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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전사의 탄생 - 분쟁으로 보는 중동 현대사
정의길 지음 / 한겨레출판 / 2015년 1월
평점 :
품절
현재의 중동 문제로 중동에 대해 간략히라도 알고 싶은 마음에 몇 권을 읽게 되었다. 몇몇 저서를 읽으며 한 가지 사안에 대해서도 다양한 관점과 시야의 책을 두루 보는 것이 사안을 이해하고 다각도로 사유하기에 유익하구나 생각됐다.
[IS 지하디스트 그리고 이슬람]이란 책을 통해서는 간략히 요약된 중동사를 접할 수 있었고 이슬람이란 어휘의 의미에 대입해 이슬람 원리주의를 이해할 수 있었다. [중동은 왜 싸우는가]는 중동에서의 서구 세력의 영향력에 대한 이슬람 사람들의 저항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기 위한 의식있는 저항으로 드러났다는 감상을 갖게 되었다면. 본서 [이슬람 전사의 탄생]을 통해서는 서구의 이슬람 침탈과 전략의 의도를 좀 더 다채롭게 알 수 있었고 그에 대해 저항하며 일어난 이슬람의 저항이 비단 신에게 복종하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운동만이 아니라 다분히 정치적인 움직임이기도 했다는 감상을 갖게 되었다.
[중동은 왜 싸우는가]가 21개의 장으로 중동의 역사를 나름 상세히 조망하는 기회였다면, 본서는 각 단락별로 중동 각국의 역사를 다루기 보다는, 중동의 정세와 전세를 통해 이슬람 원리주의가 확산하고 기세가 확장되며 일어난 정치적 분쟁과 결탁의 면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슬람 원리주의라며 무장단체들이 일어서지만, 그들이 이슬람 민중을 다 대변하는 것도 아니며 각국의 정부에 저항하는 이유도 각국 정부가 타락해서가 아니라, 자신들 스스로를 신의 권위를 대변하는 대리인으로 정하고서 자신들에게 저항하는 측을 신에 대해 대항하는 세력으로 단정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다는 걸 본서를 읽으며 느끼게 됐다. 오사마 빈라덴의 알카에다 같은 경우도 사우디의 원조를 받으며 성장하고 유지하면서 각국의 정권 교체 등 정치적 영향력 확대에 전념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도 확연히 보이는 건 사분오열되어 보이는 이들 이슬람의 정권과 무장단체들은 외세에 저항만 하는 게 아니라 정치적인 의도하에 그들과 결탁하고 서로서로 반목하거나 공조하며 세력 확장에 주력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 스스로가 아무리 알라의 뜻이라며 내세우는 원칙이나 명분들도 그들 스스로에 위세를 확장하고 성장시키는 이상의 의미는 찾을 수 없었다.
본서는 제목부터가 [이슬람 전사의 탄생]이듯 이슬람 원리주의와 무장세력의 형성과 확산, 영향력 확대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으며 인상적인 대목은 알카에다의 911테러와 그에 대해 응전한 미국 정부의 전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911 테러 직후 부시 정부는 ‘전 세계 테러에 대한 전쟁’이라는 취지로 대응했는데 오바마 정부 때는 ‘알카에다와 그들 테러에 대한 전쟁’으로 포커스를 조율했다고 한다. 그리고 911 테러 훨씬 이전부터도 이슬람 각국에서의 전쟁 수행시에도 확전의 우려를 보고할 때 미 정부인사들의 입장은 세계대전으로 확전된다고 해서 나쁠 건 무어냐는 식의 대응이었다고 한다.
러시아나 미국, 유럽의 정략적 이슬람 각국에 대한 외교와 전략은 솔직히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단체들의 그것보다 나아 보이는 면이 없었다. 외세의 침탈에 저항할 방법이 테러라는 한 수 밖에 남지 않은 이슬람의 입장이 되려 이해될 지경이다. 이슬람이 극단적인 역사 퇴행적인 태도로 영향력을 개인들에게 미치고 있기에 미국과 서구의 악의적인 정책들이 희석되어 그렇지 이슬람이 받은 침탈을 이슬람 정도의 문화 수준에서 한국이 받았다면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행동을 취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합리화뿐인 이슬람의 폭력적 행태는 정당성이 그들에게는 없어 보이기도 한다. 이슬람과 서구세계의 충돌은 아마도 현재진행 중이고 미래에도 그치지 않을 듯한데 그들의 경전에 가르침을 넘어서는 새로운 서술을 가져올 누군가가 그들에게 나타나 주는 것이 인류적 차원의 유익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성은 개들에게나 던져주라’는 그들이기에 이성과 대화와 타협을 통한 화해나 화합은 요원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전에는 현재까지와 다름없는 제도의 결과만으로는 결코 이제까지와 다른 결론을 가져올 수 없어 보인다.
그래도 중동을 알아가려는 노력은 현재를 알고 겪는 것과 모른 채 감당하는 차이이기에 현격히 다른 삶의 태도와 대응이 아닌가 싶다. 알아야 덜 당황스러운 것은 사실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