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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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메스학 입문의 과정을 마치며 4원소의 세계를 여행하는 과정에서 나는 그 과정이 마치 칼 융의 적극적 명상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되었다. 내친김에 하나의 세계를 창조했고 창조한 그 대륙과 섬들과 그 세계에 만든 피조물들을 가끔씩 돌아봤다. 명확하게는 피조물들을 돌아봤다기보다는 내가 만든 세계를 유람했다. 그러다 어느 날 나의 피조물들이 모여든 자리에서 나는 고백했다. “내가 너희의 신이다라고. 피조물들은 분개해서 일어났으며 창을 들어 모두가 내게 저항하려 했다. 나는 그들을 제압하기보다는 내가 만든 피조물들을 해치기 싫다는 심정이 들어 그 자리에서 날아올라 그 대륙과 섬의 창공을 날아 다시 유람을 떠났다. 그 이후로는 나의 피조물들에게 내가 너희의 신이다라는 고백이자 선언을 하지 않았다.

 

이건 일종의 적극적 심상화이기도 한데 세계를 내가 창조했다는 것만 차이가 있을 뿐, 헤르메스학 입문에서 원소의 세계를 여행하는 것이나 흔히 백마법이라고 불리는 에노키안 매직의 여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페어리 웨이까지 마법 대부분이 또 다른 세계와 조우하며 그 세계와 그 세계의 존재들을 체험하는 여정이다. 이런 일련의 익숙한 세계로 인해 나로서는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 등장하는 세계와 그곳을 여행하고 그림자가 빠져나와 살아가고 또 노란잠수함 소년이 의 역할을 계승하는 내용들이 그다지 거부감이 없었다. 오히려 세계의 구성과 양식이 단조로워 무라카미 하루키 씨의 상상이자 명상이 담박하다는 감상이 들었다. 40년이 넘어 구축된 세계임에도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가 만든 세계 다시 말해 소설 속의 나의 그리움의 대상이 함께 창조해낸 그 세계에 대해 나름 체감 아닌 체감을 하며 소설을 완성한 것 같다. 그리고 그의 작가적 상상력이라고 할까 식자적인 상식이 그가 만든 세계를 보다 지적으로 풍부히 서술하게 했구나 생각되었다. 벽 속의 세계를 화자이자 주인공은 벽의 의지를 말하며 의식을 가진 존재로 인식하고 그곳(벽 안의 도시)을 장기의 내벽과 같다며 되뇌이기도 하며 다음에는 뇌의 모양을 빌려 설명하기도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씨는 벽, 도시, 그림자, 짐승들, 도서관과 소녀, 꿈 읽는 이, 웅덩이 등 나름 나열할만한 상징들을 보여주고 있다. 뇌와 의지가 언급되었음에 분명 의식과 무의식, 칼 융이 말하는 인간의 그림자를 상징할 것이다, 이 모든 건 인간과 영혼을 상징하고 있다고 단정 지으려 해도 마지막까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늠되지 않았다.

 

그걸 가늠하려는 것보다는 그저 이 소설이 주는 서사와 화자인 가 느낀 1부에서 마지막까지 흐르는 간절함과 그리움 그리고 끝내 현실을 인정하고 수긍하게 되는 대미에서 무언가 감상이 담겨야 할 것만 같았다. ‘가 경험하게 된 그 세계는 그리움이 간절함과 마찰하며, 그녀와의 설계대로 건축된 것이고, 2부에서 고야쓰 씨를 만나고 옐로 서브마린 소년과 만난 것은 문학적 운명이었다고 해도, 현실세계로 돌아온 그림자일까 본체일까가 카페 여주인을 만나고야 가 그 도시에서 현실세계로 다시 돌아올 정서가 불러일으켜진 것은 수긍할 법했다.

 

이 신비한 이야기는 때론 몰입하게 하고 때론 그만큼 지루한 구간이 있지만 분명 상실만큼 회복과 그 회복의 여정이 담겨있지 않나 싶다. 상징들에 넋이 나가 있는 동안 알게 모르게 이 상실과 회복의 여정이 내 안에서 나를 일으켜 세운다. ‘너의 것이 되고 싶다고 어떻게든 온전히 너의 것이 되고 싶다는 그녀의 말은 너무도 닭살 돋고 부끄러운 대사 같았지만 한 남자가 무언가 자신의 전부를 상실한 채 살아가게 하기에는 충분하고도 넘치는 말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등장인물의 입술을 빌려 한 말처럼 누구나 자신의 그림자를 데리고 살지만 이런 기억의 그림자는 이 소설 속 벽 안의 도시와 같은 세계를 창조하고 그 세계로 떠나버리기에 충분한 힘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녀 말이 의 그림자에 깊은 암영을 드리우게 하지 않았을까? 그녀의 입술을 통해 태어난 의 그림자는 그 도시를 갈망하고 는 이 여정을 마치지 않고서는 다시 재생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나 역시 간절함과 외로움이, 앞서 말한 내가 창조한 세계를 만들게 했고, 안타깝게도 그 세계를 유람하는 중에도 본체의 세계에서 내가 박탈되고 있었던 것처럼, 그 세계의 나도 나의 피조물들로부터 배제되고 말았다. 아마도 나는 내가 만든 세계에서 다시 한번 그들과의 마주침을 조심히 준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 세계에서의 여정이 현실세계의 여정과 만나 내게 다른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삶의 빛깔을 만들게 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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