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다영이 용의 입 방향을 향해 눈에서 붉은 오렌지빛 광채를 뿜어내자 용이 입을 열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다영과 지현은 용의 입 밖으로 날아나왔다. 지현이 아무 소용없는 걸 알면서도 용을 어떻게 공격해야 할지 견주고 있을 때 다영이 한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용을 공격해봤자 소용없는 걸 알면서 뭐 하러 또 공격을 하려고 그래요?


그렇게 말하며 다영은 용의 옆구리를 한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러자 용은 공중에 떠있는 다영과 지현의 주위를 크게 휘돌아 감싸는 듯 한 바퀴 돌더니 먹구름과 함께 멀리 사라져갔다. 


-살아나왔구나. 하긴 여기서 죽는 것도 이상하긴 하지.


다시 날아온 터번을 쓴 노인이 말했다.


-그렇게 재빠르게 도망가실 줄은 몰랐어요.


다영은 가볍게 말했지만 조금 섭섭한 투였다.


-그럼 어쩌겠니? 이 늙은이가 용과 맞서 싸울 수도 없고.


노인은 겸연쩍었지만 자기 말이 틀린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무사하게 탈출해서 다행이지, 뭐.


다들 지상에 발을 딛을 때 지현이 분위기를 바꿔보려 말했다. 다영도 노인이 도망간 건 서운했지만 그가 그러지 않았다면 지현과의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그럼 지현도 용의 배에서 나오지 못했을 것이고. 섭섭함은 작은 문제고 자신에게 작은 깨우침이 있어 다행이라 여겼다.


-저는 이제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너무 늦은 시간이라 엄마가 기다릴 거예요.


-아까 내 말 잊은 거야. 모든 현실은 니가 만드는 거라니까.


지현이 그녀의 의식에 작은 일깨움은 줬지만 다영은 아직 모든 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건 아니었다.


-늦었다고 생각하니 늦는 거란다. 아침이라고 생각하면 언제나 아침이야.


그렇게 말하며 노인은 한결같이 태양이 따사로운 벌판 가운데서 언제 피어났는지 모를 하얀 튤립 한 송이를 꺾어 다영에게 건넸다. 


-황량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꽃이 피었네요. 이곳이 벌판이 아니라 온통 꽃들이 만발한 꽃밭이면 더 좋았을 텐데.


다영이 그리 말하자 색색깔의 꽃들이 순식간에 온 벌판을 가득 채우며 피어났다. 짧은 찰나만에 무지개의 스펙트럼같이 다양한 빛깔로 들판을 가득 꽃들이 채우고 있었다.


-많은 이들의 염원이 담겨야 변하는 공간을 넌 아주 쉽게 바꾸어 놓는구나.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요?


지현의 말에 다영은 자기가 그랬을 리 없다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하지만 너의 마음이 이곳을 온통 꽃들로 출렁이게 만들었어.


-정말 내가 했다고요?


-너에게는 그저 자신에 대한 확신만 있으면 된단다. 그리고 그 확신이 무르익을 때에야 자신의 현실을 아니 사실이라 해야겠지.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다시 한번 지현의 말을 의심하는 다영에게 노인이 말했다. 다영인 생각했다. 


=사실이란 게 뭘까?



17


다영은 지현과 함께 자신의 세계로 돌아왔다. 다영의 집 현관까지 지현이 바래다줬다. 


-오랜만이었어.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한 건.


-저는 처음이었어요. 남자와 단둘이 그런 밀실에 갇힌 건.


지현이 말없이 다영과의 헤어짐이 아쉽다는 듯 물끄러미 쳐다봤다.


다영도 지현을 바라보다가 다영으로선 뭔가 처음인 낯선 분위기가 어색해 한 마디를 했다.


-이제 오빠라고 해도 되죠?


-어? 어! 그래도 되지. 


-지현 오빠 잘 가. 바래다줘서 고마워. 


다영은 말을 마치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문을 닫고는 그렇게 돌아선 채 미소를 지었다. 



18


그때 아빠가 거실에서 달려와 다영을 와락 껴안았다. 


-다영아! 아빠가 미안해. 아빠가 이제서야 왔구나. 정말 미안하다, 다영아.


-아빠 갑자기 어떻게 왔어. 무슨 일 있는 거야? 표정이 왜 그래?


-다영아, 미안하다. 아빠가 정말 미안하다.


다영이 아빠의 어조에서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있는 거란 걸 직감하고는 다시 한번 물었다.


-아빠 미안하다고만 하지 말고 무슨 일인지 말해 줘야지. 엄마는? 엄마는 어딨어?


그러면서 다영이 엄마를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자 엄마가 침대에 누워 링거를 맞고 머리를 붕대로 감싼 채 누워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내가 다른 차원에 갔다 온 사이 또 현실이 바뀐 걸까?


다영은 당황스러웠지만 그럴수록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난 현실을 바꾸는 힘을 깨우쳤어. 이 현실은 다시 바꾸면 돼.


그렇게 마음먹고 다영은 눈을 감았다. 엄마가 나은 현실로 바꾸고자 깊은 염원을 담아 기도를 했다. 그리고는 눈을 떴다.


눈을 뜨자 다영의 눈앞에 병원 중환자실에서 간호사들이 오고 가며 침대에 누운 엄마를 체크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옆에 아빠가 애처롭게 침대에 누운 엄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선 엄마가 울고 있었다. 엄마가 말이다.


말이 안 되는 현실에 다영은 놀라 침대 곁으로 다가가려 했다. 그때 자신 옆으로 눈부시게 빛이 작렬하더니 지현이 하얀 옷을 입고 나타났다.


-다영아 놀라지 마.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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