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네 백인들은 그렇게 많은 화물들을 발전시켜 뉴기니까지 가져왔는데 어째서 우리 흑인들은 그런 화물들을 만들지 못한 겁니까?" 간단한 질문이지만 그것은 얄리가 경험한 삶의 핵심을 꿰뚫고 있었다.
어쩌면 그와 같은 이주, 적응, 인구 폭발의 순환이 대약진을 야기했고 그때부터 반대로 서쪽의 유라시아와 아프리카로 확산되었는지도 모른다.
피사로가 성공을 거두게 한 직접적인 원인에는 총기, 쇠 무기, 말 등을 중심으로 한 군사 기술, 유라시아 고유의 전염병, 유럽의 해양 기술, 유럽 국가들의 중앙 집권적 정치 조직, 문자 등이 있다.
동식물의 가축화와 작물화는 곧 훨씬 더 많은 식량과 조밀한 인구를 의미했다. 그 결과 잉여 식량이 생겼고 또한 일부 지역에서는 동물을 이용하여 그와 같은 잉여 식량을 운반할 수 있는 수단이 생겼다. 그 두가지는 정치적으로 중앙 집권화되고 사회적으로 계층화되고 경제적으로 복잡하고 기술적으로 혁신적인 정주형 사회로 발전 하는 데 필요한 선행 조건이었다.
그리하여 식량 생산을 일찍 시작한 지역의 민족들은 총기, 병원균, 쇠를 발전시키는 방향으로도 일찍 출발한 셈이었다. 그 결과는 역사의 유산자와 무산자 사이의 수많은 충돌이었다.
식량 생산자들은 인구가 조밀했기 때문에 굳이 기술, 병원균, 직업 군인 등등 식량 생산과 관련된 그 밖의 이점들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순전히 숫자만 가지고도 수렵 채집민들을 몰아내거나 몰살할 수 있었다.
우리가 야생 식물의 여러 개체 중에서 ‘선택‘을 했기 때문에, 그리고 밭에서 재배되는 식물 개체 사이의 경쟁은 야생 상태에서와는 또 다른 개체들에게 유리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진화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사과를 작물화시키지 못한 이유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주어진 야생 동식물 전체의 문제였다. 그 동식물이 가축화, 작물화에 그다지 유망하지 않아서 북아메리카에서는 식량 생산이 늦게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유라시아인들에게는 기타 대륙 사람들에 비해 가축화할 만한 대형 야생 초식성 포유류가 훨씬 더 많았다. 그 같은 결과가 나오게 된 것, 그리고 그로 인해 유럽 사회가 대단히 유리해진 것은 바로 포유류의 지리, 역사, 생태 등 세 가지 기본적인 현실 때문이었다.
선사 시대에 식량 생산이 전파된 지역들도 그 전파 속도나 시기는 상당히 차이가 났다. 식량 생산이 가장 신속하게 전파된 경우는 동서 축 방향이다.
... ... 대중성 질병들은 반드시 대규모의 조밀한 인구 집단이 형성되어 있어야만 발생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인구 집단은 약 10000년 전에 농업의 발생과 더불어 시작되었고 지금으로부터 몇천 년 전에 도시의 발생과 더불어 가속화되었다.
아무튼 초기의 문자는 그러한 정치 제도의 필요(기록 보관이나 왕권에 대한 선전 따위)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 문자의 사용자들은 식량을 생산하는 평민들에 의해 비축된 잉여 식량을 먹고 살던 전업 관료들이었다. 한편 수렵 채집민 사회는 문자를 만들어내지도 도입하지도 못했다.
각 대륙의 면적, 인구, 확산의 난이도, 식량 생산의 출발 시기 등에서 나타난 이 같은 차이에 따라 기술 발전의 격차는 더 크게 벌어졌다. ... 따라서 유라시아는 처음부터 상당히 유리한 입장에 있었지만... 그것은 유라시아인들의 지능이 탁월해서가 아니라 유라시아의 지리적 요건이 탁월했기 때문이었다.
... 정복의 궁극적인 원인은 식량 생산과 각 사회 사이의 경쟁 및 확산이었다. 거기서 시작된 인과 관계의 사슬에 의해 병원균, 문자, 기술, 중앙집권적 정치 조직 등 정복의 직접적인 요인들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구체적인 인과 관계는 경우에 따라 달랐지만 언제나 공통적인 요소는 조밀한 대규모 인구와 정주형 생활이었다. 이러한 궁극적인 원인들은 각 대륙에서 제각기 다르게 발전해서 정복의 직접적인 요인들에도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유럽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원주민의 수는 두 가지 원인 때문에 크게 감소했다. 첫 번째는 원주민들을 사살한 일이다. ... 두 번째 원인은 유럽인들이 들여온 병원균에 있었다. ... 이 같은 두 가지 원인 때문에 자율적인 원주민 사회는 유럽식 식량 생산에 적합한 모든 지역에서 제거되고 말았다. ... 그리하여 40000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원주민들의 전통은 유럽인들의 이주가 시작되고부터 1세기 이내에 거의 사라졌던 것이다.
이처럼 중국 문자가 한국과 일본에서 끈질기게 버틴 것은 거의 10000년 전 중국에서 시작되었던 동식물의 가축화, 작물화가 20세기에 남겨놓은 생생한 흔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동아시아 및 태평양 일대 사람들의 경우에도 지리적 환경에 따라 가축화,작물화할 만한 야생 동식물이 각기 달랐고 다른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는 여건도 달랐다. 그리하여 식량 생산의 여러 가지 선행 조건을 갖추고 아울러 다른 곳으로부터 기술이 확산되기 좋은 위치에 있던 사람들은 이 같은 이점을 갖지 못한 사람들을 교체했다. 그리고 어느 한 부류의 이주민들이 여러 가지 다양한 환경에 처하게 되었을 때 그 후손들도 각자의 환경에 따라 다르게 발전했다.
식량 생산에서의 이러한 차이점들은 유라시아 사회와 아메리카 원주민 사회 사이에 존재했던 불균형의 주된 궁극적 원인이기도 했다. 정복의 직접적 요인들도 거기서 파생했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은 바로 병원균, 기술, 정치 조직, 문자 등의 차이였다. 이 가운데 식량 생산의 차이와 가장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요인은 병원균이었다.
유럽이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삼을 수 있었던 까닭은 백인 인종 차별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유럽인과 아프리카인의 차이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리적, 생물지리학적 우연(특히 두 대륙의 면적, 축의 방향, 야생 동식물 등)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아프리카와 유럽의 역사적 궤적이 달라진 것은 궁극적으로 부동산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이제 지구상의 대륙들을 훑어보는 짧은 여행을 끝마친 지금, 우리는 얄리에게 어떤 대답을 해주어야 할까?
나 같으면 얄리에게 이렇게 말하겠다. 각 대륙의 사람들이 경험한 장기간의 역사가 서로 크게 달라진 까닭은 그 사람들의 타고난 차이 때문이 아니라 환경의 차이 때문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