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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경제학 필독서 50 - 애덤 스미스부터 토마 피케티까지 경제학 명저 50권을 한 권에 ㅣ 필독서 시리즈 7
톰 버틀러 보던 지음, 서정아 옮김 / 센시오 / 2023년 5월
평점 :
세계가 운영되는데 가장 기반이 되는 시스템 중 하나는 경제가 아닐까 싶다. 사회를 또 더 깊이는 사람 낱낱을 기저에서 욕동하게 만드는 근본도 경제학적 사고로 어느 한도까지는 이해될 수 있으리라고도 생각된다. 어쩌면 세계와 사회,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노력의 하나가 경제학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고 말이다. 이런 까닭에 본서의 출간 소식을 듣고 반가움이 일었다. 본서를 일독할 기회가 주어져 기뻤고 읽는 내내 다소 진지하게 임했다.
이 책은 연도별로 경제학자들의 저작이 수록되지 않았고 읽으면서도 뚜렷히 제시하는 항목 분류의 기준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그럼에도 읽으면서 머릿속에서는 전자와 후자의 수록 경제학자의 견해가 서로 보완하거나 상반되거나 통합되는 경우들이 인지되기도 한다. 요 몇 년 사이 경제와 정치, 전쟁, 미래 예측 분야에 깊은 관심이 가기 시작해 그런 방향의 책들을 다수 탐독해 왔다. 그러다 퍼뜩 생각이 드는 게 이 모든 호기심이 결국에는 사회학 분야에 대한 궁금증이라는 것이었다.
[세계 경제학 필독서 50]이라는 본서를 읽으면서도 결국 경제학이라는 것도 사회학의 한 부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의 역량 혹은 기업 중심주의’ 대(Vs) ‘제도의 중요성’이 대립되는 이야기로 본서가 읽혀졌기 때문이다. 기업가 정신, 기업 경영과 관련한 경제학자들의 주장은 결국 애덤 스미스의 ‘사리사욕이 전반적으로 긍정적 효과를 낸다’는 주장과 ‘정부 간섭이 최소화된 상태에서 국민이 자유롭게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의 연장선상에 있을 것이다. 거기서 ‘이상을 품고 창출하는 주체는 사회가 아니라 개인’이라는 루트비히 폰 미제스의 관점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논리 전개가 아닌가 싶다.
반면에 앨버트 O. 허시먼은 ‘현대의 자본주의는 슘페터의 파괴적 혁신의 과정이 아니라 인간의 비이성적인 면과 매우 불완전한 정보를 감안할 때 난국 타개의 과정에 가깝다’는 주장을 했다. 개인, 기업, 국가가 합리적인 행동을 한다든 데 대해 반기를 든 것이다. 다른 경제학자들과 아울러 ‘행동경제학’이 탄생하는 사고의 한 부분을 이룬 바라고도 할 수 있다. 경제의 주체가 비이성적이라고 한다면 분명 이에는 대응안이 있어야 할 테고 그러한 방향 중 가장 쉬운 접근은 제도적 규제일 것이다.
더 나아가 헨리 조지처럼 ‘경제 발전으로 가난이 더 심해졌다’는 관점이거나 머레이 N. 라스바드처럼 ‘국가는 사유 재산의 약탈을 위해 합법적이고 질서정연하며 체계적인 통로를 제공한다’는 시각이라면 또 나오미 클라인처럼 ‘국가 산업 민영화로 소수가 막대한 부를 얻었지만 그 과정에서 근로자들은 밀려났다’는 관점이라면 더더군다나 제도적 규제는 절실할 것이다.
이렇다면 토마 피케티처럼 불평등과 격차 해소를 위해 ‘자본세를 징수’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거나 스테파니 켈튼처럼 ‘통화 주권국에서 복지지출 때문에 위기가 초래될 일은 없다’는 주의더라도 문제는 없어 보인다.
반면에 개인 역량과 개인의 역할을 중시하는 경제학자 중 토마스 소웰이라는 미국 흑인 보수주의자 경제학자는 ‘빈곤의 원인으로 가정해체보다 정부의 지출 부족을 먼저 꼽는 건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으며 아인 랜드라는 유대인이자 러시아계 미국 경제학자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무언가를 얻으려면 다른 것을 희생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아무도 미국을 산업국가로 만들기 위해 굶주림을 감내할 필요가 없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아인 랜드는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이민 내지는 망명한 여성으로서 자신의 감상만으로 편향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 기회비용을 감당하지 않는 개인은 없으며 미국의 산업화 시기 남쪽에서는 흑인 노예들이 면화를 따고 있었다는 걸 그녀도 모르지 않을 텐데 그걸 배제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 선진국인 미국에서의 현격한 불평등과 계층 격차를 그녀는 모른 척하고 있다.
토마스 소웰도 출생지가 미국이라면 미국의 흑인들을 우대하는 대학 입학 제도의 혜택을 받았을 것이다. 그의 시대에 만약 그런 혜택이 없었다고 한다 해서 빈곤층에 태어나 보살핌의 결여와 마약과 폭력지대 등의 환경적인 배경을 초월해서 모든 흑인들이 개인 역량만으로 가난이라는 제도적 난제를 뛰어넘지 못하는 걸 문제 삼지 말아야 할까? 더 나아가 인종과 계층의 문제가 과연 제도적인 차원의 문제는 전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환경을 이겨내는 것이 인간이니 이겨내라는 관점은 너무도 편협할 뿐이 아닌가 싶다.
현재의 경제 여건과 취업 요건은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 청년층이 취업하기도 어려워졌으며 그들의 임금만으로 계층의 격차를 뛰어넘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시절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일본의 청년층은 사토리 세대라고 하여 취업도 소비도 모두 초탈해 버린 득도한 세대가 되었고, 중국은 탕핑족이라고 하여 젊은 세대들이 취업 등 경제활동 전반에서 파업을 선고한 세대로 불리고 있다. 한국에서는 그보다 더해 청년층들이 현재도 팍팍하고 미래도 막막한 이 현실을 견디다 못해 너나 할 것 없이 자살하는 추세다. 한국 인구 10만 명 당 청년층 자살율만 26명으로 OECD 국가들 대부분이 인구 10만 명 당 11명인 것에 비교하자면 두 배 이상에 이르고 있다. 현실을 이겨내는 것을 개인의 힘만으로 해내라는 건 어쩌면 간접적인 아니 완곡히 표현해도 자살을 부추기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이번 독서는 그렇게 경제학이나 제도에 대한 관점과 태도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시대의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즉 ESG가 탄생하는 동인이었을지도 모를 견해도 알 수 있었다. E.F. 슈마허의 ‘우리는 직접 생산한 것이 아니면 공짜로 생각한다’는 시각과 그러므로 ‘영속성을 추구하는 사회 및 경제가 지구의 자원과 인간의 욕구를 충분히 인식한 상태로 진화하기에 훨씬 더 유연하고 오래 지속된다’는 관점이 ESG의 기본 견해가 되지 않았나 싶을 정도이다. 여기에 ‘자본주의의 본질적 의미는 기존 구조와 기업을 창조하고 파괴하는 과정에 있다’는 슘페터의 주장이 구현되는 과정이 ESG의 발전 과정일 것이다. 하지만 ESG가 결과적으로 소수가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과정이나 도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제도적인 규제랄지 견제랄지가 갖춰져야 하리라는 생각도 든다.
[세계 경제학 필독서 50]은 경제학이라는 학문이 사회에 어떠한 각도에서 필요하고 절실한지 그리고 이용하는 이에 따라 얼마나 악용될 수도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자신이 읽고자 하는 틀을 가지고 이 책을 읽는다면 그때마다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