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인간으로 퇴화하지는 마라."
친구는 늑대에게 이런 말을 했다.
호모는 절대 누구도 물지 않았지만, 우르수스는 가끔 물곤했다. 적어도 무는 것이 우르수스의 특권이었다. 우르수스는 인간 혐오자였으며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 곡예사가 되었다. 생계탓이기도 했다. 먹고사는 일이 사람의 신분을 결정짓기도 하는법이다. 게다가 인간 혐오자인 곡예사는 자신을 더 복잡하게 만들기 위해 혹은 자신을 완성시키기 위해 의사 노릇도 했다.
15



 우르수스는 카리브 지역 인디언이 되는 것을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그는 혼자 사는 사람이 되었다. 혼자 사는 사람은 문명 세계가 인정한 야만인의 축소판이다. 사람이란 떠돌면 떠돌수록 그만큼 더 외로워지며 그것에서 끊임없는 이동이 시작된다. 그는어디에 정착한다는 것을 길들여진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는 자신의 길을 계속 가면서 인생을 보냈다. 도시들을 볼 때마다 그의 안에서는 잡목림과 빽빽한 나무들, 가시덤불, 바위굴등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진해졌다. 그의 진정한 고향 집은 숲이었다. 광장의 소음은 나무들의 함성과 비슷해 타향에 왔다는느낌이 크게 들지 않았다. 군중이 사막에 대한 욕구를 어느 정도까지는 충족시켜 주는 것이다. 그는 문과 창문이 있어서 일반 주택을 닮은 오두막이 불만이었다. 동굴 하나를 네 바퀴 위에 올려놓고 유랑했다면 만족했을 것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그는 미소 짓지 않았지만 웃었다. 가끔, 아니 상당히 자주, 씁쓸하게 웃었다. 미소는 동의의 표시이지만웃음은 대개 거부의 의미가 담겨 있다.
그가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인간을 증오하는 것이었다. 그의 그러한 증오는 집요했다. 사람들이 그에게 데려오는 환자들에게 그는 인간의 삶이 끔찍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밝혀주고 백성을 짓누르는것은 군주, 군주를 억누르는것은 전쟁, 전쟁을 짓누르는 것은 흑사병, 흑사병을 덮치는 것은 기근이다 등 모든 재앙은 어리석음으로 초래된다는 것을 말해준 뒤,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벌의 요소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죽음이 해방이라는 것을 인정한 다음에야 치료를 했다. 45-46


수다가 밤의 침묵보다 덜 음산하지는 않다. 밤의 수다에서는 잊힌자의 노여움이 느껴진다.
밤은 하나의 존재이며 밤과 암흑은구별해야 한다.
밤 속에는 절대가 있으나 암흑속에는 다양성이 있다.문법 논리는 암흑에게 단수(數)를 인정하지 않는다. 밤은 하나이며 암혹은 여럿이다.
밤의 신비를 간직한 안개는 그 자체가 산만하고 덧없으며 무너짐과 불길함을 가진다. 그 속에서는 더는 육지를 느끼지 못하고 다른 현실만을 느낀다. 무한하고 규정할 수 없는 어둠 속에는 살아 있는 무엇, 혹은 누군가가 있다. 하지만 살아 있는 것은 우리 죽음의 일부이다. 우리가 이 지상에서 삶의 여정이 끝날 때, 그러한 어둠이 우리에게 빛이 될 때, 우리의 삶 저 너머에 있는 생명이 우리를 가져갈 것이다. 그때를 기다리며 생명은 우리를 더듬는 것 같다. 어둠은 압박이다. 밤은 우리의 영혼에 대한 일종의 지배다. 어떨 때는 묘석 뒤에 있는 무언가가 우리를 잠식하는 것을 느낀다.
그런 미지의 존재가 우리와 가까이 있다는 사실이 생생하게느껴지는 때는 바로 바다의 폭풍 속에 있을 때이다. 그 속에서는 공포가 기이함을 먹이로 삼아 더욱 커진다. 인간 활동을 중단시킬 수 있는 제우스는 자신의 마음에 들도록 사건을 만들기위해 변화무쌍한 질료, 일관성 없는 사건, 그지없는 무질서, 편견 없는 확산력 같은 것을 마음대로 사용한다. 폭풍이라는 신비는 매 순간 우리가 알 수 없는 의지의 변화를 표면적이건 혹은 실질적이건 간에 받아들이고 실행한다.
 시인들은 그것을 파도의 변덕이라 불렀지만 그러나 변덕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연에서 뜻하지 않은 일들이 일어날 때 그것을 변덕이라 부르고, 운명에서 일어날 때는 우연이라고 부르지만 그것은 모두 우리가 희미하게 포착할 수 있는 법칙의 일부이다. 168-169


바킬페드로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는 가장 보잘것없으나 가장 무서운 자였다. 바로 질투하는 자였던 것이다.
질투는 왕궁에서 언제나 할 일이 있다.
궁정은, 질투하는 자와의 대화가 필요한, 건방지고 무례한 자들, 할 일 없는 자들, 쑥덕공론에 굶주린 부오한 게으름뱅이, 건초 다발 속에서 바늘 찾는 자들, 재난을 만드는 자들, 조롱당한 조롱꾼들, 멍청이들로 넘쳐난다.
사람들이 또 다른 이에게 이야기하는 악이란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이란 말인가!
질투는 남의 일을 정탐하는 사람을 만들어 내는 아주 좋은재료이다.
질투라는 자연스러운 열정과, 염탐질이라는 사회적 기능 사이에는, 매우 깊은 유사성이 있다. 정탐꾼은 마치 사냥개와 같이 다른 이를 위해 사냥을 하고, 질투꾼은 고양이처럼 스스로를 위해 사냥을 한다.
하나의 강렬한 자아, 그것이 질투꾼의 진면목이다.
391-39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