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팥죽(멥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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팥죽(새알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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팥죽(새알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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팥호박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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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지의 어원

동지는 24절기의 하나로서 일년 중에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입니다. 24절기는 태양력에 의해 자연의 변화를 24등분하여 표현한 것이며, 태양의 황경이 270도에 달하는 때를 '동지'라 고 합니다. 동지는 음력 11월 초순에 들면 '애동지', 중순에 들면 '중동지', 그믐께 들면 '노동지'라고 하는데, 이는 동지가 드는 시기에 따라 달리 부르는 말입니다.


2. 동지의 유래

동지는 일년 중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길어 음(陰)이 극에 이르지만, 이 날을 계기로 낮이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여 양(陽)의 기운이 싹트는 사실상 새해의 시작을 알리는 절기이며. 중국의《역경(易經)》에는 태양의 시작을 동지로 보고 복괘(復卦)로 11월에 배치하였습니다. 따라서 중국의 주(周)나라에서는 11월을 정월로 삼고 동지를 설로 삼았는데 이러한 중국의 책력과 풍속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옛 사람들은 이날을 태양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날로 생각하고 경사스럽게 여겨 속절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동지를 신년으로 생각하는 고대의 유풍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전통사회에서는 흔히 동지를 '작은 설'이라 하여 설 다음 가는 경사스러운 날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옛말에 '동지를 지나야 한살 더 먹는다' 또는 '동지팥죽을 먹어야 한살 더 먹는다' 라는 말이 전하기도 합니다.


3. 동지의 풍속

중국의《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의하면 "공공씨(共工氏)의 재주 없는 아들이 동짓날에 죽어서 역질(疫疾)귀신이 되었는데, 그 아들이 생전에 팥을 두려워하여 팥죽을 쑤어 물리친 것이다"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은 다분히 후대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야기로 팥죽의 축귀(逐鬼) 기능에대한 유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동지팥죽이 절식이고, 팥은 붉은 색 깔을 띠고 있어서 축사(逐邪)의 힘이 있는 것으로 믿어 역귀(疫鬼) 뿐만 아니라 집안의 모든 잡귀를 물리치는데 이용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점은 음양사상(陰陽思想)의 영향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즉 팥은 붉은 색으로 '양(陽)'을 상징함으로서 '음(陰)'의 속성을 가지는 역귀나 잡귀를 물리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경상도 지방에서는 팥죽을 쑤어 삼신·성주께 빌고, 모든 병을 막는다고 하여 솔잎으로 팥죽을 사방에 뿌리는 풍습이 남아 있습니다.

또 경기도 지방에서는 팥죽으로 사당에 차례를 지낸 후, 방을 비롯한 집안 여러곳에 팥죽 한 그릇씩 떠놓기도 합니다. 한편 지방에 따라서는 전염병이 유행할 때, 우물에 팥을 넣으면 물이 맑아지고 질병이 없어진다고도 하였습니다. 한편으로 동지에는 동지팥죽과 더불어 책력을 선물하던 풍속이 전하는데 이에 대해《농가월령가 (農家月令歌)》11월 조에서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동지(冬至)는 명일(名日)이라 일양(一陽)이 생(生)하도다 시식(時食)으로 팥죽을 쑤어 이웃(隣里)과 즐기리라 새 책력(冊曆) 반포(頒布)하니 내년(來年) 절후(節侯) 어떠한고 해 짤라 덧이 없고 밤 길기 지리하다.

 옛부터 "단오(端午) 선물은 부채요, 동지(冬至) 선물은 책력(冊曆)이라"는 말이 전하여 옵니다. 전통사회에서는 단오가 가까워오면 여름철이라 친지와 웃어른께 부채를 여름 선물로 선사하고, 또 동지가 되면 책력을 선사하는 풍속이 성하였습니다. 책력은 농경사회에서 생업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요긴하게 사용되었던 생활의 지침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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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 2004-12-25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릴적 어머니께서 끓여 주셨던 팥죽 생각이 납니다. 위 팥죽 그림을 보니 새알심 팥죽이었던것 같습니다. 팥죽을 먹었던 기억이 아물아물 하네요.

그림으로 팥죽을 끓여주신 수수께끼님!~~가암사아합니다.
 

 수련님의 페이퍼에 말씀하신 백제역사재현단지의 백제 건축물(실은 이 건축물이라는 것도 백제의 건축 양식에 의한것이 아니라 일본에 남아있는 목조건축이 백제의 영향을 받아 조성된 것으로 판단하여 일본 건축물을 참고한 것이지만...)의 단청 자문작업을 맡으신 모양인데 글의 내용으로 보아서는 일차적으로 동궁의 단청에 대한 작업계획을 마무리 한 것으로 보입니다. 수련님도 말씀하셨지만, 바탕색을 온통 녹색으로 한다는 내용으로 보아서는 내록이나 양녹(이는 청동에 생기는 녹을 수습한 것으로 무척 독성이 강한 화학물이지만 목재의 장기보존을 위해 사용합니다)으로 바탕을 칠하고 그 위에 문양을 넣는 모양입니다.



  여기에서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를 제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은 백제의 문양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백제의 문양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 문양이 불상이건, 기와이건 또는 금속공예나 벽돌이건 백제의 문양을 찾기는 쉬운일이 아닙니다. 그 수도 지극히 적을뿐만 아니라 일단의 조형물에 나타난 문양이 과연 백제의 단청에 사용되었는가에 관한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다양하게 나타나는 문양이라면 미루어 짐작하여 한 시대의 양식과 조류로써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하겠으나 불행하게도 백제의 문양은 지극히 단편적으로만 알 수 있을 따름입니다.



  지금까지 나타난 백제의 유물에서 문양을 알 수 있는 것을 살펴보면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머리받침과 발 받침의 문양과 왕관에서의 문양...그리고 무덤을 이루고 있는 전돌의 문양(이 전돌은 중국 양나라에서 사용하던것과 똑 같은 문양으로 수입품인지의 여부도 검토가 되었으나 백제에서 모사하여 제작한 제품임이 밝혀졌습니다), 또한 백제 금동대향로에 나타난 문양이나 부여 외리에서 발굴된 연꽃 귀면무늬 전돌이나 산경치 귀면무늬 전돌,  백제의 미소라고 불리우는 서산 마애삼존불상의 광배에 담긴 문양과 그리고 저도 직접 가서 조사를 해 보았지만 일본 호류지(법륭사)에 있는 백제관음상(이 관음상에 백제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백제의 작품이라고 보는데는 다소 무리가 있는 불상입니다)의 광배의 화염문과 연화문... 비조사의 기와에 나타난 문양등입니다. 특히 비조사는 불 타 없어졌지만 비조사 경내에 보관하고 있는 비조사의 기와에 나타난 문양은 백제의 문양임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문양들이었습니다. 이런 문양에서 고구려나 신라의 문양과 비교를 하면 금방 알 수 있는것이 연꽃문양의 연잎이 6엽이 아닌 8엽으로 통일이 되어 사용되었던것등 백제가 고구려나 신라와는 다른 문양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양들이 과연 백제시대의 건축물에 사용이 되었는지는 수련님의 말씀처럼 1500여년을 훌쩍 뛰어넘는 타임머신을 이용하기 전에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양은 당 시대의 보편적인 사용이 전제이기에 당시에 사용되었던 문양이라고 억지로 꿰맞추어 사용할수밖에 없습니다. 문양이야 그렇다치고 그럼 바탕색은 무엇으로 해야할지가 문제가 됩니다. 수련님의 글 내용으로 봐서는 말씀드린대로 내록과 양녹을 사용하는것 같은데 이런 바탕색 사용은 상당한 문젯점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단청 비용이 한 두푼도 아니고 몇 십억이 소요되는데 국적도 없는 단청이 된다면 이는 웃음거리 그 자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고삼국의 회화나 건축물은 고구려 고분벽화를 보면서 연구가 가능합니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도교적 영향으로 사람이 죽어서도 이승에서의 영생불멸을 한다고 믿었기에 벽화의 구성이 사람이 살아있던 당시와 똑같이 꾸며져 있습니다. 집의 형태를 그대로 옮겼음은 물론이고 부엌과 푸주간등...그리고 수레와 사냥모습등등 생전에 망자가 했던 내용들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으며 인물조차도 생전 모습 그대로 정좌한 모습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일부 고구려 고분에는 입구가 건축물의 기둥 형태로 제작되기도 했으며 일부 고분에는 차마 제작을 할 형편이 아니었을 경우에는 그림으로 기둥을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이런 고구려 고분 벽화는 회화뿐만 아니라 건축사적 입장에서도 상당히 중요하며 그 형태등을 알아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것은 그 당시의 단청 모습은 단지 문양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건축물과 같이 요란한 단청은 없으며 황색, 또는 회색 바탕에 당초문등의 문양으로 단청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이러한 단청의 색상은 돌로 만들어진 기둥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 석회를 발랐기에 색상 표현을 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는 어불성설입니다. 고구려인들은 피부색까지도 표현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특히 사신도에서 보면 세부 색감 표현을 위해 상당히 노력을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망자에 대한 예우는 오히려 살아 있을때 보다 더욱 극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단지 이승을 떠났을 뿐이고 저승에서 또 다시 영생을 보낸다고 생각했으니 말입니다.


  요즘 고궁 건축물이나 절간에 칠해지는 단청은 언제부터 시작이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다만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알 수 있듯이 상당히 오래전부터 단청작업이 있었던것만은 사실입니다. 단청에 대해서는 중국의 송나라때 집필된 "영조법식"이라는 책에 건축물의 구조와 더불어 어떤 그림이 들어가야 하는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알 수 있는 단청이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지금처럼 요란한 채색이 되고 있으며 이에 대한 하나의 규범으로 "영조법식"이 만들어 졌다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조법식은 우리 나라의 경우 고려시대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려시대 이전의 상황을 어떻게 짐작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한 해답은 불행하게도 No입니다.  그리고 바탕색으로 사용되는 양녹이나 내록도 언제부터 사용되어졌는지 명확하게 알 방법이 없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 나라에서는 단청에 대한 연구가 매우 미진합니다. 연구라고 해보았자 실은 최근의 몇 몇 연구가들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는 회화는 하나의 기술로서 예술로 인정을 하고 있음에도 단청이라는 작업은 단순한 기능으로서 기능인의 채색작업으로 치부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단청에 대해서도 소득수준의 향상과 더불어 하나의 예술분야로서 인식이 되기 시작했으며 점차 단청 연구 인구가 늘어갈 것으로 판단이되지만 단청이란 기껏해야 200년 정도가 수명인지라 특별한 보존대책이 강구되지 않은 건축물에서의 단청을 볼 수 있는 경우란 거의 없습니다.  한마디로 단청의 변천과정이나 문양등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청에 사용되는 문양도 어떤 통일된 문양이 없이 전국 각지에서 단청 작업자의 개인적 사고에 의하여 멋대로 행해져서 단청을 연구한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고단한 작업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제에 백제 역사단지 재현 건축물에 송대의 단청 양식도 아닌 그 후대의 단청양식으로 녹색 투성이의 단청을 한다면 과연 그 건물이 제대로 백제의 단청을 재현한 건축물로서 빛을 발할 수 있을까요? 물론, 당시에 내록이 안쓰였다고는 확실하게 말씀드리기 곤란하지만 한편으로는 당대에 내록이 쓰였다는 확답도 없기에 대충 그러려니 하면서 현재의 단청 바탕을 기본 바탕으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북한은 평양의 동명왕릉을 정비하면서 왕릉앞에 대규모의 사당 건축을 하고 그 건축물(시멘트 건축물입니다만)에 고구려 고분 벽화를 참고로 하는 단청 작업을 하였는데, 이 작업도 북한에서는 상당히 고민을 많이 한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현대 단청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단청 형태를 보이고 있으나 이마저도 맞는지 틀리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도 이렇게 옛 단청이라고 복원한 경우가 있습니다. 부여의 정림사지에 세워진 기념관에 백제의 단청이라고 하여 단청이 되어 있지만 이 단청으로 인하여 상당한 논란이 일었습니다.  과연 아무도 가보지 않은 백제시대의 단청을 어떻게 천연덕스럽게 백제 단청의 재현이라고 했느냐는 문제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단청에 종사하시는 분들의 입장에서는 요즘의 단청이 눈에 익어 새롭게 재현한 단청에는 거부감이 생길수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중요한것은 고증에 입각한 단청이라 할것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백제 단청에 수련님 말씀처럼 내록이나 양녹으로 푸르딩딩하게 바탕색이 칠해진다면 정말 가관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곳에 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대규모의 건축물인데 건축물이 온통 푸르딩딩 하다면 과연 단청이 제 맛이 날까가 걱정입니다.  아마도 문양 작업이 선행되어 그나마 극히 일부만 남아있는 백제의 유물로 문양은 대강 만들어 졌을것으로 판단이 되는데 이렇게 어렵게 만든 문양을 엉뚱한 바탕색으로 망친다면 안타까운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뿐만아니라 백제역사재현단지에의 단청을 보고 각각의 기능만을 고집하는 단청인들이 어떤 말들을 할것인지는 불을보듯 뻔하다고하겠습니다. 한편으로는 백제의 문양도 백제 유물을 통해 나타난 문양을 그대로 사용해야지 현대적으로 재해석을 한다거나 또는 임의로 변경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금제 관식의 화염문 속에는 꽃이 들어있는데 이 꽃을 현대적 개념의 단청처럼 연꽃이나 연등초의 형태로 변형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변형은 백제의 단청 재현이 아니라 현대적 해석에 의한 현대단청이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수련님이 밤잠을 못이루시겠다는 이야기에 충분히 공감을 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백제 문양부터 재고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상의 광배나 기타 백제의 유적에 나타난 모든 문양을 종합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백제 금제 관식에 나타난 화염문 속에 들어있는 꽃봉오리도 단순하게 연꽃으로 넘어가서는 안될일입니다. 특히나 비조사에 있는 백제 와당은 상당한 문양 자료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기와는 건축물과는 땔래야 땔 수 없는 중요한 것이기에 백제 와당의 문양은 상당히 소중한 자료로 받아들여야 할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바탕색에 관한 문제로 백제 당시의 단청을 내록 일색으로 푸르딩딩하게 한다는 것은 후대 단청작업자들의 어리석은 발상이라는 것입니다. 백제의 색감은 어디에서고 찾아볼 수 없는 지경이지만 동 시대의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나타나는 색채는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동 시대에 특별히 다른 채색안료가 있었다면 몰라도 고구려나 백제나 동일한 채색재료를 사용했다고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일부에서는 무덤과 집은 다르다고 하여 서로간의 색상의 차이를 논할수도 있으나 분명히 인식해야 할것은 고구려 고분의 묘사는 고구려인의 실생활을 그대로 묘사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무덤이기에 그렇다고 운운하는 논리는 맞지 않는것입니다. 이러한 논리의 전개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제작 사유에 대한 명확한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기에 발생되는 오류라고 할것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내용은 실은 상당한 전문적인 내용으로 일부 읽으시는 분들께서는 이해가 어려울수도 있을것입니다. 그러나 수련님의 짧은 단청에 관한 글을 보면서 고민하시는 내용이 제가 평시에 갖고 있는 생각이 필요할것 같아 말씀을 드리는바이며, 백제의 문화를 재현한다는 것은 최대한 그 당시의 모습과 근접해야 한다는 명제임을 생각할 때 관련되는 제반 자료의 종합적인 검토가 선행이 되어 충분한 논의 끝에 결정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 것입니다. 시행청에서도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공기에 쫒겨 급하게 진행할것이 아니라 충분한 검토를 거쳐 시행토록 하여 막대한 예산의 낭비는 물론이고 잘못 시공됨에 따른 갑론을박도 충분한 자료나 관련근거의 제시로 마무리를 해야 할것입니다. 백제에 관한 사료나 근거가 없다하여 대충 한다는것은 오히려 백제의 예술을 왜곡시키는 사례임을 관련자들은 명확하게 인식해야 할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작업은 단청업자의 요구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한다거나 섣부른 결론으로 시행을 하게 되면 엄청난 부작용이 뒤따른다는점을 반드시 명심을 해야 할거입니다. 특히나 이러한 작업에 관한 사항들은 역사에 남는 일로서 관련자는 모두 우리의 역사를 되새긴다는 명확한 사명감을 가져야 할것입니다. 그런 사명감이 결여되어 섣부른 결론에 이르러 전혀 엉뚱한 단청이 만들어 진다면 관련자들은 그 오명을 후대에 남길 수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최대한 백제의 단청에 근접한 작업을 할 수 있어야 할것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단청 작업을 조속히 마무리 해야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점입니다. 단청의 주 목적은 건축물의 장엄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목재의 보호라는 이유가 가장 우선하기에 몇 년 늦어졌다해서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것은 가장 사실에 입각한 고증작업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자료가 부족하면 몇 년이 걸리더라도 문양부터 차근차근 짚어가면서 제대로 된 단청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백제역사재현단지의 건축물부터 이론이 많으나 일단은 일본에 전래된 백제 양식을 역으로 되살려왔기에 별다른 시비 사항이 없다고 보겠으나 백제 단청은 일본에 있는 동사(東寺)를 비롯한 옛 백제계 양식의 속에 있는 단청들도 참고를 해야만 할것입니다.  제가 직접 가본 동사의 5중탑 내부에는 어느 시대인지는 모르지만 단청이 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이에 대한 사진 촬영도 했었기에 앞으로 나오는 백제역사재현단지의 단청과 비교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만약 백제 재현이 현대 단청과 짬뽕이 되어 나타난다면 구태어 백제의 단청이랍시고 비싼 예산을 들여서 단청 작업을 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그냥 현대식 단청으로 작업을 하면 될 일이지...백제의 단청이랍시고 시행한 작업이 전혀 엉뚱한 시대불명이요 국적불명의 단청이 되어버린다면 구태어 백제 단청을 찾는 작업을 할 필요가 없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렵게 많은 예산을 들여 시행하는 백제역사재현 사업이 잘 마무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 如       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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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 2004-12-03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두 옳으신 말씀입니다.

이러한 모든것을 종합하여 연구하고 노력해도 한사람만의 결정이 아니기에 어렵다는 말씀을 드리고 있답니다. 감사합니다.

수수께끼 2004-12-03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로 엉터리 백제역사재현단지로 만들어지는것을 막아야 합니다. 신라의 문화재 보고인 경주와 달리 백제 역사는 처음으로 정비가 되는데 시작부터 엉터리로 진행이 되는것에는 시작부터 제동을 걸어야 하는 일이라고 봅니다. 이 글을 많이 퍼 가서 다른곳에도 올려주셨으면 합니다.

조선인 2004-12-03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련님이 보시길 기다렸습니다. 수련님이 퍼가셨으니, 이제 저도 퍼가야지요. 그리고 많이 퍼가라고요? 넵, 분부대로 합지요. ^^

수수께끼 2004-12-03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아마 조선인님께서 퍼 가셨으니 많이 많이 퍼지리라 확신을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문화재라는 역사적 사명을 가지고 매달려야 하는 일에 돈에 눈이 먼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정말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그런 인간들을 그냥 콰악~~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

수련 2004-12-05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요...경제논리에 일이 그르쳐지면 안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쓰린적이 한두번이 아니랍니다. 오로지 한번밖에 없는 백제역사재현 자문에 최선을 다해보고자 합니다.
 

 아래글은 조선일보에 난 기사입니다. 중국의 동북공정도 중요한 문제이지만 남북간의 경협에 견주어 쥐꼬리만한 예산만 배정된 고구려 유적에 대한 처지는 말로만 고구려찾기의 대표적인 사례라 할것입니다.

"한반도 고구려유적 곰팡이 필 지경"
문화재청·유네스코 '고구려 고분보존' 학술회
북 고분 습기많아 대책 시급… 아차산 유적, 헬기장에 훼손


▲ 표면이 벗겨지고 그을음이 생기는 등 훼손을 겪은 평남 수산리 고분벽화. 남북한에 남아있는 고구려 유적들의 보존 대책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ICOMOS 코리아제공
남·북한 고구려 유적들이 관리 소홀로 훼손 가능성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이 수천억원을 들여 집안(集安)·영안(寧安) 등지의 고구려·발해 유적을 정비하며 고구려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면서 ‘중국 고구려사’를 선전하고 있는 것과 달리, 고구려 역사를 이어받았다는 우리는 한반도 내의 고구려 유적조차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옛 고구려 수도였던 ‘역사 도시’로서의 평양 전체를 새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자는 주장까지 나오는 현실에서 이런 문제들은 상당한 걸림돌로 작용할 수도 있다.

지난 19일부터 23일까지 평양을 방문, 평양 동명왕릉과 평남 대동군 덕흥리 고분 등을 조사한 무니르 부시나키(Mounir Bouchenaki) 유네스코(UNESCO) 문화담당 사무차장보는 25일 “북한의 고구려 고분들에 습기가 많아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부시나키 사무차장보는 이날 문화재청과 유네스코 공동주최로 서울 타워호텔에서 열린 ‘고구려 고분의 보존과 관리’ 국제심포지엄에 참석해 이같이 밝혔다.

이날 심포지엄에 참석한 도색 보존 전문가 로돌포 룬스포르드(Rodolfo Lujan Lunsford) 이탈리아 볼로냐대 교수는 “강서군 약수리 고분의 경우 주변에 인공 저수지를 만든 뒤부터 물이 땅으로 스며들어 고분 안의 습도가 높아진 것으로 알려졌지만, 조사 결과 오히려 빗물이 더 큰 문제인 것으로 드러났다”며 “습도가 너무 많아 벽에 곰팡이가 생길 지경”이라고 말했다. 습도 전문가인 산드로 마사(Sandro Massa)씨는 “북한에서 고분 보존을 위해 사용했던 실리콘과 콘크리트가 오히려 훼손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부시나키 사무차장보는 “더 이상의 훼손을 막기 위해서 (한국의) 경제적·기술적 지원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최근 문화재청의 국정감사 요구자료에 따르면 현재 남한에 남아있는 고구려 유적은 ▲서울 홍련봉·구의동·용마산 보루 등 11건 ▲경기 아차산 보루, 연천 호로고루, 파주 칠중성 등 32건 ▲강원 춘천시 방동리 고분 등 4건 등 모두 57건인 것으로 집계됐다. 그러나 이중 국가지정 문화재는 7건, 시·도 지정문화재는 13건에 불과해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중 연천 호로고루성은 1994년 지표조사 이후 발굴조사가 이뤄지지 않았고 성벽을 쌓은 돌이 무너지고 있는 상태며, 서울 아차산 일대 20개소가 분포하는 고구려 유적은 헬기장·체육시설 등으로 크게 훼손되고 있다. 또 올해 신라 문화권의 유적 정비 예산이 243억7100만원이었던 데 비해 고구려·고려 문화권의 정비사업 예산은 49억5700만원에 불과해 “아무리 남아있는 고구려와 고려 유적이 적다고 해도 예산 배정이 너무나 편중돼 있다”는 목소리가 높다.

 57건의 고구려 유적은 대부분 방치 상태나 마찬가지이며 이러한 이유는 발굴이나 기타 공사등의 경로로 인하여 우연히 발견되는 부분이 상당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고구려사는 제대로 다뤄지지 않아 이에 대한 연구나 문헌자료의 부족으로 대부분의 고구려 유적은 다 파헤쳐봐야만 알 수 있다는 맹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고구려연구회가 급조하다시피 만들어졌는데 그 이전의 서길수 교수 중심의 고구려연구회는 상당한 자료를 축적한 상태이기에 진정 고구려가 한바도의 국가임을 내세우려면 공동연구나 문헌정보의 발굴등 실질적인 고구려 연구에 박차를 가해야만 체계적으로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국이 동북공정이라는 프로젝트를 들이밀자 마치 큰 것을 빼앗긴것 처럼 호들갑을 떨더니만 중국 외교부 국장급의 방한에서 지켜지지도 않을 구두 약속을 믿고는 다시 사그라들어버렸으니....언론에서 보도를 안해서 그렇지 중국은 지금도 동북공정을 차근차근 진행해 나가고 있음을 알아야 할것입니다. 그것은 통일 한국 이후의 중국의 국내정세를 예측하고 시작한 커다란 규모의 사업이기에 중국으로서는 결코 포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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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군요. 다른분들은 새페이퍼쓰기라는 것이 위에 나타나지 않는데 수수께끼님의 마이페이퍼에는 새페이퍼쓰기가 나와있고 이렇게 들어와서 글을 남길수 있네요. 잠시 들어와서 시험을 했지만 수수께끼님..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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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나라국립박물관의 선임 연구관(큐레이터)인 稻本선생에게서 e-mail이 왔습니다. 금년 7월 10일부터 신라의 황금 문화재를 중심으로 특별전을 개최한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알라딘에서 구입한 도서중 <황금의 나라 신라>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때맞춰 일본에서 특별전으로 "황금의 나라 신라"라는 주제로 전시회를 한다니 책에 나온 많은 문화재를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하겠습니다.

 신라의 무덤에서 출토된 금을 이용한 장신구는 머리에 쓰는 왕관부터 신발에 이르기까지 온통 금으로 장식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죽은 임금에 대한 부장의 성격이 강하며 실제 생활에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신라 전반에 걸쳐 황금장식은 커다란 유행을 이루고 있었음이 분명하며, 이러한 장식을 세공할 수 있는 황금문화의 장인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든 사람은 이 세상을 떠났고 남은것은 아름다운 금 세공품들뿐입니다. 전 세계의 무덤을 통틀어 경주만큼 많은 귀걸이가 출토되는곳도 없다 할 정도로 신라의 귀걸이는 그 숫자 뿐만 아니라 그 세공기술 또한 최고조의 공예기술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러한 신라의 유물이 일본에서 특별전으로 열린다니 당연히 구미가 당깁니다. 이번에 17일 나라국립박물관에 들려서 신라의 금 공예기술이 뽐내는 아름다움을 딸과 함께 감상 할 기회를 갖기로 했습니다. 나라는 백제의 영향과 더불어 신라의 문화가 많이 유입되었으며 특히 일본 황실의 보물창고라고 할 수 있는 "정창원"이 나라 박물관 인근인 동대사의 뒷편에 자리잡고 있으며, 정창원에는 임진왜란때 수탈해간 우리 문화재를 비롯하여 일제 강점기때 수탈해갔던 수많은 우리의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재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전면 공개를 꺼리며 매년 야금야금 조금씩 특별전이라는 형식을 빌어 나라국립박물관에서 전시를 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우리 나라 경주와 유사한 일본의 고도로 경주시와는 자매결연 도시이며 매년 국립경주박물관과 인적 교류의 일환으로 학예연구원 1명씩을 상호 파견하여 두 박물관의 유물에 대해 연구토록 하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회도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경주박물관에 있는 다량의 신라 유물이 함께 전시가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해 봅니다. 또 한편으로는 일본이 보유하고 있는 신라의 금공예 제품이 어떤것인가에 대한 관심입니다. 일본 당국도 신라의 금 공예기술을 인정하기에 특별전의 명칭을 <황금의 나라 신라>라고 한것 같습니다.

 이웃나라 일본...문화적으로는 우리 한반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에도 구태어 대륙으로부터의 유입이라고 주장하는 그들...그러나 문화적 측면에서의 우수성을 그들도 부인하지 못하고 있으며, 매년 정창원의 유물을 공개하는 과정에서 뛰어난 한반도의 문화적 소산물인 유물을 전시하며 그 미적 감각과 예술미에 감탄을 하고 있는데 이는 바로 삼국시대의 빛나는 문화를 그들도 묵시적으로 인정을 하는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번 여행에서는 제가 읽고있던 <황금의 나라 신라>라는 책을 몇 권 가지고 가서 선물로 전해주려고 합니다. 아무리 그들이 연구를 했다한들 국내 학자의 연구성과만한 결과를 얻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물론, 특별전에 따르는 도록도 있겠지만, 그 도록이야 일본에서 수박 겉핥기 정도의 안내문에 그치지 않을 것이기에 신라의 황금을 다룬 <황금의 나라 신라>는 그들에게는 좋은 참고 도서가 될것을 확신합니다. 1400여년이 지난 지금 일본에서 열리고 있는 <황금의 나라 신라>展.... 일본의 나라국립박물관 특별전시실은 그 위대한 신라황금의 반짝거림으로 가득할것입니다.

                                                                           < 如       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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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4-07-14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황금의 나라 신라'를 서점에서..... 그림만 휘리릭, 보았어요. ^^;;

두심이 2004-07-20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은 여행이셨겠습니다. 후기도 자세히 좀 알려주세요..궁금해요.

2004-07-20 1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수께끼 2004-07-20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나라국립박물관을 못 다녀왔습니다. 이번주에는 가려고 하는데 항공편에 여유가 없어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중에 스캐닝해서 도록 일부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새페이퍼쓰기>는 지금 저 윗쪽에 <마이페이퍼 관리>와 함께 보이는데 저만 보이는것이 아니라 다른 님들께서도 보이는 모양이지요? 다른분이 이곳에 쓰실수 있다면 <마이페이퍼>가 아닌 <공용페이퍼>가 될텐데....저도 조금 궁금하군요...

수수께끼 2004-07-20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약, 제 <마이페이퍼>를 열어보시는 분들께서도 위에 말씀드린대로 <새페이퍼쓰기>가 보인다면 문제가 있군요. 다른분들의 <마이페이퍼>에는 <새페이퍼쓰기>와 <마이페이퍼관리>가 보이지 않던데...제것만 다른분들에게 공개가 된것인지...그것도 저에게만 주는 특권이라면 여러님들...이곳의 제 페이퍼에 많은 글들 올려주세요~~

민동기 2004-07-21 0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상하게 수수께끼님의 마이페이퍼에만 새페이퍼쓰기가 보이는군요. 제가 쓸 수 있는지 한번 시도를 해 보겠습니다.

민동기 2004-07-21 0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수께끼님 마이페이퍼에 제가 글을 쓰고 왔는데 저장이 되었답니다. 이상한 현상이군요

두심이 2004-07-21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수께끼님! 왼쪽에 페이퍼관리에 들어가셔서 글쓰기 권한허용을 안해놓으시면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수수께끼 2004-07-21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녜...두심님 말씀처럼 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하면 코멘트를 쓰지 못하게 만드는 것으로 알고...하하하...이제는 괜찮을 겁니다...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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