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감옥에서 다시 원고 감옥으로 이감해가는 중에 잠시 풍경을 내다보는 기분으로 페이퍼 하나를 적는다. 엊그제 새로 번역된 토마스 만의 <마법의 산>(세창출판사, 2013)을 구입했는데, 물론 그간에 <마의 산>이라고 번역된 작품이다. 개인적으로는 일역본 제목에서 온 <마의 산>이 평소에 좀 어색하다고 생각해온 터라 개명된 제목이 오히려 더 나아 보인다(영어본의 제목도 그냥 'The Magic Mountai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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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는 <마의 산>을 <마법의 산>이라고 옮기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적었다(하권의 역자해설, 663쪽).
이제까지 독일어로 Zauberberg(영어로 Magic Mountain)는 '마의 산'으로 번역되어 왔다. 그러나 역자는 이 번역이 오류라고 생각하여 '마법의 산'으로 옮겼다. 마(魔)는 악마라는 뜻으로 오해될 소지가 많으며, 이렇게 되면 소설의 내용까지도 전도될 위험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토마스 만은 이 소설에서 무시무시한 산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자주 언급하였듯이 '연금술적인 신비'와 '마법'이 작용하는 산을 다루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단순했던 주인공이 정신적으로 성숙해지고 고양되는 소위 '교양소설' 내지 '발전소설'의 양상을 서술해 나간다.
시간을 내서 <마법의 산>으로 읽어보고픈 생각이 든다. 그렇게 새 번역본을 접한 김에 또 생각난 책은 얼마전에 첫 권이 나온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펭귄클래식, 2013)다. 물론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새 번역본이다. 언제 완간되는지는 모르겠지만 표지만 보면 다섯 권짜리로 나오는 듯도 싶다. 민음사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경합을 이룰 책(두 역자는 모두 프루스트 전공자이며, 김화영 교수의 번역본까지 가세하게 되면 언제가는 3파전이 벌어질지도 모르겠다. 원로 불문학자의 번역으론 김창석, 민희식 교수의 번역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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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는 '잃어버린 시간' 대신에 '잃어버린 시절'이라고 옮긴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시간’이라는 것은 광대무변한 공간 속에 처한 무시무종의 질료세계에서 포착되는 물리적 이동 및 변화 현상을 기술하기 위하여 고안된 합의개념일 뿐, 즉 공간 및 그 속에서 부유하는 질료덩이들에 종속되는 개념일 뿐, 그 독립된 실체가 없는 일종의 허개념입니다. 따라서 ‘시간’이라는 것은 잃거나 되찾을 수 있는 그 무엇일 수 없습니다. 반면 ‘시절’이란 하나의 오성(감각 및 인지의 주체)이 이미 겪은 실존의 퇴적물이며, 그 ‘시절’은 오직 질료적 접촉에 의해서만 필연적으로 부활하는, 그리고 전적으로 주관적인 새로운 정서적 국면입니다. 물론 그 ‘시절’ 또한 엄밀히 말해 우리의 염원이나 의지에 따라 되찾을 수 있는 무엇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계시(쏘크라테스적 의미로써의 계시) 혹은 영감처럼 번개가 명멸하듯 우리를 스쳐갈 뿐, 따라서 그것을 ‘찾는다’ 하는 말은 그러한 계시에 귀 기울인다는 정도의 뜻을 가질 수 있을 듯합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시절’은 ‘시간’과 달리, 기다림이나 명상 혹은 모색의 대상일 수 있습니다. 여하튼 작품의 말미에서 주인공은 ‘잃어버린 시절(le temps perdu)’이 곧 ‘옛날(les jours anciens)’을 가리킨다고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번역어는 ‘롤랑의 노래’나 ‘니벨룽겐의 노래’, ‘음유시인’, ‘서사시’ 등처럼, 우리가 외래 문물을 받아들이던 초기에 오역된 숱한 말들 중 하나일 듯합니다.
그렇게 해명은 하고 있으나 개인적으론 동감하기 어렵다. '시간'이란 허개념이고 '시절'이 주관적, 정서적 국면을 지시하기에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라고 하는 게 옳다는 얘기지만, 이미 '잃어버린 시간'이란 말에 역사적, 문화적으로 축적된 정서적 국면이 내재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이질적인 개명으로 카뮈의 <이방인>을 <이인>(문학동네)이라고 옮긴 경우도 떠올려볼 수 있다. 두 경우 모두 역자의 깊은 주관적 소신을 반영하고 있지만, 나로선 모두 동의하기 어렵다.
이 두 가지 개명된 제목에 대해 각기 다른 느낌을 갖는 것은 나만의 주관 탓일까...
13. 06.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