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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저녁식사는 사무실 사람들과 어울려 주변의 식당을 찾았습니다. 주메뉴야 닭도리탕인데 평시에는 보지 못했던 반찬 한가지가 더 올라와 있었습니다. 하얀 보숭이에 담긴 메뚜기였습니다. 그런데 메뚜기는 설탕과 간장에 조려져 있었고 예전에 먹던 메뚜기맛을 생각하고 입안에 넣으니 바삭거림은 여전한데도 맛은 옛 맛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메뚜기가 반찬으로 나오니 무척 신기하였는데, 주인장에게 식당에서 튀긴것이냐고 물으니 농수산시장에서 구입해 왔다는 것입니다. 언뜻 생각나는것이 있어 포장을 좀 보자고 가져와 달라고 해서 포장을 보니 원산지가 중국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원래 원가가 비싼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라면봉지 두 배 정도되는 메뚜기의 가격이 제법 되더군요.  아마 수입상은 분명 싼 가격에 수입을 했겠지만 유통과정에서 가격이 많이 부풀려 진것 같습니다.

  제가 어려서 생활하던곳은 돈암동이었습니다. 이맘쯤이면 동네 아이들과 작당을 하여 미아리 고개를 넘어 길음천 부근에 다다르면 바로 논가에 다다랐었죠. 논의 이곳 저곳에는 벌써 벼베기가 끝나서 낱가리를 쌓아둔 논과 주인이 게을러서인지 익을대로 익은 벼가 고개를 푸욱 수그리고 있음에도 베지 않고 있는 논이 있었는데, 이 논에는 가마귀와 참새가 알방구리 드나들듯 마음껏 배를 채우기도 합니다. 우리들은 길섶에 키만큼 자란 강아지풀 몇 개를 쑤욱 뽑아들고는 논으로 갑니다. 사람의 인기척에 놀라 이리 푸드득 저리 푸드득거리는 벼메뚜기를 잡기 시작합니다. 어떤때는 커다란 녀석을 발견이라도 하게되면 이리 넘어지고 저리 넘어지면서도 끝까지 쫒아가서 결국은 어린 손바닥에 가득차는 그 녀석을 붙잡고는 좋아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잡은 메뚜기는 목 뒤로 강아지풀의 끄트머리를 밀어넣어 아래로 내리면 꼼짝을 못하며 버둥대기 시작합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아이들의 손에는 너 댓개의 강아지풀에 잔뜩 꿰여있는 메뚜기를 들고는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돌아옵니다. 뒷덜미가 강아지풀에 꿰인 메뚜기들은 긴 다리를 서로 차기도 하면서 몸부림을 치지만 한번 꿰인 메뚜기는 목이 달아나기 전 까지는 그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동네로 돌아온 아이들은 저녁먹을 시간이 안된 경우에는 동네 골목에서 잔불을 피워놓고는 강아지풀의 끄트머리를 손에 잡고 메뚜기를 불 속에 집어 넣어 굽게 되는데, 불 속에서 바등거리던 메뚜기들은 잠시 후에는 빨갛게 익었다가는 금방 새까만 덩어리가 되고 맙니다. 그렇게 잘 구워진 메뚜기를 한 마리 한 마리 입속에 넣고 씹어 먹노라면 그 맛은 어느 것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꿀맛이랍니다. 그래도 몇 가닥의 강아지풀에 남은것이 있으면 집으로 가지고 들어옵니다. 어머니는 그런 생물을 왜 잡아왔느냐고 겉나무라시지만 동생과 같이 구멍마다 뱀의 혀 처럼 날름거리는 연탄아궁이의 불위에 살짝만 올려 놓아도 아주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훌륭한 고단백의 간식거리가 됩니다.

  제가 대학에 다닐때도 메뚜기를 잡아먹어 보았지만, 벌써 그 때도 농약 오염이니 뭐니 해서 메뚜기를 먹는것에 대한 우려의 소리가 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 철에 농촌에 갈 기회가 없어서 그랬지 기회만 닿았다면 아마도 많은 메뚜기를 더 잡아먹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요즘은 농촌에 가서도 잘 보이지 않고 메뚜기가 보이는 경우도 가끔 있지만 어렸을 때 처럼 가을걷이를 마무리하는 논의 이곳 저곳을 비상하던 메뚜기떼는 구경도 할 수 없었습니다.

  언젠가 지방에 자료조사차 내려갔다가 메뚜기 양식을 한다는 분이 계셔서 그 양식장에 가 본적이 있었습니다. 양식장이라고 해서 상당히 궁금했었는데 양식장이라는 곳에는 나무 기둥이 박혀있고 너 댓개의 모기장이 쳐저 있었는데 양식장에서 비교적 먼 거리임에도 무엇인지 스왁~스왁~하는 소리가 들리는것 같았습니다. 그 소리의 정체는 모기장에 가서야 알 수 있었는데 그 모기장이 바로 양식장이며 모기장 속에는 수많은 메뚜기가 자라고 있었고, 아까의 그 소리는 메뚜기의 사료로 사용되고 있는 옥수수잎을 갉아먹는 소리였습니다. 어찌나 순식간에 해 치우던지...그 모습을 보니 아프리카에서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메뚜기떼의 대 공습이 바로 이런 모습으로 수억만 마리의 메뚜기떼가 한꺼번에 돌아다니면서 곡식을 갉아 먹는다면 남아날 것이 없을것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럴때는 화염방사기를 발사해서 날라다니는 메뚜기를 아예 구이로 만들어 적당한 가미를 하고 포장을 하여 우리나라 같은 메뚜기를 술안주로 삼는 나라에 수출을 하면 될텐데...아직 아프리카의 나라들은 그런 생각까지는 미치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어제의 메뚜기는 고소한 맛 보다는 설탕과 간장에 조리는 바람에 오히려 약간은 달착지근한 맛이 강해서 예전의 그 맛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왜 이런 고단백의 식품에는 관심이 없을까요? 워낙 먹거리가 풍부해서인지...아니라면 논에 가도 메뚜기가 어떻게 생긴 녀석인지 볼 기회가 없어서인지...그도 아니라면 방과후 피아노다 태권도다 학원에 가느라 시간이 없어서인지 말입니다. 제가 인터넷을 찾아보니 몇 군데의 유기농 논에는 우렁이와 메뚜기가 많이 있다고 하는데 주말에는 아이들과 그곳이라도 찾는다면 보기 힘든 메뚜기를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또 기회가 된다면 잡아서 구워 먹어도 보고요....

 * 메뚜기는 보호색을 띈다고 합니다. 흔히 벼메뚜기는 논에 심겨진 벼와 함께 살기에 녹색을 띄며, 가을에 마른 풀섶에 사는 메뚜기는 갈색을 띄고 있어 '송장메뚜기'라고 하여 논에서 자라는 메뚜기와 구별을 하는것 같습니다.

                                                                        < 如       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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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4-11-04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다 먹어봤는데 메뚜기만 못먹어봤습니다. 으메 아까운거... 지금은 줘도 못먹게 되어 정말 안타깝습니다...

수수께끼 2004-11-04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제가 조그만 트럭으로 한 차 보내드렸는데..어찌 줘도 못드시나요? 그 맛있는것을...(꾸울꺽~~) 못들어 보신분은 아마 그 고소한 맛을 모르실겁니다....아...생각만 해도...

수련 2004-11-05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뚜기는 발톱이 까실까실해서 먹기가 나쁠텐데...어떻게 먹나요?

곤충이라는 생각때문에 도저히 입에 넣어지질 않을것 같네요
메뚜기 요리가 고급요리라는 말은 들어보았지만 ..저는 메뚜기는 도저히 목먹을것 같습니다. 무인도에 혼자 갇혀 아무것도 먹을것이 없다면 모를까~~
.

그런데~~~수수께끼님 !!메뚜기 그만 드시고...강의준비 잘해주세용!!~(은근한 스트레스주기)

수수께끼 2004-11-05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뚜기는 발톱이 없고 다리 뒷쪽에 톱날같은 돌기가 있지요....이 돌기는 불에 약해서 굽는 순간 다 없어진답니다. 메뚜기에 대한 식용성을 이야기하자니 침이 넘어갑니다만, 제법 큰 벼메뚜기의 오동통한 뒷다리의 맛은 일품 그 자체랍니다. 그리고 강의 일정에 대해서는 별도로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수련 2004-11-05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연시간에 졸았나 봐요? 곤충을 좀 무서워 하는 습관이라서 잠자리도 잘 못잡거든요

생각해보니 메뚜기를 잡아서 자세히 본 기억은 전혀 나질 않는군요. 주작이나 닭의 며느리 발톱같은 것을 말하나 보군요. 자연공부 잘하고 갑니다~~다음에 메뚜기 잡으면 뒷다리부터...잡아먹어야 겠군요. 그래야 확실히 톱날인지 발톱인지 알테니 말이예요.
 

 결국은 D라는 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생은 제적이라는 최악의 처벌을 받았고, 이 학교의 교목은 이 학생을 두둔했다는 이유로 정직처분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학생의 경우를 보면서 제가 중학교 입학때의 경우에 대해 몇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아직도 종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 제가 개인적으로 신앙으로 삼는 종교를 갖지 못하고 있음을 미리 말씀을 드립니다. 종교가 없음은 조금은 고집스럽지만 생애에 죄가 있다면 어떤 종교든 그 죗가를 받으면 그만이라는 다소 편협한 인식이 잠재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다니던 중학교는 기독교계 학교였습니다. 입학식날부터 뭔지는 모르지만 음은 알고 있는 노래로 시작을 하여 여러차례 고개를 숙이고, 또 노래를 하고....그리고 마지막에는 원 머리가 훌러덩 벗겨지신분이 두 팔을 들고 뭐라뭐라 하던일....이것이 제 기억속의 입학식이었습니다. 기독교를 종교로 갖고 계신분은 찬송가와 마지막의 축도라고 금방 아실것입니다만 교회라고는 문앞에도 안 가본 저로서는 그 모든 일들이 신비스럽다기 보다는 귀찮게만 느껴졌습니다. 개학이 되니 학교에서는 제법 두툼한 용지로 만든 봉투와 출석표를 나눠줬습니다. 봉투는 헌금봉투이고 출석표란 일요일을 맞아 가까운 교회에 나가 예배에 참석하고 확인 도장을 받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매주 한 차례의 예배와 2시간의 성경과목이 편성되어 성경 수업을 받게 되었는데 천성이 종교와는 거리가 멀었던 저에게는 성경시간은 고역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단 한가지 좋은 점은 그 시간에 졸든, 아니면 다른 책을 보든 담당 선생님게서는 야단을 치시지는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제가 반장이라는 위치에 있었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반장이 수업 전에 기도를 하고 수업을 시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기도하는 방법과 기도의 내용 등등 예배에 관한 기본 지식을 가르쳤다고 생각하신 선생님의 의도였던것 같습니다. 저는 수업전에 기도를 하면서 이것 저것 너저리 너저리 다 기도에 집어 넣어 수업시간 전체를 기도로 때우고야 말았습니다. 아마 제가 생각해도 기도의 내용 자체만을 가지고는 어느 선생님도 시비를 걸지 못할 정도로 완벽한 기도로 한 시간을 다 때운것이 아니었던가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런 기도는 시간이 흘러가면서도 전혀 그 시간의 단축이 없이 성경시간 전체를 모두 다 기도만 하고 종이 울리면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가 동시에 나오면서 마치는 것이었습니다. 1학년 1학기는 초기 몇 주를 제외하고는 성경교과서의 진도가 단 한페이지도 나가지 못했고, 선생님은 숙제로 어디 어디를 예습해 오라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학기말 고사를 치루는데 배운게 없어 시험을 치루지 못하고 일괄적으로 기본점수를 주고 나머지 점수는 일요일의 교회 예배 참석율을 더하여 성경과목 성적을 작성하였습니다.  방학이 시작되던 날...교목이신 그 대머리 목사님이 저를 찾았습니다. 그 분은 당시 교단에서도 나름대로의 지위를 가지고 계셨던 박경식 목사님이셨는데 교목실에 들어 선 저에게 자리에 앉기를 권하시고는 "너는 예수님을 믿지 않느냐?"고 물으셨고, 저는 "예수님뿐만 아니라 그 어떤 신도 믿지 않습니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알려진대로 고명하신 목사님은 제게 예수가 어쩌니 저쩌니 하는 구차한 포교의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왜 믿어야 하는지도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한참을 생각하시던 목사님께서 제게 하신 말씀은 "내가 너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 주마...네가 싫으면 교회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 고 하셨습니다. 쪼그만 꼬마의 당돌함에 목사님께서는 제 의사대로 하도록 맡겨버리신것 같습니다.

 수업시간을 기도로 때웠다는 소문은 학교에 자자해서 저라는 인물을 대하는 선생님들의 반응은 대단한 놈이라는 반응과 학교의 종교를 무시한다는 반응으로 크게 대별되었지만 구태어 저를 꼬드겨 교회에 나가라마라를 말씀 하시는 선생님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일요일에는 교회에 가서 꼭 예배에 참석을 하고 주보를 가져다가 예배에 참석했다는 증거물로 담임선생님께 제출을 하였습니다. 교회에 나가야 한다는 교칙에 구태어 반기를 들고 싶지도 않았지만 특별히 교회에 가면 목사님이 나쁜일을 하라는 말씀은 하지 않으시기에 겸사겸사 교회에 나가게 되었지만, 제 마음속에는 기독교를 제 신앙으로 삼아야 겠다는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습니다. 교회에서 알게 된 분이 아동문학가로도 이름이 있는 이 현주 목사와 그 동생 이 덕주 목사입니다. 물론, 지금은 이 두 분과 연락이 없지만 제가 대학에 다닐 때 까지도 이 두분과는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에 대하여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우선은 제가 갖는 의문에 대한 해답을 듣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적어도 종교를 갖는 사람들이라면 신앙이 없는 사람보다는 못되지 말아야 하며 남들의 모범이 되어야 하고, 정말로 자신의 생활에 떳떳해야 할것이 아니냐는 물음이었습니다. 어떤 분은 이런 저에게 신도를 보지말고 성경을 보라는 말씀을 해 주시기도 했습니다만, 제가 요리 조리 교회에 다니는 신도를 면밀히 분석해 본 결과는 실망 그 자체였습니다. 수요예배나 주말 예배에 나와서는 정말로 열심히 자신의 죄를 뉘우치면서 기도를 합니다. 심한 경우에는 격한 감정에 쌓여 한없이 울기도 합니다. 소위 개과천선의 기회를 그들은 갖는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태는 교회에 나오기 전이나 그 다음이나 마찬가지로 나아지는 것이 없어 보였습니다. 이런 문제는 당시 젊은 교인그룹이었던 이 현주, 이 덕주 목사님에게도 매우 심각한 자기 모순으로 비춰졌던 모양입니다. 결국, 형인 이 현주 목사는 지금은 계룡산 입구의 개척교회에서 진정으로 죄인들을 구제하겠다는 의미로 일반인의 삶 속에서 목회 활동을 하고 있다고 들었고 동생인 이 덕주 목사는 어디인지는 모르나 나름대로의 목회활동에 열심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의 종교관은 비단 기독교뿐만 아니라 불교도 마찬가지 입니다. 저는 이상하게도 종교를 싫어함에도 알고 지내는 신부, 목사, 중이 많은 편입니다. 나름대로는 제각기의 중요한 위치에 있지만 제게는 그저 단순하게 여겨질 다름입니다. 언젠가는 육군의 군종감이 단 한번 법사로 보임된 적이 있는데 저는 사람이 많은 장소에거 차에서 내리는 그 법사에게 큰 소리로 "땡중"이라고 부르는 바람에 군종감이 안절부절 하기도 했지만 중은 중이고 목사는 목사이며 신부는 신부로 그 소임을 다하는 것이지 그들이 나름대로의 직분으로 신도들보다 상위의 그룹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이들은 신앙의 대상이 되는 종교의 공복으로서 일반 신도에 대해 더 친절하고 자세하게 종교에 대한 안내를 해야 하는 입장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직자들은 나름대로 어려운 과정을 거쳐 그 위치에 선다는 것도 잘 알지만 국회의원이 선거전에는 읊조리다가 선거가 끝난 다음에는 거들먹 거리는것과는 근분적으로 행동을 조심해야 할 위치가 바로 성직자의 위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미리 말씀드렸듯이 저는 어느 종파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이기에 훨씬 자유롭답니다. 절을 찾아도 신도라면 우선은 한 단계 깔고 덤벼드는 중도 없고, 마음의 평정을 찾는 방법으로 아무도 없는 교회에 들어가 명상에 잠기는 시간을 가져도 특별히 나무라는 목사나 신부는 없습니다(그러나 모 교회에 들어갔다가 신도가 아니라는 답변을 들은 목회자가 나가라고 해서 쫒겨 나온적이 몇 차례 있었습니다. 절간에서는 안그러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제 의지와는 관계없이 종교단체의 의식에 참여하게 되는 경우가 가끔 생깁니다. 그것은 결혼식이라든가, 영결식 등등 피치못해 가야할 사정입니다. 저는 나름대로의 기준을 설정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가서는 열심히 찬송가를 부르고 주기도문을 외우고, 십계명을 봉송하며, 절에 가서는 사홍서원을 외우고 찬불가를 부르면서 각각의 종교행사에 최선을 다해 임한다는 것입니다. 저를 지켜보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제가 독실한 신자로 보이기 쉽상일 것입니다만 제가 갖는 기준은 어느 종교이건 그 종교적 상황에 대해서는 존중하고 인정을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우스개 소리로 제 신앙은 '기불릭+기타 잡교'로 되어 버린것 같습니다.

 저는 이 글에서 어느 종교를 비난하거나 폄하하고자 하는 의도가 없음을 말씀 드립니다. 이번 D고교의 사태를 바라보는 제 의견은 적어도 이 학생보다 세상을 더 살아왔다는 사람들의 처사가 너무 속이 좁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학생을 마귀로 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제 저녁 이 학생을 다룬 프로그램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러한 처사가 오히려 그 종교에 대한 반감을 더욱 키운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그 학교의 행정실장이 전화 인터뷰에서 밝히는 내용은 더욱 기가 막혔습니다. 기자의 종교에 대한 자유는 기본권이므로 인정을 해야하지 않겠느냐는 물음에 "우리학교에서의 종교는 개인이 갖는 기본적 자유에 우선합니다"라는 답변입니다. 제 짧은 소견은 다른 사람에게 존경을 받으려면 자신도 남에게 존경을 표하듯 종교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종교가 인정을 받으려면 다른 종교도 인정을 해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당이나 절간이나를 방문하였다면 최대한 그 종교에 대하여 예의를 갖추는 것이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불교와 천주교는 활발한 교류는 아니더라도 비교적 교류가 많은 편임에도 개신교는 그렇지 못한것 같습니다. 물론, 전체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비 종교인인 제 눈에 비친 이번의 사태처럼 너무 편협한 사고로 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답답함을 느끼게 합니다. 그 학생은 학생회장도 했으며 전교 1등이라는 성적도 가지고 있었고, 그 학생의 인터뷰 내용에서 느낄 수 있는것은 나름대로 조리있는 자신의 논리를 전개한 똑똑한 학생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학생을 정말로 종교적인 사랑의 차원에서 감싸 안으려 했던 교목에게까지 제재가 가해졌다는 것은 아직 구원 받기를 원치 않아 무종교로 살아가는 제가 느끼기에는 정말로 아리송한 수수께끼 같습니다.

                        < 如      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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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04-07-19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주위에는 무종교, 유신론분도 계시지만, 안티 크리스찬으로 자처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 분들의 생각이나 느낌을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수수께끼 2004-07-19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교인이라는 범주에 들지 않음은 어느 종교이건 그 신앙에 심취하여 아집과 편견에 치우치지 않기 위함이나 마립간님의 말씀처럼 안티로 가는 이유를 크리스천뿐만 아니라 각 종교는 조금 심각하게 분석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안티라는 말은 그 종교에 대한 거부의 의사인데 단지 종교로서의 신앙의 형태에 대해서만인지...아니라면 그 종교(또는 종교인)의 행태때문인지 스스로가 생각을 해 보아야 할것이며 자신의 종교 이외의 종교에 대한 이단적인 취급이 다소 편협한 종교관에서 나오는것이 아닌가도 정확한 교리의 이해로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제가 제 생각을 글로 옮긴것은 어떤 종교 특정 종교를 비판이나 험잡고자 하는 의도가 없으며 제 글에 다소 억지가 있다손 치더라도 혜량해 주시기 바라면서 아울러 어떤 종교인으로서의 시비나 또는 믿음에 대한 권고도 사양함을 사족으로 말씀드립니다.

두심이 2004-07-20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의 선생님들보다 그 학교의 교목으로 계셨던 분의 목소리가 훨씬 이성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종교의 자유라는 제목을 달지않아도 조금 상식밖의 행태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번 서울대 농활팀의 철수를 계기로 예전에 대학생활을 장식했던 농활에서 발생했던 몇 가지 이야기를 회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경암회"라는 학교 써클의 일원으로 농활에 참석을 하게 되었는데 출발 며칠전부터 얼마나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던지 거의 일주일간은 몸이 파김치가 되도록 농활을 대비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적어도 농활에 참석하는 봉사자가 갖추어야할 최소한의 자격요건이라고 할 수 있었던 이 일은 지금도 흐믓하며, 또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농활을 해서인지 지금도 농촌에 가서는 주변의 힘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생긴 경우에는 양말을 벗고 논 바닥에 뛰어들기도 하는데 이런것이 아마 잘 다듬어졌었던 농활을 경험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1. 똥지게를 나르기 위한 맹 트레이닝...

 제가 대학 입학후 처음 맞는 방학에 농활을 출발하는 지역은 충남 예산군 한산면 봉림리라는 마을이었습니다. 예산역에서 내려 흙먼지가 폴폴거리는 삽교 마을을 지나 미리 먹을것을 장봐온지라 어깨 가득 무거운 짐을 지고는 거의 4시간 가량을 걸어서 마을에 도착을 했던 당시에는 아주 오지였습니다. 저희 써클의 회장은 농촌 출신이었는데 신입생에게 체력 단련을 시킨다면서 어디서 구해왔는지 물레틀을 가져와서는 마닐라 포대에 넣고 요리조리 끈을 이용해서 어깨에 맬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신입생들에게 그것을 메고 운동장을 한바퀴씩 돌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키도 제법 크고 힘도 나름대로 빵빵했다고 생각해서 가장 먼저 그 일을 하게 되었는데 막상 양 어깨에 메고나니 이게 보통 무거운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레틀은 온통 통나무로 만들어진 어마어마한 무게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입생들이 낑낑~거리며 운동장을 도는 모습을 회장(농활때는 대장이라고 호칭했습니다)은 자리도 뜨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일명 <똥지게 나르기>라는 이 훈련은 농활 출발전의 7월초의 뜨거운 날씨 속에서 매일 10바퀴씩 5일간 계속 되었습니다. 중간 중간 농활을 위한 자체조달 부식을 사러가서 짐을 지고 오기도 하였지만 물레틀에 비하면 감자 한 가마도 별로 무거운 것이 아닐 정도로 물레틀은 정말 무거웠는데 첫 날, 어깨에 물집이 생기고 아프기 시작했던것이 농활을 떠날때는 딱지가 앉아 별로 아프지 않게 되었습니다.

 농활중에 실지로 똥지게를 지는 일은 없었기에 농활을 다녀와서는 은근히 5일간의 트레이닝에 대한 불만도 있었는데 다녀와서 보고회를 하는 과정에서 회장이 체력단련을 위한 트레이닝의 한 방법이라고 이해를 구하여 경험이 많은 회장의 사전 준비에 경탄을 했습니다. 회장은 농활에서 자칫 발생할 수 있는 체력 저하를 우려하여 미리 체력을 강화토록 하였던 것입니다.

2. 저수지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잠을 잤는데 어찌 대장이 알고 엄벌을??

 농활은 정말로 힘겨웠습니다. 매일 아침 6시 기상...그리고는 각자의 임무를 부여받고는 밥 먹는 시간 빼고는 뙤약볕 밑에서 일을 해야만 했고, 늦은 저녁을 먹고나면 자정을 넘겨가면서 반성회를 가졌습니다. 당연히 졸음은 더위와 함께 우리의 가장 막강한 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느날...저는 저수지쪽으로 논의 물꼬를 만드는 임무를 부여 받았습니다. 오전에는 이 논 저 논의 물꼬를 저수지 방향으로 잡고 말라비틀어진 검은 진흙덩이와 씨름을 하면서 열심히 작업을 했습니다. 농활을 왔으니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지요. 그런데 점심을 먹고나니 우선 식곤증으로 도저히 작업을 수행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논에 난 좁은 농로에서 잘 수도 없고 만약 자다가 수시로 순찰을 도는 대장에게 발각이라도 된다면 저는 그날밤 반성회 시간에는 거의 인민재판식 성토에 시달리게 될것이 뻔하니 몸을 잘 숨기고 잘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그 때 생각난것이 바로 저수지의 물속에 들어가서 자는 것입니다. 마을 저수지라 그리 깊지도 않고 또 저수지의 경사면도 완만해서 안성맞춤이었습니다. 저는 옷을 입은채로 저수지에 들어가서는 완만한 경사지에 얼굴중 숨쉬기 위한 공간만을 물 밖에 내 놓고는 거의 1시간 가량 잠을 잤습니다. 아주 완벽한 피서를 겸한 낮잠이었습니다. 얼굴이 조금 따가웠지만 온 몸이 물속에 담겨 있었으니 정말로 완벽한 피서를 겸한 낮잠이었지요.   저녁 반상회 시간에 각자 그날 수행했던 작업의 설명과 작업량, 앞으로 해야할 작업량 등을 보고를 하는 자리인데 저는 열심히 논의 물꼬를 만들었다고보고를 하는데, 갑짜기 대장이 옆에 있던 몽둥이를 집어 들더니 "엎드려!!"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혹시 잠자는 모습을 대장에게 들켰나보다고 생각하며 엎드려서는 엉덩이가 불이 날 정도로 얻어 맞았습니다.

 매질을 마친 대장은 한번만 더 농땡이 부리고 잠을 자면 정말로 무거운 벌을 주겠노라고 엄포(?)까지 놓는 것인데 그러면서 하는 말이 대원들이 무얼하는지 다 아니까 엉뚱하게 딴짓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제 경우를 예로 들어 설명을 하는데....아뿔싸....물속에서 자는 모습을 들킨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도 몰랐는데 제 얼굴에는 물속에 잠겨있던 부분과 물 밖에 나와있던 인중 윗부분이 확연하게 표시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경험이 많은 대장은 제 얼굴이 이상한 모습으로 탄것을 보고는 나름대로 자신의 경험인지 또는 과거 있었던 경험인지는 모르겠지만 제 행동을 유추해 내었던 것이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거울을 보니.....에고...제 얼굴은 정말로 멋진 가면을 쓴 모습이었습니다.

3. 오늘은 아침 당번 ...메뉴는 뱀탕이다....

 매일 2명이 다른 대원보다 일찍 기상을 하여 대원들의 조식을 장만해야 했습니다. 새벽 4시쯤 일어나서 20여명의 아침밥을 장만을 하는 일인데 밥 단지를 올려 놓고 장작불을 지피며 대충 밥이 익는 냄새를 맡으면서 반찬은 무엇으로 할까를 고민하다가 대원들의 영양 보충을 위한 기발한 생각을 해 내었습니다. 주변에 있던 싸리 빗자루에서 제법 든든한 싸리가지를 몇 개 뽑아서는 농로에 나갔습니다. 농로에는 생각대로 개구리와 물뱀들이 있엇는데 싸리나무 가지를 휘둘러 3마리의 물뱀과 몇 마리의 개구리를 잡아 왔습니다.(음...제가 그렇게 무지막지 하냐구요? 그런게 아니고 농활을 하면서 극한적인 생활을 하다보니 생존을 위한 음식과 잠에 대한 욕구만 강해져서 뭐...눈에 뵈는게 없었습니다....저도 지금 생각하면 기가 막힙니다) 제 아침식사 파트너는 기겁을 했지만 제 계획(그 때는 순전히 대원들의 영양 보충만 생각을 했었습니다)을 듣고는 그 파트너도 동의를 했습니다. 개구리 다리와 뱁의 껍질을 벗기는 일은 그 친구가 했고, 저는 칼로 잘게 다지는 일과 음식을 만드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지금도 뱀을 먹지 않지만 그아직까지 물뱀도 먹는 뱀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개구리와 뱀을 커다란 쇠칼로 열심히 다졌습니다. 아주 잘게 다져진 덩어리는 분명 일반 고기와 다를바가 없어 보였고, 이것을 이용해서 시원한 된장국을 만들었습니다.

 대원들은 "오늘 식사당번 음식솜씨 최고다!!" 라는 찬사와 함께 커다란 가마솥에 담긴 국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먹어 치웠습니다. 저는 먹고 싶지도 않았지만 미처 제가 먹을 국물 조차도 남아있지 않아 먹지를 못했습니다.  그날 저녁 반성회 시간....오늘의 맛있는 요리의 재료를 발표하자 여학생들을 필두로 여기 저기서 웩~웩~ 거리면서 난리들인 것입니다. 그 무섭던 대장은 흐믓한 미소를 지으면서 대원들에게 고단백을 공급해 주느라고 수고했다는 말을 잊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뱀이라면 기겁을 하는데 그 때는 어찌 그런 음식을 만들 용기가 다 생겼는지....지금도 수수께끼(? ===> 어디서 많이 본듯한 단어입니다)입니다.

 제게 있어 농활은 도시보다 뒤떨어진 빈농을 위한 진정한 봉사의 기회로 머리속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대학생활의 낭만이라는 기억은 아예 없고 어떻게 하면 농민들에게 반감을 주지 않으면서(농민들에게는 도시민은 선망의 대상이자 증오의 대상이었으니까요...) 그들의 일을 도울 수 있을까에 대하여 상당히 고심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농활 기간인 20여일은 아예 죽었다고 각오하고 농활에 임했던 것이 당시 함께했던 대원들의 공통적인 마음가짐이었습니다.  이번 서울대생들의 농활 철수 기사를 접하며 제가 겪었던 농활에서의 에피소드 몇 개를 적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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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ylontea 2004-07-09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도 수수께끼입니다... 그래서... 서재 주인 이름이 수수께끼???

호랑녀 2004-07-09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1학년 때는 순진하게 집에다 농활가겠다고 보고했다가 감금!당했고, 그 노하우 때문에 그 담부터는 말을 하지 않고 갔죠. 서울에 남아 공부 좀 해야겠다고 말하면서...ㅋㅋ
경상도 어디로 갔는데, 딸기 하우스를 하는 마을이었어요. 아저씨 한 분이 교통사고를 당해 거의 방치가 된 하우스 몇 동을 책임지고 정상적인 모습으로 돌려놓는 일을 했는데... 한 일주일 걸렸던 것 같습니다.
여대라서 몽둥이 찜질 같은 건 없었구요 ^^
낮에 동네 아이들 데리고 다니면서 놀았는데... 둘째날부터는 다들 차라리 밭에 가서 일을 하겠다고 자원했습니다.

그때 일주일의 경험이, 농부의 며느리가 되어서 가끔 써먹을 수 있었습니다. ^^

조선인 2004-07-09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학년 때 안동으로 지역이 바뀌기 전까지 영양으로 농활을 갔습니다.
그곳은 워낙 물이 귀한 지역이라 규율의 대부분이 물 절약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하루 딱 1번 씻는데 저녁에 물 반바가지로 이닦고 세수하고 발씻고, 그 물로 밭에 물주고.
10박 11일의 기간 동안 머리 감는 건 5일째 밤에 딱 1번 허락되고, 목욕은 불가.
계속 물을 재활용해야 하니 비누나 치약, 샴푸도 쓰면 안되고.
물의 소중함을 배울 수 있었던 정말 귀중한 경험이었습니다.

가을산 2004-07-09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저도 한조각 거들랍니다.
제가 생선회를 처음 먹은 것이 봉사 덕이었으니까요. 어인 일로 비싼 생선회를? ^^

학생이었을 당시만해도 의료봉사를 가면 매일 수백명씩 진료를 받으러 왔었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진료도 하고 역학조사도 하고 보건위생에 대한 교육도 하느라 점심은 먹을 시간이 없고, 새벽에 한번, 한밤중에 한번, 이렇게 두번 식사를 하는데, 마지막 날은 그나마 아침밥도 못먹고 오전진료만 하고 오후에 귀경을 해야 했습니다.

오후에 출발해서 어찌어찌 바닷가의 도시에 도착한 것이 거의 저녁때, 마지막으로 밥을 먹은 것이 전날 저녁이었으니, 거의 24시간을 굶은 샘이었습니다.
그런데, 교수님께서 수고 많았다고 저희를 데려간 곳이 횟집이었습니다. 저는 생선회 못먹었는데.. ㅜㅡ
동기들은 덥썩덥썩 잘도 집어먹고, 생선회는 쑥쑥 줄어들고....
사람이 살자니, 24시간 굶었을 뿐인데..... 저도 생선회를 먹고야 말았습니다.
그 맹맹한 맛이라니.

지금도 생선회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제는 '먹을 수' 있게 되어서 사회생활에 도움이 됩니다. ^^


 

 외국 여행이 잦아지면서 우리 나라가 참 살기에 편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이웃 일본은 우리와 비슷하기는 해도 상점들이 일찍 문을 닫아버려 조금 늦은 식사라도 할라치면 밥을 굶기가 쉽지만, 우리 나라처럼 24시간영업이라는 특화된 가게가 많아 어떤 먹거리나 생필품도 주변에 널려있는 가게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편리함은 세계 어디에고 없답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가게도 별로 없었고 기껏해야 구멍가게 형태의 "점빵"이라는 이름으로 앞쪽에는 나무로 만든 사각형의 틀 속에 이런 저런 사탕을 넣고 유리로 뚜껑을 만든 장식장이 언제나 초입을 지키고 있었죠... 따라서 지금처럼 돈이 있어도 사먹을 것이 별로 없던지라 왕드로프스나 왕사탕 한 알만 입에 넣어도 부자가 된 기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도시락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은 결식아동이 많다고 하는데 예전의 어머니와 현재의 어머니는 사고가 많이 다른 모양입니다. 똑같이 가난속에서 살았기에 반찬이야 어떠하든 도시락을 안가져 오는 급우들은 없었습니다. 보리쌀을 30%이상 반드시 넣어야 했기에 쌀밥을 먹는 집이나 깡보리밥만 먹는 집이나 도시락 뚜껑을 열면 그게 그것인양 비슷비슷해서 깡보리밥을 싸왔다고 창피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만큼 예전의 어머니는 자신은 굶더라도 아이들의 점심 도시락은 꼭 챙겨주었는데 요즘은 돈이 없어 도시락을 못 챙겨주는게 아니라 맞벌이로 바쁘다는 핑계로 도시락을 쌀 틈이 없어 싸주지 못하는 어머니가 많다고 합니다. 글쎄요...그만큼 의식이 변한것이 아닐까 합니다만 옳고 그름을 이야기 할 수는 없을것 같습니다. 도시락에 담긴 반찬은 어떨까요? 반찬이야..어느 집에서 제사라도 지냈다면 그나마 전 이나 산적,고기류를 담아 올 수 있지만, 대부분의 집에서는 계란말이와 김치, 멸치조림, 그리고 콩나물 반찬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요즘 아이들 처럼 다양한 샌드위치나 햄버거, 또는 순 살이 듬뿍 들어간 소고기 볶음밥등은 감히 엄두를 낼 수 없었고, 또 설령 그런 반찬을 가지고 올 수 있다해도 도시락 뚜껑을 여는 순간 먼저 본 사람의 반찬이 되기에 가져올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도시락은 겨울철에 먹는 도시락의 맛이 제일이지요...갈탄을 지폈던 교실에서는 4교시가 시작되기전의 휴식시간에 앞 다퉈 난로위에 도시락을 올립니다. 콩나물 교실 수업이라고 좁은 교실을 꽉 채웠던 많은 아이들의 도시락은 3교시를 끝나는 종이 울리고 선생님이 교실을 나서시는 순간부터 한바탕의 전투를 치르고는 마치 급조된 빌딩 처럼 우뚝 솟아 있게 됩니다. 보통 50~60여개의 도시락이 좁은 난로위에 올라 앉아 있으니 그 모양은 보기만 해도 아찔아찔 하답니다. 난로는 보통 교실의 중앙에 있기에 늘 난로 주변의 아이들은 뜨끈한 열기가 직접 닿는 난로 바로위에 올릴 수 있지만 맨 구퉁이에 앉은 아이들은 언제나 고층 꼭대기에 올리 둘 수 밖에 없습니다. 맨 위에 올라앉은 것은 어떤 때는 찬밥 그대로 먹기가 쉽상이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4교시 수업이 진행되고 조금씩 시간이 흐를수록 밥이 타는 냄새와 더불어 김치볶음밥을 만드는 냄새가 교실에 퍼지게 됩니다. 호랑이 선생님의 수업시간에는 맨 밑에 도시락을 넣었다면 새카만 숯밥을 먹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호랑이 선생님도 시간이 지나면 도시락을 바꾸라고 말씀을 하시고 주번은 장갑을 끼고는 빽빽한 도시락의 맨 밑에 있는것을 위로 올려줍니다. 그 많은 도시락 중에서도 자기 도시락은 귀신처럼 잘 알고 있습니다. 재질이 양은이라 다 똑같을것 같지만 크기가 다르기도 하고 또 똑같은 형태라도 얼마나 오래 사용했느냐에 따라 조금씩 변하기 때문에 내 도시락이 어느 위치에 있다는 것은 대부분 다 알고 있습니다. 보통 도시락의 위치 변동은 한번 이루어지는데 중간에 있던 도시락이 맨 밑바다으로 내려가 있으면 그 때 부터는 밥이 탈까봐 안절부절 하게 됩니다.

 4교시 수업을 마치고는 우르르 달려들어 자신의 도시락을 찾아 갑니다. 어느 녀석것은 방금 갓 지은 밥 처럼 아주 김이 모락모락 나면서 적당하게 덥혀진 반면, 어느 도시락은 아예 새카맣게 타 버려서 먹을 수 없게 된것도 있습니다. 갈탄을 조금 많이 넣어 화력이 강한 날에는 밑의 도시락은 대부분 숯덩이가 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누룽지가 도시락의 절반을 채우게 되기도 합니다. 숯덩이가 되었다고 땅을 치며 통곡을 하지도 않고 어찌어찌 먹게 되고 또 김치나 다른 반찬도 제대로 익었기에 비벼먹기에 딱 좋게 된 아이들은 또 그들 나름대로 맛있게 먹습니다. 문제는 숯덩이를 만든 아이들은 어머니에게 혼 날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지금의 아이들은 이런 맛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시골의 아주 한촌에서 아직도 겨울이면 나무나 갈탄을 연료로 하는 학교라면 몰라도 대부분의 학교는 보일러가 설치가 되어 있고, 최소한 석유 곤로나 전기 난로라도 있으니 예전에 맛 보았던 그런 맛있는 도시락은 이제는 보기 힘들게 되었을것입니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는 빈 도시락에 담긴 숫가락과 젓가락이 딸그락 거리는 소리가 발걸음을 옮길때 마다 나는데, 이 소리를 벗삼아 집으로 돌아가지요....

 지금은 사무실 식당에서 마음놓고 먹을 수 있습니다. 매번 빠짐없이 식사를 한다면 아마도 비만이 될 정도의 고영양의 반찬으로 이루어진 식사입니다만 아직도 도시락에 깃든 추억은 버릴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도시락을 난로위에 올려 놓고 가슴조리던 시절이 더 좋았던것 같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 때는 사람 사는 냄새를 맡을 수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지금이라도 그런 사람 사는 향기를 듬뿍 맡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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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ylontea 2004-06-30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전... 왜 난로위에 도시락을 한 번도 올려놓지 않았을까요?

sunnyside 2004-06-30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다닐 때에는 왕겨탄, 그리고 조개탄을 땠었어요. 수수께끼님 때랑 비교해서 큰 발전은 없었던 듯. 다만 보온밥통이었기 땜에 난로 위에 올릴 필요는 없었답니다. ^^

수수께끼 2004-06-30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론티님==> 아마 보온도시락을 가지고 다니시지는 않으셨는지요? 그거 올려 놓으셨다가는 큰일 납니다. 밥알과 플라스틱이 뒤엉겨붙어 밥알 골라 먹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니까요^^
써니옆구리님==> 조개탄이 갈탄이구요...그래서 연기가 많이 나지 않는데 수위 아자씨가 갈탄 가루 가져와서 물로 비벼서 주먹으로 만드는것도 보셨겠는데요? 에고...그리고 저보다는 덜 쉰세대이신듯...저희때는 그런것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꿨었습니다. 제 동생은 그걸 가지고 다니더군요...긴 끈에 어깨에 매고는 덜렁거리면서 말입니다 ^^~

ceylontea 2004-07-01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온도시락 아니었어도.. 안올렸던 것 같아요... ^^
그리고고등학교 다닐땐 온장고란 것이 교실에 있었어요... 그땐 그래서 온장고를 이용했지요.. 그전에는 그냥.. 찬밥을 먹었던 것 같아요... ^^ (보온 도시락 가지고 다녔던 적도 있긴 하구요.)

수수께끼 2004-07-01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온장고라는 괴물이 버티고 있었군요. 와아~ 완전히 브르주아적인 환경에서 교육을 받으셨으니....제가 어렸을때와는 너무도 격세지감을 느끼게 되는군요...
 

 예전에는 지금처럼 수도관이 각 가정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지금이야 꼭지만 틀면 콸~콸~ 물이 쏟아져 나오지만 서울에서도 수돗물을 먹기란 그리 쉬운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정수 시설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수도관을 지금처럼 거미줄 같이 땅 속에 매설할 형편이 되지 않았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동네마다 공동수도라는 것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꼭지도 지금의 꼭지보다는 상당히 컸었고 물도 틀기만 하면 땅바닥이 패일 정도로 콸~콸~ 거리면서 나왔습니다.

 제가 어렸을 적에는 어깨에 맬 수 있는것이 책가방 말고 두 개가 더 있었습니다. 그 하나는 똥통이었는데 이것은 이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메고 "똥 퍼요~~"라고 동네를 돌면서 소리를 질러댔지요...그리고 또 하나가 물통을 지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때만 하더라도 물통을 져 날라야 했는데 언제 세상이 이렇게나 편리하게 변해버렸는지...

 학교에서 돌아오면 키에 맞지 않는 지게를 메고는 공동 수돗가로 달려가야 했습니다. 일찍 간다고 가 보아도 물이 쏟아지는 수도꼭지는 저 멀리 보이고 양철로 만든 동그란 물통은 순서를 기다리며 늘 길게 줄지어 있었습니다. 하여간, 그 당시에는 동네 철물점에서 파는것의 주종을 이루는 것이 낫, 삽, 호미, 쇠스랑, 그리고는 물통이었습니다. 양철판을 동그랗게 말고 바닥을 대고는 아구리에는 가로나무를 대서 중간 아랫쪽에 지게가 걸릴 수 있도록 홈을 판 것이었습니다. 제 차례가 되면 공동수도에서 돈을 받는 아주머니에게 얼마간의 동전을 내고는 물통 가득 물을 받습니다. 그리고는 지게를 메는데 이 지게라는것이 등판을 이루는 나무판에 엇갈리게 긴 나무를 걸치고 그 끝에는 쇠갈고리 모양의 걸쇠를 달은 것인데 이 걸쇠를 물통의 홈에다 걸고는 집으로 돌아 오는 것이었습니다.

 수돗가에서 물을 받을 때는 물통 가득한데 지게를 지고 집으로 돌아오면 조심조심 해서 오면 4/5정도가 남고, 조심하지 않으면 물통에는 2/3 정도만 남아 있게 됩니다. 물론, 어른들이 지게를 진다면야 힘도 넘치고 하니 그리 많은 물을 쏟지 않겠지만 어린 아이들이 지는 지게는 요령도 모르고 지기 일쑤이기에 걸음을 옮길 때 마다 물은 마른 흙바닥을 튕기며 떨어져 나갑니다. 지게지는 요령이란 물이 흔들리는 주기와 맞추어 걸음을 옮기는 것인데 찰랑거리는 물이 앞쪽으로 쏠리냐 뒷쪽으로 쏠리냐는 단지 감으로만 느껴야 하는데 그게 그리 쉬운일은 아닌 것입니다. 그나마라도 집에 도착해서 커다란 물독에 부으면 제법 독을 채울 수 있었고, 한 번, 두 번 물지게를 져 나르면서 물독의 차오르는 양으로 앞으로 몇 차례를 다녀와야 물긷기를 그만 할것이라는 것을 미리 예상 할 수 있었고, 너 댓번을 공동수도에 다녀와야 물긷기는 끝을 낼 수 있었습니다. 물긷기를 마치고 시장통에 심부름이라도 갈 때면 길게 늘어선 물 긷는 양동이를 보면 미리 물긷기를 끝내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을 느끼기도 하였습니다.

 집에는 우물과 펌프가 있었으나 여기서 길어 올리는 물은 말 그대로 허드레 물로 사용할 정도입니다. 식수로 사용하기에는 빗물이 고이는 우물이나 펌프로 퍼 올리는 지하수는 안심을 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가뭄이 심하면 그나마 이런 우물물이나 펌프로 끌어 올리는 물 조차도 나오지 않습니다. 우물은 말라서 두레박이 바닥을 벅~벅~ 긁어대고 펌프는 아무리 밑물을 부어도 뾰옥~하며 지하로 빠져 들어버리고 맙니다. 이렇게 가뭄이 계속되면 서울시에서는 물차를 보냅니다. "물차 왔데요~" 하는 소리가 들리면 이 집 저 집에서는 물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란 그릇은 모두 동원하여 들고 나갑니다. 트럭 뒷쪽에 꼭지가 달린 물 탱크 차량은 정신없이 들이미는 물통을 정리하느라 난리지만 한 방울의 물이라도 더 받아가려는 사람들의 입장은 그게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트럭이 높으니 물통들은 얼굴 윗쪽으로 날라다니고...정말 난리 난리 이런 난리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식수를 받아 두어야 밥이라도 짓고 숭늉이라도 마실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채 아스팔트가 깔리기 전에 땅을 파고 수도관으로 사용되는 커다란 시멘트 관을 뭍기 시작한것은 중학교에 들어가서의 일입니다. 어느 날, 집에는 계량기가 뭍히고 그 계량기 끝쪽으로 마당에 수도꼭지가 뭍히고는 급기야 몇 번 꺾이는 듯 싶더니만 학 대가리 모양의 수도꼭지가 설치 되고 그곳으로 물이 콸~콸~거리며 시원스럽게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요즘같이 더운날...학교에서 돌아오면 할머니께서는 제게 커다란 선심이라도 쓰시듯 "얘, 거기 수돗물에 등목을 하거라"고 하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조금이라도 수돗물을 세게 틀어 놓으면 "물 아껴써라"고 말씀 하셨는데 땀으로 끈적거리는 웃 몸을 흐르는 물로 씯을 수 있다는 것은 여간 시원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야금 야금 우리 생활 속에 파고 들던 수도는 아파트가 세워지고 집들이 편리한 양옥으로 고쳐 지어지면서 언제 그렇게 빨리 퍼져 나갔는지 어느 집이고 이제는 물을 쓰는데 불편함을 모르게 되었습니다. 제 어릴 적 이야기가 꽤나 먼 옛날 이야기 같음에도 실은 그리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랍니다. 그만큼 우리의 생활은 급속한 발전을 거듭해 왔던 것 같습니다. 또, 그런 급속한 발전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어렸을 때 물을 길어 나르던 시절을 잊고 살아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소설속에 그런 이야기가 나오면 당시의 고생을 이해하기 보다는 우리네 옛 물정에 동정이 일기까지 하는 것이겠지요....

 제 어깨는 지금도 딱! 벌어져 있습니다. 물론, 저보다 두 살 아래인 제 동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둘다 비지땀을 흘리면서 물을 길어 나른 경험이 있기에...키에 어울리지도 않는 물지게를 지었던 경험이 있었기에 오늘은 이렇게 떡 벌어진 어깨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지금처럼 복잡하고 머리아픈 세상속의 자신만 앞세우는 삶 보다는 물차에서 물을 얻지 못한 이웃에게 내 먹을 물을 나눠주던 정이 담뿍 담긴 그런 옛날이 오히려 더욱 그리워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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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4-06-29 0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심에 사는 우리야 펑펑 수도물을 누리지만, 이제 우리나라는 물부족국가라죠.
그게 옛날이 그리운 이유중 하나인 거 같네요...

메시지 2004-06-29 0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펌프경험은 있습니다만 물지게는 경험이 없어요. 펌프도 아주 어렸을때 시골 외할머니댁에서 신기해서 해본 것이 전부구요. 물지게는 대학때 연극하면서 후배가 물지게를 지고 들어오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때 소품 만들고, 연습시키느라 물지게 지는 척은 해본 적이 있어요.
불편하거나 부족했던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은 참 애틋한 것 같아요. 그 평범한 일상들이 다 보석같은 추억이 되는 것을 보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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