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에 막 입학하자 마자 동네에는 이상한 소문이 나기 시작을 했읍니다. 바로 제가 살던 동네에 여자 중,고등학교가 있었는데 그 학교에 "달걀 귀신"이 나타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혼자 화장실에 간다거나 밤에 화장실에 가서 볼일을 다 마치고 나오면 뒷 쪽에서 "어딜가??~~~~" 하면서 하얀 소복을 입은 여자가 다가오는데 일단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서 소복입은 여자가 말을 거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치는데 온 몸의 털이 삐쭉 서는것은 그 여자의 얼굴이 눈도 코도 입도 없는 민둥얼굴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붙은 이름이 "달걀 귀신"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무슨무슨 "괴담"정도 될것 같은데 예전에야 지금처럼 가로등이 밝거나 전깃불을 훤하게 켜 둘 형편이 아니었기에 사람들이 늦게 나다니는 일도 드물었지만, "달걀 귀신"소문 이후로는 해가 지고나면 말 그대로 골목길에는 쥐새끼 한마리 다니지 않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런 소문이 퍼져 나가니 밤에 화장실에도 못 가는 것입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 조차도 화장실에 가는것을 꺼려해서 아예 날이 어두워 지기 전에 볼일을 다 봐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소문이 빠르게 번져나갈즈음 정말로 사건이 하나 터지고 말았습니다. 당시 화장실은 지금같은 양변기나 좌변기가 아니라 그냥 나무를 엮어 만든 '푸세식'인데 그 화장실에서 학생의 시체가 발견 된것입니다. 갓 입학한 학생이라 아마 발을 헛 딛고는 빠졌다가 헤어나오지를 못하고 변을 당한 모양인데 "달걀 귀신"의 소문과 맞물려 이제는 정말로 "달걀 귀신"이 사람을 해치는 일을 했다고 소문은 날개를 달고 퍼져 나갔습니다. 저도 한 걸음에 학교에 가 보았는데 화장실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빙 둘러쌓고 무슨 볼거리라도 있는냥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체는 벌써 경찰이 병원으로 이송해 갔음에도 수많은 사람들은 거기서 또 다른 무엇이 나올까? 라는 기대감으로 어둑 어둑 해가 질 때 까지 죽치고 앉아서 소문을 부풀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 저 사람의 이야기를 귀동냥 하다보니 정말 "달걀 귀신"은 대단했습니다. 어떤 남자는 비가 오는 날 밤 골목을 가다가 달걀 귀신을 만나서 정신없이 우산으로 귀신을 내리쳤는데 분명히 몸을 때렸음에도 허공을 휘젓고 말았다는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자랑스러운 경험담으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다 거짓말임에도 당시에는 가슴이 콩당거리며 "달걀 귀신"의 무서움에 두려워 할 수 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은 "달걀 귀신"이 둔갑을 하는 사태가 발생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겨울 어느 날  낯 모르는 청년 두 명이 동네에 나타나 꼬마들을 다 모아 놓고는 동네 어디 어디를 돌아서 가장 빨라 오는 사람에게는 상금을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정말 돈을 줄까? 라는 생각에 반신반의 했었지만 일단은 "요이~ 땅!!" 하는 소리와 함께 열심히 달려 1등을 하였고 저는 상금으로 10환을 받았던 것입니다. 몇 등 까지 등위를 정해서는 그 아이들에게도 상금을 주는 것이지요. 그러더니 이 젊은 사람이 하는 말..."옷을 많이 입으면 달리기를 잘 할 수 없으니 모두 옷을 벗고 달리면 잘 달릴꺼야"라고 하면서 웃옷을 벗으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잘 달리면 돈도 받을 수 있겠다...가만히 생각해보니 달릴 때 춥다고 입었던 옷이 사실은 달리는데 거추장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아이들이 옷을 다 벗어 놓으니 그것도 제법 수북하게 쌓였습니다.  "요이~ 땅!!" 출발 신호와 함께 동네의 지정된 지점을 향해 열심히 뛰었습니다. 당연히 또 1등으로 도착을 했는데.....어랍쇼??  젊은 두 사람과 우리가 벗어둔 웃도리는 온데간데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참을 찾다가 결국은 찾지 못하고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자초지종을 들으시고는 사태를 판단하신 모양입니다. 사기에 당한것이었지요....순진한 아이들의 옷을 상금을 준다고 꼬드겨서는 웃옷을 가지고는 냅다 뺑소니를 친 것이었습니다.

 그날은 멍청이라고 놀림을 받았고, 제법 야단도 맞았지만 저희 아이들은 모두 "달걀 귀신"이 사람으로 변장을 하고는 우리 옷을 가져 간것이라고 했습니다. "달걀 귀신"에 대한 공포가 커지다보니 밥 상에 올라온 달걀 조차도 입에 넣기가 두려운 지경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동네 시장에 불이났습니다. 아주 큰 불로 시장 전체가 불길에 휩싸였는데 구경을 가느라고 같이 놀던 동생에게는 집으로 가라 하고는 시장통으로 뛰어 갔습니다. 시장 언저리의 약간 높은 축대위에 올라가 시장이 불길에 담겨서 화마가 낼름거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찌나 열기가 강하던지 제법 거리가 있었음에도 얼굴에 화기가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그럭저럭 불길도 잡히고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막상 집에 도착을 하니 동생은 어디 갔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집으로 가라했기에 당연히 집에 있는 줄 알았는데 형을 따라 시장통에 갔었던 모양입니다. 그날 제 동생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다음날부터 어머니는 제정신이 아니셨습니다. 톻행금지 사이렌이 울리기까지 하루 종일을 동생을 찾아 시내를 헤메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잘 몰랐지만 동네에서 수근거리는 이야기는 "달걀 귀신"이 잡아갔을 것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정신없이 동생을 찾아 다니시던 어머니의 노력 덕분에 근 한 달 가까이 지난 어느날 동생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아마 그 때 제 동생을 잃었더라면 저도 한창 이산가족 찾기에 메달렸을지도 모릅니다.

 "달걀 귀신" 이야기는 그 후로도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납량특집'이나 '전설따라 삼천리'에서도 "달걀 귀신"은 단골 이야기꺼리 였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달걀 귀신"을 보았다는 사람은 별로 없고 또 "달걀 귀신"으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는 사람도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대학에 다닐 때 까지도 "달걀 귀신"은 냄새나는 화장실이 주거 공간이었던지 화장실 이야기때 마다 "달걀 귀신"이야기가 떠돌고는 하였지만 더 이상 소문이 확대된다거나 피해 사례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대학 재학중 학교의 종합화 계획으로 지금의 위치로 옮기게 되었는데 당시 교련 수업을 마친 학생 하나가 학교 윗 쪽에 있는 작은 댐의 물에 뛰어 들다 심장마비로 익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도 아무런 관련이 없는 "달걀 귀신"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 학생이 교수회관에서 달걀 하나를 몰래 훔쳐 먹었는데 "달걀 귀신"이 노해서 물로 끌어 들였다는 것이 소문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음대 쪽에 있는 '자하연' 이라는 연못에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 둔 여학생이 투신 자살을 하는 일이 발생을 했는데 이 사건에서는 "달걀 귀신" 이야기는 전혀 거론되지 않았습니다.

  "달걀 귀신"은 사람들이 만들어 낸 귀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것은 대학을 졸업하고 군에 입대후 입니다. 군에서는 귀신도 다양하고 그 종류 또한 다양합니다. 아무래도 초병이라는 임무는 혼자, 또는 둘이 근무에 임하다보니 조금은 무섭고 또는 그런 초병을 놀리기 위해 여러 귀신 이야기가 나도는 것인데 실제 귀신에게 죽음을 당한 초병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길거리를 지나다가 머릿속에서 잊혀졌다고 생각했던  "달걀 귀신" 이야기를 듣게 된것입니다. 어느 어린아이의 어머니가 아이를 달래며 하는 말이 "너...말 안들으면 달걀 귀신이 잡아 간다.." 그 말을 들은 아이는 울던 울음을 뚝!! 멈추고 말더군요...아마도 그 어머니는 "달걀 귀신" 이야기를 들으며 성숙해 온 분이셨고, 아이에게는 "달걀 귀신"에 대한 무서움을 자주 이야기 해주었기에 "달걀 귀신"이 잡아는 이야기를 듣고는 간울음을 멈춘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 봅니다.

 "달걀 귀신".....그 이야기는 이제는 무섭거나 두려운 존재로 들리지 않습니다. 어쩌면 "달걀 귀신"은 우리 인간이 만들어 낸 애교있는 귀신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귀신이나 도깨비나 다소의 성격은 달라도 얼굴에서 피를 흘린다던가, 또는 무지막지한 얼굴로 보는 순간부터 공포를 느끼는 그런 귀신이 아니라 밋밋한 얼굴에 우리 스스로가 달걀 귀신의 얼굴을 만들어 가는 그런 멋이 '달걀 귀신"이야기에 담겨 있는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제 "달걀 귀신"이야기도 듣기 힘든 옛 날 귀신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 如       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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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4-06-15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전 망태할범이랑 곰쥐이야기를 들으며 컸습니다. 얼마전 자꾸 하수도 공사하는 쪽에 가보겠다고 하는 시조카에서 거기 곰쥐 있다고 겁주니까 시댁 식구들이 다 멀뚱멀뚱 곰쥐가 뭐냐고 하데요. 지역마다 차이가 있나봐요.

물만두 2004-06-15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순경 온다 소리를 젤 무서워 했다는데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을까 싶습니다. 혹 전생에 범죄자???

비로그인 2004-06-15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어른들의 아이들 겁주는 방법이며 나름대로 어떤 무서운 대상을 설정해서 어른들의 능력으로 해결하지 못했던 것들을 망태할멈, 마귀할멈, 달걀귀신, 곰쥐(그런데 곰쥐가 어떻게 생긴 쥐죠?), 귀신 등등의 힘을 빌어 통제의 수단으로 삼았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뜨거운 것이나 지저분한것을 만지려고 하면 "에~뜨" "지~지" 라고 하면서 제지하였던 것과 독 같은것 같습니다.

가을산 2004-06-15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어려서 외삼촌 방 천장의 비가 새서 곰팡이 핀 구석을 삼촌이 '도깨비가 들락거리는 구멍'이라고 하는 것을 진짜 믿었어요. --;;
삼촌이 '도깨비가 내 친구야'라고 하는 말에 삼촌을 존경하기까지...

2004-06-17 1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목이 말라 우물 판다"

  조선인님의 서재 내용물중 마이페이퍼라는 상자의 겉이름 입니다. 처음 서재를 방문하고 나서부터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는 의문 한 가지!!!

   저는 목이 마르면 냉장고를 열어 마실것을 찾는데....

   조선인님은 목이 마른데 왜 우물을 파는걸까?

   거...참.....

   정말...  알듯 하면서도 모르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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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4-06-14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너무 해요. 잉잉잉~
뭔가 궁금하고 알고 싶을 때, 호기심과 지적 허영으로 목마를 때,
웹상의 우물을 파는 거라고 봐주세요. ㅎㅎㅎ

비로그인 2004-06-14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오정 임돠~~

가을산 2004-06-14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갈수록 수수께끼님의 유머가 드러나네요. ^^
 

 (1)편에 이어 (2)편에서는 의문점을 제시하고 왜 그러한 것이 의문점으로 대두되는가를 하나하나 설명토록 하겠습니다.

  신륵사 다층석탑을 살펴보면 그 시대에 나타난 탑의 조성양식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선 탑을 구성하고 있는 석재가 일반적인 탑의 석재와는 달리 대리석을 이용하였다는 것이며 특히 일반형 석탑에서는 볼 수 없는 용과 구름, 파도 문양을 조각하였는데 왜 다른 탑과는 다를까? 라는 의문을 갖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이러한 의문 몇 가지를 정리하여 보면

 1. 석탑을 구성하는 석재는 왜 다른 탑과 달리 대리석을 이용하였을까?

 2. 탑의 몸돌은 1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매 층마다 받침이 모각(돌에 새겨진 형태)되어 있으나 유독 초층 탑신을 받치고 있는 상층 갑석에는 탑의 몸돌을 받치는 받침이 없을까?

 3. 탑의 기단석에는 용의 문양이 있는데 발톱이 다섯개로 이는 당시의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중국의 황제만이 다섯개의 발톱을 가진 용을 사용할 수 있는데 어떻게 발톱이 다섯개인 용을 문양으로 사용할 수 있었을까?

 4. 임진왜란을 겪으며 사찰이 전소되었을 때 이 석탑도 그 피해를 보았는데 탑신석은 불길이 닿은 흔적을 보이나 유독 용문양이 새겨진 기단석에서는 불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까?

 5. 기단의 귀퉁이에는 죽절형(竹節形)의 우주(隅柱)가 조각되어 있음에도 탑신에는 단순하고 간략하게 날카로운 칼로 판 것 같이  선으로 우주의 형태만을 나타내고 있을까?

 이상과 같은 다섯 가지의 의문점을 가지고 신륵사 다층석탑을 고찰해 보기로 했습니다.

 첫째는 왜? 대리석을 이용하여 탑을 조성하였을까? 라는 의문입니다. 신륵사 경내에는 또 다른 탑이 하나 더 있습니다. 보물 제 226호로 지정되어 있는 다층 전탑이 바로 그 탑입니다. 전탑은 주로 안동지방과 칠곡의 송림사 5층 전탑, 제천의 장락동에 있는 전탑과 같이 경상북도와 충청도 일부 지방에 건립되었었는데 경기도 땅인 여주에 조성된 이유는 분명하지 않으나 남한강의 지류를 타고 전래된 것이 아닐까 판단됩니다.  신륵사가 위치한 지형은 鳳尾山입니다. 뜻풀이를 하자면 봉황의 꼬리처럼 형성된 산입니다.그리고 이 산에는 바위라고 할만한 것이 없습니다. 뿐만아니라 신륵사 주변에서는 양질의 화강암을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 이유로 석재를 구하기가 어려워 돌을 벽돌처럼 다듬은 전탑을 조성하게 된것이 아닐까 합니다. 특히 전탑의 기단부를 형성하고 있는 화강암은 그 입자가 굵고 풍화가 상당히 진행된 것으로 보아서는 신륵사 인근에서 양질의 화강암을 구하여 탑을 만드는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고 보여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대리석이라는 석재를 그 재료로 삼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대리석은 우리나라 황해도 해주 인근에서 양질의 대리석이 생산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생산량이 적은것은 물론이고 대리석의 크기 또한 대형이 아니어서 대리석을 이용하여 큰 탑을 조성하기는 불가능 하였고, 이에 따라 탑은 크기가 크지 않는 3m 내외로 조성할 수 밖에 없었다고 판단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의문은 매 탑신이 옥개석을 포함하여 하나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고 탑신 받침석이 모각되어 있으나 유독 상층 기단의 갑석 위에는초층 탑신을 받치는 받침석이 없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신륵사가 중창된 시기는 기록에 의하면 1467년입니다. 중창 당시 이 절은 세종 영릉의 資福寺로 중창된 절입니다.  만일 당시 왕실의 명령에 의하여 조성된 사찰의 탑이라면 과연 이렇게 부분이 결구된 형식의 탑으로 조성이 될 수 있었을까? 라는 의문입니다.  탑은 일반적인 조형물과는 달리 부처님을 대신하는 경배의 대상으로서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탑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많은 功力을 필요로함은 물론이고, 탑을 조성함에 있어서도 온 정성을 다함은 당연하다 할것인즉 탑의 기단석위에 있는 1층 몸돌 받침석을 빼먹고 조성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세번째의 의문은 문양에 관한 의문입니다. 조선은 明과 淸이라는 거대한 중국의 두 황제국으로부터 자유스럽지 못했었습니다. 매년 조공을 바쳐야하는 형제의 나라로서 중국 황실의 눈치를 봐야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용의 발톱이 5~7개인 것은 바로 명나라와 청나라의 두 황제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신륵사가 당시 아무리 임금의 원찰이었다 해도 황제를 상징하는 5개의 발톱을 가진 용을 문양으로 넣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발톱 5개를 가진 용의 문양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고종대를 전후해서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라 칭한 이후에나 도자기 등에 발톱이 5개인 용의 문양을 그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륵사 다층석탑에는  제가 (1)편에 올린 사진에서 보는것 처럼 용의 문양은 비교적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용의 문양에서 발톱이 5개로 표현된 경우는 드문 예로 이에 관해서는 보다 심도 깊은 조사와 연구를 통하여 밝혀내야 할 것입니다.

  네 번째 의문은 탑신석에서는 화재에 의한 그을음의 흔적을 볼 수 있으나 유독 아랫쪽인 기단석에서는 왜 그 흔적을 찾기 힘든 것일까? 하는 의문입니다. 임진왜란 당시에 신륵사는 완전히 잿더미로 변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석재로 만들어진 탑은 그 와중에서도 견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석재라서 다른 목조건물 처럼 화재에 견딜 수 있었지만 화재의 피해를 입었으며 사찰을 복구할 때 이 탑도 손질을 했을 것입니다. 그 당시에 어떠한 방법으로든 탑을 닦아 내었을것인데 유독 용문양이 조각된 기단석 부분만 닦았을까요?  물론, 그럴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부처님을 대신하여 경배의 대상으로 삼는 불탑을 관리함에 있어 어느 한 부분만을 집중적으로 닦고 다른 부분은 방치한다는 것은 불가의 속성상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화재로 인한 석재의 그을음은 아무리 닦는다고 해도 열에 의한 피해로 석재의 재질이 변함으로 인하여 화재의 잔재를 완전히 없앤다는 것은 현대의 신기술로도 불가능한 일임을 비추어 볼 때, 화재 당시에 이 탑의 기단부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전혀 피해가 없었거나 또는 화재후 다른 대리석재로 바꾸었다는 등의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 섯번째의 의문은  기단석의 모퉁이 기둥 문양과 탑신석의 모퉁이 기둥의 문양이 너무 극단의 표현을 사용하였다는 점입니다. 아래 사진은 기단석의 모퉁이 기둥의 문양인데 영락형(목걸이형)의 장식으로 조성되어 있음에 비해 탑의 몸돌 모퉁이 기둥은 아무런 조각도 없이 단순하게 얕은 선으로 모각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단과 탑의 몸돌이 완전히 다른 형태를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단석에는 매우 섬세하고 공을 들여 용의 문양과 더불어 귀기둥에도 세심한 조각을 했음에 비해 탑의 몸돌에는 겨우 흔적만 알 수 있도록 모각을 한것에는 분명히 어떤 사연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는 단지 조각의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하였다는 이유로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다른 여타의 탑도 신륵사 탑과 같은 형태를 보이는 것은 없습니다.

  조선시대의 탑은 선대의 탑을 모방하여 제작된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신륵사 탑에서는 일반적인 조선시대의 석탑의 양식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탑을 조성하고 있는 석재는 대리석으로 일반 화강암과 같이 입자가 굵지 않아 조각하기에는 비교적 수월한 편임에도 일부에는 세심하게 공을 들이고 또 다른 부분은 간략하게 표현하였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제작 공정이라 궁금증을 갖게 하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신륵사 다층석탑은 몇 가지의 의문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문점은 문헌기록이 있다면 자세히 풀어갈 수 있겠으나 현재로서는 이 의문점을 풀수 있는 단서가 없어 아쉬움을 남김니다. 조선시대의 이형석탑의 하나로, 대리석으로 조성된 이 탑은 그 제작 시기부터 재고할 필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현재는 초기의 조사 결과에 따라 중창 당시에 제작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견이 정설로 되어 있습니다만, 나옹선사가 입적한 절로서 고려시대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으며, 탑도 마찬가지로 대부분 절의 조성과 동시에 조성됨을 비추어 본다면 조선시대 이전의 이 절의 탄생과 관련지어 볼 필요가 있다 할것입니다.

 <에필로그>

  제 스승께서는 제가 제기한 다 섯 가지의 의문에 대하여 일단의 제자를 대동하고 신륵사 탑의 간략한 재조사에 임하셨었습니다.  주로 5가지의 의문 사항을 확인하는 조사였는데 대부분 제가 제시한 의문점에 동조를 하셨습니다. 한편으로는 30여년전 다리가 없어 강나루에서 신륵사로 건너가서 조사를 하였으며 당시 그런 깊이 있는 조사를 하지 못했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한가지 아쉬운점은 제가 제기한 5가지의 의문점에 대해서는 인정을 하시면서도 편년(제작년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노 학자의 조사결과를 번복한다는 것은 힘든 결정이었기에 그러셨던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신륵사탑의 기단석은 처음부터 같은 탑의 부속 석재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외부(혹은 외국)에서 임진왜란 이후에 유입된 것으로 판단되고 있습니다. 문양으로 보아서는 임진왜란 이후에 중국에서 도입했을 가능성이 많아 보이는데 그 이유는 임진왜란 당시 신륵사에 발생한 화재로 인하여 기단부가 심각한 손상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며, 따라서 왕실의 원찰로서 기단부를 새롭게 조성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제 개인적인 생각이 틀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이 탑의 정확한 편년을 위해서는 중국으로부터 유입되엇을 것으로 판단되는 기단석으로 사용되었던 대리석과 원래의 탑의 석재였던 몸돌 대리석에 대한 재질 분석을 통하여 원산지를 확인하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할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은 조급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탑의 건립연대를 밝히기 위한 작업으로 지속적인 연구속에 추진되어야 할 것입니다.

                                                                               <如         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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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4-06-12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정말 다섯개의 발톱이 뚜렷하네요.
음...

두심이 2004-06-17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금하네요..왜 그런지. 언젠가 또다른 문헌들이 세상의 빛을 보게되면 알수 있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4번째 의문이 제일 궁금합니다. 계속적인 연구 부탁드립니다.
잘 읽었습니다.
 

  여주의 남한강을 끼고 신륵사라는 고찰이 있습니다.  이 절을 처음 건립한 시기는 신라의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이것을 뒷받침 할만한 유물이나 유적은 물론이고 문헌자료도 없습니다. 그러나 고려 우왕(禑王)2년인 1376년에 나옹(懶翁)선사가 이 절에서 입적하면서 절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조선조에 이르러서는 경기도 광주의 대모산(지금 남한산성의 송파쪽)에 있던 世宗의 묘를 여주로 이장하면서 왕실에서는 신륵사를 원찰(願刹)로 삼고 절 이름도 報恩寺로 바꾸고, 전각이나 건물을 새로 꾸몄습니다. 현재 신륵사 경내에는 고려말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조성된 많은 유물이 있으며 특히 이곳에서 입적한 보제존자(普濟尊者) 나옹선사의 부도를 비롯한 유물과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다층석탑이 있으며, 강변에는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 세운 전탑등 다수의 유물이 남아 있습니다.  신륵사의 유물중 다층석탑의 건립연대에 대한 의문점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말씀을 드렸지만 학문에서 형성되는 학파라는 개념은 한 스승 밑에서 배우는 입장에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 탑은 30여년전에 필자의 스승이 조사를 하여 그 조사 결과가 오늘날까지 정설로 받아들여져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탑을 조사하면서 제 스승과는 다른 견해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 탑의 조성연대를 조선시대로 보고 있지만 저는 건립 시기가 조선시대 이전의 고려말, 또는 그 이전으로 보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건립된 탑은 우리 나라에 있는 1300여기의 탑중 20여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와는 달리조선은 억불정책으로 탑이 많이 조성되지 않은것이 이와 관련이 있거나 또는 기왕에 절간이 세워지면서 탑이 세워져 있었기에 새로운 탑의 건립을 염두에 두지 않아서 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륵사 석탑은 일반적으로 조선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제가 보는 조형수법과 탑을 구성하고 있는 재료, 그리고 탑에 장식된 문양에 나타나는 조각 형식등에 대한 의문점으로 이 탑에 대한 재 조사를 했던 것입니다.  스승의 조사 결과를 제자가 번복하는 일은 학파에 몸 담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대단한 모험을 하는 일이지만 몇 가지 이 탑이 갖는 의문점을 기준으로 그 의문에 대한 하나 하나의 조사로 이 탑에 접근을 하기 시작 했습니다.

    신륵사 다층석탑은 대리석으로 만든 탑으로 신라시대나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먼저 탑의 아랫부분인 기단부는 2층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 여러 층의 탑신(탑 몸통돌)을 얹은 사각형의 석탑인데 세부 조형을 살펴보면 신라나 고려의 조형수법과는 다른 새로운 양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기단석에 비룡(飛龍)을 조각하는 경우는 매운 드문 경우로 이것은 신륵사의 창건과 관련된 설화의 내용을 담았는지 모르겠지만 조각 수법이 무척 세련되고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어 자칫 무겁게만 보일 수도 있는 탑의 무게를 조각이 덜어주고 있습니다.

 이 탑의 재료는 대리석인데 이 석재는 당시에는 구하기도 힘든 석재인데 왜 대리석으로 조성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며, 과연 이 탑이 보여주고 있는 양식으로 판단할 때 이미 알려진 대로 조선시대의 탑인지..아니라면 언제 조성된 탑인지를 정확하게 알아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 탑은 3m에 불과한 비교적 작은 석탑이지만 기단부 부터 탑의 몸돌인 탑신부에 이르기 까지 각 층의 돌은 모두 1개의 돌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작은 석탑의 각 부재를 1개의 돌로 만들게 된것은 대리석이라는 재료를 구하기가 어려워서 탑을 크게 만들 수 없는데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 탑은 일반적인 석탑의 전형을 그대로 따랐지만 각 부재에 있어서는 그 세부 감각을 전혀 달리하고 있는데 이 또한 재료가 대리석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단부는 지대석 윗면에 단엽으로 복련문양을 조각하고 그 위에 2층으로 된 기단으로 구성되었는데 아랫층 기단 갑석의 윗면과 윗층 기단 갑석 아랫면에도 연화문(蓮花紋)을 장식하였습니다.  위의 사진에 나타난 용의 문양이나 우측 사진인 기단에 나타난 문양의 조각은 매우 섬세하며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습니다.  .                                                          <신륵사 다층석탑의 상하층 기단>

탑의 몸돌인 탑신부는 현재는 8층 탑신부 까지 남아 있지만, 몇 군데 옥개석의 체감율이 맞지 않아 원래의 정확한 탑이 몇 층이었는지를 추정하기는 쉽지가 않으며 탑의 맨 윗부분인 상륜부는 현재는 철제로 된 찰주(刹柱)만 남아 있고 다른 부재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와같이 모든 점을 살펴보면 신륵사 다층석탑은 지대석 윗면에 연꽃문양을 조각하여 화사한 지대를 이루고 있는데,  기단부에 연화문을 장식한 예는 많지만 이 탑 처럼 지대석에 연화문을 장식한 경우는 흔한 일이 아닙니다.  기단부에 있어서는 면석의 각 우주(귀퉁이 돌)에 화문(花紋)을 모각한 것이라든가, 기단 상층 깁석을 기단 하층 갑석의 하반부형(下半部形)으로 만들어서 조금이라도 무거운 느낌을 줄이고자 하는 점은 이 탑에서 주목할만한 형식이라고 하겠습니다.

   특히 지대석에 용과 구름, 파도 문양을 조각한 수법은 주로 스님의 무덤인 부도(浮屠)에 조각되는 수법인데 특이하게도 이 탑에서는 신라시대나 고려시대에는 없던 문양의 특성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 (2)편에서는 이 탑이 갖는 5가지의 의문점을 제시하고, 그 의문점을 하나 하나 풀어가도록   

         하겠습니다.

                                                                    < 如       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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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6-11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비로그인 2004-06-11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족한 글이라 송구스러운데 balmas님께서 가져가시기 까지 하신다니 더 없는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퍼가시는 님들을 위해서라도 자세하게...그리고 정성껏 글을 써야 되겠습니다.

두심이 2004-06-11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기대됩니다. 제가 이렇게 좋은 자료들을 거져 읽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메시지 2004-06-11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저는 신륵사를 세종대왕을 떠올리는 매개로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문화재를 보는 시각을 좀더 깊게 갖고싶은데 쉬운 일이 아니네요. 님의 글이 도움이 됩니다.

비로그인 2004-06-11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심님...당연히 많이 읽어주신다면 더 없이 고맙겠습니다. 자주 들러서 보고 가시고 가끔은 흔적을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메시지님...자꾸 보며 하나씩 이해하려고 하신다면 어렵게만 느껴지던 우리 문화재도 아주 가까이 있었다는 것을 느끼시게 될것입니다. 고개만 끄덕이는것 보다는 찾아 볼 기회가 되신다면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신다면 그 순간부터는 전문가가 되시는 것입니다.
 


 

 

 

 

 

 

 

 

 

 

 

 

노트북 키보드 보호막도 준비를 안했는데 사랑하는 강아지가 이런 일을 벌인다면...도대체 어떻게 해야만 하는건지요?  특히 가을산님은 이런 위험이 항상 잔재하고 있을텐데....최소한 노트북의 키보드는 바꿔야만 하겠죠?   미쳐.....

                                                                                       < 如        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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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4-06-10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악~! 안돼~~~! ^^

sunnyside 2004-06-10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마이 갓~~ 근데 강아지 안 말리고 사진 찍고 있는 이 사람은 뉘신지...? ^^;

▶◀소굼 2004-06-10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범노트북이였던가...저런식으로 물을 흘려도 밑으로 새게 만든 노트북이 있더군요^^

비로그인 2004-06-10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단을 쳐도 강아지는 눈만 멀뚱~ 멀뚱~ 다들 아시잖아요? 강아지가 잘못을 하고나서는 눈만 멀뚱거리는거.....그런데...복날은 언제죠??

비로그인 2004-06-11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 복날에 저 강아지 잡아도 한입밖에 안됩니다.우리을 즐겁게 해주는 강아지 그냥 예쁘게 봐주세요..참 몇대 때려주는거 잊지 마시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