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열림원 세계문학 1
헤르만 헤세 지음, 김연신 옮김 / 열림원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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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을 처음 읽었던 건 중학 2년 때쯤으로 기억한다. 그 시절 즈음에는 무협지와 문학 소설과 시도 나름 좋아했었다. 언젠간 시를 다소 읽을 때는 아마도 그 시절의 향수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문학은 소시민이 향유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풍요로운 대상이기도 하고 말이다.

 

오랜만에 데미안을 다시 읽고 든 첫 감상은 내가 이 소설을 정말 읽었던 적이 있는 걸까하는 자기 의심 같은 것이었다. 소설 전반이 기억나지 않아서이기도 했고 친구의 엄마에게 사랑을 느낀다거나 전쟁이 일어나 군에 징집되는 내용까지 청소년이 느끼기에 임팩트가 없지 않는 단락들 마저 전혀 기억에 없어서 더 그렇게 느꼈다. 내게 데미안은 그저 이번에 처음 경험한 것과 전혀 다름이 없다.

 

본서의 부록으로 작품해설이 있는데 데미안에 대해 문명 비판으로서의 기능을 논하고 있기도 했다. 천박한 물질 문명의 부상과 진정한 삶의 무산을 비판하기 위한 소설이라고 말이다. 그렇게까지 문학 비평가적으로 바라보지 않더라도 청소년부터 청년, 중년, 장년에 이르기까지 누구에게든 의미로운 감상을 남길 소설이라는 감상이 깊다.

 

유년기의 아이가 청년기에 이르기까지의 역동들을 헤세 특유의 감성어린 필체로 그리고 있는 소설이 데미안이다. 많은 사람들이 알을 깨는 새의 이미지로 상징적 감상을 갖을 데미안이지만 나로서는 몇몇 상징만이 아니라 소설 속 등장인물 한 명 한 명과 배경묘사 하나하나까지 무엇 하나 상징적이지 않은 것이 없게 다가왔다.

 

청소년 싱클레어의 아니마인 베아트리체와 에바 부인 그리고 그의 롤 모델인 막스 데미안만이 아니라 프란츠 크로머, 알폰스 벡, 피스토리우스, 크나우어, 그리고 싱클레어의 어머니와 아버지까지 등장인물 모두의 상징성이 다가왔고 낱낱의 장면까지 이 함의적인 소설에서 안배된 배치들이 아마도 다시 읽고 다시 읽는다면 읽을 때마다 달리 다가올 것만 같다.

 

유년기에 마주친 크로머는 그의 부정적 행위를 약점으로 잡아 싱클레어를 통제하며 그를 점점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존재였지만 그가 아니고서는 싱클레어는 자신의 그림자를 경험해 볼 수도 자신의 아버지에게 보인 것과 같은 오이디프스적이며 자기방어기제와도 같은 양상을 자신이 보이는 상황을 경험해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대극 중 하나를 경험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였기에 크로머도 트릭스터의 외양을 띤 한명의 인도자였는지 모른다고 생각된다.

 

청소년기의 알폰스 벡은 싱클레어의 이성과 영성과는 상반되는 욕동을 자각하게 해준 존재라 여겨졌다. 데미안이나 피스토리우스와는 다르지만 벡 역시 크로머보다는 온건한 모습의 인도자였다고 생각된다. 크나우어는 그 누구보다 현실에 뿌리내린 인도자가 아니었을까 싶다. 싱클레어 자신이 자신에게 갖는 심경 전반이 통합된 기대와 평가를 크나우어를 통해 다시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데미안과 에바 부인이 보이는 변성의식 상태의 양상을 청년이 된 싱클레어도 보이는데 이들 간의 교감과 영성적 소통이 크게 의아스럽게 보이지도 않는 건 오랜 세월 동안 이와 같은 류의 가르침들과 가까워졌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싱클레어의 정신을 성장시킨 건 크로머와 벡이 한 축이고 데미안, 에바 부인, 피스토리우스가 반대편 축에 있다고 생각되었다. 크나우어와 싱클레어의 부모는 그사이 경계에 있는 인물들이고 말이다.

 

그들에게 찾아온 전쟁은 사람이 자성하고 자각하고 성장한다고 해도 결국 세상이라는 변화는 주도해서 막거나 혁신시킬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것을 일깨웠다. 자신의 깨달음과 깨우침이 전 우주적인 가치를 갖는 것만 같겠지만, 소수가 다수의 집단무의식을 자극해 가져온 인류적 차원의 변화나 재앙은 단 한 사람 또는 몇몇의 깨달음만으로 변화를 가져올 수 없는 문제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데미안을 통해 인류의 연대기나 자신의 역사를 돌아보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자기 나름의 남다른 통찰을 갖는 경우도 있을 수 있겠지만, 문학 비평가들이 무슨 수식어를 가져다 붙인다고 해도 데미안은 사람에게 성장이란 무엇인가 성숙이란 어떤 가치일 수 있는가를 인물의 성장 과정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는 감상이 가장 먼저 든다. 청소년기에 한 번쯤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 또 한 번쯤 다시 읽어볼 만한 소설이 아닐까 싶다.

 

여기까지 성장소설이란 방향에서 다소의 얕은 감상만 남긴다. 데미안과 싱클레어 사이의 카인과 아벨에 대한 대화에서 시작되는 긴 여정에 주목한 감상을 남기자면 너무도 장황한 언변들이 이어져야 할 것 같기에 성장소설과 심리에 대한 짧은 감상만을 남긴다.



[밑줄 긋기] 

- 작가들은 소설을 쓸 때면 마치 자신이 신이라도 되는 양, 그래서 어떤 인간사를 훤히 꿰뚫어보고 이해하며, 신이 자기 자신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기라도 하듯 그렇게, 아무것도 은폐하지 않고 어디서나 의미있게 서술할 수 있는 것처럼 굴곤 한다.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작가들이 그렇게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지만 어떤 작가에게 자신의 얘기가 중요한 것 이상으로 내게는 내 이야기가 중요하다. 그건 바로 나 자신의 이야기이자, 한 인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의 삶은 자기 자신을 향해 가는 길이자, 그 길로 가고자 하는 시도이며, 어느 좁은 길에 대한 암시라고 하겠다. 일찍이 그 누구도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누구나 그렇게 되려고 애를 쓴다. 누군가는 막연하게, 누군가는 보다 확실하게, 각자 할 수 있는 만큼 애를 쓴다.

 

새는 힘들게 싸워 알을 깨고 나온다. 그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세계를 부숴야만 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 데미안이 남긴 쪽지에

 

“... 만일 자연이 당신을 박쥐로 만들었다면 자신을 타조로 만들려고 해선 안 되겠죠. ...” - 피스토리우스

 

지금 우리가 아브락사스라는 이름을 붙여준 우리의 새로운 신앙은 아름다워요. 친구여, 그 신은 우리가 가진 최상의 것이라오. 그런데 그 신은 아직 젖먹이죠!. ...” - 피스토리우스

 

그래, 넌 내게 멋진 성자지! 네게도 죄악이 있다는 걸 난 알아! 현자처럼 행동하지만 나와 모든 사람처럼 똑같은 오물에 비밀스레 매달려 있지! 넌 돼지야. 나 같은 돼지라고, 우린 모두 돼지라고!” - 크나우어

 

나는 전에 자주 미래의 형상들과 유희했었다. 어쩌면 시인이나 예언자로서 또는 화가나 다른 어떤 것으로서 내게 배정되어 있을 역할들을 꿈꿨었다. 그런 건 모두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시를 짓거나 설교를 하려고, 그림을 그리려고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건 모두 부수적인 결과로 생겨날 뿐이었다. 각자에게 진짜 소명은 단 하나였다. 그건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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