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벽화고분 - 한국문화예술대계 1
김원용 지음 / 일지사 / 1980년 5월
평점 :
절판


  중국이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으로 한반도의 역사를 송두리째 바꾸려는 역사왜곡 시도행위가 노골적이고 직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북한지역을 제외한 중국 집안의 환도산성과 장군총은 물론이고 광개토대왕비 마저도 정비라는 명목으로 보호각을 설치하고 중국의 변방 속국이었던 고구려라는 안내판으로 한반도에서 가장 강성했던 고구려의 세력을 축소시킴은 물론, 그 역사마저도 저들의 역사속에 집어 담으려는 얕은 수작을 부리고 있다.

 이 책은 한국미술사학계의 원로였던 고 김원룡 선생이 1980년에 저술한 책이다. 이 책이 나오기 이전의 1930~40년대에 일본 학자에 의한 고구려 고분 연구가 있었으며, 1974년에는 북한의 고구려 고분 발굴에 의한 발표논문이 그리고 1978년에는 김병모교수의 고분 벽화중 말각조정벽화에 대한 고찰이 '역사학보'에 보고되기도 하였으나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단행본으로 출간된것은 이 책이 처음일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책의 제목을  "벽화고분"이라고 하여 현재 사용되고 있는 "고분벽화"라는 용어와는 거꾸로 쓰고 있다. 벽화고분이냐 고분벽화냐 하는 문제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으나 고분에 그려진 벽화라는 개념에서 본다면 "고분벽화"라고 쓰는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1992년에야 중국과의 수교가 체결된 관계로 그 이전의 연구는 직접 현지를 방문하고 연구했던 것이 아니라 일본 학자의 연구보고서를 참조하였기에 실질적인 고분벽화를 다루는데는 많은 제약이 따랐음에도 김원룡 선생은 관련 도서 대부분을 탐독하여 나름대로의 미술사학적접근을 시도하였다고 본다.

 실제 중국의 고구려 고분벽화가 생생하게 우리 나라에 전달된것은 1992년 중국과 수교후 조선일보사의 특별취재진에 의한 고구려 고분벽화 특별전인 "아...고구려"展이었다. 조선일보의 특별 취재팀은 1500년간 무관심속에 놓여있던 고구려의 어두운 고분속에 담긴 찬란한 벽화를 세상속으로 들고 나왔다. 더군다나 해방이후 남북분단이라는 현실속에서 미진할 수 밖에 없었고 가물가물 우리의 의식속에서 촛농이 녹듯 사라져 가는 고구려에 대한 인식을 되살려준 "아...고구려"전은 학계는 물론이고 그 찬란한 벽화를 사진으로 관람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고구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할 수 있었다.(조선일보사 刊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1993 참조바람) 한편으로는 조선일보사의 특별 취재진에 의한 고분벽화의 자세한 소개이후에는 사실 이 책은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겉핥기식의 연구로 비하될 소지도 다분히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직접 보지 않고 간접 자료를 참고로 하였음에도 저자는 상당한 깊이의 연구를 하였음을 알 수 있어 책이 갖는 가치를 결코 폄하하거나 한쪽으로 치워 버리지 못게 하였다. 물론, 실물에 가장 근접하는 다량의 자료가 새로 전파되어 조금더 사실에 접근할 수 있지만 저자는 벽화와 관련된 다양한 연구 논문들을 접하면서 나름대로의 연구 성과를 보이고 있다. 저자도 서문에서 토로하고 있듯이 편년이나 성격파악등이 뼈대에 불과하며 저자의 책이 고분벽화 연구의 문제 제기적 구실을 하여 줄것을 당부하고 있다. 물론 이 책의 도판으로 사용된 대부분의 사진도 흑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는 중국과 북한에 남아 있는 고분 벽화 자료를 정리하면서 고구려 벽화가 갖는 역사적 배경이나 발생, 분포, 고분의 구조등 기본적인 내용을 서술하고 있으며 고구려 고분에 그려진  벽화의 기법과 벽화 내용, 그리고 더 나아가 저자 나름대로의 편년을 추론하고 있다. 지금의 각종 연구서와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으나 당시의 한정된 자료에 의한 연구로는 상당히 자세한 분석으로 저자가 고분벽화에 접근하고자 하는 노력의 흔적을 남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저자는 그 수가 극히 적은 백제고분의 벽화를 나름대로 정리하고 있다. 저자는 백제인의 형성을 고구려에서 내려 온 사람들이라고 규정하여 고구려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고 있음을 논하고 있는데 고분 벽화의 성격이 중국 남조시대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설명하여 고구려 또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것에 대한 연구가 필요함을 은연중에 강조하고 있다.

  저자인 고 김원룡 박사는 무녕왕릉의 졸속발굴을 평생을 두고 후회하셨던 분이다. 뿐만아니라 송산리 고분군에 대한 현재의 발국 조사와 같이 세심한 조사가 이루어졌더라면 비록 박락이 심하다 하더라도 백제의 고분 벽화를 지금보다는 좀 더 상세하게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그러나 그나마 백제의 고분 벽화는 자료가 남아 있어 후대의 연구가들이 연구할 수 있으나 고신라는 적석목곽분 형식이라는 이유에서인지 영주군 순흥면 태장리의 고분벽화 이외에는 뚜렷한 벽화를 남긴것이 없다. 가야도 극히 일부의 벽화를 남겼으나 자료로 삼기에는 부족한 실정이다.  신라나 가야가 뚜렷한 벽화를 남기지 않은것에 반해 신라의 문화를 계승했을 것으로 판단되는 고려시대에는 그래도 제법 많은 고분벽화를 남기고 있어 남북한의 고분에서 벽화를 접할 수 있으며 이 책에는 다루지 못했지만 몇 년전 태풍 '사오마이'로 인해 노출된 경남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의 朴翊(고려말~조선초 :1332~1398)의 석실묘에서는 거창 둔마리 고분이나 파주 서곡리의 고려 고분과는 달리 거의 완벽한 상태의 고려벽화를 발견하기도 하였다.

  고 김원룡 박사가 이 책을 저술한 이후에도 많은 고분벽화가 발견 되기도 하였고, 또 부여의 능산리 고분이나 무녕왕릉 처럼 우연치 않은 발견을 통하여 우리는 더욱 새로운 고분 벽화를 접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써 고분 벽화에 대한 더욱 많은 연구를 통하여 더욱 새로운 기법이나 형태등을 밝혀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이 비록 25년전에 출간이 되었고 그 내용이 작금의 연구 결과와는 많이 다르다고 해서 이 책의 가치가 낮아지지 않음을 이야기 하고 싶다. 한편으로는 이 책이 갖는 의미를 우리 나라의 고분 벽화 연구의 과정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부족한 자료로 상세하게 접근하려는 저자의 의지가 가득 담겨있는 우리 나라 최초의 고분벽화 연구서로서의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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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4-12-19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초의 고분벽화 연구서라고 하면서 별점이 짜시네요.

시대의 한계라도 한계는 한계다 라고 냉정하게 판단하시는군요.

에, 또, 가장 역사적인 발굴 중 하나로 꼽히는 무녕왕릉 발굴을 후회한

뒷얘기가 몹시 궁금합니다. 언제 알쏭달쏭에서 다뤄주세요. ㅎㅎㅎ

수수께끼 2004-12-19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녜...이제는 내용 자체는 아주 고문이 되어 버렸으니 말입니다. 혹여라도 제 리뷰를 보고 이 책을 구입하신다고 생각하니 높은 점수를 주기를 쉬운일이 아닌것 같습니다....그나저나 100번째 리뷰의 첫번째 댓글의 주인공이 되신것을 축하드립니다...

수련 2004-12-20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100번째 리뷰~~훗~~그런데 제가 수수께끼님의 100번째 리뷰 댓글의 두번째 주인공에 당첨? 된것 같군요?
저는 한편도 제대로 못쓰고 있는데...부럽기도 합니다.


일설하고~~~~벽화고분과 고분벽화의 용어선택에 대하여~~



저도 논문을 쓸때 고분벽화와 벽화고분이라는 단어를 두고 심사숙고 한적이 있었습니다. 고구려 고분에는 벽화가 그려진 무덤과 벽화가 없는 무덤이 있는데 벽화가 있는 무덤과 벽화가 없는 무덤을 구분할때< 벽화고분>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이 바람직 하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예를 들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구려고분군 (벽화고분 0기 포함) ...이렇게요~~

고분속에 그려진 그림을 말 할때는 당연히 고분벽화라 해야 하겠지만요~~

제 생각입니다요~~




. 2004-12-19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다면 제가 댓글의 세번째 주인공인가요? 드디어 100번째 리뷰가 완성되었군요.

축하드립니다. 저는 한국미술사에 대한 지식이 변변치 않은탓에 생산적인 댓글을 달지는 못하겠습니다. ^^;; 다만 한국미술사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져서 중국미술사만큼이나 서구권에서 중요시되고 관심 기울이는 부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만 가져봅니다.

가을산 2004-12-20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정적으로는 '고구려는 우리 역사'라는 생각이 앞서지만....

고대 역사가 '누구 것이냐' 하는 것은 콩하고 팥을 골라내듯 구분하기는 힘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드디어 100번째 리뷰를 쓰셨군요. 축하드립니다. ^^

수수께끼 2004-12-20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두 4분께서 댓글을 달아주셨군요...제 계획으로는 5분께 근사한 선물을 드리려고 했었습니다. 어떤분이 되실지는 몰라도 1분 더 댓글을 달아주신다면 그분까지만 선물을 드릴까 합니다. 그리고 가을산님의 견해는 동양사학자들이 갖는 견해인데 사실 고대국가에 대한 현재의 계승이 어느 나라냐 하는것은 정말로 규정짓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영토 개념에서의 선행되었던 역사를 자국의 역사로 보는것이 타당한 견해이며 이에 따라 고구려나 발해의 역사 또한 우리의 역사가 될것입니다. 징기스칸이 유럽을 정복했다고 해서 유럽땅이 징기스칸의 땅이 아니듯 몽고나 원나라가 우리 영토에 침입을 했다고 해서 그 나라의 영토가 될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될것입니다. 중국의 사기에도 동이족을 치기 위하여 수많은 노력을 했음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런 관점에서도 고구려는 중국의 역사가 아닌 타국가의 역사가 분명하며 문제는 중국의 역사가 아니라고 우리 나라의 역사냐?는 반문에 대한 해답을 구하는 일이겠지만 이에 대한 내용은 한반도 내에서의 패권 다툼이나 역사속에서 분명한 우리 나라의 역사임을 알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수수께끼 2004-12-20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님의 부탁 말씀처럼 부여의 무녕왕릉 발굴과 관련된 내용을 알쏭달쏭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직접 겪은것이 아니지만 그럴듯하게 이야기 처럼 올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직접 발굴에 참여하셨던 여러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들은지라 이야기를 전개하는데는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기대하세요...개봉박두!!!

urblue 2004-12-22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산님 서재에서 보고 건너왔습니다. 알라딘에는 여전히 제가 모르는 훌륭한 분들이 많이 계시네요.

리뷰 몇 편 읽었습니다. 제게는 낯선 분야로군요. 그래도 흥미로운 책들도 있고, 시간 많이 내어 다시 들러서 찬찬히 읽어봐야겠습니다.

100번째 리뷰 축하드립니다.

2004-12-22 10: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kenny chang 2007-10-24 0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녕왕릉 발굴기 중에서 고 박대통령이
금비녀를 휘어보던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적절한 유물보존 기술이 없는 상태에서의
발굴은 파괴와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항상
유념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김원룡 선생의 책은 지금 편집되어서 나온
책보다 그 전에 나왔던 수필집들이 더 나았던 것
같습니다.(개인적인 생각으로)
 
묵재한화 - 한국미술사 외사
진홍섭 지음 / 대원사 / 1999년 12월
평점 :
품절


  미술사를 추적하는 기본 자료는 역시 정사를 바탕으로 한다. 그럼에도 삼국유사와 같은 야사나 외사가 역사에서의 참고자료에 지나지 않음에도 훨씬 더 다양하고 재미있다. 그 이유는 정사에 기록하지 못할 이야기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라 할것인데 정사에만 치우치다보면 그 뒷이야기를 모르고 넘어가며, 단지 정사에 담긴 내용만 머릿속에 남게 된다. 저자는 미술사 자료를 조사하고 연구하는 과정에서 접하게 되는 많은 외사를 집대성하여 한권의 책으로 엮었다.  묵재한화(默齋閑話)라는 제목은 저자 진홍섭의 호인 수묵(樹默)의 서재속에서 저자가 관련하였던 학문인 미술사의 조금은 허허로운 뒷이야기를 담았다는 뜻으로 이해를 할 수 있다.

  저자 진홍섭은 아흔을 바라보는 노학자다. 우리 미술사학계의 1.5세대 정도로 오랜동안 우리 문화재와 미술사학에 종사하며 후학 양성과 문화재 조사에 몸바쳐 왔던 분으로 그동안 접했던 많은 미술사학적 내용중에서 잘 다루지 않고 넘어갔던 외사 부분에 대하여 대학에서 강의하던 자료를 수정하여 엮은것인데 모두 26편의 제각기 다른 주제를 정사와 외사를 기초로 하여 새롭게 해석을 하고 있어 전공을 하는 사람에게는 중요한 자료가 되면서도 전공으로 삼지 않는 일반 독자라 할지라도 재미있는 이야기로 읽을 수 있는 내용으로 꾸며져 있다.

  신라의 대찰이었던 영묘사에 관한 추적으로 그 영묘사라는 절이 어디에 있는가를 여러가지 문헌자료를 참고하여 유추하고 있으나 정확하게 어디에 있었다는 결론을 내리는것을 유보하며 '다만 영묘사에는 3층 목탑이 있었다'는 말로 마무리를 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들은 구태어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자신의 학설이나 의견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정사에 치우쳐 넘어갔던 바깥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준다고 생각하면 될것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들은 물론 미술사학적 접근에 의한 내용이 대부분이지만 달마도를 그린 김명국의 일화나 선묘와 의상과의 로멘스등 우리 역사속에 오르내렸던 인물에 대한 가십도 담고 있다. 뿐만아니라 건축물이나 왕실에 관한 이야기등 지금까지 잘못 알려진 부분에 대해서는 외사와 관련된 문헌자료를 제시하며 새롭게 인식하기를 저자는 바라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저자가 평생 몸담았던 미술사학의 대상이 되는 문화재의 파손과 훼손에 대한  경위를  외사속에서 찾아내어 알려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도리사 금동사리함'의 경우처럼 미술사학적 고찰을 거쳐 밝혔어야 함에도 그런 과정을 거치지 못했던 우리 문화재의 제자리 찾기에 대한 안타까움도 담고 있어 노학자이며 선배로서 자신이 다하지 못했던 일에 대하여 후학들이 무엇을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담고 있다 할 수 있다.

 이 책의 내용을 읽다보면 방대하게 인용된 각종 문헌의 양에 놀라게 된다. 저자의 설명처럼 관련 자료를 집성하다보니 정사뿐만 아니라 외사나 야사의 내용도 접하게 되었을지 모르나 이러한 외사나 야사가 실증사료인 문화재의 존재를 증명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음을 강조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 책은 제목이야 '한담'이라고 하였으나 실은 미술사학의 뒷이야기를 상세히 기술한 내용으로 정사와 완전히 동떨어진 내용을 담고 잇는것이 아니라 다양한 각도에서 문화재를 분석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책의 내용은 아무래도 학문적 자취를 바탕으로 하여서인지 전혀 관심이 없었던 일반인이 이해하기에는 쉽다고 할 수 없으나 문화재에 관하여 조금의 관심이라도 갖고 있는 독자들이라면 특별히 어렵지는 않으리라고 보여진다. 딱딱하다고 여겨지는 미술사학에 관한 다양한 접근중 이렇게 외사나 야사를 통한 접근은 그 내용을 받아들임에 있어 훨씬 부담감을 덜어줄 수 있을 것이다. 노학자의 말 처럼 이 책을 통하여 우리 선조의 고귀한 정신과 문화재의 소중함을 배웠으면 하는 바람이 이 책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조금이라도 접근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 如        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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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에서 다비까지
병진 지음 / 문이재 / 2002년 2월
평점 :
품절


  책 하나 만드는것이 결코 쉽지 않다. 원고가 마련이 되어도 책의 구성을 논해야 하고, 차례와 순서를 정하는 일도 그리 만만한 일이 못된다. 그런데도 어느 스님의 지독한 열정으로 200여 페이지의 책이 단 보름만에 만들어져 출간이 되었으니, 어찌 인간의 하고자 하는 의지를 막을 수 있을소냐....

  이 책은 불교의 종단중 가장 큰 종단인 조계종의 종정(宗正) 혜암(慧菴) 대종사의 급작스러운 열반 소식을 접하고 해인사로 달려간 한 스님이 열반이후부터 다비까지의 각종 장의진행 절차를 사진으로 담은 것으로 일반인들은 다비(茶毘)라는 장의 절차를 본다는것은 힘든 일이며, 불교에서도 위대한 스님이 아닌 보통 스님의 열반시에는 일반 절차에 따르지만 나름대로 소위 고승이라고 불리는 스님들의 열반시에는 대규모의 장례행사를 치루는데 혜암 큰스님도 불교계의 고승으로 대규모의 장례를 치루게 되었으며, 이런 대규모의 장의 행사를 '병진'스님이 사진으로 찍고 글을 써서 출간한 것으로 장례의 준비단계부터 사진이라는 기계로 다비까지의 7일간을 기록한 자료이며, 불가에서 말하는 '다비'의식의 절차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열반이란 '생'과 '사'의 인연의 고리를 끊는 것이다. 혜암 큰스님은 2001년 마지막날 가야산 해인사에서 열반에 드셨다. 오전 10시 가야산의 을씨년스러운 겨울 모습속에 열반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퍼지면서 장의 준비가 시작된다.  이 책에는 제 1장에서 생전의 혜암스님이 정진하던 거소를 먼저 보여준다. 그리고는  제 2장은 혜암스님의 입적 소식을 듣고 해인총림으로 모여드는 스님들과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해인사는 불법인 대장경을 모신곳으로 法寶寺刹로 수많은 스님들이 이곳에서 경을 닦고 전국으로 퍼져 나갔기에 더위에 지친 사람들이 그늘을 찾듯 그들은 서둘러 거룩한 스승이 계시던 해인사를 찾는 것인데, 이런 제자들의 귀환 모습을 사진에 담고 있다.  상좌 스님들이 호주의 역할을 하고 제방의 스님들은 절간에 발을 들여 놓기가 무섭게 분향소를 찾아 예를 갖춘다.

 제 3장은 '산자와 사자의 공양'으로 절간을 찾는 많은 스님들을 비롯한 조문객의 식사를 준비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일반 가정에서의 상차림과 특별히 다를것이 없으나 산중 사찰에서의 식사는 그 절차나 분위기마저도 엄숙하다. '병진'스님은 이런 모습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제 4장은 '이별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주제로 하고 있다. 이는 장례행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분주한 모습과 그 분주함 속에서의 정성스러움을 구석진 곳까지 카메라를 들이대고 기록하고 있다. 명정과 만장을 써야하고 대나무로 만장의 깃대를 만들어 세워야 하며, 한편에서는 영결식장 준비에 여념이 없다. 아직 극락으로 가는 배를 만들지 못했음에도 망자는 어찌 그리 편안하고 즐겁게 잠 만 자고 있는가? 꽃으로 장식된 상여를 만들기에 여념이 없는 모습을 담고 있다.

  제 5장은 '연꽃으로 피어난 다비단'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다비단이란 열반한 스님의 사체를 불태우는 단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다비단의 제작은 지극정성을 들이기에 일반 공개를 하지 않는데 저자인 '병진'스님은 한마디로 스님이라는 직권을 남용하여 다비단의 제작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그런데 실은 이 다비단의 제작 과정은 대단히 중요하다. 겉으로 보아서는 연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일반인이 이용하는 장제장의 형태를 모두 갖추어 연꽃속에 숨겨야만 다비가 가능하기에 연꽃속에는 우선 장작이 차곡차곡 쌓인다. 다비중에 불붙은 나무가 흐트러지지 않게 굵은 철사로 영글게 묶으며, 그 나머지 공간은 나비장으로 틈새가 없게 만든다. 마른 나무는 안쪽에 숯과 같이 넣고 바깥쪽은 젖은 나무로 나무 광(壙)을 만들고 그 촘촘히 쌓인 나무 광 둘레에 이엉을 잇는다. 이엉을 이은 후에는 온통 흰 천으로 뒤덮어 하얀 남골당을 만들고 그 바깥쪽 아랫부분부터 수십만개에 이르는 연잎을 하나 하나 일일히 풀칠하고 붙여가며 하나의 커다란 연꽃이 만들어질 때 드디어 다비를 위한 연꽃이 피어나는 것이다.

 제 6장은 '영결식'편으로 고인이 살아있는 사람과 마지막 이별을 하는 절차입니다. 평시에 혜암스님은 장례행렬에서 "수많은 죽은 사람들이 1사람의 산 사람을 따라가노라"고 하였는데 정말, 한 사람의 죽은 자를 위하여 누가 망자이고 누가 살아있는 사람인지를 구분할 수 없는 그런 영결식이 치뤄진다. 제 7장은 '누가 불타는 집에 있는가?'라는 제목으로 다비의 모습을 담고 있다. '세상은 항상 불타고 있으며 그 대들은 항상 암흑속에 있으면서 왜 빛을 구하려 하지 않는가?' 라는 물음을 던지는 다비는 죽은자의 무덤을 불태우는 것으로 불길이 다으면 죽은자의 집은 화택(火宅)으로 변한다. 그 불길의 날름거림은 하늘로...하늘로 올라 텅빈 공간속으로 사라진다. 그러기에 스님들은 '無'를 말하며 평생을 '空'으로 사는가?

  달도 자고, 바람도 자고 밤이 깊어가면 이제는 하나 둘 산문을 찾았던 조문객들도 성긴 걸음으로 발걸음을 재촉하여 먼 길을 돌아간다. 신 새벽이 다가오면 다비단은 마지막 불길로 길게 용트림을 한다. 아침이 밝아오면 사그라진 다비단 속에서 스님이 남긴것을 찾는다. 그것이 바로 사리(舍利)다. 부처의 다비후 8만 4천개나 나왔다는 영롱한 사리는 살아 생전 스님이 불심을 마음속에 새기며 정진한 결실이라던가?  평소에 인간으로 태어나 사바세계에서 보여주던 혜암스님의 모습이 아닌 참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이리라....

  이렇게 7일간의 장의는 끝났다. 이 책의 뒤쪽에는 영결식 자료인 열반송과 추도사, 그리고 영결식 절차에 관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일반적이지 않다. 돌아가신 큰 스님의 장례절차와 이러이러한 추도사가 있었다는 기록에 불과할 것이다.

 이 책을 만든 '병진'스님은 한 마디로 대단하다. 스님으로서 "장례의식을 사진으로 남겨야겠다"는 발상의 전환이 보기 드문 절집의 장례과정을 담은 한권의 책으로 만들어지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 동안 몇 분의 큰 스님들이 열반에 드셨음에도 이런 세세한 모습을 담은 자료집은 없었다. 이 책이 특별하게 잘 만들어졌다거나 일반인의 시각에서 관심을 끌만한 대목은 하나도 없으나 절집 식구들에게는 말로만 들어오던 큰 스님의 다비의식을 한권의 책을 통해서 알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며, 겸하여 우리 문화의 오랜 영역을 차지하며 면면히 내려오는 불교의 다비의식을 기록으로 남겼다는데 그 가치와 의의를 찾는다 할것이다.

                                                                               < 如        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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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 2004-11-07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병진스님께서 여러면에서 대단한 스님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셨군요. 다비식 사진도 수준급이시구, 내용도 볼만하더군요. 제가 가까이에서 자주 뵙기 때문에 저역시 병진스님의 화승으로서의 그릇을 알고 있답니다.

미술사나 미학에 대한 부분에 일반인학자(교수들)보다 넓은 식견을 가지고 계신분이시기도 하죠. 오늘도 아름다운(미)에 대한 토론에서 기염을 토하셨답니다.

동서미학과 미술사를 모두 섭렵하시고 승려로서 경에대학 지식까지 해박하시니 아름다움(미)의식에 대한 명쾌한 답을 쉽게 끌어내시더군요. 오늘의 한마디는 미술계를 이끌어나가는 선각자들의 존재경향적 관념(제행무상)에 의해 아름다움이 가꾸어 진다면서 우현 고유섭선생님도 미에대한 정확한 결론은 내리지 못했다는 말로 결론을 대신했답니다.

수수께끼 2004-11-07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움에 대한 해답은 없습니다. 부처님은 제자 가섭에게 변을 가르키시며 '저것이 무엇인가?'를 물으셨고 제자의 모른다는 물은에 "꽃이로다"는 말로 응답을 해 주셨습니다. 병진스님의 미에 대한 결론은 단순한 선념적 사고에서의 판단으로 보여지며 각양각색의 주관속에서 미의 기준 또한 각자의 고유한 영역으로 획일화 될 수 없는 것이며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우현선생은 섣불리 미에 대한 결론을 단정짓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내가 주장하는 미의 본질이 네가 주장하는 미의 본질과 다를것임에 섣불리 내가 미의 개념을 정념하는것은 너의 미적 개념에 혼란을 초래하는 것이다"는 말에서 처럼 미란 선각자들이나 예술가의 관념적 접근과는 다른것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다만, 미란 아무것이나 아름답다고 하므로써 개념의 혼란과 남발을 방지하기 위한 미학이라는 학문을 통하여 외재된 형태미를 통한 내재적 잠재미의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정답을 논할수는 없으나, 자칫 남의 미에 대한 관점과 관념속에 스스로의 미에 대한 개념이 와해되고 있지 않은가를 경계할 필요성도 있습니다.

수련 2004-11-09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움에 대한 해답이 있을리 있겠습니까? 미 라는 한자어 자체가 추상적 이 잖아요~~미술을 그리고 미술을 가르쳐도 미는 동그라미예요.
 
영혼의 여정 - 조선시대 불교회화와의 만남
국립중앙박물관 엮음 / 국립중앙박물관 / 2003년 8월
평점 :
품절


 절집을 찾으면 스님이 거주하는 요사채를 제외한 모든 불당(佛堂)에는 불화가 있다. 종류도 다양하지만 등장인물도 매우 다양하여 어지간히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냥 알록달록한 그림이라 치부하고 지나쳐버리기 딱 알맞습니다.  더구나 신도가 아닌 관광객으로 사찰을 방문하는 이교도들의 눈에는 마치도 무당집으로만 비쳐질 것이다.

 이 책은 2003년 9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특별전으로 전시되었던 불화전의 도록이다. 양산 통도사와 김천 직지사의 성보박물관에 보관, 전시중이던 불화들과 남장사, 해국사의 불화, 그리고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중이던 불화중에서 조선시대의 불화를 전시하며 "영혼의 여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불화를 "영혼의 여정"이라고 이름붙인것은 불교적 교리의 '윤회'의 의미를 말하기도 하지만, 불화에서 보여주는 다양한 세계를 한 마디로 정의한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에서의 죽음이란 또 다른 삶에 이르는 하나의 과정이기에 그 광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일들, 즉 저승사자에 의하여 이승에서 심판을 받으며 업보에 따라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을 불화에 담고 있으며 가장 성스러운 탄생인 연화생(蓮花生)의 모습까지도 표현하고 있다.

 도록중 도판은  '지옥' , '극락을 향하여','수행과 염원'이라는 세 개의 소주제로 나누고 있으며 논고로는 김승희, 정명희, 문동수, 천주현 등의 불화에 대한 연구 논문과 보존처리 조사보고서가 첨부되어 있다. '지옥'편에서는 인간이 이승을 떠나 저승사자의 손에 이끌려 저승세계의 왕들에게 나가서 살아생전의 업보에 대하여 심판을 받고 죄중에 따라 다양한 처벌을 받는다. 지옥에는 10명의 왕이 있어 이 왕들 앞에서 죄질에 따라 문초를 당하며 이승에서의 업보에 따르는 고초를 겪게 되는데 이러한 절차를 묘사한 불화가 바로 시왕탱(十王幀)이다. 이 시왕탱화는 모두 10명의 왕이 벌하는 모습을 담고 있는데 벌을 받는 인간의 모습은 제각각의 형벌대에서 고통과 낙담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불화는 현생을 사는 인간들에게 나쁜 업보를 쌓으면 죽어서도 무서운 형벌을 받으니 착한 일을 하라는 교훈적 의미를 담고 있다 할 것이다.

 '극락을 향하여'편에는 '지옥'을 거쳐 새롭게 태어나는 구제된 인간이 극락을 향하여 자력과 타력의 수행을 통하여 화엄세계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가 갖는 원융(圓融)의 상징적 체계로 나타나며 지옥과 극락이 분리된 세계가 아닌 하나의 여정임을 감로탱(甘露幀)을 통해서 알수 있다. 이 불화는 영혼의 여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감로탱에는 여래와 보살, 지장과 관세음보살등 구제와 관련이 있는 불보살들이  영혼을 맞이하며 영혼의 여정을 이끄는 불보살의 주변에는 긴 구름의 꼬리가 하늘로 뻗어 천상의 세계, 극락정토에서 하강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지옥과 지상, 천상은 하나의 유기적인 순환체라는 것을 조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감로탱에서는 구제와 자비를 수행하는 불보살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는 감로, 즉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르면 어떤 대상에 대한 구별이 없는 만인평등의 구제임을 나타내고 있다.

 '수행과 염원'에는 인간의 윤회를 마무리 짓는 극락정토에서의 안착을 위한 수행의 길을 보여주고 있다. 이 수행의 길은 모든 업보를 참회하고 고집멸도(苦集滅道)를 깨달아가는 어렵고도 먼 길을 그리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죽은자의 여혼을 위로하고 극락왕생으로의 인도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사찰에 불화를 모셨다. 이렇게 하므로써 망자가 지옥으로부터 구제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의 소산물로 불화가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도록의 도판은 우선은 전체 사진을 싣고, 중요한 세부 사진은 확대하여 상세히 설명하고 있으나 도록이기에 보여줄 수 있는 여건의 제한임을 느낄 수 있다. 사실, 불화를 감상함에 있어 그 세부 묘사에 대한 자세한 감상은 필수조건임에도 도록이기에 어쩔 수 없는 제한된 공간에서의 만남이라는 안타까움을 담고 있다. 그러나 비교적 세부묘사의 중요성이 인정되는 지옥도는 인간의 형벌모습을 확대하여 담고 있다.

 券末부록에는 불화의 아랫쪽에  명기된 화기(畵記: 화기에는 누구를 위하여 누구의 발원에 의하여 초본은 누가 그리고 화공은 누구였으며, 언제 그렸다는것 등등이 담겨있다)를 싣고 있는데 이 화기는 불화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 작자를 알 수 있는것은 물론이고 왜 불화를 그리게 되었는가에 대한 내용...그리고 가장 중요한것은 아직까지 정립되지 않은 화승(畵僧)의 계보를 파악하는 중요한 사료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비록 전시회는 한 달 남짓으로 끝났고 불화는 원래 불화가 걸려있던 사찰에 가면 다시 볼 수 있게되었지만 불화에 대하여 상세한 내용을 몰랐던 사람들에게는 도록이지만 절간에 걸려있는 불화에 대한 대략적인 조형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그 가치를 담고 있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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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4-11-11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 수원 용주사로 탱화기행을 갔어요. 원래는 브라이언 배리 선생님과 같이 가기로 했는데, 그만 일정이 어긋나는 바람에 문외한끼리 코끼리 다리 더듬느라 우스웠지요. 그러고보니 용주사 탱화가 김홍도 작이냐 아니냐에 대한 님의 의견도 듣고 싶네요.

수수께끼 2004-11-11 1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용주사 후불탱화는 양분된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탱화 기법은 일반적인 동양화와는 다소 다른데 용주사 탱화가 서양화와 같은 음영기법을 적용한 최초의 작품 운운합니다. 탱화의 아랫부분에 보면 중앙에 붉게 경명주사로 마련된 공간이 있는데 이곳에 화기(畵記)를 기록합니다. 화기는 그림을 완성하고 마지막에 쓰는것이라 '발미'라고도 합니다만, 이 탱화는 발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탱화의 기법은 소위 보카시기법(태서법)을 사용하여 인물의 얼굴 표현등을 입체감이 살도록 한 그림인데, 그림의 잘잘못이나 또는 교리상의 도상형식이 맞는가 보다는 주로 김홍도의 작품이 맞다...틀리다로 논쟁이 일지요... 참으로 이 문제에 대해서 어느것이라고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화가는 어떤 그림에서 "평생 단 한번"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소설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처럼 단 한편만 남을 수 있지만 그림은 유사한 여러 그림을 그려야만 접근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따라서 이 탱화는 저로서는 딱 잘라 김홍도의 그림이 아니라고 말씀드립니다. 양식이나 접근방법에서 전혀 김홍도의 작품세계를 접할 수 없음에 문제가 있기도 하지만 일반 기록(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 나타난 내용을 확대해석하여 김홍도의 그림으로 판단하는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조가 김홍도를 용주사에 머물게 하였고, 또 "부모은중경"을 그리고 목판에 새긴것은 사실이나 김홍도의 감독하에 조성된 탱화가 반드시 김홍도가 그렸다고 말할 수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 그림에 관해서는 1편의 논문도 있는데 잘 모르고 논문을 본 분들은 김홍도의 그림으로....그러나 탱화에 대해 제대로 아는 분들은 아닌것으로 판단하고 있다는 말씀을 첨언합니다...김홍도의 그림으로 알려진것은 대웅전 바로 뒷편의 시방칠등각에 있는 3개의 탱화중 가운데 탱화도 있는데 화법이 상당히 다름을 알 수 있답니다......답변이 되었는지요?

수련 2004-11-11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탱화작품은 어느것을 막론하고 한사람이 그렸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특시 조선시대는 주로 궁실화가들이 왕실원찰의 탱화를 그렸습니다. 그 당시에 김홍도 역시 조선시대 도화서 화원중의 높은 직책에 있었던 한사람으로서 용주사 후불도제작시 도편수로서 탱화의 일부를 제작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조선시대와 구할말의 모든탱화들이 화승들이나 도화서 화원들의 팀웍에 의하여 제작된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에 제 의견으로는 김홍도가 용주사 후불탱화와 전혀 관련이 없다고는 볼 수 없고 도편수로서 작품제작의 감독정도로 도화서의 합동작이였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불화제작에 임하는 사람들은 각기 재능에 따라 초를 잘내는 사람, 바름질을 잘하는 사람, 영락을 잘꾸미는는 사람 등 이 있었고 현재도 그 전통은 이어지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저는 수수깨끼님께서 말씀하신 딱잘라라는 말에는 이의를 제기하고 싶군요.

하지만 화기가 없으니 모든 말들은 추측에 불과하겠죠.

수수께끼 2004-11-12 0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탱화 제작에 있어 말씀하셨듯이 화기의 연화질에 기록된것과 같이 많은 화승이나 화원이 그리기도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답니다.
의외로 한분이 제작한 탱화가 많이 있습니다. 금호당 약효스님도 그랬고, 정연스님도 혼자서 제작하신 작품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물론, 보응도 마찬가지입니다.이런 내용은 "한국의 불화" 전집의 뒷편에 있는 화기편을 자세히 읽어보신다면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또 1800년대에 활동하셨던 홍안스님은 대부분의 작품을 혼자 그리셨습니다. 대부분의 경우라기보다는 탱화를 작업하시는분들의 성향도 불화를 제작함에 있어 많이 좌우된듯 보이며, 저같은 경우라도 혼자 제작을 할 것입니다.왜냐하면 단순히 그리기만을 위한 작업이 아니라 교리적 내용을 녹아들게 하려면 자신이 불화 제작의 기능을 가졌다면 다른 사람의 힘을 구태어 빌리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랍니다.

말씀하신대로 김홍도는 용주사의 탱화제작에서 총책임을 맡았는데(이럴때는 도편수라고 하지 않습니다. 도편수는 영화 감독 같은 것이고 용주사에서의 김홍도의 역할은 제작자...정도입니다) 다만 책임을 맡았을 뿐이며 제작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왕실 화원의 특성상 "단원"이라는 낙관이 들어가는것은 필수임에도 화기조차 없다는 것은 이 작품이 김홍도의 작품이라는데 많은 의문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서양의 기법 운운하지만 실제 그 당시에 바름질이라는 태서법이 들어왔는가에 대한 의문으로 인하여 현재 용주사 탱화의 제작시기마저도 모호한 입장이며 일부에서는 그보다 더 늦은 시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보기도 합니다. 어떤 시대에 변화나 발전의 과정을 보이지 않으며 유일하게 나타나는 형태나 양식을 그 시대의 작품으로 평가한다는것은 상당한 위험을 가져오기에 용주사의 후불탱화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어 그냥 김홍도가 그렸다는 이야기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은중경'은 분명히 왕의 분부를 받들어 그렸고, 목판에는 다른 목공장이 각인을 하였기에 김홍도의 작품과 다를바가 없다 할것이나 엄밀한 의미에서는 김홍도는 밑그림을 그린 것이며, 판각은 목조각장이 한것으로 구분을 해야 할것입니다.

balmas 2004-11-12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주문하려고 봤더니 품절이네요.

다른 데서 주문해야지 ...

수수께끼 2004-11-12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크!! 발마스님...제가 말씀드린대로 제가 읽는 책은 그리 많이 팔리지를 않나봅니다. 몇 권 가져다 놓았다가 팔리면 그만이고 그런 책들인지 번번히 발마스님이 찾으시는 책은 없군요...제가 그 빌미를 제공했으니 구해서라도 드려야 하는데...거참...문제네요...

조선인 2004-11-13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알라딘에 와봤더니 이처럼 자세한 이야기가 논해지고 있군요. 김홍도작이냐 아니냐라는 지엽적인 궁금증을 가진게 무색해집니다. 사실 용주사 기행은 여러 모로 속상한 경험이었습니다. 회사일로 차일피일 미룬게 벌써 1달이 다 되어가네요. 후기 올리면 꼭 한말씀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

참, 발마스님, 지난달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팔고 있는 걸 본 적 있어요. 알라딘이나 웬만한 서점에서 다 품절로 나오는 도록도 박물관에서는 꽤 찾아볼 수 있더군요.

수수께끼 2004-11-14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국립중앙박물관에는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은 중앙박물관이 폐관을 했기에 차라리 국립민속박물관에 가시면 구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리고, 김홍도는 당시 화원의 수장으로 '화성능행도'등을 제작하기 위하여 정조를 따라 융건릉에 자주 갔었습니다. 역대 조선의 임금중 가장 많이 화원들을 활용하여 그림을 남긴 임금이 정조임금으로 조선왕조실록에는 한달에 일곱차례나 화성에 행차를 했던적이 있었다 하니 그 수 차례의 능행을 보고 그림을 그린 왕궁 화원의 노력으로 "화성능행도"가 만들어진것입니다. 김홍도作이냐는 문제에 있어서는 단지 화원이라고 해서 불화를 그리지 않았다고는 볼 수 없겠으나 한편으로는 화원이기에 불화를 그렸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것은 왕의 발원에 의하여 그린 불화에는 발미(화기)가 반드시 있어야함은 물론이고 그 내용중에는 왕의 발원에 의하여 그렸다는 내용이 반드시 포함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많은 불화중에는 임금, 또는 왕비나 대왕대비의 발원에 의하여 그림을 그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부모은중경"의 판본에도 누가 그리고 누가 판각을 했다는 내용이 전혀 없어 김홍도가 그렸다는 것에 대하여 의문을 갖기도 하지만, 새겨진 글씨의 서체로 보아서는 김홍도의 필체로 판단이 되기에 김홍도가 그렸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며 이런 불명확함으로 인하여 대웅보전의 후불탱화가 수차례의 문화재위원회의 심의에서 국가지정문화재로 등재되지 못하였으며 "부모은중경판" 또한 국가지정문화재에 등재되지 못하고 경기도유형문화재 제 17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조선인 2004-11-15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웅... 그건 좀 이상하네요. 김홍도작이어야만 국가지정문화재가 될 수 있는 건가요? 아니면 화원의 그림이어야 한다는 뜻인가요? 예술적 완성도 이외에도 그런 변수가 작용할 수 있다니 몰랐습니다.

수수께끼 2004-11-15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죄송합니다. 오해의 소지를 남긴것 같군요. 국가지정문화재의 지정조건이 몇 가지 있습니다. 문화재보호법 제 2조의 정의에는 "자연적,인위적으로 형성된 국가적, 민족적, 세계적 유산으로서 역사적,예술적, 학술적, 경관적 가치가 큰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회화는 제1항에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 가치가 큰것과 이에 준하는 고고자료"로 유형문화재로 명시되어 있습니다.또한 국보로 지정되기 위한 위원회의 규정도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들을 종합하여 문화재위원회에서 국가지정문화재로의 등재여부를 결정합니다. 물론, 결정전에는 문화재 조사위원의 선행조사와 문화재전문위원의 학술적 조사를 거치게 됩니다.

용주사의 후불탱화는 기법상에 있어서는 다른 불화에서는 찾을 수 없는 특색은 갖추고 있으나 제작시기나 제작자 등등 제반 요건을 갗추지 못했기에 지정이 쉽지 않은 것입니다. 참고로 말씀을 드리자면 안성의 '쌍미륵사'라는 사찰에 고려초에 제작된것으로 여겨지는 미륵불 2개가 있는데 보물 지정을 위한 여러차례의 위원회가 개최되었었으나 계속 보류가 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는 명확한 문헌자료가 없어 소홀히 그 형태나 양식만으로는 지정을 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어제 제가 그 사찰에도 다녀왔습니다만, 이 사찰은 미륵불을 주불로 하는 '법상종'의 본사인만큼 미륵불에 대한 가치가 어떻게 나오는가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고, 두 개의 미륵불에 대한 조사를 제가 했었기에 저도 지정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말씀하신것처럼 김홍도가 그려야만 국가지정문화재가 되는것은 아니며 국가지정문화재의 요건이 매우 다양하다는 것을 말씀드리며, 예전의 '별황자총통'의 경우처럼 잘못 지정하여 망신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라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조선인 2004-11-15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항, 설명 잘 들었습니다.

balmas 2004-11-18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수수께끼님, 조선인님, 이 책을 다른 서점에서 구입했답니다.

그런데, ㅋㅋㅋ 책 맨 앞에 나온 저승사자 그림을 보고 너무 웃었어요. 저승사자 콧구멍에 삐져나온 코털들을 봤기 때문이죠. 다른 그림들에는 없는데, 유난히 저승사자 그림에만 코털들이 그려져 있네요. 저승사자가 너무 바빠서 코털 소제할 시간이 없어서 그런 건가요, 아니면 다른 심오한(??) 뜻이 있는 건가요?^^

정말 지엽적인 질문이라, 좀 쑥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궁금한 건 어쩔 수 없네요.^^;;;

수수께끼 2004-11-19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녜...지옥도에서 인간을 붙잡아 10대왕 앞에 꿇어 앉히는 역할을 하는 저승사자가 다소 무섭게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사실, 10왕탱을 보다보면 여러가지 형벌의 형태를 알 수 있습니다. 육시를 하는 장면과 뜨거운 기름솥에 들어가서 고초를 당하는 장면, 침이 돋아난 벌판에서 뱀에게 쫒기는 장면 등등 인간이 이승에서 저지를 죗가를 받는 장면은 매우 다양합니다. 말씀하신 저승사자의 콧털은 저 자신도 별도로 연구를 하지 않았던 부분이라 다소 당황을 하게 되는데 제 생각에는 콧털의 의미는 다소 과격하고 무식한 이미지의 상징이 아닌가 합니다. 적어도 저승사자라면 이승에서 죄를 많이 지은 사람들을 붙잡아 가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선비처럼 얌전한 모습이라면 어울리지 않을것 같습니다. 각종 흉악범도 있을것인즉 그들을 저승으로 끌고가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위엄이 있어야 하고 조금은 무서운 표정이 필요할 것입니다.

책자에 나와 있는 그림을 보시면 10대왕 앞에서 심판을 받기 위해 끌려 온 사람들을 관장하고 있는 저승사자의 얼굴 표정이 무조건 위압적이지는 않습니다. 죗가가 적은 사람들을 끌고 온 저승사자는 그나마 덜 무서워 보일겁니다. 옛날 사람들은 그림을 그리면서 이렇게 세부적인 모습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던것 같습니다.

balmas 2004-11-20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힛, 수수께끼님,

질문 같지도 않은 질문에 이렇게 길게 답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책은 정말 재미있고 유익하게 보고 있습니다. 좋은 책 소개해주셔서 한번 더

감사드려요. 추천이 한 번뿐인 게 좀 아쉽네요.^^

수수께끼 2004-11-21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구...발마스님...질문이 아무리 하찮다해도 궁금증에 대한 풀이 욕구가 바로 지적욕구 아니겠어요? 하하하...그나저나 제 서평이 직접 책을 보셨을 때 '엉터리 서평이로군!'이라고 하실까봐 겁이 나고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언뜻 보니 리뷰에 대한 리뷰도 쓸 수 있었던것 같은데...혹여 비전문가실지라도 리뷰를 한번 써 주신다면 좋은 참고가 될것 같습니다.....
 
자연속의 인간:반딧불이는 별 아래 난다
신유항 / 랜덤하우스코리아 / 1998년 5월
평점 :
품절


  가을이 깊어가며 하늘에는 고추잠자리가 어지럽게 비상을 한다.  하늘마저도 잠자리의 비상과 자유로운 비행을 보장하려는듯 높이 높이 올라가 있는 계절....낮에는 이리뛰고 저리 뛰는 메뚜기와 잠자리...그리고 밤에는 어디에선지는 모르지만 찌르륵~ 거리는 귀뚜라미가 가을의 정취를 물씬 쏟아 낸다. 계절을 만들어가는 곤충은 늘 우리와 함께했음에도 우리는 그런 사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지 못했었는데 떨어지는 낙엽의 아름다운 빛깔속에 푸르름을 안고 움직이는 여치 한마리를 마주한다.  불현듯 잊었던 과거로의 추억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불쑥 솟는것을 느낀다.

  이 책은 중앙M&B에서 시리즈로 출간한 "책으로 보는 자연다큐멘터리"중의 하나인 '자연속의 인간-곤충'편이다. 저자는 곤충학회 이사인 경희대 신유항 교수인데, 이 시리즈의 책이 늘 그렇듯이 이 책도 역시 보기 좋은 도판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책을 펼치면서 시원스럽게 펼쳐지는 도판을 보노라면 기분마저도 자유스러워진다. 이 책은 예전에 구입한 직후 부담없이 읽었던 책이었는데, 얼마전 골프를 할 기회가 있어 필드를 찾았을 때, 그린 주변에 여기 저기에 힘없이 나뒹구는 여치들의 모습을 보면서 다시 한번 자세히 읽게 되었다.

  골프장의 여치는 죽지는 않았지만, 전혀 날거나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울음소리는 고사하고 짧은 삶마저도 풍전등화인 여치는 골프장에 뿌려대는 농약으로 인한 마지막 몸부림을 치는 것이었는데 여름 동안 알차게 섭취해서인지 검자손가락 만한것이 제법 살이 올라있었다. 그런데, 농약을 뿌려대는 사람들은 입에 하얀 마스크를 쓰고 농약을 분무하지만 자신들이 목표로 삼는것 이외의 다른 폐해에 대하여는 얼마나 관심을 가질까?  가만히 주변을 살펴보니 여치뿐이 아니다. 어렷을 때 논에서 푸드득 거리며 날아다니던 것들을 잡아 강아지풀에 엮어서 구워먹었던  벼메뚜기도 보이고, 매미, 풍뎅이, 장수하늘소 등등의 곤충이 여기저기서 바드둥거리면서 마지막 숨을 할딱거리고 있었다. 일부러는 아닐지라도 인간만을 위한 행위에 이렇게 수 많은 곤충들이 그 짧은 생을 버려야만 하는 것이다.

  이 책은 이렇게 인간에 의해 사라지는 곤충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 있다. "풀과 나무와 새와 곤충과 물고기가 빠저나간 공간에 무엇을 대신해야 그들만큼 아름다울지..."라는 말은 사라지는 곤충에 대한 안타까움이 다 담겨있다 할것이다. 정말, 우리 주변에 늘 함께했던 그들이 빠져나가버리면 무엇으로 그들이 존재할때의 아름다움을 대신할 수 있을까?  저자는 이 책에서 주변에서 흔히 만나는 곤충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며, 사라져 가는 곤충들을 애정어린 눈으로 바라봐 주기를 당부하고 있다. 그리고 저자는 그런 방법이 곧 자연사랑이며 우리의 삶의 질 향상에 이바지하는 길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모두 6개의 꼭지로 짜여진 이 책은 이 시리즈의 모든 것이 다 그렇듯이 마지막장은 앞으로의 과제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 대안에는 필수 불가결하게 이루어지는 개발속에서의 보존 방법도 제시를 하고 있어 발전속에서도 곤충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방안을 논하고 있는 것이다.

제 1장은 곤충과 우리 문화의 관계와 곤충의 탄생, 그리고 번식에 관한 비밀을 담은 "귀뚜라미가 우는 나라"로 꾸며져 있다. 옛부터 우리 조상들은 늘 곤충과 함게 했음을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저자의 마음이 담겨 있다. 제 2장은 "곤충으로 가득한 세상"이라는 주제로 우리 땅에 서식하는 곤충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곤충, 그리고 곤충 기네스를 담고 있어 곤충에 관한 흥미를 돋우고 있다. 세계의 84만 곤충중 우리나라에는 만 천여개의 곤충명이 있음을 알려주며, 새 보다 더 큰 곤충인 골리앗큰뿔꽃무지에 대해서도 알려주고 있다.  제 3장에서는 곤충의 모양에 따라 붙여진 이름을 알기쉽게 설명하고 있다. 생긴 모습대로 이름이 붙여진 호랑나비를 비롯한 곤충들의 생태를 알 수 있도록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제 4장은 "신비한 생의 질서"편으로 곤충이 어떻게 종족보존을 위하여 짝짓기를 하는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곤충이 짝짓기를 통하여 어떤 탈바꿈의 과정을 거치는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바로 탄생의 비밀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여기에는 곤충들간에 짝을 찾는 방법에 대해서도 설명을 하였는데 이러한 설명은 가을밤에 우리 귓가에 들려오는 곤충의 울음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게 해 준다.  제 5장은 생존을 위한 곤충들의 위장술을 중심으로 적과 마주쳤을대 내뿜는 페로몬이라는 물질의 성분에 대한 분석이 담겨 있다. 생존을 위한 싸움에서 이겨나가야 하는 곤충이 가지는 능력을 우리는 "거품속에는 거품 벌레가 있다"라는 부제가 붙은 이 장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매년 230여종의 새로운 곤충이 발견되고 있다고 한다. 그런 반면 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자취를 감추는 종도 수없이 많음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수년전...충남 청양의 장수하늘소 집단 서식지가 발견되었다는 보도가 나온후에 그 서식지가 황폐화 되었다는것은 사람들의 보존 의지보다는 궁금증에 의한 훼손이 더 심하다는 것을 말하는 좋은 사례라고 할 것이다. 메뚜기때가 날아들어 광활한 평원을 순식간에 폐허로 만드는 이유도 호르몬에 의한 군서상 메뚜기로의 변화라는 저자의 말 처럼 곤충은 비록 그 하나의 자체로는 미약하지만 집단으로 뭉쳤을때는 엄청난 파괴력을 지닐 수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런 군서상에 관한 내용은 영화등을 통해서도 알려져 있어 곤충을 하나의 괴기물로 인식하도록 인위적으로 유도되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곤충은 우리 곁에 늘 머물고 있다. 잠시 관심을 두지 않아서 그렇지 곤충은 늘 우리 주변에서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곤충이 우리 곁에 머물러있지 못할 환경만 제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곤충이 우리 곁을 스스로 떠나는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을 떠밀듯 내 쫒아버린것은 아닌지 반성을 해 볼 단계이다. 늘 우리와 함께 했던 정다운 곤충들이 물러난 자리에는 2억년 이상을 살아온 바퀴벌레가 대신하고 있다. 그리고 삶의 터전을 빼앗긴 개미들이 인간을 물며 보복을 하고 있다. 구태어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목청을 돋을 필요는 없다하더라도 풀섶이 성긴곳에는 아직도 우리곁에 함께 했던 곤충들이 언제 다시 가까와 지기를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다.

 가을 밤...맑고 또렷한 초승달 아래서라도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를 듣노라면 삶에 찌든 때도 말끔히 씻을수 있지 않을까? 오늘만큼은 퇴근후에 무심코 스쳐가지 않고 가을숲에서 귀뚜라미 소리라도 들어보련다...

                                                                         < 如           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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