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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대예측 - 모두를 위해 일하는 세계 경제 시스템
클라우스 슈밥.피터 반햄 지음, 김미정 옮김 / 메가스터디북스 / 2022년 4월
평점 :
원제가 [Stakeholder Capitalism]이듯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에 관한 책으로 정확하게는 그 필요성과 전망이랄까 향후의 가능성이 어떠한가를 말해주고 있다. 책 전반에서 다각도로 여러 차례 현재까지의 자본주의 발전의 역사를 서술한다. 다만 그 관점이 자본주의가 발전하며 불평등이 해소되는 것 같았으나 어느 순간 부는 다시 정점에 축적되었고 불평등은 격화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어떤 부분에서는 피케티적인 시각이지만 피케티가 그의 저서 [자본주의와 이데올로기]에서 말했던, 사회가 ‘3원 사회’에서 ‘노예제사회’를 거쳐 ‘식민사회’를 지나 ‘소유자사회’에 이르렀다는 지적에서 클라우스 슈밥은 더 나아가, 앞으로의 사회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사회’로 도약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고 여겨지기도 했다.
이 책에서는 거듭 자본주의의 발전상을 담고 있지만 자본가의 자원 확보와 자원 창출(파괴적 혁신)이 개인의 부와 국가의 부에 주역을 담당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중산층을 확장하며 사회적으로 긍정적 영향을 주어 왔으나 다시 불평등은 심화되어 부는 정점으로만 향하고 있다는 지적을 한다. 무엇보다 본서가 설득력 있었던 것은 GDP의 향상이 웰빙 즉 삶의 질과는 상관없더라는 주장 때문이 아니다.
쿠즈네츠의 저주라는 GDP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쿠즈네츠의 예견과는 다르게 지속 가능한 발전에는 한계가 있었으며 초기의 불평등은 발전 이후 완만하게 보완된다는 쿠즈네츠의 예견과도 다르게 불평등과 부의 편중은 더욱 급속하다는 지적도 있다. 카발의 사제집단인 다보스 포럼의 수장답게 불평등에 대한 쿠즈네츠의 관점의 영향으로 환경에까지 낙관적이던 것과 다르게 쿠즈네츠의 저주는 환경에까지 이르렀다는 전개도 인상적이다. 지속 가능한 발전의 붕괴, 불평등, 더해져 가는 기후위기. 이 3가지의 문제를 저자는 쿠즈네츠의 3가지 저주라고 말하고 있다.
이 논리가 이어지며 다각도에서 자본주의의 역사를 조망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본주의의 역사는 문제를 내포하며 문제를 양산한 발전사가 되었고 그에 대한 시대적 해답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라는 것이 본서의 핵심이 아닌가 싶다. 흔히 ESG로 일컬어지는 이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체계화되어 있으며 어떻게 작용하는 것인지에 대한 상세한 대답으로는 다소 부족하고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에 이르게 된 당위성과 그 필요성을 이해하기에는 적절한 책이 아닌가 싶다.
실무에서 ESG가 어떻게 적용되고 그 적용이 필요한 이유를 알기 위해서 선택할 책은 아니고 인문학적 접근을 하는 책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부터 소소한 사견인데 현재의 역사가 미국 또는 민주주의 단극 체제에서 힘의 균형이 분산되는 다극 체제로 전환하는 과도기라 지적하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신세계질서]라는 책의 논리를 이 저작과 연계해 보자면 과거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거쳐 이제는 주주자본주의나 국가자본주의로 인류사적으로 실험을 마친 세계 경영 엘리트층이 이제는 그 과도기를 지나 자본주의의 새로운 체제를 열려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세계적 패권이 다극화되며 사회적 역할, 환경, 지배구조의 다양한 지점에서 참여하여 완성한다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까지 나타나고 있는 것은 무언가 민주적인 경영환경이 자리잡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사회주의적이기도 할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민주주의던 사회주의던 대중에게 유익을 준다면 무슨 문제인가 싶기도 하겠지만 민주적으로 보이는 무언가가 전체주의적인 세계상을 만들어 개인을 옭죄게 될 때의 폐해를 생각한다면 문제는 다를 수 있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경영의 체제로서는 사뭇 이상적이고 아름다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그것이 이 책에서 그리듯 모든 것이 미화된 마스터피스라기 보다는 그저 원피스로 보인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미 인간이 필요 없는 시대를 향하고 있는 시절에 등장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과연 인류를 위해서일까?
입국자 제한, 사회적 모임 제한 등의 방역 조치 행정명령을 겪어본 시대에 이때 등장한 15분 도시제 등은 수긍할 법하면서도 다분히 전체주의 사회상이 아닌가 싶다. 게다가 위기 상황의 방역을 위해 각국이 WHO에 방역 권한을 넘긴다는 논의나 탄소 발자국 추적 등의 논의는 개인의 자유가 사라져가는 통제사회 시대로 진입하고 있음을 일깨운다. 개인의 자유가 사라지고 각국이 [1984]에나 등장하던 진실부를 설치하고 행동경제학자들을 동원한 부서를 설치하는 시대, 각국의 경찰국가화, 전체주의사회화가 가속되는 이 시대에 등장하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라면 그것이 과연 사회주의와 전체주의적인 시대로의 진입을 이야기하는 또 다른 논의가 아닌지 의심해볼 필요가 다소 있지 않나 하는 의심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과거 [THRIVE]라는 딥스테이트의 사회 장악을 고발하는 다큐멘터리에서 한 여성 출연자는 인터뷰에서 이런 발언을 했다. 거대한 나무의 무성한 잎사귀를 다 갉아 먹은 벌레가 나비로 변모하는 진화를 이루는 것과 이 시대가 다르지 않다고 말이다. 그녀의 발언은 착취당하고 가능성을 차단(인류적 차원의 발전을 이룰 아이디어들이 어떻게 수탈당하고 차단되었는지도 그 다큐는 고발하고 있었다)당한 대다수 인류는 거대한 나무의 잎사귀이고 그 희생의 결과로 딥스테이트는 새시대를 열 에너지를 충전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고 본다. 그런데 그러한 새시대를 대다수 인류가 향유할 수 있을까?
인류는 어쩌면 착취만 당한 것이 아니라 한 세기에 이르는 거대한 실험에 실험체가 되었었다고 생각된다. 그렇다고 실험체가 된 데 대한 보상이나 그 실험으로 인한 보람은 대다수 인류와는 관련 없는 것일 거다. 다음 실험은 인간의 의식을 장악하고 인간을 생산해내는 시대로의 이행일 테니, 인간의 존엄성이나 천부인권 같은 건 논할 수 없는 시대로 진입하게 되는 것일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