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교수신문에 실린 '번역단상'을 스크랩해놓는다. <번역투의 유혹>(이학사, 2010)의 저자 오경순 박사가 '번역투'에 대한 문제의식을 간추리고 있다. 흔하게 쓰는 말이긴 한데, '번역투'가 실제로 무엇이며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어떻게 피해갈 수 있는지 등에 대해서 생각해보게끔 한다.

  

교수신문(10. 09. 06) 韓·日語의 편견에 기댄 직역이 ‘일어투’ 과잉 낳았다

번역학은 1983년에야 비로소 하나의 독립된 신생학문으로 정립됐다. 21세기 들어 번역학 연구는 전통적인 주제에서 벗어나 언어학, 사회학, 인류학, 민속학 등 학제간 연구의 관점에서 다양한 분야의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현대 지식사회에서 번역을 문화의 힘으로 보는 인식의 확산 때문이다. 

일상 대화에서 자주 사용해 어법을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글로 표현할 때 어색하고 의미가 쉽게 전달되지 않는 문장들이 있다. 번역투란 우리말에 남아있는 부자연스러운 외국어의 흔적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어떤 글에서 원문이 아닌 번역문이란 흔적이 일정하게 반복해서 나타나는 경우, 그러한 특성을 바로 번역투라고 한다.

번역학, 1983년 신생학문으로 독립
예를 들어 ‘만나다’, ‘모이다’라고 해야 할 것을 ‘만남을 가지다’, ‘모임을 가지다’라고 번역하는 경우는 영어의 ‘have+명사’를 직역한 번역투이다. ‘즐거운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는 ‘Have a good time.’을 직역한 번역투이며,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나 ‘즐겁게 보내시기 바랍니다’가 자연스런 번역이다. 

또한 아래 예와 같이 번역한 우리말을 보면 원문인 일본어가 그대로 훤히 들여다보이는 듯한 직역투 표현 역시 대표적인 번역투라 할 수 있다.

「獨島/竹島硏究における 第三の視覺」
‘독도(다케시마)연구에 있어서 제 3의 시각’
?‘독도(다케시마)연구의 제 3의 시각’

일본식 후치사 ‘~における’를 우리말로 그대로 옮긴 ‘~에 있어서’는 글의 가독성을 떨어뜨리는 군더더기 표현일 뿐만 아니라 대부분 없어도 의미 전달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 ‘~에 있어서’, ‘~함에 있어서’는 ‘~에’, ‘~데’, ‘~에서’, ‘~에게’, ‘~의’, ‘~이’, ‘~할 적에/때’, ‘~의 경우는’ 등의 표현이 자연스러운 우리말 번역이다. 일한 번역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보고 듣고 읽는 많은 말과 글 속에서도 일본식 용어나 구문, 일본식 造語, 일본식 한자어를 그대로 직역해놓은 듯한 번역투 표현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간절기 패션으로 잘 나가는 상품이에요.”(<한국일보> 2006. 10. 12)

간절기란 일본식 표현을 오역한 것이다. 일본어에는 환절기에 해당하는 한 단어로 된 용어가 없다. 대신 ‘절기의 사이’라고 표현한다. 일본어로 표기하면 ‘節氣の間’이다. ‘間(あいだ)’는 공간과 시간의 간격을 나타내는 용어다. 또는 ‘季節のわり目’라고도 한다. 일본어를 번역하면서 무분별하게 오역한 결과이다.

구체적인 번역투 극복 방법 없어 
한국어와 일본어는 언어 구조상 유사한 점이 많지만 차이점도 많다. 흔히 한·일 양 언어가 유사하단 선입관 때문에 번역 과정에서 양 언어의 문법 구조와 어법, 화용적 특징, 관용어법 등을 고려하지 않은 일대일 대응의 직역 방법이 자칫 번역 오류 및 품질이 좋지 않은 번역투로 이어지기 쉽다.

번역투는 번역자가 원문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거나 우리말 구사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번역어는 일차적으로는 원문의 언어 내적·외적 의미에 부합하는 정확한 어감 및 의미 전달을 목표로 해야 하며, 이차적으로는 우리말 체계에 적합해 부자연스럽거나 생경하거나 번역투가 되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우리말 번역을 위해서는 우리말 표현 능력이 전제돼야 함은 물론, 번역자는 번역투의 문제를 사전에 충분히 인식하고 이를 가급적 줄여나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현실의 문제를 고려할 때 번역과 번역투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와 교육이 절실히 필요하지만, 번역 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는 번역학 논문이나 번역 연구서, 번역 지침서 등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지금까지 나온 일어일문학계의 일한 번역 관련 논문들을 살펴보면 원문과 번역문을 대조 분석해 오역 사례를 지적하고 오역을 유형별로 분류·정리해 번역의 중요성을 제시한 논문이 대부분이며, 번역투와 관련된 연구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번역투와 일본어투에 관한 기존의 일부 연구는 국어 전공자들이 국어 순화 및 국어 문체의 관점에서 접근한 것으로, 문제점을 제시한 성과는 있으나 구체적인 번역투 극복 방안을 제시하지 못한 한계점을 지니고 있다. 특히 일본어 전공자의 번역투 및 가독성 연구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는 현 상황에서 일본어 전공자의 번역투 문제 인식과 극복 방안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더욱이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세계는 다문화·다언어 사회인 지구촌 사회로 급속히 변모하며 국가 간의 관계 및 교류가 한층 긴밀하고 다양하며 광범위해졌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번역의 중요성이 재인식되고 번역 교육의 필요성이 새삼 강조되는 것은 시대에 부응하는 당연한 결과이다.(오경순 고려대 일본학연구센터) 

10. 09. 10.    

P.S. 저자의 전공분야에 따른 것이지만, 주로 일본어 번역투에 대한 사례를 많이 들고 있는데, 언어적 영향관계에서 불가피한 부분과 불필요한 부분을 어떻게 가려낼 수 있을지 고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기사에 번역학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대중적이진 않지만 이 분야의 책들(주로 학술서)도 꾸준히 나오고 있다. 최근엔 <번역학 발전사>(이화여대출판부, 2010)도 번역돼 나왔고, 중국 학자의 <신번역학 논고>(한국문화사, 2010)도 눈길을 끈다. 도서출판 동인에서는 '번역학총서'를 출간하고 있는데, 번역투 문제와 관련해서는 <번역과 정체성>(동인, 2010)도 참고해볼 만하다. 번역/통역과 문화적 헤게모니의 관계를 짚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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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0 19: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12 08: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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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10-09-11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번역투를 문제삼는 배경에 자리잡는 일종의 민족주의가 좀 꺼림찍하게 느껴집니다. 이와관련해서는 일종의 '실용주의'가 더 좋지 않을까요? 원산지가 어디든지간에 한국어로 전용되었을때 한국어의 표현자체를 풍부하게 해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라서요. "~에 있어서"도 마찬가집니다. "~의"라고 표현할때의 느낌과 "~에 있어서"를 사용할때의 느낌은 서로 다를 수있습니다. 이런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는 오히려 "~에 있어서"라는 표현이 수입되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효과 아닌가요?

로쟈 2010-09-12 08:45   좋아요 0 | URL
기본적으론 그런데, 그 뉘앙스 차이에는 '오렌지'와 '어린지'의 차이도 포함되죠. 효과와 역효과를 식별할 필요가 있을 듯해요...

알비스 2010-09-12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투 뿐 만 아니라 일어 단어도 우리말에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저도 이번에 알았는데, ‘출산’이라는 단어가 일본어라고 합니다. 우리말은 ‘생산’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언론이나 방송에서 심지어 우리들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계속 쓰고 있으니 후자가 오히려 어색하게 들립니다. (간혹, 사극에서 후자의 단어를 쓰긴 합니다만) 이 단어 이외에 다른 말도 우리말로 굳어져 오랜 시간 동안 사용이 돼서 다시 되돌리기가 힘들어 보입니다. 언어라는 것이 시간이 가면서 바뀌기 하지만 그 바뀐, 또 바뀌고 있는 이유가 영 찜찜하죠.

로쟈 2010-09-12 08:48   좋아요 0 | URL
일본에서 건너오거나 경우한 말을 다 배제하는 건 불필요할 뿐더러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좀 의식하고 가려쓰고 하는 게 필요하다고 보는 쪽이에요. 영어식 구문도 우리말에 이미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하다못해 인칭대명사만 해도 그렇고, 구두법만 해도 그렇죠. 그렇더라도 '나쁜 번역투'를 가려내고 삼가하는 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술관에서 인문학을 만나다

저녁을 잘 먹고 소화 안 되는 기사를 읽었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미술평론가 아서 단토의 신작이 출간된 건 반갑고, 게다가 그 책이 지난달에 기대를 표한 <앤디 워홀>(2009)이라면 놀라울 정도인데, 정작 '번역서'라고 나온 <앤디 워홀 이야기>(명진출판, 2010)는 엉뚱하게도 '청소년 롤모델' 시리즈의 하나로, 앤디 워홀의 전기를 소설처럼 꾸며서 간추린 책이다.   

 

청소년들에게 21세기가 원하는 롤모델을 소개시켜주는 '청소년 롤모델' 제10권 '앤디 워홀 이야기'. 미국 원로 미술평론가이자 예술철학자 아서 단토가 일상과 예술, 그리고 산업 사이를 가로막는 벽을 허문 '팝 아트'의 대가 앤디 워홀의 창조적 인생 속으로 청소년들을 초대하고 있다. 류머티즘 무도병으로 인해 병약했으나 특유의 예술 세계의 바탕을 다져간 어린 시절부터 따라간다. 특히 앤디 워홀의 인생 속에는 21세기를 움직이는 가장 핵심적 가치인 '다양성'과 '컨버전스'가 생생하게 살아숨쉼을 보여준다. '멀티 플레이 창조인'을 꿈꾸는 청소년들에게 롤모델이 되어줄 것이다. 앤디 워홀은 자신이 사는 자본주의 시대에 걸맞게 예술과 비즈니스를 적극적으로 결합하여 상업미술가이자 순수미술가로서 성공을 거두었다. 스스로를 '예술 공장 공장장'이라고 부르면서 회화부터 영화까지 풍부한 예술 작품을 남겼다. 예술에 대한 고정관념도 부수어내, 평범한 사람들도 그것을 마음껏 향유하도록 인도했다. 특히 코카콜라 병마저도 예술 작품으로 탄생시키는 등 평범한 것을 예술로 승화시켜 새로운 것으로 창조시켰다.(아시아경제) 

일단 이런 소개기사에서 "미국 원로 미술평론가이자 예술철학자 아서 단토가 일상과 예술, 그리고 산업 사이를 가로막는 벽을 허문 '팝 아트'의 대가 앤디 워홀의 창조적 인생 속으로 청소년들을 초대하고 있다"는 말은 '작문'이거나 '거짓말'이다. 원저의 서문을 읽어보니(물론 번역본엔 번역돼 있지도 않다) 단토는 그런 걸 의도하지도 않았다. 여러 훌륭한 전기를 토대로 자신의 예술철학에 영감을 준 워홀의 작품세계를 재조명하는 것이 책의 취지다.  

그렇게 해야 '팔리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정식으로 원저자와 판권계약을 한 책인지, '아서 단토 지음'이란 말은 무슨 의미인지 궁금하다. 편집자주에 따르면, "원저작물에 어려운 부분이 많아 엮은이를 따로 두었"다. 차라리 편집자를 '저자'로 해서 책을 냈으면 훨씬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어차피 원저와는 관계가 없는 책이니까. 청소년 롤모델로서 '앤디 워홀'이 불만스럽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런 책은 얼마든지 나올 수 있고, 나는 말릴 생각이 전혀 없다. 하지만 불만은 왜 엉뚱한 저자의 책을 망쳐놓느냐는 것이다(정식 계약을 한 책이라면, 단토의 이 책은 다시 번역될 수 없다. 최소한 수년간은). 이런 게 출판의 '롤모델'인가?  

기대했던 책이 어이없게 출간돼 더없이 불쾌하다... 

10. 0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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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4 20: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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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4 2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4 2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4 22: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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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4 22: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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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4 22: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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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4 23: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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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4 2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4 2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poptrash 2010-08-15 17: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비밀 댓글들만 있어서 이어지는 내용이 더 궁금해졌어요!

로쟈 2010-08-15 17:13   좋아요 0 | URL
몇분이 비밀글로 달아놓시는 바람에 저도...

미미달 2010-10-24 1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작을 읽어보지 않아서 확실한지는 모르겠지만, 소설처럼 꾸민것은 아니구요. 그냥 간추리기만 했습니다. 차라리 소설같았으면 재미라도 있었겠지요. -_-;ㅋ
 

이번주에 나온 가장 '묵직한' 책은 막스 베버의 사회학 고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길, 2010)이다. 출간은 예고된 것이긴 한데, 해제와 역주가 원서의 두 배가 넘는 '정본 주석판'이다(일반 독자를 위해서는 조금 더 저렴한 보급판이 나오면 좋겠다). 책은 아직 입수하지 못했지만 '올해의 번역서' 후보로 올려놓음직하다. 흠, 이런 책은 황석영의 <강남몽>(창비, 2010)과 같이 읽어줘야 하나(한국 자본주의의 정신을 낳은 '윤리'는 무엇이었나?)...  

한겨레(10. 08. 14) 금욕주의, 자본주의의 정신적 힘이었다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사진·1864~1920)의 주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하 ‘윤리와 정신’)이 베버 전공 사회학자 김덕영 독일 카셀대 교수의 번역으로 새로 나왔다. 이번에 출간된 <윤리와 정신>은 200자 원고자 850장에 이르는 상세한 옮긴이 해제와 방대한 역주를 거느리고 있어 분량이 원서의 두 배가 넘는다. 전공 학자가 자신의 학문적 역량을 총동원해 이루어낸 고전 번역이자 우리 사회과학 분야에서는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꼼꼼한 주해 작업의 모범적 사례로 꼽힐 만한 작업이다. 옮긴이는 이와 함께 베버의 후속 연구논문인 ‘프로테스탄티즘의 분파들과 자본주의 정신’도 번역해 보론으로 실었다.  



베버는 흔히 현대 사회학의 창시자로 거론되지만, 대학 시절 그의 전공은 법학이었고 강단에서는 법제사와 경제사를 동시에 가르쳤다. 생애 말년에야 뮌헨대에 사회학 교수로 부임했으나, 이때에도 경제사·경제학 교수직을 겸했다. 말하자면 베버의 학문은 학제간 연구를 통해 발전했으며, 인문·사회과학을 포괄하는 통합과학의 성격을 띠었다. 그의 얼굴과도 같은 저작인 <윤리와 정신>이 바로 그런 통합과학적 연구의 결과물이다. 베버는 이 저작에서 신학·경제학·역사학은 말할 것도 없고 철학·문학·문헌학·심리학 같은 여러 학문의 도움을 받아 이론의 건축물을 세웠다.

이 책은 제목이 알려주는 대로 근대 자본주의 정신이 형성되는 데 프로테스탄티즘이라는 금욕적인 종교적 이념이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를 추적해 밝히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근대 자본주의의 발흥을 가져온 시민계급의 엄격한 직업정신이 어디에서 기원했는지 밝히는 것이 이 책의 내용인 셈이다.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 윤리가 시민계급의 직업정신을 낳았다고 베버는 말한다.

눈여겨볼 것은 이 책의 주제어 가운데 하나인 ‘자본주의’에 관한 베버의 독특한 생각이다. 베버는 자본주의가 “우리 근대인의 삶의 운명을 가장 강력하게 결정하는 힘”이라는 일반적인 관념을 논의의 전제로 삼는다. 그러나 그는 자본주의를 영리욕이나 화폐욕과 동일시하는 통념에는 단호하게 반대한다. “영리욕, 이윤 추구, 화폐 취득, 그것도 가능한 한 많은 화폐 취득을 추구하는 것 자체는 자본주의와 전혀 상관이 없다.” 베버는 자본주의를 ‘탐욕’ 자체와 동일시하는 관점을 ‘천진난만한 것’이라고 규정한다. 자본주의는 “오히려 이런 비합리적인 충동의 억제, 또는 적어도 합리적 조절과 동일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무제한의 탐욕을 동력으로 삼아 나아가는 체제라기보다는 그 탐욕을 합리적으로 억제하고 조절하는 체제라는 것이 베버의 관점이다.  

이 책에서 단적으로 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의 주체로 지목하는 것이 칼뱅주의와 거기서 발전한 영국의 청교주의(퓨리터니즘)다. 중세 가톨릭에 대항해 기독교를 개혁한 사람이 마르틴 루터(1483~1546)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베버는 개념사 연구를 통해 루터가 근대적 의미의 ‘직업 개념’을 창출했음을 밝힌다. 루터는 기독교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베루프’(Beruf, 영어 calling)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 단어는 ‘직업’이라는 뜻과 ‘소명’이라는 뜻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직업이 신의 소명, 부르심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직업 정신이 바로 근대 자본주의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베버는 루터주의 안에 가톨릭의 전통적인 관념이 남아 있었다고 말한다. 루터주의는 중세 가톨릭의 세계관과 완전한 단절을 이루지 못했다.  

장 칼뱅(1509~1564)의 ‘예정론’에 와서야 가톨릭의 전통적 관념이 완전히 씻겨나갔다. 누가 구원받을지 누가 버림받을지 이미 영원으로부터 예정돼 있어서 그 어떤 노력으로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이 칼뱅의 예정론이다. 이 예정론이 초래한 심리학적 결과는 “각자 개인이 직면하는 전대미문의 내적 고독감”이었다고 베버는 말한다. “종교개혁 시대의 인간들은 영원으로부터 확정된 운명을 따라 고독하게 자신의 길을 가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아무도 그들을 도와줄 수 없었다.” 설교자도, 성례전(성찬식·세례식)도, 교회도 도울 수 없다. “심지어 신조차도 도울 수 없다.” 처음부터 결정된 것을 신이 뒤늦게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칼뱅주의와 루터주의의 차이점이었다. 루터주의는 교회에 가고 예배를 봄으로써 구원받을 가능성을 열어 놓았으나, 칼뱅주의는 이 구원의 문을 닫아버렸다. 여기에서 베버 사회학의 핵심적 개념인 ‘세계의 탈주술화 과정’이 등장한다. 인간이 주문·기도·예배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주술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는 것이 ‘세계의 탈주술화 과정’이다. 베버는 이 과정이 헬레니즘 시대의 과학적 사고와 더불어 진전되다가 마침내 칼뱅주의에 이르러 완결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진정한 청교도들은 심지어 장례식에서도 일체의 종교적 의식의 흔적을 배척했다.” 구원과 저주가 태초에 정해졌기 때문에 인간의 어떠한 노력도 간청도 쓸모없다는 생각에서 주술적인 사고와 행위를 모조리 거부했던 것이다.

이런 예정론적 사고방식이 낳은 결과가 투철한 직업윤리와 노동윤리였다는 것이 베버의 통찰이다. 신의 소명, 곧 직업에 헌신하여 이윤을 얻고, 이 이윤을 조금도 낭비하지 않고 계속 사업에 재투자함으로써 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이 세상 사람들이 할 일이라는 것인데, 이를 통해 칼뱅주의자들은 신의 은총을 확신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근면한 노동과 금욕주의적 생활의 결과인 이윤 획득과 사업 번창이 신의 구원을 확증해주는 주관적인 근거였다. 바로 여기서 자본주의 정신이 형성됐다고 베버는 말한다. 수도원 담장을 넘어 세속으로 나온 금욕주의가 바로 자본주의를 밀고나간 정신적 힘이었던 것이다.(고명섭 기자) 

10. 08. 14.  

P.S. 역자 김덕영 교수에 대한 소개와 인터뷰도 덧붙인다.   

김덕영(52) 교수는 베버와 인연이 깊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읽었던 그는 베버에 대한 호기심에 끌려 사회학과를 택했다고 한다. 독일로 유학을 떠난 것도 베버를 공부하고 싶다는 열망이 가장 큰 이유였다. 1993년 독일 괴팅겐대학에서 베버 사회학에 대한 지성사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5년 뒤에는 카셀대학에서 ‘막스 베버와 게오르크 지멜 비교 연구’로 하빌리타치온(독일 대학교수 자격)을 획득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베버를 연구했던 그는 비교 연구 대상이었던 지멜의 책들은 여러 권 번역했지만, 베버 책 번역은 계속 외면했다고 한다. 1999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번역을 제안받았을 때도 대답은 “할 수 없다”였다. “이 책을 번역하기에는 나의 지적 훈련에 결정적인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가장 큰 범주가 ‘신학’인데, 그 분야에 대해 거의 공부가 돼 있지 않았던 것이다. 김 교수는 결국 뒤늦게 다시 신학 공부를 시작했고, 2007년쯤에는 이 책의 번역에 도전할 만큼 루터 이후 서구 기독교 신학에 익숙해졌다고 한다.

김 교수는 베버의 이 책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여러 종의 영어 번역본과 프랑스어 번역본을 참고했는데, “결정적인 문제에서 영어 번역본에 의존하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적이 여러 번 있었음”을 고백했다. 중요한 개념이 엉터리로 번역돼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 체험을 통해서 “외국의 지식을 수용하고 번역하는 경우에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원어로 해야 한다”는 평소의 생각을 다시 확인했다고 말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스스로를 진정한 학문으로부터 배제하고 소외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영어로 된 ‘Max Weber’를 수용하고 번역하면 ‘맥스 웨버’는 논할 수 있을지 몰라도 ‘막스 베버’는 논할 수 없을 것이다. 곧 영어화되고 미국화된 베버 논의에 머물 뿐 진정한 의미의 베버 논의는 불가능할 것이다.”

김 교수는 이 책을 번역한 동기가 “고전 번역을 통해 우리 문화자본을 축적하는” 데 있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그는 이 책이 한국 사회의 자기 성찰의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랐다. 한국 자본주의가 ‘천민자본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이 책에서 찾아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요컨대, 이 책은 실천적 측면에서 한국 사회의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역자의 교수자격취득논문 ‘막스 베버와 게오르크 지멜 비교 연구’가 아마도 <짐멜이냐 베버냐?>(한울, 2004)의 바탕인 듯싶다. '베버리언'으로서의 면모는 평전 <막스 베버, 이 사람을 보라>(인물과사상사, 2008)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베버에 대한 조금 다른 시각의 비판을 담은 책으론 키어러 앨런의 <막스 베버의 오만과 편견>(삼인, 2010)도 참고해볼 만하다(내가 반경 2미터 내에서 한달 넘게 못 찾고 있는 책이다).   

막스 베버와 뒤르켐, 마르크스 등 고전 사회학자들의 자본주의론을 비교한 책으론 앤서니 기든스의 <자본주의와 현대사회이론>(한길사, 2008)이 요긴하겠다. 특히 뒤르켐과의 비교는 지식인마을 시리즈의 <뒤르켐 & 베버>(김영사, 2007)도 참고할 수 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까지 정본 번역이 나오니까 욕심이 나는 것은 뒤르켐의 <자살론> 번역이다. 번역본이 없지는 않지만, 결정판이라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뒤르켐 전공자들이 '자존심'을 찾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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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4 13: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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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4 17: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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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5 00: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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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6 22: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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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6 15: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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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 2010-08-17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믿을 만한 번역본이 나왔군요. 문예출판사 본을 갖고 있었는데, 김덕영 번역본을 구매하게 되면 비교해 볼 수 있겠습니다. 개인적으론 <프로테스탄트..>가 중요한 참고문헌이긴 하지만 어마어마한 아우라를 가진 고전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외국의 지식을 수용하고 번역하는 경우에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원어로 해야 한다”는 말에 원칙적으로는 동의하지만 '어떠한 일이 있어도'라는 말이 가져올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리스어를 몰랐고 많은 경우 아랍어에서 중역한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었지만 그의 아리스토텔레스 이해를 무시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독일관념론을 중요한 전거로 삼았던 프랑스 현대철학자들이 과연 독일 관념론에 대한 '문자 그대로의 이해'에만 치중했다면 실존주의-구조주의-후기구조주의로 이어지는 창조적인 탐구가 가능했을지도 의문입니다. 독일 관념론의 창조적인 '오독(?)'이 프랑스 현대철학이 아닐까 싶기도 하구요. 물론 독일의 관념론도 대륙합리론과 영국 경험론의 창조적인 오독일 수도 있겠지요.^^ 같은 나라에서도 하이데거는 후설의 현상학을 오독했고, 아도르노는 벤야민을 오독했지요. 지젝의 철학도 헤겔-마르크스-라캉의 창조적 오독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물론 '정확한 읽기'는 학문적 깊이와 창조적 사고의 필요조건이긴 하지만 전자가 후자를 바로 담보해 주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할 필요도 없이 이러한 단순한 원리는 대부분 알고 계시지만 전자에 매몰되서 후자를 망각하는 경우가 종종있는 듯 합니다...

영어가 아닌 언어로 된 고전의 번역본에 상투적으로 붙는 이야기 중의 하나가 '영어본에 오류가 있다'인데 이도 너무 과장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원어로 된 것을 직접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제어인 영어본을 통한 이해로도 충분히 깊이있는 학문적인 논의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영어본과는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정도가 족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로쟈 2010-08-17 10:00   좋아요 0 | URL
네, 철학사의 오독/오해에 대해선 지젝이 지적한 바 있죠. '정독'이 무엇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번역관계로 보자면 의미의 변형을 포함하지 않는 번역이란 불가능한데다 무의미한 것인데요. 문제는 생산성이죠. 얼마나 멀리 가느냐는. 못난 부모에게서 잘난 자식이 나왔다고 자식을 탓하는 건 기이한 일이겠죠. 넌 부모를 '오독'했어?...
 

집안일로 지방에 다녀왔다. 직행버스를 타고 올라오는 길에 들른 대천휴게소에서 잠시 바람에 실려온 바다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올여름 바다와의 '인연'은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일 듯싶다. 하긴 가뭄과 산불로 '생지옥'이라는 모스크바에서 '휴가'를 보내지 않은 것만도 다행으로 여겨야 할는지 모른다. 내일자 리뷰기사들을 보다가 <하버드, 철학을 인터뷰하다>(돌베개, 2010)의 오역 지적이 기사화된 걸 읽었다. '인문학 가뭄'으로 편집자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출판계 현실을 문제 삼고 있다. 역자와 출판사쪽에서 번역을 재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으로 '번역시비'는 일단락짓는다.  

경향신문(10. 08. 14) ‘인문학 가뭄’이 부른 오역 홍수

묵직한 인문·사회과학서를 전문으로 내고 있는 한 출판사는 지난해 말쯤 외국 유명 학자의 두툼한 책을 번역해 출간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어느 전문가가 원서와 대조해서 읽고 번역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한 것이다. 번역자는 대체로 이 지적들을 수긍했다.

일부를 고치는 수준이 아니라 번역문을 전체적으로 재검토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남아 있는 책들, 그리고 이미 팔린 책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초판을 적게 찍긴 했지만 재고가 꽤 많이 남아있는 상태였다.

출판사는 재고를 폐기하고 품절시켰다. 그리고 이미 팔린 책들은 구매자를 파악해 새로 책이 나오면 교환해 주기로 약속했다. 다행히 인터넷 서점을 통해 팔린 경우가 많아 서점을 통해 구매자를 찾는 데는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이 출판사 관계자는 “적지 않은 부담이었지만 그간 쌓아온 출판사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당연한 결정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였다. “인문학 전공자의 층이 엷어지면서 심도 있는 책들을 번역할 사람도, 교정·교열 및 편집 능력을 제대로 갖춘 출판 편집자도 갈수록 줄어들고 있습니다. 특히 출판사들이 편집자들에게 전문성보다는 ‘실적’을 강조하는 문화가 정착되고 편집자들의 이직이 잦아지면서 당연히 걸러졌어야 할 오·탈자나 비문, 오역이 방치되는 사례가 늘고 있습니다.” 다른 출판사의 편집주간도 비슷한 얘기를 했었다. “편집진이 자주 교체되고 젊어지면서 예전의 꼼꼼함과 치열함이 덜하다고 여겨지는 건 대부분의 출판사들이 가진 고민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나눈 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번역에 관한 시비가 또 붙었다. 활발한 강연과 저술·번역, 그리고 날선 비평으로 유명한 철학자 강유원씨가 다른 한 명의 공역자와 번역해 최근 출간한 책에 여러가지 오류가 있다는 지적이 공개적으로 제기된 것이다. 전부터 오역 사례를 많이 지적했던 서평가 ‘로쟈’는 이 책을 원문대조해 곳곳에서 문제점을 찾아냈다며 그 내용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다. 강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라온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그가 지적한 것 중에서 명백한 오역은 쇄를 거듭할 때 고치려 한다”고 밝혔다. 몇몇 문장은 고치겠다고도 했다. 이 책을 출판한 돌베개출판사 역시 “강씨가 번역문을 재검토한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오자와 탈자, 비문 등은 책이건 신문이건 활자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체로선 숙명과 같은 것이다. 아무리 글쓰기를 업으로 삼은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인간인 이상 오·탈자와 비문은 발생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번역 역시 마찬가지다. 굵직한 번역서가 나올 때마다 의역이네, 직역이네, 오역이네 하는 시비가 붙곤한다. 이 또한 번역서의 숙명이라면 숙명이다.

특정인과 특정 출판사를 면박주고 싶은 뜻은 결코 없다. 번역자와 편집자가 나눠질 책임의 무게도 저울질 해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이 이야기되고 곱씹어져야 하는 것은 앞서 소개한 우려 때문이다. 오죽하면 과거 이윤기씨로 하여금 <장미의 이름> 개역판을 내도록 만든 ‘고수’인 강씨와 차분하게 질좋은 책을 만든다는 평가를 받는 돌베개의 만남에서마저 이런 일이 벌어졌느냐는 안타까움과 우려 말이다.(김재중 기자) 

10. 08. 13.  

P.S. 참고로 기사의 서두에서 언급된 책은 짐작에 조반니 아리기의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길, 2009)일 텐데, 공개적인 리콜이 이루어졌던 것일까? 내가 갖고 있는 초판본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알아봐야겠다(나는 알라딘을 통해 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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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란 무엇이고, 번역이란 무엇인가

<하버드, 철학을 인터뷰하다>(돌베개, 2010)를 겨우 다 읽었다. 무더위에 다른 일들과 겹쳐서이기도 했지만 별로 흥미를 끌지 않는 분석철학자들의 인터뷰가 후반부에 줄줄이 배치돼 있어서 진도가 빨리 나가지 않았다. 게다가 내달에 나올 서평집('책을 읽을 자유'란 타이틀이다) 교정도 보고 있는 형편이어서 집중적으로 책을 읽진 못했다. 중간에 건너뛴 법철학자 앨런 더쇼비츠 편을 맨마지막에 읽었는데(찾아보니 그의 책도 두 권이 국내에 소개됐다), 그래도 이 번역서에서 가장 무난하게 읽히는 장은 존 롤스와 더쇼비츠의 인터뷰이다(이 두 인터뷰는 원서와 대조하지 않아도 읽는 데 별로 무리가 없다).  

 

나는 원서의 배열대로 차라리 존 롤스 편이 맨앞에 나왔더라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롤스에 이어서 퍼트남, 에코, 맨스필드 순이다). 일단 한 동료철학자에 따르면 롤스는 "우리 시대에 둘도 없을 훌륭한 사람"이다. 인터뷰에서도 그의 겸손한 인품이 확인되는데, 가장 인상적인 건 철학을 공부하고 싶어하는 학생들에게 주는 그의 충고다. 

"혹 그럴 기회가 있더라도, 제가 학생들에게 철학에 뛰어들라고 권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철학의 결점을 더 강하게 부각시킵니다. 그래도 강렬히 하길 원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요. 그렇지 않으면 철학에는 고난과 시련이 있기 때문에 철학에 뛰어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철학을 잘하는 사람은 적어도 사회의 기준으로 보면, 다른 일을 더 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철학에서 얻는 진정한 보상은 개인적이고 사적인 것이라는 점을 이해해야만 합니다."(155쪽) 

이 얼마나 훌륭한 충고인가! 학생들이 철학을 하겠다고 하면 최대한 말리겠다는 철학교수가 사실 우리 주변에도 없는 건 아니지만 롤스 정도 되는 철학자의 말인지라 감동적이다. 이 책에서 건질 수 있는 첫번째 교훈이다. 그리고 두번째 교훈은 더쇼비츠가 전해준다. 이번엔 사회적이고 공적인 교훈이다. 변호사계에서는 '성자 유다'로도 불릴 만큼 패소한 소송을 뒤집기로도 유명한 변호사 겸 법학자인데 미국의 사법체제에서 개선이 필요한 측면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판사와 사법부입니다. 정의를 믿지 않고 속임수를 쓰며 거짓말을 일삼는 냉소적인 판사가 너무 많을 뿐 아니라 그들을 모든 방면에서 지능적으로 부정을 저지릅니다. 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선출되고 재선출되며, 임명되고 승진된다는 점입니다. 그러한 결합은 재앙의 징조입니다."(211쪽) 

아무리 짐작은 하더라도 이 역시 미국 최고의 변호사이자 법학자라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얘기라 감동적이다. 아마도 우리의 검찰을 미국의 사법부에 견줄 만하겠다. 그렇다면 왜 부적적할 판사가 선출되는 거냐는 질문에 대해 더쇼비츠가 드는 이유는 '인맥'이다(우리의 사법부는 미국에 비하면 그래도 좀 낫지 않나 싶다. '인맥'에 좌우되는 검찰과는 달리 말이다).  

"이 나라의 많은 지역에서 연방정부 판사가 되는 것은 상원의원 친구를 둔 썩 좋지 않은 변호사가 되는 것을 의미하며, 주정부 판사가 되는 것은 주지사를 친구로 둔 썩 좋지 않은 변호사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판사를 뽑는 과정을 보면 혐오스럽습니다. 이 세상에 문명화된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최악의 과정 중 하나일 겁니다."(211쪽) 

미국의 판사들은 아마도 상원의원의나 주지사 같은 이들이 추천하는 모양이다. 하니 그런 인맥을 탄 '질 낮은' 판사들이 대거 포진하게 됐고, "모든 방면에서 지능적으로 부정을 저지"른다는 얘기. 왠지 좀 안쓰러우면서도 고소하지 않은가. 여하튼 이 두 대목이 내가 읽은 이 책의 '건더기'다... 

나머지 장들을 읽으면서는 불편하거나 불쾌한 대목이 많았는데, 잘 읽히지 않는 대목들이 불편의 출처라면 어이없는 오역들은 불쾌의 원인이다. 굳이 불쾌하다고까지 한 건 너무도 부주의하거나 불성하게 옮겨졌기 때문이다. 공역자의 지명도와는 전혀 걸맞지 않는데, 그가 <인문 고전 강의>(라티오, 2010) 같은 수준급 교양서의 저자라는 걸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요컨대, 나로선 <인문 고전 강의>의 저자와 <하버드, 철학을 인터뷰하다>의 역자가 동일인이라고 믿기 어렵다. 그건 마치 '인지적 모순'처럼 여겨진다(합리적인 설명은 그가 일부 번역과 감수 정도에 관여했을 거라는 것이다). 롤스의 유명한 제안대로 '무지의 베일'을 쓰고서 이 두 책을 냉정하게 읽고 판단해본다면, 과연 두 사람이 동일인이란 결론을 얻을 수 있을까? 나는 회의적이다. 

지난번의 오역 지적에서 나는 이러한 인상을 충분히 피력했다고 생각했지만, 사람에 따라선 '공명심'에 눈이 어두운 '어설픈 번역비평가' 행세로도 비친 모양이다('번역비평'이란 말이 고깝다면 '번역시비'라고 불러도 좋겠다. 나는 '인터넷 서평꾼'에 덧붙여 '번역시비꾼'이다). '공개적인' 비판에 유감을 표한 분들도 계신데, 이것도 '논쟁'이라고 한다면 굳이 비공개로 진행할 이유가 없다. 또 <장미의 이름> 번역 교정과 관련한 미담 사례를 제외하면 강유원씨 자신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또한 다른 번역서의 오역에 대해서 공개적인 비판을 서슴지 않았으니까. 더불어,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번역자가 아니라 독자다(나는 번역에 대한 시비나 비판을 '소비자 권리운동'이라고도 불렀다).  

나는 유감의 사유를 적시했고, 그에 대한 이견이나 반박은 역자나 출판사쪽에서 또한 알아서 제시하면 될 것이다(쇄를 다시 찍을 때 교정할 수도 있고, 정오표를 만들어 온라인에 올려놓을 수도 있다. 방법은 여러 가지다). 판단은 이 책에 관심을 둔 독자들이 알아서 할일이고. 하지만 공연한 '침소봉대'로 독자를 선동한다는 비난도 없지 않아서 유감의 근거를 조금만 더 들추도록 한다. "강의와 글쓰기, 번역을 통해 공동 지식과 공통 교양의 확산에 힘쓰고" 있는 역자에게 누를 끼치는 게 돼 유감이지만, 나는 '하버드'와 '강유원', 그리고 '철학'의 이름값을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오류들은 충분히 지적되고 교정돼야 한다고 생각한다(솔직한 생각은 전공자의 감수하에 개역본이 나와야 한다는 쪽이다). 길게 늘어놓을 것 없이 바로 몇 가지만 추가로 지적한다(시작도 하기 전에 벌써 눈이 침침하군. 공연한 '공명심'은 너무 많은 걸 희생하게 만든다). 코넬 웨스트까진 넘어간 걸로 하고, 스탠리 카벨에 대한 소개를 보자.   

"스탠리 카벨은, 비트겐슈타인이 우리에게 일상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대체하려고 전념했던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문제들을 자신의 작업의 주요 주제로 삼았다."(75쪽) 

이 번역문이 말해주는 건 무엇인가? 일단 (1)비트겐슈타인은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문제들을 우리에게 일상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대체하려고 했다". (2)카벨은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문제들을 자신의 주요 주제로 삼았다." 맞는가? 이렇게밖에 읽을 수 없다면 두 명제 사이의 관계는 역접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이러했다, 하지만 카벨은 저러저러했다. 하지만 당장 이어지는 문장은 "카벨은 비트겐슈타인이 전념한 일에서 해방의 의미를 찾으면서, 그를 철학의 거품을 빼 종말에 이르게 한 사상가라기보다는 새로운 대화를 펼친 매력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철학자로 읽는다." 그런데, 어떻게 비트겐슈타인과는 정반대의 작업을 할 수 있는가? 이런 건 자연스런 의문이다. 그리고 확인해보면 대부분 오역에서 비롯된 것이다. 원문은 이렇다.  

"A guiding theme in Stanley Cavell's work is Wittgenstein's commitment to replacing metaphysical or philosophical problems with our own ordinary needs."  

그러니까 'A guiding theme'의 보어가 Wittgenstein's commitment'인 문장을 번역문은 'metaphysical of philosophical problems'를 보어로 잘못 옮긴 것이다(결과적으론 정반대의 뜻으로 옮긴 게 된다). 굳이 이렇게까지 자세히 언급하는 것은 콰인의 주장을 빌자면 '번역의 불확정성'을 이유로 이런 경우에도 오역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반박하는 분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냥 복잡하면 다 생략하고, "카벨의 주요 주제는 비트겐슈타인이 전념하던 문제들이다."라고만 해도 됐을 것이다. 독자를 그렇게 고려한다면 말이다.   

카벨에게 주어진 첫번째 질문의 화제는 그가 정년을 앞두고 신참 교수와 함께 자신의 첫번째 책 <이성의 주장>을 강의했다는 것인데, 그것은 비트겐슈타인과의 결정적인 만남으로 되돌아간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그렇게 되돌아간 이유는 무엇이고 중요한 면은 무엇입니까?"라는 게 질문이다. 이에 대해 카벨은 그 책의 프랑스어 번역본(1996)을 준비하면서 자신의 책에 대해 새롭게 사유할 수 있었다는 것과 은퇴 전 마지막 학기를 기념하고 싶었다는 이유를 댄다.  

"<이성의 주장>은 저의 박사논문으로 깊숙이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고 제가 가장 나중에 한 작업의 일부이기도 하기 때문에, 하나의 텍스트만 해야 한다면 그 책을 할 겁니다.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고요."(79-80쪽)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는 대목이지만, 번역이 얼마나 부주의한가를 보여주는 한 가지 사례에서 인용했다. 원문은 가정법으로 하나의 텍스트만 골라야 했다면 그 책이어야 했다고 얘기한 후에 "I'm grateful it happened."라고 덧붙인다. "그렇게 돼서 감사하다."는 뜻이다. 그러니 "그렇게 되었으면"이 아니다. 강의는 1996년에, 이 인터뷰는 1997년에 이루어졌다. 

이 답변 이후에 연이어 질문자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에 대해선 언급하면서 다른 후기 저작들은 업급하지 않는 이유를 묻는다. 카벨은 이렇게 답한다.   

"첫 질문에 대해선 답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이성의 주장>에 대한 강의를 생각하지 못한 것은 저의 텍스트가 <철학적 탐구>에 나온 구절들에 대한 주석이라는 한계 때문이었고, 그것 때문에 저는 비트겐슈타인으로 되돌아갑니다. 어떤 점에서는 제가 비트겐슈타인의 글에서 정말 떠나본 적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항상 떠날 뻔하거나 떠나려고 했습니다."(80쪽)   

카벨과 비트겐슈타인이 어떤 관계였는지 굳이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일단은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읽을 수 있어야겠다. '비트겐슈타인으로 되돌아갑니다' -> '비트겐슈타인을 떠나본 적이 없습니다' -> '비트겐슈타인을 항상 떠나려고 했습니다', 이런 스토리라인인가? 카벨의 경우 여기서 맞는 건 '비트겐슈타인을 떠나본 적이 없습니다'뿐이다. 나머지는 다 엉터리 번역이다. 원문과 대조해본다. 

"I didn't respond to that part of your first question. I don't find that teaching the course on The Claim of Reason, for all the extent to which tht text of mine is a commentary on passages from the Investigations, is taking me back Witttgenstein. Probably the reason is that in a sense I've never really left Wittgenstein's writing. It is always close or always about to explode." 

"I didn't respond to that part of your first question."란 첫문장을 번역문은"첫 질문에 대해선 답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옮겼는데, 왜 그렇게 시제를 안 맞춰주는가. 이건 앞서의 첫 번째 질문(비트겐슈타인에게 되돌아간 이유는 무엇이고 중요한 면은 무엇입니까?)에 대해서 대답을 다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대목은 여전히 첫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그리고 카벨은 자신의 책 <이성의 요청>에 대해 강의하면서, 그 책이 <철학적 탐구>에 대한 주석들을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트겐슈타인에게 되돌아간 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니 "저는 비트겐슈타인으로 되돌아갑니다"라고 한 건 거꾸로 옮긴 것이다.  

왜 되돌아간 게 아닌가? 떠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당연한 논리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 "It is always close or always about to explode." 이게 어떻게 해서 "항상 떠날 뻔하거나 떠나려고 했습니다"란 뜻이 되는가? 어이없는 일이다. 주어 'It'이 가리키는 건 앞에 나온 'Wittgenstein's writing'이다. "비트겐슈타인의 글은 항상 가까이에 있었어요, 언제나 폭발 직전이었죠." '폭발 직전이었다'는 말을 나대로 의역하면, "언제나 내게 엄청난 영감을 제공해주었다" 정도다. 요컨대, 번역문은 카벨과 비트겐슈타인의 관계에 대해서 제대로 전달해주는 바가 거의 없다.  

그럼, 특별히 영화와 오페라에도 많은 관심을 내보인 카벨의 또 다른 면모에 대해선 어떤가. 오페라의 어떤 면에 철학적으로 관심을 갖느냐는 질문에 카벨은 오페라가 철학의 초점을 이동시킨다며 이렇게 대답한다.   

"이런 의미에서 오페라가 철학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오페라가 이전보다 더 철학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페라는 주요하게는 니체와 키르케고르 같은 철학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우리는 데카르트 이전 세대가 일상 언어의 의미를, 세계와 우리의 관계를 잘못 조작하는 것으로 표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셰익스피어의 위대한 비극들이 출현한 10년 동안에 오페라가 생겨난 것은 인간의 목소리에 대한 찬양이 생겼기 때문입니다."(90쪽) 

마지막 문장의 원문은 이렇다.  

"But the fact of opera and the celebration of the human voice, so one could say, in the call for opera during the decade which saw the appearance of the great tragedies of Shakespeare, a generation before Decartes expressed his sense of ordinary language as falsifying our relation to the world, means that my own sense of philosophy, in tracing the exiling of the human voice in philosophy, is something I have thought that fact of opera might bear on." 

강조한 문장의 주어를 번역문은 '데카르트 이전 세대'라고 했지만 내가 읽기엔 그냥 데카르트다. 세익스피어(1564-1616)의 주요 비극은 데카르트(1596-1650)의 저작들보다 한 세대쯤 전에 발표되었다. 그래서 이 삽입절은 "일상언어가 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오도한다는 생각을 데카르트가 발표하기 한 세대 전이죠" 정도의 뜻이다. 데카르트 이후 '인간의 목소리'는 (근대)철학에서 배제되었는데, 근대철학보다 한 세대 전에 출현한 오페라는 그 인간의 목소리를 보존하고 있는 예술장르다. 오페라와 철학의 문제적 관계가 성립되는 지점이다. 더불어, 카벨이 오페라에 관심을 갖는 이유다.  

"오페라는 미합중국만이 창조할 수 있는 높은 대중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고급한 대중예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뮤지컬코미디, 재즈, 영화 같은 것에 대해 저에게 묻는 것은 미합중국에 대해 관심을 갖지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과 같으며, 그런 물음은 저의 현재 저작 전반에 관한 물음인 것입니다."(91쪽) 

오역만 지적하는 건 소모적이므로 이런 대목도 읽어둔다. 여느 '직업적' 분석철학자들과는 다른 카벨의 독특한 문제의식과 관심영역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카벨은 내가 관심을 갖는 철학자 범주에 들어간다. 에머슨과 소로에서 시작된 미국 철학의 전통에 대한 의견도 참고할 만하다.  

"저는 미합중국에서 철학과 문학이 제가 잘 알고 있는 현대의 어떤 문화에서보다 서로 다른 관계를 맺으며 존재하기를 기대합니다. 문학과 철학에서 미합중국적인 차이를 동시적으로 고안하려 했던 에머슨이 필요로 했고 가능하게 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그 이후로 미합중국의 철학과 문학이, 특히 미합중국의 문학이 얼마나 멀어지게 되었는지 알게 된다면 에머슨은 틀림없이 충격을 받을 겁니다."(94쪽) 

인용문의 마지막 구절은 '만약 -한다면, -할 것이다' 구문인데, 뒷부분은 "then you must be struck by the remoteness of literature, especially of Americn literature, from American philosophy since then."을 옮긴 것이다. 여기서 충격을 받은 건 'you' 곧 '당신'이나 '우리'다. '에머슨'이 아니라. 이것도 고차원적인 '의역'인가.   

여느 분석철학자들과는 다른 길을 걷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카벨이 로티처럼 분석철학계를 박차고 나온 것은 아니다. 카벨과 분석철학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제가 처음부터 철학에 전념한 것은 어느 정도는 제가 항상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저의 고민을 쓰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저작, 특히 영어권의 분석철학의 시야 내에 머물러 있는 저작을 쓰기 위해 분석철학의 시야 내에서나, 그 시야에서 철학을 매체로서 이용하는 것은 제가 결코 이용하지 않을 삐뚤어진 방법일 것입니다. 저의 고민을 쓰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는 것은 저에게 다양한 이유와 다양한 방식에서 저를 분발하게  만듭니다."(91쪽) 

요는 그가 분석철학의 관심이냐 시야를 넘어서는 자신의 고민과 문제의식을 분석철학 내에서 찾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might seem a last and perverse place to look for it."이라고 카벨은 고백한다. "아마도 그런 일을 하기엔 가장 어렵거나 도착적인 장소처럼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카벨은 그런 일을 이제까지 해왔다! 그러니 "제가 결코 이용하지 않을 삐뚤어진 방법일 것입니다."는 삐뚤어진 번역이다. "저의 고민을 쓰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는 것은 저에게 다양한 이유와 다양한 방식에서 저를 분발하게  만듭니다."란 마지막 문장은 "For me, for various reasons, in various ways, it has been inspiring."을 '풀어서' 옮긴 것이다. 하지만 보다 친절했다면, '저의 고민을 쓰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는 것'은 '저의 고민을 쓰기 위한 방법을 분석철학 내에서 찾으려고 한 것'이라고 해주는 게 더 좋았겠다. 핀트는 '분석철학 내에서'에 가 있으니까. 취향의 차이겠지만 '저를 분발하게 만듭니다'는 '저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로 옮기고 싶다...  

이런 식으로 지적하자면, 며칠이 소요될지 모르겠다(아직 절반에도 이르지 못했다). 이런 게 무슨 신나고 재미나는 일이라고 몸바쳐 하겠는가. 나대로 해야 할일은 따로 있기에 애초의 계획과는 달리 일단 마무리한다. 누군가의 지적대로, 이런 류의 오역 지적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식은 죽먹기'다. 그러니 번역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 말아야 한다? 내 생각은 거꾸로다. 식은 죽먹기므로 좀더 많은 이들이 참여해서 번역 수준을 좀 높이도록 해보자는 것이다. 독자들이 입 다물고 있으면 또 이런 책을 읽을 수밖에 없다. 그런 게 우리가 경험해본 세상의 이치 아니던가. 물론 아무래도 철학자들 인터뷰여서 구어체 대담치곤 어려운 대목이 드물지 않지만 영어문장을 좀 볼 줄 아는 독자라면, 그리고 철학에 대한 약간의 소양만 있다면, 이 번역서의 허다한 오류를 찾는 게 크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숨어 있는 것도 아니다.   

가령, 'Anglo-American philosophy'(영미철학)를 번역본은 한 군데인가를 빼고는 '북아메리카 철학'이라고 옮겼다. 영국과 미국을 가리키는 단어가 '북아메리카'인가? 'modern logic'을 '현대논리학'이 아니라 '근대논리학'이라고 옮긴 건 '관례'에 대한 무지라 쳐도 'priceless'(아주 귀한)을 '가치 없는'이란 식으로 옮기는 것은 정말 가치 없는 번역이다. 경제 숙어인 'freedom from want'(결핍으로부터의 자유)'를 '수요로부터의 자유'로 옮긴 것은 경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일까? 'neural'(신경계)를 '중립적'(neutral'로 봤겠지)으로 착각하고, "최후의 심판을 믿는 사람'(people who have a belief in the Last Judgment)을 '최후의 심판에서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 옮기고, '우선성'(priority)을 '선험성'으로 옮기는 수준이라면 수준 이하의 번역 아닌가?  

이런 오역에 대해서 지적한다고 동료 번역자들이 같이 분개하며 '동병상련'의 마음을 갖는다면 대단한 자기비하가 아닐 수 없다. 정말 이런 게 '남의 일'이 아니며 한국의 인문서 번역 수준이 다 이 정도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번역에 대한 비판을 자주 제기한 바 있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비관적이라고 판단하진 않는다. 공역자인 강유원씨도 제대로 맘먹고 책을 다시 정독한다면, 나보다 더 많은 오역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곧 교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철학박사가 아닌가. '동아시아학'을 전공한 역자와는 뭔가 차이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이 책은 일종의 철학 혹은 인문학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는 본인의 말에 책임을 지는 게 될 것이다.  

'인문철학자' 강유원을 아끼고 존경하는 독자들이 적지 않다. 전부는 아니지만 나도 그의 책을 다수 갖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따져봐도 <하버드, 철학을 인터뷰하다>의 강유원은 우리가 아는 강유원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름을 올려놓은 이상, 이 책에서 뭔가 '철학과 삶의 문제 그리고 공부에 관한 조언'을 기대한 독자들에게 정중하게 사과하는 것이 예의에 맞다고 생각한다. 대부분 쉽게 묻히는 다른 인문서와는 달리 이 책은 역자의 지명도와 '하버드'란 간판 때문에 상대적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고, 짐작에 초판 정도는 소화가 되었을 듯싶다. 돌베개 출판사나 강유원씨나 실추된 명예를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10. 08. 08.

P.S. 오래전 일이지만 지난 2004년 강유원씨가 고미숙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시공간>(그린비, 2003)을 일간지 북리뷰를 통해 신랄하게 비판한 적이 있다. 그린비출판사의 유재건 사장이 반론을 제기하지 그는 이렇게 답했다. 

저작을 비난하는 것이 저자를 비난하는 것으로 간주될수 있을까요? 저작을 비난하면 저작이 상처받는 것이지 저자가 상처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저작이 상처받는다’는 말이 성립할 수 있을까요? 제가 ‘필자의 자존심’을 거론한 것은, 그것이 설혹 고미숙이라는 필자에 의해 쓰여지지 않았다 해도 명시된 필자가 자기 저작에 대해 말하는 것이 최소한의 규칙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출판계에 새로운 관행이 생겼다면 할 수 없겠지만 말입니다.

이런 말들이 오고가는 와중에 오리아나 팔라치의 ‘한남자’에나오는 글귀들이 떠올랐다. “영웅의 전설은 그 영웅을 유명하게 만든 위대한 공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신화에 있어서나 현실에 있어서 위대한 공훈이란 모험의 시작, 사명의 출발에 지나지 않는다… 타인의 망각, 가중되는 고독, 고통의 무미건조한 반복만이 있을 뿐인 시련. 그러나 영웅이 이 두번째의 시련에 못 견딘다면 그에게 화가 미치리니. 그를 유명하게 만든 위대한 공훈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이 되고, 사명은 실패하고 말 것이다.” 부디 ‘두번째 시련’을 견뎌내고 진정한 영웅들이 되시길.(문화일보) 

그에게도 '진정한 영웅'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온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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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08 0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8 0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8 01: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8 01: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8 0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8 0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8 0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08-08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근주스, 그대가 역자가 아니라면 그만두시오. 로쟈의 지적을 살펴보니 대체로 정당한 것들이오. 한국처럼 번역 환경이 열악한 곳에서 사소한 번역의 실수는 있을 수 있는 일이며 (물론 사소한 실수마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해할 수 있다고 한 걸음 양보할 수 있다오. 그러나 로쟈가 지적한 부분들의 번역은 그 내용의 경중과 빈도로 볼 때 사소한 실수가 아니며, 중대한 과오의 수준에 이르고 있소이다. 그대가 맞다고 생각하는 번역을 영어로 back-translation 하면 내 주변의 미국 친구들이 웃을 일이오.

그리고 역자들은,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 지면에 적극 발언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해명해주어야 마땅할 것이다. 이것은 로쟈와 번역자들의 문제를 벗어나 독자들의 돈과, 시간과, 땀의 손실에 관한 사항이니 그러하다.


penny1 2010-08-08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보기에도 로쟈님이 지적하신 번역 오류는 타당해 보입니다.

푸른바다 2010-08-08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번역 오류에 대한 지적은 적절합니다. 번역자와 출판사는 지적들을 참고하여 개정판을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힘만들고 별로 빛은 나지 않는 이런 일에 용기있게 발언해 주시는 데 대해 깊이 감사드립니다.

2010-08-08 1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8 1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qualia 2010-08-08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속 지켜보기만 하다가, 아무도 지적하는 분이 없기에, 할 수 없이 제가 딱 한 가지만 지적합니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일 수 있지만...)

["A guiding theme in Stanley Carvell's work is Wittgenstein's commitment to replacing metaphysical of philosophical problems with our own ordinary needs."]

위 번역비평문의 첫 인용 원문에 오타가 두 개나 있습니다. 당근주스 님도 그 오타 문장을 그대로 재인용하여 반론을 펴고 계셔서, 할 수 없이 이참에 알려드립니다. (이하는 평서문으로).

ⓛ “Stanley Carvell's work”에서 스탠리 카벨의 이름을 잘못 적었다. 로쟈 선생의 번역비평 작업에서 중요한 항목을 차지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름 올바로 적기와 올바로 음역하기〉다. 수다한 한국어 번역판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오류가 바로 이 인명 표기 오류와 그 음역 오류이다 보니 로쟈 선생은 번역비평 작업 때마다 그냥은 지나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로쟈 선생의 번역비평 작업에서 꼭 약방의 감초격으로 수다하게 등장하는 지적 사항이 이 인명 표기 오류와 음역 오류다. 그만큼 로쟈 선생의 번역비평 작업에서 인명의 올바른 표기와 올바른 음역은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 이 점에서 볼 때, 로쟈 선생은 자기 원칙의 하나를 스스로 배반한 결과가 된다.

(참고로 말하자면, Stanley Cavell은 콩글리쉬식 음역인 “스탠리 카벨”과 현지의 실제 발음인 “스탠리 카벨”이 행복하게 맞아떨어지는 드문 예 중의 하나다. 현지인들도 “스탠리 커벨”이라고 발음하지는 않는다.)

② 위 인용문에서 “metaphysical of philosophical problems”을 보고 잠깐 헤맸다. 아무런 관사도 없는 형용사 “metaphysical”이 ‘of-구’의 수식을 받는 구문이라니??? 혹시 중복되는 용어를 생략한 구문일까? 이런 (사이비) 문법스런 고급스런 생각도 들었지만, 아무래도 이상해서 원문을 찾아보았다. 역시 아니나 다를까, “metaphysical or philosophical problems”라는 쉬운 구문의 단순한 오타였다. 이런 글자 하나의 사소한 오타/오류가 쓸데없이 독자를 고급스런 혼란에 빠지게 만든다. 아주 사소한 글자 하나의 오타/오기가 왼갖 문법적 해독 작업으로 골치를 싸매게 만들었다가, 결국은 허망한 단순 결론으로 맥이 빠지게 만드는 전형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요즘 로쟈 선생의 글들에는 평소와는 다르게 엉뚱한 오타/오기가 숱하게 발견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지식인들보다 더 많이 오타/오기를 저지른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내가 판단하기에 그 어느 지식인보다 문장을 정확하게 쓰시는 분 가운데 한 분이다.) 아마도 폭주하는 숱한 청탁 원고와 번역 일거리와 블로그 글쓰기를 동시다발로 처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블로그 글에 종종 드러나는 책읽기/원고쓰기/번역하기/강의하기의 폭주 속에서 이분이 이렇게 짬을 내어 위와 같은 번역비평글을 써낸다는 사실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솔직히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2010-08-08 13:25)

로쟈 2010-08-08 13:32   좋아요 0 | URL
지적 감사. 오타는 수정했습니다. 저 같은 경우 다른 곳에 쓴 걸 옮겨오는 게 아니라 직접 페이퍼에 타이핑을 하기 때문에 오타가 잦습니다. 보이는 대로 수정하고 있습니다...

yamoo 2010-08-08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주 관심분야가 분석철학인데, 로자님은 별 관심이 없으시군요^^ 허기사 라캉이나 지젝 들뢰즈 쪽을 공부하시는 분들과 분석철학은 별로 친해 보이지 않더군요~ㅎ 그나저나 번역이 아니라 해석이라 좀 짜증나는 군요...인문 사회 고전을 읽어가면서 확신이 든 것은 내용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오역이 너무 많고 제대로 된 한국어 문장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이해도가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저도 잠깐 덧붙일께요..
가장 심각한 번역은 로자님이 지적하셨다시피 우리나라 역자들이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는 것입니다. "스탠리 카벨은, 비트겐슈타인이 우리에게 일상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대체하려고 전념했던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문제들을 자신의 작업의 주요 주제로 삼았다." 지적하신 부분은 어청난 오역이구요...사실 이 문장은 매우 좋지 않습니다. 도대체가 국어 공부를 전혀 안한 분들 같습니다. "일상적으로 필요한 것으로.."이런 문장은 누군가가 말한 썩은 문장입니다..그리고 다음 부분..
"우리는 데카르트 이전 세대가 일상 언어의 의미를, 세계와 우리의 관계를 잘못 조작하는 것으로 표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셰익스피어의 위대한 비극들이 출현한 10년 동안에 오페라가 생겨난 것은 인간의 목소리에 대한 찬양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단문으로 잘라야 겠지요. 목적어가 3개 연달아 나오는 문장을 좋은 문장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그리고 계속 역자는 "잘못 조작하는 것으로 표현했다~"는 식의 ~~하는 것으로라는 이상한 표현을 남발하는데 정말 거슬리는 군요.. 계속 이사람은 짜증나는 표현으로 문장을 구성합니다. "문학과 철학에서 미합중국적인 차이를 동시적으로 고안하려 했던 에머슨이 필요로 했고 가능하게 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그 이후로 미합중국의 철학과 문학이, 특히 미합중국의 문학이 얼마나 멀어지게 되었는지 알게 된다면 에머슨은 틀림없이 충격을 받을 겁니다" 번역하신 분은 이게 제대로 된 문장이라고 생각하고 번역을 했겠지요. 영어 문장을 한국어로 해석한 작업을 번역이라고 내놓으니 한심할 뿐입니다. 이렇게 번역하기 때문에 이해하기위해 현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빠르게 읽어나갈 수가 없게 됩니다. 번역하는 많은 분들이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 번역 사업의 질을 떨어뜨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해당 분야의 권위자로서 번역을 하기 전에 제대로 된 한국어 문장 공부를 해야 될 것 같습니다...거슬리는 표현이 지적해 놓으신 부분마다 산재해 있지만 이쯤해서 그만 두렵니다..에휴~

로쟈 2010-08-08 13:53   좋아요 0 | URL
거기까지 바라시는 건 아직까진 과도한 기대이십니다.^^; 추천할 만한 분석철학서가 있으면 이 참에 추천해주시죠. 저도 비트겐슈타인이나 분석철학에 대해선 학부때나 관심을 좀 갖다가(이명현, 엄정식 교수 등의 책들을 읽었습니다) 잘 맞지 않아서 접었습니다. 로티는 당연히 아주 흥미로웠죠...

yamoo 2010-08-08 16:53   좋아요 0 | URL
그냥 관심을 갖고 읽어나가는 분야이기 때문에 거의 피상적인 수준이지만 그래도 괜찮은 책들은 꽤 있는 것 같습니다. 학부때는 그렇게도 논리학분야가 싫었는데, 지금은 거의 모든 분석철학 책들을 모으고 있으니...참으로 아이러니컬 합니다~ㅎㅎ 가장 괜찮은 책이 엔날에 고려원에서 나왔던 사무엘 고로비츠의 <철학적 분석>입니다. 분석철학 전공하신 안건훈 교수가 번역했기 때문에 그나마 믿음을 갖고 볼 수 있는 책이에요..최고의 입문서 같다는^^ 그리고 콰인과 울리안의 공저인 <인식론>이 있습니다. 콰인의 <논리적 관점>에서 보다 <인식론>이 훨씬 쉽고 범위도 넓습니다. 분석철학의 입장에서 인식론과 과학철학 언어철학을 다루고 있습니다. 두 책 모두 절판되어서 구하기가 쉽지 않지만 도서관에 비치 되어 있기 때문에 구해서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로쟈 2010-08-08 17:03   좋아요 0 | URL
콰인의 책은 읽었습니다. 믿음의 거미줄 얘기 나오는 책이죠? <철학적 분석>은 구해놓기만 한 것 같은데, 그렇게 좋은 책인 줄은 몰랐네요. 뮤니츠의 <현대분석철학> 같은 건 어떤가요? 사실 이 분야도 생각만큼 책이 많이 나오진 않았네요. 전공자들은 꽤 많은데...

yamoo 2010-08-09 00:04   좋아요 0 | URL
아, 뮤니츠의 책이요~ 그건 경제학에서 슘페터의 <10대경제학자>와 비슷한 성격의 책입니다. 입문서긴 한데요, 언어분석, 설명, 추론에 대한 심도있는 내용을 접할 수 없는 게 약점입니다. 아, 그리고 종로서적에서 나온 믿음의 거미줄 그 책 맞아요! 그 책을 보셨다면 하레의 <과학철학>이나 폰 리히트의 <설명과 이해>가 훨씬 좋아보입니다~ 특히 하레의 저서는 실재론의 입장에서 과학적 추론의 형태와 과학적 지식의 보편성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특히 포퍼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는데요, 번역이 매우 잘된 편입니다. 역시 논리학 전공하신 민찬홍 교수가 번역해서 읽을 맛이 나는 책입니다~ 저의 좁은 소견으로는 뮤니츠의 책보다는 하레와 폰리히트의 책을 보심이 더 유익할 것 같습니다!

구보 2010-08-08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어를 못하는 제가 봐도 로쟈님의 번역이 잘 읽히고 명료하게 이해됩니다.
영어원문은 차치하고 원번역문 문장들은 여러 번 읽어도 무슨 말인지 잘 읽히질 않네요.
저처럼 평균적인 독자가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번역이 바람직한 번역 아닐까요.
여러번 공들여 읽고 본인의 이해력 탓만 하다가 깔끔한 번역으로 술술 읽히는 경험을 해 보니 -최근에 읽은 <경제 인류학을 생각한다> 홍기빈씨가 새로 번역한 <거대한 전환>-새삼 번역자의 노고에 감사하는 절로 들었습니다.
일단 문장이 매끄럽게 읽히면 내용이 어려운 부분은 단어에 대한 개념이해 문제인데 이 또한 친절한 각주로 해결해주더군요.



로쟈 2010-08-08 15:33   좋아요 0 | URL
네, 모범적인 번역 사례죠. 요는 번역문화가 그런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독자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비로그인 2010-08-08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처음부터 철학에 전념한 것은 어느 정도는 제가 항상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저의 고민을 쓰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저작, 특히 영어권의 분석철학의 시야 내에 머물러 있는 저작을 쓰기 위해 분석철학의 시야 내에서나, 그 시야에서 철학을 매체로서 이용하는 것은 제가 결코 이용하지 않을 삐뚤어진 방법일 것입니다. 저의 고민을 쓰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는 것은 저에게 다양한 이유와 다양한 방식에서 저를 분발하게 만듭니다."(91쪽)

저는 번역과 관련하여 출발어와 도착어란 표현을 좋아합니다. 이 책은 그러니까 영어가 출발어고 우리말인 한글이 도착어인 셈이겠네요. 그런데 위의 문장 같은 경우 아무리 들여다봐도 아직 도착되지 않은 문장 같습니다. 말하자면 영어에서 출발하여 우리말로 오고 있는 중이랄까요(이럴 때는 제가 꼭 항구에 서서 이제나저제나 배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리는 원주민 같아 씁쓸해집니다).

"제가 처음부터 철학에 전념한 것은"은 무슨 말인가요? 술어를 고려하면 "제가 애초에 철학에 전념했던 것은(혹은 이유는)"이란 뜻이겠죠.
"어느 정도는 제가 항상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어느 정도는, 항상?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다?
"저의 고민을 쓰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고민을 쓰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서?
"영어권의 분석철학의 시야 내에 머물러 있는 저작을 쓰기 위해" 시야 내에 머물러 있는 저작을 쓰기 위해? 시야 내에 머물다? 저작이?
"저의 고민을 쓰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는 것은 저에게 다양한 이유와 다양한 방식에서 저를 분발하게 만듭니다" 고민을 쓰다? 저에게--- 저를 분발하게 만든다?

번역을 하시는 분들이나 번역에 대해 논하시는 분들이 늘 존경스럽고 부럽기도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직역이든 의역이든 심지어 오역이든 모두 '역'자가 붙은 말이니 일단은 번역이 완료되었다는 전제에서 평가하는 것이 아닌가요? 일단은 우리말 어법에 맞게 옮겨진 상태에서 지나치게 출발어의 입장만 고려했다든가 반대로 도착어를 읽는 독자의 구미에 맞추려다 보니 의미가 왜곡되었다거나 아니면 영 엉뚱한 의미로 옮겨졌다는 지적이 가능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말 어법에도 맞지 않는 문장을 지적하면 직역하다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말씀들을 하시곤 합니다(참고로 저는 그런 문장을 교정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기운이 빠지곤 하죠. 그분들의 노고를 폄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만 기본적으로 잘못된 생각을 하고 계신 건 아닌가 해서 이렇게 불쑥 끼어들었습니다.
우리말은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원주민의 말이 아닙니다. 표현법을 익히기가 쉬운 말도 아니고요. 해당 외국어를 익힐 때처럼 우리말의 어법과 표현법을 익히려고 애쓴다면 모든 번역자들이 미처 도착되지도 않은 문장에 쉽게 마침표를 찍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더위에 지치지 마시고 건강하세요.

로쟈 2010-08-08 15:35   좋아요 0 | URL
네, 지적 감사합니다. 번역에 대한 시비도 좀더 섬세하게 우리말 번역문의 자연스러움과 유려함에 대한 논의로까지 가면 좋겠는데, 아직은 갈길이 멀다는 생각이 듭니다. 격려와 채찍이 필요하지 않나 싶어요...

울프심 2010-08-08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기 리플들을 보면서 인문학 번역의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인문학 책 뿐만 아니라 경제,경영서도 많은 오역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돈 더주고 영어본 혹은 일어본을 보게 됩니다. 어쨋든, 로쟈님의 노력에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좋은 글과 다양한 분들의 리플 및 의견을 보게 되었습니다. 다들 무림의 숨은 고수 이시던데요!!^^

로쟈 2010-08-08 22:51   좋아요 0 | URL
집단지성이 다른 게 아니죠...

biosculp 2010-08-08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더 나은 번역으로 고칠수 있으면 좋을것 같구요.
감정이라는것에 대해 더 생각해봐야 되겠습니다.
저도 잘 조절이 안되는 부분이고,
갑작스럽게 어떤것에 의해 촉발되어서, 감정에 의해 논리가 요구되는 부분들도 있고.
참 말이라는게 아다르고 어다른데요.

로쟈 2010-08-08 22:52   좋아요 0 | URL
더 나은 번역이 나오려면 '대폭적인' 결단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미지 2010-08-08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읽었습니다. 정말 심각하고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로쟈님의 지적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로쟈 2010-08-08 22:53   좋아요 0 | URL
복잡한 얘기가 아닌데도, 일을 복잡하게 만들려는 분들이 계신 듯해요...

Kitty 2010-08-08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운데 고생이 많으십니다. 저도 흥미진진하게 잘 읽었고 많이 배웠습니다. ^^

콩세알 2010-08-09 0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에 언급된 고미숙의 '열하일기'나 진은영의 순수이성비판, 김은주의 데카르트에 대한 책 같은 '쉽게 읽는 고전'의 용도가 과연 뭘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이런저런 계기에 읽게 된 저런 책들에 대한 저의 경험은 그들의 목적과는 달리 사상가들에 대한 이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고 나중에 보니 저런 책을 읽을 시간과 돈으로 무식하게 원전이라도 몇십페이지 읽는 것이 나았다는 판단을 하게 되더라구요. 원전을 접하기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그저 '그에 대해 읽어보았다'는 만족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말이죠. 핵심을 알려면 개론서를 읽으면 되고 원전의 분위기를 알고 싶으면 원전을 직접 읽는 것이 나으니까요.

맑스의 '자본론'을 세번째 시도에서 150페이지를 드디어 넘기고 심지어 이해까지 되는 것 같아 자축(^^;;)하고 있는 중인데 지금까지 주어 읽고 주어 들은 것들로 형성된 이미지가 확 깨지는 중이고 또한 그 주어들은 것들이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들인지가 감이 오기 시작했거든요. 원전읽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 같아요. 물론 그걸 읽기 위해 공부의 바탕이 필요하다는 것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요.

로쟈 2010-08-09 09:52   좋아요 0 | URL
어떤 고전해설서도 고전 대신에 이걸 읽으라고 얘기하진 않습니다. 저는 읽지 않았지만 고미숙씨의 <열하일기>에 대해선 호오가 갈리던데, <열하일기>에 대한 관심을 부추긴 공로는 있지요. 이후에 정본 번역서까지 나오게 됐으니까요. 생각해보면 '나쁜 책'이 나쁜 영향만 끼치진 않습니다. <하버드>도 번역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게 하고, 영어공부도 시켜주는 순기능이 있습니다...

콩세알 2010-08-09 0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미숙의 경우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어슬픈 들뢰즈론과의 합체인데요. 제가 그 책으로 하는 독서토론회에 참가해 보았는데 들뢰즈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전쟁기계니, 노마드니 그런 단어들이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는 것처럼 보였고, 들뢰즈 책이라도 좀 뒤적여 본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새로운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정작 들뢰즈가 낯선 수많은 독자들에게 자신이 쓴 단어들이 어떤 맥락에서 쓰이고 있는지 책의 목적처럼 쉽게 풀어주어야 할 시간에 자신이 열하일기를 읽으며 얼마나 포복절도했는지 깔깔댔는지 같은 느낌표에 많은 시간을 쓰고 있거든요. 그러니 이 책의 들뢰즈 합체는 '노마드니까 노마드'라는 동어반복만을 제시하면서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기 위한 것 이상의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의심스러웠어요. 차라리 들뢰즈 용어들로 범벅하지 않고 그 말을 '열하일기'를 풀어쓰듯이 일반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용어로 풀어 썼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물론 로쟈님이 의도하는 맥락은 그것이 아니었다고 해도 고미숙의 책에 대한 총체적인 책임과 번역감수를 비교하는 것은 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듭니다.

로쟈 2010-08-09 09:49   좋아요 0 | URL
제가 인용한 대목의 핵심은 "저작을 비난하는 것이 저자를 비난하는 것으로 간주될수 있을까요? 저작을 비난하면 저작이 상처받는 것이지 저자가 상처받는 것은 아닙니다."라는 대목입니다. 번역에 대한 비판이 번역자에 대한 비난과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취지고, 강유원씨 말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죠. 고미숙씨의 책이 이렇다저렇다하는 건 부수적입니다. 강유원씨가 보기에 '나쁜 책'일 뿐이고, 제가 보기엔 <하버드>도 '나쁜 번역서'일 뿐입니다...

2010-08-09 1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9 1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콩세알 2010-08-10 0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고 있습니다. '로쟈님이 의도하는 맥락은 그것이 아니었다고 해도'라고 써놓고도 저는 할 말을 했고 로쟈님도 그걸 알면서도 또 답을 하셨을 것으로 짐작해 봅니다. 그게 감정인거죠.

빙빙 돌려말하기는 약자의 수단입니다. 죄송합니다. 이 서재가 저로서는 유용하고 책을 좋아하는 이상 이래저래 덧글 달고 싶은 유혹도 느낄 것이라 서로 감정이 상하면 안될 것 같은데 이 포스트에 대한 불편함 어쩌지 못해 저렇게 쓴 겁니다.



고미숙의 책에 호오가 갈린다는 말은 좀 이해가 안됩니다. 특히 인문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럴 것 같은데..저는 강유원씨가 고미숙에 대해 무슨 말을 했는지 여기 말고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고 인문고전강의를 제외한 아무것도 모릅니다.

구보 2010-08-09 15:22   좋아요 0 | URL
<문화일보-"회사원 철학박사 강유원이 사서 읽은 책">이란 기사에서 발췌했습니다.-[연암의 웃음과 역설은 흉내내고 있으나 불온한 사회 비평 정신은 온데간데 없다. 외려 프랑스의 얼치기 유목주의자 - 프랑스는 들판이 아주 넓어서 유목에 적절한 환경을 갖췄다고 할 만하다 - 에게 빌린 상투어 두어 개와 이상야릇하게 재해석된 마르크스의 언어가 ‘열하일기’ 해석에 동원되면서 연암은 졸지에 18세기 판 개그 작가로 전락한다.

왜 이런 사태가 벌어졌을까? 이 물음에 답하려면 고미숙이 가담하고 있는 집단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아야 할 듯하다. 그 집단은 이진경이라는 사람이 이끌고 있다. 그 사람이 쓴 어떤 책에 나온 저자 소개는 이렇다: “자본주의적 질서, 자본주의적 관계의 외부를 꿈꾸는 저자는, 현재 비슷한 꿈을 꾸는 사람들과 함께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에서 세미나와 강의에 몰두하고 있다.” 온갖 학문 영역을 넘나들며, 심지어 ‘수학의 몽상’이라는 책까지 써서 직업적 수학자에게 비웃음을 받기도 했던, 왕년에는 잘 나가던 사회주의 이론가였던 그가 자본주의를 넘어서기 위해 택한 방법은 탈주니 유목이나 하는 언어들뿐이다.-

구보 2010-08-09 17:53   좋아요 0 | URL
-어쨌든 연암의 ‘열하일기’는 왕까지도 서늘케 했겠으나, 수유의 전도에 앞장서고 있는 고미숙판 ‘열하일기’의 장난글은 밥맛만 떨어지게 했다. 연암에게는 금기시한 것을 말한다고 하는 분명한 전선이 있었으나 고미숙의 염두에는 전혀 불온하지 않은, 유쾌한 글을 원하는 타깃 독자만 있었을 뿐이다. 덧붙여, 나는 고미숙의 책을 통독한 뒤 내다 버

-저도 고미숙씨 책에 몹시 실망한 터라 공감하며 읽은 기사입니다.




미지 2010-08-09 15:40   좋아요 0 | URL
콩세알님, 제 생각에는 이런 문제에 접근할 때 사감의 연루와 어조에 너무 신경 쓰다 보면 공론의 의의가 쇠퇴할 듯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문제제기에 충분히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그 문제 제기의 의의를 인정하고 그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이 공부하는 사람들로서의 태도가 아닐까 싶네요.
이 번역 오류의 문제는 취향의 호오 문제가 아니라, 엄연한 기본 문법 문제 아니겠습니까?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을 두고 다들 너무 열정적으로 회의하시는 듯하네요. 날씨 탓인가요? 기본적인 영단어와 영문법 독해 문제인데 말이죠...

로쟈 2010-08-09 16:00   좋아요 0 | URL
""공역자 중에 강유원씨도 포함돼 있어서 번역에 대한 자연스런 신뢰도 보태졌다" 이후로 나오는 모든 글이 저 문장을 반증하는 것으로만 쓰여져" 있는 건 보시는 대로입니다. 역자에 대한 신뢰 때문에 책을 펴들었지만 너무나도 실망스럽다는 게 제 결론이니까요. 그게 어떻게 해서 '순수하지 못하다'는 결론으로 귀결되는지요? 강유원씨에 대한 제 '사감'이 굳이 궁금하시다면, 제 서재 전체에서 '강유원'을 검색해보시길.,,

당근주스 2010-08-10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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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 2010-08-09 15:52   좋아요 0 | URL
댓글을 지우셨다니 애석하네요... 방문자들이 보며 뭐가 문제인지 나름 판단할 수 있게 그냥 두셨으면 좋았을 뻔했습니다...

책읽는아저씨 2010-08-10 00:07   좋아요 0 | URL
제 생각도 같습니다.
방문자들이 판단할 수 있게 놔둬야 하는데, 댓글을 지웠다는 건 자신의 말에 책임을 다 하지 않는 행위라고 밖에는... 그래놓고 누굴 지적하시는건지..

콩세알 2010-08-10 0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제가 과했다고 생각합니다. 지적하신 부분은 지웠습니다. 그 부분에 대한 덧글이 있는데 지우는 것은 예의가 아니겠지만 제가 해서는 안될 얘기가 인터넷에 배설물처럼 둥둥 떠 있는 것을 보기가 힘들어서요. 블로그는 가끔 사람을 예가 아닌 것을 말하게 몰아가는 뭔가가 있는 듯 하다는 것이 제 변명입니다. ^^;;

로쟈 2010-08-10 09:23   좋아요 0 | URL
과하기보다는 뭔가 오해를 하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강유원씨와 안면도 없지만 특별한 사감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비판을 저는 자주 해왔구요. 그 의도에 대해선 다른 페이퍼들에서 자세히 적은 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