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세만큼이나 오해도 많이 받았던 인물, 나 역시도 나혜석을 피상적으로만 알았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라지만 남은 그림으로 봐서는 잘 그렸다고 하기 어려운 화가, 연애하는 신여성, 남편 덕에 세계일주한 여자, 거기서 바람이 나 이혼하고 그 전말을 또 매체에 발표한 여자….… 그러나 2000년대 들어 다시 만난 나혜석은 정말 글을 잘 썼다. 문장의 미려함을 말하는 게 아니다. 사고는 21세기적이었고, 지평은 식민지 조선을 넘어 유럽으로 향했다. 글로 좌충우돌한 것은, 쏟아질 비난을 몰라서가 아닌 것 같다. 논쟁의 시대였고, 논쟁의 탈을 쓴 명사들의 여혐 발언‘도 지면은 기꺼이 신던 시절이었다. 거기서 나혜석은 여성 선각자로서 비난을 한몸에 받으면서도 제 역할을 했다. 다만 그림에 대해서는 답답한 점이 남는다. 151


일본영사관 부영사로 있을 당시 나혜석 부부는 독립운동가들의 밀입국을 도왔다. 그러나 이후의 삶은 갈라졌다. 전 남편 김우영, 가정 파탄의 원인제공자였던 최린, 그리고 도쿄 유학 시절부터 교유했던 춘원 이광수까지..… 나혜석과 가까웠던 남자들은 친일행적으로 해방 후 반민특위에 회부됐다. 반면 가정도, 작품도, 종국에는 이름까지 다 잃은 나혜석은 신사참배도 거부하며 자기만은 지켜냈다.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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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라는 우주를 건너는 너에게 - 수학자 김민형 교수가 아들에게 보내는 인생 편지
김민형 지음, 황근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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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자 김민형 교수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부제가 달려있는 이 책은 이미 2014년에 출간되었고 이 책은 그 책의 개정증보판이라는 것은 책을 펼쳐들고서야 알았다. 그리고 아니 그래서 그의 아들이 이 책에 담겨있는 편지를 받을때는 좀 많이 어린친구였다는 것도. 

책을 읽고 김민형 교수가 아들에게 편지를 보낸 시기가 언제인지 찾아봤다. 2005년,이라면 나 역시 아주 잠깐이기는 하지만 독일의 퀠른 성당에 갔었는데 내가 갔을 때는 보수공사 중이어서 첨탑의 한쪽이 가림막으로 가려져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성전에 대한 기억은 흐릿하지만 그 높았던 종탑은 잊을수가 없는데 어떤 건축학적이나 미학적이거나 역사학적인 관점이 아니라 그저 퀠른 성당의 전체를 사진에 담고 싶었는데 그 가까이에서는 바닥에 누워봐도 성당 전체를 담을 수 없었던 것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같은 것을 보아도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이 다르고 기억이 다르고 그에 대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것도 다르다. 그래서 여행에세이를 좋아하는데 2달여간의 유럽 일대를 다니며 보고 싶은 아들에게 자분자분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이라니, 더구나 그 글이 인문학적 글쓰기를 하는 수학자 김민형 교수의 글이라니 책을 읽기전부터 기대가 컸었다. 그런데 확실히 어린 아들에게 보내는 글이라 - 그 자신은 이 글 역시 선행학습이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걱정할만큼 좀 깊이있는 글들이 있기는 하지만 -  좀 더 여행지의 풍경에 대한 이야기를 기대한 내게는 기대감이 좀 달랐다고 할지... 조금은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글이었다. 


기억에 남는 이야기중 하나는 '다양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며 교류가 많아지는 것은 좋은 면이 많겠지만 수학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각 나라마다의 개성있는 연구 방식이 사라지는 것은 좀 아쉽기도 하다는 동료 수학자의 이야기는 또 다른 측면에서 '세계화'를 떠올려보게 한다. 

만약 내 주위에 아이가 있다면, 조카든 주일학교 아이들이든 이 편지글을 함께 읽고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는 생각도 잠깐 해봤다. 암기할수는 없지만 함께 엘리어트의 시를 낭송해보기도 하고 슈베르트의 노래를 들으며 생각의 지도를 같이 그려보기도 하며 서로 다른 것을 지닌 사람들의 다양성을 인정하며 세상이라는 책을 함께 읽는다... 라는 생각을 해 보면 그것만으로도 왠지 즐거운 시간이 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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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말하네
잠은 고마운 것, 내 생은 돌 속에 단단히 갇혔네
그래서 더욱 고마운, 잘못과 오욕은 남으리니 내게는 시간도 행복을 주지 못하네
비탄에 무감해지는 것만이 행복일 뿐
그때 되면 그대 날 깨우지 않도록, 조용히 말해주오.
잠은 고마운 것, 그리고 더욱 고마운 것은
대리석이 되는 것, 뻔뻔스러운 잘못과 비탄이퍼지리니, 그저 듣지도 보지도 않는 게 최선
그때 날 깨우지 말아주오, 간청하니. 쉿, 조용히 말해주오
오라, 친절한 잠이여, 죽음의 얼굴이여
와서 내 옆에 누워, 빨리 떠나지 마오
생명 없이 누워 사는 것 얼마나 달콤하리오
그래서 죽음 없이 죽는 것 얼마나 달콤하리오



***

미켈란젤로의 자작시를 위즈워스가 옮긴것이라는데.
생각이 복잡한 요즘. 아무 생각이 없는게 얼마나 달콤한 유혹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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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12 03: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엇이 옳은 방식인지도 여전히 모르겠다. 출구 없는 모욕과 비참만 남아 있을 때, 정의는 어떤 방식으로 움직여야 하는가. 수시로 생각해보는데, 요즘은 이런 질문마저 바닥에 묶인어떤 삶들에 대한 무례인 것 같아 차마 묻지 못하겠다. 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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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을 딛고 서는 힘


사람의 삶이라는 게 제멋대로 움직이는 동물의 삶 같지만,
실은 한자리에 꽂혀 한자리에서 늙어가는 식물의 삶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제 수명 다한 식물을 뽑아내다보면 흙 위에서 어떤 꽃을 피웠고 어떻게 시들었든 한결같이 넓고 깊은 흙을 움켜쥐고 있다. 바닥을 치고 딛는 힘이 강할수록 꽃도 열매도 실하다. 사는 게 어려울 때, 마음이 정체될 때, 옴짝달싹할 수 없게 이것이 내 삶의 바닥이다 싶을 때, 섣불리 솟구치지 않고 그바닥까지도 기어이 내 것으로 움켜쥐는 힘, 낮고 낮은 삶 사는 우리에게 부디 그런 힘이 있었으면 좋겠다. 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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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을 치고 딛는 힘.
막장이 끝이 아니라 그곳이 새로운 시작이라는 걸 의식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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