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는 성경이 아니다"

리링의 <집 잃은 개>를 둘러싼 논쟁 소개기사에 이어서 국내 논어 번역사를 일별해준 기사도 옮겨놓는다. 논어 읽기에 참고할 만하다.  

 

교수신문(11. 08. 16) 국내 논어 번역 어떻게 전개됐나 

근대적 의미에서 우리나라 논어 번역의 시작은 1908년 최남선이 창간한 잡지 <소년>의 제9호 (1909년 8월)부 터 제12호(1909년 11월)까지 실린 「소년논어」에서 찾을 수 있다. <소년>이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되면서 「소년논어」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소년논어」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논어 번역’이란 자리에 손색이 없음은 물론이고, 시간을 뛰어넘어‘번역의 전범’이라 평가받아 마땅하다.  

「소년논어」의 탁월성은 일제강점기에 번역된 두 종류의 번역서와 비교할 때 더욱 두드러진다. 1922년에 유교경전강구소에서 간행한『諺譯걩語』와 1932년 이범규가 간행한『言解四書』는 여전히 전통적 방식을 답습하는 데 그쳤지만 그보다 훨씬 앞서 최남선은「소년논어」를 통해 전통을 근대로 번역하는 가치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의 번역이 한자어를 중심으로 우리말토를 붙이거나, 한문을 단순히 한글로 바꿔 놓았을 뿐 우리말을 적극적으로 쓰지 않았던 것에 비해, 광복이후 1960년까지의 논어 번역은 전면적으로 우리말을 중심으로 번역문을 싣고 있다는 점에서 확연하게 다르다. 따라서 이들 번역서는 논어의 내용을 당시의 언어생활의 변화추세에 맞춰 새롭게 번역했다고 할 수 있다. 곧 유가철학원전의 대표격인 논어를 번역대상으로 삼았기에 내용상으로는 전통적인 것을 계승했다고 할 수 있지만, 전통적 표현방식과의 결별을 선언했다는 점에서는 논어에 대한 인식의 수준이 한층 높아졌다. 



계승한 것과 결별한 것
50년대의 대표적인 번역서로 1956년 통문관에서 간행한 이가원역『논어신역』을 들 수 있다. 이 책에서는 논어의 첫 번째 문장에 나오는 ‘學而時習’을‘배운 글을 복습한다’고 번역하고 있으며, ‘有朋自遠方걐’또한‘함께 연구하는 벗’으로 번역하고 있다.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익힌다는 것인지 불분명한 이전의 번역에 비해 ‘글을 익히는 것’을 학문의 구체적 대상으로 분명히 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일보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학자의 본분을 글을 배우는 데 국한하고 있으니 이는 원문이 지닌 실천적 의미를 놓친 셈이다. 또‘벗이 찾아와 나와 함께 연구한다’는 번역문을 봐도 실천적 행위보다는 강단학자의 연구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그리고 있으니 아무래도 아쉽다.

60년대의 논어 번역서로는 1969년도에 을유문화사에서 간행한 차주환역 『논어』를 주목할 만하다. 이 책은 비슷한 시기의 번역서들이 ‘성경의 존엄성’을 말하거나 ‘총명한 성인의 가르침’운운한 것과 비교할 때 비교적 객관적인 시각에서 논어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 또 기존의 논어가 모두 원문을 번역문의 앞뒤에 병기하고 있는 데 비해 이 책은 원문을 책의 말미에 따로 엮어두었다. 번역문만으로 논어를 읽게 하겠다는 의도가 분명히 보인다. 또 논어 첫문장의‘不亦說乎’와‘不亦樂乎’를 풀이하면서‘說’은‘마음 속으로부터 우러나는 희열’이고, ‘樂’은 ‘사람들과 학문성취에 뜻을 두고 같이 공부하는 즐거움’이라고 풀이해 ‘열’과 ‘낙’의 차이점을 분명히 의식하고 번역에 반영한 점이나, ‘불역군자호(불역)’를 “군자답지 아니하냐”라고 번역한 점 등은 이전 번역에 비해 정확도가 높아졌음을 보여준다.

70년대에는 이전의 그 어느 시기보다 많은 양의 논어 번역서가 간행됐지만 그 중 주목할 만한 책으로는 단연 이을호역 『한글논어』를 들 수 있다. 1974년 박영사에서 문고판으로 간행된 이 책은 기존의 번역서는 물론이고 당시의 일반적인 번역의 수준을 단번에 뛰어넘는 뛰어난 성과물이다. 이 책은 원문의 함의를 충분히 전달하면서도 원문에 얽매이지 않고 과감하게 우리의 일상 언어로 바꿔 번역했으며, 자연스러운 대화체를 사용함으로써 마치 공자의 육성을 직접 듣는 것처럼 생동감 있게 번역했다. 또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고 명료하게 번역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원문과의 대칭적 구조까지 살린 탁월한 번역이다. 게다가 삶의 문법이 분명히 보이는 번역으로 권위의 굴레를 벗고 일상 속으로 다가오는 공자를 보여주고 있다. 

80년대에는 70년대보다 오히려 적은 양의 논어 번역서가 출판됐지만 내용면에서는 번역의 정확성이 향상됐기 때문에 질적으로는 어느 시기보다 풍성하게 결실을 맺은 때이기도 하다. 이 중 거론할 만한 번역으로는 1984년에 간행된 안병주외역『논어』, 1989년에 간행된 김학주역 『논어』와 김종무저『논어신해』, 1990년에 간행된 성백효역 『논어집주』가 있다. 이 중 안병주외역 『논어』는 유학, 한국철학, 동양철학 전공자 8명이 참여해 번역한 공역으로 번역의 정밀도 부분에서 기존 논어의 문제점을 상당히 해소한 역작이라 할 만하다. 또 중국문학전공자의 번역인 김학주역『논어』도 전공자의 장점이 돋보이는 정밀한 번역과 상세한 주석 등 여러 가지 장점을 겸비한 책이다. 아울러 1989년에 간행된 김종무역『논어신해』또한 거론할 만한 논어번역서이다. 이 책은 실질적인 ‘역자’인 김종무를 ‘저자’로 표기하고 있을 정도로 새로운 해석을 많이 제시하고 있다. 기존의 번역은 대체로 역자가 주희의 주석이나 정현의 주석을 임의로 선택하여 번역하고 있는데, 이 책은 기존의 주석을 대체로 비판하면서 번역자 자신의 견해를 중심으로 전혀 새로운 내용의 논어를 구성하고 있다.   

이처럼 80년대에는 새롭고 참신한 번역서가 많이 간행됐지만 그 중에서 학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번역을 들라면 1990년에 간행된 성백효역 『논어집주』를 들겠다. 성백효역 『논어집주』는 지금까지 전공자들에게 가장 많이 읽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문을 학습하는 교재로 꾸준히 읽히고 있다. 『현토완역 논어집주』라는 제목의 이 책은 그 당시 비중이 점점 줄어들고 있던 주희의『논어집주』를 완역한 번역서다. 무엇보다도, 당시까지 본문 번역과 주석 내용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거의 유일한 번역이기 때문에 학술적 가치 또한 높다. 또 이 책은 이후 유사한 아류번역서들이 나올 정도로 학습에 편리하게 구성돼 있을 뿐만 아니라 한 글자 한 글자를 놓치지 않고 철저하게 축자역을 하고 있어서 한문을 정확하게 익히려는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 아울러 새로운 해석과 새로운 주석이 주류를 이루는 상황에서 조선조의 독서인들이 가장 많이 읽었던 『주자집주』를 처음으로 완역함으로써 학술적 균형을 도모했으니 번역사적 의의 또한 매우 크다.

90년대의 논어 번역은 완전 한글 번역이 주류를 이뤘다. 1998년에는 한필훈역 논어 『한글로 읽는 논어-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가 나왔고 1999년에는 김형찬역 논어 『논어이야기』가 나왔다. 이 두 책은 한글 번역문을 앞에 놓고 원문은 뒤로 보내 번역문 만으로 논어를 읽을 수 있게 배열했는데 모두 자연스러운 우리말로 편안하고 쉽게 공자의 일상을 그려내고 있어 읽기에 부담이 없다.

2000년에 나온 황희경역 『논어』는 ‘삶에 집착하는 사람과 함께하는’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헌책 중의 헌책’인 논어에서 새로운 생각거리를 찾을 때 읽을 만한 책이다. 이 책은 공자를 신성시하거나 완전한 존재로 가정하지 않고 우리가 공자를 넘어서서 생각해볼 만한 여러 문제를 제안하고 있다. 논어 밖에서 논어를 바라보는 길을 터주는 독창적인 저자물이다. 



2002년에 나온 배병삼역 『논어』는 통치자와 백성의 관계에 대한 공자의 생각을 전하는데 각별히 공을 기울인 참신한 번역이다. 예를 들어, 덕치나 효에 대한 공자의 말이나, 계강자와의 대화에서 보여준 공자의 말을 정치적 맥락으로 풀이한 내용은 상당한 개연성이 있어서 논어를 정치학적 관점에서 읽고자 하는 이에게 추천할 만하다. 



최근에 나온 논어 중 주목할 만한 번역서로 2010년에 이지형이 완역한 정약용의 『논어고금주』와 올해 나온 박성규역 『논어집주』를 빼놓을 수 없다. 『논어고금주』완역은 한대와 송대의 경학 전통을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문제의식으로 가로지른 우리 역사상 가장 독창적인 논어주석서의 완역이라는 점에서 노작 중의 노작으로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또 박성규역 『논어집주』는 ‘주자와 제자들의 토론’이라는 부제가 보여주듯, 주희의 집주를 단순히 번역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해당 주석의 내용과 연관이 있는『사서혹문』,『 주자어류』,『 주자문집』등을 추적해 주희의 견해가 성립된 근원을 탐색하고 있다. 논어를 읽으면서 주자학의 장대한 세계관을 음미할 수 있게 해주는 수작이 아닐 수 없다.

디딤돌을 딛지 않는 학계 풍토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최남선이 근대적 의미의 논어 번역을 시작한 이래 수많은 걸작이 탄생했다. 하지만 우리 학계에서는 아직 이런 결과물을 정당하게 평가하고 있지 않다. 연구자라 해도 일반적으로 우선 만나는 논어는 번역서일 것이다.

그런데도 번역서들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없으니 우리는 아직도 ‘논어를 제대로 만나지 못하고 있다’고 하면 과장일까. 학계에서조차 논문을 쓸 때 원전을 인용하면서 이들 번역서를 참고하는 경우를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논어를 번역하는 번역자들 또한 앞선 번역을 참고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번역서는 연구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디딤돌 같은 것. 디딤돌을 딛지 않고 거센 물살을 잘 건너기는 어려운 법이다. 좋은 번역서를 잘 활용하면 원문을 제대로 만나는 건 물론이고 원문을 뛰어넘어 더 다양한 사상의 줄기 안에 들어서는 즐거움도 맛본다. 오랜 시간 공들여 번역한 결과물을 연구자들이 읽지 않는다면 번역의 노고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전호근 경희대·한국철학) 

11. 08.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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瑚璉 2011-08-21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주환 역 논어로 논어에 처음 발을 들이게 되었는데 다시 보니 반갑네요.

로쟈 2011-08-22 21:45   좋아요 0 | URL
저는 최근에 황종원 베이징대 교수 번역본으로 다시 구했습니다...

담연 2011-08-28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성규 역주 논어집주가 걸작입니다. 학교에서 그분의 강의를 들었는데, 번역에 대한 원칙이 매우 철저하고 엄격하신 분입니다. 풍우란의 <중국철학사> 번역자로서 중국철학에 대한 넓은 이해도 가지고 계시며, 주자 철학을 전공하셨기 때문에 주자 집주에 관하여 누구보다도 능통하십니다. 언젠가는 철학과 시간강사실에 직접 찾아가서 출간을 축하드리고 선생님 책에 저자 서명을 받은 기억이 납니다.

로쟈 2011-08-27 22:13   좋아요 0 | URL
아 풍우란 번역자시라면 믿어봄직하겠네요. 저도 구해봐야겠습니다.^^
 

얼마전 중견출판사 생각의나무가 부도를 내고 문을 닫았는데, 소식을 접하자 마자 절판이 염려돼 구한 책은 켄트 가이의 <사고전서>(생각의나무, 2009)이다(알라딘에는 이미 품절이어서 교보에서 구했다). 청 건륭제 때 편찬된 이 방대한 서물을 다룬 저자의 하버드대 박사학위논문이다. 건륭제 혼자만의 열람을 위해 편찬했다는 사고전서는 대략 3,600여 종, 36,000여 책, 79,000여 권 규모라 한다. 거의 책으로 쌓은 만리장성이라 할 만하다. 어제 교수신문에서 이 사고전서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를 접했다. 어림계산으로 200년이 걸리는 작업이라 한다. 한여름밤의 몽상일는지 모르지만 그럴 듯하게 여겨져 스크랩해놓는다.      

  

교수신문(11. 07. 18) 우리 학계에 존재하는 상상력의 빈곤

나는 2003년부터 7년 동안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朱子大全』과 『朱子語類』를 번역하는 연구팀의 일원으로 일할 수 있었다. 고전의 번역 과정에서 역주의 필요성 때문에 참고문헌을 뒤적이는 일은 모든 번역자들이 마주치는 일상의 다반사다. 거기에 수반되는 두통과 지끈거림은 겪어본 이들은 모두 공감한다. 오늘날에는 디지털 기술로 구축된 다양한 데이터베이스들이 있기 때문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절감할 수 있다.  

필자의 경우 많은 도움을 받은 것은 고전번역원의 한국고전종합DB, 타이완 중앙연구원의 25사 원문 서비스, 그리고 문연각본 『四庫全書』를 디지털화 한 전자판 『사고전서』였다. 작업 도중에 정확한 서지사항의 표기를 위해 원문 확인이 필요한 경우 전남대 도서관 4층의 고한적실을 이용했다. 거기에는 상무인서관에서 출판한 『사고전서』의 영인본이 보관돼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거의 매일 도서관을 오르내리다 보니 어느 날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사고전서』에 수록된 책들을 다 번역하려면 얼마나 걸릴까? 이 총서는 현대적인 제책으로 1천501권이고, 한 쪽 당 10행 20자 원문이 4면씩 축소 영인돼 있다. 실제로 전체 분량은 단행본 6천여권 정도에 해당하는 것이다. 평균 쪽수가 1천쪽이라고 간주하고 일반적인 한문 고전의 번역 관행을 적용할 경우, 1만8천 권 정도로 이뤄진 학술 총서가 발행된다. 어림잡아 2만여권 내외의 번역물이 예상되는 것이다.

연인원 200명을 기준으로, 개인당 2년에 단행본 한 권씩 번역한다고 가정할 경우 약 200년이 소요된다. 한국연구재단이 지원하는 학술 연구 교수의 수준을 적용해서 1인당 연간 3천600만원의 인건비를 책정한다면 1조 4천400억 원이 필요하다. 결국 1조 5천억 원 정도와 연인원 200명, 200년의 시간이 번역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변수를 감안하더라도 현재 기준으로 5조원 정도의 예산을 300년 정도 투입하는 선이면 가능할 것이다.

2만권의 번역본으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만나 본 적이 없는 새로운 학문 분야의 탄생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四庫學’이라고 불릴 수 있다. 그것의 내용은 중국학, 동양학, 고전학, 문화학, 신화학, 천문학 등등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 될 것이다. 한 마디로 그것은 여러 가지 학문의 상호착종과 교차를 특징으로 삼는다.

현대적 용어를 빌리자면 ‘인지적 유동성(cognitive fluidity)’혹은 ‘개념 혼성(conceptual blending)’이라고 불리는 인지적 능력은 자신의 창발적 활동을 위해 이러한 지적 배경을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포코니에와 터너가 말했다시피 ‘인간의 문화와 사고는 근본적으로 보수적이고, 인간의 문화와 사고는 이미 이용 가능한 정신적 구성물과 물리적 사물로부터 작동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온고이지신’이란 이런 현대적 이해를 예언하는 고풍스런 전조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이런 상상을 하는 주된 이유가 하나 있다. 어째서 우리 학계에는 겨우 100년을 유지하는 학술 계획조차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한국 인문학의 전통을 최초로 개인 문집을 남긴 최치원의 『계원필경』으로부터 잡더라도 벌써 1천300여 년이 흘렀다. 이 학문의 역사 속에 겨우 1세기를 지속 기간으로 하는 비전과 목표조차 마련하지 못하는 상상력의 빈곤을 생각해보면 왜소함과 답답함에 현기증을 느낀다. 학술계에서조차 이런 상상이 불가능하다면 어느 영역에서인들 같은 것이 가능하겠는가.

1세대가 시작하고, 2세대가 골격을 세우며, 3세대가 지붕을 올려 완성하는 상상의 학술 생태계를 그려보는 우활한 몽상은 대체적으로 비웃음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경ㆍ사ㆍ자ㆍ집의 四大江이 현대 한국어로 미래의 인지적 상상력과 만나서 문화의 꽃을 피우는 몽환경은 삽질이란 평이한 낱말의 사용을 다시 되돌아보게 만든다.

어쩌면 삽질이라는 낱말은 삽이 꽂혀야 할 곳으로서 대상화되는 저 자연의 사대강 속에서 자신의 깊은 의미를 박탈당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것처럼, 낱말의 의미는 가정된 대상과의 지칭 관계가 아니라 다양한 사용 속에서 발견돼야 하기 때문이다. 하기야 이런 종류의 삽질을 위해서는 창조성이 폭발하는 무형의 문화 공간을 상상하고 그려내야 하는 도저한 상상력이 필요한 만치, 빈곤한 상상력에 감식안마저 무딘 누군가에게는 사대강이 콘크리트로 정돈되는 데 필요한 몇 년마저도 터무니없이 길게만 느껴지질 것이다.(이향준 전남대 박사후연구원·철학)  

11. 07. 23.  

P.S. <사고전서>의 번역자는 중국사 전공자로 <사고전서> 외 유익한 책을 여럿 우리말로 옮겼다. 벤저민 엘먼의 <성리학에서 고증학으로>(예문서원, 2004)도 그중 하나인데, 나머지 책들도 모두 구해놓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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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사람 2011-07-27 0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흥미있는 글이네요. 개인적으로는 중국의 정사 24사를 누군가 나서서 번역했으면 합니다. 사기는 완역이 나온 것 같은데 한서 삼국지쯤 가면 초역이고 그 이후는 번역이 아예 없는듯합니다. 만일 중국 정사를 한국어로 읽을 수 있으면 여러 후속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난 20년간 한국학에 있어서 가장 큰 사건은 조선왕조실록 완역이었다고 생각하는데 중국과의 교역이 이미 미국을 넘어선 시점에서 중국역사 연구의 시초는 바로 중국 24사의 번역이라고 생각하는데 꿈일까요.

중국 정사 24사는 뉴욕 한인 밀집지역인 플러싱 공립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는데 한문으로 된 것이라 전혀 접근이 불가합니다. 쩝 (미국 공립 도서관은 정말 놀랍죠, 대학 도서관은 말할 것도 없고요)




로쟈 2011-07-27 22:10   좋아요 0 | URL
24사 번역은 20년쯤 걸릴까요?^^;
 
다시 읽는 식민주의와 탈식민주의

포스트식민주의 이론가로 국내에는 소개된 로버트 영 교수가 학술대회 참석차 방한했던 모양이다. 인터뷰기사가 눈에 띄기에 스크랩해놓는다. 그의 책으론 <백색신화>(경성대출판부, 2008)와 <포스트식민주의 또는 트리컨티넨탈리즘>(박종철출판사, 2005) 두 권이 번역돼 있다. 간략한 입문서 시리즈의 <포스트식민주의> 같은 책도 소개됨직하다.   

교수신문(11. 06. 17) 번역불가능한 것은 새로운 실천을 낳는 '씨앗' 제공"

로버트 J.C. 영(61) 교수는 Colonial Desire : Hybridity, Culture and Race (1995), Postcolonialism: An Historical Introduction (2001), White Mythologies (2004) 등의 저서로 포스트식민주의 이론 연구에 있어서 세계적 이론가로서 명성이 높은 석학이다. 특히 식민주의의 영향력 아래 있던 지역을 제3세계라는 모호한 용어대신 트리컨티넨탈(tricontinental :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로 명확하게 지칭하고 이 지역을 중심으로 한 포스트식민주의를 트리컨티넨탈리즘으로 명명하고 있다. 국내에 번역 소개된『포스트식민주의 또는 트리컨티넨탈리즘』와『백색신화』두 권은 포스트식민 시대에 재편된 세계질서에서 여전히 남아있는 식민주의적 가치를 비판하는 데 있어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고 있다. 로버트 영 교수의 저서들은 영문학자들 뿐 아니라 문화연구자, 여성학자, 사회과학자들에게 중요한 이론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문화 혼종성과 유동적 정체성'을 주제로 한 국제학술대회에 참가한 그를 이경란 이화여대 이화인문과학원 HK연구교수가 기조강연 후 1차 대화를 나눈 뒤, e메일로 추가 대담을 진행했다.  

이경란: 로버트 영 교수님, 이화인문과학원 연구단을 대표해서 저희 국제학술대회에 함께 해주시고 인터뷰에 응해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먼저, 저희 학술대회의 주제와 관련된 “혼종성”과 “문화번역”에 대해 질문 드리겠습니다. 영 교수님은 혼종성과 문화번역이 현재의 다문화 시대를 위해 가치있는 개념 혹은 이론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한국은 초국가적 결혼과 노동 이주 등의 영향으로 빠르게 다문화적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위 “다문화주의”는 실패라고 말해집니다. 이런 상황에서 “혼종성”이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새로운 대안적 가치가 될 수 있는지요? 또한 “문화번역”이 모든 다양한 문화들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하는 가치인지, 아니면 “이국성”이나 “타자성”을 대면하는 과정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문화적/언어적 개념들을 “목표 문화”에 설명하는 이론적 혹은 실용적 도구로 보시는지 여쭈어보고 싶습니다.  



Young: “혼종성”과 “문화번역” 개념들이 현재의 모습으로 만들어진 것은 사실 다문화 시대를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이해해야할 것은 그것이 “다문화주의” 개념 그 자체를 비판하면서 발전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독일, 영국 등의 정치지도자들이 다문화주의가 어떤 면에서 실패다,라고 말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마침내 수십 년 동안 인문학자들, 특히 영국 인문학 비평가들이 말해온 것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문화주의”가 캐나다에서 발명되었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캐나다의 상황은 영국이나 한국에서의 상황과는 아주 달랐습니다. 다문화주의는 초국가적 결혼이나 노동 이민이 만들어낸 상황을 다루기 위해 창안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캐나다 퀘벡에서는 강력한 분리주의 운동이 있었습니다. 퀘벡은 주로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지역이었고, 그 지역의 유일한 공식 언어는 프랑스어였습니다. 그들은 16세기부터 그곳에 있었으며, 적어도 1960년대부터 많은 퀘벡 사람들이 캐나다로부터 독립한 독립국가로서의 통치권을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계 캐나다 인들이 캐나다의 영어권 문화 안으로 동화되기를 확고부동하게 거절하는 상황에서 다문화주의는 발명되었습니다. 캐나다 안에 두개의 분리된 문화들이 있는 현실을 수용하려는 캐나다 정부에 하나의 모델을 제공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두 문화가 캐나다의 한 일부로서 상호 평등한 존중과 관용으로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제공해줄 수 있는 모델을 찾아 발명된 것입니다. 

그 후 다문화주의 개념은 토착 원주민들뿐 아니라 이뉴잇(Innuit: 캐나다 에스키모인)들에게까지 확장되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80여개의 다른 언어를 사용하였고, 그들 자신의 토착 문화들을 보존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므로 본질적으로 다문화주의는 캐나다 국가를 위한 정치적, 문화적 틀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캐나다 정부는 캐나다 안의 서로 다른 문화들의 평화로운 공존을 고무할 수 있었고, 각각의 문화가 자체의 자율성을 유지하도록 허용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이 상소 관용의 모델은 비교적 성공적으로 작동하는 듯했고, 그래서 유럽 국가들이 이민, 특히 비유럽 국가들에서 오는 이민의 정치적, 문화적 결과들을 고려하기 시작할 때 그들은 흔히 다문화주의 개념에 눈을 돌렸습니다. 그들 국가 안의 서로 다른 공동체들 사이에 가능한 관계들을 생각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일련의 여러 다른 토착적 문화들이나 여러 세기 동안의 정착민 문화들이 있는 상황과 동시대 이민에 만들어낸 상황은 아주 다릅니다. 다문화주의가 가장 호소력을 가졌던 곳은 독일이었습니다. 독일 정부는 이민자 집단들, 특히 터키인들을 결국은 독일을 떠날 일시적인 ‘손님 일꾼들’일 뿐이라는 가정을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다문화주의는 독일 정부의 관점에 잘 맞았습니다. 독일 정부는 이민자 집단들을 일반인들로부터 분리 유지하고자했습니다. 그들을 분리된 집단으로 인정함으로써 그들의 독특한 정체성을 고무하고자했습니다. 그들이 전반적인 독일 문화 안으로 통합해 들어오는 것, 혹은 터키계 독일인들이 독일인이 될 수 있다는 독일인이나 이민자들의 인식을 억제했습니다. 이러한 태도, 즉 이민자들은, 그들이 2세대라해도, 독일인이 아니다,라는 태도는 널리 퍼져 유지되었습니다. 

다른 한편, 영국에서는 이민자들을 일시적인 집단, 즉 영국인이 될 수 없는 집단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어떤 공식적 정책도 없었습니다. 가술적인 면에서, 어떤 경우는, 1940년대와 50년대에 영국 제국에서 온 이민자들은 이미 영국인이었습니다. 영국은 다문화주의 개념을 어느 정도 공식적 개념으로 사용했는데, 다문화주의가 서로 다른 소수민족 공동체들에게 그들 자신의 삶의 형식들, 예를 들면 종교 같은 형식들에 일종의 문화적 존중과 자율성을 제공한다고 가정되었습니다. 이것은 모든 이민자들이 가능한 빨리 지배 문화 안으로 문화적으로 변용되어 들어와야 한다고 가정되었던, 전통적인 미국식 ‘용광로’보다 진전된 대안이라고 여겨졌습니다. 이 모델은 1960년대에 미국의 소수민족들에 의해 이미 도전되고 있던 모델입니다. 그러나 비판가들은 재빨리 지적했습니다. 이러한 자비로운 다문화주의 형식조차도 여전히 개별 집단들이 자신들을 분리된 것으로 생각하도록 고무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개별 집단들이 모든 사람이 단지 그들의 민족성 때문에 속해야하는 “공동체”다,라는 가정을 만드는 효과를 내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면 정부나 지방 의회들은 그 공동체가 처음부터 공동체로 존재했다고 가정하고, 반드시 그 공동체를 대변하는 것은 아닌, 흔히 스스로 임명한 “공동체 지도자들”과 대화를 하곤 했습니다. 

혼종성과 문화번역은 바로 다문화주의 개념에 특유한 화석화에 대항하기 위해 호미 바바, 폴 길로이, 스튜어트 홀과 같은 학자들에 의해 제안되었습니다. 그러나 단순한 동화라는 오래된 개념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한 대안으로서였지요. 단순한 동화 안에서 이주자의 문화적 정체성과 역사는 가치 없는 것으로 흔적도 없이 지워질 수 있었습니다. 바바의 개념인 “제3의 공간”은 문화들 사이의 상호작용 안에서, 전적으로 주인문화의 것도 아니며, 전적으로 이민자 문화의 것도 아닌, 새로운 문화적 형식들과 삶의 양식들이 발전될 가능성을 제안하기 위해 전개되었습니다. “새로운 것이 세상에 들어오는 방법”에서요. 혼종성과 문화 번역은 그러므로 한 사회가 어떻게 자신을 변모시킬 수 있는가하는 이론들입니다. 다른 민족들의 존재를 수용하기 위해,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풍요롭게하는 문화적 환경과 긍정적이고 능력을 주는 새로운 삶의 형식들을 생산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경란: 한국 독자들은 주로 교수님의 White Mythologies와 Postcolonialism: An Historical Introduction의 한국어 번역본인 『백색신화』와  『포스트식민주의 혹은 트리컨티넨탈리즘』를 통해 만납니다. 특히 두 번째 책은 포스트식민주의를 “트리컨티넨탈리즘”과 동일시한 책의 제목으로 독자들의 눈을 끌곤 합니다. 한국어로 번역된 제목이 마음에 드시는지요? 한국어판 제목이 “문화번역”의 관점에서 성공적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Young: 우선, 불행하게도 나는 한국어 제목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한국 번역본의 표지가 보여주듯, 영어 제목은 White Mythologies입니다. 이 제목은 자끄 데리다(Jacque Derrida)의 에세이 “백색 신화”(La mythologie blanche)를 암시하면서 복수로 부드럽게 번역한 것입니다. 두 번째 책으로 말하자면, 한국어 제목 '포스트식민주의 혹은 트리컨티넨탈리즘'은 참으로 만족스럽습니다. 사실, 내가 그 책을 마무리했을 때, 나는 발행자가 부제의 “Introduction” 부분을 없애게 하려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책은 사실 그 단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방식의그 “Introduction”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Introduction”들은 보통 아주 짧지요! 하지만, 그 책은 이미 그 이름으로 시장에 알려졌기 때문에 그는 그 말을 없애는 것을 꺼렸습니다. 우리는 결국 “An Historical Introduction”이라는 제목으로 타협을 했지요. 사실 한국어 제목이 그 책의 정신과 주장에 훨씬 더 충실합니다. ’트리컨티넨탈‘이라는 개념의 발전과 포스트식민주의 개념 사이에는 긴밀한 역사적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어 제목은 성공적인 문화 번역입니다. 실제로 원본 자체보다 더 원본의 정신에 진실한 제목입니다!

이경란: 교수님은 포스트식민주의를 대신해서 “트리컨티넨탈리즘”을 제안하셨습니다. 나름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지만, 세 대륙을 “트리컨티넨탈리즘”으로 묶고 자본주의, 신식민주의, 신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연대를 상상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아니 가능은 한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도 있습니다. 세 대륙의 역사와 현재의 경험이 아주 다르고, 같은 대륙 내에서의 경험도 다양하니까요. 한국의 경우 비서구 국가인 일본에 의한 식민지 경험도 있습니다. 세 대륙 안에서 국가들이나 집단들 사이에 그들의 모순된 이해관계와 가치들에 기반한 어떤 ‘번역불가능성’이 있겠는지요?

Young: “트리컨티넨탈”(The Tricontinental)은 “북”(the North)의 대륙, 즉 유럽과 북아메리카와 대립되는 “남”(the South)의 세 대륙, 아프리카, 아시아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를 나타냅니다. “북”은 자본주의와 많은 식민주의의 역사적 기원이었습니다. 물론 이 구분은, 당신이 지적한 것처럼 불완전합니다. 특히 일본 같은 나라는 어떤 의미에서는 남(비-서구)의 일부였지만 스스로를 제국적 강국으로 만들고 남동아시아의 많은 부분을 식민지화함으로써 식민지가 되는 것을 모면했습니다. 최근에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경제 대국 중 하나가 되었지요. 이러한 것은 이러한 분류가 결코 견고한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오늘날에는 일본뿐 아니라 한국, 싱가포르 같은 나라들이 경제적 조건에서 “북”의 일부가 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 일인당 GDP가 전 세계 180여 국 중 30번대 중반에 놓여있습니다. 더 부유한 국가들과 더불어 상위 사분의 일 안에 들어있지요. 그러한 의미에서 “북”에 속해 있습니다. 

하지만 북과 남을 나누는 다른 방식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개별 국가의 국민이 그들의 국가와 문화가 더 지배적이라고 느끼는지, 아니면 더 강력한 나라들에 의해 지배된다고 느끼는지 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들의 나라가 비교적 번성하다해도 전지구화의 전 과정에서 종속국가가 되고 있다고 느끼는지, 글로벌 경제의 상대적으로 분리된 그리고 제한된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자본의 흐름의 일부라고 느끼는지 혹은 그것에서 베제되어 있다고 느끼는지 등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트리컨티넨탈리즘‘이 넓게는 지리적 참조틀을 사용하지만, 그것은 결코 단순히 지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결코 그런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개념입니다. 그들의 나라가 충분히 독립적이고 자율적이기보다는 국경 밖의 힘들에 의해 의존적이고 착취되는 상태에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제휴입니다. 그것은 또한 글로번 문화 시스템을 지배하지 못하는 그러한 문화들,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가치들, 언어들, 그리고 문화적 규범들에 자신들을 맞추라고 요구받고 있다고 느끼는 나라들을 나타내는 표식이기도 합니다.

이경란: 현재 새롭게 진행하는 프로젝트는 어떤 것이 있으신지요? 혼종성과 문화번역, 그리고 트리컨티넨탈리즘에 관한 이론들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혹 새로운 개념 혹은 변화된 개념은 없으신지요?  



Young: 나는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Colonial Desire: Hybridity in Theory, Culture and Race (1995) 개정판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일정한 양을 새로 쓰고 새로운 장이 더해질 것입니다. 새로운 판에서 나는 그 책 이후 발생한 변화와 발전을 반영하기 위해 혼종성에 대한 나의 개념들을 정교하게 할 것이다. 나는 또한 번역에 대한 새 책을 쓰고 있습니다. 번역과 문화 번역의 개념들을 함께 다루고, 그것들을 개념적으로 비교하면서 두 개념에 대한 새로운 이론들을 전개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번역불가능성의 개념이 이 시도의 중심입니다. 언어적 번역에서, 특히 철학의 영역에서, 번역불가능성은 어떤 의미에서는 번역의 가능성들을 결정합니다. 

반면, 문화 번역은 역설적으로 실제로 번역할 수 없는 바로 그 특정한 문화적 실체나 실천을 말합니다. 하지만, 두 경우에서, 내가 이화여자대학교에서의 강연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것처럼, 번역불가능한 것은 단순히 막다른 골목, 장애가 아니라, 새로운 의미와 새로운 실천들을 발생시키는 “씨앗”을 제공합니다. 마지막으로, 더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차원에서, 나는 폭력과 관용에 대한 책을 쓰고 있습니다. 나는 우리 시대의 특징인 폭력에의 파괴적인 충동에서 나아갈 길을 마련할 수 있는, 관용에 관한 역사적 사례들과 이론적 모델들을 다시 생각하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이경란: 좀 사적인 질문인 듯 합니다만, 많은 한국 독자들은 교수님이 식민주의와 포스트식민주의에 대한 관심이 어떤 계기에서 촉발되었는지 궁금해 합니다. 아마도 그 호기심은 교수님께서 “백인 앵글로-색슨 남성”이라는 문화적, 민족적 배경에서 오는 듯합니다.

Young: 그 질문에 적절하게 대답하는 것은 긴 답을 필요로 할 것이며, 아무리 많이 답을 한다해도 아마도 결국에는 대답할 수 없음을 증명할 것 같습니다. 나는 이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간단히 대답하기는 어렵습니다. 즉, 내게, 어떤 의미에서는, 번역불가능한 질문입니다. 나는 여러 번 그것에 대해 글을 쓰려고 했었습니다. 예를 들어, White Mythologies의 두 번째 판 서문에 약간의 논의가 있습니다. 한국 번역본에 포함 되어있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쓴 것이 그 질문을 더 이상 하지 않게 할 정도인가의 점에서는 진정으로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영국의 허트포드셔(Hertfordshire)에서 태어났습니다. 나의 가족사에 식민지나 비서구와 연결된 고리는 없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런던에서 성장하였고, 그의 가족 배경은 영국 북부와 스코틀랜드입니다. 두 곳의 문화는 내가 성장한 남부와는 아주 다릅니다. 그리고 두 문화는 내게는 여전히, 아마도 세계의 먼 곳의 다른 문화들보다 더, 이질적으로 느껴집니다. 나의 어머니의 배경은 아일랜드입니다. 그녀의 가족은 1860년대 대기근 때 서부 아일랜드에서 이민을 시작했습니다. 최근에 나 자신의 연구 조사로 발견한 사실입니다. 그들은 뉴캐슬(Newcastle) 바로 바깥에 있는 항구, 노스 쉴즈(North Shields)에 정착 했고, 1930년대의 경제적 불황 동안 남부로 이주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이 사용한 언어의 용어 “앵글로-색슨”(Anglo-Saxon)으로 보자면, 더 적절하게는 오스르테일리아에서 그들이 부르는 “앵글로-켈틱”(Anglo-Celtic)인 셈입니다. 비록 이 두 개념들 모두 내가 나의 책 The Idea of English Ethnicity에서 보여주고자 한 것처럼 19세기의 창조물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나는 처음 그곳에 갔을 때, 나는 늘 아일랜드를 좋아했습니다. 아일랜드의 삶의 방식에 즉각적이고 깊은 공감을 느꼈습니다. 

이런 것들 어느 것도 적절한 방식으로 식민주의와 포스트식민주의에 대한 나의 관심을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또한 나의 지속적인 경향, 즉 나 자신을 내가 성장한 것들과 아주 다른 관점들 속으로 반직감적으로 투사하는 경향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또한 내가 많은 다른 문화적 배경들에서 온 사람들과 교우 관계를 쉽게 발전시키는(그렇게 생각하고 싶습니다)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한국에 온지 아주 짧은 그 몇일 동안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으로는 이 정도로 만족해야할 듯합니다. 나는 단지 어떤 의미에서는 언제나 나 자신의 문화적 조건화의 결실을 거슬려 가는 사람입니다. 언제나 힘을 가진 사람보다 힘이 약한 사람들에게 더 손쉽게 공감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나의 말을 하기보다는 그들에게 귀를 기울여 그들의 개인적인 관점을 발견하는 것, 다시 말해, 사물이 그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무엇이 그들의 인간됨의 지반인지 발견하는 것이 더 흥미롭다고 느끼는 사람입니다.  

11. 0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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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295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이번호는 '거리로 나온 인문학'이 특집이군). 모처럼 비평집을 서평감으로 골랐는데, 번역 문제를 다룬 조재룡의 <번역의 유령들>(문학과지성사, 2011)에 대한 독후감을 간단히 적었다. 마감이 한참 지나 편집자의 애를 먹이며 쓴 기억이 난다.   

  

기획회의(11. 05. 05) 다시, 번역이 문제다

“다시 번역이 문제가 된다”를 화두로 내건 ‘비평집’을 읽었다. 불문학자 조재룡 교수의 비평집 <번역의 유령들>이다. 번역을 주제로 한 비평집이기에 ‘번역비평’이라 부름직하지만, 비평의 대상이 분명하거나 딱 떨어지는 건 아니다. 정확하게는 ‘번역’이 아니라 ‘번역의 유령들’을 상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번역의 유령이, 번역이라는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이미 ‘유령’이라고 지정하고 또 명명하였기에 미리 짐작해볼 수 있지만 책에서 ‘번역이란 무엇인가’란 물음에 대한 확실하고도 확고한 대답을 찾기는 어렵다. “우리를 끊임없이 포위하고 우리의 내부로 침투하여, 이질적이건 동질적이건, 우리들의 저 관계들을 조정해나가면서 모국어의 잠재적 가능성을 일깨우는 유령”이 바로 ‘번역’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줄여서 ‘모국어의 잠재성을 일깨우는 유령’이라고 정리해볼 수 있겠지만, 당연하게도 그 형체가 손에 잡히진 않는다. 조금 더 구체적인 여정이 그려질 수 있을까. 번역의 유령이 떠돌아다니며 남겨놓은 흔적들의 여정 말이다.  

저자는 “문화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우리 국어도 번역의 혼백(魂魄)이 풀어놓은 산물”이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구두점’의 체계적인 사용에서부터 일본식 한자어와 조선식 구어를 혼합해 최남선이 우리식 ‘에크리튀르’ 곧 서기체계를 만드는 것은 빅토르 위고나 레프 톨스토이의 작품을 우리말로 번역하면서다. “번역의 유령은 1895년 유길준의 국한문혼용체의 실험에서 1908년 최남선까지, 이어 1919년 김안서의 조어(造語) 창출과 이를 통한 시적 변용에 이르기까지” 쉼 없이 불려나온다. 저자가 일러주는 바에 따르면, 이러한 번역의 작업과 역할은 우리만의 특수한 정황이 요청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것이다. “서양문학사를 돌이켜보면 문학장르가 탄생하는 매 시기, 번역의 유령들이 분탕질을 해댄, 바로 이 섞는다는 행위가 있었다”고 하니까.  

이제는 많이 알려진 대로, 한국 근대시의 효시로 평가되는 최남선의 「海에게서 少年에게」만 하더라도 번역의 유령이 불러낸 영감과 혼용의 결과였다. “번역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창작을 추동하는 근본적인 행위이자 장르가 분화되고 새로운 유형의 문학을 촉진하는 결정적인 매개”였다는 사실에 대한 추인을 바탕으로, 한국 근대문학사는 한국 번역문학사와 분리될 수 없으며 분리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거개가 일본에서 이루어진 근대 개념어들의 번역이 수용돼 우리말로 전환되어 가는 과정에서 근대적 사유가 열렸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순수 한글’이 존재할 것이라는 막연히 추정하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일본의 근대가 ‘번역된 근대’였다면 우리의 근대는 ‘중역된 근대’였다.  

이러한 사실, 곧 ‘번역이라는 유령’의 존재성을 부인․부정하는 태도는 국가적․정치적․문화적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다. 특정한 나라의 문학과 그 문학 특유의 ‘감수성’이란 그 ‘특유’를 참칭하는 사람들에게만 특유할 뿐이라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불문학자 황현산의 말을 인용하면, “실은 타자로 다시 일어서지 않는 주체는 주체조차도 아니다. 그것은 주체라는 공허한 메아리이며 그 그림자일 뿐이다.” 그 그림자 뒤에 버티고 서 있는 것이 그러한 이데올로기이다. 타자로 다시 일어서는 일이 ‘모국어의 감옥’을 깨뜨리는 일과 등가적이라면 그것은 달리 번역의 유령과의 조우이기도 하다. 이 유령과의 만남 이전에 주체다운 주체란 없다. ‘나는 번역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가 도출되는 이유다.  

번역의 유령들은 ‘언제 어디서나 동시에 존재’하기에 저자는 근대 이후를 ‘번역의 유비쿼터스 시대’라고까지 말한다. 그러한 편재적 양상 가운데에서도 특별한 관심과 주목의 대상이 되는 건 시이고 시 번역이다. 시에 대한 편애는, 하지만 임의적인 것이 아니다. 저자는 시인이야말로 가장 창조적인 번역가라고 말한다. 그리고 “시를 번역한다는 것은 시를 쓴다는 것”(앙리 메쇼닉)이라는 관점을 확장하여 “번역은 시를 시답게 구성하는 요소들, 때에 따라 한 단어가 될 수도, 텍스트 전체가 될 수도 있는 지점들로 파고들어, 그것을 읽어내고, 다시 쓰는 작업”이라고 규정한다. 그런 맥락에서는 저자는 시의 아포리아가 곧 번역의 아포리아라고 말하며, ‘번역의 눈’으로 시를 읽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를 읽지 못하는 사회는 시를 읽을 수 없다는 사실 앞에서 제 결함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고 서두에 못박아 놓고, 젊은 시인들의 ‘새로운’ 상상세계를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평문도 포함하고 있지만 이 비평집이 본격적인 시비평집은 아니다. 하지만 ‘예고편’으로서는 충분한 역할을 한다. “새로운 독자를 상정해온 젊은 시인들은, 지금, 새로운 독자를 요청해야만 하는 지점에 와 있다”란 진술에 기대 말하자면, 우리는 ‘새로운 독자’에 대한 요청을 ‘새로운 비평가’에 대한 요청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본격적인 시비평 대신에 저자는 문학작품 속에 나타난 번역가의 모습을 추적하고 불문학자였던 평론가 김현의 번역의식과 번역론을 재평가하며 보들레르와 이상의 가상 인터뷰를 시도한다. 그와 함께 다양한 언어, 다양한 장르의 글과 이미지들을 인용하고 있는데, 개중에는 일본만화와 정훈이의 만화도 포함돼 있어서 자못 ‘심각한’ 비평담론에 숨구멍을 내준다. 남기남이 등장하는 두 컷 만화는 이런 내용이다. (소년 남기남은 어려서부터 의기총명하고) “I am a boy, 나는 오전의 소년이다.” (한심대학 영문과 강의실) “아이 애무 어 보이(I'm a boy), 나는 소년을 애무한다.” ‘독창적인’ 번역의 사례로 들고 있는 예이다. 저자의 관심영역이 얼마나 폭넓은가를 짐작하게 한다.  

대부분 출판계에 몸담고 있을 <기획회의>의 독자라면 익숙할 법한 에피소드도 한번쯤 음미해볼 만하다. 저자는 번역가의 ‘반역’을 부추기는 출판사의 행태를 직접적인 경험담을 통해 밝혀놓고 있는데, 세계문학전집을 기획한 모 출판사 부장과의 대화 장면은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 번역을 맡아준 데 감사를 표하면서 아무개 부장은 번역 원고의 양을 최대 A4 120매에 맞춰주도록 부탁한다. 아무리 적어도 140매 이상은 나올 거라고 말하자 아무개 부장 왈 “필요 없는 부분은 빼버리고 중요하지 않은 내용도 삭제하면 되지 않나요?” 물론 그런 부조리한 요구를 들이민 것은 알만한 속사정 때문이다. “이게 원래 똑같은 분량의 시리즈로 구성되어야 하거든요.” 그런 요구 속에서 번역가의 존재가 사회적 차원의 ‘유령’으로 전락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래서 다시, 번역이 문제다.  

11. 05. 10.   

P.S. 저자가 이론적 지주로 삼고 있는 학자는 앙리 메쇼닉인데(책의 한 장이 메쇼닉에 할애돼 있다), 이미 번역서와 연구서를 몇 권 출간하기도  했다. <시학을 위하여1>(새물결, 2004)가 나오다 만 것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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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1 17: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11 23: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번역가들의 책이 가끔씩 출간되고 있다. 번역서가 아니라 번역가 자신의 책이다. 지난주에 나온 건 일본문학 전문번역가 권남희 씨의 <번역에 살고 죽고>(마음산책, 2011)이다. 번역가 지망생이라면 베테랑 번역가의 '생존 노하우'를 참고해볼 수 있겠다.    

  

문화일보(11. 04. 23) “번역가는 바람둥이, 금세 새 책과 열애”

“백댄서만 하다가 가수로 데뷔한 느낌이라고 할까요. 무척 기뻤어요. 그만큼 두려움도 크더군요. 학문적인 내용이 아니라 제 개인사와 번역에 대한 제 생각을 쓴 것이니 세상에 알몸으로 선 기분도 들고요.”

번역가인 권남희씨는 ‘번역에 살고 죽고’(마음산책 발행)를 펴낸 소감을 이렇게 전했다. 이 책은 일본문학 번역가로서 최고 반열에 올라있는 권씨가 번역 입문 시절부터 지금까지 겪어온 일들을 진솔하게 담은 책이다. 에세이 형식의 글들을 모았는데, 흥미진진한 소설처럼 한달음에 읽힌다. 경쾌한 보법을 사용하는 문장 속에 유머와 휴머니티가 담겨 있어서 자주 미소를 짓게 된다.

권씨는 번역을 할 때와 자기 글을 쓸 때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번역은 어떤 상황에서도 책상 앞에 앉으면 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글은 그렇지가 않더군요. 이른바 글발 받는 날이 아니면 아무리 쓰려고 해도 한 줄도 안 쓰이더라고요. 1주일 동안 한 줄도 안 쓰여서 애가 탔던 적도 있어요.”

20년차 번역가인 권씨는 자신이 업계에서 최정상급의 대우를 받게 된 것을 ‘운’이 좋아서라고 했다. 1990년대 이후로 한국의 젊은이들이 일본 소설을 많이 읽게 된 바람을 탔다는 것이다. 그러나 책을 보면 스스로 스펙(학력, 경력)이 약한 ‘마이너리그 출신’이라고 하는 그가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알 수 있다. 1990년대 초반에 보통의 번역가들이 200자 원고지 1장당 2300원을 받을 때 600원을 받고 일했다. 그럼에도 일거리가 들어오지 않자 권씨는 일본에 가서 직접 책을 구입해서 기획하며 일거리를 만들었다. 

 

권씨는 당시 에피소드들을 책에 소개하며 익살스럽게 중얼거렸다. “너무 앞서갔던 나는 번역계의 이상(李箱)이었던가.” 그 시절에 그가 일본 현지에서 발굴한 책의 작가 중에는 ‘요시모토 바나나’ ‘에쿠니 가오리’가 있었다. 그에 대한 우리 출판사들의 반응은 이랬다. “이름이 바나나야? 토마토가 아니고? 에쿠니 가오리? 앗싸 가오리? 내용이 뭐 이래. 이런 걸 누가 읽어요.” 그런 천대를 받았던 ‘바나나’와 ‘가오리’의 작품들이 지금은 출판사들이 앞다퉈 번역하고 싶어하는 대상이 됐으니….

유미리, 무라카미 류, 무라카미 하루키, 아사다 지로, 온다 리쿠 등의 책을 우리말로 옮긴 그는 번역가를 ‘바람둥이’라고 생각한다. 한 작가의 작품과 열애에 빠졌다가도 금세 다른 소설에 온 마음을 뺏겨버린다는 점에서다.

권씨는 번역 작업이 너무 즐겁다면서도 젊은이들에게 직업으로 권하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열 명이 시작하면 한두 명 성공하는데, 그렇다고 해도 큰 수입을 얻는 건 아니에요. 물론 일하는 만큼 돈이 되니 더 열심히 일하면 더 많이 벌 수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건강을 포기해야겠죠. 저는 여가 생활을 전혀 못하면서, 또 주말도 즐기지 못하면서 일한 끝에 겨우 여기까지 왔거든요. 그래서 이제 사회에 나오는 친구들, 혹은 가족의 생계를 떠맡아야 할 젊은이들한테는 번역 쪽은 택하지 말라고 하죠.”

그럼에도 권씨는 책에 문답형식으로 번역가 지망생들을 위한 조언들을 자세히 정리해 놨다. 그는 여기서 좋은 번역가가 되려면 외국어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우리말 공부를 부지런히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번역의 실제를 설명하면서 외국어를 그대로 직역했을 때와 그것을 우리말로 제대로 다듬었을 때의 차이를 구체적 사례로 소개한다.

그는 번역을 직업으로 택했을 때의 장점을 “집 밖으로 나가서 사람을 만나지 않고 모든 작업을 진행할 수 있다는 점”을 꼽았다. 책에는 그가 번역 원고의 첫 독자로서, 비평자로서 역할을 해온 딸 ‘정하’와 함께 살아온 모습이 진솔하게 담겨 있다. 물론 번역가도 저자, 출판사 편집자와 소통을 잘 할 수 있도록 원만한 성품이 요구된다는 것을 그의 책을 통해 알 수 있다. 번역 고료 지급이 안 되거나 그것이 늦어졌을 때 해결하는 지혜도 필요하다.

권씨는 실력이 뛰어난 후배 번역가들이 등장하면서 일본 문학의 우리말 번역 수준이 크게 높아졌다고 했다. “후배들 때문에 제 밥줄이 위태롭다”고 하면서도 권씨는 흐뭇한 눈치였다. 그는 영미문학 번역가였던 고 이윤기씨처럼 소설을 쓰겠다는 꿈을 간직해왔다. “경로우대증이 나오는 65세까지는 열심히 번역을 할 거예요. 그 후에는 여유롭게 먹고 사는 걱정 안 하면서 제 글을 쓸 수 있으면 좋겠어요.” (장재선기자) 

11. 04. 24. 

 

P.S. 번역가 얘기가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조재룡 교수의 <번역의 유령들>(문학과지성사, 2011)에는 한국 문학 속에 번역과 번역가가 어떤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나 살펴본 글들이 포함돼 있다. 저자가 정리해준 통념상의 번역, 번역가의 스테레오타입은 이런 모습이다. 

예컨대 잠시 머무는 직업, 임시방편의 직업, 일정한 틀 안에 갇히지 않는 작업, 언젠가는 그만두어야 하는 일, 빈둥거리면서도 할 수 있는 일, 거쳐가는 일, 이동 중인 일, 통과하는 일, 그래서 또 자유롭다면 자유롭다고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번역이며, 그리하여 룸펜일 수 있는 자가 바로 번역가인 것이다.(2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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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5 11: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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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5 16: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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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5 15: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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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5 16: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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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04-25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0년대에 번역료가 200자 원고지 1장당 2300원인데 지금은 200자 원고지 1장당 4000원이라고 하더군요.그래선지 실력있는 번역자들이 없어서 FTA번역 오류들이 생긴다고 하네요.

로쟈 2011-04-26 07:37   좋아요 0 | URL
4000원 이하도 많습니다. 이 또한 열정을 착취하는 시스템이에요. 하기 싫으면 관둬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