찜질방이란 곳에 다녀왔다. 수건으로 양머리를 하진 않았지만 먹고 자다 때밀고 집에 돌아오니 자정이 넘었다. 방학이 끝나가는 아이의 소원이 '온가족 찜질방 가기'여서 결단(?)을 내린 것인데, 이런 정도의 '소원'만 계속 가져주면 아빠로선 소원이 없겠다. 눈을 붙이기 전에 습관처럼 주말 북리뷰를 훑어보니 대부분은 안면을 튼 책이다. 몇 권의 예외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조철수 교수의<예수 평전>(김영사, 2010). 성서 해석에 신기원을 제시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데(성서학계에 이미 알려진 견해인지 저자의 독자적인 주장인지 궁금하다), 그냥 번역학적 관점에서도 흥미롭다. 한겨레의 소개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01810.html). 책은 저명한 종교학자 크로산의 <하나님과 제국>(포이에마, 2010)과 같이 읽어도 좋겠다. "'승리에 의한 평화'를 추구하는 로마의 제국신학과 '정의에 의한 평화'를 추구하는 하나님나라를 극적으로 대비시켜 제국을 꿈꾸는 미국과 전 세계 기독교인들에게 도발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책"으로 소개된다.
 

  

한겨레(10. 01. 30) ‘오병이어’는 번역 실수가 만든 기적?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 예수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여명을 먹이고도 남은 빵이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는 <신약성서>의 네 공관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놀라운 이야기. 믿기 어려운 기적의 진실은 무엇일까?

1976년부터 예루살렘 히브리대학에서 성서학과 고대 셈어, 이집트학, 아시리아학을 공부하고 수메르어로 학위를 받은 뒤 10여년간 히브리대에서 가르쳤던 성서학의 국제적 권위자 조철수(60) 교수의 <예수 평전>은 눈이 번쩍 뜨이는 설명을 제시한다. 조 교수는 먼저 마르코 복음서 6장의 이 기적 이야기 일부를 이렇게 인용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명령하여 각자 동료들끼리 풀밭에 앉게 했다. 백 명의 동료지간의 백부장과 오십 명의 동료지간의 오십부장이 끼리끼리 자리잡았다. 예수는 다섯 개의 빵과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하늘을 향해 쳐다보며 축복하고 빵을 떼어 그의 제자들에게 주며 그들 앞에 나누게 했다.” 공동번역 성서의 마르코 복음서는 이 가운데 ‘백명의~’ 부분을 이렇게 옮겨놓았다. “군중은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모여 앉았다.” 마태오나 루가 등 다른 복음서들에는 이들이 끼리끼리 모여 앉았다는 표현 자체가 아예 없다. 이 표현의 차이에 주목하라.   



조 교수가 인용한 마르코 복음서 내용은 자신이 따로 번역한 것이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신약성서 원문은 그리스어로 쓰여 있는 게 가장 오래된 사본이다. 그런데 이 그리스어 원본 자체가 번역본일 가능성이 높다. 원래 복음서나 사도들 편지는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기록됐고 적어도 그 수십년 뒤에야 그리스어 본들이 만들어졌다. 히브리어와 아람어는 같은 계열이지만 그리스어는 전혀 다른 언어체계다. 따라서 아람어와 히브리어 텍스트들을 자신이 직접 번역한 조 교수의 인용문이 당시 이스라엘(유대)의 언어행위 실상과 사회상에 더 근접할 가능성이 높다. 조 교수는 1947년 발굴된 ‘사해 두루마리’ 등의 옛 전적들을 성서와 하나하나 대조하면서 예수의 실상을 재구성한다.

조 교수에 따르면 공관복음서에서 ‘오천 명’이라 옮긴 단어는 아람어 본(페시타) 신약성서에는 ‘오천’이라고만 돼 있다. 오천은 히브리어로 ‘아메쉐트 알라핌’이다. 그런데 이를 ‘하메쉐트 알루핌’으로 읽으면 ‘다섯 천부장’이라는 뜻이 된다. 당시 히브리어나 아람어에는 모음부호가 없었기 때문에 알라핌을 알루핌으로 읽는 식의 바꿔 읽기는 유대교 성서 해석에 종종 활용됐다. 따라서 오천을 오천명의 군중이 아니라 ‘다섯 천부장’으로 읽을 수 있다면 ‘백 명씩 오십 명씩’은 백부장, 오십부장으로 옮길 수 있다. 조 교수는 ‘빵을 먹은 이들이 다섯 천부장이었다’는 말은 백부장과 오십부장들이 참석한 그날의 특별한 만찬 의례에서 그들 가운데 다섯명의 천부장을 선출했다는 얘기고 예수가 그들에게 성찬의례를 베풀었다는 뜻이라고 풀이한다. 천부장들은 당시 예수가 한때 소속돼 있던 에세네파 공동체의 최고의결기관에서 재판관들과 사제장들, 부족장 등과 함께 그 조직 주요 구성원이었다. 

사해 문헌 중의 에세네파 예식에 대한 규례들 중에도 “이스라엘의 천명의 장과 백 명, 오십 명, 십 명의 지도자와 재판관” 등이 재판 청문회에 참석한다는 내용들이 들어 있다. 나중에 에세네 공동체의 한계를 지적하며 떠나간 예수의 공동체 역시 성찬의례를 통해 다섯 천부장을 뽑고 그들이 열두 제자들 모임에 합류하는 좀더 발전된 상부조직을 갖게 된다. 열두 광주리의 12라는 숫자도 이스라엘 12지파, 12제자처럼 당시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는 상징성을 갖고 있고, 메시아의 도래를 알리러 각지에 파견한 72제자의 72라는 숫자도 당시 천문관념에 따라 지파당 6명씩 배치한 결과로 읽힌다.  

그렇다면 오병이어 기적의, 외딴곳 그 많은 군중을 어떻게 먹이느냐는 제자들 질문이나, 다 먹이고 남은 빵과 물고기가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는 복음서들 얘기는 오역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기 위해 후대에 추가되고 윤색된 내용일 가능성이 있다. 그날 성찬의례 참석자, 빵과 물고기를 단합과 사명과 정체성 확인 차원의 의례행위로 받아먹은 사람들은 예수 공동체의 소수 지도급 인사들이었다. 마르코 8장의 일곱개 빵으로 사천 명을 먹였다는 얘기도 일곱명의 원로들 모임에 합세할 네명의 천부장을 선출한 것으로 읽는 게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

루가 6장의 “가난한 자는 복 받을 것입니다. 천국이 그들 것입니다”라는 예수의 말은 마태오 5장에서는 “마음으로 가난한 자는…”으로 돼 있다. ‘마음’의 히브리어는 ‘레브’다. 그런데 레브는 특정 맥락에서 모세 오경 또는 하느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토라’의 은유적 표현으로도 사용된다. 따라서 ‘마음으로 가난한 자’라는 말은 토라 공부 때문에 가난한 자, “하느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데 전념하여 돈벌이에 급급하지 않아 구차한 삶을 사는 사람”을 뜻한다는 게 조 교수 풀이다. 따라서 ‘마음이 가난한 자’로 옮기는 건 의역이란다.

이런 식으로, 복음서들의 갖가지 치유기적의 의미, 두드리면 무엇이 열린다는 것인지, 첫째가 나중 되고 나중이 첫째 된다는 게 뭔지, 일 많이 하나 적게 하나 모두 같은 삯을 지불하는 포도밭 주인의 비유, 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가는지, 카이사르 것은 카이사르에게 주라는 건 무슨 의미인지, 왜 유다는 마지막 순간 예수에게 입 맞췄는지 등 성서 속의 많은 비유와 예화들이 전혀 새롭게 해석된다. 중요한 건 그것이 막연한 추론이 아니라 구체적인 문헌 근거들을 토대로 이뤄진다는 점이다.

사해문헌 중의 <하박국서 해석>엔 ‘진리’의 이름으로 불린 사제가 등장한다. 그는 이스라엘을 지배할 때 교만해져서 하느님을 떠났으며 재산 때문에 법규들을 배반하고 반동폭력배와 백성들의 재산을 훔쳐간 ‘악한 사제’로 로마 법정에 선동 혐의로 넘겨져 사형당한다. 조 교수는 그 사나이가 바로 예수라고 본다. 그를 악한으로 묘사한 하박국서 해석은 예수가 자신들을 배신했다고 본 이 해석서의 작성 주체인 에세네파의 시선이다.

바리새, 사두개는 물론이고 한때 자신이 그 사제요 교사로 복무했던 에세네파의 한계까지 과감하게 뛰어넘었고 결국 그 때문에 죽임을 당한 예수. 900쪽의 두툼한 <예수 평전>은 당대의 문헌자료들과 문화적 배경설명을 토대로 그 생애를 치밀하게 재해석한다.(한승동 선임기자) 

10. 01. 30.  

P.S. 찾아보니 저자는 이미 <유대교와 예수>(길, 2002), <수메르 신화>(서해문집, 2003), <고대 메소포타미아에 새겨진 한국신화의 비밀>(김영사, 2003), <랍비들이 풀어 쓴 창세신화>(서해문집, 2008) 등 다수의 저술과 주해서를 펴낸 바 있다. <유대교와 예수>는 <예수 평전> 입문으로 읽어봐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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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0-01-30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경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여진 책이기에 그 글자 하나 하나가 틀림이 없으며, 역사와 과학적으로도 사실이라는 기독교 근본주의적 성서읽기방식이 축자 영감설입니다.특히 미국을 근간으로 한 청교도 계통에서 이런 주장을 하며,미국 청교도의 영향을 많이 받은 국내 기독교 교단도 이런 주장을 하고 있지요.축자 영감설은 주로 디모데후서 3장 16절~17절이 있는데“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라는 것이지요.
로쟈님 글처럼 성경은 필사에 필사를 거듭한 책이라,그러다 보니 필사하다 오류가 생길수도 있고 필사자의 생각이 들어갈수 있는데다 아람어/히브리어>그리스어>라틴어>영어등 유럽어로 번역되면서 원래 의미와 달라진 부분도 있다고 하는군요.
그래선지 우리 나라 성경도 원래 희브리나 그리스 성경과 비교해보면 틀린 부분이 다수 있다고 하는데 이런 부정확한 부분을 가지고 제 맘대로 해석하다보니 이단이다 뭐다가 많이 나온다고 하네요.

로쟈 2010-01-30 10:10   좋아요 0 | URL
축자 영감설은 전혀 영감을 주지 않는데, 성서 번역 문제는 흥미롭습니다. 예전부터 '젊은 여자'를 '처녀'로 오역하는 바람에 '처녀수태설'이 잉태됐다는 얘기는 있었죠...

2010-01-30 02: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30 1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바다 2010-01-30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승동 기자의 책소개는 늘 신뢰성에 의심을 하게 됩니다... 책을 제대로 읽었는지도 의문이 들고 자신의 편견에 따라 마음대로 왜곡된 기사를 쓰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예수평전>을 직접 읽어 봐야 알겠지만, 이 기사의 내용도 역시 한 기자 마음대로 곡해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듭니다.
한 기자는 <성경>이라는 말로 얼버무리고 있지만 모두들 아시다시피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구약은 유대인의 경전이고 신약은 기독교인의 경전인데, 기독교인은 가능한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을 강조하지만 '정통' 유대인은 신약을 부정합니다. 한기자는 사해문서에 마치 신약성경도 포함되어 있는 양 기사를 쓰고 있는 데, 사해문서는 주로 구약과 유대인의 종교 문헌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해문서에서 예수의 행적을 구성한다는 부분 자체에 의심이 갑니다. 그리고 제가 알기로는 신약은 애초에 희랍어로 기록된 것입니다. 물론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사용한 언어는 '아람어'였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기독교는 헬레니즘 세계에 전파된 종교이기 때문에 바울 서신과 복음서들은 당시의 헬레니즘 세계의 공용어였던 희랍어로 기록된 것입니다. 기자는 페시타(시리아아, 아람어) 판 신약성서도 사해문서에 포함된 것인양 혼돈을 주는 방식으로 애매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페시타 판본은 사해문서와는 전승 자체가 다른 것으로서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 텍스트 역시 희랍어 원본을 번역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소수의 학자들이 원래 시리아어로 기록된 단편을 참고했으리라는 추측을 하고는 있으나 '시리아어로 기록된 원래의 단편' 자체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약 이 책의 저자가 페시타 본으로 신약성서를 재해석하고자 했다면 아마도 소수의 의견을 따른 것일 것입니다.
아마 이 책의 저자가 이런 기본적인 사항들을 모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물론 책을 봐야 알겠지만 책의 두께로 보아 아마 이러한 부분도 섬세하게 기술되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무튼 전 기자의 책 내용 전달 방식에 문제가 있지 않나 추측해 봅니다...

로쟈 2010-02-01 15:01   좋아요 0 | URL
네, 아무래도 전체적인 건 책을 봐야겠어요. 한데, 워낙 두꺼워서...

펠릭스 2010-01-30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성경)학자들의(?) 몫이군요. 믿음을 갖는다는 것과 성경 문구의 신뢰성은 다를듯 해요. 서품을 받은 신부들 중에는 유럽(독일 등)으로 신학공부를 떠나죠(보통 7~8년정도). 신학 공부가 끝나 한국에 입국하면 3년정도 일반 본당(성당)에서 주임(보좌)신부로 근무하다, 대개는 카톡릭신학교 교수로 발령나 가르칩니다. 저도 '빵 다섯과 물고기 두 마리'에 대해 궁금했죠. 문제는 요술처럼 갑자기 불어나 다 먹었다는 것은 아니고요. 개인이 소유하고 있던 음식을 이웃(옆사람)을 위해 내놓아 서로 배불리 나누어 먹었다로 설교하던데요. 하지만 신학적인 논리와 사실성의 입장에서 근거는 번역의 오류인지 아니면 어떤 의도가 있는지는 깊이 신학공부하신 신부님 외 전문가에게 알아 보고 싶습니다. 기부금 명칭중에는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도 있습니다.

로쟈 2010-02-01 15:00   좋아요 0 | URL
성서학자들이 그토록 오래 과문했다는 건 잘 믿기지 않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1-30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관복음은 요한복음은 빼고 마태 마가 누가만 가리키는데 한승동 씨가 잘못 알고 있군요.

로쟈 2010-02-01 14:59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단비스 2010-02-03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것만큼 힘들다는 표현도
사실은 낙타와 밧줄이라는 단어가 유사해서 오역이 된거라고 하던데,
그러한 부분들이 여러군데 있나보네요...

로쟈 2010-02-04 11:35   좋아요 0 | URL
웃지 못할 일들입니다...
 

한국일보의 2009년 출판계 결산 연재 가운데, 번역서에 관한 꼭지를 스크랩해놓는다. 특별히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는 건 아니지만, 엊그제 한 인터뷰에서 몇 마디 거든 게 인용돼 있다. '태반이 날림'이라고 한 표현은 과한데, 날림으로 나온 번역도 적지 않다 정도이다. '중국산 번역'이란 표현은 내가 곧잘 쓰는 것이다.   

한국일보(09. 12. 17) [책의 풍경, 2009] <8> 번역서, 당신이 읽는 거의 모든 것

"번역서 비중? 글쎄, 한 20%쯤?"(장재용ㆍ직장인) "읽고 싶은 책의 절반 이상이 번역서."(홍수완ㆍ한신대 경제학과 강사) "번역서 말고는 읽을 게 없다. 심지어 황우석 사건에 관한 것도 독일인이 쓴 게 제일 낫더라."(최성일ㆍ출판평론가)

책과 가까이 생활하는 사람일수록, 번역 도서에 대한 체감 비중은 높다. 올해 출판시장이 낳은 숫자 가운데 일반인들의 눈에 띄는 것은 단연 '100만'(신경숙씨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의 판매부수)일 것이다.

그러나 출판의 생리를 아는 사람들에게 보다 무겁게 다가온 수치는 '31%'(발행종수 기준 2008년 국내 출판도서 중 번역서 비중)일 듯. 시장점유율을 기준으로 하면 번역서의 비중은 훌쩍 더 커지는데, 한국인의 서가는 번역자의 탈초와 윤문을 거친 외국인의 목소리에 차츰 점령돼 가고 있다. 

번역서 의존 갈수록 심화
한국 출판시장에서 번역서가 차지하는 비중은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10%대 중반에 머물렀다. 그러던 것이 외환위기를 거치며 2000년 20%를 돌파한 후 꾸준히 확대, 2008년 드디어 30%를 넘어섰다. 그러나 이것은 종수를 기준으로 한 단순 집계일 뿐이다. 판매량으로 따지면 학습지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출판 분야에서 번역서의 비중은 이미 50%를 넘어섰다는 것이 출판계의 중론이다.

특히 출판의 정수라 할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는 "의미있는 책은 십중팔구 번역서"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철학서의 경우 번역서 비중이 60%를 넘어섰는데 학계에서는 이를 두고 "학문은 여전히 식민국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말까지 나돈다. 베스트셀러 목록도 마찬가지. 교보문고가 지난 15일 발표한 '2009 연간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면, 전체 종합 상위 30위(외국어학습서 제외) 가운데 번역서가 14권 포함돼 있다. 백원근 한국출판연구소 책임연구원은 번역서가 범람하는 일차적 원인으로 "외국 저작물의 질적 비교우위"를 꼽았다. 하지만 그는 출판계의 '단기 승부' 구조도 함께 지적했다.

▦상품성이나 판매량이 검증돼 최소한의 수익성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점 ▦저렴한 번역비용으로 신속하게 시장에 내놓을 수 있다는 점 ▦저작권료 부담이 대체로 국내 인세나 원고료보다 저렴한 점 등이 그것이다. 결국 "사회의 지식ㆍ문화적 인프라 수준과 출판사들의 상업적 기동성이 결합, 출판 산업에 그대로 투영"돼 번역서 의존 심화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2007년 '한국 출판사 실태조사'에 따르면 조사 대상 766개 출판사 가운데 이전 3년(2004~2006년) 동안 번역 출판 경험이 있는 출판사는 55%에 달했고, 이들의 번역물 발행 비중은 46.2%였다. 번역 대상이 미국과 일본에 치중(2009년 67%)돼 있는 점과 저작권료의 급격한 상승도 심각한 문제로 지적된다.

오염된 번역, 탁해지는 출판시장
번역서의 범람이라는 현상에 비해, 번역의 수준을 비판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출판계에선 수치로 드러나는 양보다 무분별한 번역이 해치고 있는 출판의 질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로쟈라는 필명으로 인터넷 서평 활동을 하는 이현우씨는 "번역의 질 자체는 태반이 '날림'"이라고 꼬집으며, 이를 유해 농산물에 빗대 '중국산 번역'이라 표현했다. 이씨는 "먹거리라면 그렇게 무분별하게 수입되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라며 "대중이 더 안전한 먹거리를 요구하듯, 독자도 품질 높은 번역서를 읽을 권리를 출판사에 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번역 출판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고급 인력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국내에서 외국어 능력과 필력을 두루 갖춘 번역자는 양 손에 꼽을 정도다. 그래서 정상급 번역자에게는 늘 1~2년씩 번역 물량이 몰려 있는데, 그들에게 번역을 맡기지 못할 경우 부실 번역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저작권 수입 비용이나 국내 저자의 인세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번역료도 이런 현상을 부추긴다. 200자 원고지 1매당 3,000원 미만의 번역료를 받는 번역자의 비중이 3분의 1을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꼭 필요한 분야의 책이 제때 번역돼 나올 수 있는 환경의 구축도 필요하다. 국내에서 저자를 찾기 힘든 선진 담론을 소개하는 것이 번역 출판의 본래 의미. 그러나 기초학문 도서 등의 출간을 위한 사회적 지원은 거의 없다. 주일우 문지문화원 사이 기획실장은 "올해는 다윈 탄생 200주년이었지만, 쟈넷 브라운 등의 훌륭한 다윈 관련 책들은 정작 번역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번역가 김석희씨는 "전공 분야의 고전을 번역해도 연구 업적으로 쳐주지 않는 등 학계의 닫힌 현실도 개혁해야 한다"고 말했다.(유상호기자) 

09.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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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중국산 번역?
    from 일방통행로 2009-12-17 19:52 
    로쟈의 저공비행은 내가 즐겨찾는 블로그다. 비평고원이 쿤데라와 고진의 고원(이름도 가물가물하고나..)일 때부터 그의 글을 봐 왔고, 특히 번역에 대한 그의 문제제기, 혹은 그러한 상황을 바로잡아 보려는 시도에 마음으로나마 지지를 보내왔다.(지지를 꼭 드러나게 해야하는 건 아니니까.) 그 지지의 한 방식으로 나도 중국쪽 원전이 잘못 번역된 부분이 있으면 조금씩 고쳐 두고는 했다. 천성이 게을러 눈에 띄게 하지는 못했지만. 양만 다른 게 아니라 질적으로..
 
 
펠릭스 2009-12-17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판지원사업이 정부나 민간기업차원에서 우선되었으면 합니다.

로쟈 2009-12-18 08:50   좋아요 0 | URL
도서관부터 먼저 잘 정비되면 좋겠습니다.

무해한모리군 2009-12-17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요즘 새책을 사면 운이 없어 그런지 오탈자, 잘못된 번역을 너무 자주 만나요. 참 이상하지요.. 틀림없이 세월가면 줄어야 될거 같은데 --

로쟈 2009-12-18 08:50   좋아요 0 | URL
그게 쉽게 달라질 것 같진 않구요, 출판문화 혹은 독서문화의 수준과 나란히 변화해가야 할 듯해요...

카스피 2009-12-18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의 문제같군요.독서인구 감소>출판사 경영 악화>부실 번역>독서인구 감소라고나 할까요.
개인적으론 정부가 쓸데없는 토목 공사에 비용 지출하지 말고 도서관에 책이라도 한권 더 넣어주었으면 합니다.

로쟈 2009-12-19 08:14   좋아요 0 | URL
그게 뭐 쥐귀에 경읽기가 돼서요...
 

김화영 교수 번역의 카뮈 전집이 완간됐다. 인터뷰기사를 보니 1987년에 첫권이 나왔다. 그 여름에 내가 읽은 <결혼 여름>이 첫 권이었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롭다. 내년에 카뮈의 몇몇 작품을 강의할 기회가 있는데, 그 시간의 기억을 더듬어볼 수 있겠다. '레전드'가 될 만한 역자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경향신문(09. 12. 16) “7년 예상 ‘카뮈 전집’번역 23년 씨름했어요” 

“이제 여기서 근 23년에 걸친 한국어판 ‘알베르 카뮈 전집’의 대장정을 마무리한다.” 지난 10일자로 발행된 카뮈(1913~60)의 책 <시사평론>(책세상) 번역자 서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1987년 산문집 <결혼·여름>으로 시작된 카뮈 전집(총 20권) 번역을 끝낸 김화영 고려대 명예교수(68)를 지난 11일 서울 인사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카뮈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처음부터 전집 번역을 염두에 뒀던 것은 아니었다. “첫권인 <결혼·여름>은 너무나도 서정적인 산문집입니다. 일부만 번역돼 있었기에 ‘내가 한번 해볼까’ 하던 차에 책세상 주간이던 소설가 호영송씨가 86년 제안을 해서 이듬해에 출간했죠.” 출판사는 내친 김에 전집을 번역하자고 했다. 그래서 2권인 <이방인>부터 전집 23권의 목록이 책 뒷날개에 실리기 시작했다.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와 독점계약을 맺었는데 국내에서 카뮈의 작품이 정식계약을 맺고 번역되기는 이 전집이 처음이다. “독점계약이었기에 지금도 다른 출판사의 ‘세계문학전집’에 카뮈의 작품은 올라있지 않습니다.” 내년 1월4일은 카뮈가 죽은 지 50년째 되는 날이므로 2011년 사후 저작권이 풀린다. 



김 교수에게 오랫동안 자신을 즐겁게 하기도 하고 괴롭히기도 했던 카뮈에 대해 말하는 것은 신명나는 일인 듯 보였다. 그 앞에 놓인 머그잔은 인터뷰 초반에 이미 바닥을 드러냈고 카페라테가 남긴 거품이 말라가고 있었다. 첫권을 번역할 당시 40대 교수였던 그는 1년에 3~4권씩 번역하면 7~8년이면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대학에서 은퇴해 지하철을 무료로 이용하는 나이”가 돼서야 끝났다. “해제를 쓰는 작업이 더 고역이었습니다. 마라톤을 막 끝냈는데 한바퀴 더 돌라는 격이죠.” 그래서 23권으로 계획됐던 전집은 한국 독자의 관심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시사평론> 2권과 3권, <알베르 카뮈·장 그르니에> 서한집을 제외시킨 채 20권에서 마침표를 찍었다.

그동안 출판사의 담당 편집자가 여러명 바뀌었고 번역문체도 변화를 겪었다. 언어환경 전반에 한자어 사용이 급격하게 줄면서 뒤로 갈수록 한글 구어체 비중이 높아졌다. “문자에 너무 얽매였던” 그의 번역 태도도 바뀌었다. “나이가 들수록 원문도 중요하지만 우리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나 김 교수는 이 부분에서 걸핏하면 “어렵다”고 하는 독자들을 질타했다. “원문 자체가 어려운데 독자들이 아무 노력도 안하면서 쉽게만 번역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게으름의 소치”라는 것이다. 



카뮈는 1913년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으며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고 있었던 42년 소설 <이방인>을 발표, 프랑스 문단의 총아로 떠올랐다. 신문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카뮈는 독일의 프랑스 점령기에 레지스탕스에 적극 가담했다. 5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카뮈는 60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작가수첩>이라고 이름붙은 책이 3권 있습니다. 이걸 보면 카뮈가 얼마나 용의주도한 작가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일기와 비슷한 사적 기록들인데 작품 계획과 변동사항을 세세하게 기록해 뒀기 때문에 그의 생각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어요. 그는 항상 자기 문제와 시대의 문제로 씨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카뮈의 작업은 하나의 주제에 대해 소설과 희곡, 에세이 등 다양한 형태의 작품이 ‘사이클’을 이루는 방식이다. 카뮈가 천착한 첫번째 사이클은 인간과 세계의 ‘부조리’였는데 소설 <이방인>, 철학 에세이 <시지프 신화>, 희곡 <칼리굴라·오해> 등이 이 범주에 속한다. 카뮈가 부조리에 대한 해결책으로 선택한 테마인 ‘반항’이 두번째 사이클이다. 소설 <페스트>, 에세이 <반항하는 인간>, 희곡 <정의의 사람들·계엄령> 등이다. “카뮈는 세번째 사이클인 ‘절도(節度)’에 대해 쓰다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흔히 카뮈를 ‘실존주의자’로 부른다. 그러나 카뮈는 “나는 실존주의자가 아니다”라는 글을 발표할 정도로 사르트르 등의 실존주의와 거리를 뒀다. “실존주의는 인생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말하는데 카뮈는 유의미할 수도, 무의미할 수도 있다고 봤습니다. 이게 사르트르와의 차이점입니다.” 카뮈가 마지막으로 집중한 주제였던 ‘절도’가 철학적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내세운 ‘중용’을 뜻하는 것처럼 카뮈의 사상 핵심은 ‘균형’이었다고 했다.

김 교수는 “카뮈는 절대로 낡은 고전이 아니라 21세기 한국에서도 살아 펄떡거리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작가”라고 역설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카뮈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면서도 ‘모든 부정 속에 긍정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가 히로시마 원폭을 비판했던 것도, 사형제를 반대한 것도 이 때문이었죠. 이런 메시지는 시대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의미를 지닙니다.”(김재중기자) 

09. 12. 16.  



P.S. 얼마전에 평론집 <소설의 숲에서 길을 묻다>(문학동네, 2009)를 내고서 김화영 교수가 주간한국과 가진 인터뷰 기사도 참고할 만하다(http://weekly.hankooki.com/lpage/people/200911/wk20091109190120105610.htm) "선생은 <마담 보바르>나 <이방인>과 같은 작품은 수백 번을 읽었고 아직도 일 년에 한 번은 읽는다고 말했는데, 국내 문학 작품을 볼 때도 이 기준은 유효하다. 그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는 전부 시적인 작가"라고 말했다."는 대목은 내가 이해하는 불문학자이자 비평가 김화영과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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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jjismy의 생각
    from jjjismy's me2DAY 2009-12-16 01:33 
    [알라딘서재]카뮈 전집과 씨름한 23년
  2. 김화영 교수, 카뮈전집 완간
    from 한사의 서재 2009-12-16 09:37 
      카뮈 타계 50주년 앞두고 한국어판 전집 완간           김화영 고대 명예교수         실존의 부조리(不條理)에 반항했던 작가 알베르 카뮈(1913~1960)의 한국어판 전집(책세상 출판사)이 카뮈 타계 50주년(2010년 1월 4일)을 앞두고 완간됐다.    불문학
 
 
비연 2009-12-16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화영교수 번역의 카뮈 전집을 다 모으고 있는 입장에서, 정말 큰 일을 하셨다는 생각이.

로쟈 2009-12-17 08:07   좋아요 0 | URL
전집을 다 모으시는 것도 큰일인데요.^^

sophie 2009-12-16 0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라발도 헌 책 더미 속에서 사르트르와 카뮈를 꼽으면서 특히 카뮈가 글을 잘 썼다고 하더군요. 그건 글에 대한 얘기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로쟈 2009-12-17 08:09   좋아요 0 | URL
사르트르냐 카뮈냐란 물음이 한때 유행하긴 했었죠. 프랑수아즈 사강은 사르트르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2009-12-16 0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17 08: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09-12-16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경의를 표해야겠군요. 작가수첩은 읽어보고 싶긴한데
까뮈하면 왠지 어렵다는 선입견이 있어서 말이죠.ㅜ

로쟈 2009-12-17 08:10   좋아요 0 | URL
설마 수첩까지도 어려울라구요.^^;

펠릭스 2009-12-16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뮈와 톨스토이는 치밀하며 용의주도한 작가인듯 합니다.

로쟈 2009-12-17 08:11   좋아요 0 | URL
창작에 대한 태도에는 그런 면도 있는 듯하네요...
 

한국고전번역학회 창립기념 학술대회가 ‘고전번역학 정립을 위한 이론적 모색’을 주제로 지난주에 열렸다고 한다. 발제 내용을 일부 정리해놓은 기사기 있기에 '번역과 번역가' 카테고리를 위해서 스크랩해놓는다. 원론적인 내용이지만, 과제도 많고 갈길도 멀다는 걸 한번 더 확인하게 해준다... 



교수신문(09. 11. 30) “번역 통한 콘텐츠 확충 사업은 인문학 차원의 ‘건국운동’이다” 

고전번역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가운데 한국고전번역학회(회장 송재소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한국고전번역원(원장 박석무)과 함께 지난 27일 성균관대 국제관에서 학회 창립기념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기치는 ‘고전번역학 정립을 위한 이론적 모색’이었다.  

이날 송재소 회장은 기조강연 「한국고전번역의 과제」를 통해 고전번역학회가 풀어나가야 할 과제를 제시했다. 이런 과제는 3가지 주제와 함께 문제제기로 이어졌다. 제1주제는 「한국고전번역의 역사적 고찰」(이동철 용인대), 제2주제는 「번역과 역사변혁」(박상익 우석대), 제3 주제 「일기류 자료의 국역 현황과 과제」(황위주 경북대)였다. 각 주제별로 정채철(단국대), 하원수(성균관대), 김현영(국사편찬위원회)등이 토론을 맡았다. 이날 학술대회의 문제의식을 공유한 송재소 회장의 글과 박상익 우석대 교수의 글을 발췌한다. 

     
    
송재소 한국고전번역학회장(성균관대 명예교수)

무릇 번역의 대전제는 충실한 번역과 정확한 번역이다. 이 문제의 중심에 놓인 것이 직역과 의역의 문제이다. 한국고전의 번역에서 직역과 의역의 문제는 더욱 첨예하게 다가온다. 직역은 원문의 언어구조, 당시의 문화와 관습 등에 최대한 근접하게 번역하는 것인데 자연히 많은 주석이 요구되는 번역이다. 이러한 직역의 대표적인 예가 經書諺解이다.

보다 바람직한 번역은 문자 추종적인 충실성이 아니라 의미의 충실성을 목표로 해야 한다. 즉 원문의 의미를 정확히 살리는 동시에 원문으로부터의 간섭을 덜 받으며 비교적 자유롭게 번역하는 것이다. 이러한 번역을 의역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도 적지 않은 문제가 산적해 있다. 어느 선까지 의역해야 하는가. 이 문제가 먼저 대두된다. 한자, 한문은 우리가 오랫동안 사용해 왔기 때문에 타외국어와는 다른 친연성을 지니고 있다. 이 친연성이 오히려 번역의 장애물이 될 수 있다. ‘經濟’ 등의 낱말을 옮길 때가 그러하다. 또 오랜 시간 쓰여 오던 용어를 살려야 할지 풀어야 할지도 과제로 남는다.

문학작품의 번역은 더욱 어렵다. 모든 번역이 그렇겠지만 특히 문학작품의 번역은 재생적이면서 동시에 창조적이어야 한다. 그러자면 원문이 지니고 있는 文體, 修辭法, 語調 등을 염두에 두고 번역해야 되지 내용전달에만 매달려서는 안 된다. 이렇게 볼 때 漢文讀解能力만으로는 좋은 번역의 필요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 한문독해능력이 중요하지만 여기에 한국어 구사능력, 문화적 교양, 예술적 심미안 등을 두루 갖출 필요가 있다.

번역학이란, 보다 나은 번역을 하기 위한 방법이나 원리를 모색하는 학문이다. 번역의 일반이론에 관해서는, 서구에서 이루어 놓은 번역이론들을 광범위하게 섭취하는 한편으로 ‘한문고전의 번역’이라는 특수성에 입각해 우리 나름의 독자적인 이론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학제적 성격을 가진 번역학의 특성을 고려하여 언어학, 문화학, 미학 등 인접학문과의 상호 협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번역이론의 개발과 함께 중요한 것은 다양한 번역기법의 개발이다.

“기존 번역서 평가하는 시스템 필요”
더 나은 번역을 하기 위해서는 기존 번역서들에 대한 평가 작업도 수행해야 한다. 기존 번역서 평가는 앞으로의 번역의 질을 높이기 위한 중요한 여러 단서를 제공해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독자들에게 양질의 번역서를 제공하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다. 엄밀하고 객관적인 평가가 이뤄지기 위해 평가의 방법과 과정 그리고 결과의 활용 등 평가의 제반 시스템이 마련될 필요가 있다. 이 또한 한국고전번역학의 과제로 남는다.

이 밖에도 국가적 차원의 번역 지원 정책을 수립하는 데에 큰 틀의 방향을 제시하고, 고전번역의 활성화를 위해서 여러 가지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등의 사업도 한국고전번역학의 과제라 할 수 있다. 또한 한문고전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은 그 자체만으로도 중요하지만 이 작업은 한문고전을 서구어로 번역하는 일과도 맞물려 있다. 이 경우 번역 담당자는 서구어 전공자들일 터인데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이들이 한문고전을 직접 번역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들에게 믿을만한 결정적인 번역 텍스트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  

  
    
박상익 우석대 교수(서양사)
시인 김수영은 신세대 문학청년들을 ‘뿌리 없이 자라난 사람들’이라고 혹평한다. 일본어를 읽을 줄 모르는 까닭에 세계문학의 흐름으로부터 차단돼 있는 그들에게 가장 결핍돼 있는 것은 ‘지성’이라는 것이다. 그는 산더미같이 밀린 외국 고전들을 우리말로 번역해 한글 콘텐츠를 일본어 못지않게 늘리는 일이야말로 國運에 관계되는 문제라고 지적한다. 김수영의 시대로부터 40여년이 흐른 지금은 형편이 나아졌을까.

일본은 메이지 유신 직후 정부 내에 ‘번역국’을 따로 두고 집약적으로 수만 종의 서양 고전들을 번역했지만, 그들이 19세기말에 번역한 고전들 가운데 아직도 많은 책이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았다. 많은 대학에서 번역을 연구실적으로 인정하지 않을뿐더러, 정체성에 대한 고민 없는 일부 인문학자들은 번역의 필요성에 대한 최소한의 인식마저 없는 실정이다.

2008년 7월 28일부터 고려대 인촌기념관에서 거행된 제18차 세계언어학자대회는 소수민족 언어에 대한 언어학적 분석과 보존 계획 수립의 문제를 주요 의제로 삼고, 인간은 자신의 모국어를 사용할 때 가장 ‘창의적인 사고’를 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21세기에 독창적 문화를 창조하는 일이 무가치하다고 판단하지 않는다면 번역을 통한 한글 콘텐츠의 확충은 결코 미룰 수 없는 시급한 과제다.

다음은 우리 고전의 번역이다. 우리는 올해로 제64주년 광복절을 맞이했다. 우리 인문학은 어떨까. ‘광복’을 기해 우리 인문학도 ‘빛’을 되찾았을까. 안타깝게도 일제 강점기 이전에 ‘우리 인문학’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한 예를 들어보자. 개화기 역사를 다룬 黃玹,(1855∼1910)의 『梅泉野錄』은 원전이 한문이라서 요즘은 대학 졸업자도 읽을 수 없다. 영어권 독자들은 500년 전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지금도 읽을 수 있지만, 우리는 100년 전 ‘우리 것’도 읽을 수 없다. 단군 이래 100년 전까지 우리 선조가 작성한 거의 모든 문헌이 ‘번역’이란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우리에겐 ‘딴 나라’ 책이다. 우리는 언어적으로 우리 자신의 과거로부터 상당 부분 단절돼 있다. 이런 형편이니 1세기 전의 ‘우리 인문학’을 거론조차 할 수 없다.

일제강점기에도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1945년까지 일본어를 국어로 常用하다가 한글을 본격적으로 쓴 지가 이제 겨우 60년이다. 그러므로 ‘모국어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인문학’이란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갓 태어난 아프리카 신생국과 다를 바 없다. 자존심 상하지만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우리 현실이다. ‘빛을 다시 찾은 것’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빛이 비치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인문학에서는 광복이란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 인문학은 60년 전 ‘탄생’했다.

“40~50대 활용해 번역 사업 매진해야”
얼마전부터 인문학 위기란 말이 유행처럼 나돌고 있다. 하지만 지난 60년 동안 과연 우리 인문학이 잘 나갔던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모국어를 기반으로 한 인문학의 역사가 이제 겨우 60년이라는 냉엄한 현실을 직시한다면 반만년 역사 운운하며 느긋한 허위의식에 안주할 수 없다. 신생국 처지임을 자각하고 새로 시작하는 결연한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먼저 끊어진 역사를 연결시켜야 한다. 아직 20%도 해내지 못한, 우리 선조들이 남긴 국가기록물과 개인문집에 대한 번역작업을 빠른 시일 내에 완료해야 한다. 이 작업이 완결돼야 비로소 반만년 우리 역사가 온전히 ‘우리 것’ 즉 한글 콘텐츠로 편입될 수 있다.

인문학 위기론이 팽배한 현시점에서 그나마 인문학 연구 인력이 가장 두터운 층을 형성하고 있는 세대는 40대와 50대로 보인다. 그 아래는 학문후속세대의 단절이 우려될 정도로 ‘실용’에만 몰두하는 형국이다. 정부는 이들 연구 인력이 더 늙기 전에 한글 콘텐츠 확충을 위한 번역 사업에 대대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자칫 시기를 놓친다면 뒤늦게 사업을 추진하려 해도 마땅한 인력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번역을 통한 한글 콘텐츠 확충 사업은 인문학 차원의 ‘건국 운동’이다. 모국어에 대한 비전을 갖지 못한다면 우리는 주권독립 국가의 국민일 수 없다.(정리 최익현 기자) 

09. 12. 01. 

P.S. 한겨레의 기사 탓인지 방문자수와 즐찾이 모두 늘었다. 방문자의 경우 300명쯤 늘어난 듯싶은데, 그래도 며칠 안으로 '원상'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한다. 여하튼 덕분에 총방문자 1맥만명이 코앞에 닥쳤다. 내일은 간단한 이벤트라도 공지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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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12-01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월말 '한국고전번역원'에서 '계원필경집1'과 '고운집/최치원지음/이상현옮김'이 발행되었습니다. 한국고전번역원(http://www.itkc.or.kr/)
한국고전적종합목록시스템(http://www.nl.go.kr/korcis/)
한국고전종합DB(http://db.itkc.or.kr/itkcdb/mainIndexIframe.jsp)

로쟈 2009-12-01 22:58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기사로는 봤습니다...

펠릭스 2009-12-02 00:08   좋아요 0 | URL
수원시 인구가 110만을 돌파, '중도실용정부'의 행정구역 개편 기준 인구가 100만임을 가만하면, '로쟈의 저공비행'은 대한민국 공중 도시로 곧 탄생 하심이...

이매지 2009-12-01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전문학전집을 하면서 도움이 될 것 같아 가려고 했는데,
일이 너무 바빠서 못 갔는데 기사로라도 접하니 도움이 되네요.
감사합니다 :)

그나저나 백만명이라니. 정말 엄청나네요 ㅎㅎ
미리 축하드려요!

로쟈 2009-12-01 22:59   좋아요 0 | URL
천만명을 넘어선 블러거들도 있는 걸요.^^;
 

고종석 한국일보 객원논설위원의 칼럼이 얼마전부터 '언어학 카페 말들의 모험'으로 바뀌었다. 여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거쳐서 다시 '전공'인 말들의 세계, 언어학의 세계로 돌아온 것. <감염된 언어>(개마고원, 1999/2007)을 읽고서 '아, 고종석!'이라고 무릎을 쳤던 나로선 반가운 일이다. 이런 칼럼이 일간지에 연재된다는 사실 자체도 고무적이고. 그가 세 차례에 걸쳐 나눠 실은 '번역이라는 고역'을 옮겨놓는다. 소쉬르 언어학의 기본용어들을 소개하면서 용어번역의 이런저런 문제들을 숙고해보도록 한다.    

한국일보(09. 10. 12) 번역이라는 고역(苦役) (上)

고바야시 히데오(小林英夫ㆍ1903~1978)라는 일본인 언어학자가 있습니다. "고바야시 히데오? 들어본 이름이군!" 하는 독자들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 고바야시 히데오는 언어학자 고바야시 히데오가 아니라 예술비평가 고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ㆍ1902~1983)이기 쉬울 거예요. 성(姓)은 같지만, 이름의 한자가 다릅니다.

언어학자 고바야시 히데오는 이름이 닮은 한 살 위의 평론가만큼 20세기 일본 지성사를 요란스럽게 살아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언어학사 책 한 구석에 흐릿한 윤곽으로 웅크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를 일으켜 세워 양지바른 곳으로 불러내 봅시다.

스물다섯 살 때인 1928년, 고바야시 히데오는 소쉬르의 <일반언어학강의>(CLG)를 일본어로 옮겨 출간했습니다. 고쇼인(岡書院)이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이 일본어판 CLG의 표제는 <겐고가쿠겐론(言語學原論)>이었습니다. <겐고가쿠겐론>은 1916년 로잔과 파리에서 초판이 나온 CLG의 첫번째 번역본입니다. 그러니까 프랑스어로 쓰인 CLG의 첫 번역본은 일본어판이었습니다. 오늘날 CLG는 한국어를 포함한 스물 남짓의 자연언어들로 번역돼 있습니다.

유럽어 번역본이 일본어 번역본보다 시기적으로 늦은 데는 유럽인들이 일본인들보다 프랑스어를 읽기가 더 쉬웠다는 사정도 개입했겠습니다만, 그 사실 때문에 고바야시 히데오의 높은 안목을 지나쳐서는 안 되겠습니다. 원서가 나오고 10여 년 세월이 지나는 동안 프랑스어권 바깥의 어느 언어학자도 굳이 번역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CLG가 일본인 청년 고바야시의 눈에는 단번에 '고전(古典)'으로 비쳤던 것입니다. <겐고가쿠겐론>은 1939년 출판사를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으로 옮겼고, 1972년 고바야시가 직접 개역(改譯)하면서 표제를 원서 제목에 맞추어 <잇판겐고가쿠고기(一般言語學講義)>로 바꿨습니다.  

그런데 고바야시 히데오 이래 수많은 CLG 번역자들은 소쉬르 고유의 프랑스어 용어들, 곧 우리가 지난번에 살폈던 '랑그' '파롤' '랑가주' '시니피앙' '시니피에' 따위를 어떻게 처리했을까요? 맞춤한 역어(譯語)를 찾기 힘들다는 핑계로 우리처럼 프랑스어 단어를 그대로 썼을까요? 아니면 억지로라도 그 대응어를 찾아냈을까요? 역자들 대부분이 그 용어들에 대응함직한 말을 제 모국어에서 찾아내려 애썼습니다. 그 애씀의 과정은 소쉬르를 이해하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이론의 영역을 넓힌 이들이 새로운 개념을 담기 위해서 고를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새 말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예컨대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문화적 복제자'(replicator)라는 개념을 담기 위해 '밈'(meme)이라는 말을 새로 고안해냈습니다. 그러나 더 일반적인 경우는 이미 사용되고 있는 일상어에 특별한 뜻을 담는 것입니다. 소쉬르의 '랑그'(langue), '파롤'(parole), '랑가주'(langage)가 전형적입니다.

일상 프랑스어에서 '랑그' '파롤' '랑가주'는 평이한 말입니다. '랑그'는 그저 '언어'라는 뜻입니다. 랑그 마테르넬(langue maternelle)은 '모국어'이고, 랑그 알망드(langue allemande)는 독일어입니다. '파롤'은 그저 '말'이라는 뜻입니다. 파롤 드 디외(parole de Dieu)는 '하느님의 말씀' 곧 복음(福音)입니다. '랑가주'는, '랑그'보다 조금 무거운 느낌을 주긴 하지만, 역시 '언어'라는 뜻입니다.

랑가주 나튀렐(langage naturel)은 '자연언어'이고, 랑가주 아르티피시엘(langage artificiel)은 '인공언어'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들의 쓰임새가 다르기는 하지만, 본디부터 그 말들에 각각 언어의 추상적 측면, 언어의 구체적 측면, 언어활동 전체라는 뜻이 또렷이 담겼던 것은 아닙니다. 이 말들에 그 특별한 개념들을 담은 것은 소쉬르지요.

이 때, 프랑스어의 일상어 단어들(여기선 '랑그' '파롤' '랑가주')에 거의 대응하는 일상어 단어들을 갖춘 자연언어로 소쉬르 용어를 옮기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 해당 일상어를 그냥 가져와도, 어차피 CLG에 소쉬르의 설명이 있으니, 독자들이 오해할 여지가 크지 않습니다. 스페인어가 그런 경우입니다. 소쉬르의 '랑그'를 '렝과'(lengua)로, '파롤'을 '아블라'(habla)로, '랑가주'를 '렝과헤'(lenguaje)로 옮기는 데, 스페인어 배경의 언어학자들은 거의 다 동의합니다.

그런데 이탈리아어만 해도 일이 그리 간단치 않습니다. 일상 이탈리아어에는 일상 프랑스어의 '랑그'와 '랑가주'에 해당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링과'(lingua)와 '링과조'(linguaggio)가 그것입니다. 그러니 소쉬르의 '랑그'를 '링과'로, '랑가주'를 '링과조'로 옮기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문제는 '파롤'에 있습니다. 물론 일상 이탈리아어에는 일상 프랑스어 '파롤'에 얼추 대응하는 단어도 있습니다. '파롤라'(parola)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탈리아어 '파롤라'는 그저 '말'이라는 뜻으로 쓰기도 하지만, '낱말' 곧 '단어'(프랑스어의 mot)라는 뜻으로 더 자주 씁니다.

소쉬르 식으로 표현하자면, 프랑스어 '파롤'과 이탈리아어 '파롤라'는 가치(valeur)가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CLG에는 '단어'(mot)라는 말이 여러 차례 나옵니다. 그러니, '파롤'을 '파롤라'로 옮겨 버리면, 프랑스어 '모'(motㆍ단어)를 번역할 말이 없어집니다. 이런 혼돈을 무릅쓰고 소쉬르의 '파롤'을 '파롤라'로 번역하는 이탈리아인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탈리아 언어학자들은 소쉬르의 '파롤'을 고스란히 가져와 그냥 '파롤'이라고 씁니다. 본문의 다른 단어들과 체(體)를 달리해, 외국어 단어라는 것을 드러내줄 때가 많지요.

프랑스어 '랑그'와 '랑가주'의 (형태적) 구별이 없는 자연언어의 경우, 소쉬르가 특별한 의미를 담은 이 두 단어를 구별하는 것은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닙니다. 예컨대 영어가 그렇습니다.(일본어나 한국어는 말할 나위도 없지요) 일상 프랑스어의 '랑그'와 '랑가주'는 둘 다 일상 영어의 '랭귀지'(language)에 해당합니다. 웨이드 배스킨(Wade Baskin)이라는 언어학자는 CLG를 영어로 번역하면서 '랑그'를 '랭귀지'로, '파롤'을 '스피킹'(speaking)으로, '랑가주'를 '스피치'(speech)로 일관되게 옮겼습니다. 로이 해리스(Roy Harris)라는 언어학자의 전략은 전혀 달랐습니다. <소쉬르 읽기(Reading Saussure)>라는 단행본 소쉬르 연구서를 내기도 한 해리스는 CLG를 영어로 옮기면서, 가장 중요한 단어라 할 '랑그'를 그때그때 맥락에 따라 달리 번역했습니다.

소쉬르가 특별한 의미를 담은 '랑그'는 '랭귀지 스트럭처'(language structure), '링귀스틱 스트럭처'(linguistic structure), '링귀스틱 시스템'(linguistic system) 따위로 옮긴 반면에, 일상적 의미의 '랑그'는 앞의 관사를 변화시켜 가며 '랭귀지'로 옮겼습니다. '랑가주' 역시 그저 '랭귀지'로 옮겼지요. 해리스는 또 '랑가주'를 '스피치'로 옮긴 것(배스킨이 그랬지요)이 엄청난 오역이라고 공박하면서(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우리들도 공감할 수 있는 지적입니다), '스피치'를 '파롤'의 역어로 삼았습니다. 해리스의 주장과 실천이 그의 옳음을 증명해주지는 못하지만, 번역이라는 행위의 어려움을 증명하는 것은 확실합니다.

아무런 선례의 혜택도 입지 못한 고바야시 히데오는 소쉬르 용어들을 뭐라 옮겼을까요? 그는 '랑그'를 '겐고(言語)'로, '파롤'을 '겐(言ㆍ말)'으로, '랑가주'를 '겐고가쓰도(言語活動)'로 번역했습니다. 또 '시니피앙'은 '노키(能記)'로, '시니피에'는 '쇼키(所記)'로 옮겼습니다. 고바야시의 선례를 따라 한국어판 CLG(들)도 '랑그'를 '언어'로, '랑가주'를 '언어활동'으로,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를 각각 '능기'와 '소기'로 옮겼습니다. 한국어판에서는 '파롤'을 주로 '화언(話言)'이라 옮기는데, 이 말 역시 일본식 조어(造語) 냄새를 풍깁니다. 게다가 고바야시의 '겐'이 일상어인 데 견주어, '화언'이라는 말은 일상에서 너무나 먼 말입니다. '화언'은 소쉬르가 '랑그'와 대립시켜 거론한 '파롤'의 역어로밖에 쓰지 않는 말이고, 그래서 프랑스어 '파롤'과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말입니다.

청각이미지와 개념을 각각 가리키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역어들은 더욱 그렇지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역시 일상 프랑스어치고는 조금 무거운 말이지만, '능기'와 '소기'에 댈 게 아닙니다. '기표'나 '기의', '기고보(記號母)'나 '기고시(記號子)' 같은 다른 한일(韓日) 역어들도 그렇습니다.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라는 말을 그냥 쓰느니만 외려 못하게 돼버렸지요.  

한국일보(09. 10. 19) 번역이라는 고역 <中> 

소쉬르 용어의 번역 문제를 조금 더 짚어봅시다. 언어활동('랑가주')의 개인측면과 사회측면을 각각 '파롤'과 '랑그'라고 부르면서, 소쉬르는 일상 프랑스어 '파롤' '랑그' '랑가주'의 의미가 자신의 일반언어학 용어 '파롤' '랑그' '랑가주'의 의미에 너무 깊이 간섭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던 모양입니다. 그는 '랑가주'를 '랑그'와 '파롤'로 나누어 논한 뒤, 얼른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우리가 정의한 것은 사물이지 낱말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겠다. 그러므로 언어에 따라서 몇몇 용어들이 모호해져 서로 깔끔하게 대응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가 확립한 구별에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러고 나서 소쉬르는 독일어와 라틴어의 예를 듭니다. 그의 말을 계속 들어보지요. "가령 독일어 Sprache는 '랑그'와 '랑가주'를 뜻한다. Rede는 '파롤'에 얼추 대응하지만, 거기에 '디스쿠르'(discoursㆍ담화)라는 특수 의미를 보탠다. 라틴어 sermo는 외려 '랑가주'와 '파롤'을 의미하는 한편, lingua는 '랑그'를 가리킨다. 어떤 낱말도 앞에서 자세히 설명한 개념들 중 하나에 정확히 대응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낱말에 내려진 모든 정의(定義)는 헛되다. 사물을 정의하기 위해 낱말에서 출발하는 것은 나쁜 방법이다."

<일반언어학강의>(CLG)의 라틴어 번역본은 없습니다. CLG가 출판된 20세기 초는 라틴어가 이미 유럽 지식사회의 공용 문어 자리를 잃은 지 오래니 그럴 만합니다. 독일어 번역본은 당연히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제가 지닌 것은, 헤르만 로멜(Herman Lommel)이라는 사람이 옮긴 <그룬트프라겐 데어 알게마이넨 슈프라흐비센샤프트(Grundfragen der Allgemeinen Sparchwissenschaft)>입니다. 1967년 베를린에서 나온 책이군요. 원본 표제의 '강의'(Cours)가 로멜의 독일어 번역본에선 '근본문제'(Grundfragen)로 바뀐 게 눈에 띕니다.

그렇다면 로멜은 소쉬르의 '랑그' '파롤' '랑가주'를 뭐라 옮겼을까요? 독일어에 능숙했던 소쉬르의 조언을 따랐을까요? 곧이곧대로 따르진 않았습니다. 로멜은 '랑그'를 '슈프라헤(Sprache)'로, '파롤'을 '슈프레현(Sprechenㆍ말)'으로, '랑가주'를 '멘슐리혜 레데(menschliche Rede)'로 옮겼습니다. 독일어 감각이 무디니, 이 번역이 잘된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판단을 삼가겠습니다. '랑가주'를 '멘슐리혜 레데' 곧 '사람의 말'로 옮긴 데서, 로멜이 겪었을 고충이 드러납니다.

일상 프랑스어의 '랑그'와 '랑가주'에 (의미적으로만이 아니라 형태적으로) 대응하는 낱말을 제 어휘목록에 지닌 자연언어들(지난번에 살핀 이탈리아어와 스페인어가 그랬지요) 이외의 언어(영어가 그랬지요)로 이 두 용어를 구별해 옮기는 것은 역시 어려운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영어와 독일어가 그럴진대, 일본어로 이 둘을 구별해 옮기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을 겁니다. 고바야시 히데오가 그것들을 '겐고(言語)'와 '겐고가쓰도(言語活動)'로 옮긴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이 두 역어는, '랑그'와 '랑가주'처럼, 형태적 공통인수를 지녔습니다. 그리고 '랑그'가 '랑가주'의 부분집합이듯, '겐고'가 '겐고가쓰'의 부분집합임이 한눈에 드러납니다.

일상 프랑스어의 '랑가주'보다 일상 일본어의 '겐고가쓰도'가 조금 무거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군요. 번역이라는 병치레가 수반하는 발열(發熱) 증상 정도로 생각합시다. '파롤'을 '겐(言)'으로 옮긴 것도 잘된 번역 같습니다. "겐(言) 오 마타나이"(말할 것도 없다, 자명한 일이다) 같은 예에서 보듯, 일상 일본어 '겐'은 일상프랑스어 '파롤'에 얼추 대응합니다.

그러나 '파롤'의 한국어 번역어 '화언(話言)' 앞에선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군요. 물론 이 말을 표제어로 올린 한국어사전도 있긴 합니다. 예컨대 이희승 국어대사전엔 '화언'이 "말을 함. 이야기함. 또, 그 말이나 이야기"라 풀이돼 있습니다. 그러나 일상 한국어에서 '화언'은 죽은 낱말, 없는 낱말입니다. 반면에 '파롤'은 일상 프랑스어에서 싱싱하게 꿈틀거리는 낱말입니다. 그 두 말 사이의 거리는, 일상 독일어 '페어슈탄트(Verstand)'나 일상 영어 '언더스탠딩(understanding)'과 한국어 '오성(悟性)' 사이의 거리보다 훨씬 더 멀어 보입니다.

'오성'이라는 말도, 철학적 맥락 바깥에선 쓰지 않는 탓에, 부적절한 역어의 대표적 예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립니다(사실 일본사람들이 '고세이ㆍ悟性'로 옮긴 것을 그냥 베껴온 것이긴 합니다). 그런데 '화언'은 '오성'보다 더 굳어있는 말입니다. '파롤'을 '화언'으로 옮기는 것은 그 말을 아무 의미 없는 소리뭉치로, 예컨대 '비디비디'나 '쿵빠짜'로 옮기는 것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비디비디'나 '쿵빠짜'가 한국어 공간에서 생명 없는 말이듯, '화? 역시 방부제로 처리한 주검이나 다름없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파롤'을 차라리 '말'로 옮기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그 말이 소쉬르 언어학의 맥락에선 언어활동의 개인측면을 가리킨다는 것이 어차피 명시될 테니 말입니다. '말'이라는 말이 영 내키지 않았다면(도무지 학술용어처럼 들리지 않았다면: 사실 이건 커다란 편견이지요. 학술어는 흔히 일상어의 특별한 사용일 뿐이니까요), 이탈리아 사람들처럼 그냥 '파롤'이라고 놔둘 수도 있었을 겁니다.

우리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예를 따르려 합니다. 아니 그들보다 더 나아가려 합니다. '파롤'은 물론이고 '랑그'나 '랑가주'라는 말도, 소쉬르의 맥락에서는, 그냥 가져다 쓸 생각입니다.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능기'와 '소기', '기표'와 '기의'라는 말의 생기가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라는 말의 생기보다(심지어 한국어 텍스트 안에서도) 덜하다고 여겨서입니다.

소쉬르 번역과 관련해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용어가 또 있습니다. '음성학'과 '음운론'입니다. 지금의 언어학자들에게 음성학은 '포네티크(phonetiqueㆍ영어로는 phonetics)'의 대응어이고, 음운론은 '포놀로지(phonologieㆍ영어로는 phonology)'의 대응어입니다. '포놀로지'와 '포네미크(phonemiqueㆍ영어로는 phonemics)'를 구별하는 언어학자도 있는데, 말소리에 관한 이 학문들의 분류와 그 내용은 언젠가 자세히 살필 기회가 있을 겁니다. 이 자리에선 음성학과 음운론의 차이를 짧게 얘기하고, 이 용어들이 소쉬르 번역에서 왜 문제가 되는지만 살피겠습니다.

음성학은 음성을 연구하는 학문이고, 음운론은 음운(이라기보다 차라리 '음소'라고 해야겠네요. 음운과 음소의 구별에 대해선 뒷날을 기약합시다)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음성은 말소리 일반을 가리키고, 음소는 한 자연언어에서 실현되는 말소리 가운데 의미와 관련이 있는 말소리들을 가리킵니다. 아주 거칠게 도식화한다면, 음성학은 파롤의 언어학에 속하고, 음운론은 랑그의 언어학에 속합니다.

'동물의 살'을 뜻하는 한국어 낱말은 '고기'입니다. 이 단어의 첫 자음과 둘째 자음은 다 'ㄱ'으로 표기됐지만, 서로 다른 소리로 실현됩니다. 즉 첫 자음은 [k]로 실현되고 둘째 자음은 [g]로 실현됩니다. 둘째 자음도 본디는 [k]였지만, 두 모음(두 유성음) 사이에서 유성음으로 변한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어 화자들에게 이 두 소리는 똑같이 들립니다. 한국어 음성학은 이 [g] 소리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어 음운론은 거기 관심이 없습니다. 한국어에서 [g]는 독립된 음소가 아니라 음소 {k}의 환경적 변이음일 뿐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물고기'에서는 첫 'ㄱ'이 /k'/로 실현됩니다. 이 경우의 /k'/도 음소 {k}의 환경적 변이음이긴 합니다. 그러나 한국어 음운론은 /g/와는 달리 /k'/에는 관심이 있습니다. '굴'[kul]과 '꿀'[k'ul]의 비교에서 보듯, 한국어에서 {k'}는 {k}와 대립해 의미 차이를 만들어내는 버젓한 음소이기 때문입니다.

CLG 서론의 마지막 장(章)과 그 부록은 'phonologie'에 대한 논의입니다. 그런데 소쉬르가 여기서 실제로 논의하는 것은 (음운론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음성학'이라고 부르는 것과 거의 겹칩니다. 소쉬르의 phonologie는 오늘날의 phonologie와 의미가 전혀 다르다는 얘기입니다. 이 때 이 'phonogie'를 '음운론'이라 옮겨야 할까요, 아니면 '음성학'이라 옮겨야 할까요? CLG의 한국어판 둘 가운데 한쪽은 '음성학'을 골랐고, 다른 쪽은 '음운론'을 택했네요. 영어로는 이 'phonologie'를 'phonology'로 옮기는 게 옳을까요, 아니면 'phonetics'로 옮기는 게 옳을까요. 웨이드 배스킨은 'phonology'라 옮겼고, 로이 해리스는 'physiological phonetics'라 옮겼군요. 참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한국일보(09. 10. 26) 번역이라는 고역 <下>

방부 처리한 주검에 '파롤'의 한국어 역어 '화언'을 견주며, 저는 번역자의 무성의와 무감각을 탓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공정한 비판이었을까요? 부분적으로만 그렇습니다. 소쉬르의 '파롤'이 일상어의 특별한 사용이었듯, 한국어에서도 특별한 사용을 통해 전문용어 노릇을 겸할 수 있는 일상어를 찾아냈다면 좋았겠지만, 번역자 처지에선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사실 적지 않은 (전문용어들의) 역어들이 주검 상태에서 생애를 시작합니다. 운이 좋아 거기 생기가 깃들이면 그 낱말이 일상어로 자리잡게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그 말은 전문용어 사전 속에만 숨어있게 됩니다. '화언'은 운이 나빴을 뿐입니다.

이를테면 메이지(明治) 시대 초기의 일본인들은, 오늘날 한국인들이 '화언'이란 말에서 느끼는 낯섦보다 더 지독한 생경함을 '샤카이(社會)'라는 말에서 느꼈을 겁니다. 오늘날의 일본인들은 영어 낱말 society를 대뜸 '샤카이'에 대응시킵니다. 일본사람들을 따라서, 오늘날의 한국인들도 society를 즉시 '사회'에 대응시킵니다. 그렇지만, 일본어에서 '샤카이'가 society의 역어로 정착된 것은 18세기 말 이래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뒤의 일입니다.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 가운데 큰 것 하나는 일본 전통사회에 society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동료들끼리의 결합을 뜻하는 society는 전통 일본에도 있었지요. 그러나 가장 넓은 범위의 서로 모르는 개인들이 모여 이룬 집단을 뜻하는 society는 일본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만큼 이 단어의 번역은 쉽지 않았고, 최후의 승자로 남은 '샤카이'조차 처음엔 '방부 처리한 주검'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 말이 생기를 얻은 것은 수많은 일본인들이 그 말을 society라는 의미로 사용한 덕분입니다. '샤카이'가 운이 좋았던 거지요. 현대 일본의 정신적 초석을 놓은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ㆍ1835~1901)만 해도, 1868년 영어로 된 경제학 교과서를 <세이요지조 가이헨(西洋事情 外篇)>이라는 표제로 일역하며, society를 '닌겐고사이(人間交際)' '고사이(交際)' '구니(國)' 따위로 옮겼습니다. 세이후(政府)나 세조쿠(世俗), 소타이진(總體人) 같은 낱말도 그 시절 '샤카이'의 경쟁어였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현대한국어 문장이나 현대일본어 문장은, 심지어 그 문장들이 한국학이나 일본학을 논하고 있을 때조차, 압도적으로 '번역된 유럽'이라는 점을 지적해야겠습니다. 지금 제가 쓰고 있는 이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글에는 한두 세기 전 한국인이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들(주로 한자어)이 많은데, 그 말들은 대개 유럽 사회에서 태어난 개념들을 번역한 것입니다.

그 번역의 주체는 18세기의 란가쿠샤(蘭學者ㆍ네덜란드어 문헌들을 통해서 유럽 문화를 연구하던 이들)와 19세기 중엽 이래의 에이가쿠샤(英學者ㆍ영어 문헌을 통해 서양 문화를 연구하던 이들)를 비롯한 일본인 번역가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두 세기 남짓 기간에 걸쳐 유럽(아메리카까지 포함한) 문화 전체를 한자로 옮겨내 제것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 '번역된 유럽'은, 19세기 말 이래 반세기 이상 한국이 일본문화권의 일부를 이루면서, 고스란히 한국어에 이식됐습니다. ('란가쿠[蘭學]' 이래 일본인들이 수행한 번역활동을 비롯해 번역행위의 세계문명사적 의의와 그 양상은 졸저 <감염된 언어>[1999]의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라는 글에 비교적 소상히 적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저는 '번역된 유럽어'로 독자 여러분과 소통하고 있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닙니다. 란가쿠샤 이래의 일본인 번역가들은 유럽을 한자어로 옮기면서, 이미 동아시아에 존재했던 비슷한 개념어를 가져다 쓰기도 했지만, 완전히 새로운 말을 만들어낸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그 신조어들은, 대체로, 우리의 '화언' 같은 주검 상태로 일본어 세계에(그리고 나중에는 한국어 세계에) 머리를 들이밀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신조어들 가운데 수많은 말이 살아남아 지금 현대일본어와 현대한국어 어휘부의 뼈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새 번역어들이 주검 상태에서 생기를 얻는 과정을 야나부 아키라(柳父章)라는 일본인 번역학자는 '카세트 효과'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카세트'는 보석상자라는 뜻입니다. 그의 말을 잠깐 들어볼까요? "새로 만든 말은 카세트를 닮았다. 그 말 자체가 매력이다. 그리고 속에 깊은 의미가 틀림없이 담겼으리라는 막연한 기대가 사람들을 끌어서 자꾸 그 말을 쓰도록 부추긴다. 빈약한 의미밖에 지니지 못한 신조어는 그 반복 사용 과정을 통해 이윽고 풍부한 의미를 갖게 된다. 처음엔 단지 아름다움 때문에 보석상자를 찾던 사람들이 끝내 보석을 간수하는 데 그 상자를 쓰는 것과 마찬가지다. 의미나 역할이 아니라 말 자체에 매혹되는 첫 체험이 없었다면 사람들은 결국 그 말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번역을 위해 새로 만들어진 말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보석상자 같은 것이다."(<번역이란 무엇인가>)

그러니까 야나부에 따르면 수많은 신조어들이 처음엔 빈 보석상자였다가 나중엔 보석이 담긴 상자가 되는 겁니다. 물론 끝내 빈 보석상자에 머물러 사람들의 손길에서 멀어지는 경우도 많지요. 영어 단어 'society'의 역어 자리를 놓고 '샤카이'와 경쟁하던 '닌겐고사이'나 '소타이진'처럼 말입니다. 사람들은 오직 '샤카이'라는 카세트에 보석을 담았던 것입니다. '파롤'의 역어 '화언'은 아직 빈 카세트 같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 안에 보석이 담길 것 같지 않습니다. 보석을 담게 될 카세트는 차라리 '파롤'이라는 외래어 같군요. '카세트 효과'는 신조어에서만이 아니라 외래어에서도 나타납니다. 처음 듣는 외래어는 빈 카세트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빈약한 의미밖에 지니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거기 매혹된 사람들이 자꾸 쓰다 보면 언젠가 보석을 담게 됩니다. 다시 말해 시나브로 풍부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렇지만 '화언'이 영원히 빈 카세트로 남게 된다 해도, 역자들을 크게 탓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번역의 역사에서 끝내 빈 카세트로 남게 된 말은 무수히 많으니까요. 오히려 그 번역의 시도를 상찬하는 것이 올바를 것 같습니다. 번역은 한 세상에 또 한 세상을 들여놓아 세상을 입체화하는 엄청난 일이니까요. 란가쿠 이래 일본인들의 번역활동이 일본에(그리고 나중에는 한국에) 유럽 전체를 들여놓아 일본인들의(그리고 이내 한국인들의) 세계인식을 크게 확장시켰듯 말입니다.

번역이 늘 인식의 지평을 넓히겠다는 욕망에서 실천되는 것은 아닙니다. 번역은 때로 일종의 배타적 종족주의, 문화적 국수주의를 연료로 삼기도 합니다. 모국어 순화운동이 그 전형적 예입니다. 일본인들이 '메이시(名詞)'라고 옮긴 영어 낱말 noun을 우리 역시 '명사'라고 옮깁니다. 그러나 언어민족주의자들은 이 번역어를 다시 '이름씨'로 번역합니다. 일본인들이 '도시(動詞)'라고 옮긴 영어 낱말 verb를 우리 역시 '동사'라고 옮깁니다. 그러나 언어민족주의자들은 이 번역어를 다시 '움직씨'로 번역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이 이중번역에 커다란 뜻이 있을까요?

물론 개인 수준에서만이 아니라 민족 수준에서도 자존감은 매우 커다란 심리적 자산입니다. '명사'나 '동사'라는 말이 '메이시'나 '도시'라는 일본어를 그대로 베낀 것은 분명하고, 그것이 언짢아 '이름씨'나 '움직씨'라는 말을 만들어내 쓰고 싶어하는 마음을 깔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름씨'나 '움직씨'가 '명사'나 '동사'보다 '혈통적으로' 한국어에 가까워 보이는 건 사실입니다. '이름씨'나 '움직씨'는 한자로 표기할 수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명사'와 '동사'가 '메이시'와 '도시'를 고스란히 베껴낸 것이라면, '이름씨'와 '움직씨'도 '명사'와 '동사'를 고스란히 베껴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두 번째 번역을 통해서 인식의 지평이 조금이라도 넓어졌다 할 수는 없으니까요. 말하자면 '이름씨'와 '움직씨'는 지적 작업의 결과라기보다 말놀이의 결과입니다. '메이시'와 '도시'가 지적 작업의 결과인 것과는 크게 다르죠. 지적 작업에 이르지 못하는 이 말놀이를 비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낱말의 생명력이 반드시 '혈통'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다시 야나부의 말투를 빌려오자면, '명사'와 '동사'는 이제 보석을 가득 채운 카세트입니다. '이름씨'와 '움직씨'는 민족주의자들의 수십 년 열정을 비웃듯 아직도 빈 카세트인 것 같습니다. 여기에 언젠가 보석이 담길 거라 자신할 수도 없고요. 

09. 11. 01. 

 

P.S. 칼럼에서 주로 언급되고 있는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는 두 종류의 한국어본이 있지만, 현재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은 최승언 역의 <일반언어학 강의>(민음사)가 유일하다. 바로 이 책에서 '파롤'의 번역어로 '화언'을 쓰고 있다. 발췌본인 김현권 역의 <일반언어학 강의>(지만지, 2009)에서는 어떤 번역어들을 사용하고 있는지 아직 확인해보지 못했다. 제자들이 받아적은 강의록을 옮긴 <일반언어학 강의>와 달리 뒤늦게 발견된 소쉬르 자신의 노트를 대본으로 한 <일반언어학 노트>(인간사랑, 2007)는 <일반언어학 강의>의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 필독해볼 만한 책이다. 나도 작년쯤 구입만 해놓은 상태이지만.   

  

고종석이 인용하고 있는 필자 가운데 한 사람인 야나부 아키라의 책으론 <번역어 성립사정>(일빛, 2003)이 있다. 그의 다른 책들도 소개됐으면 싶지만(칼럼으로 봐서는 <번역이란 무엇인가>란 책도 있는 듯하니까) <번역어 성립사정>마저 절판된 게 우리의 궁색한 현실이다. 고종석의 <감연된 언어>도 물론 같이 읽어봐야 하는 책이며, 한권 더 덧붙이자면 이연숙의 <국어라는 사상>(소명출판, 2006). 일본에서의 '국어' 개념의 성립과정을 살펴봄으로써 근대 일본의 언어 인식의 근저를 밝히고자 한 책이다. 1996년 이와나미서점에서 출간되어 이듬해 산토리학예상을 수상하는 등 일본에서 화제를 모았다는 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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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ine 2009-11-01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한국의 경우 소쉬르 연구의 깊이는 굉장히 얕은 상황에서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통해서 랑그, 파롤, 기표등의 용어가 알려지면서 그 개념이 모호해지는 측면이 있는거 같습니다. 사실 라캉은 소쉬르를 추켜새우긴 해도 그가 쓰는 개념과는 안드로메다급으로 다른 의미로 이 개념을 쓰고 있는데 말이죠...

로쟈 2009-11-01 20:37   좋아요 0 | URL
소쉬르보다 라캉이 먼저 소개된 건 아니구요, 국내에서 소쉬르 연구가 라캉 연구보다 깊이가 얕은 것도 아닙니다. 기표와 기의의 관계를 새롭게 해석하지만, 소쉬르와 야콥슨의 언어학이 없었다면 라캉의 정신분석학(정신분석학의 언어학적 전회)도 어려웠겠죠...

2009-11-01 23: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01 2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park6 2010-03-15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재 소쉬르의 일반 언어학 강의(민음사)를 읽고 있습니다.

이글을 통해 소쉬르 읽기에 많은 도움을 받고 있어요ㅎㅎ

이런 좋은 글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