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재난과의 전쟁 - 미래산업을 바꿀 친환경기술 100
박영숙 지음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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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후재난설, 기후위기설을 믿지 않는다. 기후재난은 기후위기설을 더 민감히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 설정된 단어이고 기후위기는 지구온난화라는 설이 대중에게 위기의식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것 같으니 위기감을 고조하기 위해 가져다 붙인 이름이다. 그리고 지구온난화는 1972년 로마클럽의 경제학자와 기업인들이 환경오염과 자원고갈 등이 경제성장에 미치는 문제를 분석한 보고서인 [성장의 한계]에서부터 지적되던 사안을 통해 주목한달까 조성한달까 조작되기 시작한 개념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기후재난, 기후위기, 지구온난화는 환경오염과 자원고갈은 경제성장을 막으니 이부터 해결해야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하다는 경제학자와 기업인들의 프로파간다를 대중에게 각인시키기 위한 효율적인 선전문구로 기획된 것이다.

 

이미 이 사안은 그러니까 기후재난, 기후위기 등에 대한 개념은 사회에 일반화되어 해외에서는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까지 매도되고 있는 상황이다. 기후위기라는 프로파간다가 얼마나 큰 영향력과 중독성이 깊은지는 유럽의 일부 급진 환경단체들의 과도한 시위와 난동 등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들의 행동에 공감하지 않는 대중들까지도 그들의 주장에는 동조할 정도로 기후위기설은 유효하게 대중의 심리를 장악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말하듯 99%나 되는 과학자들이 다 기후위기설을 신봉하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진짜 현실이다. 유럽에서는 지난 100년간 3~5도의 기온이 상승했다는 기후위기설 과학자들의 주장에 반박하며 오히려 지난 100년간 -1.6도 지구온도가 하락했다는 주장을 펴는 과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주류언론에 등장하자마자 기사가 차단당하고 있기도 한 실정이다. 기후위기설을 정치 문화적으로 악용하기 위해 코로나19 시기에 백신에 부정적인 정보들을 차단했듯이 기후위기설에 반대되는 정보는 차단당하는 실정이다. 미국에는 이미 1984라는 소설에서나 등장하던 진실부라는 정부 부처까지 등장한 게 대중이 처한 현실이다. 정부가 진실이라고 제시하는 것 외의 정보는 접근이 원천 차단당하고 있다는 말이다. 아직까지는 그래도 그 강제와 강압이 치밀하지는 못해 정부가 차단하는 정보를 입수할 경로 전체가 막힌 것은 아니지만 조만간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일수록 정부가 접근을 막는 정보와 접촉할 수단을 잃게 될 것이다. 과거에는 장탁천문이라고 했지만 이제는 하늘을 보려는 대중의 눈을 정부가 찔러버리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기후위기설을 통한 대중 통제의 사례는 관련 정보들을 이전 리뷰와 포스팅을 통해 충분히 전했다. 기후위기설을 통해 기득권층이 얻는 것은 비단 대중 통제만이 아니라는 것을 본서를 읽는 분들은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본서에서는 기후위기를 막기 위한 과학계와 기업들의 노력은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 개념처럼 새로운 혁신을 불러올 거라 전망하고 있다. 그에 대해 긍정적인 면만을 보고 하는 저작이 본서라고 할 수 있겠다. 기존의 지속되어오던 기간체제 전반이 무화되고 새로운 기간체계를 구축한다는 것은 설비와 생산과 소비에 있어 새로운 비용과 소비를 설계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한 마디로 새로운 부의 부흥을 불러오는 과정이 될 거라는 말이다.

 

저자는 IPCC의 보고들을 의심의 여지없는 사실로만 제시하고 있으나 기후위기설에 반대하는 과학자들의 저작들은 IPCC의 연구와 보고가 어떠한 교정과 조작을 거치는지 대중에게 알려준다. 기후위기가 진실이라고 주장하기 위한 수정과 교정을 거친 정보들을 마주한 과학자들 일부는 각국 정부 소속으로 일하다가 그를 떠나기도 하고 종말론적 환경주의에 반대하는 열렬한 반대자들이 되고 있다. 그들은 기후위기라는 것이 새로운 체제를 수립하기 위한 거대한 혁신의 순간(그레이트 리셋)을 위해 마련된 웅장하고 치밀한 하나의 사기극이란 것을 대중에게 토로하고 있다.

 

환경주의가 낳은 신기술들과 산업들을 보자 해도 이것이 기업이 대중을 위해 기여하는 새로운 시대의 기류인 것처럼 대중이 인식하도록 하고 있으나 초극부층들에게는 거대한 부의 부흥을 불러올 창대한 투자의 대상일 뿐인 것이다. 어쩌면 부만이 아니라 자신들이 누릴 시대를 위한 투자인 것일 수도 있고 말이다. 사회를 위해 환경을 위해 인간을 위해 기존의 것들을 철폐하고 새로운 시대를 마련하고 있다는데 환경주의자들이 말하는 그 새로운 시대를 위한 기술들에 쓰일 자원들을 얻는다는 목적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콩고의 코발트 채취장에서는 민중이 19세기 유럽 공장에서처럼 매를 맞으며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있고 아동노동에 놓인 아이들이 여기서 일하기 싫어요. 너무 아파요.” 라고 호소하며 맨발로 중금속을 밟으며 중독되어 가며 코발트 푸대를 이어 나르고 있다. 인간과 지구를 위한다며 개발되는 신기술들에 필요한 자원을 채취하는 현장들 어디서도 현대식 장비와 노동자들의 안전이나 중독을 방지하기 위한 설비나 장비를 찾아볼 수 없다.

 

과연 지구를 위한다는 게 인간을 착취하고 중독시키고 폐인을 만들고 과로에 시달리다 죽어가게 만들 가치가 될 수 있는가도 묻고 싶다. 지구를 위하는 길이 인간을 위한 길이라면 아무리 창조적 파괴라 하더라도 완만히 가야 한다고 생각된다. 대중이 대비할 수도 수용하기도 벅찬 변화를 그레이트 리셋이란 의도 아래 하루아침에 가져오려는 것은 일부 계층의 사람들에게는 유익할지 몰라도 대중을 위한 것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환경주의와 기후위기라는 프로파간다를 통해 그들이 가져오려는 것이 대중을 위한 것인지 일부 계층의 부를 위한 것인지 낱낱의 사람들이 바로 보고 정보를 서로 공유할 필요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문제의 인식과 문제 해결을 위한 과정과 그 결과 중 무엇 하나가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는 게 진짜 문제인지를 인지하는 과정을 가볍게 여기면 안 될 것이다. 주류 매체가 말하는 게 진짜 사실인 것인지 거듭 확인할 필요가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진실부가 제시하는 것만이 사실이라면 다행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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