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의 본질 - 환생의 증거와 의미, 카르마와 생명망에 대한 통합적 접근
크리스토퍼 M. 베이치 지음, 김우종 옮김 / 정신세계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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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와 카르마, 그리고 죽음 이후의 세계 등에 대해서는 어린 시절부터 관심이 많았다. 특히나 군대에서는 일본에서 활동한 심령가 안동민 씨의 [업장소멸] 시리즈를 읽고 또 20대에 마이클 뉴턴의 [영혼들의 운명] 시리즈를 읽으며 사색에 빠질 때도 있었다. [티벳 사자의 서]에 대한 번역서 몇 권과 [이집트 사자의 서]에 관심이 간 이유도 인간의 시작과 끝, 진정한 인생의 목적이자 운명은 무언지가 궁금할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겪는 깊은 운명의 무게를 감당하면서 오히려 운명에 초연해졌다. 죽음도 삶도 그다지 무겁게 다가오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런 문제들에 관심을 갖는 자체가 인생이 살만하고 운명이 그다지 무겁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게 성장과 성숙의 과정만도 아니고 인간의 삶과 이 세계라는 것이 교육의 장만이 아닌 거라면 도대체 인간이 인식하는 운명은 뭐고 윤회나 카르마란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는 숨 돌릴 만한 무게로 생의 체감 무게가 달라지니 이런 희론적인 사유도 하게 되는구나 싶기도 하지만 성장과 교훈을 빼고도 태어남과 삶과 죽음이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지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윤회에 관한 책들을 탐독하게 되었고 살아오며 내가 지니게 된 생사관, 내세관, 인생관들을 돌아보게 되었다.

 

본서는 철학과 종교학을 연구한 저자가 윤회에 관해 연구한 자료들을 근거로 자신의 생각을 더해서 집필한 저작으로 이런 류의 책들을 자주 탐독해온 분들에게는 크게 색다를 건 없는 저작이기도 하다. 하지만 윤회를 바탕으로 삼고 생의 이유와 목적을 처음으로 사유해 보고자 하는 분들께는 유익할 수도 있을 책이다.

 

저자의 서술을 통해 잊고 있던 정보들이 떠오르기도 했는데 무엇보다 윤회는 유대교 하시디즘과 이슬람 수피들, 그리고 기독교 영지주의자들에게는 정설로 인정받던 것이라는 것도 저자의 서술을 통해 새삼 일깨워지기도 한 기억이다. 저자의 말이 아니었다면 다시 회상해 보지 않았을 지식은 이것인데, 찰스 폰즈의 [카발라]라는 책에서도 카발리스트들은 윤회를 길굴이라고 하며 삶과 죽음과 재탄생의 거듭되는 순환을 통해 인간이 완전성을 회복하라는 창조자의 배려로 보고 있다.

 

대개의 윤회론을 주제로 한 저작 그리고 죽음 이후의 세계를 서술한 저작들의 공통점은 인간의 생과 죽음 그리고 내세와 환생은 우리의 성숙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의 여정은 영혼이 성숙하기 위해서이고 세상은 그를 위해 주어지는 교육의 장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입장은 지나 서미나라의 [윤회]라는 책을 리뷰하며 서술한 바대로 성숙을 위해서라면 인간이 윤회를 기억 못하고 거듭되는 윤회만이 아니라 한 생 안에서도 거듭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이어서 퇴보하기도 하는 건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반복과 어그러진 순환은 생의 목적이 성숙이 아니라는 반증이라고 생각한다. 인생과 윤회는 성숙이나 성장이 아닌 그 자체를 감상하라고, 다시 말해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다채로운 양식으로 연기하며 스스로에 삶의 선택들에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감동을 하라고 주어지는 것이지 않은가 하는 것이 나의 견해다.

 

본서를 보면 어느 여성 저자의 [전생요법]이란 책에서 인용한 전생 회상 기법은 내담자와 상담 후 그의 구술에서 인상적인 몇 단어를 최면 기법 없이 생각이나 말로 반복하게 하는 것이다. 그럼 내담자가 자유연상처럼 떠오르는 대로 전생 이야기를 쏟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저자의 저작에서 인용한 전생 퇴행 최면을 통한 내용들은 한 인물이 거듭 같은 인생의 루틴을 다채로운 시대에서 다채로운 환경에서 거듭 환생하며 반복적으로 만나는 인물들과 비슷한 루틴의 잘못을 다양한 양식으로 반복하며 환생한다는 것이다.

 

이는 저자의 주장과는 다른 결론도 유추할 수 있다. 전생을 회상하거나 전생 퇴행 최면을 받는 인물들이 최근의 자신에게 인상적이거나 각인되는 생의 요소에 매몰되어 최면 암시 속에서 하나의 스토리나 둘 셋 넷의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냐 하는 의문이 일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루틴만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한 생과 다음 생과 그다음 생 등 몇 생의 텀을 두고 순환하는 몇 가지 인생 루틴이 한 인물에게서 발견되기도 한다. 생과 생과 생을 반복할 때 순환 주기에 텀을 두고 몇 가지 주제들을 다른 순환주기마다 각각 거듭 반복하며 윤회해 왔다고 결론 짓는데 이것도 한 인물에게 인상적인 몇 가지 주제가 최면을 걸 때마다 또는 최면에서 다른 생으로 퇴행해 갈 때마다 내담자가 자신에게 인상적인 몇 가지 주제를 주기적으로 각각 반복해 여러 생을 연상해 구술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짐작해 볼 수도 있다.

 

그리고 가족 구성원의 최면 시 구술이 같다고 한다면, 우주 공간이나 지구 내 공간에 입력 저장된 과거 다른 인물들의 인생 데이터와 현재의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접속되며 그 데이터를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자신들의 생으로 착각해 발언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자각몽을 집단이 함께 꾸고 공유하는 사례도 있으니 좀 전 말한 경우를 가정하거나 집단의 암시 동조화로도 충분히 의심할 만 하다고 본다.

 

더욱이 카르마가 관계성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라고 하면서도, 자신이 자각하거나 명상 수행을 통해 카르마의 악영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힌두교와 불교에서 하는 주장을 저자도 반복하는데 그것 역시 어폐가 있어 보인다. 이를테면 B라는 사람이 A의 가족을 몰살하고 나서 깊은 수행을 하면 AB 사이의 카르마는 해소되고 A는 기다렸다는 듯이 B를 용서하게 된다는 게 카르마의 원리라는 것인데 이게 카르마의 우주적인 형성과 해체의 원리라면 합리적인 구조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인간은 무작위의 대상에서도 패턴을 읽어내고 스토리를 찾아내는 독보적인 능력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자신이 스스로의 과거부터 현재와 미래까지의 절대적인 주도권을 확보할 관점도 그 독보적인 능력을 사용해서 창조해냈다고 보는 게 윤회와 카르마에 대한 관점으로 더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윤회가 몽상이거나 윤회가 있다 해도 그 근간이 교육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없는 원인과 없는 결과와 없는 과정을 통해 구속받기도 성숙하기도 자유로워 질 수도 있는 게 인간이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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