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에서도 그렇지만 최근에 나온 화제의 번역서는 <이방인>(새움, 2014) 재번역본이다.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다"라는 공격적인 카피가 눈길을 끄는데,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김화영 번역의 <이방인>을 주된 타겟으로 삼고 있는 '교정 번역본'이다. 책의 절반 정도가 이 교정과정을 담은 '역자 노트'로 채워져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김화영판은 민음사판과 책세상판 두 종으로 나와 있으며 근소한 차이가 있다).

 

 

몇달 전인가 출판사 카페에 번역에 대한 문제제기와 함께 새 번역이 연재되고 있는 걸 알았고 이후에 경향신문에서 번역에 대한 논란이 기사화된 걸 읽기도 했다. 번역 문제에 관심이 많은 편이고 한겨레에는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연재하고 있기도 하므로 나 역시 새 번역 과정에 흥미가 있었지만 일단은 책으로 나오면 판단해볼 생각이었다(아무래도 온라인의 문제제기는 잠정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데다가 출간이 예고돼 있었기 때문이다. 역자는 본명이 아닌 '이정서'라는 필명으로 출간하겠다고 했다).

 

지지난주에 책을 구해서 일단은 맨앞에 실린 '역자의 말'을 읽었다. 이미 김화영 번역의 몇몇 문제들에 대한 비판에는 공감하기도 해서 이 책이 한 추천인의 말대로 "프랑스어판 정본에 버금가는 권위를 누리고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인용의 준거가 되기를 기대"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좀 유보하게 됐다. 소설의 맨마지막 단락에 나오는 한 문장의 해석 때문이다. 역자가 이 대목을 '역자의 말'에서 다루고 있는데, 문제 삼고 있는 대목의 김화영 번역은 이렇다.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것은 이제 나와는 영원히 관계가 없어진 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민음사판, 135쪽)

특히 문제가 된 건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라는 문장이다. 불어 원문은 "À ce moment, et à la limite de la nuit, des sirènes ont hurlé."이다. 이에 대해 이정서는 이렇게 비판한다.

보다시피 김화영은 여기서 limite를 '끝'으로, sirènes를 '뱃고동'으로 보고 저렇게 번역을 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limite는 '경계'를, sirènes는 '사이렌'을 가리킨다. 하여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울린" 게 아니라, "한밤의 경계선에서 (감옥의) 사이렌 소리가 울린" 것이다. 여기서 김화영이 다시 이런 기본적인 단어를 오해한 것은 다음 문장, '한 세계로의 출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다른 세계로 떠나가는 '배'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저 말은, 이제 날이 밝으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질 뫼르소가 자신이 죽은 다음의 이 세계는 자신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앞에서 자신이 한 말을 다시 한 번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문장은 김화영이 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얼마나 오해하고 번역했는지를 확인시켜주는 마지막 문장이라 할 것이다.(새움판, 8-9쪽)

이런 판단에서 이정서는 문제의 대목을 이렇게 다시 옮겼다.

그때, 한밤의 경계선에서 사이렌이 울부짖었다. 그 소리는, 이제 영원히 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새움판)

내가 갖고 있는 불어 실력은 빈약해서 sirène이란 단어가 어떤 뉘앙스의 의미들을 갖는지, 단수와 복수의 차이는 없는지 잘 알지 못한다. 한데 이정서의 말처럼 그렇게 단정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김화영이 '한 세계로의 출발'이라는 말과의 조응을 고려하여 '사이렌 소리'를 '뱃고동 소리'로 옮긴 것에 견주면 그냥 '사이렌'이라고 한 것은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는 말과의 연결고리를 과소평가했다는 인상을 준다. 한밤의 경계라면 12시를 가리키는가? 감옥에선 12시에 그런 사이렌이 울리는지도 확인해볼 문제이지만, 한밤중에 울리는(게다가 울부짖는!) 감옥의 사이렌 소리가 어째서 '세계로의 출발'과 이어지는지 불분명하다. 그 새로운 세계가 뫼르소가 죽은 다음의 세계를 가리킨다면, 더 적절한 건 한밤의 사이렌이 아니라 새로운 아침을 알리는 새벽 6시의 기상 사이렌 같은 것이다(군대에서처럼 감옥에서도 기상 사이렌이 울린다고 하면). 그리고 limite란 단어도 '경계'라는 뜻도 포함하지만 일차적인 의미는 '끝'이나 '가장자리' 아닌가?

 

 

 

다른 번역본들에서 어떻게 처리했는지 궁금해 찾아봤다. <이방인>의 번역본도 꽤 여러 종 갖고 있는 편인데 다 찾을 수는 없고 눈에 띄는 몇 권만 책장에서 빼왔다(시공사에서 나온 최수철본을 찾지 못했다). 그래도 주요 번역본을 망라하고 있는 듯한데, 먼저 '원조' 번역본이라고 할 이휘영본(문예출판사)은 이렇게 옮겼다.

그때 밤의 저 끝에서 사이렌이 울렸다. 그것은 이제 나에게는 영원히 관계없는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는 것이었다.(문예출판사판)

가장 먼저 이루어진 번역본이라 김화영본도 참고한 번역이다. 그러니까 이 대목에서 "그때 밤의 저 끝에서 사이렌이 울렸다"를 좀더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한국어 '사이렌'에서는 '뱃고동 소리'를 떠올리기 어렵다. 뫼르소가 아무리 선박회사 직원이라 하더라도) 김화영은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라고 고쳐 옮겼던 것. 또 다른 번역으로 김예령본(열린책들)도 '사이렌파'에 속한다.

그 순간, 밤의 경계선을 타고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 소리는 이제 나와는 영원히 무관한 세상을 향해 출발을 고하고 있었다.(열린책들판)

반면에 또다른 카뮈 전공자인 이기언은 <이인>(문학동네판)에서 이렇게 옮겼다(지나는 김에 말하자면 <이방인>이란 제목을 <이인>으로 옮긴 건 역자나 출판사의 패착이며, '二人'과 '異人', 두 가지를 뜻하는 의미에서 <이인>으로 고쳤다는 해명도 설득력 빈곤이다).

그 순간, 밤이 시작되려는 바로 그때, 고동소리들이 울려퍼졌다. 고동소리는 이제 나와는 영원히 무관해져버린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문학동네판)

'밤의 끝'이나 '밤의 경계'로 옮겨진 문구는 '밤이 시작되려는 바로 그때'라고 풀어서 옮겼다. 그리고 이기언은 sirènes가 복수형인 걸 고려해서 '고동소리들'이라고 옮겼다. 부두에서 출항하는 배가 연거푸 내는 소리다(내가 아는 상식으론 군대나 감옥에서 나오는 사이렌 소리는 길게 한번으로 그칠 것 같다). 아무튼 그래서 이기언본은 김화영본과 함께 '뱃고동파'로 분류될 수 있겠다(최수철본은 어디에 속하는지 미확인이다).

 

 

영역본들은 어떨까. 역자도 불분명하기에 제대로 된 번역본이라고 할 수 없지만, 영역본도 같이 묶인 베스트트랜스본(더클래식판)에서 찾아보니 이렇게 돼 있다.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는데 이제 나와는 영원히 관계가 없어진 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는 소리였다.(더클래식판)

이것은 영역본 "Then, just on the edge of daybreak, I heard a steamer's siren."에 대응하는 것이다(이 영역본에 따르면 '막 동틀무렵' 뱃고동소리를 들은 게 된다). 펭귄에서 나온 모던클래식판에서는 "At that point, on the verge of daybreak, there was a scream of sirens. They were announcing a departure to a world towards which I would now be forever indifferent."라고 옮긴 대목이다. 영역본들은 la limite de la nuit를 '새벽' 혹은 '동틀녘'으로 옮기는 모양이다. '밤이 시작되려는 그때'라거나 '한밤의 경계선'과는 해석이 많이 다르다. 사실 limite는 시간적 의미뿐 아니라 공간적 의미도 갖는 단어다(아니 공간적 의미가 더 우선적 아닌가). 그렇게 따지면 la limite de la nuit '어둠의 저 끝' 정도의 뜻으로 새길 수도 있다. 밤의 어둠 저 멀리서 뱃고동 소리가 들렸다는 것으로.

 

정리하자. 새움판 새 번역 <이방인>에서 역자는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는 문장을 근거로 "이 문장은 김화영이 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얼마나 오해하고 번역했는지를 확인시켜주는 마지막 문장이라 할 것"이라고 '탄핵'했지만, 나는 '사이렌 소리' 대신에 '뱃고동 소리'라고 옮길 만한 근거도 있으며 그렇게 옮긴 번역본도 적지 않다는 걸 말하고 싶다. 그리고 어느 편이냐를 묻는다면, 적어도 이 대목에서만큼은 '뱃고동파'의 편을 들어주고 싶다. 번역은 "여기서 limite는 '경계'를, sirènes는 '사이렌'을 가리킨다"고 단언할 만큼 단순한 작업이 아니다(그런 번역이라면 구글이 더 잘할 수 있다). <이방인>의 인용 준거가 되려는 번역이라면, 좀더 많은 걸 살펴야 하지 않을까 싶다...

 

14. 04. 06.

 

 

 

P.S. 새움판 <이방인> 때문에 촉발된 오역 논쟁에 대해선 한겨레에서 정리기사를 실었다. 영어판, 일어판과도 대조해놓았는데, 전문을 참고해볼 만하다(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32347.html).

이정서씨의 <이방인>도 숱한 번역본 중의 하나다. 그러나 이씨가 좀더 주목받는 이유는 ‘내 번역이 낫다’는 번역 논쟁에 그치지 않고 ‘권위자 김화영 교수의 번역은 엉터리다’라며 일종의 ‘문학권력 논쟁’으로 나아간 데 있다.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다…25년을 속아 온 번역의 비밀, 이제 진실이 모습을 드러낸다!’ 새움출판사의 마케팅 띠지 문구다. 이씨가 오역의 주체로 지목한 인물은 김화영(73) 고려대 불어불문학과 명예교수다. 카뮈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카뮈 대표작을 모두 번역해 전집을 낸 한국의 대표적인 프랑스 문학자·번역가다. 여러 권의 산문집을 낸 작가이기도 하다.(...)

 

이씨의 익명 논쟁 방식도 논란이다. 이씨는 본명과 과거 문학가로서의 경력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그는 이름과 권위가 아니라 문장을 보자는 취지라고 이유를 밝혔다. 정혜용씨는 “창작 비평은 작품을 얼마나 깊이 읽는지를 다루는데 번역 비평은 어떤 번역의 나쁜 점을 지적하는 걸 먼저 한다. 그런 점에서 번역자에겐 늘 자기를 옹호하고 항변하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이정서씨가) 이름도 밝히지 않고 김 교수를 비판하는 것이 정당한 번역 비평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밝혔다. <한겨레>가 전자우편으로 이씨에게 재차 학벌 등을 제외하고 번역가나 작가로서의 배경을 추가 설명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이씨는 적절치 않다며 거절했다.

 

정혜용씨는 “이씨의 논쟁은 ‘번역도 문학’이라는 점을 독자에게 알린 점에서 재밌는 현상”이라고 긍정적 측면을 짚었다. 번역가들의 노력은 창작에 버금간다. 번역이 지식 생태계에 끼치는 영향도 크다. ‘인권’ ‘사회’ ‘국회’ 등은 모두 메이지유신 당시 일본이 발명한 번역어였다. 그 번역어로 한국인은 사고하고 말한다. 프랑스어 번역문학계에서 이번 논쟁이 건설적인 번역 논쟁이 되기를 희망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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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회의(363호)의 특집은 '번역을 바라보는 8가지 시선'이다. 청탁을 받아 쓴 특집의 '여는 글'을 옮겨놓는다. 이디스 그로스만의 <번역 예찬>(현암사, 2014)과 <작가란 무엇인가>(다른, 2014)에 실린 포크너의 인터뷰를 글거리로 삼았다.

 

 

기획회의(14, 03. 05) 왜 번역이 중요한가

 

다시, 번역을 말한다. 왜인가. 물론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번 특집의 계기가 된 이디스 그로스만의 <번역 예찬>(현암사)도 원제는 ‘왜 번역이 중요한가’이다.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교양 있는 남녀라면 읽고 공부할 번역물이 없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라고 그로스만은 말한다. 영어권 독자에게만 한정된 얘기가 아니다. 우리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문학이나 인문사회분야로 한정하면 번역서의 비중이 절반을 넘어선다. 체감으로는 3분의 2는 돼 보인다. 번역물이 빠진 출판이나 독서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라면 번역이 왜 중요한지 말하는 것은 공기가 왜 중요한지 말하는 것만큼이나 중언부언이다. 그럼에도 다시 중언부언하는 것은 번역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그 인식의 공유와 확산이기 때문이다.


번역이론이나 번역비평서, 그리고 번역예찬서까지도 등장했지만 실제 이런 책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은 여전히 제한적이다. ‘만약에 번역서가 없다면’이란 가정이 실감나지 않아서일까. 내친김에 책장에서 번역서를 잠시 빼내보자. 몇 권이나 남아 있는지 눈으로 확인해보면 좀 실감이 날지 모른다. 표준적인 사례는 아니겠지만 시험 삼아 책장 한 칸에서 번역서가 몇 권이나 꽂혀 있는지 세 보았다. 영어와 러시아어 책을 뺀 40권 가운데 번역서가 32권, 국내서가 8권이다. 무려 80%가 번역서인 셈. 짐작컨대 어지간한 독서가라면 이 수치가 결코 50% 이하로 떨어지기 어려울 것이다. 산술적으로만 보아도 이것이 우리의 독서 현실이고 조건이다.


“번역은 보편적이고 계몽된 문명이라는 개념을 형성하는 데 중추적이고 현저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그로스만은 말한다. 하지만 그러한 위치에 걸맞은 대우와 평가를 받고 있느냐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그로스만은 당연히 영어권 특히 미국의 상황을 우려하는데, 우리와는 고민의 방향이 좀 다르다. 일단 번역서의 수가 현저하게 적다는 게 그의 문제의식이기 때문이다. 영어가 국제 공용어로 쓰이고 있는 현실 때문이겠지만, 미국에서 번역서의 수는 서유럽 선진국 및 중남미 나라와 비교해볼 때 처참할 정도로 적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여기서 그의 비교 대상은 문학작품의 번역인데, 세계문학전집이 여러 곳에서 출간되고 있는 우리는 사정이 조금 나을 수 있다. 하지만 세계문학이라고는 해도 일부 언어권(서구와 일본)에 과도하게 편중된 상황은 여전히 개선의 소지가 있다. 우리의 경우도 다른 언어권의 문학 번역이 처참할 정도로 적은 건 마찬가지다. 이러한 결여와 편중은 어떤 문제를 낳는가.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영어 번역자로도 유명한 그로스만은 윌리엄 포크너와 마르케스 간의 ‘연속적인 관계’를 예로 든다. 마르케스는 젊은 시절 포크너의 소설이라면 없어서 못 읽을 정도로 좋아했다고 한다. 마르케스에게만 그런 건 아니다. 포크너는 20세기 중반 중남미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현대 영어권 작가였다. 카를로스 푸엔테스나 바르가스 요사도 포크너에게 진 빚이 크다.


흥미로운 것은 포크너 자신이 세르반테스의 열혈 독자였다는 점이다. <파리 리뷰>와의 인터뷰에서 포크너는 다른 사람들이 성경을 매년 읽는 것처럼 자신은 <돈키호테>를 매년 읽는다고 털어놓았다. 물론 그가 읽은 건 영어 번역본인데, 그의 만연체 문장이 세르반테스의 영향이라면 중남미 작가들이 포크너에게서 친밀감을 느끼는 것은 우연히 아니겠다.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세르반테스가 포크너에게 영향을 주고 포크너는 다시 마르케스에게 영향을 준 것만큼 마르케스는 영어권의 현대 작가들에게 압도적인 영향을 미친다. 토니 모리슨과 살만 루슈디, 돈 드릴로 등의 경우가 그런데, 마르케스의 영향을 고려하지 않고는 이들의 문학을 생각할 수 없다는 게 그로스만의 판단이다. 이것이 언어 간의 ‘생산적 교환’이며 이 교환은 번역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중국의 포크너’로 불리는 모옌의 경우도 고려하면 그 생산적 교환의 범위는 더 확장된다. 문제는 우리다. 노벨문학상에 욕심을 내고 ‘세계문학’에 진입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지만, 그러한 ‘생산적 교환’의 생산적인 사례를 우리는 얼마나 떠올릴 수 있을까(베케트 계보로 묶을 수 있는 이인성, 정영문, 한유주 등의 작가를 떠올려보지만 일례에 지나지 않는다).   

 


말이 나온 김에 포크너를 예로 들자면 우리는 아직 한국어판 포크너 전집을 갖고 있지 않다. 한국 독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헤밍웨이의 경우도 대표적인 소설들만 묶은 선집이 출간돼 있는 상황이다. 국내에서 그보다 훨씬 적은 독자를 갖고 있는 포크너는 저작권 보호기간이 끝난 직후에 몇 권의 작품이 더 출간되긴 했지만 여전히 그가 쓴 작품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게다가 대표작 <소리와 분노>나 <압살롬, 압살롬>의 새 번역본이 나온 게 한두 해밖에 되지 않았다. 포크너의 영향을 받은 한국소설을 기대한다는 게 아직은 무망할 수밖에 없다.

 


문학동네의 '세계문학전집' 100권 돌파를 기념하여 작년에 나온 <한국작가가 읽은 세계문학>에는 포크너의 <곰>에 대한 독후감도 실렸는데, 필자는 2009년에 등단해 작년에 첫 소설집 <그들에게 린디합을>을  펴낸 손보미 작가다. 포크너가 40대 중반에 쓴 이 작품에 대해 “나도 그 정도 나이가 되면 저렇게 정직하게 작품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마도 너무 큰 소망인 것 같아 그냥 접어두기로 했다. 그 대신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를 비롯한 다른 작품들을 한번 읽어봐야겠다”고 적었다. 하지만  포크너가 네 번째 장편소설 <소리와 분노>를 쓴 건 작가보다 더 젊은 서른두 살 때의 일이다.


세르반테스와 발자크, 플로베르, 도스토예프스키와 경쟁했던 포크너는 이렇게 말했다. “훌륭한 예술가는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충고할 수 있을 만큼 훌륭하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는 최고의 허영심을 갖고 있지요. 옛 작가를 존경하더라도, 그는 그 작가보다 더 잘 쓰기를 바라지요.” 번역은 바로 이런 작가와, 이런 태도와 만나게 해준다. 한국문학은 ‘한국어로 쓴 문학’라고 정의하는 식의 빈곤한 인식으로는 세계문학과 만날 수 없다. 여전히 한국문학만을, 새로 조합하자면 ‘국내문학’만을 비평의 거리로 삼는, 그래서 번역문학은 들러리 정도로 간주하는 관행도 세계문학과의 거리를 좁히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 당연하지만 문제는 문학에 한정되지 않는다. 플라톤의 <파르메니데스>나 헤겔의 <대논리학>도 새 번역본이 나오지 않아 읽을 수 없는 게 우리의 독서 현실이다. 왜 번역이 중요한가, 한 번 더 목소리를 높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14. 0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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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휴가중이던 지난주에 나왔지만 '이주의 발견'으로 적는다. 데이비드 벨로스의 <내 귀에 바벨 피시>(메멘토, 2014). 제목만으로 어떤 책인지 짐작하긴 어려운데, '번역이 하는 모든 일에 관하여'가 부제다. 번역론이자 번역에 관한 성찰, 번역에 관한 에세이 등등으로 분류할 수 있는 책이다. 소개는 이렇다.

 

 

이 책의 관심은 번역 이론이나 번역 기술보다 ‘번역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밝히는 것이다. 번역가이자 전기 작가인 저자 데이비드 벨로스(David Bellos)는 언어학, 철학, 인류학의 풍부한 교양 위에서 사전, 기계 번역, 성서 번역, 국제법, 뉘른베르크 재판, EU와 동시통역의 탄생, 문학작품 번역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날렵한 재치와 풍성한 입담으로 풀어나간다. 언어, 말, 번역에 대한 신선하고도 유익한 이야기로 우리가 몰랐던 번역의 진실에 다가갈 수 있게 해주는 이 책은, 번역이라는 주제로 흥미롭고 진기한 문화사 한 상을 차려낸다.     

 

 

책은 초면이지만 알고 보니 저자와는 구면이다. 데이비드 벨로스가 카뮈의 영역본 선집에 공역자로 참여했고, 내가 그 책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조르주 페렉과 이스마일 카다레의 책을 여러 권 옮겼고 로맹 가리에 대한 전기도 썼다(로맹 가리의 전기는 국내에 한 권 소개돼 있지만 한 권 더 나와도 좋지 않을까).

 

 

번역가의 번역란이란 점에서는 최근에 나온 이디스 그로스먼의 <번역 예찬>(현암사, 2014)도 떠올리게 한다. 그로스먼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가르시아 마르케스, 바르가스 요사의 여러 작품을 영어로 옮긴 번역자다. 개인적으론 그로스먼 역시 <번역 예찬>과 만나기 전에 영어본 <콜레라 시대의 사랑>을 통해서 먼저 접한 바 있다.  

 

 

 

번역에 관한 좀더 이론적인 책으론 윤성우, 이향 교수의 <번역학과 번역철학>(한국외대출판부, 2013)이 가장 최근에 나온 책이다. 두 저자가 공역한 앙트완 베르만의 <낯선 것으로부터 오는 시련>(철학과현실사, 2009), <번역과 문자>(철학과현실사, 2011) 등도 번역에 대한 이론적, 철학적 관심을 가진 독자에게 필독서다.

 

주섬주섬 사모은 번역학 관련서도 여럿 더 되는데, 정리해놓질 못해서 어느 구석에서 찾을 수 있을지 가늠할 수 없다. 번역 문제에 대한 정리는 나중으로 미루는 수밖에 없겠다. 일단은 <내 귀에 바벨 피시>부터 읽고서...

 

14. 01. 23.

 

 

P.S. 아, 제목의 '바벨 피시'는 뭐냐고? "이 책의 표제에 쓰인 ‘바벨 피시’는 코믹 SF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 나오는 작고 노랗고 거머리같이 생긴 물고기다. 이 물고기는 귀에 집어넣으면 어떤 언어라도 즉시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통역기다." 그러고 보니, 이 두꺼운 책도 구입해놓고 아직 펼쳐보지 못하고 있구나. '은하수 여행'을 떠나려면 며칠간의 휴가로는 어림도 없을 테니 당분간은 '그림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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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번역과 번역가' 카테고리의 글을 옮겨놓는다. 이디스 그로스만의 <번역 예찬>(현암사, 2014) 출간을 계기로 번역자 공진호 선생과 번역과 번역비평을 주제로 대담을 가진 적이 있다. 대담의 기획자이자 사회자였던 김신식 편집자가 정리한 글이 프레시안에 기사로 올라왔는데, 그중 일부다(전문은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40110130653 참조). 공진호 선생은 포크너의 <소리와 분노>(문학동네, 2013) 등을 우리말로 옮긴 바 있다.

 

 

 

프레시안(14. 01. 10) 오역 '지적질'로 그칠 것인가? 더 좋은 독서를 원한다!

 

(...)

 

읽기, 번역 비평의 출발점

김신식 : 번역 비평을 하려면 일단 책을 읽는 게 순서겠죠. "이 책 번역 참 좋네" 혹은 "덕지덕지 붙은 번역투 참 거슬리네" 하는 반응이 자연스레 나옵니다. 성실한 사람들은 원서도 장바구니에 담고 책이 도착하면 비교해가면서 읽어봅니다. 곧 인상을 찌푸리거나 '오~' 하는 반응도 보이겠죠. 두 분이 번역서를 '따져 읽기' 시작했던 때와 그 경험을 밝혀주신다면.

 

이현우 : 저의 경우 러시아문학을 전공하면서 공부하는 방식의 특성상 원서와 번역서를 비교해서 읽는 일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습니다. 인문 번역서들을 주로 읽다가 번역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게 됐고요. 대학원 시절에 움베르토 에코나 폴 리쾨르를 영어본으로 읽고 번역하는 스터디 모임을 꾸린 적이 있는데, 한국어 번역본이 상당히 안 좋은 경우가 있었어요. 오역이 눈에 띄면 아무래도 더 주의 깊게 읽게 되니까 결과적으론 번역서 '독해력'을 많이 키우게 됐지요.

 

공진호 : 저는 사실 미국에서 살고 공부를 했기 때문에 원서와 번역서 간 비교 독서를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다만 몇 년 전부터 미국에서 번역을 하기 시작하고 한국에 와서 번역서를 접했을 때 많은 오역이 눈에 띄더군요. 대개는 제가 잘 아는 작품의 첫 단락에서 제가 아는 것과 다른 내용을 발견할 때가 많았어요.

 

 

 

가령 이런 것입니다. 조지 오웰의 <1984>를 열면 첫 문장에 "the clocks were striking 13."이 나옵니다. 시중에 나온 번역을 보면 "괘종시계가 13시를 알렸다" 혹은 "시계는 13시를 치고 있었다"는 식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오웰은 첫 문장부터 자기 소설 속의 세계가 정상적인 세계와 다르다는 것을 알리고 있습니다. "13시"라고 하면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군대에서나 철도 시간표 같은 경우 24시 시스템으로 시간을 말하잖아요. 시계들의 종소리가 13번 울리고 있었다고 해야 하는데,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것입니다. 종을 13번 치는 시계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으니까요.

 

게다가 일제히 여기저기서 시계들이 그 종소리를 울리는 광경을 떠올리게 하는 것입니다. 사소한 문구나 실수라면 기억을 못해서 알아채지 못할 텐데, 작중 세계를 규정하는 중요한 구절이라 기억하는 것이죠. 그런 게 의외로 많더란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번역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이현우 선생님의 블로그 '로쟈의 저공비행'에 소개된 관련 포스트를 접하기도 했어요. 개인적으론 문학 작품 번역에 문제점이 많다고 느끼는 편입니다.

 

김신식 : 공진호 선생님이 '로쟈의 저공비행' 이야기를 잠깐 해주셨지만, 이현우 선생님은 예전부터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꾸준하게 번역 비평을 실천해오고 있습니다. 또 번역학 관련해 학계 일도 맡으시면서 학술적인 참여도 하셨구요. 일반 독자와 학계 사이를 오가면서 번역 비평이 어떤 모습으로 정리될 수 있는지 고민해보셨을 듯합니다.

 

이현우 : 마땅한 번역 비평의 모델이란 게 아직 정립되진 않은 것 같습니다. 번역 비평에 관한 연구논문을 찾아보시면, 비평의 모델을 고민하는 결과물들이 있습니다. 연구자 스스로 논문 안에 번역 비평을 실천해 적합한 형식과 내용을 제시하는 형태가 많죠. 꼭 학계 사람이 아니더라도 블로그 등 일반 독자가 '뜨겁게' 참여하는 번역 비평 공간도 종종 발견됩니다.

 

김신식 : 번역 비평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겁니까.

 

이현우 : 어느 정도 지식은 필요하겠죠. 특히 독해력. 그런데 번역 비평이라고 해서 소수의 전유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독자라면 누구나 관여할 수 있는 서평보다는 문턱이 높을 테지만, 어떤 번역이 좋다, 나쁘다 정도를 식별하고 판별할 수 있다면 자기 몫의 번역 비평을 할 수 있는 거지요.

더불어 '번역을 하는 사람'과 '번역을 비평하는 사람'이 꼭 분리돼 있는 것도 아니고, 대립할 이유도 없다고 봅니다. 사실 현장 번역가들이 가장 훌륭한 번역 비평가가 될 수도 있지요. 가령 영화 쪽에도 영화감독과 영화비평가를 겸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서로에 대한 조언과 건강한 비판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김신식 : 현장에 계신 공진호 선생님은 번역 비평을 유익하게 받아들이시나요?

 

공진호 : 공개적으로 어떤 비평을 받아본 적은 없습니다. 다만 번역이론을 공부함으로써 제 자신의 번역과 거리를 두는 경우는 있습니다. 거기에는 '번역밥'을 먹고사는 입장에서 유익한 점이 분명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번역한 결과물에 대한 교정 수단으로 삼고 있지요.

 

번역 비평은 '헐뜯음'이 아니다

이현우 : 번역 비평이라 하면 혹자는 꼭 '번역 비판' 심지어 '번역 비난'으로만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는 않지요. 찬사와 경탄도 얼마든지 가능하잖아요? 번역 비평을 오역 시비로만 여기고, 좋은 번역의 가치를 알리고 번역가 노력과 성취를 평가해주려는 비평은 마치 주례사 비평인 양 치부한다면 아쉬운 노릇이죠.

 

상식적인 말이지만, 비평이 옳다/그르다 식의 재단만 일삼는 건 아니죠. 물론 아직은 번역 비평이라고 하면 오역 비판이 주종이 되곤 합니다. 원론적으로 번역이 그만큼 어려운 작업이고 그런 만큼 또 이견을 허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좋은 번역 vs 나쁜 번역'이라는 구도보다는 '좋은 번역 vs 더 좋은 번역'의 구도로 가는 게 훨씬 생산적이고 바람직하죠. 우리 번역문화도 그런 방향으로 가면 좋겠어요.

 

김신식 : 본디 비평이란 요물의 타고난 업보인지 모르겠으나, 날 선 비평문 자체는 읽는 사람에게 속 시원함을 안겨다주기도 하지만, 때론 당사자에게 엄청난 서운함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듯합니다. 이 서운함이 간혹 오해를 낳으면 물리적이거나 법적인 충돌로 일어나기도 하죠. 이현우 선생님은 몇 년 전 한 인문서의 오역을 짚다가 번역가 당사자에게 고소를 당하신 적도 있습니다. 번역 비평을 둘러싼 사람들의 정서라고 할까요. 그런 걸 한번 생각해본 기회도 되셨을 법한데요.

 
이현우 : 번역 비평을 둘러싼 호오(好惡)가 있습니다. 아까도 이야기를 꺼냈지만 번역 비평은 아직 '오역 지적질'로만 생각되는 듯해요. 여기서부터 갈등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번역자나 번역 비평자의 입장을 같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가령 이런 거죠. 번역자 입장에서는 일부 오역에 대한 비판이 작은 잘못은 크게 부풀린다는 인상을 받을 거예요. 1퍼센트의 흠이 99퍼센트의 노력을 가려버린다면 부당하고 억울한 일일 테니 정서적으로도 받아들이기 어렵죠. 물론 그렇더라도 자신이 잘못 옮긴 부분이 있다면 흔쾌히 수용하고 정정하는 게 더 성숙한 태도이긴 합니다. 번역에 대한 신뢰감도 심어줄 수 있고요.

 

한편으론 독자 입장도 고려해야 합니다. 어떤 상품에 하자가 있으면 '리콜'을 요구하는 게 당연하지만, 책은 좀 특수합니다. 쇄를 다시 찍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상식 이하의 번역서라면 반품하면 될 테지만(그런 반품이 사실 가능하진 않지요. 내용상의 파본이라고 해서 교환해주진 않으니까요), 부분적인 오류의 문제라면 저로선 독자들끼리라도 교정해서 읽자는 생각입니다. 만약 1퍼센트의 문제가 있다고 하면, 그걸 고쳐서 읽자는 겁니다. 오역 문제를 시비 거리로만 끝낼 게 아니라, 더 나온 번역문화, 독서문화로 나아가는 계기로 만드는 게 생산적이죠. 출판사나 역자는 한 번 더 확인해보는 계기가 될 터이고, 독자로선 번역을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는지 가늠해보면서 읽게 되겠죠.

 

공진호 : 번역 오류가 지적되어도 잘 팔리는 책은 여전히 잘 팔리더라고요. (웃음)

 

이현우 : 제가 들으니 인문서의 경우 구매 독자의 5퍼센트 가량이 완독한다고 해요. 구매 독자와 실제 독자 사이에 차이가 있는 거죠. 그 5퍼센트 독자 중에도 책의 내용을 꼼꼼히 따져가면서 읽는 독자는 극소수일 성싶어요. 번역 비판이나 비평은 그런 제한된 독자들만의 관심사처럼도 보입니다. 그렇더라도 좋은 책을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요건을 만드는 일은 중요하죠. 인문출판에서 번역서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 이상인 상황에서 좋은 번역서, 신뢰할 만한 번역서가 나오게끔 해줄 수 있는 분위기나 문화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죠. 이를 위해서라도 '좋은 번역을 위한 감시' 같은 번역 비평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김신식 : 번역 비평이 다룰 수 있는 주제는 많겠지만 그래도 '오역'을 지적하고 더 적합한 번역을 찾아보는 과정을 기본적으로 배제할 순 없을 듯합니다. 번역 비평은 원문과 번역문이라는 두 텍스트가 있는 상황에서 '오류' '잘못됨'이라는 부분을 드러낼 수밖엔 없을 듯한데요.

 

 

 

공진호 : 오류와 오역은 좀 더 달리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을 대하는 반응도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자신의 원작보다 나은 번역을 했다고 말한 두 문학 번역가가 있습니다. 그레고리 라밧사와 이디스 그로스먼. 둘 다 당대 최고의 남미 문학 번역가로 불립니다.

 

 

그로스먼이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영어로 옮길 때였어요. 번역을 하고 나서 그로스먼은 세르반테스의 '실수에 애착이 간다'고 했습니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세르반테스는 경제적으로 늘 쪼들리고 이 때문에 혹사에 시달리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초판본에 오류들이 눈에 띄었나 봐요. 어떤 번역가는 역사상 가장 부주의하게 쓰인 걸작으로 <돈키호테>를 꼽기도 했습니다. 허나 그로스먼은 세르반테스의 부주의를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 주목하고 원본에 다가가기 위한 친근한 정서로 해석했죠. 이처럼 오류 혹은 오역도 때론 작품의 일부로 해석될 여지가 있습니다.

 

이현우 : 원작의 오류를 어떻게 교정해서 옮길 것인가, 그대로 옮길 것인가, 하는 것도 흥미로운 문제지요. 공진호 선생의 말처럼 문학 작품상에서 오류와 오역은 작품을 새롭게 바라보도록 해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문서 번역, 특히 이론서 번역은 사정이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이론서 번역은 쉽게 말하자면 진위 여부를 따져야 하니까요. 마땅한 사례는 아니지만, 가령 슬라보예 지젝을 읽다보면 헤겔 철학이나 라캉 정신분석학의 용어들이 많이 나오는데, 아직 합의가 돼 있지 않은 용어들이 많습니다. 같은 개념을 번역서마다, 번역자마다 달리 옮기게 되면 일반 독자로선 좀 당혹스럽게 되죠. 주이상스(jouissance)라는 단어도 영어로는 쾌락(pleasure)과 구분해서 'enjoyment'라고 옮기는데, 우리말로는 '주이상스' '향유' '향락' '희열' 등으로 다양하게 옮겨지고 있어요.

 
스피노자나 칸트, 들뢰즈의 철학 개념들도 마찬가지로 번역어상으로는 아주 복잡합니다. 교통정리가 필요할 정도에요. 그렇게 되면 사실 소통에 장애가 생길 수밖에 없지요. 문학적 표현의 번역에서는 유연함이 발휘될 수 있지만 인문서 번역에서는 개념을 어느 정도 고정해주어야 하는데, 그게 제각각이라면 독서에 부담이 됩니다. 번역자들도 이런 점은 좀 감안해주었으면 싶어요.

 

(...)

 

14. 0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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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프레시안 books'의 특집이 '번역'이다. '번역가 3인 대담' 코너에서는 현장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이세욱, 박현주, 김명남 번역가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데, 흥미로운 읽을 거리여서 옮겨놓는다(전문은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30726211918&section=04 참조).

움베르토 에코, 베르나르 베르베르, 미셸 우엘벡 등의 작품을 옮기며 지극한 단정함과 아름다운 문장을 결코 놓치지 않는 이세욱, 레이먼드 챈들러와 존 르 카레, 트루먼 카포티 등의 작품을 통해 현대 장르소설에 뛰어난 감각을 발휘하는 박현주, 리처드 도킨스와 스티븐 제이 굴드 등 최전선에서 활동하는 과학자들의 화제작을 유려하고 편안하게 옮기는 김명남. 세 사람의 번역가는 모두 번역계에서 뚜렷한 자기 세계를 유지하며 편집자와 독자 양쪽 모두에게 큰 신뢰를 받고 있다. '프레시안 books'는 창간 3주년 특집을 맞아, 이 세 명의 번역가들을 한자리에 불러모아 위의 질문들과 더불어, 번역 작업의 행복과 고통, 자의식과 선입견 등을 꼬치꼬치 캐물어보았다. <편집자>

 

프레시안 : 먼저 어떤 계기로 번역을 업으로 삼게 되었는지 듣고 싶다.

이세욱 :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열린책들 펴냄)로 번역을 시작한 게 1992년이다. 누구나 그렇듯 처음부터 번역자가 되려고 대학에 간 건 아니지만, 아르바이트로 몇 번 하면서부터 번역과 어느 정도 친해지게 됐다. 그러다 삶의 어떤 시기에 '내가 무엇을 잘 할 수 있는가'를 묻게 되었고, 리스트를 쭉 만들어 보니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좋아하는 것이 겹치는 분야가 번역이었다. 그길로 이론을 공부하고 자기소개서를 돌리고, 몇 번 고배를 들이켰다가 어느 너그러운 출판사 사장을 만나서 이 일을 시작했다. 그동안 그만둘 기회는 숱하게 많았다. 다른 분야에서 유혹도 있었고.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 일을 놓지 않았던 건 번역이 준 행복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말하고 나니 별 게 없다. 그저 번역을 하다 보니 번역가가 되어 있었다고 할까.

김명남 : 내 경우 중학교 때부터 번역가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 책을 좋아했지만 작가가 될 능력은 없는 것 같다는 정도의 자의식이었다. 그런데 과학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점점 이 분야와 멀어지게 됐다. 마흔 살쯤 되면 번역을 하고 싶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인터넷서점 MD 시절 기회가 생겨 첫 작업을 하게 됐다. 전업 번역가의 길로 접어든지 이제 8년차다.

박현주 : 글 쓰는 직업을 갖는 여러 가지 길이 있는데, 나는 마니아가 번역자가 된 경우에 해당한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늘 문학과 텍스트 분석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소설을 좋아했는데, 가령 도서관에 가면 거의 모든 소설의 대출 카드에 내 이름이 적혀 있을 정도였다. V. C. 앤드류스의 <다락방의 꽃들>(이미영 옮김, 한마음사 펴냄) 같은 소설도 열심히 찾아 읽었다.(웃음) 자연스레 잡지나 학술문서 번역을 할 기회가 생겼고, 비슷한 취향을 나누는 PC통신 동호회 활동을 하다가 출판사 직원이 된 지인의 의뢰로 단행본 번역 일을 시작하게 됐다. 2001년경 당시 퍼블릭도메인으로 나와 여러 출판사에서 펴내게 된 셜록 홈즈 시리즈의 북하우스판을 맡게 되었다. 그러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빅 슬립><안녕 내 사랑>(북하우스 펴냄) 등의 번역이 인생의 기점이 됐고, 거기서부터 하나씩 연결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프레시안 : 직접 번역할 일이 있을 때마다 이른바 '구글링'의 힘을 실감한다. 인터넷 없던 시기에는 대체 어떻게 번역을 했나 싶을 정도다.(웃음) 이세욱 선생님은 그 시절을 경험하셨을 테고, 다른 두 분은 인터넷이 있어도 자료가 많지 않았던 시절을 겪었다고 할 수 있다. 그때의 경험은 지금과는 어떻게 다를지 궁금하다.

이세욱 : 그렇게 따지면 1950년대 말에 <돈 키호테>나 <신곡>을 번역한 최민순 신부님은 기적이라고 봐야 한다. 물론 지금은 그 번역이 도서관에서 잠자고 있지만, 작품에 대한 애정이나 독자와 작품을 나누려는 순수한 마음이란 측면에서는 지금도 그 작품을 따라올 게 없을 정도다. 물론 엄밀하게 따지면 불완전한 부분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스페인어 사전도 없는 상황에서, 일본어 중역도 아니라 원어를 가지고 우리말에서 가장 적합한 표현을 찾아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다. 지금 기준으로는 과도한 순우리말 사용을 문제 삼을 수 있지만, 우리말이 서양언어를 얼마만큼 대체할 수 있는가라는 무거운 문제의식을 가지고 접근한 결과라고 본다. 마찬가지로 20년 전에도 인터넷은 없었지만, 말의 가능성에 대한 고민이 있다면 자료나 적합한 번역어를 찾을 수 있었다.

그때는 일차문헌 위주로 자료를 찾았다. 지금 곤충에 관한 책을 번역한다면 일단 위키피디아에서 여러 언어의 버전으로 비교를 해보겠지만, 그때는 <곤충학개론>부터 시작해야 했다. 해외여행도 상당히 원시적이었던 시절이라 번역한 책에 나온 장소를 여행할 때도 모든 자료를 가방에 짊어지고 고단한 코스를 밟아야 했다. 요컨대 탐구 과정이 훨씬 길고 고단했다. 심지어 여행에 들어가는 돈도 사비를 턴 것이었으니까. 그때는 오로지 책과 번역 자체가 좋아서, 내가 좋아하는 작품과 함께 지내는 일이 좋아서 기꺼이 그렇게 했다. 지금에 비하면 많이 불편했지만 애정이나 순수성이 보장되는 측면도 있었다.

예전에는 과정 자체가 고단하므로 오류를 더 많이 범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기에 훨씬 더 치열했던 것 같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정보 검색이 편해졌으니까 어떤 정보를 부정확하게 다뤘다면 바로 불성실의 징표가 된다. 그래서 무서운 시대이기도 하다. 작가가 대부분 살아있기도 하고 검증하는 눈도 많으니까 새로운 고단함이 생겨났다고도 할 수 있겠다.

박현주 : 10년 전만 해도 인터넷이 있긴 했지만 거기서 찾을 수 있는 유용한 정보는 별로 없었다. 그래서 주로 도서관에 의존했다. 웹상의 자료가 많아지면서 인터넷을 많이 이용하게 됐는데, 여전히 직접 도서관을 뒤지고 공부해야 할 부분이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찰스 부코스키 책을 번역할 때 경마 장면이 있었는데 무슨 이야기인지 하나도 모르겠더라. 초보자들을 위한 '더미스' 시리즈 중 경마에 관한 책을 사서 읽고 마사회 사이트를 들락거리면서 미국 경마와 한국 경마의 시스템을 조금씩 매치시켜야 했다.

김명남 : 인터넷이 우리 일상에 들어온 게 불과 10년 전이다. 2003년 처음으로 단행본을 번역했을 때 이미 인터넷이 일상화되어 있었지만 집에는 깔려 있지 않았다. 책과 사전을 들고 집에서 번역하다가 PC방에 가서 몰아서 검증했던 기억이 난다.

이세욱 : 최근 에코가 그런 얘길 한 적이 있다. <프라하의 묘지>(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열린책들 펴냄)의 영어 번역자가 책 속 에코의 정보 중 틀린 부분이 있다고 했다더라. 뭔가 하고 찾아봤더니 그 영어번역자가 인터넷에서 본 정보라고…(웃음) 에코는 언제나 일차문헌에 기반하여 글을 쓰는 작가다. 인터넷 문서는 대부분 면밀한 검증을 거친 뒤에야 확신할 수 있는 정보이기 때문에 그에 의존하는 건 항상 경계해야 한다.

 

(...)

 

13. 0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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