 한국과 일본은 거의 상대가 안되는 수준입니다. 중국 고전을 교과서로 과거를 500년 이상 실시했던 조선의 후손인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개탄할만한 일입니다.  

일본에서는 한서도 예전에 번역되어나왔는데 우리는 언제 한서 번역을 볼 수 있을까요. 이런 문제들 때문에 동양사하려면 한문 중국어 뿐아니라 일본말까지 필수로 해야 됩니다. 슬픈 현실이지요.


로쟈 2011-10-11 11:02   좋아요 0 | URL
흥미로운 정보네요. <자치통감>의 경우엔 그래도 얼마전인가 완역본이 나왔습니다. 그런 식으로 24사가 조금씩은 번역되고 있습니다. 아직 요원하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