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에 이어 북한의 불상이 진짜인가 가짜인가를 상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불상의 형태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래 사진은 신문에 난 사진을 옮긴 것인데 좌측이 북한의 문화재라고 주장하는 <연가7년명 금동일광삼존상>이며 <우측이 우리 국보 72호로 지정되어 간송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계미명 금동삼존불상>입니다.

신문사진을 스캐닝해서인지 뚜렷하게 나타나지는 않고 있지만 좌측의 북한 유물은 우측의 유물보다 비교적 정교하게 제작이 되었습니다.

 똑 같아 보이는 두 개의 불상은 인물의 선이나 옷자락, 그리고 광배(인물상 뒤어 있는 배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왼쪽의 것은 인물도 선명하고, 옷 주름이나 손의 모습이 비교적 상세하게 표현이 되어 부드러움 보다는 날카로운 면이 돋보이는 편이며 오른 쪽의 국보 72호는 연꽃 대좌를 비롯하여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편입니다. 이런 면 이외에는 광배에 담겨있는 문양에서 가장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북한의 유물에 나타난 광배의 문양은 선(線)의 형태가 강하게 나타 난 문양이며, 우리 국보는 선이 아니라 낮은 돋을 새김을 하여 화염의 형태를 조성하고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북한의 유물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또렷함이고 남한의 유물은 부드러움이 강하게 느껴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말씀을 드린것은 두 유물을 비교하여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말씀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우선은 국보 72호로 지정된 <금동계미명 삼존불>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알아보겠습니다.



좌측의 사진이 바로 국보 72호인 <금동계미명삼존불>입니다. 이 불상은 구리로 만든 불상에 금을 입힌것으로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양쪽에 보살이 있습니다. 높이는 17.5cm이며 광배만의 높이는 12.5cm로 광배가 전체 높이의 약 2/3 정도 됩니다. 이 불상은 중국 남북조 시대에 나타난 삼불상 양식을 따른 삼국시대 작품입니다.

 가운데 석가여래의 갸름한 얼굴은 약간 앞으로 숙여져 예불을 드리는 중생을 굽어보는 형식이며 입가에는 살짝 웃는 미소를 머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미소는 서산에 있는 삼존불의 미소(이 미소를 김원룡 박사는 '백제의 미소'라고 이름 붙였습니다)처럼 신격화보다는 인간에게 친밀감을 준다고 하겠습니다.

석가여래의 머리부분 뒷편에 둥근 형태는 두광(頭光)이라하여 성스러운 부처의 머리 윗쪽에 남는 서기라고 생각하시면 되는데 이 두광은 4개의 동심원으로 이루어져 있고 맨 가장자리의 원 안에는 연꽃과 당초, 인동초 문양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뒷편은 몸의 서기를 나타내는 신광(身光)인데 불꽃(火焰:화염)무늬가 담겨 있습니다.

  이 삼존불은 대좌와 본존, 그리고 광배를 각각 따로 만들어서 꼬다리로 조합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부분별로 주조하면 보다 섬세하게 만들수 있는데 이와는 반대로 <연가7년명 금동불>은 전체가 하나로 되어 있습니다.

  이 불상에서 자세히 살펴 볼것은 이러한 문양이 선으로 이루어진것이 아니라 주물에 의하여 많이 또는 조금 튀어나오도록 제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양각, 또는 돋을 새김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불상의 조성은 주로 밀랍을 이용해서 기본적인 조형물의 바탕을 만든 후에 틀을 만들어 구리를 녹인 물을 부어 만든 것입니다. 북한의 유물은 방법은 같은 방법을 사용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밀랍을 이용한 바탕의 틀을 만드는 과정에서 세밀하게 양각의 형태로 만들지 못하고 선을 그은 것 처럼 만든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일차적으로는 불심이 깊지 않은 사람이 제작을 했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옛날만한 세밀한 기술을 발휘할 능력이 없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진정으로 부처를 섬기기 위해 만들었다면 북한의 유물과 같이 대충 만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불상을 비롯한 종교와 관계돤 것의 조성에는 많은 정성을 필요로 하며, 마음마저 정갈하게 하려고 노력을 하는데 대충대충 하지는 않기 때문에 불심과는 관계 없이 조성된 것으로 판단이 되는 것입니다.


 

 

 

 

 

 

 

 

 

 

 

 

 

  위의 좌측 사진은 본존의 세부 모습입니다. 일반적으로 육계라고 부르는 머리위의 살상투가 둥근 공모양을 하고 있으며 얼굴의 세부 표현은 인자한 표정으로 상당히 섬세한 표현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측의 사진은 광배의 뒷 부분인데 윗쪽에는 명문이 있고 아랫쪽에는 본존과 연결하는 꼬다리가 있습니다. 이 삼존불의 광배 뒷면에는 모두 17자의 명문이 음각되어 있는데 1자는 아직까지 판독되지 못하였습니다. 음각된 명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癸未年十一月一   日寶華爲亡  父趙ㅁ人造(계미년 11월 1일에 보화가 돌아가신 아버지 조ㅁ인을 위하여 만들다)                 * 명문중 'ㅁ'은 아직 정확하게 판독이 되지 않은 글자 입니다.

살펴본 바와 같이 신문에 게재된 사진으로 봐서는 두 불상의 형태는 비슷하나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더 중요한것은 광배의 뒷쪽에 있는 명문(銘文)입니다. 북한 유물의 명문은 위의 명문이 아니며  <연가 7년명 금동여래입상>의 명문을 그대로 배꼈다는 것입니다. 국보 119호인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의 광배 뒷면에 어떤 명문이 있기에 그 명문을 그대로 배낀 가짜라고 하는지..... 그 이야기는 (3)편에서 자세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如       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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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4-06-21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 갈수록 궁금증만 유발시키고... 중간 중간 똑똑 끊으시다니... 잔인하십니다.
꼭 한참 재미있게 영화보고 있는데 광고가 튀어나와 황당해지는 주말영화같습니다. ㅠ.ㅠ

비로그인 2004-06-21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크!!....죄송합니다. 너무 길게 쓰면 오히려 읽으시는데 불편하실것 같아 일부러 끊었던 것인데 정말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조금 길더라도 한꺼번에 다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미안~~
 

중년!그 아름다움!!!




요즘은 유난히 중년이라는 낱말을 많이 듣는다
그 안에는 기쁨보다 아픔이
즐거움보다는 서글픔이 진하게 깔려 있어 종종 나를 당혹케 한다



빠른 시간의 흐름 속에 벌써 불혹의 나이
지천명이라는 아쉬움
젊은 날들의 회상
앞으로의 날들이 지나온 기간들보다
짧다는 두려움이 내포되어 있음을 잘 알고 있지만
나는 중년이란 참으로 신비스런 아름다움이라고 말하고 싶다



젊음은 예쁘고 화려하지만
중년은 아름답고 신비스럽다
지나간 삶 속에 외로움이 무엇인지 알고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있고
추억을 가꿀 줄 알고
고독의 의미를 잘 알고 있고 오늘의 가치를
내일을 준비하는 여유가 있어 더 깊이 있게 생각할 줄 알기 때문이다



높고 높은 파아란 하늘처럼
뜨거운 폭염을 가셔내고
빨갛고 노오란 병풍으로 산을 물들인
늦가을 풍경처럼 중년의 모습은 아름답다
그 풍경에는 익힌 세월에서의 따뜻한 배려가 있고
다른 이들을 껴안는 온기가 있고
자신을 추스릴 수 있는 자신감이 있고
항상 고여서 흐르는 사랑의 강물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이들이 자신의 생활에서
만족하지 못하듯
나 역시 가끔 내 생활에 염증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러나 오늘을 사랑하고 진실하게
생활해서 후회없는 지금의 오늘을 기억하고 싶다



늙어간다는 초조함도 피곤의 짜증도 버리며
삶이란 시간과 함께 가는 것이며
그 속에서 조금씩 성숙해지며
아름다움을 가꾸는 것이라 믿기에

중년 그 신비스런 아름다움
이른봄 풍경을 색칠하며 서로를 사랑하며
여유있는 중년이라는 길을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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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4-06-18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중년이군요. 그런데 전 나이를 잊고 있었네요.
신비스런 아름다움을 과연 내가 풍기고 있는지, 모를 일이에요. ^^
사람과 사물을 바라보는 내 모든 시선에 여유를 가져야겠어요.

비로그인 2004-06-19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나이를 잊고자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무시하지 못한다는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젊게 살고 싶어도 젊은이들 사이에 끼어도 내 마음같이 젊게 봐주지 않고, 무늬만 중년이라고 아무리 외쳐댄들....이제는 어절 수 없는 중년....아름다운 중년으로서의 신비로움과 자신속에 살아야 할것입니다. 나이 마흔이 되면 자신 스스로에 대한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는데...과연 나 자신은 그런 책임을 지며 살고 있는지...무늬만 중년임을 강조하지만, 사고는 늙다리로 구태가 뭍어나지 않는지....하지만 속으로는 외치고 있을 것입니다. 내 마음은 아직도 순수한 18세라고 말입니다...

비로그인 2004-06-19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퍼갑니다................
 

 미술사학이란 학문이 참으로 재미는 있지만 쉬운 학문은 아닌것 같습니다. 우선은 워낙 방대한 분량의 문헌이 남았지만 아직도 많은 부분에 대한 완전한 번역이 이루어지지 않아 문헌자료를 인용함에 있어서도 우선은 많이 읽고 찾아본 사람이 유리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많은 문헌 자료에서 인용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 인용된 부분이 옳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문헌 자료의 신빙성에 대해서도 재고를 해 보아야 하겠지만, 현재로서는 실증자료와 문헌자료의 일치여부가 옳다, 그르다를 말하기에는 곤란한 문제가 있습니다.

 흔히들 정사라고 하는 <삼국사기>와 야사에 속하는 <삼국유사>가 대표적인 문헌자료에 속하는데 이 마저도 사실은 정확하다고 볼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두 자료가 모두 고려시대에 편찬이 되었기에 고려 이전의 사실에 대한 역사적 내용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맞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후대에 문화재와 미술사학을 연구하는 분야에서는 많은 논란거리를 제공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백제의 무왕이 세웠다고 하는 미륵사지의 발굴시에 신라 관직명이 음각된 작은 항아리 조각이 출토되었는데, 그렇다면 이 작은 조각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백제 건축물로 알고 있는데 신라의 유물이 나왔다면 일차적으로는 "여기서 왜 신라의 유물이 나오지? 이 탑이 그럼 신라와 연관이 있나?"라는 의문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삼국유사>의 백제 무왕조에는 무왕이 세운 탑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한번 정도 <삼국유사>의 사실성에 의문을 제기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당대에 작성한 것도 아니요...직접 보고 작성한 것도 아니기에 사실은 이야기를 적은 내용이라고 할것인데, 다만 '어디어디에 의하면...'이라는 출처가 있어 일반적인 이야기 책과는 달리 보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어디 어디에...'라는 것에 대한 검증은 문헌이 남아있지 않은지라 할 수 없는 형편이고 그 기술하고 있는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극단적으로 백제가 세웠다고 알고 있는 미륵사지 탑의 바닥에서 신라의 유물이 발견 되었으니 생각을 고쳐 신라가 쌓은 탑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는 무척 많이 있습니다. 익산 왕궁리에 있는 5층탑은 분명 백제의 양식을 간직한 탑인데 탑 아래 고려시대의 기와가 나왔다 해서 제작연대를 고려로 보게 되었는데 이 또한 탑에 문제가 있어서 탑을 고쳤다던가 하는 사실은 전혀 무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왕궁리 5층탑은 해체수리를 하면서 사리장엄구가 발견이 되었고, 다른 것으로 대신 채워 넣었으며, 그 유명한 신라의 감은사지 석탑도 해체 수리를 하면서 새로운 사리장치를 납입하였는데 후대...우리의 후손들이 탑을 다시 고쳐야 할 경우 지금 넣은 물품을 보고 신라의 탑이 아니라 2000년대의 탑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물론, 이 경우는 단순 매납이겠지만 사실은 언제 언제 누가 고쳐서 다시 세웠다는 내용도 함께 매납을 합니다. 그러나 과거에는 이런 친절한 내용을 적은 경우는 극히 드문 형편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런 혼돈을 갖고 조사나 연구에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발굴 결과에 대한 연구의 부족으로 학자간에 공감대 형성이 부족하여 상호 티격태격하는 모습도 보이는 것은 정확한 문헌 자료의 부재에서 오는 결과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황룡사탑의 높이가 80여미터라느니...또는 100미터가 넘었다느니....당시 인구가 얼마였다느니, 또는 거북선의 모습과 내부 구조가 이렇다 저렇다니...등등 너무도 많은 분야에 달랑거리는 기록 한 장 제대로 남기지 않은 조상덕에 후손들이 옳으니 그르니 하는 볼성 사나운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토인비는 "기록을 하는 민족은 절대 멸망하지 않는다"고 <역사의 연구>에 적어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자의 중요성은 태양의 아들이라고 자처했던 잉카의 인디오 문명이 기록의 부재로 인하여 무성한 추측만 남은것을 봐도 기록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것 같습니다.

 솔직한 이야기로 저는 타임머쉰이라도 있다면 카메라를 달랑 메고 당시로 돌아가서 당시 상황이나 모습을 사진에 가득 담아서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소!!"라고도 하고픈 마음입니다만 그런 일은 단지 꿈에 불과한 공상일 따름이라 앞으로도 많은 부분에 대하여 "왜?"라는 의문으로 다양한 검토와 연구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알쏭달쏭 문화재 이야기>를 써 내려가면서 우려하는 마음이 하나 생겼습니다. 제가 쓰는 글은 단지 그렇게 생각 할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해 주십사는 부탁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아하~ 그게 그랬구나" 라고 단정을 하신다면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학설을 접하면서 나름대로 스스로가 판단하는 가장 근접한 학설에 고개를 끄덕여 주시면 된다고 하겠습니다.

  얄미운 우리 조상님네는 거북선의 그림 하나 제대로 남긴것이 없어 후손들이 무척 고생을 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조상 탓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고 이에 대한 끊임없는 반론, 그리고 반론에 대한 반론을 위한 연구, 이러한 반복과정이 다소는 지루하고 볼성사납다 할지라도 사실에 점차 근접하는 하나의 방편이 될 것입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초기 1세대 학자들은 제대로 조사를 하거나 연구를 했다고 보기 어렵답니다. 그 분들을 결코 폄하하는것은 아니나 당시의 현실은 모든 여건이 제대로 연구를 할 형편이 못되었기 때문이며, 미술사학이라는 학문에 있어서도 선구자적 역할을 했던 때인지라 많은 부분 잘못되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 잘못된 부분에 대한 교정 작업이 현재까지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잘못이 바른 답인줄 알고 넘어가고 있다는 현실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이순우가 쓴 <제자리를 떠난 문화재에 관한 보고서 1,2>가 나온지 한참이 되었음에도 맞다 틀리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제깐놈이 뭘 안다고 그래?"라는 인식이 강하게 작용되고 있다고 보시면 될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후손을 위해서라도 잘못 조사된 부분이나 연구된 부분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인정을 하고 재 조사를 해야만 합니다. 바로 <알쏭달쏭 문화재 이야기>는 과거에 조사되고는 두 번 다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고 정설처럼 받아들여지는 우리의 문화재 중에서 의문이 간다거나 재론을 필요로 하는 유물을 한 번 짚고 가자는 의미에서 마련한 것입니다. 따라서 일부 알고 계시는 분야에서는 고개를 갸우뚱 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이 란을 통해서 논의되는 유물은 한 번쯤 되새김질을 하고 넘어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꼭 정답이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 如        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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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2004-06-18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새겨듣겠습니다. <알쏭달쏭 문화재이야기> 재미있게 유익하게 보고있습니다.

두심이 2004-06-18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쩌면 밥 숟가락 하나, 도자기 하나가 우리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이 없다고 해서 무관심하게 흘려버려야 할게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하나하나가 모여 그시대상을 나타내는 것일 테니까요. 이렇게 님이 보여주시는 정성으로 다음세대에 똑바로 된 하나를 아는 후손이 생겨날것이고, 역사라는 것이 그 작은 정성이 모인다는 생각을 합니다.
 

  지난 달 4일 조선일보에는 "서울온 北 고구려불상은 가짜"라는 제목으로 A21면에 제법 크게 기사를 실었습니다. 작은 제목으로는 '장충식 교수"南 불상 베끼다 틀린 명문 새겨"'였는데 이 기사의 주요 내용은 4월 9일부터 제기동의 한솔동의보감에서 열리고 있는 '2004 남북공동기획 고구려문화전'에서 전시중인 고구려 불상에 대하여 그 진위를 논하는 글이었습니다. 어느 전시회에 전시중인 작품에 대하여 왈가왈부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 경우이지만 전시회가 개최될 때마다 가끔은 이런 문제가 대두되어 전시 주최측을 당황하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몇 가지를 예로 든다면 국전에서 대상을 받은 '지하철의 모습'이라는 유화작품이 사진 작품을 보고 그대로 베꼈다고 해서 대상을 취소해야 하느냐 아니냐를 두고 심사위원회의를 했지만, 어차피 화가는 사물을 보고 그리는 것이며, 그림에서의 예술적 창의성에 대해서는 논란의 소지로 삼을 수 없다고 해서 그대로 놔둔 적이 있었고(물론, 저는 사진도 보고 회화도 보았지만 표현 방식의 차이일뿐 완전히 똑같은 작품이라고 봐야될 정도였으며 제 개인적으로는 당연히 대상 자격을 박탈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류화가 천경자의 작품을 두고 본인이 가짜라고 주장하여 한동안 세상을 뜨겁게 달구었다가 결국은 작가가 우리 나라 땅에서 사는것이 싫다고 조국을 버리고 해외로 나간적도 있었습니다. 특히나 문화재 분야에서는 김정희의 글씨와 겸재 정선의 그림에 대해 모 전문가가 시중에 나도는 것들은 모두가 위작이거나 가짜라고 해서 온통 바글바글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전시회에 전시되어 있거나 경매장 등에 나오는 작품에 대하여 가짜 운운하는것은 자칫 전시 관계자와 등을 돌리게 되는 경우가 발생함은 물론이고 학문적으로는 확실한 문헌근거나 입증할 방도를 마련치 않는다면 오히려 역공속에서 헤어나기 힘든 지경에 처하게 될 수도 있기에 상당히 조심을 해야 할것입니다. K박물관의 C실장이 자신이 가장 뛰어난 전문가라는 생각으로 겸재 그림에 딴지를 걸었다가 무척이나 혼이 난 적이 있었는데 진위를 구별하는 명확한 방법이 없는 한은 차분히 그 진위를 다져보는 학문적인 전개절차를 거쳐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할것입니다. 고구려 불상이 가짜라고 지적한 장충식 교수는 동국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로 나름대로 불상과 석조물에는 정평이 있으신 분으로 문화재위원이며 개인적으로는 제 은사의 한분이시기도 합니다. 처음 이 기사를 접할 때...깜짝 놀랐습니다. 함부로 그런 논리를 전개하실분이 아니신데 단정적으로 가짜라는 말씀을 하셨고 이것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보도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가짜다 아니다..라는 논란의 대상이 된 전시품은 북한에서 가져왔다는 <연가7년명 금동일광삼존상>인데 이 전시품이 우리 나라의 국보 제 72호인 <계미명 금동삼존불상>을 그대로 본 뜬 뒤, 국보 제 119호인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의 뒷면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그대로 음각한 짬뽕의 성격으로 만들어진 가짜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기사의 옆에는 우리 나라 국보와 전시중인 북한의 문화재를 나란히 싣고 비교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언뜻 보면 똑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자세히 살펴보면 많이 다른것을 알 수 있는데 주최측에서는 "유물에 새겨진 명문은 후대에 새겨졌다는 의문이 있는것은 사실이지만 유물 자체가 문제가 있는것은 아니다"라고 답변하여 유물 자체는 고구려 유물이 맞다고 강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짜라고 주장하는 측은 이 유물이 1960년대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전시 유물이 가짜라면 정말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얼마전에는 국보로 지정되었던 "별황자총통"이라는 조선시대의 대포가 가짜로 밝혀지고 이 가짜를 진짜로 둔갑시킨 주동인물인 해군 대령이 구속이 되고 이를 만들어 준 기술자(?)들이 구속되기도 했었고, 이로 인하여 당시 지정을 위한 심의에 참석했던 문화재위원들은 그 명성에 완전히 X칠을 하게 되었었습니다. 그만큼 문화재를 판별할 수 있는 능력에 의심을 가게 만든것은 물론이고 국보로 지정 당시 시중에 가짜라는 말이 떠돌았음에도 안이하게 대처했던 문화재청도 많은 책임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북한의 유물이 가짜다 아니다 하는 문제는 심각하게 접근을 해야 할것입니다. 이 문제에 관하여 몇 차례에 걸쳐 관련되는 사진과 관련 학자들의 의견을 중심으로 진실은 무엇인가에 접근해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학술적으로의 전개는 다소 무거울것 같아 가능하면 알기 쉽도록 풀어가며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如       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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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심이 2004-06-17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흥미진진합니다. 유물의 진위는 정말 시급하고 중대한 문제입니다. 제대로, 정확하게 아는 것은 어쩌면 일반인들에게는 가까이 접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만 그래도 관심을 갖는 방법으로 일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꼭 이번문제에 대한 얘기를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런일이 있었다는 것조차 몰랐다는게 창피하군요..

비로그인 2004-06-17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심님...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관심을 갖지 않으셨기에 모르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랍니다. 전혀 창피한 일이 아니십니다. 다만, 지금부터는 우리 것이기에....그리고 남이 우리의 것을 지켜주고 관심을 써 주지 않기에 관심을 조금이라도 가져보자는 의미를 가져야 하겠으며 두심님과 같이 관심을 가져 주시는 많은 분들이 계시기에 아마도 우리 문화재에 더 많은 애정과 연구가 이루어진다고 생각을 합니다. 고맙습니다.

메시지 2004-06-17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수께끼님 서재에 놀러오면 우리 문화에 대한 흥미를 느낄 수 있어서 좋습니다. 흥미가 우리 문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로 나가도록 노력해야겠죠.

비로그인 2004-06-18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란 조금씩 좋아하는 일이라고 말씀드려도 되겠죠? 잘못 이해하실 수 있는 부분과 예민한 부분이 많아 저도 상당히 객관적인 자료를 인용한다고는 하지만 제가 말씀 드리는 것이 반드시 정답은 아닐것입니다. 하지만 한번쯤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의미에서 물음표(?)를 가지고 접근을 하며, 관련 문헌자료를 찾고, 또 선배 학자들이 이룩한 업적에 누가 되지 않도록 많은 노력을 한다고 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아름다운 부부

남편이 미울 때마다 아내는
나무에 못을 하나씩 박았습니다.

바람을 피우거나 외도를 할 때에는
큰 못을 쾅쾅 소리나게 때려 박기도 했습니다.

술을 마시고 때리고 욕을 할 때에도
못은 하나씩 늘어났습니다.

어느 날 아내가 남편을 불렀습니다.

"보세요, 여기 못이 박혀 있는 것을...
이 못은 당신이 잘못할 때마다 하나씩 박았던 못입니다."

나무에는 크고 작은 못이 수 없이 박혀 있었습니다.
남편은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남편은 아내 몰래
나무를 안고 울었습니다

그 후 부터 남편은 변했습니다.
아내를 지극히 사랑하며 아꼈습니다.

어느 날 아내는 남편을 불렀습니다.

"여보! 이제는 끝났어요.
당신이 고마울 때마다 못을 하나씩 뺏더니 이제는 하나도 없어요."

그러자 남편이 말했습니다.

"여보! 아직도 멀었소, 못은 없어졌지만 못자국은 남아 있지 않소?"

아내는 남편을 부둥켜 안고서
고마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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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부부 사이에서 뿐만아니라 우리네 인생살이에서도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할 줄 안다면 그 결과는 의외로 따뜻하게 나타 날 것입니다. 비록 작은 이야기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는 글인것 같습니다.

                            < 如       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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