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기에는 저마다 짊어져야 할 고유의 몫이 있다.
는 사실을 아는 데에도 나는 이런 시간과 훈련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그걸 몰라서 ‘내가 옆에 있는데 오빠는 왜 매일 힘들까?‘라는 생각이 자꾸만 나를 섭섭하게 했다. ‘삼시세끼 밥을 차려주는 날 위해 상담은 빠지지 않고 가줄 순없는 거야?‘라는 투정과 심술이 볼멘소리로 터져 나오던여러 날들을 보냈다. 그때마다 그는 "지금 간신히 견디고있는 중이야"라고 대답했고 그제야 나는 ‘아차!‘하고 말았다.
아차 싶은 순간이 반복되면서 내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자세는 방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의 우울증을 낫게 할 순 없지만 적어도 악화시키지는 말아야지. 그 후로는 더 이상 상봉이가 왜 하루 종일 게임을 하는지 이유를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매일 집에만 •있는 그가 도저히 힘들어서 같이 장을 보러 나가지 못한다.
말해도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점점 ‘우울증이니까‘라는 이유를 생각하지 않아도 그의 하루가 원래그런 모양으로 생긴 것처럼 별나 보이지 않았다.
사실 방관에는 다른 이의 힘듦을 지켜봐 줄 수 있는인내와 그가 자신의 몫을 해낼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그래서 애정하는 것에 쉬운 방관은 없다. 애정할수록 그의힘들은 나의 힘듦이 되고, 자신의 몫을 해낼 것이라는 믿음 뒤에는 혹시나 하는 염려가 자꾸만 자꾸만 따라붙기 때문이다. 특히 ‘죽음‘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는 더욱 그렇다.
죽고 싶다는 그 마음까지도 인내와 믿음으로 눈감아 줘야하는 것인지, 그렇다면 도대체 방관자는 무슨 쓸모가 있는지 회의가 든다.
나는 우울한 상봉이가 어떤 생각을 하게 되고, 그것이 어느 결론에 이르게 되는지, 결코 그 생각의 속도를 쫓아가지 못할 것이다. 가끔 그가 용기 내어 들려주는 말을 통해 어떻게 그 마음까지 도달했는지 헤아리다 코끝만 찌릿해질 뿐이다. 140-141 - P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