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지 않는 영혼 - 내면의 자유를 위한 놓아 보내기 연습
마이클 싱어 지음, 이균형 옮김, 성해영 감수 / 라이팅하우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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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제목과 달리 영문 제목은 직역하자면 묶이지 않은 영혼이고 좀 더 완만히 의역한다면 매이지 않은 영혼정도가 될 것 같다. 일단의 서양에 영적 지도자들로 분류되는 이들의 성향이 거의 그러하듯 고뇌하며 괴로움을 겪어본 상처받은 치유자의 빛깔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의 서양에서 영적 지도자로 분류되는 이들은 괴로움을 겪어본 이들이 아니라 문서로 학습하고 머리로 사유한 철학자들과 다름없지 않나 싶다.

 

마이클 싱어 또한 서양과 동양을 아우르며 불가의 가르침으로부터 요가의 빛깔을 담고 노자의 도덕경을 언뜻 언급하다가 요한복음서로 마무리하고 있지만 깊은 통찰은 무리인 것만 같다. 그는 분별하는 학자의 눈으로 보고 나누고 가르며 강연하고 있다.

 

불가의 가르침이 친근하지 않은 이들이나 스스로의 마음에 의문도 살핌도 없는 이들에게나 몰입하게 할 책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에게서 삶을 통해 괴로움을 가로지르며 다른 언덕으로 오르려 하는 이의 면면은 보이지 않는다. 깨달은 이의 시선을 통해 배운 바를 읊조리고 깨달은 이와 보통의 사람, 깨달은 세계와 고통받으며 헤매이는 괴로움의 세계를 분별해서 저곳만이 피안이라고 손가락질하고 있다.

 

하지만 괴로움 속에서 허덕여본 사람, 삶이 주는 무게를 짊어지고 괴로움의 바닷속에 침몰하며 허우적대 본 사람들은 안다. 고해에서 허우적대는 것도, 잠시 쉬는 시간 주어지는 휴식 같은 별일 없는 시간의 안락감도, 모두가 나를 깨우쳐주고 있는 것이란 걸. 괴로움의 세계와 깨달음의 세계가 결코 다른 세상이 아니며, 과정을 거쳐야 벗어날 수 있는 트라우마나 정신과적 문제들까지도 우리가 살아있음을 느낄 기회였다는 것을.

 

그는 일상의 고민과 번뇌를 넘어서야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듯 이야기하고 있다. 살아있다는 것을 만끽하게 하는 경지는 따로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정작 괴로워 봤던 이는 안다. 삶이 주는 모든 무게도, 나를 혼란케 하는 과정도, 결국에는 그 자체를 느끼며 살아있는 과정이며 살아가는 자체라는 것을 말이다. 물론 어떤 집요하게 괴롭히는 상태는 우리의 각성과 벗어남을 요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생이란 성취나 성장(성숙)이 목표인 그런 것이 아니라 살아있다는 것을 그 자체로 만끽하기 위한 과정일 것이다. 물론 삶의 무게는 그 무게가 주는 엄중함에 과몰입하면 죽음에도 이르게 한다. 하지만 이 세계를 하나의 자유도 높은 시뮬레이션 속이라고 가정할 때 우리는 우리가 우리에게 주는 미션 이외의 미션은 없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분명 그럴 것이다. 다시 말해 성취하라거나 성장하라고 우리가 서로에게 또 스스로에게 세뇌하지 않는다면 그런 건 애초에 미션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분명 그러할 것이다.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자체로써 느끼며 살아있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그 외의 의미에 우리 주목하고 싶어하기에 의미를 찾지 못하는 역설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라는 말이다.

 

번뇌하고 망설이고 선택하고 좌절하고 절망하는 자체도 우리가 살아있음을 느낄 기회인 거다. 뿌듯하고 기뻐하고 즐기며 환희하는 순간만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만끽한다는 것은 어쩌면 좋은 느낌만이 아니라 좋지 않은 느낌들까지 아울러 감각해야 하는 것이다. 삶에 감사하지 못할 때도 우리는 살아있으며 성장이나 기쁨만이 우리가 느껴야 할 대상이라면 우리는 더 기쁨을 잘 찾는 존재로 더 실수하지 않는 존재로 진화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뻐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절망하는 존재이기도 하며 거듭 같은 실수를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가 성취하고 성숙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면 또 기쁨만을 만끽해야 하는 존재였다면 우리는 지금처럼 이렇게 진화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대해 살아가야 할 태도에 대해 애초에 잘못된 정의를 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저자는 깨달음에 이른 사람은 남이 원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남이 싫어하는 것을 온전히 받아들인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이 기쁨과 안락을 그리고 행복을 원하듯 깨달은 이도 그런 것을 원한다. 불가의 가르침은 이고득락이라고 하지 않는가? 괴로움을 떠나고 즐거움을 얻기 위한 것이 불가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유라고 불교에서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명상에서 얻는 최상의 한 가지는 지복이라고 불린다. 지극한 행복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실수하고 넘어지고 절망하는 사이에서 행복을 향하고 있다. 그런 게 생이다. 모조리 성취하고 태어나는 존재가 있다 해도 그도 그 나름의 좌절과 절망을 경험할 거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행복을 향하려는 과정은 틀린 것도 잘못된 것도 아니다. 살아있는 과정에서 느끼는 모든 것들은 결국 우리를 행복으로 향하게 하며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우리는 깨어있으며 살아있다는 자체를 만끽하면 된다.

 

그렇기에 붓다께서는 번뇌가 즉 보리(지혜, 깨달음)이며 중생이 곧 부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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