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타니 고진의 대담을 옮겨온 김에 하나 더 옮겨놓는다. 10년전 대담이니까 '사료'로 보아야 하는게 아닌가 싶다(게재지였던 <포에티카>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대담자는 김우창 교수여서 '한일 비판적 지성의 만남'이란 타이틀이 붙었다. 대담은 다음카페 '비평고원'의 자료실에서 가져온 것이다.

포에티카(1997년 가을호) 한일 비판적 지성의 만남 : 가라타니 고진/ 김우창  

한일 진보적 세력의 교류

김우창: 가라타니 고진 선생님은 일본 지식인으로서 한국에 관심을 갖고 있는, 특별한 분입니다. 선생님이 한국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으실 거예요. 일본과 한국의 관계는 전적으로 우호적인 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한국인과 일본인이 만나면 복잡한 한일 관계에 대한 이야기부터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대담은 한일 관계의 일반론에서 시작하여 세계 문학에서 동아시아의 위치,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한 전망 등을 다뤄보면 좋겠습니다.



가라타니 고진(이하 고진): 제가 한국이라는 나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60년대부터였습니다. 1960년은 일본에 안보 투쟁이라고 해서 전국적인 투쟁 운동이 일어난 해였는데, 마침 한국에서도 4.19 학생 혁명이 일어났었습니다. 저 자신도 운동에 참여했었기 때문에 그 시기에 운동을 했던 한국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국가 레벨이 아니라 개인 대 개인의 차원에서 한국 학생 운동 세대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몇 년 후인 1965년에 한일간 외교 관계가 정상화되었지만 같은 사고 방식을 가졌던 한국 학생 운동 세대에 대한 정보는 제대로 얻지 못했습니다.

1960년대 일본에는 과거 공산당 이념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신좌파가 생겨났습니다. 신좌파란 1960년을 전후한 안보 투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그때까지의 공산당원들의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려 했습니다. 그리고 한일간의 교류는 국가간의 교류를 제외하면 일본의 신좌파와 한국의 좌파 간의 교우뿐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그 신좌파라고 하는 것은 한반도에서 북한을 이상화시켰습니다. 남한은 단지 독재 국가로만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벽을 깬 것이 일본의 소설가 나카가미 겐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소설 <장마>의 작가 윤흥길 씨를 일본에 소개하는 데 주력했고, 그 자신이 한국에 와서 작품 취재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반한(反韓)적 입장을 고수했던 일본 지식인들은 그를 비판했습니다. 심지어 그는 남한의 중앙 정보부와 연계되어 있지 않은가 하는 의심까지 받았습니다. 제가 한국과의 교류를 본격적으로 생각한 것은 나카가미 겐지가 죽고 난 뒤였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그전부터 한국에 대한 관심은 있었지만, 실제로 한국에 대해 공부하게 된 배경에는 나카가미의 뜻을 이어받는다고 하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와 저의 우정은 오래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저는 25살이었고, 그는 20살이었습니다. 그 뒤 우리는 줄곧 교분을 나눠왔습니다(*나카가미의 소설 <고목탄>의 해설을 가라타니가 썼다). 우리 두 사람의 관계는 가족 내에서 장남과 차남의 관계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나보다 나이가 어렸고, 판단력은 좀 떨어졌을지 모르지만 직관력이나 행동력은 훨씬 앞서 있었습니다. 내가 관망할 때 그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행동했습니다. 그는 일본의 천민 집단인 `부락'출신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개인사적 체험을 토대로 제3세계적 문학의 가능성을 지향했습니다. 나카가미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그를 따라 움직이도록 만드는 힘이 있었고 나도 그를 따라 행동했던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나카가미는 이론의 존재에 대해서는 모르면서도 직관적으로 이론을 실행에 옮긴 작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우창: 1960년대 일본에서 학생 운동이 한창일 무렵 동경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그 운동에서 생긴 여러 분파 중의 하나가 `적군파'였습니다. 최근 레바논에서 그 적군파의 잔존 세력이 체포됐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습니다. 1960년대 한국 학생운동의 성격은 적군파 정도까지는 나가지 않았었는데, 적군파에 대한 가라타니 선생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고진: 그때 운동을 한 세대는 지금 50대입니다만, 그 사람들에게는 후계자가 없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신좌파라고 하는 사람들은 구좌파를 비판하고 나온 사람들이었지만 결국에는 같은 결과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허무한 결과였습니다. 연합 적군파 사건이 대표적으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만, 1970년대 일본에선 끝까지 운동의 뜻을 이으려면 `연합 적군파'가 되거나 아니면 신좌파의 한계를 절감하고 좌파이기를 포기하는 일 중 택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72년 일본에서는 `아사마 산장 사건'이라는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신좌파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즉 아주 부정적인 장소에서 마르크스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처한 것입니다. 제가 마르크스의 사상을 근본적으로 다시 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것도 그 때였습니다. 좌파에 대해 절망한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서 저는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김우창: 일본의 마르크스주의자, 공산주의자, 좌파들은 복잡한 한일 관계 속에서 한국에 대해 유대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일제하에서 식민지 조선에 대해서 그랬고, 해방 이후에는 북한에 호감을 표시했습니다. 한일 간의 복잡한 관계를 초월해서 건설적으로 양국 지식인이 만날 수 있는 하나의 자리가 좌파 이데올로기였는데, 적군파가 사라졌듯이 그 시대도 끝났습니다. 따라서 앞으로는 어떤 것에 근거해서 한일 양국 지식인이 서로 뜻을 모을 수 있겠습니까?

고진: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국가 레벨의 형식적 교류가 아니라 다른 레벨의 교류도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소련이 붕괴한 뒤에도 마르크스주의에 또 다른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마르크스주의가 좀더 절망을 겪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르크스주의와 유토피아

김우창: 공산주의란, 특정한 문제를 해결하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가령 생산 체제와 같은 것을 바꾸면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인간 사회를 보면, 전체적 관점에서는 해결이 불가능하고 좀더 경험적인 국면에서 구체적인 해결을 모색해야 할 과제들이 많습니다. 밀턴의 <실락원>에서 아담과 이브가 에덴에서 쫓겨나 걸어가는 장면은 천국이 아니라 결국 땅 위에서 구체적으로 삶터를 마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산주의 이후, 인간의 조건은 <실락원>이후와 비슷한 감이 듭니다.



고진: 저는 공산주의를 낙원으로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마르크스가 활동하던 시기에도 유럽에 유토피아적 사고 방식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마르크스는 헤겔파에서 좌헤겔파를 비판하며 나온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마르크스가 지향했던 것은 칸트의 시점으로 되돌아가서 비판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헤겔의 변증법, 절대 정신의 자기 실현과 역사의 종말에 들어 있는 유토피아적 요소를 비판했습니다. 그에게 유토피아적인 관념은 별로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마르크스주의의 의의는 그런 비판적인 관점에서 경제를 바라보았다는 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우창: 선생님은 독특한 마르크스 해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유토피아의 문제에 있어서, 제가 볼 때는 마르크스가 유토피아적 요소를 비판했던 것이 유토피아적이었습니다. 마르크스가 유토피아적인 요소를 부정하고 비판한 것, 즉 헤겔이 이원적으로 정신과 물질이라고 나누어 생각한 것을 물질 위주로 합치시킨 것은 마르크스의 현실주의처럼 보이지만, 달리 생각하면 물질 속에서 정신적인 요소가 역사적인 단계를 통해서 실현된다고 본 점에선 오히려 더 유토피아적인 것이 아닙니까?

고진: 칸트의 이념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구성적 이념, 즉 유토피아를 자신이 직접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칸트는 그것을 비판합니다. 다른 하나는 통제적 이념, 즉 실제로 실현되지는 않더라도 현실을 규제하고 현상을 비판해 나가는 힘으로서의 이념입니다. 저는 이 후자의 이념을 마르크스가 수용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1990년대 이후입니다. 현실적으로 공산주의가 존재할 때는 특별히 큰 목소리로 말할 필요가 없었지만, 아무것도 형체가 안 남게 되었으니 그들이 생각한 통제적 이념에 대해 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현실을 비판하는 힘은 나오지 않습니다.

김우창: 서양의 네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실천적 차원에서 비판적 차원으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혁명, 사회주의자들의 혁명은 단순히 비판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르크스주의는 그 비판적 차원보다는 실천적 차원에 더 강한 매력이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에 비판적 차원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사회주의 혁명과 같은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비판적 차원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혁명적인 이념이 실현될 수 있다는 믿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념이 비판적인 것보다는 현실에 그 역사적 단계로서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의 힘입니다. 제가 이렇게 보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에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이 오늘날 부딪치게 되는 문제는 비판적 관점이 없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보는 실천적 지렛대가 없어졌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주의의 실천적 전략으로서의 매력이 현실성을 잃어버리게 된 절망감이 전세계 좌파의 고민입니다.



고진: 마르크스는 유토피아의 실현 가능성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현 상황에 대한 비판적 관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거지요. 이 둘 중에 상대적으로 선택해야 할 필요성이 생깁니다. 마르크스가 밝힌 것은 자본주의의 문제점이었습니다. 자본주의가 변했다고들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는 국가 자본주의가 되었을 뿐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말하는 일이 비판입니다. 저는 마르크스주의 자체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고 어떤 관념(유토피아)의 `상황'이 아니라 `비판'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세계시민'이라는 말이 있지만 실제로는 어렵습니다. 내이션nation을 바탕으로 한 인터내셔널international이 아니라 개인적인 차원의 인터내셔널international이 필요합니다.

마르크스에 대한 애기를 했습니다만, 그런 정치적인 상황에 1970년대의 문학을 연결시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메이지 20년대에 일본은 근대 문학의 확장을 경험했습니다. 서구적 근대 사회를 세우려는 정치적 운동이 좌절된 가운데 일본은 근대적 국가를 세웠습니다. 그 같은 정치적 좌절로 인해 문학은 개인의 내면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 같은 근대 문학의 성립 속에서 현실적 타자가 배제되었습니다. 이와 똑같은 상황이 1970년대에 반복되었습니다. 정치 운동의 좌절이 문학으로 수렴된 것입니다. 저는 그런 움직임에 대해서 우려합니다. 그로 인해 배제된 문학의 가능성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있습니다.

오늘, 문학의 상황

김우창: 비판적 마르크스주의가 현실에 어떤 관련이 있는지 딱하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얼마 전 영국 신문을 보니 최고의 악문가 Bad Writer로 프레드릭 제임슨이 뽑혔더군요. 2등은 로브 윌슨이 선정되었고요. 문학의 문화에 대한 비판에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보십니까?

고진: 지금 문학에 대한 비판의 필요성을 이야기하셨습니다만, 저는 문학이라는 말을 조금 다른 의미에서 쓰고 싶습니다. 저는 1980년대까지는 이른바 문학 비평을 하는 비평가로 활동했습니다. 그 이후에는 다른 작업에 임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바로 그 시기부터 진짜 문학을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의 범위는 다양하게 설정할 수 있겠습니다만, 문자로 씌어진 언어라는 의미에서의 글쓰기를 문학이라고 할 때 저에게 있어서는 쓰는 일 자체가 문학입니다. 문제는 문학을 어떤 개념으로 생각하는가입니다.

지금 김 선생님께서는 문학에 효용성이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하셨습니다만, 지금 일본은 문화적 효용성을 의심하는 단계가 아니라 문학 자체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시점에 와 있습니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문학 비평서 출판도 줄어든 상태입니다. 저는 문학 비평에서 멀어져서, 철학, 건축,미술 쪽으로 얘기를 많이 하고 있고,`비평공간`도 그런 의식을 갖고 하고 있는 일입니다만, 저와 같은 작업을 하는 사람 외에는 문학은 문학, 철학은 철학이라는 식으로 나뉘어 있는 상황입니다. 지금 일본에서는 문학을 비판한다든가, 내면을 비판하는 일이 있지만 그런 일 자체가 이미 의미가 없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김우창: 우리 사회에는 해야 될 일이 너무 많고, 있을 수 없는 일도 많고, 일어나지 않아야 될 일도 많은데, 이런 상황에서 문학을 최후의 파수꾼으로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고진: 일본에서도 비슷한 상황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 삼십년 전까지만 해도 어떤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작가나 비평가의 발언이 힘을 가지고 있던 때가 있었지요. 현재는 문학의 효용이니 하는 말 자체를 할 수가 없는, 그런 것에 대해서 아무도 생각하고 있지 않은, 그런 상황에 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본 사회와 경제 문제

김우창: 화제를 다른 방향으로 돌려보겠습니다. 일본 사회에서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일본의 경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고진: 현재 일본의 경제적인 성공은 1939-40년에 확립된 `총동원'체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 비군사화되면서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 현재에 이어진 셈이죠. 그런데 그런 일본적 시스템이 1980년대 말쯤 해체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일본적 시스템의 붕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보이는 바와 같이 일본 경제에 여러 가지 문제들을 낳았습니다. 거기에 어떻게 대처해 나갈 것인가가 문제가 되겠습니다. 현 상황에 대해서는 전체적으로 볼 때 부정적입니다. 그냥 이대로 대충 해나가면 될 것이라는 사고 방식이 만연해 있는데 저는 거기에 대해서 비판적입니다. 일본인들의 경제적인 존재방식은 이대로 대충해 나가면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현재 대단히 위기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김우창: 일본은 빈부 격차가 제일 작은 사회라고 평가되는데, 그것과 지금 일본의 위기가 어떤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고진: 일본에 빈부 격차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만, 그것은 일본의 근대라고 하는 시기가 자본주의적인 것을 억제했기 때문에 나온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파시즘적 움직임에 의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즉 공산주의에 대항해서 그런 태세를 취한 것인데, 그것은 자본의 이익을 제한시키는 정책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구체적으로는 개인 자본가를 억제하고 법인주의를 만든다든가, 모든 산업을 국가가 관리한다든가, 토지나 건물에 대한 규정이 주인이 아닌 임대자를 보호하는 쪽으로 정해진다든가 하는 식의 정책을 추진한 결과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정책이 1980년대까지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소련이라는 나라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지요. 그러나 이제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나타나고 있는 빈부 격차 등의 문제도 부상할 것입니다. 

유교와 데카르트

고진: 서울에 오기 전에 선생님 논문을 읽어보았습니다만, 한국에 대해 생각할 때 유교 문제가 새롭게 부상되고 있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근대를 극복하고자 생각한다면 꼭 주자학 문제가 나오게 됩니다만 일본에서는 주자학 대신 니시라 기타로 철학이 거론됩니다. 제 생각에 니시다 철학이라고 하는 건 거의 주자학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당시에는 니시다 철학이 일본에서는 유일하게 통합적 사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전통 같은 것도 정치와 융합되었지요. 에도 시대에는 주자학이 통합적인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유럽의 토마스 아퀴나스적 존재입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일본의 근대는 단순히 유교의 문제가 아니라 주자학 문제로 생각해야 합니다. 또 한국 자본주의 논쟁이 있다는 이야기도 읽었습니다만 일본에서도 1980년대에 일본의 자본주의를 어떻게 이해해야 되느냐를 둘러싸고 논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일본이 아니라 세계적 관점에서 자본주의를 바라보면서 유교 문제와 결부시켜야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김우창: 작년에 독일에 가서 이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말씀하신 논문은 그때 독일인들의 요청으로 쓴 논문인데, 제가 그 논문을 통해 말하려고 했던 것은 유교가 어떻게 한국의 발전에 기여했는가를 논의하는 의견들을 평가해 보려는 것이었습니다. 제 생각에 유교는 한국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고, 가라타니 선생님 말씀대로 일본에서도 중요합니다. 철학은 역사운동과 관계가 없는 듯 하면서도 역사 전체의 움직임을 요약해서 보여줍니다. 서양에서는 데카르트나 칸트 철학의 주체 정신이 서양의 근대성 발전에 있어서 중요했듯이, 동양에 있어서, 특히 한국에 있어서는 유교가 주체적 입장의 정리를 맡았습니다.

 

고진: 선생님 논문을 보고 결론에는 저도 공감했습니다. 선생님이 데카르트의 주체성과 한국적 주체성을 연결시켜 생각하고 계신 부분에서, 유교보다 데카르트가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신 것말입니다. 1980년대 중반 일본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한창일 때, 그때 저는 모던을, 근대의 연장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포스트모던 시대라고 해서 비판적 성찰이 바뀌거나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철학과 비평의 차이를 이야기 하자면,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형식을 취급하는 것이고, 형식이란 역사에 따라 바뀌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 비평이라고 하는 것은, 장소의 이동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모던에서 다시 포스트모던으로 바뀌었다고 하면 반대가 되었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그건 반대가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이동이 아니라, 근대비판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지점에 오면 근대를 비판하고, 포스트 모던 비판이 필요한 지점에서는 포스트 모던을 비판하는 그런 의미에서의 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런 점에서 비평의 비평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데카르트라든가 마르크스 등, 여러 철학자들의 얘기가 나왔습니다만, 저는 그들이 낸 결론 자체는 별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체계 자체를 좋아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들은 제가 말한 의미에서의 비평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에서 그들의 자세를 좋아합니다. 동경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김우창: 데카르트 안에는 데카르트 비판이 들어 있습니다. 현시점에서, 서양적인 세계가 된 오늘의 시점에서 데카르트는 매우 중요한 철학자입니다. 데카르트와, 데카르트 비판이 포함되어 있는 데카르트 철학의 특징이라면 자기 비판적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성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를 떠나서, 사람이 사는 데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성이고 반이성이고 간에, 여러 사람이 모여 사는 데 이성은 불가피한 것이지요. 포스트모더니즘도 모더니즘의 일종이고 이성적 입장을 버릴 수 없다고 봅니다. 유교가 의미를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유교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반성적 계기를 통해서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고진: 저도 한마디 덧붙이겠습니다. 데카르트를 생각할 때 이원론적으로, 즉 합리론이라든가 경험론 등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자세히 보면 이것이 어떤 한 입장에 멈춰 서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합리론에서 경험론으로, 그 다음 다시 한번 경험론을 비판하며 합리론 쪽으로 옮아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마르크스도 독일 이데올로기와 영국 경험론 사이를 문제가 있을 때 오갔다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런던에 망명했을 때에는 경험론자들에 대해서 헤겔의 제자다운 발언을 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최종적인 입장이 무엇이었냐가 아니라 그때 그때의 필요에 따른 운동, 이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비평입니다.

제가 비평이라고 하는 말에 특히 애착을 느끼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저는 철학자라고도 사상가라고도 불립니다만, 저는 스스로를 비평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작은 입장에 멈춰있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는 엥겔스나 마르크스나 다 마찬가지여서 문제가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1인 2역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런 위치가 중요하지요. 스피노자 같은 사람은 주체성, 데카르트를 비판했었습니다만, 데카르트적인 작업을 했습니다. 주체성의 비판이 다시 주체적이되는, 그런 것이지요. 저는 바로 그러한 입장 자체를 중요시 하고 싶습니다.

오늘의 출판 상황

김우창: 독일이나 북유럽에서는 예술가와 작가에 대한 지원정책이 많습니다. 북유럽에서는 심지어 한 작가의 책이 도서관에서 대출되는 횟수에 따른 저작권료를 지급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본은 어떻습니까?

고진: 일본에서는 출판사가 만화로 돈을 벌어서 문학 출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약 사백 개 정도의 문학상이 있습니다. 각 지방에 따라서 그 지방과 관계있는 작가의 이름을 딴 문학상이나, 그 지방을 소재로 한 작품상이 있습니다. 실제로는 중앙 문단 작가들에게 그 상이 돌아갑니다.

김우창: 요즘 일본 작가들을 보면 옛날 이야기를 풀어서 쓰는 일이 많은 것 같습니다. 가령 시바료타로가 대표적인 예가 아닌가 합니다. 서양적 의미에서 작가와는 다른 `이야기꾼'의 역할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당대적 이야기를 하기보다 재료를 갖고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지요.

고진: 그것은 역사라는 형태를 취한 `허구'입니다. 자신한테 유리한 소재만을 갖고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작년에 NHK에서 대하드라마<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했었는데, 그 이야기가 나오게 되면, 마지막에 꼭 임진왜란(일본에서는 `조선출병' 이라고 하는데)이야기가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끝을 보니까 임진왜란이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뜻이 아니라 그 아랫사람의 음모에 의한 것이라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그래 놓고 그것을 역사라고 말하고 있는 거지요. 오늘의 한일 관계에 맞게 역사를 꾸미는 것입니다. 역사를 소재로 당대의 샐러리맨들의 출세담, 즉 현대의 기업 체제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이야기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김우창: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세운 오사카 성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도요토미의 만년의 시 한 편이 적혀 있는 것을 봤는데, "인생은 이슬로 태어나 이슬로 사라지며, 성을 지은 일도 꿈속의 일"만 같다는 것입니다. 현실적, 정치적 사실에 대해서 로맨틱한 태도를 취하는 일본인의 특성을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준 경우가 아닌가 합니다.

천황제의 의미

고진: 일본 사람들이 역사를 제대로 못 쓰는 것은 한마디로 천황의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아까 나왔던 근대적 주체의 문제와도 연관이 되는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일본과 한국의 차이를 생각해 봤을 때, 일본이 왜 그렇게 됐는가 하면 에도 시대 때부터의 무사들을 봤을 때, 최고 책임자가 되는 것을 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본인이 권력을 가지면서도 완전한 최고 책임자가 되지는 않았던 것이죠. 그러면서 자기의 정체성과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천황의 권위를 이용했습니다. 천황 자체는 실제 권한이 없었는데도 권력을 받쳐주는 존재였기 때문에 천황이 권력 유지에 이용되는 상황이 계속되어 왔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종전 후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헤이세이 천황이 있습니다만, 그 사람이 7년전에 즉위할 때 "나는 헌법을 지키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대목은 취임사 원래의 초고에 없던 말을 천황이 자기 마음대로 만들어 했다는 이야기가 나중에 돌았습니다. 이것도 재미있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황이라는 것은 헌법상으로 상정된 존재인데(상징 천황), 그 천황이 나는 법을 지키겠다고 말했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우익들은 대단히 낙담하고 실망했었지요. 천황이라는 것이 뭔가 보다 더 깊은 뜻이 있는, 의미가 있는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국민이 만든 헌법을 지킨다고 말한 사실에 대해서요. 반면에 사회당은 천황도 국민이 만든 헌법을 지킨다고 말하면서 환영했습니다.



김우창: 일본의 천황제란 세계에서도 특이한 제도인데,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고진: 저는 그 점은 한국과도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원식 선생님 책에서도 어딘가에 인용이 되어 있었던, 어떤 일본인 학자가 이야기한 말입니다만, 즉 이제까지 역사를 봤을 때 일본이라고 하는 나라는, 몽골이 쳐들어 왔을 때도 그랬고, 러시아라든가 중국하고의 관계를 봤을 때도, 항상 한국이라는 나라가 중간에 있어서 쇼크를 완화시켜 주는 완충제 역할을 했었죠. 그래서 외국하고 직접적인 접촉을 안 해도 되었던 겁니다. 보통 영국과 일본이 비슷하다는 말을 합니다만, 그런 의미에서는 영국과 일본이 다릅니다. 즉 그런 식의 조건, 일본의 존재 방식 조건을 한국이 결정해 온 역사가 있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다시 말하면 일본의 특수성이라고 하는 것에는 한국이 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태 즉, 직접 외국으로부터의 공격이나 침략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상황은, 국경을 꼭 정해 놓을 필요도 없고 전통을 이어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국경이라는 것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절대적 권력자, 중심이 필요해지는 법입니다만, 그런 상황이 바로 절대적인 권력자, 전통이라든가 권위를 만들지 않아도 존재 가능한 시스템을 만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일본의 천황제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김우창: 흔히 영국인들을 일컬어 합리적 경험주의자들이라고 합니다만, 영국은 유럽 여러 나라 가운데서 왕이라고 하는 것을 가장 높이 생각하는 나라입니다. 네델란드, 덴마크, 노르웨이 이런 나라들과 비교해서 영국 왕은 높은 존재입니다. 정치적 권력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으면서도, 굉장히 상징적인 존재로서 커다란 의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한편으로는 영국을 상당히 안정된 사회로 만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불합리성으로 가득 찬 사회로 만듭니다. 그 점은 일본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고진: 그런 의미에서는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아마 섬나라라는 조건도 관계가 있을 겁니다. 역시 한정된 공간에서 경험으로 판단해서 일을 진행시킨 결과라는 특징도 일본과 영국을 비슷하게 만든 원인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다만 좀 다른 점은 영국은 원래 왕을 대체적으로 외국인을 데려다 앉히는 그런 나라였습니다. 왕은 왕이지만 처음부터 자신들하고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별개의 존재로 취급하는, 특별히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는 상징적 존재로 생각한 거지요. 하지만 왕 자체는 외국인이었고 아이덴티티의 문제하고는 관계가 없었습니다. 그게 일본과 영국의 다른 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김우창: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지나간 자리마다 표시를 해놓는데, 영국에서도 왕이 지나간 자리마다 흔적이 남습니다. 그래서 영국인들에게 그들이 뭐가 다르냐고 했더니 제대로 설명하지 못합니다. 영국은 평등하다고 하지만역시 강한 계급사회가 아닌가 합니다. 계급사회의 불합리성은 임금의 상징적 신성화와 관계되어 있습니다.

고진: 영국에선 혁명이 일어나면 왕을, 즉 절대 권력을 죽이고 외국인을 데려와 왕으로 삼았습니다만, 일본 역사에서는 이런 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일본은 천황의 신비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근대에 들어와서도 천황은 새롭게 부각될 정도로 천황의 존재는 절대적이었습니다. 메이지 천황은 독일 헌법에 근거하여 만들어졌고, 다이쇼 천황은 이른바 대정 데모크라시의 위기 속에서 출현한 것입니다. 즉 당대에 어떤 대표성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이죠. 합리적 측면에서 말하자면 일본 천황은 조만간 은퇴해야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신비화하는 것이 아니라 천황 자신의 의견도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천황제가 없어져야 할 것으로 봅니다.

아시아적 동일성의 문제

김우창: 세계 역사 속에서 아시아라는 것이 별도의 의미를 갖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유럽의 경우 다양한 사회 문화가 하나의 테두리 속에서 존재하면서 유럽 전체를 구성했습니다. 그만큼 지역적, 인적 교류가 다양하게 전개된 것입니다. 아시아의 경우 앞으로 미국, 유럽보다는 동북 아시아 내에서 지역 문화를 세우는 것이 필요하지 않은가 합니다.



고진: 세계사라고 하는 것은 현시점에서 과거를 되돌아봐서 재구성한 것입니다. 근대 초기에 오카쿠라 텐신 같은 미술사가가 `동양은 하나'라고 외쳤습니다. 서구 열강이 아시아를 지배하려고 할 때 아시아인은 동일성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서구의 힘이 부각되었기 때문에 그런 아시아적 동일성이란 의식이 처음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서양이 말하는 동일성도 무언가에 대항을 해나가는 속에서 그 의식이 생긴 것입니다. 유럽의 경우도 역시 미국과 아시아에 대한 방어 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동일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움직임 속에서 동아시아권이라고 하는 것도 불가피하게 생겨나지요. 그런 의미에서 동일성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동일성에 대립하며 그 의식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아시아의 공동성이 경제적 관점에서 분명히 제기될 것입니다. 일본은 이 시점에서 반드시 다시 한번 대동아 공영권의 문제점을 되새겨야 합니다.

김우창: 서양이 타자로 존재하니까 아시아적 동일성이 제기되는 것도 맞습니다만, 여기서 우리는 조셉 니덤의 문제 설정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는` 왜 17세기까지 유럽보다 선진적이었던 중국의 과학 기술이 그 이후 뒤떨어졌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가 보기에 서양이 여러 국가 공동체에서 다양한 사고를 발전시킨 데 비해, 중국은 너무나 통일된 상태라 그 같은 발전을 계속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다양한 공동체 안에서 산다는 것이 궁극적으로 창조적 문화를 낳는 요인이 됩니다. 아시아도 대동아 공영권 같은 문제점을 극복하면서 서로 협동적으로 살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하리라고 봅니다.

고진: 기본적으로는 그렇습니다만, 일본인인 저로서는 그렇게 간단하게 말해 버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동일성을 내세워 공동체를 구성하는 일 자체가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렸듯이 그런 움직임은 필연적으로 나올 것이고, 그렇다면 일본이나 중국이 아닌 한국이나 대만 같은 나라가 중심이 되는 형태로 만들어져야 할 것입니다. 유럽에서도 베네룩스 3국이라든가 네델란드가 중심이 되고 있는데, 이 나라들은 과거에 침략을 당햇던 나라들입니다.

저는 국가라고 하는 것을 전면으로 내세우지 않는 차원에서의 교류, 즉 개인 레벨에서의 교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국가'의 책임은 계속 논의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옛날과 지금이 다르다고 한다면 국가 차원에서의 교류가 아닌, 사회적인 레벨에서의 교류가 많이 생겨났고 실제적인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방금 말씀하신 학회에서의 발표같은 것도 그런 교류의 하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국가라는 틀을 만들지 않고는 상대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때는 개인에 바탕을 둔 민중이라는 것도 중요해집니다만, 이런 것에 대해서 백낙청 선생도 얘기를 하고 계시죠. 저는 민중이라고 하는 것은 물론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다만 민중만큼 국가에 흡수되기 쉬운 존재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민중 차원 보다는, 그런 일을 가능한 한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문인이나 지식인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국가라는 조건과 개인의 연대

김우창: 가령 일본에서 태어난 사람과 아프리카의 빈국에서 태어난 사람은 그 운명의 길이 서로 엄청나게 다릅니다. 어느 국가에 속하느냐가 개인의 행복을 결정짓는 현실입니다. 국가는 그런 의미에서 개인의 운명의 절대적 조건입니다. 국가를 초월하는 것은 그러므로 현실 차원에서 어렵습니다.

고진: 물론 실제로 국가를 초월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제가 말한 것은 그런 의미에서의 이념을 초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 나라에 속하면서 자기 나라에 비판적인 사상과 사고 방식으로 투쟁하는 사람들끼리의 연대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김우창: 마지막으로 한국사람들에게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면 한마디 하시죠.



고진: 한국분들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일본 근대 문학의 기원>에 씌여 있다고 생각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한가지 우려가 되는 점은 어떤 책이든지 상황이 다르면 좀 잘못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그 책에서 근대 비판, 주체 비판, 문학 비판이라고 하는 것을 했습니다만, 역사적인 문맥을 이해하지 않은 상태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면 하는 게 제 바람입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저는 비평이라고 하는 것을 장소의 이동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과 완전히 반대되는 이야기를 할 수도 있습니다.실제로 그러한 작업을 해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단 한 권의 책만으로 제가 이해되는 상황에 불안감을 느낍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읽어주시는 분들은 제가 이 자리에서 한 이야기를 참고하시면서 책을 읽어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김우창: 지금 시점에서 세계적으로 공통의 과제를 찾기 힘들지만, 더 많은 교섭을 통해 공통의 과제를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07. 0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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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멘트 2007-05-26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자료네요. 감사히 담아갑니다.~^^

2007-05-26 2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유 2007-05-26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긴한 김에 리플 먼저 달고 나중에 읽어보겠습니다. 김우창과 고진. 손이 가는 인물들 아니겠습니까..

로쟈 2007-05-26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감사.
수유님/ 그냥 '자료'로 옮겨놓은 것입니다. 창고에 넣어두시면 됩니다.^^

사량 2007-05-27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오랜만에 <포에티카> 이름을 듣는군요. 딱 1년만 발간되고 폐간된 계간지였는데 <창비>나 <문사> 같이 두껍지 않으면서도 맛있는 글들이 가득했던 아주 알찬 계간지였습니다. 이 잡지에 연재되던 '도정일 문학론'도 비슷한 때 연재던 그의 '신화 읽기'만큼이나 흥미로왔는데...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