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가면 1 : 원시 신화 까치글방 160
조셉 캠벨 지음, 이진구 옮김 / 까치 / 200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삶의 충만성은 각자가 지니고 있는 신화의 깊이와 폭에 직접 비례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러 문화의 신화들은 ...중략... 삶의 동기와 방향을 제공하는 강력한 동인으로 분명히 작용하고 있다"

"신화 속 상징들은 가장 깊은 동기 부여를 가져온다"

"신화가 자신의 특질을 무의식으로 부터 꺼낼 때 삶은 그 속으로 흘러들어 간다"

"신화는 -따라서 문명은- 시적 초일상적 이미지이다. 모든 시가 그러한 것처럼, 신화는 깊은 차원에서 상상된 것이지만 다양한 수준에서 해석될 수 있다. 아주 피상적인 정신의 소유자는 신화에서 국지적인 배경을 보지만, 가장 심오한 정신의 소유자는 거기서 무의 세계로 통하는 입구를 본다." 

"신화는 삶의 의미를 연출하는 이미지 체계이다. 그리고 그 의미는 두가지 방식으로 파악할 수 있다. 첫째는 사유의 방식이고 둘째는 경험의 방식이다. 사유로서의 신화는 과학에 접근하거나 과학으로 향하는 원시적인 서곡이다. 경험으로서의 신화는 예술 자체이다. 더구나 신화적 이미지와 신화적 공식은 의례 속에서 현재화 된다."




이 리뷰의 마지막장을 너무 오래 미뤄뒀는데 이제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것 같다. 가능하면 짧게 끝내려 한다. 


애초에 『신의 가면』은 제목 마따나 신화에 대한 저작이다. 그러니 이 저작에 대한 리뷰를 작성하며 예수님의 생과 가르침으로 접근한 것은 가장 적절한 양식이 아니었나 싶다.


'삶을 충만하게' 만들고 '삶의 동기와 방향을 제공'하며 '삶이 흘러들어 간다'는 신화... '무(無)의 세계로 통하는 입구를 보게 한다'는 신화는, '삶의 의미를 연출하는 이미지 체계'라고 조지프 캠벨은 말하고 있다.


이는 비단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자신의 종교를 통해 삶이 의미를 찾은듯하고 충만한 사랑과 은혜를 경험해 보았다는 이들이라면 공감할 정의가 아닌가 싶다. 물론 이것은 종교의 긍정적 영향만을 두고 이르는 것이지만 말이다. 


조지프 캠벨은 『신의 가면』의 첫번째 권인 《원시신화》에서 많은 이야기를 하지만 가장 주목하게 되었던 것은 마르가와 가면의식, 기괴한 사고(accident), 은폐하는 우화(Screening Allegory) 그리고 이 모두를 인간의 의지로 구현하여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통합적 새신화를 유도할 수 있다는 논리를 가져올 수도 있을 생득적 방출기제(Innate Release Mechanism)에 대한 서술이다.


조지프 캠벨은 '인간에게 주어진 능력 가운데 최고의 선물은 미성숙함 자체'라며 '인간은 미성숙한 존재이기 때문에 본래적으로 놀이 능력을 지니고 있다' 고 말한다. '정신의 고귀함은 천상에서든 지상에서든 놀이를 할 수 있는 능력' 이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예를 든 것이 중세 유럽의 기사도 양식과 비슷한 일본어 화법인 '아소바세-코도바' (놀이 언어)이다. "자네 아버지께서는 언제 죽음을 연기하셨는가?" "제 아버지께서는 삼일 전 죽음을 연기하셨습니다" 부친이 언제 돌아가셨는지에 대한 대화이지만 이 일본어 화법 속에서 부친은 하나의 연기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한국어에서는 돌아가셨다라는 죽음에 대한 표현양식과 다른듯 하면서도 유사하다. 한반도에서의 선조들은 죽음이라는 과정으로 오셨던 곳으로 되돌아가고 계신 것이고 일본에서 일본인들의 선조들은 한편의 연극으로서 죽음을 연기하고 연출하는 것이다. '일본인의 삶의 이상에서 나타나는 비상할 정도의 열정과 엄숙함은 하나의 허구에 의해 가려져 있다. 그것은 인생만사가 놀이일뿐이라는 멋진 허구이다.' 


조지프 캠벨은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 속에서는 삶도 죽음도 한편의 놀이일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그가 말하는 놀이가 너무도 처연하게만 다가온다.


원시적 의식 속에서 샤먼은 '신의 가면을 쓰고 의례를 행한다. 의례 속에서 그는 신과 동일시된다. 그는 단지 신을 표상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신 자체이다.' 이 의례 속에서는 (as if~), (make~believe) "마치 ~인체 하는" 즉 "마치 ~인 것 처럼" 이라는 논리가 지배한다고 한다. 이것은 자신이 신이 되었다는 믿음이 바탕하며 진행되는 하나의 게임이며 이 "'믿음의 게임'을 묵묵히 받아들이면서 '축제의 놀이'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고 조지프 캠벨은 이야기 한다. 믿음을 통해 '일상적 세속적 논리가 연극과 놀이의 논리로 전환된다'는 것이다. 


- 이 믿음은 그저 하나의 가정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단지 "무엇인 척" 하는 것으로 또는 "동일시"하는 것으로 저자나 서양학자들이 받아들이는 것과는 다르게 진리의 인식인 것이다. 그것도 하나의 진리의 인식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단하나인 진리 그 자체인 것이다. 인도의 수행철학체계의 근간이 담긴 '소흠' 또는 '소함'으로 음역되는 만트라는 그 반대의 '함사' 만트라와 함께 수행하도록 하는 체계이다. '소'를 '그것(It)'으로 번역하던데 이는 영어권 수행자의 직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어권에서는 '그것' 보다는 '그' 또는 '그녀' 로 해석하는 것이 더 나을지 모른다. 그로 해석하던 그녀로 해석하던 서양인들 처럼 그것이라 하던 모두 유일한 한분의 절대자를 말하는 것이다. '흠'은 '나'를 뜻한다. 들숨에서 '소' 또는 '사' 음이 날숨에서 '흠' 또는 '함'음이 동반된다는 것을 자각하고 나면 이 만트라는 "그는 나이다" "나는 그이다"가 거듭 반복되는 것이 우리의 호흡이며 살아 숨쉬는 동안 한결같이 지속되는 존재의 가르침임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나는 둘이 아니다. 그와 나를 둘로 보게 하는 존재의 차원 전체가 하나의 꿈이며 기만일 뿐이라는 것이 인도 베단타 요가철학 체계 가르침의 핵심이며 축이다. -


- 축제의 놀이영역에 대한 조지프 캠벨의 말을 좀더 인용하자면, "그 놀이 영역에서는 재미와 기쁨 그리고 황홀감이 단계적으로 힘을 발휘한다. 거기에서는 시공간 속에 존재하는 삶의 법칙들, 즉 경제학과 정치학 그리고 도덕법칙이 사라진다. 그 다음에는 타락 이전(선과 악, 옳고 그름, 참과 거짓, 믿음과 불신에 대한 지식이 생겨나기 이전)의 낙원으로 귀환하여 새롭게 거듭나게 되고, 그 결과 놀이의 인간(호모루덴스)의 정신과 관점을 삶 속에서 다시 회복하게 된다. 아이들의 놀이에서 처럼, 그러한 상황에서는 진부한 삶이 현실에 기가 꺾이지 않은 채, 순수한 놀이의 기쁨을 위하여 다른 어떤 것과 스스로를 동일시 하는 자발적인 정신의 충동이 이 세상을 성스럽게 변화시킨다." -


조지프 캠벨은 '놀이의 경우 처음 순간 강조되는 것은 "사로잡힘(seizure)"의 황홀이 아니라 놀이의 즐거움(fun)' 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믿음(belief) 혹은 믿음의 놀이는 "사로잡힘"의 상태로 나아가는 첫걸음' 이라고 한다. 그러니 결국 사로잡힘의 상태로 나아간다는 말인 것이고  '...그들이 "사로잡힘"의 경험을 하기전에 겪은 "기나긴 시련"' 에 대해 논하기에 이른다.


원시전통 속의 샤먼은 기나긴 시련, 가혹한 시련으로 일컬어지는 고통의 시간들을 견뎌내야 한다. '고통을 통해서만이 지혜에 이를 수 있다' 면서 말이다.


- 이것은 기독교 성자들 또한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바로 위의 문장에서 마지막 따옴표 안의 '그들이' 로 시작하는 문장을 인용하며 임의로 '성자전에는' 이라는 주어를 생략했다. 결국 샤먼에 대한 내용이면서 동시에 카톨릭 사제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


기나긴 시련, 가혹한 시련이라는 고통의 길 '마르가' 는 인도철학의 용어 '우파디(upadhi)' 로 설명될 수도 있다고 한다. 이 용어는 '깨달음의 특성' 을 설명하면서 동시에 '존재의 기만적 속성' 들을 이르기도 하는 말이다. '고통' 은 실체가 아닌 속임수이며 그 고통 안에 존재하는 '환희' 라는 깨달음의 특성만이 실재할 뿐이다. 이것이 우주적 진실이기에 '깨달음의 특성'인 것이며 '존재의 기만적 속성'이라는 것이다. 조지프 캠벨은 '비극적 고통이라는 것은 존재의 기만적 속성이며 이것을 통해 근원적 비밀'에 이른다는 것이 원시신화와 인도철학 용어가 합일점을 찾은 관점이라는 듯 주장을 한다. 그렇기에 '죽음은 기만인 것이고 부활이라는 진실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환희' 라고만 하기엔 샤먼은 '기나긴' 그러면서도 '가혹한' '시련' 속에서 '위대한' 이라던가 '엄청난' 이라는 미사어구가 더해진 '고독'을 감당해야만 한다. 그가 겪어야 하는 시련과 고독은 길고 긴 시간 가혹하고 엄청난 규모로 덮쳐오고 지속되는 것이다. '엄청난 고독'이라는 것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숨겨져 있던 모든 것이 한사람의 정신세계 속에서 나타나게 된다" 고는 하지만 이 과정은 '영적 정화'니 '자아 비우기'니 그럴싸한 말로 포장해 보았자 "궁핍(privation)과 자아가 발가벗겨지는(stripping of the self)" 과정이 동반된 고통만이 주도적인 길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시편 51:17]'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여 중심이 상함이니이다...[시편 109:22]' 에 해당하는 상태로 내몰리기 위한 바로 그 길이라는 말이다. 이 고통이 환희로 바뀌어야 할 '비극'은 '마음의 초점을 바꿈' 으로써 비극이 끝나고 희극이 시작된다고 한다. 즉, '비극의 양식이 끝나고 신화가 시작된다' 는 것이다. 샤먼은 '신화의 시적 변형' 인 이 '비극' 이라는 '심리적 위기'를 통해서야 '자기만의 고유한 힘'을 획득하는 것이라 한다. (레법이냐ㅡㅡ^ 2C)  


- 이 길에서 그는 사랑 마저도 허락되지 않는다. 이 메마르고 불사르는 지옥 불구덩이만도 못할 지구에서, 목타오르는 갈망 속에서도 단하나의 사랑 조차 허락되지 않은 삶이라는 말이다. 조지프 캠벨은 말한다. "낮은 차원의 대상에 대하여 느끼는 사랑과 애착은 실은 높은 차원의 대상 안에 자신을 잠재적으로 확립하는 작용이다. 그러나 만약 정신이 본연의 목적에 도달하려면 낮은 차원의 대상에 대한 사랑을 희생해야만 한다."


결국 한사람에 대한 간절한 사랑을 통해 하나님께로 향하여야 하고 한사람을 통해 간절한 사랑을 깨닫고 나면 그 단 한사람을 향한 사랑은 좌절 당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럼으로써 하나님 밖에는 못보는 외곽으로의 시야는 가려진 채 달리는 경주마 같은 신세가 되어 오아시스의 한모금도 그저 한줌의 물도 허락 되지 않은 삶이나 살아야 하는 것이 샤먼과 사제의 삶이라는 말인 거다. (엿 같다! 절대 '요깟다'가 아니라!) -


이 과정에서 동반되는 것이 있다. 그건 '원시의례에서는 "사고(accident)"로 간주되는 것이 우주체계의 중심에 놓여있다'고 저자가 말한 바로 그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동반되는 것이라기 보다 '우주 체계의 중심에 놓여있는 것'으로 저자가 언급했듯 이 의례의 축을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 그 축이라는 것은 바로 "갑작스럽고 기괴한 죽음" 을 이른다. '이러한 "사고"는 우주의 질서가 지닌 잔인성의 계시로 간주된다' 는 것이 저자의 관점이다. '이렇게 계시된 것은 단지 이 세상이 지닌 일상성의 기괴함이 아니라 우리의 둔감한 능력으로 느끼는 것보다 훨씬 고차원적인 실재성을 지닌 일상성'이라 한다. 이런 '신적 의지를 지닌 기괴함'을 내용으로 하는 계시가 '그러한 기괴함의 형태를 지니는 것은 신이 모든 활동에서 그 자신을 현실화하기 때문'이라 것이 저자의 성찰이다. 그래서 저자는 '신화는 이 세상의 기괴성과 경이감의 표출' 이라 정의하고 있다. 앞서 "갑작스럽고 기괴한 죽음"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나 "일상성"이라는 어휘의 사용이 반복되었듯 갑작스럽다 하여도 경이라 하여도 기괴하다 하여도 그것은 '갑작스러우면서도 경이롭고 기괴한 "일상"의 문제인 것이다' 세계와 우리 자신의 날들에서 일어나는 현실 말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신화를 통하여 우리는 세계와 우리 자신을 깊은 차원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기괴한 사고'에 대해 결론 짓고 있다.


여기까지 이야기한 조지프 캠벨의 주장을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응 해보자. 신의 가면을 쓰고 신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원시의례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던 예수님의 말씀에 수긍하던 기독교인들을 통해 더욱 온전히 완벽한 연극으로 완성되었다. 예수님 사후 요한복음서를 통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라며 예수님을 하나님과 완벽한 일체를 이루는 존재로까지 온전히 빈틈없는 하나의 극으로 완성되지 않았나? 게다가 '만물이 그로 하여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 된 것이 없느니라' 라는 구절로 인하여 바늘구멍 하나만한 빈틈도 없을 완벽함을 갖추게 된 것이다.


사실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 하여 어찌 하나님이겠나? 비유하자면 자신의 아버지 곁에 있는 이가 모두 아버지라는 논리는 성립될 수없는 논리일뿐이다. 말씀은 하나님의 창조 내지는 부분적 분할(할애)을 통해 존재케 되신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사용하셔서 말씀을 근간으로 존재의 차원을 창조하신 것이라는 것이 요한복음의 말씀일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계시니 하나님이시다는 논리를 담은 구절은 예수님 생존시 허락을 구하고나서 요한복음서가 쓰여졌다면 예수님께서 허락하셨을리 없을 논리적 오류 자체인 구절이다. 그리고 말씀을 현대 과학으로 보자면 말씀이라 할 때는 정보를 담은 소리를 말하는 것일테고 이는 현대물리학에서 아마도 파동이라 이르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파동은 시각영역을 자극하는 대상이 될 때는 빛, 색깔, 형상을 띠게 되며 청각영역을 자극하는 대상으로는 소리가 될 것이며, 촉감으로는 냉감 열감 등등의 느낌으로 접수 될 것이다. 이 파동의 주파수 대역으로 아마도 초끈이론에서 끈의 파장이 달라지며 물질의 최소구성인자의 종류가 결정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말씀이란 애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차원들 중 우리가 거주하는 물질 우주를 구성하고 운영하는 원리 자체를 상징적으로 말하는 것이지 인격체를 상징하는 것일 수 없다. 그럼에도 요한복음은 창조자와 구성원리를 인격체와 동일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창조자와 창조자가 창조한 구성원리 그리고 한명의 인격체를 동일시함으로써 원시부족의 가면의례와도 같이 하나의 신화가 온전함을 갖추게 된 것이다. 


자신을 하나님이 아들이라 하고 그를 신앙하는 이들은 그를 하나님과 동일시함으로써 as if~, make beleive~ 라는 의례이면서 동시에 놀이인 논리가 완성된 것이다. 이렇게 신인 체하고 신이 되었다고 믿는(가정하는) 의례의 필요성과 그 기능에 대해 조지프 캠벨은 인도의 간다르바 탄트라를 들어 설명한다. 


"스스로 신이 되지 못한 사람은 제대로 예배할 수 없다. 신이 된 사람만이 신에게 자신을 제물로 바칠 수 있다." -  간다르바 탄트라(Gandharva Tantra)


신에게 제대로 예배한다는 것, 신에게 자신을 제물로 받칠 수 있다는 것은 모두 스스로가 신이 되는 것이 전제가 된 이후의 결과이다. 즉, 신이 되는 것은 의례를 완성하는 전제 조건이며 이러한 전제는 바로 신의 제물이 되고 신에게 예배하는 다시 말해 신에게 귀속되고 환원되는 과정 그 자체를 이르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관점은 신이 되어야 신의 것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란 논리적 귀결에 이르도록 한다.


따지고 보면 기독교적으로 인간이란 하나님의 형상을 본따 즉 하나님의 구조대로 만들어져, 하나님의 부분을 담으면서야 창조가 완성된 존재이기에 처음 부터 하나님과 그 피조물인 우주와 인간 이 셋이 모두 완전히 독립되기만하고 단절되어 있는 존재라고만 우기는 것은 애초에 막무가내식 억지일뿐이었다. 그렇다고 독립적인 존재가 결코 아니기만 하다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이기만 하거나 단절되어 있지만은 않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 다시한번 언급하겠지만 조지프 캠벨이 말하는 '자아의 상실과 자아의 고양이 동일하게 느껴지는 순수한 황홀의 경험'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자아의 상실'과 자아의 고양'이 어떻게 같으냐? 무슨 말 장난인 것이냐? 고 의문을 갖는 사람은 여기까지 이르는 포스팅들을 건성으로 스킵해가며 하얀 행간만 읽은 것일 거다. 자아의 상실은 자신의 자아 곧 내가 사라지며 자신이 사랑(신앙)하는 대상만이 자신을 충만히 채우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아의 상실과 동일하게 느껴지는 자아의 고양이라 한다면 결국 자신의 근원이자 자아 상실 상태의 자기를 압도하며 충만히 채운 대상(근원적 일자)만이 온전히 자신과 모든 차원의 우주에 가득해진 상태를 이를 것이다.  


그래서 조지프 캠벨은 말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아이의 미분화 경험이 성인의 개별화 경험 보다 더 깊은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개개의 유기체는 결코 자연에서 독립해 있지 않다." "모든 신비주의가 추구하는 가장 큰 목표는 자아라는 이슬방울을 전체라는 대양 속에 소멸시키는 것, 즉 자아를 비우고 신의 얼굴을 보는 것이다."라고 말이다.


다시 말해 이미 예로 들었던 '소함'과 '함사'의 의미인 "나는 그이다." "그는 나이다."가 영혼 깊숙히에서 의미 그 자체로서 아니 존재적 차원 그 자체로서 충만히 온전히 진실임을 깨닫게 하고자. 스스로가 또는 우리의 대표라 할 상징적 존재가 이 세상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말이다. 기독교인들에게 그런 상징적 존재의 대표적 인물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 이어서 계속됩니다

삶의 충만성은 회복과 귀환의 길을 깨닫는데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