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타임에 잠시 외도를 한다. 할일이 많은 주말인데, 공연히 페넬로페 도이처의 <데리다>(웅진지식하우스, 2007)를 잠시 읽어본 탓에 머리속이 복잡해졌다. 떠오르는 아이템을 비워내야 좀 맑은 정신을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몇 자 적어둔다. 주로 '해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리가 될 것이다.
책은 이번에 나온 'How To Read' 시리즈의 한권인데, 저자는 생소하고 역자는 의외이다(영화평론가로서가 아니라 아마도 '수유'의 멤버로서 번역진에 가세한 듯싶다). 개인적으론 시리즈의 다른 책들을 맡고 있는 슬라보예 지젝(라캉)이나 키스 안셀 피어슨(니체), 피터 오스본(마르크스) 등에 비해서 중량감이 떨어진다는 생각을 잠시 했는데, 그래도 노스웨스턴대학의 철학교수이며 <해체와 철학사>, <불가능한 차이의 정치학: 뤼스 이리가레의 후기 저작> 등의 저서를 갖고 있는 중견 철학자이다(국역본 속표지에는 'Luce Irigaray'가 '루스 이리가리'라고 특이하게 표기돼 있다. '이리가레'나 '이리가레이', '이리가라이'까지는 본 적이 있지만 '이리가리'는 처음이다. 어떤 자신감의 표현인지? 물론 예전에 '아리가리'라고 적은 서평은 있었지만).
저자인 도이처에 대해서 좀더 알아보니까 현대 프랑스철학과 여성철학(philosophy of gender)이 주전공이고(그녀의 근간은 보부아르 연구서이다) 파리 1대학에서 저명한 여성철학자 사라 코프만의 지도하에 석사학위(DEA)를 받았다(박사학위는 뉴사우스웨일즈대학에서 했다). 켈리 올리버와 함께 <수수께끼들: 사라 코프만에 관한 논문집(Enigmas: Essays on Sarah Kofman)>(1999)을 편집했는데, 나도 갖고 있는 책이다(그러니까 알고보면 '구면'인 셈이다. 코프만과 올리버는 모두 니체 연구로 유명하다).
사실 내가 몇 권 훑어본 시리즈의 책들 가운데에서 가장 깔끔한 번역은 <니체>이다. 원서를 안 갖고 있어서 대조해보지는 않았지만 가독성이 가장 좋다(책의 난이도도 고려해야겠지만). 고유명사나 작품명 외에 원어를 병기해주는 일이 최소화되어 있다는 점도 가독성을 좋게 할 뿐더러 역자의 '자신감'까지 읽게 한다. 거기에 비하면 <데리다>는 너무 많은 (대개는 불필요한) 원어 병기로 가독성을 떨어뜨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첫 페이지에서부터 'anti-Semitic'을 '반셈족적인'이라고 옮김으로써 신뢰도 또한 끌어내린다.
'데리다의 생애'에서도 "독일 점령기 알제리에서 광폭하게 시행된 프랑스의 반셈족주의와 페탕 정책으로"(196쪽) 데리다가 학교에서 쫓겨났다고 기술돼 있는데, '반유대주의' 대신에 '반셈족주의'를 고집하는 것은 역자의 신념에 따른 것인지?('페탕'도 보통은 '페탱'이라고 표기한다.) 어원을 따지자면 틀린 번역은 아니겠으나 누가 '반유대주의'를 '반셈족주의'라고 말하는가?('유대인 데리다' 대신에 '셈족 데리다'?) 이후엔 마음놓고 읽을 수 있는 번역이 아니라 매번 돌다리처럼 두드려가며 건너야/읽어야 하는 번역이다.
그렇게 읽자니 불편한 구석들이 많아진다. 데리다의 경력을 늘어놓는 서문에서 데리다의 <국가박사>는 따로 독립적인 책처럼 표시돼 있지만("당연히, 첫번째 박사학위와 두번째 박사논문인 <국가박사>가 뒤를 잇는다. 데리다의 <국가박사>는 23년 뒤에 가서야 비로소 제출된다.") 사실 1980년에 데리다가 국가박사학위논문 심사대상으로 제출한 것은 1967년에 내놓은 저작들(의 편집)이었다(그러니까 국가박사학위논문이 따로 있지 않다. 심사위원들 가운데는 레비나스도 포함돼 있었다). 그리고 '학위논문의 방어(thesis defence)'를 '논제 변호'(7쪽)라고 말하지 않는다.
데리다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강제 퇴학('퇴출') 당했다가 "학교에 복귀했을 때, 그는 축구에 빠져 최종 학교 시험 첫 시도에서 낙제한 불량학생이었다."에서도 '최종학교 시험(final school examination)이 프랑스의 대학입학자격시험인 '바칼로레아'를 가리킨다는 건 덧붙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그는 1947년에 이 시험에서 한차례 낙방했다). '정치학'에 'politics'란 원어를 병기해주는 친절이라면 말이다(16쪽). "그러나 두번째 시도에서는 프랑스 제3교육체계 내에 속하는 가장 엘리트적 대열에 입학 허가를 받을 만큼 좋은 성적을 받았다."(8쪽)라고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제3교육체계'에 'tertiary education system'이라고 원어를 병기해주면 일반 독자들이 알 수 있는 것인지.
교육학쪽에서 정확하게 어떤 용어를 사용하는지는 모르겠지만 'tertiary education system'은 대학이나 그에 준하는 '3차 교육기관'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내용은 데리다가 '3차 교육기관 가운데서 최고 엘리트 학교'에 입학했다는 뜻. 알제리 출신의 '시골뜨기' 데리다가 적을 두게 된 곳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엘리트 양성기관으로서 '그랑제꼴(Grandes Ecoles)'의 하나인 '고등사범학교'이다.
참고로 알제리에서 유학을 와서 혼자 생활하게 된 "파리에서의 학창시절 역시 외롭고 불행한 것이었다. 간헐적인 우울증과 불안 그리고 복갈아가며 복용한 수면제와 각성제로 인해, 1950년, 1951년, 1955년 세 번씩이나 시험에서 낙제했다." 이 대목은 연보('데리다의 생애')에 기술된 내용과 약간 다른데, 거기서는 "1949년과 1951년의 고등사범학교 입학시험 낙제, 1955년 교수자격시험 낙제"라고 설명돼 있다(그가 정식 대학에 몸담을 수 없었던 한 가지 빌미가 되지 않았을까?). 요컨대, 데리다만큼 화려한 '낙방' 경력을 가진 철학자도 드문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