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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학술저널에 실릴 글의 일부를 옮겨놓는다.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의 한 대목을 읽어보면서 번역과 '반동적 행위'란 말의 의미에 대해서 따져본 것이다. 내가 읽기에 이 대목의 국역본 번역은 다소 부정확하며 그에 대한 지적도 겸하고 있다.   

번역이 능동적 행위라면 번역비평은 반동적 행위일까? 혹은 번역이 작용이라면 번역은 반작용일까? 그래서 번역이 주인의 도덕이라면 번역비평은 노예의 도덕에 불과한 것일까? ‘번역비평’이란 말을 염두에 두고서 들뢰즈가 읽는 니체를 따라가노라면 문득 그런 의문을 갖게 된다. <니체와 철학>의 네 번째 장은 ‘원한에서 양심의 가책까지’를 모토로 하고 있는데, 들뢰즈가 제일 처음 인용하는 니체의 문장은 “La vraie réaction est celle de l'action”이다. 우리말 번역에서 이것은 “참된 반작용은 작용의 반작용이다”(<니체와 철학>, 201쪽)라고 옮겨졌다. 반면 영역본의 “The true reaction is that of action”을 옮긴 번역은 “진정한 반작용은 행위의 그것이다.”(<니체, 철학의 주사위>, 193쪽)라고 옮겼다. 이 대목은 <도덕의 계보>의 제1논문의 10절 첫 대목에서 따온 것이다. 한국어판 니체 전집본에서는 가까스로 찾아볼 수 있는 대목이다.



"도덕에서의 노예 반란은 원한 자체가 창조적이 되고 가치를 낳게 될 때 시작된다: 이 원한은 실제적인 반응, 행위에 의한 반응을 포기하고, 오로지 상상의 복수를 통해서만 스스로 해가 없는 존재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원한이다."(<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367쪽) 

독어본을 옮긴 이 인용문에서 “실제적인 반응, 행위에 의한 반응”이라고 옮겨진 부분이 들뢰즈의 인용문에 상응한다. 니체의 관점에서 보자면, 번역에 대한 ‘실제적인 반응, 행위에 의한 반응’을 포기하고, 곧 참된 반응을 포기하고 단지 ‘상상의 복수’를 통해서만 스스로를 보상하는 것, 번역을 통한 반응 대신에 ‘밖에 있는 것’, ‘다른 것’, ‘자기가 아닌 것’을 부정하는 제스처로 자신을 보전하는 것, 혹 그것이 번역비평은 아닌가? 니체는 그러한 부정이야말로 “노예 도덕의 창조적인 행위”라고 불렀다. 번역비평의 ‘창조성’이란 바로 그런 노예 도덕의 산물은 아닐는지? 그것은 반작용이자 반동적 행위이며 결국은 ‘원한’에 불과한 것은 아닐는지? 

일견 이것이 번역비평이 내몰린 궁지이다. 번역비평을 닦달하는 의혹과 비난의 시선은 어차피 능동적인 힘이 아닌 한에서 불가피하게 뒤집어써야 하는 숙명일까? 잠시 이 문제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원한이란 무엇인가를 차분하게 물어야겠다. 과연 원한이란 무엇인가? 들뢰즈에 따르면, 니체 자신이 일부러 갖다 쓴 불어 단어 ‘르상티망(ressentiment)’이 정확한 정의를 제공한다. 즉, 그것은 “la réaction cesse d'être agie pour devenir quelque chose de senti”이다.

우리말 번역본은 “원한은 느껴진 어떤 것이 되기 위해서 영향받길 중단한다”(<니체와 철학>, 202쪽)고 옮겼고, 영역본의 “reaction ceases to be acted in order to become something felt (senti)”를 옮긴 번역본은 “반동적 행위는 느껴지는 어떤 것이 되기 위해서 행위하게 되기를 중지한다”라고 옮겼다. 편하게 이해하자면, ‘르상티망’은 느끼기 위해서 반응하지 않는 걸 뜻한다. 즉, 느낌만을 계속 축적할 뿐 그에 대한 반응은 중지한 상태를 가리킨다. 국어사전에서 “원한, 증오, 질투 따위의 감정이 되풀이되어 마음속에 쌓인 상태”라고 ‘르상티망’을 풀이하는 것은 그런 면에서 적절하다. ‘원한, 증오, 질투 따위의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고 계속 마음에 쌓아두는 것을 ‘르상티망’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원한은 느껴진 어떤 것이 되기 위해서 영향받길 중단한다”는 말은 모순이다. 영향 받기를 중단한다는 것은 보통 어떤 반응이나 행동을 예비하는 것이니까. 여기서의 이분법은 외부의 자극을 수동적으로 수용만 하느냐, 아니면 그것에 능동적으로 반응하느냐이다. 물론 이때의 반응은 ‘참된 반작용’을 가리킨다.

들뢰즈는 이것을 프로이트의 ‘hypothèse topique’를 소개하면서 풀이한다. 한 번역본은 ‘위상학적 가설’이라고 옮기고, 다른 번역본은 영역본의 ‘topical hypothesis’를 따라서 ‘총론적 가설’이라고 옮겼지만 내용상으론 ‘장소’에 관한 가설이다. 어떤 가설인가? 자극/흥분을 수용하는 체계(시스템)와 그 흔적을 보존하는 체계는 동일한 체계일 수 없다는 가설이다. 어떤 하나의 체계가 자극을 성실하게 보존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또 다른 자극을 계속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라고 프로이트는 보았다. 때문에 애초에 두 가지 서로 다른 체계가 존재해야 한다. 한 체계는 자극들을 수용하지만 아무것도 잡아놓지 않으며 따라서 어떠한 기억도 갖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한 체계는 그 자극들을 항구적인 흔적들로 변화시켜서 보존한다. 이것이 이른바 반응적 장치의 두 체계이며 이들은 각각 의식과 무의식에 상응한다. 니체의 구분에 따르면, 반응적 무의식은 기억의 흔적에 의해, 항구적인 자국에 의해서 정의된다. 반면에 또 다른 반응적 힘은 의식과 구별되지 않으며 이것은 항상 새로운 수용에 열려 있는, 새로운 것들을 위한 장소이다. 이 두 번째 종류의 반응적 힘에 대해서 들뢰즈는 이렇게 말한다. 편의상 두 종의 국역본과 영역본을 인용한다(강조는 필자의 것이다). 

"두 번째 종류의 반응적 힘들은 우리에게 반작용이 어떤 형태로 또 어떤 조건 아래서 영향을 받을 수 있는지 보여준다. 반응적 힘들이 의식 속의 흥분을 대상으로 삼을 때, 상응하는 반작용 자체는 영향을 받는 어떤 것이 된다."(<니체와 철학>, 204쪽)

"두 번째 종류의 반동적 힘들은 우리에게 반작용이 어떠한 형식으로 어떠한 조건에서 활동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반동적 힘들은 의식적인 자극을 그것들의 대상으로서 취급한다. 그러면 그때 그에 상응하는 반작용은 그 스스로 작용된다."(<니체, 철학의 주사위>, 196쪽)


The second kind reaction can be acted: when reactive forces take conscious excitation as their object, then the corresponding  reaction is itself acted.(Nietzsche and Philosophy, 113쪽)   
 
영역본에서의 ‘be acted’는 문맥상 ‘능동적이 된다’ 정도의 뜻이다(‘영향을 받는다’는 식의 번역은 난센스이다). 여기서 의식의 반응은 ‘행위에 의한 반응’으로서의 ‘참된 반작용’에 부합한다. 그래서 니체는 의식이 겸손해야 하다고 요구하면서도(어쨌든 의식 또한 반응적 힘이므로)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두 반응적 체계가 엄격하게 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두 체계의 차이는 망각과 기억의 차이로 변주된다. 니체에게서 망각은 제동력이자 완화장치이고 재생력을 갖는 치료적 힘이다. 이러한 ‘능동적’ 힘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사람은 마치 소화불량 환자의 처지와 같게 된다. 아무것도 끝낼 수 없기 때문이다(그런 점에서는 변비 환자 또한 연상시킨다). 우리가 현재 순간에 어떤 행복, 평온, 희망, 자부심, 기쁨 따위를 맛볼 수 있다면, 그것은 망각의 능력 덕분이다. 망각은 반응적 힘이 스스로를 능동적이게 만드는 능력이다. 이것이 반작용으로서, 반동적 행위로서 번역비평이 봉착한 궁지를 타개시켜줄 하나의 모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08.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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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8-11-29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좀 어렵네요. 번역비평이 반동적행위고, 반동적행위는 원한이고, 원한은 쌓아두는 거고, 쌓아두는 건 무의식이고, 무의식은 망각이고~전 이렇게 이해되는데요. 그러면 망각은 번역비평인가요? ㅎ 저 같은 독자 입장에서는 번역비평도 너~무나 능동적인 것 같아서 사실 이런 논의 자체가 느낌이 안 오네요.^^

로쟈 2008-11-29 13:36   좋아요 0 | URL
무의식은 망각이고, 에서 다시 정리하시면 되겠습니다. 무의식은 기억/축적이고 의식이 망각이거든요...^^ 저도 이런 대목에선 국역본 <니체와 철학>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제가 이해할 수 있는 쪽으로 다시 옮긴 거구요(보통은 원저보다 번역본들이 더 어렵습니다)...

릴케 현상 2008-11-29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 사실 무의식은 기억이고로 정리했다가...축적은 무의식이니까 다른 걸로 바꿔야 할 것 같아서 수정했거든요^^ 아 다시 고민해 봐야겠네요.

yoonta 2008-12-10 0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네요..^^


마이클하트의 책(들뢰즈사상의 진화)를 다시 읽다가 이와 관련된 구절을 찾아봤습니다..

"역량에 관한 들뢰즈의 연구는 두가지 층의 구별을 밝혀준다. 첫째 층위에서 그는 능동적 변용들과 수동적 변용들 간의 구별을 제시한다. 둘째 층위에서 그는 기쁘고 수동적인 변용들과 슬프고 수동적인 변용들 간의 구별을 제시한다." <들뢰즈 사상의 진화 309쪽>

여기에서 들뢰즈(마이클 하트)는 역량에는 순수한 형태의 긍정적인 힘인 '능동적' 변용들과 수동적(passive) 변용들이 있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그런데 전자인 순수한 능동적 힘들은 "불투명한 채로 남아있"어서 분석하기 힘들고 후자인 두번째 층위의 수동적 변용들이 우리들의 (들뢰즈가 논한 것처럼)의식과 무의식간의 구별을 가능하게 해주는 역량이라는 것라는 것인데, 이는 다시 망각함으로써 새로운 실천practice의 기반이 되는 "기쁜" 수동적 변용들, 즉 의식과 느낌들을 축적만 하고 새로운 실천(행위)를 위해 망각하지 못하는 "슬픈" 수동적 변용들, 즉 무의식으로 구분될수 있다는 이야기네요.

스피노자의 기쁨joy의 실천으로서의 정치학이 가능하게 되는 지점도 결국 여기서였죠. 기쁨이라는 말이 흔히 오해되기 쉬운데 사실은 순수한 의미의 기쁨(능동성)이라기 보다는 슬픔과 수동성을 망각함으로써만 얻어지는 (수동적/반응적/반작용적/반동적) 기쁨이라는 것 이것이 이 말의 좀더 정확한 해석이죠.

로쟈님 덕분에 가물가물해질뻔 했던 내용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 나네요..^^

그런데 한 학술저널에 실릴 글의 일부라고 하셨는데..혹시 글의 전문은 볼수있을까요?

로쟈 2008-12-10 18:10   좋아요 0 | URL
<번역비평> 2호에 게재될 예정이고 곧 출간된다네요. 나머지는 예전에 쓴 걸 좀 간추린 거라 생략했습니다...
 

연세대 대학원신문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번역문제와 관련한 에세이를 주문받고 쓴 것이다. 아직 신문을 받아보지 못해서 편집상 수정이 이루어졌는지는 모르겠다. 이 글은 초고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주인공 햄릿은 처음부터 등장하지 않고 1막 2장에서야 등장한다. 죽은 부왕의 유령이 등장하는 1막 1장에 이어지는 이 궁중 장면에서다. 덴마크의 새 국왕 클로디어스는 선왕의 죽음을 추모하고 형수였던 거트루드를 왕비로 삼는 데 동의해준 신하들을 치하한다. 그리고는 여러 국사를 처리하고 재상 폴로니어스의 아들 레어티즈의 유학을 허락하는 일까지 마무리한 뒤에야 햄릿을 찾는다. “그건 그렇고, 자, 나의 조카 햄릿, 이젠 나의 아들-(But now, my cousin Hamlet, and my son,-)”이 햄릿을 부르는 그의 대사다. 그리고 그 부름에 답하는 햄릿의 방백이 우리가 이 연극에서 듣게 되는 햄릿의 첫 대사다. 햄릿은 이렇게 말한다. “A little more than kin, and less than kind.”

대사로 처리되기도 하고 방백으로 처리되기도 하는 이 문장이 내가 여러 종의 <햄릿> 번역본을 들춰볼 때마다, 그리고 새 번역본이 나올 때마다 한번쯤 확인해보는 대목이다. 다수의 번역본이 있는 만큼 이미 다양한 번역이 제시되었다. 아니 다양하게 ‘연주’되었다. “숙질 이상의 관계가 되고 말았지만 그렇다고 부자 취급은 싫습니다.”(김재남) “조카보다야 가깝지, 하지만 부자취급은 어림없어.”(여석기) “핏줄은 통한다마는 마음은 구만리 밖이라.”(신정옥) “동족보단 좀 가깝고 동류라긴 좀 멀구나.”(최종철) “친척보단 조금 더 친하고, 자식보단 조금 덜 친한.”(김정환) 등이 그 사례다.

클로디어스는 아버지의 동생이니 햄릿에게는 숙부가 되지만 어머니와 결혼하였으니 새 아버지(계부)이기도 하다. 클로디어스에게 햄릿이 조카이자 아들인 것처럼. 하지만 이 병행적이면서도 이행적인 관계를 햄릿은 선뜻 수용하지 못한다. 햄릿의 kin/kind는 클로디어스의 cousin/son만큼 자연스럽게 양립하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그의 정체성은 불확실하며 불확정적이다. 한 노래 가사를 비틀어서 말하자면 “숙질도 아닌 그렇게 부자도 아닌 어색한 사이”가 클로디어스와 햄릿의 관계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몇 가지 번역 사례를 평해 보자면, 김재남역은 ‘숙질’과 ‘부자’를 대비시킴으로써 명료하게 의미를 전달하고 있지만 좀 투박하다. 원문의 간결한 리듬을 살리지 못한 탓이다. 여석기역은 ‘조카’와 ‘부자’를 대비시키고 리듬감도 살렸지만 ‘어림없어’란 말이 좀 걸린다. 왠지 유약하다기보다는 강인한 햄릿이 연상돼서다. 신정옥역은 의역의 최대치를 보여준다. 하지만 ‘핏줄’과 ‘마음’의 대비는 정체성에 대한 햄릿의 고민을 전달하지 못한다. 최종철역의 ‘동족’과 ‘동류’는 거꾸로 직역의 최대치를 보여주지만 역시나 햄릿의 고민이 잘 전달되지 않는다. 김정환역은 두루 만족시키고 있지만 개인적으론 불완전하게 끝난 문장이 마음에 걸린다. ‘자식간’이란 말은 쓸 수 없기에 ‘친척’과 ‘자식’도 정확한 대비는 아니다. 김정환은 클로디어스의 대사에서도 ‘cousin’을 ‘친척’이라고 옮겼는데, 원래의 의미를 따른 것이라 하더라도 좀 부자연스럽다. 물론 이런 평은 주관적인 것이고 독자로선 각자의 취향에 맞는 연주를 고르면 될 터이다.

자신의 취향과 기대에 맞는 번역을 만날 때의 즐거움은 원작을 읽는 즐거움과는 사뭇 다르다. “A little more than kin, and less than kind.”란 셰익스피어의 문장이 ‘주어진 것’으로서 ‘자연’에 해당한다면 번역은 이 자연의 모방이자 재현이다. 각기 다른 번역은 이 모방․재현의 기예를 겨루는 경연이자 모험이며 좋은 번역은 말 그대로 예술이다. 이런 경연의 사례를 하나 더 들어보자. <햄릿>의 2막 2장에서 폴로니어스는 미친 척하는 햄릿의 광기가 자신의 딸 오필리아 때문이 아닌가 떠보기 위해 말을 붙인다. 햄릿은 그에게 딸이 있는가 묻고는 이렇게 충고한다. “Let her not walk in the sun: conception is a blessing: but not as your daughter may conceive. Friend, look to it.”

이 대목에 대한 몇 가지 번역을 소개하면 이렇다. “햇볕을 너무 쬐지 않도록 해. 지혜가 부푸는 건 좋지만 배가 부풀면 큰일이니까, 아주 조심해야 하네 친구.”(신정옥) “딸이 태양 아래 걷지 않도록 하게. 머릿속의 착상은 축복이네만, 자네 딸 몸속의 착상은- 친구여, 조심해.”(최종철) “햇빛 속을 걷게 하지 말게. 생각을 잉태하는 건 축복이지. 하지만 자네 딸은 다른 걸 잉태할지 모르잖아. 친구. 조심하게.”(김정환)

셰익스피어의 원문에서 핵심은 ‘conception(착상)’과 ‘conceive(임신하다)’의 의미연관성이 갖는 말장난이다. 이것을 신정옥역은 ‘지혜가 부푸는 것’과 ‘배가 부푸는 것’으로 풀었고, 최종철역은 ‘머릿속의 착상’과 ‘몸속의 착상’으로 대비시켰다. 그리고 김정환역은 이 말장난을 ‘생각의 잉태’와 ‘다른 것의 잉태’로 변주했다. 이 모두가 저마다의 연주이며 경연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그러니 <햄릿>은 한번 읽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 그것도 여러 번역본으로 읽는 것이다. 물론 중요한 것은 그렇게 여러 번 읽어도 좋을 만한 번역서가 많이 나오고 또 그런 번역서를 독자들이 많이 찾아서 읽는 문화적 풍토가 마련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번역비평 또한 오역에 관한 시비로 얼룩지기보다는 훌륭한 번역에 대한 품평으로 채워지는 것이 이상적이라 할 만하다. 예컨대 번역에 대한 평가기준이 ‘맞는 번역 vs 틀린 번역’이 아니라 ‘좋은 번역 vs 더 좋은 번역’이라면 얼마나 바람직할 것인가.

우리 번역문화의 열악한 현실에 대한 비판과 고발은 그동안 적잖게 제기되었다. 중언부언은 피하고자 한다. 대신에 최근에 나온 한 번역서에서 읽은 문장을 인용하고 싶다. “세상이 더 나아질 것 같지 않다고 말하는 것 속에 이미 낙관주의가 존재한다.” 원문은 “There is an optimism that consists in saying that things couldn't be better.”이고 보통은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고 말하는 게 낙관주의다.” 정도로 번역될 듯싶다. 하지만 나는 이 ‘특이한’ 번역 덕분에 우리의 번역문화에 대해 낙관하게 되었다. “이보다 더 나아질 것 같지 않다”는 낙관주의도 있는 것이니까. 물론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좋은 낙관주의’다.

08.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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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febvre 2008-11-14 0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사라 밀즈의 책 같군요...... ^^;;

로쟈 2008-11-14 07:15   좋아요 0 | URL
밀즈의 책은 아닙니다.^^;

lefebvre 2008-11-14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푸코의 문장이 맞는 거 같아서 찍었는데 아니었군요 ^^;;

로쟈 2008-11-14 15:47   좋아요 0 | URL
푸코의 말이 맞을 거 같은데요. 책만 다른 책입니다.^^

파란흙 2008-11-15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를 나누었으되, 종류가 다른...뭐 이런 의미로 느껴집니다만. 그 공교로움과 아니러니컬함, 비애가 전달되지 않고 말이죠. 제각기 번역자들이 왜 저런 글을 동원했는지, 그 심경이 잡히는 듯, 무척 재미있습니다. 아무리 해도 운을 맞출 수 없는 부분은 접고 들어가야 하나요? 동족, 동류가 그 시도로 보이고 제겐 가장 어울리는 번역으로 느껴지네요. 하지만 읽을 땐 그 의미가 씹히지 않는 단점이 있군요. 아, 이래도 저래도 어렵습니다.

로쟈 2008-11-15 16:43   좋아요 0 | URL
<햄릿>의 대사들이 시이기도 하지만 무대언어라는 점이 중요한데, 많은 번역본들에서 간과되고 있습니다. 최종철역은 시라는 점은 강조하다 보니 특히 그렇고요...

lefebvre 2008-11-15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그 책이 맞군요! 일전에 제본 부탁드렸던 책. 야, 이거 알아맞추기 게임이 은근히 재미 있는데요?! ^^ 그나저나 그 "오래된"(?) 책을 어인 일로 들추셨나요? *^^* 그 책의 개정판이 나왔나보죠?

2008-11-15 16: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1-16 02: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1-16 19: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승주나무 2008-11-17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정환의 책에서 원문 냄새가 나서 좋았는데, 원문과 함께 보면 더 재밌을 것 같네요.. 지를까 말까 고민됩니다~ 또 ㅎㅎ

로쟈 2008-11-17 21:57   좋아요 0 | URL
어떤 고전이건 같이 보는 게 더 재밌지요.^^

승주나무 2008-11-27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 님 이 글을 퍼가도 될까요? 출처 밝혀서... 너무 좋네요^^

로쟈 2008-11-27 18:11   좋아요 0 | URL
오픈된 자료인데요 뭐. 한데 위의 댓글과는인터발이 있네요. '열흘' 동안 고민하셨나요?^^

승주나무 2008-11-27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제가 좀 소심한 편이라.. 원문+알파로 페이퍼를 만들어보고 싶기도 하구요^^
 

다시 번역 이야기다. 프랑스의 저명한 정신분석비평가 중 한 사람인 장 벨멩-노엘 교수는 국내 대학에서 초빙교수를 지낸 바 있어서 한국과는 인연이 없지 않다(나도 그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가 한국문학의 번역에도 관여한 줄은 이번에 알았다. 그가 지난주 방한하여 이 번역문제를 주제로 한 강연을 가졌다고 한다. 요점은 "해외에 한국문학을 소개할 때 너무 한국적인 것을 소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 귀담아 들어볼 만하기에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한국일보(08. 10. 23) "한국문학 해외에 소개할 때, 한국적인 것에 집착 말아야"

"소주와 김치도 즐겨먹고 사물놀이도 신명난다. 그러나 여행가라면 모를까, 문학비평가의 입장에서 그런 민속적인 것들은 흥밋거리가 될 수 없다."

연세대 국문학BK21사업단 초청으로 지난주 방한해 연세대, 고려대, 이화여대에서 한국문학을 주제로 한 강연회를 연 장 벨맹-노엘(77) 파리 8대학 명예교수는 "해외에 한국문학을 소개할 때 너무 한국적인 것을 소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2000년 이후 벨맹-노엘 교수가 불문학자 최애영(47)씨와 함께 프랑스어로 번역한 한국 작가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이런 발언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 이인성의 <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 <낯선 시간 속으로>와 정영문의 <검은 이야기 사슬>등이 그가 번역한 작품이다.

인간의 무의식, 욕망 등을 소재로 한 실험성이 강한 작품들로, 국내에서도 일반독자보다는 훈련된 독자들의 관심을 끄는 작품들이다. "프랑스인이건 한국인이건 심층부의 무의식은 누구에게나 동일하다"는 벨맹-노엘 교수는 특히 "이인성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대해 총체적 탐험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혀 새로운 작가"라고 평가했다. 김영하 역시 그가 눈여겨 보는 작가 중 한 명. 여성의 성(性) 문제를 천착한 단편 '피뢰침' '도마뱀' 등을 번역했는데 "구성이 섬세하고 작품이 열려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평했다.

그렇다면 식민지 경험, 압축적 근대화, 냉전적 대결구조 등 한국의 독특한 현실 문제를 다룬 작품들은 호소력이 없을까? 그는 "분단과 통일이라는 상황은 독일에서도 목격할 수 있었고, 길지는 않았지만 프랑스도 나치의 경험을 했기 때문에 한국문학의 정치ㆍ사회적 맥락은 새롭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며 "전쟁을 다루더라도 소재적 측면이 아니라 양질의 문학성을 보여주는 작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면서 한국문학의 특징을 '격렬함'으로 요약했다. 유교적 전통을 깨야 한다는 격렬함, 샤머니즘을 극복하자는 에너지를 극단으로 밀고 간다는 격렬함은 사무라이로 상징되는 일본문화의 격렬함과 흥미로운 비교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한국 작가의 노벨문학상 가능성에 대해서 그는 "중국의 한자문화권 체제에서 벗어난 지 1세기 정도밖에 안되는 등 아직 한국문학은 굉장히 젊고 어려 좀더 무르익어야 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글쓰기의 혁신성을 추구하는 몇몇 작가들은 주목된다"고 말했다.

파리고등사범학교 출신으로 파리 8대학 교수를 역임한 그는 국내에도 번역된 <정신분석학과 문학> <문학텍스트의 정신분석>등의 비평서를 냈다. 2000년 이후 한국문학을 번역하면서 2003년에는 서울대 불어불문학과 초빙교수로 1년간 한국에 체류하며 강의하기도 했다.(이왕구기자)

08. 10. 22.

P.S. 이인성의 <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문학과지성사, 1996)은 나도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다. 벨맹-노엘 교수가 선호하는 "인간의 무의식, 욕망 등을 소재로 한 실험성이 강한 작품들로, 국내에서도 일반독자보다는 훈련된 독자들의 관심을 끄는 작품들"이 어떤 걸 의미하는지 대략 짐작해볼 수 있다. 하지만 '훈련된 독자들'을 위한 책이 앞으로도 계속 출간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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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0-23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적인 것을 한국에만 있는 것으로 해석하면 음...뭐가 있을까요...어느 스페인 작가에 대해서 "지나치게 스페인적인 것을 내세우지 않아서 전세계에 독자가 있다"는 내용을 본 적이 있는데 우리나라에 적용해도 될 주문이죠.

로쟈 2008-10-23 20:45   좋아요 0 | URL
식민지, 전쟁, 분단 등의 경험이 한국만의 특수성은 될 수 없다는 지적은 유효해 보입니다. 그러니까 소재로 승부해서는 안되고, 문제는 질(혹은 보편적 호소력)이라는 얘기죠...

노이에자이트 2008-10-25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페인 내전이나 그리스 내전을 소재로 한 소설을 읽으면 거의 우리나라 소설과 비슷해요.우리나라 사람들이 이 세상 모든 고생은 혼자 하는 것처럼 엄살을 피우기는 하죠.

로쟈 2008-10-25 21:29   좋아요 0 | URL
그게 주관적 특수성일 텐데, 그걸 보편적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작가의 몫이죠. 말보다 어려운...
 

몇달 전 칼럼을 뒤늦게 읽고서 옮겨놓는다. '번역의 힘'에 대한 것이다. 필자는 지난봄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예담, 2008)란 책으로 화제를 모았던 노문학자 석영중 교수이다.

서울신문(08. 07. 14) [문화마당] 글로벌시대 번역의 힘

19세기 러시아 시인 중에 주코프스키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시도 잘 썼지만 유럽 문학을 러시아어로 번역하는 일에서 더욱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특히 그가 공들여 번역한 ‘오디세이’는 러시아 문학사에 큰 획을 그어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후배 작가 고골은 주코프스키의 ‘오디세이’ 번역이 문학의 새로운 시대를 연 사건이라고 환호하면서 미사여구로 가득 찬 아주 긴 에세이를 썼다. 한마디로 주코프스키의 번역은 기적이며 번역자는 원저자보다 더 생생하고 아름답게 고대 그리스의 삶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심지어 주코프스키가 평생 동안 썼던 창작 시는 이 번역을 위한 습작이라는 것이다!

나는 문제의 ‘오디세이’ 번역을 읽어 보지 못했으므로 고골의 평가가 어느 정도 공정한지 가늠할 수 없다.‘이거야 원 꿈보다 해몽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러나 고골의 글을 읽으면 어쨌든 무척이나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번역을 기적적인 사건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문학 풍토가 부럽고, 번역가에 대한 지극한 예우가 부럽고, 번역을 창작보다 더 높이 둘 수 있는 독자의 열린 마음이 부럽다.

러시아는 옛날부터 번역을 중시했다. 특수한 역사적 상황 때문이다. 러시아는 17세기까지 유럽 문화로부터 고립되어 있었다. 따라서 표트르 대제가 서구화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한 18세기 초부터 러시아인들이 당면한 과제는 서구 따라잡기였다. 번역은 서구화를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이었다. 지식인들은 서구 문화의 전통을 차용하고 번역하고 수용했다. 그러는 사이에 번역은 창작이 되고 수용은 서구를 향한 새로운 도전이 되면서 찬란한 러시아 문학과 예술을 탄생시켰다. 그러므로 푸시킨에서 파스테르나크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의 유명한 문인들 대부분이 창작과 번역을 같이 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러시아의 번역문화는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한다. 물론 러시아가 서구화를 향해 줄달음치던 시절과 오늘의 글로벌 시대를 같은 틀 안에서 얘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오히려 글로벌 시대이기에 그리스 로마 문화도 르네상스도 모르던 러시아를 한 세기 만에 문학강대국으로 만들어준 번역의 힘이 더욱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번역은 대화다. 원저자와 번역자 간의 대화이고 언어와 언어 간의 대화이며 문화와 문화 간의 대화이다. 우리가 세계를 향해 말을 하고 싶다면 세계가 하는 말을 듣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이해의 양과 질과 속도는 결국 우리 문화의 성장을 좌우한다. 글로벌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대화로서의 번역을 요구한다.

지난 몇 년 동안 우리나라에서도 번역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학부에 번역학과가 창설되기 시작했고 번역학회와 번역가들의 활동이 다원화되고 있으며 명저 번역에 대한 정부의 지원도 지속되고 있다.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아직도 전문 번역인의 수는 턱없이 부족하다. 언어적 소양과 타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 그리고 전문가적인 양심을 갖춘 번역인 양성을 위해 지금이라도 정부가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더불어 번역 서평을 활성화하고 번역 윤리를 정착시킬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무성의한 번역, 엉터리 번역, 기존 번역의 표절 같은 것들이 설 자리가 없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한다.

그러나 가장 시급한 것은 번역에 대한 사회 통념의 전격적인 변화이다. 번역은 문화 발전을 위한 가장 강력한 원동력 중의 하나라는 생각이 굳건하게 뿌리내려야 한다. 우수한 번역가도 필요하고 명민한 번역비평가도 필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번역에 대한 국민의 인식 자체를 바꾸어 글로벌 시대를 선도할 수 있는 번역 문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는 일이다.(석영중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08. 09. 20.

Гомер Одиссея: Поэма (пер. с греч. Жуковского В.А.; предисл. Нейхардт А.; прим. Ошерова С.)

P.S. 주코프스키의 '오디세이' 번역은 http://az.lib.ru/z/zhukowskij_w_a/text_0180.shtml 에서 읽어볼 수 있다. 작가들의 번역도 '전집'에 포함하는 것이 '러시아의 번역문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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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9-20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을 중시하는 나라가 문화대국입니다.우리나라도 대학원생들에게 공짜로 번역시키는 교수들이 사라질 때 문화대국이 될 것입니다.대학원을 안 다녀봐서 경험은 안 해봤지만 이런 일이 많다고 하더군요.

로쟈 2008-09-20 20:20   좋아요 0 | URL
우리의 '번역문화'죠.^^;

노이에자이트 2008-09-20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사람보다 더 뻔뻔한 종자가 모든 것을 맨입으로 해결하려는 놈들이죠.특히 위계질서 내세워서...

로쟈 2008-09-21 09:41   좋아요 0 | URL
덧붙여 현재와 같은 강사시스템도 세계적으로 희귀할 거 같다는 생각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9-21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달 전 주한외국인이 불법체류하다가 철창생활하면서 겪은 책이 소개되었는데 한국인은 감옥에서도 쉰살이 넘은 남자들이 누가 형이냐 동생이냐 따지더라는 일화가 나오더라구요.그 외국인 남자는 "한국엔 평등한 인간관계가 없다.모두 위아래를 따진다.아랫사람은 철저히 윗사람의 횡포를 감수해야 한다"고 결론냈는데 정확한 진단이라고 봅니다.

로쟈 2008-09-22 16:41   좋아요 0 | URL
네, 소개기사를 읽은 기억이 납니다...

Sati 2008-11-13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대그리스어를 모르던 주코프스키가 오디세이를 번역할 수 있도록 독일인 작가가 독일어로 축역을 해주었다니, 주코프스키의 명역도 팔자가 좋아서 탄생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

로쟈 2008-11-13 06:56   좋아요 0 | URL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군요.^^
 

엊그제 교수신문에서 <로마 제국 쇠망사> 번역자의 번역기를 옮겨놓았는데, '번역을 말한다' 코너가 계속 연재되는 모양이다. 이번주에는 윌리엄 호스킨스의 <잉글랜드 풍경의 형성>(한길사, 2007)이 다루어졌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6810). 필자는 책의 번역자인 이영석 교수이다. 자료삼아 스크랩해놓는다(이 연재는 아마도 계속 옮겨놓을 듯싶다). 

교수신문(08. 09. 16) 역사적 지층의 의미를 찾아서

윌리엄 호스킨스의 『잉글랜드 풍경의 형성』은 영국사학계에서 역사지리학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연 고전으로 평가받는다. 호스킨스는 우리의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단순한 자연이 아니라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역사적 형성물이라는 전제 아래 잉글랜드의 구릉과 평야, 경지와 목초지, 촌락과 도시 등을 탐사한다. 이 책의 개요는 1970년대 중엽 BBC 텔레비전에 방영돼 사람들의 열띤 호응을 얻었다.

내가 이 책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지금부터 거의 20년 전의 일이다. 그 당시 나는 존 해리슨의 『영국 민중사(The Common People of Great Britain)』를 번역하고 있었는데, 거기에서 발췌한 호스킨스의 글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 후에도 영국사회사를 다룬 책들에서 간혹 그 책을 인용한 구절을 발견하곤 했다. 1990년대 중엽 런던의 한 헌책방에서 펭귄판 책을 구입하기는 했지만, 서가에 꽂아놓았을 뿐 눈여겨보지 않았다.

1990년대 말 근대 영국 사회경제사를 다룬 연구서를 내놓은 후, 나는 자신의 역사 연구에 깊은 회의감을 느꼈다. 아마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탓이 아니었나 싶다. 우선 무엇보다도 무미건조한 사회사 서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렸다. 역사서술의 문학성을 중시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이곳저곳에 눈길을 돌리며 암중모색하던 내게 호스킨스의 책은 한 줄기 섬광처럼 감동으로 다가왔고 새로운 지적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2003년 영국에 체류하면서 이 책을 본격적으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 해 내내 나는 호스킨스의 체취에 깊이 빠져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사료에서 문제를 찾고 그 문제를 수수께끼처럼 풀어나가는 그의 지혜와 잉글랜드 자연풍경 하나하나에 기울이는 깊은 애정과, 그리고 특히 그의 뛰어난 문학적 상상력에 사로잡혔다. 미들랜즈 동부의 시골길을 걷다가, 책에서 읽은 정경이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호스킨스의 책은 농촌 풍경에 남아 있는 ‘역사적 지층’의 의미와 비밀을 해독하려는 시도다. 여기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하나의 풍경이 역사적 시간을 중층적으로 담고 있다는 점이다. 비유하면 풍경은 ‘거듭 새긴 양피지’(palimpsest)와 같다. 우리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는 역사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자취와 그들이 그린 흔적이 남아 있다.

후대 사람들은 그들 선대의 자취를 반쯤 지우고 그 위에 자신들의 삶의 흔적을 덧칠한다.  호스킨스는 바로 이 거듭 새긴 양피지에서 과거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뒤쫓는다. 현재의 촌락과 발굴된 촌락터를 답사하면서 그곳에서 옛날 켈트인들의 정착과 후대 앵글로색슨인들의 이동과 중세 농민의 생활과 그리고 상승하는 부농의 새로운 모습을 그림처럼 되살린다. 말하자면 낯익은 풍경에 대한 해독을 넘어 그 속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재현하는 것이다.

호스킨스는 자연 모두가 사람의 활동과 관련되며 우리가 무심히 지나치는 미미한 경관과 풍경 속에도 인간의 삶이 깃들어 있다는 믿음을 가졌다. 그는 풍경이라는 창을 통해 인간의 삶의 모습을 되살린다. 그렇다면 2차 대전 직후 호스킨스를 비롯한 일단의 역사가들이 풍경의 역사에 관심을 기울인 까닭은 무엇인가. 그들의 움직임은 자연 자체의 위기를 목격하기 시작한 데서 비롯한다.

2차 대전의 폐허와, 그리고 냉전기에 군사기지와 군비행장을 건설한다는 명목으로 구릉과 경지와 산림을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들은 잉글랜드 지방 곳곳을 답사했다. 물론 역사적 풍경을 탐사하는 작업은 호스킨스 개인의 노력만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20세기에 들어 새롭게 대두한 지명 연구와 고고학과 그리고 무수한 아마추어 지방사가들의 작업에 힘입어 호스킨스와 그의 동료들은 잉글랜드의 역사 속에서 풍경을 재구성하는 일에 매달릴 수 있었다. 사실 호스킨스의 책은 시론적인 것이며, 그의 책이 나온 뒤에 각 지방별로 풍경의 변화를 탐사하는 작업이 계속 이어졌다.

2005년판 서문에서 키스 토머스는 호스킨스의 책이야말로  20세기 ‘불후의 명작’ 가운데 하나라고 단언한다. 사실 호스킨스가 이 책을 펴낸 1950년대 중엽만 하더라도 그의 목소리는 주위의 소음에 묻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오히려 그의 나직한 목소리는 한 세대가 지난 후 환경과 생태에 대한 우려와 관심이 증폭되면서 설득력을 얻게 됐다.

호스킨스의 책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높은 호응과 관심을 얻고 있다. 특히 근래 영국의 환경과 생태는 1950년대 냉전기의 변화보다도 더 커다란 변화를 겪고 있는데, 오늘날 호스킨스에 대한 관심이 다시 고조되고 있는 것 또한 의미심장한 일이다. 영국 경제의 호황과 더불어 곳곳에서 새로운 건축물이 들어서고 대규모 토목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호스킨스가 살아 있다면, 그는 냉전기의 폐해보다도 현재의 변화가 더 심각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2005년 판 서문을 쓴 키스 토머스도 두 세대 전 호스킨스가 느꼈던 것보다 더 심한 자괴감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암암리에 내비친다. 돌이켜보면, 근대의 지적 전통에서 자연은 사람과 상호작용하는 유기체가 아니라, 그 사람들에 의해 개조되고 변형되는 수동적 존재로만 여겨졌다.

그리하여 자연은 언제나 사람들의 삶에 걸맞게 변형된 ‘인간화된 자연’이었다. 그 전형이 풍경이다. 이제 자연은 더 이상 자신의 인간화를 감내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세계 곳곳에서 자연의 복수가 시작되고 있다. 이제는 풍경에 가까이 다가서려고 한 호스킨스의 작업을 넘어서 인간화된 자연이 과연 앞으로 지속 가능한지 심각하게 되묻지 않으면 안된다.

호스킨스의 책은 자연과 환경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해준다. 우리는 잃어버린 자연과 환경만을 뒤쫓아 갈 수는 없다. 그러나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관심을 내면화하고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잃어버린 자연을 일부나마 다시 되살리며 남아 있는 자연이 우리의 삶과 공존할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책을 번역할 때 한 가지 궁금증이 오랫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동안 우리의 풍경은 어떻게 변했는가.  무엇을 잃어버리고 또 무엇을 얻었는가. 지난 반세기에 걸쳐 산업화라는 이름 아래 급속하게 뒤바뀐 우리 풍경에 관해 과연 호스킨스의 작업과 같은 그런 연구와 탐사가 가능할 것인가.(이영석 광주대 서양사)

08. 09. 16.


 

 

 

 

 

 

P.S. 생소한 책이지만 리뷰를 읽다 보니 또 관심을 갖게 된다. 역자의 <역사가가 그린 근대의 풍경>(푸른역사, 2003)이 이 책의 번역과정에서 얻은 소출임을 짐작할 수 있다. 나란히 읽어봄 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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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9-17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를 매혹한 역사가들>에서 호스킨스를 소개하더니 이번엔 번역을 냈군요.영국 사회사가들을 많이 소개하더라구요.

로쟈 2008-09-17 17:43   좋아요 0 | URL
저는 풍경이라고 해서 '풍경화'만 떠올렸어요.^^;

릴케 현상 2008-09-17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본 <추억은 방울방울>이라는 애니메이션 대사가 떠오르네요


도시오: 도시사람은 삼림과 숲과 물이 흘러가는 것을 보고 곧, 자연이다. 자연에게 감사하겠죠. 그렇지만, 산은 물론이고 시골의 경치라는 녀석은 모두 인간이 만든 것이죠.
다에꼬: 인간이?
도시오: 예. 농부가.
다에꼬: 저 삼림도?
도시오: 예.
다에꼬: 저 숲도?
도시오: 예.
다에꼬: 저 작은 시내도?
도시오: 예. 논과 밭뿐이 아닙니다. 모두 분명히 역사가 있습니다. 어디어디의 증조할아버지가 심 었다든지 개간했다든지, 먼 옛날부터 장작과 낙엽 등과 버섯을 얻어 왔다든가……
다에꼬: 아아……그렇군요.
도시오: 인간이 자연과 싸우기도 하고, 자연으로부터 여러 가지 것을 받기도 하며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 훌륭하게 만들어져 온 것이 경치예요. 이것은.
다에꼬: 인간이 없었다면 이런 경치로 되지 않았다는?
도시오: 농부는 끊임없이 자연으로부터 얻음을 계속하지 않는다면 살 수 없게 되겠죠?
그렇기 때문에 자연에게도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농민 쪽도 여러 가지 일을 해주어 온 거죠. 말하자면, 자연과 인간과의 공동작업이라고 하는 것, 그런 것이 아마 시골이라 할 수 있겠죠.
다에꼬: 그렇군……그래서 그리웠던 거였구나…… 태어나서 자랐던 일도 없으면서 어째서 이곳이 고향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일까……계속 생각해 왔었어요. 아……그래서였구나……
다카하타 이사오, 에니메이션〈추억은 방울 방울〉중에서

로쟈 2008-09-18 00:12   좋아요 0 | URL
대사를 다 받아적으신 건가요?^^

릴케 현상 2008-09-18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그럴리가요^^

2008-09-23 02: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9-23 14: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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