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타임에 잠시 외도를 한다. 할일이 많은 주말인데, 공연히 페넬로페 도이처의 <데리다>(웅진지식하우스, 2007)를 잠시 읽어본 탓에 머리속이 복잡해졌다. 떠오르는 아이템을 비워내야 좀 맑은 정신을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몇 자 적어둔다. 주로 '해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리가 될 것이다.

책은 이번에 나온 'How To Read' 시리즈의 한권인데, 저자는 생소하고 역자는 의외이다(영화평론가로서가 아니라 아마도 '수유'의 멤버로서 번역진에 가세한 듯싶다). 개인적으론 시리즈의 다른 책들을 맡고 있는 슬라보예 지젝(라캉)이나 키스 안셀 피어슨(니체), 피터 오스본(마르크스) 등에 비해서 중량감이 떨어진다는 생각을 잠시 했는데, 그래도 노스웨스턴대학의 철학교수이며 <해체와 철학사>, <불가능한 차이의 정치학: 뤼스 이리가레의 후기 저작> 등의 저서를 갖고 있는 중견 철학자이다(국역본 속표지에는 'Luce Irigaray'가 '루스 이리가리'라고 특이하게 표기돼 있다. '이리가레'나 '이리가레이', '이리가라이'까지는 본 적이 있지만 '이리가리'는 처음이다. 어떤 자신감의 표현인지? 물론 예전에 '아리가리'라고 적은 서평은 있었지만).    

저자인 도이처에 대해서 좀더 알아보니까 현대 프랑스철학과 여성철학(philosophy of gender)이 주전공이고(그녀의 근간은 보부아르 연구서이다) 파리 1대학에서 저명한 여성철학자 사라 코프만의 지도하에 석사학위(DEA)를 받았다(박사학위는 뉴사우스웨일즈대학에서 했다). 켈리 올리버와 함께 <수수께끼들: 사라 코프만에 관한 논문집(Enigmas: Essays on Sarah Kofman)>(1999)을 편집했는데, 나도 갖고 있는 책이다(그러니까 알고보면 '구면'인 셈이다. 코프만과 올리버는 모두 니체 연구로 유명하다).    

 

사실 내가 몇 권 훑어본 시리즈의 책들 가운데에서 가장 깔끔한 번역은 <니체>이다. 원서를 안 갖고 있어서 대조해보지는 않았지만 가독성이 가장 좋다(책의 난이도도 고려해야겠지만). 고유명사나 작품명 외에 원어를 병기해주는 일이 최소화되어 있다는 점도 가독성을 좋게 할 뿐더러 역자의 '자신감'까지 읽게 한다. 거기에 비하면 <데리다>는 너무 많은 (대개는 불필요한) 원어 병기로 가독성을 떨어뜨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첫 페이지에서부터 'anti-Semitic'을 '반셈족적인'이라고 옮김으로써 신뢰도 또한 끌어내린다.

'데리다의 생애'에서도 "독일 점령기 알제리에서 광폭하게 시행된 프랑스의 반셈족주의와 페탕 정책으로"(196쪽) 데리다가 학교에서 쫓겨났다고 기술돼 있는데, '반유대주의' 대신에 '반셈족주의'를 고집하는 것은 역자의 신념에 따른 것인지?('페탕'도 보통은 '페탱'이라고 표기한다.) 어원을 따지자면 틀린 번역은 아니겠으나 누가 '반유대주의'를 '반셈족주의'라고 말하는가?('유대인 데리다' 대신에 '셈족 데리다'?) 이후엔 마음놓고 읽을 수 있는 번역이 아니라 매번 돌다리처럼 두드려가며 건너야/읽어야 하는 번역이다.

그렇게 읽자니 불편한 구석들이 많아진다. 데리다의 경력을 늘어놓는 서문에서 데리다의 <국가박사>는 따로 독립적인 책처럼 표시돼 있지만("당연히, 첫번째 박사학위와 두번째 박사논문인 <국가박사>가 뒤를 잇는다. 데리다의 <국가박사>는 23년 뒤에 가서야 비로소 제출된다.") 사실 1980년에 데리다가 국가박사학위논문 심사대상으로 제출한 것은 1967년에 내놓은 저작들(의 편집)이었다(그러니까 국가박사학위논문이 따로 있지 않다. 심사위원들 가운데는 레비나스도 포함돼 있었다). 그리고 '학위논문의 방어(thesis defence)'를 '논제 변호'(7쪽)라고 말하지 않는다.

데리다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강제 퇴학('퇴출') 당했다가 "학교에 복귀했을 때, 그는 축구에 빠져 최종 학교 시험 첫 시도에서 낙제한 불량학생이었다."에서도 '최종학교 시험(final school examination)이 프랑스의 대학입학자격시험인 '바칼로레아'를 가리킨다는 건 덧붙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그는 1947년에 이 시험에서 한차례 낙방했다). '정치학'에 'politics'란 원어를 병기해주는 친절이라면 말이다(16쪽). "그러나 두번째 시도에서는 프랑스 제3교육체계 내에 속하는 가장 엘리트적 대열에 입학 허가를 받을 만큼 좋은 성적을 받았다."(8쪽)라고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제3교육체계'에 'tertiary education system'이라고 원어를 병기해주면 일반 독자들이 알 수 있는 것인지.

교육학쪽에서 정확하게 어떤 용어를 사용하는지는 모르겠지만 'tertiary education system'은 대학이나 그에 준하는 '3차 교육기관'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내용은 데리다가 '3차 교육기관 가운데서 최고 엘리트 학교'에 입학했다는 뜻. 알제리 출신의 '시골뜨기' 데리다가 적을 두게 된 곳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엘리트 양성기관으로서 '그랑제꼴(Grandes Ecoles)'의 하나인 '고등사범학교'이다. 

참고로 알제리에서 유학을 와서 혼자 생활하게 된 "파리에서의 학창시절 역시 외롭고 불행한 것이었다. 간헐적인 우울증과 불안 그리고 복갈아가며 복용한 수면제와 각성제로 인해, 1950년, 1951년, 1955년 세 번씩이나 시험에서 낙제했다." 이 대목은 연보('데리다의 생애')에 기술된 내용과 약간 다른데, 거기서는 "1949년과 1951년의 고등사범학교 입학시험 낙제, 1955년 교수자격시험 낙제"라고 설명돼 있다(그가 정식 대학에 몸담을 수 없었던 한 가지 빌미가 되지 않았을까?). 요컨대, 데리다만큼 화려한 '낙방' 경력을 가진 철학자도 드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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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05-26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도 니체 번역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몇권을 이곳저곳 읽어보는데 가독성은 단연 니체였습니다. 번역진이 제가 가져온 6권 중 4권은 확실히 수유쪽이었던것 같더군요. 맑스, 라캉, 데리다, 니체.
아직 데리다는 손대지 않았는데 저만치 밀어두어야겠군요...

사량 2007-05-27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데리다 편 목차만 봤는데, [다른 곶], [테러 시대의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버젓이 번역서가 나와 있는 책들을 [다른 진로], [테러의 시간에서의 철학]이라고 옮겨놨더군요. 이거 보고 큰 기대는 접었습니다. ^^;

로쟈 2007-05-27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유님/ 당분간은 밀어두셔도 될 거 같습니다...
사량님/ 아직 적지 않았지만 본문 첫 문장부터 오역이 나옵니다. 범벅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기대에는 현저하게 못 미친다고 하겠습니다...
 

가라타니 고진의 대담을 옮겨온 김에 하나 더 옮겨놓는다. 10년전 대담이니까 '사료'로 보아야 하는게 아닌가 싶다(게재지였던 <포에티카>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대담자는 김우창 교수여서 '한일 비판적 지성의 만남'이란 타이틀이 붙었다. 대담은 다음카페 '비평고원'의 자료실에서 가져온 것이다.

포에티카(1997년 가을호) 한일 비판적 지성의 만남 : 가라타니 고진/ 김우창  

한일 진보적 세력의 교류

김우창: 가라타니 고진 선생님은 일본 지식인으로서 한국에 관심을 갖고 있는, 특별한 분입니다. 선생님이 한국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으실 거예요. 일본과 한국의 관계는 전적으로 우호적인 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한국인과 일본인이 만나면 복잡한 한일 관계에 대한 이야기부터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대담은 한일 관계의 일반론에서 시작하여 세계 문학에서 동아시아의 위치,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한 전망 등을 다뤄보면 좋겠습니다.



가라타니 고진(이하 고진): 제가 한국이라는 나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60년대부터였습니다. 1960년은 일본에 안보 투쟁이라고 해서 전국적인 투쟁 운동이 일어난 해였는데, 마침 한국에서도 4.19 학생 혁명이 일어났었습니다. 저 자신도 운동에 참여했었기 때문에 그 시기에 운동을 했던 한국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국가 레벨이 아니라 개인 대 개인의 차원에서 한국 학생 운동 세대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몇 년 후인 1965년에 한일간 외교 관계가 정상화되었지만 같은 사고 방식을 가졌던 한국 학생 운동 세대에 대한 정보는 제대로 얻지 못했습니다.

1960년대 일본에는 과거 공산당 이념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신좌파가 생겨났습니다. 신좌파란 1960년을 전후한 안보 투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그때까지의 공산당원들의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려 했습니다. 그리고 한일간의 교류는 국가간의 교류를 제외하면 일본의 신좌파와 한국의 좌파 간의 교우뿐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그 신좌파라고 하는 것은 한반도에서 북한을 이상화시켰습니다. 남한은 단지 독재 국가로만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벽을 깬 것이 일본의 소설가 나카가미 겐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소설 <장마>의 작가 윤흥길 씨를 일본에 소개하는 데 주력했고, 그 자신이 한국에 와서 작품 취재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반한(反韓)적 입장을 고수했던 일본 지식인들은 그를 비판했습니다. 심지어 그는 남한의 중앙 정보부와 연계되어 있지 않은가 하는 의심까지 받았습니다. 제가 한국과의 교류를 본격적으로 생각한 것은 나카가미 겐지가 죽고 난 뒤였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그전부터 한국에 대한 관심은 있었지만, 실제로 한국에 대해 공부하게 된 배경에는 나카가미의 뜻을 이어받는다고 하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와 저의 우정은 오래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저는 25살이었고, 그는 20살이었습니다. 그 뒤 우리는 줄곧 교분을 나눠왔습니다(*나카가미의 소설 <고목탄>의 해설을 가라타니가 썼다). 우리 두 사람의 관계는 가족 내에서 장남과 차남의 관계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나보다 나이가 어렸고, 판단력은 좀 떨어졌을지 모르지만 직관력이나 행동력은 훨씬 앞서 있었습니다. 내가 관망할 때 그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행동했습니다. 그는 일본의 천민 집단인 `부락'출신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개인사적 체험을 토대로 제3세계적 문학의 가능성을 지향했습니다. 나카가미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그를 따라 움직이도록 만드는 힘이 있었고 나도 그를 따라 행동했던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나카가미는 이론의 존재에 대해서는 모르면서도 직관적으로 이론을 실행에 옮긴 작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우창: 1960년대 일본에서 학생 운동이 한창일 무렵 동경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그 운동에서 생긴 여러 분파 중의 하나가 `적군파'였습니다. 최근 레바논에서 그 적군파의 잔존 세력이 체포됐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습니다. 1960년대 한국 학생운동의 성격은 적군파 정도까지는 나가지 않았었는데, 적군파에 대한 가라타니 선생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고진: 그때 운동을 한 세대는 지금 50대입니다만, 그 사람들에게는 후계자가 없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신좌파라고 하는 사람들은 구좌파를 비판하고 나온 사람들이었지만 결국에는 같은 결과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허무한 결과였습니다. 연합 적군파 사건이 대표적으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만, 1970년대 일본에선 끝까지 운동의 뜻을 이으려면 `연합 적군파'가 되거나 아니면 신좌파의 한계를 절감하고 좌파이기를 포기하는 일 중 택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72년 일본에서는 `아사마 산장 사건'이라는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신좌파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즉 아주 부정적인 장소에서 마르크스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처한 것입니다. 제가 마르크스의 사상을 근본적으로 다시 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것도 그 때였습니다. 좌파에 대해 절망한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서 저는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김우창: 일본의 마르크스주의자, 공산주의자, 좌파들은 복잡한 한일 관계 속에서 한국에 대해 유대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일제하에서 식민지 조선에 대해서 그랬고, 해방 이후에는 북한에 호감을 표시했습니다. 한일 간의 복잡한 관계를 초월해서 건설적으로 양국 지식인이 만날 수 있는 하나의 자리가 좌파 이데올로기였는데, 적군파가 사라졌듯이 그 시대도 끝났습니다. 따라서 앞으로는 어떤 것에 근거해서 한일 양국 지식인이 서로 뜻을 모을 수 있겠습니까?

고진: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국가 레벨의 형식적 교류가 아니라 다른 레벨의 교류도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소련이 붕괴한 뒤에도 마르크스주의에 또 다른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마르크스주의가 좀더 절망을 겪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르크스주의와 유토피아

김우창: 공산주의란, 특정한 문제를 해결하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가령 생산 체제와 같은 것을 바꾸면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인간 사회를 보면, 전체적 관점에서는 해결이 불가능하고 좀더 경험적인 국면에서 구체적인 해결을 모색해야 할 과제들이 많습니다. 밀턴의 <실락원>에서 아담과 이브가 에덴에서 쫓겨나 걸어가는 장면은 천국이 아니라 결국 땅 위에서 구체적으로 삶터를 마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산주의 이후, 인간의 조건은 <실락원>이후와 비슷한 감이 듭니다.



고진: 저는 공산주의를 낙원으로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마르크스가 활동하던 시기에도 유럽에 유토피아적 사고 방식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마르크스는 헤겔파에서 좌헤겔파를 비판하며 나온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마르크스가 지향했던 것은 칸트의 시점으로 되돌아가서 비판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헤겔의 변증법, 절대 정신의 자기 실현과 역사의 종말에 들어 있는 유토피아적 요소를 비판했습니다. 그에게 유토피아적인 관념은 별로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마르크스주의의 의의는 그런 비판적인 관점에서 경제를 바라보았다는 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우창: 선생님은 독특한 마르크스 해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유토피아의 문제에 있어서, 제가 볼 때는 마르크스가 유토피아적 요소를 비판했던 것이 유토피아적이었습니다. 마르크스가 유토피아적인 요소를 부정하고 비판한 것, 즉 헤겔이 이원적으로 정신과 물질이라고 나누어 생각한 것을 물질 위주로 합치시킨 것은 마르크스의 현실주의처럼 보이지만, 달리 생각하면 물질 속에서 정신적인 요소가 역사적인 단계를 통해서 실현된다고 본 점에선 오히려 더 유토피아적인 것이 아닙니까?

고진: 칸트의 이념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구성적 이념, 즉 유토피아를 자신이 직접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칸트는 그것을 비판합니다. 다른 하나는 통제적 이념, 즉 실제로 실현되지는 않더라도 현실을 규제하고 현상을 비판해 나가는 힘으로서의 이념입니다. 저는 이 후자의 이념을 마르크스가 수용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1990년대 이후입니다. 현실적으로 공산주의가 존재할 때는 특별히 큰 목소리로 말할 필요가 없었지만, 아무것도 형체가 안 남게 되었으니 그들이 생각한 통제적 이념에 대해 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현실을 비판하는 힘은 나오지 않습니다.

김우창: 서양의 네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실천적 차원에서 비판적 차원으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혁명, 사회주의자들의 혁명은 단순히 비판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르크스주의는 그 비판적 차원보다는 실천적 차원에 더 강한 매력이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에 비판적 차원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사회주의 혁명과 같은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비판적 차원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혁명적인 이념이 실현될 수 있다는 믿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념이 비판적인 것보다는 현실에 그 역사적 단계로서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의 힘입니다. 제가 이렇게 보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에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이 오늘날 부딪치게 되는 문제는 비판적 관점이 없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보는 실천적 지렛대가 없어졌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주의의 실천적 전략으로서의 매력이 현실성을 잃어버리게 된 절망감이 전세계 좌파의 고민입니다.



고진: 마르크스는 유토피아의 실현 가능성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현 상황에 대한 비판적 관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거지요. 이 둘 중에 상대적으로 선택해야 할 필요성이 생깁니다. 마르크스가 밝힌 것은 자본주의의 문제점이었습니다. 자본주의가 변했다고들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는 국가 자본주의가 되었을 뿐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말하는 일이 비판입니다. 저는 마르크스주의 자체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고 어떤 관념(유토피아)의 `상황'이 아니라 `비판'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세계시민'이라는 말이 있지만 실제로는 어렵습니다. 내이션nation을 바탕으로 한 인터내셔널international이 아니라 개인적인 차원의 인터내셔널international이 필요합니다.

마르크스에 대한 애기를 했습니다만, 그런 정치적인 상황에 1970년대의 문학을 연결시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메이지 20년대에 일본은 근대 문학의 확장을 경험했습니다. 서구적 근대 사회를 세우려는 정치적 운동이 좌절된 가운데 일본은 근대적 국가를 세웠습니다. 그 같은 정치적 좌절로 인해 문학은 개인의 내면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 같은 근대 문학의 성립 속에서 현실적 타자가 배제되었습니다. 이와 똑같은 상황이 1970년대에 반복되었습니다. 정치 운동의 좌절이 문학으로 수렴된 것입니다. 저는 그런 움직임에 대해서 우려합니다. 그로 인해 배제된 문학의 가능성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있습니다.

오늘, 문학의 상황

김우창: 비판적 마르크스주의가 현실에 어떤 관련이 있는지 딱하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얼마 전 영국 신문을 보니 최고의 악문가 Bad Writer로 프레드릭 제임슨이 뽑혔더군요. 2등은 로브 윌슨이 선정되었고요. 문학의 문화에 대한 비판에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보십니까?

고진: 지금 문학에 대한 비판의 필요성을 이야기하셨습니다만, 저는 문학이라는 말을 조금 다른 의미에서 쓰고 싶습니다. 저는 1980년대까지는 이른바 문학 비평을 하는 비평가로 활동했습니다. 그 이후에는 다른 작업에 임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바로 그 시기부터 진짜 문학을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의 범위는 다양하게 설정할 수 있겠습니다만, 문자로 씌어진 언어라는 의미에서의 글쓰기를 문학이라고 할 때 저에게 있어서는 쓰는 일 자체가 문학입니다. 문제는 문학을 어떤 개념으로 생각하는가입니다.

지금 김 선생님께서는 문학에 효용성이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하셨습니다만, 지금 일본은 문화적 효용성을 의심하는 단계가 아니라 문학 자체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시점에 와 있습니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문학 비평서 출판도 줄어든 상태입니다. 저는 문학 비평에서 멀어져서, 철학, 건축,미술 쪽으로 얘기를 많이 하고 있고,`비평공간`도 그런 의식을 갖고 하고 있는 일입니다만, 저와 같은 작업을 하는 사람 외에는 문학은 문학, 철학은 철학이라는 식으로 나뉘어 있는 상황입니다. 지금 일본에서는 문학을 비판한다든가, 내면을 비판하는 일이 있지만 그런 일 자체가 이미 의미가 없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김우창: 우리 사회에는 해야 될 일이 너무 많고, 있을 수 없는 일도 많고, 일어나지 않아야 될 일도 많은데, 이런 상황에서 문학을 최후의 파수꾼으로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고진: 일본에서도 비슷한 상황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 삼십년 전까지만 해도 어떤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작가나 비평가의 발언이 힘을 가지고 있던 때가 있었지요. 현재는 문학의 효용이니 하는 말 자체를 할 수가 없는, 그런 것에 대해서 아무도 생각하고 있지 않은, 그런 상황에 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본 사회와 경제 문제

김우창: 화제를 다른 방향으로 돌려보겠습니다. 일본 사회에서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일본의 경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고진: 현재 일본의 경제적인 성공은 1939-40년에 확립된 `총동원'체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 비군사화되면서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 현재에 이어진 셈이죠. 그런데 그런 일본적 시스템이 1980년대 말쯤 해체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일본적 시스템의 붕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보이는 바와 같이 일본 경제에 여러 가지 문제들을 낳았습니다. 거기에 어떻게 대처해 나갈 것인가가 문제가 되겠습니다. 현 상황에 대해서는 전체적으로 볼 때 부정적입니다. 그냥 이대로 대충 해나가면 될 것이라는 사고 방식이 만연해 있는데 저는 거기에 대해서 비판적입니다. 일본인들의 경제적인 존재방식은 이대로 대충해 나가면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현재 대단히 위기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김우창: 일본은 빈부 격차가 제일 작은 사회라고 평가되는데, 그것과 지금 일본의 위기가 어떤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고진: 일본에 빈부 격차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만, 그것은 일본의 근대라고 하는 시기가 자본주의적인 것을 억제했기 때문에 나온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파시즘적 움직임에 의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즉 공산주의에 대항해서 그런 태세를 취한 것인데, 그것은 자본의 이익을 제한시키는 정책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구체적으로는 개인 자본가를 억제하고 법인주의를 만든다든가, 모든 산업을 국가가 관리한다든가, 토지나 건물에 대한 규정이 주인이 아닌 임대자를 보호하는 쪽으로 정해진다든가 하는 식의 정책을 추진한 결과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정책이 1980년대까지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소련이라는 나라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지요. 그러나 이제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나타나고 있는 빈부 격차 등의 문제도 부상할 것입니다. 

유교와 데카르트

고진: 서울에 오기 전에 선생님 논문을 읽어보았습니다만, 한국에 대해 생각할 때 유교 문제가 새롭게 부상되고 있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근대를 극복하고자 생각한다면 꼭 주자학 문제가 나오게 됩니다만 일본에서는 주자학 대신 니시라 기타로 철학이 거론됩니다. 제 생각에 니시다 철학이라고 하는 건 거의 주자학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당시에는 니시다 철학이 일본에서는 유일하게 통합적 사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전통 같은 것도 정치와 융합되었지요. 에도 시대에는 주자학이 통합적인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유럽의 토마스 아퀴나스적 존재입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일본의 근대는 단순히 유교의 문제가 아니라 주자학 문제로 생각해야 합니다. 또 한국 자본주의 논쟁이 있다는 이야기도 읽었습니다만 일본에서도 1980년대에 일본의 자본주의를 어떻게 이해해야 되느냐를 둘러싸고 논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일본이 아니라 세계적 관점에서 자본주의를 바라보면서 유교 문제와 결부시켜야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김우창: 작년에 독일에 가서 이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말씀하신 논문은 그때 독일인들의 요청으로 쓴 논문인데, 제가 그 논문을 통해 말하려고 했던 것은 유교가 어떻게 한국의 발전에 기여했는가를 논의하는 의견들을 평가해 보려는 것이었습니다. 제 생각에 유교는 한국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고, 가라타니 선생님 말씀대로 일본에서도 중요합니다. 철학은 역사운동과 관계가 없는 듯 하면서도 역사 전체의 움직임을 요약해서 보여줍니다. 서양에서는 데카르트나 칸트 철학의 주체 정신이 서양의 근대성 발전에 있어서 중요했듯이, 동양에 있어서, 특히 한국에 있어서는 유교가 주체적 입장의 정리를 맡았습니다.

 

고진: 선생님 논문을 보고 결론에는 저도 공감했습니다. 선생님이 데카르트의 주체성과 한국적 주체성을 연결시켜 생각하고 계신 부분에서, 유교보다 데카르트가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신 것말입니다. 1980년대 중반 일본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한창일 때, 그때 저는 모던을, 근대의 연장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포스트모던 시대라고 해서 비판적 성찰이 바뀌거나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철학과 비평의 차이를 이야기 하자면,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형식을 취급하는 것이고, 형식이란 역사에 따라 바뀌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 비평이라고 하는 것은, 장소의 이동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모던에서 다시 포스트모던으로 바뀌었다고 하면 반대가 되었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그건 반대가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이동이 아니라, 근대비판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지점에 오면 근대를 비판하고, 포스트 모던 비판이 필요한 지점에서는 포스트 모던을 비판하는 그런 의미에서의 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런 점에서 비평의 비평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데카르트라든가 마르크스 등, 여러 철학자들의 얘기가 나왔습니다만, 저는 그들이 낸 결론 자체는 별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체계 자체를 좋아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들은 제가 말한 의미에서의 비평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에서 그들의 자세를 좋아합니다. 동경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김우창: 데카르트 안에는 데카르트 비판이 들어 있습니다. 현시점에서, 서양적인 세계가 된 오늘의 시점에서 데카르트는 매우 중요한 철학자입니다. 데카르트와, 데카르트 비판이 포함되어 있는 데카르트 철학의 특징이라면 자기 비판적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성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를 떠나서, 사람이 사는 데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성이고 반이성이고 간에, 여러 사람이 모여 사는 데 이성은 불가피한 것이지요. 포스트모더니즘도 모더니즘의 일종이고 이성적 입장을 버릴 수 없다고 봅니다. 유교가 의미를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유교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반성적 계기를 통해서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고진: 저도 한마디 덧붙이겠습니다. 데카르트를 생각할 때 이원론적으로, 즉 합리론이라든가 경험론 등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자세히 보면 이것이 어떤 한 입장에 멈춰 서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합리론에서 경험론으로, 그 다음 다시 한번 경험론을 비판하며 합리론 쪽으로 옮아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마르크스도 독일 이데올로기와 영국 경험론 사이를 문제가 있을 때 오갔다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런던에 망명했을 때에는 경험론자들에 대해서 헤겔의 제자다운 발언을 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최종적인 입장이 무엇이었냐가 아니라 그때 그때의 필요에 따른 운동, 이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비평입니다.

제가 비평이라고 하는 말에 특히 애착을 느끼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저는 철학자라고도 사상가라고도 불립니다만, 저는 스스로를 비평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작은 입장에 멈춰있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는 엥겔스나 마르크스나 다 마찬가지여서 문제가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1인 2역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런 위치가 중요하지요. 스피노자 같은 사람은 주체성, 데카르트를 비판했었습니다만, 데카르트적인 작업을 했습니다. 주체성의 비판이 다시 주체적이되는, 그런 것이지요. 저는 바로 그러한 입장 자체를 중요시 하고 싶습니다.

오늘의 출판 상황

김우창: 독일이나 북유럽에서는 예술가와 작가에 대한 지원정책이 많습니다. 북유럽에서는 심지어 한 작가의 책이 도서관에서 대출되는 횟수에 따른 저작권료를 지급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본은 어떻습니까?

고진: 일본에서는 출판사가 만화로 돈을 벌어서 문학 출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약 사백 개 정도의 문학상이 있습니다. 각 지방에 따라서 그 지방과 관계있는 작가의 이름을 딴 문학상이나, 그 지방을 소재로 한 작품상이 있습니다. 실제로는 중앙 문단 작가들에게 그 상이 돌아갑니다.

김우창: 요즘 일본 작가들을 보면 옛날 이야기를 풀어서 쓰는 일이 많은 것 같습니다. 가령 시바료타로가 대표적인 예가 아닌가 합니다. 서양적 의미에서 작가와는 다른 `이야기꾼'의 역할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당대적 이야기를 하기보다 재료를 갖고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지요.

고진: 그것은 역사라는 형태를 취한 `허구'입니다. 자신한테 유리한 소재만을 갖고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작년에 NHK에서 대하드라마<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했었는데, 그 이야기가 나오게 되면, 마지막에 꼭 임진왜란(일본에서는 `조선출병' 이라고 하는데)이야기가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끝을 보니까 임진왜란이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뜻이 아니라 그 아랫사람의 음모에 의한 것이라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그래 놓고 그것을 역사라고 말하고 있는 거지요. 오늘의 한일 관계에 맞게 역사를 꾸미는 것입니다. 역사를 소재로 당대의 샐러리맨들의 출세담, 즉 현대의 기업 체제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이야기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김우창: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세운 오사카 성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도요토미의 만년의 시 한 편이 적혀 있는 것을 봤는데, "인생은 이슬로 태어나 이슬로 사라지며, 성을 지은 일도 꿈속의 일"만 같다는 것입니다. 현실적, 정치적 사실에 대해서 로맨틱한 태도를 취하는 일본인의 특성을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준 경우가 아닌가 합니다.

천황제의 의미

고진: 일본 사람들이 역사를 제대로 못 쓰는 것은 한마디로 천황의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아까 나왔던 근대적 주체의 문제와도 연관이 되는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일본과 한국의 차이를 생각해 봤을 때, 일본이 왜 그렇게 됐는가 하면 에도 시대 때부터의 무사들을 봤을 때, 최고 책임자가 되는 것을 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본인이 권력을 가지면서도 완전한 최고 책임자가 되지는 않았던 것이죠. 그러면서 자기의 정체성과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천황의 권위를 이용했습니다. 천황 자체는 실제 권한이 없었는데도 권력을 받쳐주는 존재였기 때문에 천황이 권력 유지에 이용되는 상황이 계속되어 왔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종전 후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헤이세이 천황이 있습니다만, 그 사람이 7년전에 즉위할 때 "나는 헌법을 지키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대목은 취임사 원래의 초고에 없던 말을 천황이 자기 마음대로 만들어 했다는 이야기가 나중에 돌았습니다. 이것도 재미있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황이라는 것은 헌법상으로 상정된 존재인데(상징 천황), 그 천황이 나는 법을 지키겠다고 말했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우익들은 대단히 낙담하고 실망했었지요. 천황이라는 것이 뭔가 보다 더 깊은 뜻이 있는, 의미가 있는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국민이 만든 헌법을 지킨다고 말한 사실에 대해서요. 반면에 사회당은 천황도 국민이 만든 헌법을 지킨다고 말하면서 환영했습니다.



김우창: 일본의 천황제란 세계에서도 특이한 제도인데,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고진: 저는 그 점은 한국과도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원식 선생님 책에서도 어딘가에 인용이 되어 있었던, 어떤 일본인 학자가 이야기한 말입니다만, 즉 이제까지 역사를 봤을 때 일본이라고 하는 나라는, 몽골이 쳐들어 왔을 때도 그랬고, 러시아라든가 중국하고의 관계를 봤을 때도, 항상 한국이라는 나라가 중간에 있어서 쇼크를 완화시켜 주는 완충제 역할을 했었죠. 그래서 외국하고 직접적인 접촉을 안 해도 되었던 겁니다. 보통 영국과 일본이 비슷하다는 말을 합니다만, 그런 의미에서는 영국과 일본이 다릅니다. 즉 그런 식의 조건, 일본의 존재 방식 조건을 한국이 결정해 온 역사가 있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다시 말하면 일본의 특수성이라고 하는 것에는 한국이 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태 즉, 직접 외국으로부터의 공격이나 침략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상황은, 국경을 꼭 정해 놓을 필요도 없고 전통을 이어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국경이라는 것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절대적 권력자, 중심이 필요해지는 법입니다만, 그런 상황이 바로 절대적인 권력자, 전통이라든가 권위를 만들지 않아도 존재 가능한 시스템을 만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일본의 천황제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김우창: 흔히 영국인들을 일컬어 합리적 경험주의자들이라고 합니다만, 영국은 유럽 여러 나라 가운데서 왕이라고 하는 것을 가장 높이 생각하는 나라입니다. 네델란드, 덴마크, 노르웨이 이런 나라들과 비교해서 영국 왕은 높은 존재입니다. 정치적 권력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으면서도, 굉장히 상징적인 존재로서 커다란 의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한편으로는 영국을 상당히 안정된 사회로 만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불합리성으로 가득 찬 사회로 만듭니다. 그 점은 일본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고진: 그런 의미에서는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아마 섬나라라는 조건도 관계가 있을 겁니다. 역시 한정된 공간에서 경험으로 판단해서 일을 진행시킨 결과라는 특징도 일본과 영국을 비슷하게 만든 원인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다만 좀 다른 점은 영국은 원래 왕을 대체적으로 외국인을 데려다 앉히는 그런 나라였습니다. 왕은 왕이지만 처음부터 자신들하고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별개의 존재로 취급하는, 특별히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는 상징적 존재로 생각한 거지요. 하지만 왕 자체는 외국인이었고 아이덴티티의 문제하고는 관계가 없었습니다. 그게 일본과 영국의 다른 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김우창: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지나간 자리마다 표시를 해놓는데, 영국에서도 왕이 지나간 자리마다 흔적이 남습니다. 그래서 영국인들에게 그들이 뭐가 다르냐고 했더니 제대로 설명하지 못합니다. 영국은 평등하다고 하지만역시 강한 계급사회가 아닌가 합니다. 계급사회의 불합리성은 임금의 상징적 신성화와 관계되어 있습니다.

고진: 영국에선 혁명이 일어나면 왕을, 즉 절대 권력을 죽이고 외국인을 데려와 왕으로 삼았습니다만, 일본 역사에서는 이런 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일본은 천황의 신비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근대에 들어와서도 천황은 새롭게 부각될 정도로 천황의 존재는 절대적이었습니다. 메이지 천황은 독일 헌법에 근거하여 만들어졌고, 다이쇼 천황은 이른바 대정 데모크라시의 위기 속에서 출현한 것입니다. 즉 당대에 어떤 대표성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이죠. 합리적 측면에서 말하자면 일본 천황은 조만간 은퇴해야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신비화하는 것이 아니라 천황 자신의 의견도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천황제가 없어져야 할 것으로 봅니다.

아시아적 동일성의 문제

김우창: 세계 역사 속에서 아시아라는 것이 별도의 의미를 갖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유럽의 경우 다양한 사회 문화가 하나의 테두리 속에서 존재하면서 유럽 전체를 구성했습니다. 그만큼 지역적, 인적 교류가 다양하게 전개된 것입니다. 아시아의 경우 앞으로 미국, 유럽보다는 동북 아시아 내에서 지역 문화를 세우는 것이 필요하지 않은가 합니다.



고진: 세계사라고 하는 것은 현시점에서 과거를 되돌아봐서 재구성한 것입니다. 근대 초기에 오카쿠라 텐신 같은 미술사가가 `동양은 하나'라고 외쳤습니다. 서구 열강이 아시아를 지배하려고 할 때 아시아인은 동일성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서구의 힘이 부각되었기 때문에 그런 아시아적 동일성이란 의식이 처음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서양이 말하는 동일성도 무언가에 대항을 해나가는 속에서 그 의식이 생긴 것입니다. 유럽의 경우도 역시 미국과 아시아에 대한 방어 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동일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움직임 속에서 동아시아권이라고 하는 것도 불가피하게 생겨나지요. 그런 의미에서 동일성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동일성에 대립하며 그 의식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아시아의 공동성이 경제적 관점에서 분명히 제기될 것입니다. 일본은 이 시점에서 반드시 다시 한번 대동아 공영권의 문제점을 되새겨야 합니다.

김우창: 서양이 타자로 존재하니까 아시아적 동일성이 제기되는 것도 맞습니다만, 여기서 우리는 조셉 니덤의 문제 설정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는` 왜 17세기까지 유럽보다 선진적이었던 중국의 과학 기술이 그 이후 뒤떨어졌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가 보기에 서양이 여러 국가 공동체에서 다양한 사고를 발전시킨 데 비해, 중국은 너무나 통일된 상태라 그 같은 발전을 계속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다양한 공동체 안에서 산다는 것이 궁극적으로 창조적 문화를 낳는 요인이 됩니다. 아시아도 대동아 공영권 같은 문제점을 극복하면서 서로 협동적으로 살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하리라고 봅니다.

고진: 기본적으로는 그렇습니다만, 일본인인 저로서는 그렇게 간단하게 말해 버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동일성을 내세워 공동체를 구성하는 일 자체가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렸듯이 그런 움직임은 필연적으로 나올 것이고, 그렇다면 일본이나 중국이 아닌 한국이나 대만 같은 나라가 중심이 되는 형태로 만들어져야 할 것입니다. 유럽에서도 베네룩스 3국이라든가 네델란드가 중심이 되고 있는데, 이 나라들은 과거에 침략을 당햇던 나라들입니다.

저는 국가라고 하는 것을 전면으로 내세우지 않는 차원에서의 교류, 즉 개인 레벨에서의 교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국가'의 책임은 계속 논의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옛날과 지금이 다르다고 한다면 국가 차원에서의 교류가 아닌, 사회적인 레벨에서의 교류가 많이 생겨났고 실제적인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방금 말씀하신 학회에서의 발표같은 것도 그런 교류의 하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국가라는 틀을 만들지 않고는 상대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때는 개인에 바탕을 둔 민중이라는 것도 중요해집니다만, 이런 것에 대해서 백낙청 선생도 얘기를 하고 계시죠. 저는 민중이라고 하는 것은 물론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다만 민중만큼 국가에 흡수되기 쉬운 존재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민중 차원 보다는, 그런 일을 가능한 한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문인이나 지식인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국가라는 조건과 개인의 연대

김우창: 가령 일본에서 태어난 사람과 아프리카의 빈국에서 태어난 사람은 그 운명의 길이 서로 엄청나게 다릅니다. 어느 국가에 속하느냐가 개인의 행복을 결정짓는 현실입니다. 국가는 그런 의미에서 개인의 운명의 절대적 조건입니다. 국가를 초월하는 것은 그러므로 현실 차원에서 어렵습니다.

고진: 물론 실제로 국가를 초월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제가 말한 것은 그런 의미에서의 이념을 초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 나라에 속하면서 자기 나라에 비판적인 사상과 사고 방식으로 투쟁하는 사람들끼리의 연대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김우창: 마지막으로 한국사람들에게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면 한마디 하시죠.



고진: 한국분들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일본 근대 문학의 기원>에 씌여 있다고 생각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한가지 우려가 되는 점은 어떤 책이든지 상황이 다르면 좀 잘못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그 책에서 근대 비판, 주체 비판, 문학 비판이라고 하는 것을 했습니다만, 역사적인 문맥을 이해하지 않은 상태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면 하는 게 제 바람입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저는 비평이라고 하는 것을 장소의 이동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과 완전히 반대되는 이야기를 할 수도 있습니다.실제로 그러한 작업을 해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단 한 권의 책만으로 제가 이해되는 상황에 불안감을 느낍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읽어주시는 분들은 제가 이 자리에서 한 이야기를 참고하시면서 책을 읽어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김우창: 지금 시점에서 세계적으로 공통의 과제를 찾기 힘들지만, 더 많은 교섭을 통해 공통의 과제를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07. 0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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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멘트 2007-05-26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자료네요. 감사히 담아갑니다.~^^

2007-05-26 2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유 2007-05-26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긴한 김에 리플 먼저 달고 나중에 읽어보겠습니다. 김우창과 고진. 손이 가는 인물들 아니겠습니까..

로쟈 2007-05-26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감사.
수유님/ 그냥 '자료'로 옮겨놓은 것입니다. 창고에 넣어두시면 됩니다.^^

사량 2007-05-27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오랜만에 <포에티카> 이름을 듣는군요. 딱 1년만 발간되고 폐간된 계간지였는데 <창비>나 <문사> 같이 두껍지 않으면서도 맛있는 글들이 가득했던 아주 알찬 계간지였습니다. 이 잡지에 연재되던 '도정일 문학론'도 비슷한 때 연재던 그의 '신화 읽기'만큼이나 흥미로왔는데...ㅠㅠ
 

데리다에 관한 자료를 찾다가 얼떨결에 읽게 된 대담을 옮겨놓는다. 대담자는 가라타니 고진이다. '해외석학대담'이라고 지난 2002년에 교수신문에서 기획했던 것인데 "앞으로 프레데릭 제임슨, 쟈크 데리다, 다너 해러웨이, 가야트리 스피박 등의 서구 지식인은 물론 제3세계 지식인들과도 지적 대화를 진행하려 한다"라는 편집자의 포부에도 불구하고 이후에 대담이 더 진행된 것 같지는 않다. 해외석학과의 '유일한' 대담인 듯하다는 얘기다. 여하튼 가라타니에 관한 유용한 자료라고 생각된다. 물론 약간의 시간차는 고려해야겠지만. 

교수신문(02. 05. 07) 해외석학대담① 가라타니 고진 (일본 긴키대 교수)

박유하(이하 박): 냉전이 끝나고 10년 이상 지났지만 9·11 테러가 상징하는 것처럼 세계는 오히려 더욱더 혼미한 상태로 빠져들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냉전의 ‘끝’은 새로운 대립의 ‘시작’이기도 했던 셈인데, 좀처럼 해결의 길이 보이지 않는 상황인 만큼 ‘현실’을 바꿀만한 힘을 가진 ‘말’(비평)이 지금이야말로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교수신문’이 이번 인터뷰를 기획한 배경에는 최근 한국에서 지식인의 역할에 관해서 많은 논의가 있었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러한 논의를 다시 생각할 때, 최근의 저서 ‘트랜스 크리틱’과 선생님에 의한 ‘NAM’의 제창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NAM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해주십시오.


가라타니 고진(이하 고진): NAM은 ‘뉴 어소시에이션니스트 무브먼트’의 약자입니다. 저는 이것을 과거 2세기 동안의 사회주의운동을 논리적으로 통합하는 것으로서 구상했습니다. 어소시에이셔니즘은 프루동 등의 아나키스트가 제창했던 사고입니다. 그에 대해서 다소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맑스와 프루동은 전면적으로 대립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맑스 사후에 성립한 ‘맑스주의’에 의해 만들어진 상황입니다. 물론 맑스는 프루동을 비판하고 있지만, 실은 그는 매우 많은 영향을 받은 사상가 이외에는 비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건 그가 아담 스미스나 리카르도를 집요하게 ‘비판’하면서 독일의 속세적 경제학자를 완전히 무시한 사실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맑스의 사회주의에 대한 생각은 젊었을 때 프루동에 의해 제공됐고 그것은 기본적으로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국가를 타기(揚棄)한다고 하는, 즉 보존하면서 동시에 폐기하는 사고입니다. 예를 들면 말년의 맑스는 파리 코뮨에서 실현된 것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그는 생산소비협동조합과 같은 어소시에이션이 국가를 대체한다는 사실에 ‘실현 가능한 코뮤니즘’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코뮤니즘은 엥겔스나 레닌이 생각한 국가 통제적인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것은 오히려 프르동이 말하는 아나키즘입니다. 실제로 파리 코뮨은 주로 프루동파에 의해서 실현됐으니까요. 맑스주의자도 아나키스트도 서로 비난하기만 할 뿐 이러한 관계를 보려 하지 않습니다.

1989년 국가주의적인 맑스주의운동이 파산된 이후로 아나키즘이 부상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실제로도 근년의 세계화에 대한 대항운동의 주체는 주로 아나키스트들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아나키즘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일까요? 맑스주의에 대해서 역사적인 반성을 한다면 동시에 아나키즘에 대한 반성도 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특히 NAM은 아나키즘으로부터 시작된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에 대해 비판적이어야 합니다. 이에 관해서는 ‘트랜스 크리틱’에도 ‘NAM원리’에도 되풀이 쓴 바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저는 코뮤니즘이나 아나키즘 대신에 ‘새로운 어소시에이셔니즘’이란 말을 골랐습니다. 코뮤니즘이라고 하면, 아직 소련·중국·북한 등의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아나키즘에 관해서도 다른 나쁜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러한 명칭을 사용하게 되면 ‘아니, 사실은 코뮤니즘은 그런 게 아니다, 아나키즘은 그런 게 아니다’라는 식으로 설명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번거롭고 무의미합니다. 그런데 어소시에이셔니즘이라고 하면, ‘그건 뭡니까’라고 묻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때는 아나키즘이나 맑스주의를 포함하는 사회주의운동의 역사를 설명하면 되는 것입니다.



박: 선생님께 있어 이론(비평)과 현실에 대한 개입은 어떤 상관관계를 갖고 있습니까. 저는 자신의 글쓰기가 ‘현실에의 개입’이 될 수 있음을 늘 의식하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그건 어디까지나 ‘글쓰기’에 의한 현실 개입일 뿐 실제 ‘운동’에 나선 적은 없습니다. 다만 언젠가 필요한 때가 오면 하고 싶은 일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아마도 비상사태에 가까운 시기일 것입니다. 그래도 그때 저 자신을 움직이는 것은 제 나름대로의 ‘이론’일 테니 ‘이론’과 ‘실천’이 다른 차원의 것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정치)운동에 나서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면 어떤 것이었을까요.

고진: 제가 시작한 것은 넓은 의미에서는 정치활동이겠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정치활동은 아닙니다. 제 생각에 NAM은 ‘윤리적·경제적 운동’이라고 불러야 하는 운동입니다. 방금 당신은 언젠가 비상사태 같은 때가 오면 참가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참여에 관해서 다른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NAM의 운동은 비일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극히 일상적입니다. 특히 목숨을 거는 식의 용기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경제활동을 중심축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종래 생각돼 왔던 운동과는 다릅니다.



그에 대해 말하기 전에 제가 좁은 의미에서의 '정치적 운동'에 참가하기 시작한 시기에 대해서 말해둬야 할 것 같습니다. 훨씬 예전의 학생운동 때를 별개로 한다면 그것은 1991년 걸프전쟁 때입니다. 그것은 소련의 붕괴, 냉전구조의 붕괴 이후에 나타난 최초의 세계적 규모의 사건이었습니다. 냉전구조, 즉 미소의 이원구조가 있던 시기는 어떤 의미에서는 편했습니다. 그 쌍방을 비판하고 상대화하는 식의 자세를 취하고 있으면 됐기 때문입니다. 그때까지 저는 종래의 맑스주의적 정당이나 국가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그 비판은 그들이 굳건하게 존재해나갈 것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존재하는 한 그저 부정적이기만 하면 뭔가 하고 있는 듯한 기분에 빠져 있을 수가 있었습니다.

1989년에 이르기까지 저는 미래에 대한 이념을 경멸하고 있었습니다. 자본과 국가에 대한 투쟁은 미래에 대한 이념 없이도 가능하고 현실에 발생하는 모순에 대해 끝없이 투쟁하는 일 외에는 다른 길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소련 등이 반영구적으로 존속할 것이라는 전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붕괴했을 때 저는 나 자신이 역설적으로 그들에게 의존해왔던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적극적인 내용의 무언가를 말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그것을 생각하는데 10년이 걸렸습니다. 그것이 '트랜스 크리틱'라는 작업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완결시킨 지점(2000년)에서 NAM을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정치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걸프전부터입니다. 그것은 걸프전의 결과로 일본의 정치체제, 군사체제가 근본적으로 바뀔 것이라는 예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90년대에 들어 저는 그때까지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됐습니다. 한일문제에 관해서도 저는 4번의 한일작가회의에 참가했고 그 외 많은 강연활동을 했습니다. 아사다 아키라 씨와 함께 편집하고 있는 ‘비평공간’에서도 현실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또 저는 현실의 의회정당에 꽤 기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999년에 자민당정권은 걸프전이래 목표삼아온 일들을 전부 실현시켰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좌파는 완전히 패배·붕괴됐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어 더욱 비참한 상황입니다. 저는 자신의 작업이 패배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말하자면 제가 NAM을 시작한 계기는 정치적인 패배에 있었고 정치적인 것에 대한 비판에 있었습니다. 정치적 활동이 아니라 윤리적·경제적 활동이라고 말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좀더 말하자면 NAM을 특징짓고 있는 것은 단순히 소비·생산협동조합 같은 것을 추진하는 일뿐 아니라 마이클 린튼이 고안한 LETS(지역교환거래체계: Local Exchange and Trading System)라는 지역통화를 핵심으로 한 경제권을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지역통화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통산성이나 시·군·구의 행정지도에 의해 추진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국가에 의해 발행돼 국가적 화폐(엔)의 자본주의 경제를 보완하는 것일 뿐입니다. LETS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거기서는 각 개인이 화폐를 발행하는 주권자이고 또한 전원의 적자와 흑자의 총액이 0이 되기 때문에 이윤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말을 바꾸면 LETS에 의한 교역에 있어서는 자본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NAM에서는 LETS를 개량해 웹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것은 Q라는 명칭으로 불립니다. ‘円보다 球(큐)’라고 하는, 일본어 농담을 원용한 말입니다. 더 이상 지역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저는 지역통화 대신 시민통화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NAM에서는 시민통화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박: 9·11 테러는 미국이라는 이름의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라는 형태로 표면화됐지만 자본에 대항하는 주체가 ‘국가·민족’ 주체였다는 사실에 처음부터 모순이 내포돼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국가와 자본에 대한 동시적 대항을 제창하는 선생님의 전략은 이런 모순을 타개하려는 것으로도 보였습니다.

고진: 통상 맑스주의에서는 경제적인 하부구조가 있고 그 위에 국가나 민족이라는 상부구조가 있다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최근에는 경제적 결정론이 부정되고 상부구조의 독자적 위상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상부구조가 이데올로기적이고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했을 때, 경제는 그렇지 않은 굳건한 하부구조일 수 있을까요. 자본제 화폐경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신용에 의해 뒷받침된 환상시스템이고 언제 붕괴될지 모른다는 점을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맑스는 ‘자본론’이라는 책에 몇십 년 동안이나 매달렸습니다. 그것은 경제적 하부구조라는 인식으로만 끝낼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젊은 맑스가 지적했던 것처럼 화폐경제는 종교적 세계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국가나 민족은 어떤 의미에서는 경제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시장경제에 있어서의 교환과는 다른 것이긴 하지만, 역시 교환을 그 근본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저는 모든 것을 ‘경제적’ 관점에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류가 알고 있는 교환의 형태에는 크게 세 종류가 있습니다. 공동체나 가족 안에서의 교환처럼 상호 보수적인 것. 이것은 상호 부조적이지만 동시에 구속적입니다. 다음에 봉건적 영주와 같이 조세를 계속 얻기 위해 그것을 어느 정도 재분배하는 것. 여기서는 사람들은 구속돼 착취당하고 있지만 보호받고 있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또 하나가 화폐에 의한 시장경제입니다. 앞의 둘과는 달리 여기서의 교환은 당사자의 자유로운 합의와 계약에 의해서만 성립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화폐를 가지는 자가 유리하고 잉여가치의 착취, 계급분해가 발생합니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네이션=스테이트가 본래는 이질적인 네이션과 스테이트의 ‘결혼’이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중요한 지적이지만 그 이전에 역시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두 존재의 ‘결혼’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국가와 자본의 ‘결혼’입니다. 국가·자본·네이션은 봉건시대에는 명확하게 구분됐습니다. 즉 봉건국가(영주·왕·황제), 도시 그리고 농업공동체입니다. 그것들은 서로 다른 ‘교환’의 원리에 기초합니다. 이미 말한 것처럼 국가는 수탈과 재분배의 원리에 기초합니다. 둘째, 그러한 국가기구에 의해 지배당하고 서로 고립된 농업공동체는 그 내부에 있어서는 자율적이고 상호 부조적, 호혜적 교환을 원리로 하고 있습니다. 셋째 그러한 공동체들 ‘사이’에 시장, 즉 도시가 성립합니다. 그것은 상호 합의에 의한 화폐적 교환입니다. 봉건적 체제를 붕괴시킨 것은 이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침투입니다.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 절대주의적 왕권국가를 낳았습니다. 그것은 상인계급과 결탁해 다수의 봉건국가(귀족)를 쓰러뜨림으로써 폭력을 독점하고 봉건적 지배(경제 외적 지배)를 폐기합니다. 그것이야말로 국가와 자본의 ‘결혼’입니다.

상인자본(부르주아)은 이 절대주의적 왕권국가 속에서 성장해 통일적인 시장형성을 위해 국민의 동일성을 형성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내셔널리즘의 감정적 기반이 생기지 않습니다. 저는 네이션의 기반에 시장경제의 침투와 함께, 도시적인 계몽주의와 함께 해체된 농업공동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까지 자율적이고 자급자족적이던 각 농업공동체는 화폐경제의 침투에 의해 해체되는 것과 동시에 그 공동성(상호부조나 상호보수성)을 네이션(민족) 속에 상상적으로 회복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정말로 ‘결혼’하는 것은 부르주아 혁명을 통해서입니다. 프랑스혁명에서 자유·평등·우애라는 삼위일체가 제창된 것처럼 자본·국가·네이션은 뗄 레야 뗄 수 없는 것으로써 통합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근대국가를 ‘자본제=네이션=스테이트’라고 불러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서로를 보완하고 보강하도록 돼 있습니다. 예를 들어 경제적으로 자유롭게 행동해 그 상황이 계급적 대립으로 귀결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을 국민의 상호 부조적인 감정에 의해 넘어서서 국가로 하여금 규제시키고 부를 재분배하는 식인 것이지요. 그 경우 자본주의만을 타도하려고 하면 국가적인 관리를 강화시키는 일이 되고 혹은 네이션적 감정에 굴복당하게 됩니다. 역사적으로는 전자가 스탈린주의이고 후자가 파시즘입니다.

자본제=네이션=스테이트라는 삼위일체의 구조는 극히 강력합니다. 어떠한 사유도 이 틀을 넘어서기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제=네이션=스테이트를 넘어서기는커녕 그것이 존속하기 위한 유일한 마지막 형식입니다. 저는 사회민주주의에 아무런 희망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90년대에 저는 다른 형태에 가능성이 없는 이상 사회민주주의를 지지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이 세 가지 형태 이외의 교환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어소시에이션입니다. 그것은 상호 부조적이지만 공동체와는 달리 자유롭게 참가하고 또 나갈 수 있습니다. 또 그것은 모르는 사람들끼리 교환하는 ‘시장’이면서도 자본주의적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재분배에 의해 부의 불평등을 보완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윤리적·경제적인 어소시에이션은 일정한 종류의 화폐에 의해서만 실현 가능합니다. 그것이 아까 말씀드린 시민통화입니다.

되풀이 말하자면 시민통화는 가족이나 공동체에 의한 상호보수적 교환도, 시장경제의 사업적 교환도 아니지만 동시에 양쪽 모두이기도 합니다. 바꿔 말하면 이 둘을 ‘揚棄’하고 있습니다. 즉 보존하면서 폐기합니다. 예를 들면 일반적으로 시장경제를 부정하는 생각과 긍정하는 생각, 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 시장경제를 揚棄한다는 선택지가 있습니다. ‘시장을 揚棄한다’는 것은 시장의 폐지도 부정도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시민통화Q 안에서 시장경제는 보존됩니다. 예를 들면 Q에서는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 계약하고 교환하니까요.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자본주의적인 이윤추구는 폐기됩니다.

또 한편 Q에 있어 공동체의 상호 보수적 교환이 보존됩니다. 증여나 보답과 같은 교환관계가 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Q에 있어서는 가족이나 공동체 같은 폐쇄적·배타적 구속은 없습니다. 애정이라는 이름하의 무상노동이나 심리적 빚도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시장경제처럼 사업적으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공동체는 폐기되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일이 금방 달성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몇 세기는 걸릴 일이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론적으로 미래변혁에의 길이 존재하는가 입니다. 현실에 모순이 있는 이상 투쟁이나 대항운동은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사회민주주의, 또는 의회정치에 흡수돼 버립니다. 왜냐하면 장래에 대한 논리적 전망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박: 20세기는 아이덴티티 중에서도 ‘민족’ 아이덴티티만이 강조된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상황이 그때까지 이상의 대규모적 전쟁과 살육을 유발시켰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미 논의되고 있는 것처럼 ‘민족’ 아이덴티티의 강조는 그 속에 있는 성이나 계층의 대립을 은폐시킵니다. 그런데 이른바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문화의 다양성’이라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강조되는 시대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정신적·경제적 식민지화에 대한 저항의 언어로써 유용해 보이지만 동시에 또 다른 패권주의적 정치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차이’를 강조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차이 따위는 없다고 인식하는, 즉 아이덴티티는 다양한 것이지만 동시적일 뿐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에 대해 더욱 자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화’의 강조는 필연적으로 ‘차이’를 강조함으로써 ‘경계’를 만들어냅니다. 그러한 상황이 바뀌지 않는 한 ‘경계’를 넘어서는 만남(세계시민으로써의 연대)은 언제까지나 불가능할 것입니다.

NAM의 이론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처음부터 ‘트랜스내셔널’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국가와 자본을 넘기 위해서는 이제까지의 (전통적) ‘공동체’를 초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에 기반해 있겠지요. 그러나 사람은 자신이 익숙해진 것에 대한 집착을 갖고 있고 ‘공동체’를 넘으려는 힘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런 움직임에 대한 저항도 강력하고 뿌리깊은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려운 점은 익숙해진 것으로부터 이반할 것을 말하는 담론이 상황에 따라서는 폭력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고진: 세계화라고 불리는 것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국가가,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미국이 관여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자본은 자본제=네이션=스테이트로의 형태로만 존재합니다. 시장경제의 세계화가 진행되어도 국가가 해체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민족도 해체되지 않습니다. 그렇기는커녕 반대로 국가와 민족이 강조됩니다. 베네딕트 앤더슨이 ‘상상의 공동체’를 저술한 이래 네이션은 상상물이라는 생각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는 단순한 표상이나 가상이 아닙니다.

칸트는 “감각에 의한 오차로부터 생기는 가상이라면 이성에 의해 제거할 수 있지만 어떤 종류의 가상은 오히려 이성 그 자체가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면 자기라든지 신이나 사후의 생명 같은 것이죠. 그것들은 가상이라고 하면서 제거시키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우리는 그런 것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칸트는 그것을 초월론적 가상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화폐나 네이션에 대해서도 같은 식으로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화폐 같은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는 그것을 필요로 합니다. 네이션도 마차가지입니다. 자본주의 경제에 있어서의 사업적인 관계와 국가에 의한 폭력적인 지배·피지배관계 속에 있어 사람들이 꿈꾸는 것은 서로 돕는 동포라고 하는 ‘표상’입니다. 그것이 환상이라 해도 그것을 필요로 하는 현실을 해소하지 않는 이상 배척할 수는 없습니다.



내셔널리즘이 강해질 때 어떻게 해야할까요. 물론 지식인들이 그러한 상황에 대해 계몽적인 발언을 할 필요는 있습니다. 그러나 저 자신은 더 이상 그런 일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까 말한 것처럼 90년대에 저는 그런 일을 계속 해왔지만 ‘패배’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9·11과 같은 사건 하나만으로 긴 세월에 걸친 계몽도 모두 무화됩니다. 더 말하자면 일본에는 네이션을 초월한 것처럼 말하는 지식인이 적지 않지만 저는 그들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일본 안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뿐이니까요. 그들은 네이션은 단순한 가상이 아니고 초월론적 가상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네이션이 상상물이라고 계속해서 말합니다. 그러나 그 효과는 없고 또 있을 리가 없습니다.

저는 그런 일 대신 아무리 작은 규모의 것이라도 네이션을 대체할 수 있는 어떤 것을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네이션에 대항해 어소시에이션을, 국가의 통화에 대항해 시민통화를 대치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시민통화에 기초한 어소시에이션은 네이션이 상상적으로 충족시키고 현실에서는 국가에 의해 (세금의 재분배로서) 실행되는 일을 그 자신이 실현합니다. 저는 ‘트랜스내셔널’이란 말을 ‘인터내셔널’과 구별해 쓰고 있습니다. ‘인터내셔널’이 네이션을 단위로 하는데 비해 ‘트랜스내셔널’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국가가 발행하는 것이 아닌 시민통화는 트랜스내셔널한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경제적인 관계를 트랜스내셔널적으로 확장시키는 일이 내셔널리즘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박: 문제는 그런 식의 공동체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욕망과 권력욕을 포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선생님께서 칸트를 원용하면서 타자를 수단으로 하지 말고 목적으로 하라는 계몽적인 ‘윤리’를 언급하시는 것도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한국과 같은 식민지 체험을 한 나라에 있어서는 과거에 얻을 수 없었던 ‘주체’화에의 욕망은 물론, 가난했던 시절에 대한 반동으로서 강렬한 경제적 욕망이 존재합니다. 이런 현재의 한국에 있어서 ‘자유로워라’는 명제가 어디까지 수용될 수 있을지 회의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 보편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욕망을 넘어설 수 있는 ‘윤리’는 어떤 조건하에서 가능해질 수 있을까요.



고진: 저는 ‘윤리21’에서 이런 점을 지적했습니다. 이따금 칸트는 “타자를 수단으로서 대하지 말고 목적으로써 대하라”고 한 것처럼 언급되지만 실제로 칸트가 말한 것은 “타자를 단순히 수단으로서만 대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서 대하라”는 것입니다. 즉 수단으로써 대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분업과 교환 속에서는 우리들은 타인을 수단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타자를 단순히 수단화하는 것이기만 하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칸트의 윤리학은 시장경제를 전제로 하고 또한 그것을 비자본주의화할 것을 암묵적으로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칸트는 경제가 없는 윤리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까 시민통화Q가 윤리적·경제적이라는 것을 언급했습니다. 그 경우 중요한 것은 윤리적 동기가 없더라도, 즉 무엇인가 이윤을 얻으려는 생각으로 Q에 가입해도 상관없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Q를 사용하는 한 그 사람은 자연히 윤리적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진정한 ‘변혁’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윤리적인 결단이나 강제만으로는 생기지 않습니다. 따라서 윤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도덕적 설교도 아니고 개인적 의지도 아닙니다. 제 생각으로는 기술적 인식입니다.

예를 들면 관료제나 권력의 부패를 어떻게 막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 여러 방안이 논의돼 왔습니다. 현재의 의회제 민주주의도 그 소산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잘 안됩니다. 변함없이 관료가 권력을 쥐고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고대부터 문화대혁명에 이르기까지 관료주의적 부패에 대한 비판을 계속 해왔지만 그것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유교나 모택동 식으로 설교를 해도 안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막는 것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권력이 집중하는 곳에 우연성, 즉 제비뽑기제도를 도입하며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고대의 아테네처럼 전부 제비뽑기로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생각하는 것은 ‘선거+제비뽑기’입니다.

선거는 필요합니다. 오히려 선거의 기능을 살리기 위해서 최후에 제비뽑기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3명을 투표로 골라서 그 중에서 제비뽑기로 결정합니다. 최종적 결정은 제비뽑기에 의해 정해지므로 권력자가 자신의 승계자를 만들 수 없습니다. 파벌을 만들어도 의미가 없습니다. 매수행위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누구든지 투표할 때 상대적으로 괜찮은 사람을 고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 3명은 나름대로 유능한 사람이 선택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중에서 누가 결정되어도 상관없습니다. 제비뽑기로 결정된 사람은 자만할 수 없을 것이고 떨어진 사람도 그렇게 분할 것도 없으니까 협력할 것입니다. NAM에서는 대표를 포함해서 선거와 제비뽑기로 구성원을 결정하는 시스템을 취하고 있습니다.

박: 로자 룩셈부르크나 레닌은 노동자의 정치적 스트라이크와 봉기를 중심으로 하는 전술을 제창했지만 제국주의를 저지할 수 없었다고 하는 선생의 지적에서는 선생의 문제의식이 어디에 있는지가 명확히 보입니다. 선생께서 말씀하시는 것 중에서도 특히 제게 흥미로웠던 것은 불매운동 등의 '보이콧'이라는 행위의 가능성이었습니다. 저는 내셔널리즘비판은 최종적으로는 국가전쟁의 보이콧에 연결되어야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세계에는 다양한 접촉수단이 있고 자신이 속한 국가보다도 다른 국가나 거기에 존재하는 개인 쪽에 훨씬 더 큰 관심을 가진 사람들, 특히 젊은층이 늘고 있습니다. 90년대 이후의 인터넷의 등장은 아마도 상상되고 있는 이상의 교류와 소통을 가능케 하고 있을 것으로도 생각됩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이제는 전세계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두 나라사이의 국가에서 매스컴을 넘어선 시민 레벨에서의 의사소통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보이콧'이라는 행위의 가능성에 대해서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바를 조금 더 이야기해주십시오.



고진: 스트라이크와 보이콧의 문제는 '자본론'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생산과정과 유통과정의 어느 쪽을 중시하는가 하는 해석과 연결됩니다. 제 생각은 '자본론'의 해석을 바꾸는 과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제까지 맑스주의나 아나키즘(생디칼리즘)에서는 생산점에서의 노동자의 제네럴 스트라이크가 변혁을 가져온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옛날부터 불가능했고 더더욱 불가능해져가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시민운동 즉 소비자의 운동이나 그에 따른 여성이나 마이널리티의 운동이 확장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과 노동운동 사이에는 교류가 없을 뿐 아니라 대립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순수한 '시민'이니 순수한 '소비자'같은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소비자란 노동자가 소비하는 입장이 되었을 때 생기는 입장 이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노동자가 생산점에서 싸우면 스트라이크이고 소비(유통)점에서 싸우면 보이콧입니다.

자본의 축적운동은 M-C-M(화폐-상품-화폐)라는 과정 속에 있습니다. 그런 경우 산업자본에 있어 상품을 구매하는 것은 결국 그것을 만든 노동자입니다. 즉 잉여가치는 총체적으로 보자면 노동자가 자신들이 만든 것을 다시 살 때 생기는 차액에 있습니다. 그러나 'M-C-M' 운동 안에는 자본이 만나는 두 가지 위기적 계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노동력상품을 사는 일과 생산물을 노동자에 파는 일입니다. 만약 이중 어느 한쪽에서 실패한다면 자본은 잉여가치를 획득할 수 없습니다. 바꿔 말하면 자본일 수가 없는 거지요. 노동자는 이 두 가지 점에서 자본에 대항할 수 있습니다. 한가지는 안트니오 네그리가 말한 것처럼 '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노동력을 팔지 말라'(자본제 아래에서 임금노동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면 의미가 없습니다. 또 하나는 마하트마 간디가 말한 것처럼 '자본제 생산품을 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노동자가 '주체'일 수 있는 장소(포지션)에서 행해집니다. 그러나 노동자=소비자들이 '일하지 않는 일'과 '사지 않는 일'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동시에 일하거나 구매할 수 있는 장소가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비자본제적인 생산과 소비의 형태를 만들어내는 超出적인 투쟁(생산-소비협동조합이나 LETS)은 자본제 경제에 있어 내재적인 투쟁을 위해 불가결합니다. 반대로 후자(보이콧을 중심으로 하는 내재적 투쟁)는 자본제 기업을 비자본제적 기업형태로 조직을 변환시켜 나가는 일을 포함합니다.

보이콧은 옛날부터 있었고 지금도 가끔 행해지고 있습니다. 주의할 점은 그것이 내셔널리즘을 위해서 행해진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각각의 기업이나 각각의 국가는 그럴 경우 큰 타격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자본제=네이션=스테이트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국제분쟁을 격화시킵니다. 한편 우리들이 생각해야 하는 보이콧은 자본제에 대한보이콧이고 동시에 그것이 네이션=스테이트에의 보이콧이 되는 보이콧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저는 NAM은 보이콧 운동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박: 선생이 말씀하신 것처럼 여성운동이나 마이너리티를 위한 운동, 혹은 환경운동 같은 운동들은 현재까지는 서로간에 연결코드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NAM운동은 그런 운동들간의 연대를 모색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일차적으로는 과거나 현재에 차별과 지배의 구조 속에서 중심이 되었던 존재들, 예컨대 식민지피해자들과 제국주의 지배자들, 지배당했었던 여성들과 지배했었던 남성들은 자각적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러나 삶을 영위하는 이상 누구나 어떤 의미에서건 지배와 착취의 구조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으니 그렇다는 사실에 대하여 자각적이 되어 그러한 구조를 끊으려는 의식을 가질 수 있다면 선생님의 '운동'은 성공하겠지요. 운동을 시작한 이후로부터 현재까지의 일본 혹은 그 이외로부터의 반응과 남은 과제에 대해서 말씀해주십시오.

고진: NAM에는 개인이 참가합니다. 모든 개인은 다수의 차원에서 살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그 경우 한 레벨에서는 소수자이지만 다른 레벨에서는 다수자인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NAM의 조직원리는 '개인'을 중심으로 하고 있고 그 개인은 다수의 관심사나 지역에 동시적으로 귀속됩니다 . 아직 규모는 작지만 이 개인의 다수소속제에 의해서 많은 관심영역이 교차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이제까지 생각되지 못했던 것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저는 자본제 경제에 대한 저항운동이 생산과정에 대한 것에서 유통과정 쪽으로 그 중점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말하자면 스트라이크로부터 보이콧 쪽으로지요. 즉 소비자로서의 노동자투쟁이 되는 거지요. 이것은 동시에 노동운동은 남성에 의해, 소비자 운동은 여성에 의해서 이루어져 왔던 이제까지의 관행을 깨는 일이기도 합니다. 저는 아까 NAM의 활동은 비일상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이 운동이 '여성적'이라는 것을 의미하고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시점에서는 여성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지는 않은데 그것은 일본의 페미니스트들이 '남성적'이고 또한 자신들의 영역을 지키려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시민통화Q의 보급과 함께 여성참여자의 수가 늘어가고는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성운동에서는 예전부터 여성의 가사노동을 어떤 식으로 바라볼 것인가에 대해 논의해왔습니다. 대체적으로 이런 거지요. 가사노동은 임금을 지불 받지 못하니까 비가치생산적이고 이리이치가 말하는 '그늘의 작업'이었습니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가사노동의 가치를 인정하고 싶은 나머지 그것을 임금노동 일반과 등치시켰습니다. 그리고 임금이 지불되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모든 것이 자본주의화 되는 사회가 바람직한 것처럼 되어버립니다. 거기에는 자본제=네이션=스테이트를 초월할 수 있는 전망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또한 이러한 생각에는 맹점이 있습니다. 만약 남편이 아내에게 임금을 지불한다면 부부일 필요가 없습니다. 가정부를 고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요. 그렇게 생각해 보면 부부의 관계는 단순히 사랑이나 복종의 관계가 아니라 증여와 보답이라는 상호 보수적 관계 속에 있고 이것은 즉 교환관계이며 넓은 의미에서는 '경제적'인 것입니다. 부모자식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이러한 관계를 자본주의적인 교환관계로 환원시킬 수 는 없습니다.

모든 관계가 자본주의화 되는 사회가 좋을 리 없습니다. 그렇다 해서 남편이 밖에서 일하고 부인을 먹여 살린다고 생각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가사노동에는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화폐적인 교환가치로 그것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곤란은 시민통화를 사용하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사노동에 대하여 그 가치를 인정하면서 돈(엔)을 지불하지 않고 시민통화로 지불하면 됩니다. 그밖에도 예컨대 감사하는 마음이나 받은 것에 대한 부담감이 있지만 그것을 돈으로는 돌려주고 싶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경우 시민통화를 사용하면 윤리적·경제적인 관계가 가능해집니다. 시민통화는 인간관계의 다양한 영역에서 이제까지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들을 해결할 열쇠를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아까 시민통화나 어소시에이셔니즘은 수세기 걸릴 운동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 이곳에서 당장 실현할 수도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당장은 실패로 돌아간 것으로 안다). 비자본제적인 경제는 언제 어디서나 가능합니다. (실제로 비자본제적인 촌락공동체의 경제는 다소 남아있습니다.) 예를 들면 9/10은 엔으로 1/10은 시민통화로 교역한다고 가정합시다. 그렇게 된다면 말하자면 1/10만 코뮤니즘이 실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시민통화가 엔과 같은 국가통화를 전면적으로 대체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시민통화가 전경제의 1/10을 넘는 시점에서는 경제전체가 달라질 것입니다. 국가도 자본도 자기 멋대로 행동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상태를 실현하기 위하여 서두를 필요가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지구온난화, 환경오염, 유전자개조식품 등이 밀려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자본의 자기증식운동 M-C-M의 산물입니다. 개개인이 생각을 바꾼다 해도 이 현상은 멈추지 않습니다. 그것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는 비자본제적인 시장경제를 만들어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최종적으로 어떻게 될 지와는 별개로 우리들은 이 운동을 서둘러 진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칸트는 '타자를 수단으로써 뿐만 아니라 목적으로써 대하라'고 말했는데 이 경우 타자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인간입니다. 온난화나 환경오염의 피해를 받는 것은 그들입니다. 즉 우리는 그들, 타자를 완전히 수단으로만 대하고 있는 셈입니다. 제3세계의 타자라면 항의하겠지요. 그러나 그들은 아무런 불만도 말하지 않습니다. 아직 존재하지도 않으니까요.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해서 타자를 무시해서는 안되겠지요.

박: 일본은 걸프전 이후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나라가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보통 나라’를 지향한다는 말에 시민들도 공감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익의 말에 공감하는 사람들도 생기는 것이겠지요. ‘戰前의 思考’라는 개념을 선생이 강조하신 것은 다가올 전쟁을 예상해서 한 말이었겠지만 작금의 상황은 선생의 예상이 예언적인 것이었다고 생각하도록 만듭니다. 9·11 테러 이후 , 미국 중심의 20세기적 구조가 변하려는 시대 한가운데에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고 있습니다만, 21세기를 맞아 세계질서가 그 재편성을 향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현 단계에서의 일본이나 미국을 둘러싼 정치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선생의 미국으로의 ‘이동’도 이러한 정치상황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만 그런 점에 관해서도 말씀해 주십시오.



고진: 실은 9·11 테러 직후 곧바로 제 예언이 들어맞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옴진리교 지도자가 제 예언에 대해서 쓴 글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옴은 제가 쓴 것을 예언으로 받아들여서 그에 대비해 움직인 모양입니다. 그러나 당연한 일이지만 제가 한 말은 예언이 아닙니다. 세계적인 경기순환(파동)과 일본이 국제적으로 놓여있는 관계구조에 대해 말한 것이고 그러한 상황이 반복적이라는 점을 지적했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저는 80년대 일본경제에서 주가가 끝없이 상승해나가고 있을 때 이것은 오래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됐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예언이 아닙니다. 예측이라 할 만한 것조차 아니지요. 자본제 시장경제가 잔혹한 경제순환을 통해야만 자기조절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면 누구라도 말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것은 앞으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언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다음과 같이 명확한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자본제=네이션=스테이트 속에 있다는 사실, 그리고 거기서 빠져 나오기 위한 방법은 그것과 다른 어소시에이션을 조금씩 확산시켜 나가는 길뿐이라는 것이지요. 앞으로 어떻게 될 지에 관해서는 국가도 자본도 필사적으로 방향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분석하고 비판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현재나 수년, 수십년 후의 전망이 아니라 수세기 후를 향한 전망, 바꿔 말하자면 ‘이념’을 갖는 것입니다. 초조해하거나 불안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는 미국에서 활동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제가 하는 말들이 일본보다도 오히려 미국에서 더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활동한다고 해서 NAM 지부를 만들려는 생각은 없습니다. 애초에 NAM에는 해외지부라는 발상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일본에서도 우리는 NAM을 확산시키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NAM적인’ 것을 확산시키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서나 운동은 그 나라의 조건에 따르는 형태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미국에서 일어나는 운동은 다른 이름으로 불릴 것이고 다른 형태를 취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NAM적’인 것이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만약 한국에서 ‘NAM적인’ 운동이 일어난다면 일본의 NAM과 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박: 선생님을 잠시 ‘일본’의 지식인으로 간주하고 질문하겠습니다. 한일 ‘화해’라는 명제는 ‘전후’를 종식시키고 ‘식민지시대’를 종식시키는 것으로서 20세기를 종식시킬 수 있다는 의미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20세기적 불행한 관계를 기반으로 해서 21세기적·세계시민적 관계를 쌓는다는 의미에 있어서도 저로서는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사안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 방법이 되겠는데 저는 각 개인이 ‘일본’과 ‘한국’의 틀을 넘어서 생각하는, 즉 민족이나 국가단위의 사고의 틀을 넘어선 대화가 행해지지 않는 한 화해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해자=책임자’의 구조가 실은 그리 간단하지 않아 단순히 ‘일본’이라는 국가적 명칭만으로는 ‘가해자’의 실체를 확실히 할 수 없는 만큼 그것은 필연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이 사죄하지 않는다고 한국은 비난하지만, ‘국가’라는 시스템 그리고 그것을 지탱하는 ‘법’ 자체가 타자를 억압하는 것이니 ‘국가’를 넘어서는 사고를 하지 않는 한 ‘사죄’는 할래야 할 수 없는 구조가 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애당초 ‘국가’에 윤리 같은 것이 있을 수 없으니까요. 어떤 의미에서는 일본이 사죄하기 위해서는 ‘국가’이면서도 ‘개인’·시민의 사고를 할 수 있지 않으면 안되겠지요. 한일 사이의 화해를 방해하는 것은 일본에도 책임이 있습니다만 피해자로써의 입장이 무조건적으로 ‘옳음’으로 비춰지는 상황에도 문제가 없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한일 혹은 중일사이에서 지식인끼리 연대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만 ‘아시아’를 특권화하지 않으면서 서구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힘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고진: 되풀이 말해서 죄송합니다만 저는 어소시에이셔니즘만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이외의 방법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나름대로 많은 활동을 해왔다고 생각하고 있고 앞으로도 한일 지식인의 연대를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활동해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저는 이제까지 해왔던 방법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일관계는 더 이상 간단히 결렬될 수는 없을 만큼 경제적으로 복잡하게 뒤섞인 상태로 이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존재하는 대립이 불거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제가 하는 말은 너무나 작고 너무나 우회적인 것일지도 모릅니다.

‘동양의학’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 특징은 국소적인 증상에 직접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전체의 밸런스를 점차 바꾸어 가는 것으로 서서히 치료해나가는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의미에서도 시민통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 개인이 그것에 참가하려 할 때 어떤 나라의 ‘국민’일 필요는 없습니다. 각 개인이 직접 통화를 발행하니까요. 따라서 그것은 트랜스내셔널한 것이 됩니다. 그것은 자본이나 국가와는 다른 윤리·경제적인 관계를 만들어냅니다. 개개인이 일부러 그런 점을 의식하지 않아도 그렇게 됩니다. 저는 이제 이것 이외에 희망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쨌든 거기에는 희망이 있으니까 그나마 낫다고 생각합니다.

칸트는 ‘영구평화론’을 저술했을 때 국제교역이 발달하면 전쟁이 억제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면 외국과 경제적인 교역관계가 깊어지면 전쟁을 행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이유로 말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오히려 국제교역에 의한 이해대립으로부터 전쟁이 발생했습니다. 그렇다면 칸트가 틀렸을까요?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교역(경제관계)이 네이션=스테이트간의 전쟁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교역이 자본주의적인 이유추구에 바탕한 것이라면 전쟁이 됩니다. 그것이 만약 비자본주의적인 교역이라면 전쟁은 억제됩니다.

즉 여기서부터 시민통화에 의한, 어소시에이션에 의한 교역이 ‘영구평화’를 가져온다는 발상이 나오는 것입니다. 직접적인 반전운동, 평화운동만이 아니라, 그런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어느 샌가 비전쟁 효과가 나오는 식의, 일종의 ‘동양의학적’인 평화운동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가 만들어내려고 하고 있는 윤리·경제적 운동입니다.(정리 권희철 기자)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은
1941년 일본 효고현에서 태어났다. 도쿄대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연구했다. 1969년부터 문학평론가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문학평론이라는 장르에 머물지 않았다. 하나의 영역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고 철학, 역사, 건축, 맑스주의 등 다양한 세계 속으로 스스로를 열어 젖히고자 했다. 일찍이 그의 사유는 일본뿐만 아니라 서구에서도 주목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근래 들어 한국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고진 읽기가 유행인 것은 무슨 까닭일까. 문학과 철학 등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고 자유롭게 넘나드는 모습, 서구 사유에 정통하면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사유체계를 정립해 온 것이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국내에 소개된 주요 저작으로는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김경원 옮김, 이산 刊),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박유하 옮김, 민음사 刊), ‘은유로서의 건축’(김재희 옮김, 한나래 刊), ‘탐구 1, 2’(송태욱 外 옮김, 새물결 刊), ‘윤리 21’(사회평론 刊) 등이 있다. 최근에는 공동저작인 ‘근대 일본의 비평’과 ‘현대 일본의 비평’(송태욱 옮김, 소명출판 刊)이 간행되기도 했다. 현재 일본 긴키대 문예학부와 미국 컬럼비아대 동아시아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비평공간’의 편집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박유하 세종대 교수(일문학)는
1957년생으로 일본 게이오대와 와세다대학원에서 일본 근현대문학을 연구했다. 학위논문은 나쓰메 소세키 연구. 1995년부터 세종대 일어일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소세키와 야나기 무네요시 등에 밝다. 주요 저서로는 세간에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누가 일본을 왜곡하는가’(사회평론 刊) 등이 있다. 박 교수는 이 책을 통해 민족주의의 문제점을 폭로하고 있다. 민족주의 비판이 박 교수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임을 엿볼 수 있게 된다. 한편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 근대 문학의 기원’(민음사 刊)을 번역하기도 했다.

최근에 간행된 2002년 당대비평 특별호 ‘기억과 역사의 투쟁’에는 ‘상상된 미 의식과 민족적 정체성: 야나기 무네요시와 근대 한국의 자기 구성’이라는 논문을 싣기도 했다. 내용을 잠시 엿보자. “아이덴티티란 단일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것이라는 것은 스튜어트 홀의 지적을 기다리지 않더라도 이미 명백하다. 그 다양한 아이덴티티 중 그것을 필요로 하는 주체의 스스로의 권력화와 타자의 배제를 지향하는 정치적 이기주의가 하나의 아이덴티티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러한 ‘이기적’ 아이덴티티에의 상상과 기억이 오늘까지도 민족 담론과 ‘역사’ 서술의 근간이 되고 있는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의 말·말·말
“맑스가 말하는 ‘진리는 이론에 의해 확인되는 것이 아니다. 실천에 의해서다’라는 테제로 말하자면, ‘실천’이라는 것은 자포자기하는 것이고 엉망진창이며 방향이 없는 것으로서, 아무튼 그런 선을 그어보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들뢰즈의 생각도 그런 것이겠지요. 흔히 사람들은 ‘실천’을 주체적·목적적 행동으로 보고, 이론가는 책상에서 하고 있지만, 우리는 ‘실천’하고 있다는 느낌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실천은 둘러싸인 선의 내부에서 움직이는 것뿐입니다.” - 아사다 아키라의 ‘도주론’(민음사 刊)에서 대담



“외국인이나 아이들과 의사소통한다는 것은 곧 공통의 어떤 규칙들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공통의 약호를 공유할 수 없다는 것이 타자에게도 똑같이 의미 있는 것이다. 즉, 타자―어떤 공통의 규칙들을 공유하지 않는―와의 의사소통은 항상 가르침·배움의 관계를 형성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의사소통에 관한 지금까지의 이론들은 모두 공유되는 어떤 공통의 규칙을 예외 없이 가정하지만 외국인, 아이들, 정신병자들과의 대화에선 어떠한 공통 규칙도, 적어도 처음에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은유로서의 건축’(한나래 刊)

“우리는 죽은 자와 교섭하려는 것이 아니다. 만약 우리와 죽은 자 사이의 관계가 변한다면, 그것은 단지 우리가 변했을 뿐이라는 말이다.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 애도한다고 해서 죽은 자가 변하겠는가. 단지 그로써 산 자의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것뿐이고, 죽은 자에 대한 산 자의 관계가 변하는 것이다.” - ‘윤리 21’(사회평론 刊)

“저에게 비평은 칸트적 의미에서의 비판에 가까웠다고 생각합니다. 칸트의 비판이라는 것은 기준이라든가 입장이라는 것이 없는 상태에서의, 이른바 자기 언급적 음미라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모든 입장을 해치운 것이었는데, 그럼에도 회의는 아닙니다. 기준이나 입장이 없다는 것에서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시작하죠. 저에게 1975년 이후의 비평이라고 할 때, 그 직접적인 상대는 문학이 아니게 됐습니다. 오히려 철학 혹은 문화·과학, 경제학, 심리학, 인류학이 되어갔던 겁니다.” - ‘현대 일본의 비평’(소명출판 刊)



“자본제경제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 곧 그것을 넘어서는 것은 아니다. 또 그것이 스스로 종말을 고할 리도 없다. 그러나 이론적인 무지를 바탕으로 한 실천은 결코 변혁이 될 수 없다. 도리어 우리는 자본제경제를 지양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아야 한다. 하지만 그 어려움을 명확히 하는 것만으로는 변혁의 가능성을 가져오지 못한다는 사실도 분명하다.”-‘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이산 刊)

07. 0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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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멘트 2007-05-26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좋은 자료, 미안함과 감사한 마음으로 담아갑니다~^^

로쟈 2007-05-26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말씀을요.^^

namunnib 2007-05-27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약 괜찮으시다면 블로그에 가져가서 읽어도 될까요? ^^;

로쟈 2007-05-27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론입니다. 저도 옮겨와서 다시 정리해놓았을 뿐이니까요...

섬나무 2008-03-21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흥미로운 대담이네요. 고진은 여전히 NAM 운동을 전개 중인가요?

로쟈 2008-03-21 14:42   좋아요 0 | URL
아뇨. 실패했다고 어느 책에선가 적어놓은 게 있습니다. 그리고 지나간 페이퍼의 댓글들은 브리핑이 되지 않기 때문에 제가 간혹 놓칠 수 있습니다. 메일로 들어오는 것만 확인할 수 있어서요.^^;

섬나무 2008-03-21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더 오래된 페이퍼들이 제외 대상이겠네요.^^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되는데요..
 

컬처뉴스에서 미셸 푸코의 신간 <주체의 해석학>(동문선, 2007)에 대한 리뷰를 옮겨온다. 곧 나올 계간지들에도 서평이 실릴 듯하지만 지금까지 나온 리뷰들 가운데서는 가장 깊이가 있다. <주체의 해석학> 국역본과 영역본을 플라톤의 <알키비아데스>와 함께 책상 아래에 묻어둔 지 오래됐지만 책을 읽는 건 아무래도 방학이나 되어야 할 듯한데 일단은 리뷰라도 챙겨두도록 한다. '역사학자로서의 푸코'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도 개인적으로 아이템을 잡아두고는 있지만 언제쯤 페이퍼를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나는 무슨 일로 이리 시간이 없는 것인지!). 가련한 일이지만 푸념만으로도 삶은 모자라 보인다. 

 컬처뉴스(07. 05. 20) '자신'을 알기보다 '자신'을 배려하라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 도착한 것처럼 느껴지는 사상가가 있는 반면, 이미 도착한 것 같은데 사실 도착하지 않은 사상가도 있다. 그의 주저 『에크리』(1966)의 국역본 출간 예고가 10년 전부터 있었지만 아직 그 흔적조차 드러나지 않고 있는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이 전자의 경우라면, 사후 원고인 콜레주드프랑스 강의록까지 차근차근 국역되고 있는 철학자 겸 역사학자 미셸 푸코(1926~1984)는 후자의 경우이다. 푸코의 저서가 16권이나 국역됐는데 “사실 도착하지 않았다”니?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겠지만 푸코는 스스로 ‘권력의 이론가’라기보다는 ‘주체의 이론가’로 불리길 좋아했다. 그러니까 그의 주된 관심사는 권력이 아니라 주체, 더 정확히 말하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의 ‘서구의 근대적 주체’가 만들어진 메커니즘이었는데, 사람들은 그의 말과 글에서 ‘권력 테크놀로지’(혹은 권력 장치)에 대한 날선 비판만 읽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는 ‘시종일관’ 주체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이었다.

이런 점에서 이번에 국역된 푸코의 1981~82년 콜레주드프랑스 강의록 『주체의 해석학』(동문선, 2007)은 그가 왜 ‘주체의 이론가’인지, 그가 말하는 ‘주체의 이론’이 무엇인지를 (아마도 그의 유고작인 『성의 역사』의 3권 ‘자기에의 배려’보다 훨씬 더) 잘 보여주는 텍스트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 텍스트를 통해서 권력의 테크놀로지(지배)나 담론의 테크놀로지(지식)에 의해 구축된 서구의 근대적 주체보다는 규칙화된 자기 실천들을 통해 “스스로를 구축하는 주체의 또 다른 형상”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 강의록의 편집자 중 하나는 푸코의 수고(手稿)에 의거해, 이 새로운 주체의 형상(혹은 새로운 형태의 주체화)이야말로 “푸코 저작의 개념적 완성과 완결 원리”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푸코가 말하는 ‘새로운 주체’란 누구인가? 가장 단순하게 말하면 그것은 일단 ‘자기 인식’(“너 자신을 알라”[gnôthi seauton])을 특권화한 데카르트적 주체와 다른 주체이다. 푸코는 고대 그리스에서 이 데카르트적 주체의 대척점에서 서 있는 주체, 즉 ‘자기 배려’(epimeleia heautou)에 전념하는 주체를 발견한다. 푸코에 따르면 사실 이 자기 배려(혹은 자기 배려에 전념하는 주체)라는 관념이야말로 기원 전 5세기에 탄생해 기원 후 4~5세기에 이르기까지 “그리스, 헬레니즘, 로마 시대의 모든 철학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신앙생활까지 관통”하고 있는 관념으로서, ‘주체성의 역사’를 파악하는 데 핵심인 관념이다.

그런데 푸코는 고대 그리스에서 자기 인식은 자기 배려에 종속된 관념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즉, 자신을 배려하기 위해 자신을 인식해야 하는 것이었지 그 반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 관계는 데카르트적 주체가 전면에 부각되기 시작하는 ‘데카르트적 순간’(대략 16세기 말~17세기 초)에 뒤집혀졌을 뿐이다. 푸코가 자기 배려와 자기 인식의 관계가 전도된 이 데카르트적 순간을 문제삼는 이유는 바로 이 순간을 경유한 뒤에야 오늘날과 같은 서구의 근대적 주체가 완성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푸코에게 있어서 주체는 권력의 테크놀로지만으로는 구축되지 않는다. 개인이 주체가 되려면 스스로 자신을 주체로 만드는 특정한 자기(자아) 테크놀로지가 결부되어야 한다. 요컨대 주체는 그 아닌 다른 누군가가 개인을 특정한 형태로 만드는 외적 방식과 개인이 자기 자신을 특정한 형태로 만드는 내적 방식이 서로 관계를 맺는 지점에서만 출현한다. 예컨대 민족국가와 결부된 주체(국민이자 시민)로서의 근대적 주체란 특정한 권력의 테크놀로지와 특정한 자아의 테크놀로지가 결합된 산물이다. 여기서의 그 ‘특정한’ 자아가 바로 데카르트적 주체인 것이다(무리하게 도식화하자면, “서구의 근대적 주체=민족국가와 결부된 주체=훈육권력+데카르트적 주체의 결합”인 셈이다).

그렇다면 푸코가 염두에 둔 ‘새로운 주체’란 궁극적으로 서구의 근대적 주체를 만든 기존 테크놀로지들과 전혀 다른 테크놀로지들이 새롭게 결합된 산물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서 주체를 만드는 데 관여하는 권력과 자아 테크놀로지들의 개수가 무한히 존재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지금과는 다른 테크놀로지들이 적어도 하나 이상 존재하지 않을까? 이렇게 보자면 『주체의 해석학』에서 푸코가 주목하는 ‘자기 배려’란 바로 그 가능한 ‘또 다른 자아 테크놀로지’ 중의 하나인 셈이다.

그런데 배려해야 할 자기는 도대체 무엇이며, 배려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푸코는 플라톤의 여러 대화편들(특히 『알키비아데스』)을 분석하며 이를 설명한다. “배려해야 할 자기는 무엇입니까?”라는 알키비아데스의 물음에 소크라테스는 “그것은 영혼이다”라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에게 “내 자신은 내 영혼”이기 때문이다. 푸코에 따르면 이때의 영혼(psukhê)이란 육체와 대비되는 실체로서의 영혼이 아니라 ‘행위 주체로’서의 영혼이다. 따라서 자기를 배려한다는 것은 육체를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의 주체, 즉 자신의 육체와 적성, 능력을 사용하는 주체로서 자신의 영혼을 배려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자신을 ‘배려’(epimeleia)한다는 것 역시 일련의 행동 양식들과 관련되어 있다고 푸코는 지적한다. 그는 ‘배려’의 어원인 수련하기/단련하기(meletan)의 파생어들을 추적하면서 ‘배려’는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기, 자신을 점검하기,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자신을 통제하기, 자신을 주장하기, 자신을 해방하기, 자신을 존중하기, 자신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낄 줄 알기, 자신에게서 환희를 느끼기 등을 포괄한다고 말한다. 요컨대 배려란 이 모든 행동 양식들을 체화하기 위해 자기 자신으로 전향/회귀해, 자기 자신을 변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푸코는 이 모든 것을 일컬어 ‘자목적화’(auto-finalisation)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자목적화가 자기 내부로의 함몰, 즉 세계와 타자로부터 우리를 고립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전향/회귀-변형의 과정을 거치는 자기 배려는 우리를 정립하는 과정, 다시 말해서 세계와 타자들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에 대비해 합리적 행동의 주체로서 행위할 수 있도록 “자신을 준비”하는 과정이라는 것이 푸코의 결론이다. “자기 배려는 행위 주체와 세계의 관계, 주체와 타자들의 관계를 조절하는 원칙이다.”

푸코는 언젠가 다른 글(「주체와 권력」)에서 이런 자기 배려의 목표를 이렇게 정리한 바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제기되는 동시에 정치적‧윤리적‧사회적‧철학적인 문제는 개인을 국가와 그 제도들로부터 해방시키려 하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을 국가와 거기에 결부된 개인화 유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문제이다.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주체화를 촉진할 필요가 있다.” 물론 푸코가 ‘자기 배려에 전념하는’ 고대 그리스의 주체를 자신이 염두에 둔 ‘새로운 형태의 주체’로 곧장 단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저 ‘새로운 형태의 주체’를 사유하는 데 자기 배려의 관념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시사해 주는 바가 클 것이다.

만약 푸코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우리는 우리의 수고를 덜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사람들이 혁명의 포기 쪽으로만 전향/회귀하는 당대의 분위기를 비판하면서, “언젠가 혁명적 주체성이라 불리는 바에 대한 역사를 연구할 필요”가 있음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푸코는 이미 우리를 떠났고, 이 연구는 우리의 몫으로 남게 됐다. 어쩌면 우리는 예브게니 자먀친의 『우리들』, 미하일 불가코프의 『개의 심장』 등처럼 러시아 혁명의 경험이 반영된 책들과 『주체의 해석학』을 겹쳐 읽으면서 우리에게 남겨진 몫을 수행하기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이재원_그린비 편집장)

P.S. '혁명적 주체성'을 탐문하기 위해서 혁명기 러시아 문학작품들을 겹쳐 읽을 수도 있다는 제안은 신선하다. 한데 <우리들>은 反유토피아 소설이고 <개의 심장>은 풍자소설이어서 긍정적 주체성의 구상을 얻기는 힘들 듯하고 반면교사로서는 유력하겠다. 물론 혁명적 주체성을 소비에트적 주체성과 동일시할 수 있다면, 고리키의 <어머니>나 오스트로프스키의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를 참조해볼 수도 있겠다. 지난 80년대에 그러했듯이.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러할 수 있을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13 опытов о Ленине

나로선 지젝의 <혁명이 다가온다> 혹은 '레닌에 대한 13가지 연구'를 정독하는 일로부터 시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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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tournelle 2007-05-22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고 있는 여자 아이의 크고 또랑또랑한 눈망울과 레닌의 무엇인가를 강력하게 응시하는 눈과 안경 너머로 드리워진 푸꼬의 눈이 슬그머니 겹쳐져 묘한 풍경이 만들어지는 군요.

마늘빵 2007-05-21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코. 한번 마음먹고 파고싶은 학자입니다. 아직 연이 안닿아 멀리서 관심만 갖고 있지만.

수유 2007-05-21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아이는 도대체 뭐랍니까..--;;

드팀전 2007-05-22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데카르트를 좋아하신다는 아프님이 푸...코를 파시면... 코피나겠는데..와우 쌍팔년도 유머다..싸아......<감시와 처벌>과 소책자들 몇 권을 읽었는데..대충 그림만 그려지는 수준입니다...푸코는 이름도 그렇고 헤어스타일도 그렇고 패셔너블해^^
 

학술저널 담론비평에서 진화생물학에 관한 기사를 하나 옮겨놓는다. 원래는 '[통섭논쟁] 진화론도 진화한다'는 기획기사의 일부로 연세대 대학원신문(152호)에 게재된 것인데(사회생물학에 관한 내용이 다음호에서 다루어진다고 한다) '헌대 진화생물학의 전망'이란 타이틀을 갖고 있다. 상식 차원에서 정리해둘 만하다.

담비(07. 04. 13) 현대 진화생물학의 전망

다윈과 진화생물학 

‘진화(Evolution)’라고 하면 흔히 생물의 진화가 연상된다. 그런데 국어사전의 정의에도 그러하듯 ‘진화’는 세월의 흐름에 따른 ‘진보’ 또는 ‘발전’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일반인들이 생물진화를 ‘세월의 흐름에 따라서 진행되는 생물들의 진보 또는 발전’으로 이해하는 것은 사실상 당연한 일일 수도 있겠다. 일례로, 과거 백인들이 흑인들을 노예로 부릴 때 그 주된 논리는 흑인들이 진화적으로 백인들에 비해서 열등하다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이나 나치의 게르만주의의 배후에도 역시 그런 왜곡된 논리가 숨어있다.  

과학 역사상 가장 탁월한 이론의 하나로 간주되는 진화의 개념과 그 메커니즘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던 최초의 연구자가 바로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이다. 다윈은 1831년부터 1836년까지 근 5년 동안 영국의 군함 비이글호를 타고 세계 전역을 일주하면서 생물 진화의 증거들을 풍부히 수집했다. 이런 증거들에 바탕 하여 다윈은 진화의 메커니즘으로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 이론을 처음으로 제안하게 된다.

다윈은 맬서스(Thomas Malthus)가 1798년에 발표한 인구론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맬서스에 의하면 모든 생물종은 기하급수적으로 번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서 만약 기아나 질병과 같은 재해에 의해서 억제되지 않으면 그 수가 무한정 늘어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자연의 생물들이 대부분 안정된 개체수를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각 세대에서 소수의 자손을 제외한 대다수 개체들이 강제로 죽기 때문이다.

멜서스의 이론을 따라 다윈은 각 세대에서 도태되는 자손들은 아마도 환경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열등한 개체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가축이나 곡식들이 인간에 의해 선택됨으로 해서 점진적으로 종자가 개량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계에서도 어떤 선택의 메커니즘이 존재함으로 해서 생물종이 변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윈 이후의 진화생물학

다윈은 자연선택의 개념으로 진화를 설명함으로써 현대 생물학의 기초를 마련했다. 그러나 자연선택의 이론은 실험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그는 자연선택과 진화의 관계를 동료 과학자들에게 설명하는 데에 많은 곤란을 겪었다. 19세기의 과학자들은 진화가 일어난다는 사실은 선뜻 받아들일 수 있었으나 그것이 자연선택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이해하지는 못했다. 심지어 다윈조차도 자연선택의 구체적인 메커니즘을 몰랐기 때문에 그들을 납득시키는 데에 더욱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다윈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진화론 연구가 현대의 진화생물학으로 발전하는 데에는 다윈과 거의 동시대 사람인 멘델(Gregor Johann Mendel, 1822-1884)에서부터 시작된 유전학이 20세기에 들어와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는 점이 커다란 기여를 했다.

금세기 초엽, 멘델의 업적이 재발견됨으로 해서 과학계는 비로소 유전자와 자연선택 사이의 관련성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유전학적 지식이 처음부터 다윈의 자연선택설을 지지했던 것은 아니다. 일례로, 초기의 유전학에서 얻어진 결과들은 돌연변이가 대부분 개체에 해로우며 그 영향도 점진적인 것이 아닌 아주 대규모적으로 나타난다는 것 정도였고, 결과적으로 자연선택에서 요구되는 새롭고 유용한 변이들은 거의 발견할 수 없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점차 유전학에 수학이 가미되면서 유전학에서 얻어진 결과들이 자연선택설을 뒷받침하는 방향으로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유전학과 자연선택의 관계에 대한 전반적인 원리가 종합되었는데, 이를 ‘신다윈주의(Neodarwinism)’라고 부른다.

사회생물학의 등장

신다윈주의가 출현한 이후 얼마 되지 않아서 도브잔스키(Dobzhansky), 메이어(Mayr), 심프슨(Simpson) 등은 집단유전학, 계통학, 고생물학 등에서의 연구 결과들이 신다윈주의의 원리들과 모순되지 않음을 천명하였다. 이렇게 해서  ‘현대 종합설(The Modern Synthesis)’이 마침내 완성을 보게 되었는데, 이는 진화의 주된 메커니즘으로 자연선택설이 타당하다는 점을 전 세계 생물학자들이 인정한 쾌거라 하겠다.

그러나 진화의 메커니즘을 규명하는 작업이 신종합설의 제창으로 완료된 것은 아니었다. 신종합설이 대두되기까지 주로 고생물학, 계통분류학, 유전학 등에 의존해서 발전했던 진화생물학은 1950년대부터는 주로 분자생물학의 발전에 힘입어 현재까지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다. 이런 과정 중에서 리차드 도킨스(Richard Dawkins)를 비롯한 일단의 신다윈주의자들은 생물들 사이의 경쟁이 그다지 치열하게 전개되지 않는다는, 많은 현장 생물학자들의 관찰을 근거로 정말로 중요한 진화의 메커니즘은 생식을 위한 개체들 간의 경쟁이 아니라 유전자들 사이의 경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도킨스, 윌리암스(Williams), 스미스(Smith) 등에 의하면 진화는 다음 세대에 가능한 한 더 많은 유전정보를 남기려는 유전자들의 투쟁으로 정의된다.

1970년대에 출현한 윌슨(Edward O. Wilson)의 사회생물학은 이러한 유전자 중심 진화론의 연장이다. 사회생물학자들은 다윈의 자연선택설이 생물들 사이의 경쟁과 투쟁을 부추기는,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현상이라는 점에 대해서 의문을 표시한다. 만약 자연선택이 옳다면 어떻게 생물들 사이에서 다른 개체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이타적 현상이 빈번히 관찰될 수 있으며, 또 흰개미나 꿀벌의 집단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서로 협조하는 공생 체제가 구축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다윈 진화론과 사회생물학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 달에 논의하기로 한다).

현대인과 진화생물학

다윈 이래 진화론에 대한 논쟁은 항상 일반 대중들의 관심을 끌어왔다. 때로는 그런 관심이 지나친 나머지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일례로, 과학으로서의 진화생물학을 반대하는 일부 비전공 과학자들은 창조과학이라는 사이비 과학을 창조(?)해서 진화생물학을 공격하기도 한다. 이처럼 그것을  전공으로 하지 않는 과학자들이 단체를 결성해서 한 과학 분야를 공격한다는 것은 대단히 불행한 일이다. 진화생물학은 비단 창조과학자들과 같은 비전공 과학자들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보다 빈번하게는 일반 대중들의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는데, 그런 한 예가 아래의 풍자만화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진화생물학은 앞에서와 같은 세속적인 차원에서만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다. 시야를 크게 해서 널리 바라본다면, 학문으로서 진화생물학의 중요성은 그것이 바로 인류의 장래 문제에 깊숙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우리 인간도 다른 모든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환경에 적응하면서 살아간다. 이러한 환경에의 적응을 다윈은 자연선택과 적자생존의 원리로 설명했는데, 우리는 자연계에서 지나치게 적응에 성공했던 나머지 나중에 갑자기 새로 변한 환경 속에서는 살아남지 못하고 멸종에 이르렀던 많은 생물종들의 예를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지구라는 주어진 환경 속에서 현재 지나치게 잘 적응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가? 그리고 이런 지나친 적응이 우리 인류의 장래를 어둡게 하고 있는 것은 혹시 아닐까?

인류의 번영은 환경 파괴와 병행하고 있다. 우리는 열대우림, 산호초, 바다와 호수, 늪지, 강과 하구 등 생물상이 가장 풍부한 장소들을 파괴하고 있으며, 오존층을 훼손하고 있고, 대기 중에 이산화탄소를 더해서 온실효과를 부추기고 있다. 또, 매년 그 사용이 늘어나는 유독성 화학물질들은  우리의 식량원인 곡식의 품종을 단순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환경 훼손과 파괴는 필경 새로운 환경 조건을 조성해서 우리 인류로 하여금 바뀌어진 환경 속에서 살 것을 강요할 것이다. 과연 인류는 이러한 적응에 성공해서 영원히 번영할 수 있을까? 진화생물학은 바로 이런 질문들에 대답을 구하는 학문이다.(홍욱희/ 세민환경연구소 소장, 환경학박사)

07. 04. 15.

P.S. 필자인 홍욱희 소장은 생물학과 환경학 전공자로서 여러 권의 저역서를 갖고 있다. <생물학의 시대>(범양사출판부, 1998) 등이 내가 갖고 있는 책이다(물론 박스보관도서인지라 소장의 의미가 없는 책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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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07-04-15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화'생물학' 이란 명칭이 무색할 정도로 '진화'란 말은 생물학 분야 자체에서보다 사회과학 분야에서 훨씬 인기있는 것 같습니다. 담아가겠습니다.

책읽기는즐거움 2007-04-15 1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으면서 책 이타적 유전자와 이기적 유전자를 링크해 놓으실꺼라 생각했는데 아니네요^^;;
그런데 궁금한게 있는데 위 본문의 풍자만화 중에서 일반 대중들이 오해한 부분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정확히 모르겠어요.
좀 설명해 주시면 안될까요....-_-;; 부탁드립니다^^;

로쟈 2007-04-15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화는 윗것과 아랫것의 내용이 다른 거 같습니다. 윗것은 '창조과학자'에 대한 풍자가 맞고요(더불어 진화론과 창조론이 양립가능하다고 보는 대중에 대한), 아랫것은 제 생각엔 진화론에 대한 여성주의적 비판 같습니다(물론 <여성은 진화하지 않았다>란 책의 저자는 여성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