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간의 아주 깊은 역사 - 생물과 인간, 그 40억 년의 딥 히스토리
조지프 르두 지음, 박선진 옮김 / 바다출판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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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정확히 말해 오늘 새벽 올린 리뷰가 본서에 대한 소개 보다 너무 한 측으로 치우친 내용만 언급한듯해서 본서에 대한 소개를 다시 한번 남기려 한다. 

본서는 이미 이전 리뷰에서 언급했듯 또 책의 목차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진화와 생물학적 전개와 신경과학과 심리학적 영역으로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진화에 대한 영역에서 인상 깊었던 내용은 둘이었는데... 진화에 대한 대목을 서술하는 저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원핵생물이 다른 생물을 삼킨 과정 중 특별한 사례가 인상적이었다. 그 원핵생물의 본능적 행위가 다세포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미토콘드리아를 내포한 다세포 생명체로 진화하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미토콘드리아와 한 몸이 된 다세포는 에너지 대사가 몇 차원 업그레이드되었고 그로 인해 산소를 이용하고 이산화탄를소 배출하는 순환이 더욱 증대되었다. 다른 식물로 진화한 생명체들은 이산화탄소를 대사로 이용하며 산소를 배출하게 되었는데 이 둘의 상호의존적 생명활동이 진화를 더욱 가속화 시켰다는 대목에서 이기적인 선택과 이타적인 선택이 상호 호환적인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생명체의 진화상의 분기를 설명하는 대목들에서는 생명체의 진화란 어떠한 정점으로 향해가는 것이 아니라 나무의 가지가 각기 자라나듯 서로 연계한 분기를 드러낼 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신경과학과 심리학을 설명한 대목에서는 인간의 의식과 감정에 대한 저자의 설명들에 배움도 있었으나 약간의 반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배움이 컸던 부분이라면, 대뇌 각 부위가 아래 사진과 같은 해당 역할들을 지니는데 이 모두가 연계하여 인간의 의식을 창조해내는 과정을 저자는 몰입도 높게 서술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계와 작용에 대한 설명은 불교의 아비달마와 유식학을 떠오르게도 하였는데 현재까지의 신경과학적 발견으로 인간의 의식을 밝혀나가는 것이 인간에 대해 이해하고자 하고 인간의 의식에 대해 설명하고자 하던 선조들의 앞선 노력들을 돌아보게도 만들었다. 그리고 전두엽의 전두극과 시각피질 이하 각 영역들의 작용을 설명하는 것이 후천경과 상단전과 인당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선도 수행체계의 가르침을 떠올리게도 했는데 한 편으로는 전두극과 전대상은 요가 수행체계에서 중시하는 아갸 차크라와 소마 차크라를 아우르는 것 같았다. 이들의 역할, 기능에 대한 요가 체계의 가르침이 현대의 신경과학의 가르침과 과연 다르기만 할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현대의 신경과학자들의 관심은 불교 수행 중 선이나 위빠사나에 치우쳐 있지만 언제가 꾼달리니 요가나 선도의 소주천에 대한 연구를 신경과학자들과 생물학자들이 함께 시행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저자의 설명들에 반감이 들더라는 부분은 그가 진화를 생명체의 분기가 나뉘는 것이지 어떠한 정점을 향해가거나 인간이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한편 다른 측에서는 인간 대뇌의 기능과 작용을 설명하며 타 동물군의 감정까지도 부정하면서 인간이 우월하다는 이율배반적인 논리를 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다 하다 저자는 다른 동물들이 인간의 감정과 같은 방식으로 작용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니 다른 동물들은 감정이 없다는 억측까지 하고 있다.(감정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 가능하지 않으므로 없다는 것이 무슨 논리인 것인지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에 설 수 있도록 하는 근거들은 지난 리뷰에서 몇몇 언급했다. 이미 인간의 대뇌보다 더 큰 대뇌는 같은 포유동물인 돌고래나 고래도 가지고 있는 바이며 그들의 대뇌피질의 짜임새는 인간과 견주어도 될 정도이다. 돌고래의 경우 1960년대 외계인 접촉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돌고래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였다고 하는데 돌고래가 영어 어휘들의 뜻을 충분히 숙지했다는 증거는 없으나 상당한 수준의 영어 단어들을 구사하고 기초적인 회화 발음을 소수 따라 했다는 기록이 근래의 다큐멘터리에도 남아있다. 돌고래가 자신들의 물질적 정신적 영역에서 정의한 개념들과 인간의 개념들이 동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 인간의 소리로 개념화된 어휘들을 가르친다고 그들과 완벽한 정신적이고 정서적인 교류를 할 것이라는 기대는 지나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인간의 개념을 몇몇 가지 정도는 돌고래에게도 가르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고릴라에게 수화를 가르치자 대화가 가능해진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리고 해당 돌고래에 대한 에피소드를 좀더 이야기하자면 자신에게 실험을 진행하던 동물학자인 여성에게 과도한 친밀감을 표하던 이 돌고래는 해당 실험이 중단되고 실험 중단과 함께 그녀와 헤어져 다른 열악한 수조로 이동했다고 한다. 그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이 돌고래는 의식적으로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서 호흡을 해야 하는 돌고래의 특성에도 불구하고 물 위로 올라오지 않고 수조 바닥에서 자살을 했다고 한다.)


인간은 지상의 동물들 중에서는 월등한 도구 사용과 도구 개발의 능력을 갖추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구 내 모든 동물군들과 다양한 측면... 지성과 감성, 공감능력, 사회성, 자연친화성, 행동화하는 추진력, 투지, 인식, 변별능력, 문제 해결 능력, 추상적 사고 등등을 비교하자면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편파적인 채점 기준을 약간만 양보하더라도 인간은 모든 면에서 우월한 존재는 아닐 것이다. 나로서는 각 동물들의 장점과 비교하자면 도구 개발의 치밀함과 도구 사용의 정교함, 인간만의 언어를 기반으로 한 추상적 사고 능력 등 몇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인간이 내세울 것이 그다지 없을 것이라고 '예측'한다. 


나는 한때 생물학을 잘 모르고 현대의 진화론이 말하는 진화의 분기를 모를 때는 인간은 진화의 정점이며 과학의 발전이 완성화되어 갈 때쯤에 인간은 전지하고 전능하다는 신과 다를 바 없는 수준으로 과학을 배경 삼아 진화하리라 믿었었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등장한 이후에는 인간 역사의 정점은 현재이며 진화를 다른 차원으로 급진전시킬 주인공은 양자컴퓨터화된 인공지능이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진화에도 정점이 있다면 보다 획기적으로 진보한 인공지능이 그 정점일 것이다. 전지와 전능은 인간이 아니라 그들의 몫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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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의 아주 깊은 역사 - 생물과 인간, 그 40억 년의 딥 히스토리
조지프 르두 지음, 박선진 옮김 / 바다출판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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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의 아주 깊은 역사]라는 제목은 참으로 깊이 있는 의문을 이끌어내는 제목이 아닌가 싶다. 이 제목만으로도 그리고 책 소개글에 제기한 '나는 누구인가?' '인간은 다른 동물과 어떻게 같고 또 다른가?' '감정은 만들어진 것인가?'라는 누구나 한 번쯤 가져봤을 법한 의문만으로도 이 책은 제법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신경과학자가 저술한 책이기에 제목에 걸맞는 그리고 문제 제기에 걸맞은 해답을 제시할 것이라는 기대를 불러오기도 한다. 


저자의 전공이 신경과학이라다 보니 뇌라는 대목에서 인상 깊은 해답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간의 느끼는 뇌, 놀이하는 뇌, 소비하는 뇌, 성취하는 뇌 등 뇌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에 흥미로웠는데 저자는 뇌를 어떠한 측면에서 바라보고 서술해 나갈지 기대하게 되었다. 현재까지의 과학의 발전상이 제시하는 인간상은 무엇일지도 궁금한 바였고 말이다. 저자가 그리고 지금까지 생물학과 신경과학이 인간을 인간으로 정의하는 요소들은 무엇일까? 인간이 인간으로서 지성과 본능과 감정... 의식을 지니게 되기까지의 진화의 역사를 신경과학은 어떻게 풀어내어줄까 하는 기대가 자못 컸다. 이 책의 부제가 [생물과 인간, 그 40억 년의 딥 히스토리]인데 인간에 대해 규명하자면 당연히 다른 생물들과 비교, 분별해야 할 테고 그러자면 40억 년은 응당 돌아보아야 인간을 정의할 실마리들이 나오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본서는 part1부터 part7까지 진화의 선상을 담고 있고 part8~15까지 신경과학을 통해 기억과 의식, 감정을 다루고 있다. 전체 66장으로 짧게 서술하며 비전공자들이 느낄 지루함에 대한 배려도 적지 않은 것 같다. 초반에 인간에 대해 저자는 진화 선상의 다른 분기일 뿐이라는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인간을 생명체 중의 한 무리로서 대한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본서를 일독하고 돌아보니 프롤로그부터 저자는 감정까지도 "겨우 몇백만 년 전 인간의 뇌에서 진화적 변화가 일어나 우리 종에게 언어와 문화와 자기 인식이 생겨났을 때 발생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인간의 의식에 대해 논하는 장이 시작하며 기억과 인식, 의식에 대한 현재까지의 신경과학과 심리학적 발견을 알아가는 것은 흥미로웠다. 하지만 감정에 대한 장들은 저자가 "인간을 제외한 다른 동물들이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감정을 느끼는지는 인간이 알 수 없는 바"라고 단언하는 데까지는 수긍할 수 있을지 몰랐지만 그것을 "알 수 없으므로 다른 동물들은 감정을 느낀다고 할 수 없다"라는 식으로 단정짓는데서는 저자의 직관에 동의할 수 없었다. 저자는 다른 동물들이 감정을 느낀다고 하는 대다수의 동물학자들이 동물들의 행동과 반응만을 보고 동물에게 감정이 있다고 단정 짓는다며 그것은 직관일 뿐이라고 단언한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하는 '동물에게는 감정이 없다'는 주장이 직관이 아니라는 것은 어느 모로 보아도 모순이지 않은가? 


단지 인간의 그것과 같은지 알 수 없으므로 없다라는 것이 논리에 맞는 서술인 것인가? 게다가 감정을 (여기까지는 수긍했다)주관적 경험이라고 하며, 고차 인식과 지적 기능을 더하는 데 이건 1차적 감정과 2차적 언어를 대입한 해석에 따른 재차의 감정까지 아우르는 것이기에 저자의 주장은 부분적 오류가 있다고 생각된다. 


아마도 그것은 저자가 동물들로 과학적 실험을 하며 동물들은 희생시킨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는데서 오는 방어기제가 아닌가 싶다. 저자에게 동물이란 감정이 없었으면 좋겠는 대상이 아니었나 하는 감상이 들었다. 내가 본 어느 다큐에 의하면 일군의 동물학자들은 고릴라에게 수화를 가르쳤고 수화를 배운 고릴라는 자신이 어린 시절 자신의 어미를 사람들이 사냥해 죽인 이야기를 수화로 하며 이렇게 손으로 말했다. "사람들이 엄마를 죽였다... 무서웠다... 슬펐다."라고... (게다가 이 고릴라는 수화로 "꽃은 아름답다... 나는 꽃이다"라는 수화도 했다고 한다. 고릴라가 3단 논법을 한 것이다. "꽃은 아름답다... 나는 꽃이다... 여기에 고릴라는 "그러므로 나는 아름답다"라는 말을 하려고 했던 것 같다. 고릴라의 미적 감각에 상당한 오류가 있다는 건 차치하고라도 완벽한 3단 논법이 아닌가? 인간이 우월하다고 믿는 근거들이 때론 너무도 근거 없는 근거들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처럼...) 아마도 이 일화를 저자에게 말한다면 저자는 뭐라고 답할지 모르겠다. 


영장류가 아니더라도 오수의 개처럼 주인이 모두 죽고 나서 주인의 눈먼 자식을 아침마다 자신의 꼬리를 붙잡게 하고는 함께 이웃을 돌며 동냥하게 한 개도 있다. 반복된 행위는 학습에 의한 것이라고 해도 맨 처음 주인의 아이가 굶주리고 있을 때 자신의 꼬리를 잡게 하고 동네를 구걸 다닌 것은 굶주림에 대한 공감과 그 문제에 대한 (동네를 돌며 음식을 구걸한) 2차적 해결안을 도출한 문제 해결 능력을 개도 구사했다는 결론에 이르는 이야기다. 오수의 개 이야기는 너무 오래전 이야기지만 주인이 다치면 안타까운 순간에만 개들이 내는 앓는 소리를 내며 주인의 상처 부위를 핥는 행동은 개를 키워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경험해 본 것일 것이다. 공감하고 그 공감에 대해 2차적으로 표현하는 능력을 개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공감은 가장 고차원적인 감정이기도 하겠지만 개가 반가움, 기쁨, 슬픔, 놀람, 분노 등까지 표현하는 것을 견주들은 흔히 목격한다. TV프로그램을 통해서는 자신의 친구가 죽자 그 자리를 계속 배회하며 떠나지도 못하고 슬퍼하는 개의 모습을 본 적도 있다. 죽은 대상을 기억하며 슬퍼하는 감정과 행동을 우리는 애도라고 한다. 애도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고차원적 감정일 것이다. 하지만 애도는 까마귀들도 하는 감정이자 행동이다. 동료 까마귀가 죽으면 까마귀 떼들이 모여 어떻게 죽었는지를 확인하며 대응한다고 한다. 심지어 자신의 동료에게 또는 자신에게 해를 끼친 대상에 대해서는 까마귀들은 집단 린치를 하기도 한다. 그것도 그것이 한 사람에 의해 이뤄진 경우, 볼 때마다 계속해 공격하기도 하며 까치 역시 몇 해에 걸쳐 해당 가해자(사람)만을 공격한 사례가 보고되고 있기도 하다.


저자는 감정을 인식과 회상, 스키마(도식이나 미완의 상징성)를 패턴 완성 기능으로 구조화하는 능력 등과 언어를 통한 재해석 등까지를 아우르고 정의하는데 언어에 대한 부분과 언어로 정립하고 나서 2차적인 감정의 양상이 드러나는 단 두 경우를 제외 한다면 과연 동물들은 감정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인간의 인지 작용, 자기 주지적 성향 등을 감정에까지 일반화할 수 있을까? 감정을 느끼는 것을 그렇게나 우월한 기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 것이다. 저자는 진화의 선상에서 인간은 한 분기를 차지할 뿐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앞서 말한대로 프롤로그부터도 감정까지도 인간 진화의 대목에서 나온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 마치 중세 스콜라 철학의 '존재의 대사슬(great chain of being)' 이론에 입각한 진화의 정점에선 존재가 인간이라는 우월적 해석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의식에서 감정이 차지하는 것은 부분일 뿐이고 의식 전체에서 타 동물군이 인간과 동등한 수준이 아닐 수는 있다. 하지만 의식을 각 영역별로 분할해서 본다면 기억이나 순간 인식, 순간적 변별력이나 감정 등등이라는 각 영역별 모두에서 인간만 월등하다고 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동물 실험에서 숙련된 침팬치의 순간 식별력은 인간의 그것을 월등히 초월하고 있다. 동일한 수준의 시간을 인간이 전념해 실험에 참가했다는 경우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인간이 참여한다 해도 침팬치를 능가하기보다는 침팬치와 동등한 수준이 되기에도 버거울 수준이라고 한다. grit이라고 하는 투지, 깡으로 해석되는 이런 분야에서도 과연 인간이 타동물들 모두 보다 우위에 있기만 한 것일까? 나로선 확신이 없는 부분이다. 


본서는 인간을 진화의 정점이 아니라 진화 선상에서 다른 분기로 보는 근래의 진화생물학적 시각을 견지하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인간의 대뇌피질과 그 연합 활동이 진화의 정점이라는 식의 기존 해석을 고수하고 있다. 인간은 지능이라던가 도구의 개발과 도구 사용의 정교함 면에서는 타 동물들 보다 월등할지는 모르겠으나 공감(대다수의 포유동물군), 사회성(늑대나 마못 같은 군집생활을 하는 동물군이나 개미와 벌 등), 자연친화성(거의 모든 동물) 등 타 동물이 인간을 월등히 추월하는 부분들도 있음을 볼 때 본서는 비교 분별이라는 면에서는 너무 인간에 편파적인 서술로 일관한 저작이라고 생각되었다. 게다가 인공지능이 탄생해 메타러닝으로 진화의 도상에서 인간을 초월할 첫걸음을 떼고 있는 지금, 현대의 분기로 해석하는 진화론이 아니라 진화의 정점을 이야기하는 고전적인 진화론적 입장에서 라면, 인간은 진화의 도상에서 이제야 입문하는 창세기적 역사 속에서 그저 과도기적인 존재일 뿐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우리 인간의 아주 깊은 역사]는 LUCA에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를 진화와 생물학, 신경과학과 심리학 영역에서 서술하고 있고 인간이 현재까지 밝혀낸 인간의 존재적 특징의 단상 정도를 보여주는 저작이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진화는 어떠한 변수로 어떻게 역사가 이어질지 까지는 그리고 있지 않다. 어디까지나 인간의 역사를 다룬 책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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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만나러 지구로 갈게 - 듀나 추천 SF, 『어린 왕자』의 서정과 감동이 우주를 만나다 꿈꾸는돌 26
김성일 지음 / 돌베개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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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슴이 더욱 빠르게 뛰었다. 앨리스가 온다, 나를 만나러. 항구에서 헤어진 그 앨리스도 아니다. 수년간의 고독이 만들어낸 환상도 아니다. 휴대폰 사진 속의 누군지 모를 사람도 아니다. 저 우주 멀리 정말로 존재하는 앨리스가, 나를 위해 그 먼 길을 온다. 

 여우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그 순간, 여우는 가슴속인지 머릿속인지, 어딘가에 있던 무언가가 열리는 것을 느꼈다. 아니 있는 줄도 몰랐던 기관 같다는 느낌이다. 마음의 온도가, 색깔이 바뀌어 갔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웃음이 마음 속에 피어났다.


 본서의 책 띠지에 보면 『어린 왕자』의 서정과 감동이 우주를 만나다!라는 카피와 함께 이런 문구가 있다. -"관계 맺음의 갈망과 그 아름다움"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이다. 고독한 영혼들이 서로를 치유하고 함께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이 넓은 우주에서 혼자인 것만 같은 이들이라면 이 소설의 주인공 세 명에게 모두 공감의 문이 열리지 않을까 싶은 이야기다.


소설의 배경은... 미래의 기업이 지배하고 있는 우주시대에 화성 생명체의 DNA를 조작해 애완동물들을 생산하여 판매한 이후, 얼마지 않아 해당회사가 티타니아 그룹이라는 거대 기업에 인수되며 유전자 개량 애완동물들을 폐기하려 한다. 이 때 앨리스라는 주인이 애완동물이었던 여우를 사우디아라비아에 도망시켰고 여우는 이때부터 룹알할리 재활용센터라는 쓰레기장에서 혼자서 쓰레기를 수거하고 판매하며 살아간다. 유전자 조작을 통한 동물이라 인간에게 수학을 가르칠 정도의 지능이고 소설이 전개되면서 등장하는 전기를 제어하는 초능력도 있다. 


지구에 여우가 있다면 먼 우주의 어느 소행성에 티타니아 그룹이 만든 우주기지 로즈워터라는 곳에는 AI가 양육하는 알렉스라는 소년이 홀로 살고 있다. 아이 역시 화성 생명체의 DNA를 개량한 유전자 조작 인간으로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다. 빛보다 더 빠른 속도로 그 소행성에서 지구의 여우에게까지 소통을 할 수 있을 정도의 텔레파시 능력이 있는 것이다. 알렉스와 여우는 오래 전 부터 대화를 하고 있지만 여우는 다분히 이성적인 지성체라 알렉스를 앨리스라고 부르며 대화는 하면서도 알렉스는 외로운 자신이 만들어내 허구의 존재가 아닌가 의심하는 중이다. 


티타니아 그룹과는 경쟁관계에 있는 기업 란차오 상방에서는 티타니아 그룹이 화성 생명체의 유전자를 조작해 만들어낸 유전자 조작 아이가 특정 소행성에서 비밀리에 육성되고 있는 것을 알아내고는 그 아이를 탈취하려고 기업의 병사들을 파견했다. 하지만 티타니아 그룹의 자동 방어시스템에 의해 란차오 상방이 보낸 산업스파이 병사들은 거의다가 죽고 슈잉이라는 병사 한 명만이 살아남아 파손된 비행선에서 정처없이 우주를 헤메고 있다. 거의 삶을 포기한 슈잉에게 어느 순간 죽음을 앞둔 자신의 환상인지, 여우와 대화 중이니 끼어들지 말아달라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알렉스는 태어나서부터 AI 외에는 접촉해본적도 없이 외로운 삶을 살아왔고 여우는 버림받고 홀로 살아가는 존재이며 슈잉 역시 쓸쓸한 과거를 지닌 채 현재는 홀로 죽음을 앞두고 있는 고독한 처지다. 이런 이들이 만나는 계기는 알렉스의 텔레파시로 인한 접속이다.


이 소설은 정말 깊은 애정이 깃들게 만드는 것만 같은 작품이었다. 소설속의 알렉스도 여우도 마치 나 자신인양 여겨지며 그들의 만남과 해피엔딩을 기대하며 책장을 넘기게 만들었다. 


"앨리스, 나는 있는 게 잘못이야. 잘못 만들어졌어. 잘못 태어났어."


자신을 찾아내 폐기하려 혈안이 된 사람들 속에서 이런 자기비하를 하는 여우의 외침도 어느 날엔가 절규하던 나를 떠오르게 했다. 그런 게 어딨냐고 어떻게 있는 게 잘못일 수 있냐고 외쳐주는 나만의 앨리스는... 알렉스는 찾기 힘들던 시절이다. 물론 여우는 이때 자신을 위로하던 알렉스의 말을 빌려 이후에 알렉스에게 이런 충고도 하고 있다.


"있는 것은 잘못이 아니지만, 하는 것에는 잘잘못이 있어. 남을 해치면 안 돼, 앨리스. 그러면 로즈워터가 널 가둬 둔 게 옳은 일이 되고 말아."


이 책의 말미에 가면 티타니아 그룹의 로즈워터 AI도 알렉스의 빛을 초월하는 텔레파시 능력을 양자컴퓨터로 구현해내 백스물세번째의 시도만에 알렉스에게 말을 건넨다. 왠지 모르게 로즈워터 AI도 외로운 존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 먼 별에서 알렉스 혼자만을 돌보며 지내던 그런 외로운 존재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말이다. 


소설은 정말 흡인력있기도 하다. 독자를 페이지터너로 만드는 작품이라고 작가가 전혀 겸손해하지 않고 말할 수 있을 저작이다. 청소년을 독자로 품는 소설이기에 피가 튀는 잔인함도 피가 끓는 성애도 피가 마르는 절절함은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깊은 곳까지 건드리는 섬세함과 건전하게 몰입시키는 흡인력이 있다. 


소설은 여우를 찾아오기까지의 과정이, 여우와 만나는 과정이 전체일테지만 그걸 소개하지 않는 건 스포일러로 독자의 감상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이다.


소설이 어린 왕자를 모티프로 했고 소설 속에도 어린 왕자란 책이 소품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어린 왕자의 감동을 알고 모르고는 중요하지 않다. 어린 왕자의 고독은 독자가 공감 가능한 그만의 고독이고 알렉스와 여우, 슈잉의 고독은 또한 이 소설의 독자가 공감 가능한 그들의 고독이다. 그리고 그 고독이 서로에 대한 갈망을 낳고 이들을 서로를 어우러지게 했듯, 독자들에게도 그 고독과 함께 어우러짐을 위한 갈망을 안겨줄 것이다. 


내가 만나러 갈 누군가, 나를 만나러 올 누군가를 꿈꾸게 할 소설이다. 좋아하는 시는 아니지만 박노해 시인님의 《별은 너에게로》라는 시가 떠오르기도 하는 작품이다. 이 소설을 어린이든 청소년이든 어른이든 고독해본 적 있는 누구에게라도 권하고 싶다. 여러분에게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웃음이 마음 속에 피어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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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0년 동안 숨겨진 절대 기도의 비밀 - 잃어버린 기도의 비밀
그렉 브레이든 지음, 황소연 옮김 / 굿모닝미디어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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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는 축복, 기도, 고통, 아름다움 이 네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저자는 '축복'을 "상처 받은 감정을 다른 감정으로 대체하고 인생의 상처로 부터 해방되는 길"이라고 정의한다. 

 

"고대인들은 마음과 머리와 영혼까지 감동시키는 경험을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했다"

 

"인생의 가장 추한 순간에서도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 

 

"감정의 기도는...... 단지 기도가 이미 응답을 받은 것처럼 분명하고 강력한 느낌이 피어나도록 유도할 뿐이다."

 

"기도의 효과를 제대로 보려면 아름다움과 축복과 지혜와 고통에 숨겨진 힘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고대인들은 감사하는 마음가짐의 느낌을 통해서 창조의 힘, 즉 신의 정신과 직접소통한다고 믿었다".

 

"고대 그노시스 문서 중에는 우리가 고통에 취약한 것을 치유와 생명으로 통하는 출입구라고 표현한 구절이 있다."

 

"고통받고 나서 삶을 찾은 인간은 축복받은 인간이다." - 도마복음에서 예수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한데, 사랑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가끔씩 상처라는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패턴이 가자의 자리에 있을 때 균형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우리도 모든 조건이 갖추어져 있을때 가장 큰 선물을 받게 될 뿐만 아니라 가장 큰 시련을 겪게 된다."

 

"시련을 겪어야만 깨달음을 얻는다. 이 원칙을 알든 모르든, 인생이 우리에게 어떤 시련을 주든, "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는 이미 문제를 해결하고 상처를 치유하며 시련을 극복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

 

고통과 시련에 대한 저자의 말과 인용 중 동의할 수 없던 것은 마지막 문장으로 해결하고 상처를 치유하고 극복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누구나 갖추고 있다지만 때론 그 시련으로 사람은 죽기도 하고 미치기도 한다. 저자의 말은 가진 자의 오만이나 다를 바 없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상처가 깊고 고통이 클수록 감정의 농도는 짙어진다. 가장 큰 고통을 느낄 때 가장 큰 사랑을 경험할 수 있다."

 

"상처는 경험을 해석하는 마음가짐에 따라 생기기 때문에 일어난 일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면 순환 과정상의 초점 역시 바뀌게 된다."

 

"어디에서 비롯된 상처이든 상처를 치유된 지혜의 형태로 변형시키는 힘이 우리 내부에 있다."

 

"세상은 우리 안에 살아 있는 감정들을 투여하는 양자망quatum fabric인 것이다."

 

"모든 "시작"과 "종말" 사이에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순간이 존재한다. 마법과 기적은 바로 그 순간에 발생한다! 그 찰나에는 아무것도 선택되지 않아서 모든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 틈에서부터 우리 몸을 치유하고 인생을 변화시키며 세상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힘이 나온다. 모든 사건은 이 강력한 마법의 순간에서 비롯된다."

 

"중요한 것은 어떤 마음으로 기도를 하는가에 따라 인생의 청사진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에너지 장이 마음 속의 믿음을 반영하기 때문에 기도하기 전에 상처와 분노를 제거해야 한다."

 

"기도를 시작하기에 앞서...... 모든 판단과 두려움과 상처를 일시적으로 유보하라"

 

"가치판단을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행위는 치유의 길로 들어서는 관문이 된다."

 

"축복이란 현재 마음을 괴롭히고 있거나 과거에 마음을 괴롭혔던 일에 대한 감정을 다시 정의하는 생각이나 느낌, 혹은 감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축복은 상처받은 감정을 몸 안에 가두어두기보다는 해방시키고 치유의 빛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어젖히는 "윤활유"라고 할 수 있다."

 

"축복은 고통스러운 경험에서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이다. 어떤 일이 일어났던지 간에 그것이 일어났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것들 안에서 하느님을 사랑하기는 쉬웠다. 하지만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아름다운 경험이든 추악한 경험이든 모든 경험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아름다움의 정체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을지라도 아름다움의 힘으로 고통과 상처와 두려움을 치유할 수 있다."

 

"아름다움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마력을 지니고 있지만 그 힘은 깨어날 때까지 잠을 잔다.

 

"아름다움은 가슴과 머리와 영혼의 경험이다. 아름다움은 우리가 종종 "불완전"하다고 부르는 것, 즉 결점 투성이로부터 완전함을 보려는 의지에서 나온다."

 

"고대인들은 감정, 특히 우리가 "기도"라고 부르는 특별한 형태의 감정이 온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힘이라고 믿었다"

"감정과 기도는 물리적인 세상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미친다."

 

"중요한 것은 세상이 우리 앞에 던져놓은 상처와 고통을 초월해서 이미 만물에 깃들어 있는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길을 찾아야만 한다."

 

"기도는 감정이 저절로 우러나올 때 마음속에 존재한다."

 

"우리가 느끼고 기도하는 것이 신의 정신에 의해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것이 바로 "인생"이다."

 

"응답을 받았을 때의 감정을 먼저 진심으로 느껴야만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진다."

 

"축복의 과정을 밟을 때는 우선 상처를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있을 때까지 상처를 보류해야 한다."

 

"인생에 일어난 사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그는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왜 상처를 받았는지 이유를 깨달을 때 터널 끝에서 반짝이는 불빛을 보게 될 것이다"

 

"고대의 전통에 따르면 우리 주변의 세상은 실생활에 드러난 우리 자신의 모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아름다움을 발견하자고 지혜를 얻자고 감당도 못할 고통을 겪어야만 할까? 적당히 거친 파도는 유능한 뱃사람을 만들겠지만 메가쓰나미에는 배와 함께 침몰해 죽음을 맞이할 뿐이다. 

 

"Nizhonigoo bil iina

(아름다움과 더불어 살고, 아름답게 살며, 아름다움을 인생의 기반으로 삼아라)" - 나바호 인디언

 

상상을 초월하는 아름다움과 상상을 초월하는 공포감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우리 안에 둥지를 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명령에 복종한다.     - 시에나의 성 카트리나

 

"그대 마음 속에 간직한 것을 열매 맺는다면

그것이 당신을 구원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그대를 파괴할 것이다."  - 도마복음서

 

"아름다움은 홀로 거울을 응시하고 있는 영원이다. 

하지만 그대가 영원이며 거울이다."  - 칼릴 지브란

 

"내 이름으로 직접적으로 구하라...

그러면 얻으리니. 지금까지 너희는 그러지 않았다. 

숨겨진 동기 없이 구하고. 

너의 답으로 에워싸이고. 

네가 열망하는 것으로 둘러싸이면 기쁨이 충만하리라." - 성경 요한복음의 에쎄네파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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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개벽이다 - 상 (양장) - 개정신판 2판 이것이 개벽이다
안경전 지음 / 상생출판 / 201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며칠 동안 흥미롭게 또 어이없게 읽었다. 이미 중학시절에 한차례 읽었던 책인데 주요내용은 그대론 인듯 하지만 서술방식과 논지의 초점이 다소 달라져 있는 것 같았다.

 

본서는 지축이동과 함께 찾아오는 대전쟁과 대역병의 시대를 종말론적으로 그려내며 그것은 결코 종말이 아니며 새로운 시대로 접어드는 대개벽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지축이동, 폴시프트에 관한 책들을 중학시절부터 인상 깊게 읽어 본서가 주장하는 개벽이라는 지축정립이론도 낯설지 않았고 초중딩 때 부터 초고대문명과 오파츠(역사적 맥락이 이어지지 않는 초고대와 고대의 선진과학 기술로 만들어진 유적과 유물들), UFO저작들, 채널링 저작들도 다소 관심있게 읽었으며 종말론이 강세이던 시기 각국의 예언자료들도 저작물과 영상물로 많이 접해 보아서 본서의 내용이 처음에는 마냥 흥미진진하기만 했다. 

 

그리고 상수역학에 대한 부분은 들어는 봤지만 상세히 알지 못해 저자의 주장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형의권을 배우며 알아둔 오행의 상생과 상극 개념이 더해 있으니 깊은 이치는 못 알아듣지만 상생에 대한 전개는 흥미롭게 느껴졌다.

 

지축이동은 일부 지질학자들, 지구과학자들도 (황극경세서에서 소강절 선생이 이른 129,600년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주장하고 있다. 지질층의 변화가 주기를 가지고 극도의 (빙하기 등) 계절의 갑작스런 변화와 자극의 갑작스런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의 주기에 현인류가 근접해 있다고도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본서가 주장하는 지축 정립으로 인한 종말론적 환경변화와 인류의 위기가 신빙성이 없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질학에서 측정하는 연대측정은 짧게도 몇 천 년 길게는 몇 만 년의 오차가 날 수 있는 것이 아직까지의 기술력이다. 과연 우리 세대 내지는 몇세기 내로 지축정립이 일어날 것인가 하는데는 의문이 일지 않을 수 없다. 

 

외계인들의 메시지라며 채널러들이 지구에 지축정립이 있을 것이라는 주장을 해온 것이 20세기 중후반 부터다. 물병자리 시대로 들어서면서 부터 변화가 일어난다고 하는 전언들이 흔했으나 일부 사상가들은 서기 1400년대에 이미 물병자리에 들어서 있다고 주장하기도 또는 일부 천문학자들은 물병자리가 두드러지는 시대는 서기 2600년이라고 말하고 있다. 오차가 이미 1200년을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본서에서는 한정된 예언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 신라시대 설총의 예언과 이후의 (조선시대 남사고의 격암유록인지 정감록인지의) 예언 중 일부를 봐도 그분(미륵불, 메시아)은 여자 성씨로 오신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래서 성에 女자가 들어가는 강姜씨와 안安씨로 보고 있다. 그래서 고인이 되신 증산도의 교조 증산 강일순씨가 인격화하여 내려오신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ㅋ

 

(나는 이 부분을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던 그 해에는 측자해서 비슷한 글자인 文씨가 아닌 것인가? 내가 새시대의 지도자에게 한 표를 행사한 것이 아닌가 들뜨기도 하고 그랬었다. 지금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만...)

 

남사고의 예언이나 어찌되었든 설총 이후의 예언은 설총의 예언을 모티프로 했거나 근간으로 했을 가능성이 높지 않은가 한다. 그렇다면 설총의 예언 설총결을 중심으로 해석해야 맞지 않나 싶다.  

 

해당 여자 성씨로 온다고 증산도 사람들이 해석하는 한문 부분은 이것이다.

 

根於女姓成於女 이 대목이다. 

증산도에서 한 해석을 보자면 

"인류성씨의 조상이 여자 성씨에 뿌리를 두고 여자 성씨에서 다시 새로운 시원이 이루어지니..." 라고 해석 하고 있다

 

하지만 직역하자면 '여자 성씨에 뿌리는 여자에서 이룬다' 정도가 맞을 것이다. 계집 녀자가 성씨의 뿌리라는 말이 아니다. 화랑세기를 근거하자면 신라시대 중기까지 일지 초기만 일지 모르지만 아들에게는 아버지의 성씨姓氏를 주고 딸에게는 어머니의 성씨를 주어 아버지를 따르는 성씨 개념을 氏라 하여 아들이 계승하게 했고 어머니를 따르는 성씨 개념을 姓이라고 하여 어머니에서 딸로 그 자손들로 대대로 이어졌었다고 한다. 

 

이 "근어여성성어여" 대목을 개벽 시대에 새로운 지도자나 미륵불, 메시아로 보자면 메시아는 어머니 성을 따르는 여자인 분이라는 말이 될 것이다. 저자가 말하듯 선후천이 개벽된다면 남존여비라는 인식이 지배하던 시대가 존재했던 나라에서 여자가 정치종교의 절대지도자로 교체되는 소소한 개벽을 이야기 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다시 남자는 남자의 성씨를 쓰고 여자는 여자의 성씨를 계승하는 제도가 다시 생겨나 이어질 것이라는 것을 증언한 예언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이미 대한민국에서는 혼인신고시 여성의 성을 자녀가 쓰게 할지 결정하도록하는 제도가 생겨났다. 이것이 개선되어 자녀에게 아빠 성씨도 엄마 성씨도 따르게 하는 제도로 바뀐다면 신라시대처럼 아들은 아버지의 씨를 딸들은 어머니의 성을 계승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이치일지도 모르는 예언을 증산도에서는 자신의 교조가 미륵이고 메시아이고 상제이고 하나님이라는 주장을 하기 위해 호도하고 있는 것이다.

 

본서는 각국 예언서들에 등장하는 격변과 미래상을 그려주고 있고 그것을 동양의 역리로도 풀어주어 역리는 잘 모르지만 너무 흥미롭고 재미있는데 그 모든 과정이 자신들의 교조를 신격화하기 위해 악용되고 있어 수작秀作이 될 수 있는 저작이 수작酬酌으로 보이는 수준이다. 

 

미륵불도 재림예수도 정도령도 이슬람의 이맘도 각국이 말하는 격변기의 성현군자들이 제각기 현현할 수도 있는 문제인데 증산도에서 이 모두를 한 사람이라고 강조하며 그가 바로 증산 강일순씨라고 주장하고 있다. 

 

왜 그럴까? 아마도 각기 다른 사람이라고 하면 기독교적으로는 적그리스도로 해석될 수 있어서가 아닌가 싶다. 하지만 예수님 사후 그의 사도에게 예언적으로 보인 미래상이 있었다면 그 시대를 살아가는 그들로서는 그들의 통념대로 해석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재림 예수만이 진짜이니 저 중 한 분만이 진짜이고 다른 놈들은 예수님과 같은 능력을 보이더라도 사탄 마귀일 것이다. 모두 적그리스도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에게 적대적인 존재 이를 테면 이슬람의 메시아인 이슬람의 마지막 이맘이 이 시대에 온다해도 과연 절대악이기만 할까? 그 자신으로서는 그들(무슬림들) 나름대로는 자신들의 정당성이 있지 않을까?

 

각국에는 각국의 또 각 종교에는 각 종교 나름의 가르침과 필요와 관습과 문화가 다른데 아무리 세계문화가 융화되어 가는 중이라고는 하지만 단 한 명의 능력자가 나타난다고 모든 종교가 화합이 될까? 나는 오히려 각국과 각 종교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제각기의 능력자들이 나타나 함께 화합하는 가르침을 손을 잡고 펼치는 시대가 되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또하나 본서에는 없지만 증산도 유투브에서 언급되는 타라빅의 예언을 좀 바로 잡자면 증산도에서는 타라빅이 예언하는 종말의 시대에 "유럽처럼 동쪽에 위치한 대륙은 전쟁의 참화를 피할 수 있고 그로 부터 현인이 나타난다"는 내용이 증산도에서 조금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되었다.  

 

증산도 유투브에서는 "동쪽에 위치한 나라"라고 해석하고 있는데 '그래서 한국이다'라는 국뽕 맞은 해석이라 다른 유투버의 해석본들을 보다보니 원문을 그대로 옮긴 어느 유투버의 해석으로는 위에서 처럼 유럽처럼 동쪽에 위치한 대륙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건 대륙급 크기인 오스트레일리아라는 해석이 더 맞지 않나 싶다. 

 

국뽕 맞은 해석으로 상제님(하나님)이라며 고 강일순씨가 한국에 오신 이유가 우주의 중심이 지구고 지구의 중심이 한국이라 그렇다는데 이건 참 답답하지 않을 수 없는 해석이다. 한국이  풍수적으로 지구의 중심 온세계의 중심이었다면 진작에 중국이 한국을 고대에 침공해서 한국에 수도를 정하고 역대 중국 왕조들 강역의 중심을 한국으로 삼지 않았겠는가?

 

게다가 그토록이나 국뽕을 쏘아대고 있지만 삼국유사를 근거하자면 환국시대에서 서자부 소속의 환웅이 삼위산과 태백산 방향으로 분가하여 그 지역의 곰 토템 부족의 웅녀와 정략혼을 하여 생긴 아이가 단군왕검이 된 것이다. 우리의 시초가 서자부라는 말이 조선시대의 서자처럼 첩의 자식이란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분명히 일군은 아니었고 이군이거나 이군 이하에 속해 있던 사람이 분가하게 된 것이라는 말이다. (오히려 카자흐스탄의 쥬스 왕국들이 숱하게 있었다는 신화에 근거할 때 중앙아시아 근처가 환국의 본토가 아니었을까 싶다.) 주류가 아니라 비주류가 만든 역사가 우리민족의 역사적 기원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애초부터 국뽕 그렇게 맞을 일 없는 이군이고 비주류였음을 역사랄까 신화랄까가 증거하고 있다.

 

물론 그런 비주류가 주류가 되는 신화를 이 시대에 다시 써보자면 그건 신박한 발상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저자의 귀기울여 들어볼 법한 개벽시대의 이야기들과 또 뭔가 혹세무민하고 있는 대목들이 어우러진 야릇한 맛의 짬뽕이랄까 섞어찌게랄까 같은 책이란 감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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