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원전으로 읽는 움라우트 세계문학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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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딩 1, 2 때 이 책을 처음 읽었다. 물론 다른 역자의 책이었지만. 지금까지 본서의 역자가 이야기하는 그런 번역상의 오류들이 있다는 것은 인식도 못했다. [이방인]은 내겐 그저 짧은 잔상 같은 이미지 몇 개로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죽음. 장례. 태양. 그날 이후 언젠가의 총격 살인. 오해 받는 재판정. 사형 판결 ... 이 몇가지 이미지가 내겐 [이방인]에 대한 인상의 전부였다. 딱히 그에 따른 감상이랄 것도 없었다. 단지 막연히 부조리한 판결이고 한 인간에 대한 깊이 없는 판단이었다는 해석이 당시의 내 감상의 전부였을 뿐이다. 막연히 뫼르소의 정서가 메말라 있었다고 느끼던 것과는 이번 독서로 다른 감상을 갖게 되었다.

 

청소년기의 감상과는 다르게 자칭 청년인 중년이 된 지금의 독서로는 뫼르소는 메마른 인간이었다 거나 뭔가 정서적으로 불안정했었기에 태양 때문에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과는 다른 감상이 일었다. 

 

[이방인]을 통해 사형을 판결 받은 것은 뫼르소만이 아니고 나 자신까지 였다. 세상의 많은 '나'가 이 소설을 읽으며 사형을 판결 받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방인은 결코 뫼르소만이 아니라 이 시대에 많은 '나'들일 것이다.

 

우리는 항상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과장된 생각을 품게 된다.

나는 반대로 모든 것이 단순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우리가 사형받는 이유는 '나'가 결국 타자에게 있어 미지의 대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는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 이방인이었다. 병자를 치료하며 사랑을 말하고 겉옷을 원하면 속옷까지 벗어주라며 동행하라던 그가, 칼을 주러왔다 불을 던지러 왔다고 말하며 폭력을 행사하기도 마다하지 않던 바로 그였다. 그는 대중에게 단정지을 수 없는, 정형화할 수 없는 대상이었을 것이다. 천국을 말하다가 종말의 시기를 말하면서 너희 세대 안에 그날이 닥칠 거라던 것도 그다. 어느 모로 보나 그 시대 사람들과 지도층들이 불안해 하기에는 충분했다. 가난하고 소외 받는 사람들과 어울리던 그였지만 정작 대중들마저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너희는 바라바와 예수 중 누구를 살리겠느냐는 빌라도의 물음에 대중은 망설이지 않고 도둑인 바라바를 선택했다. 예수의 모든 말과 행동은 그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에는 혼란스럽고 불안정한 것들이었다. 그는 미지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중은 나름 신중한 판단을 했을 것이다. 저자는 우리에게 있어 이방인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런 이방인들이 우리 시대에는 무수히 흩어져 있지 않나 싶다. 대중은 또 손쉽게 사형을 판결할 것이다.

 

어떻게 나는 사형 집행보다 더 중요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요컨대 그것만이 한 인간이 정말로 관심을 가져야 할 유일한 것이었다는 걸

깨닫지 못했던 걸까!

 

어쩌면 우리는 사형 판결을 받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보다 늦게 그런 판결을 받는 사람들을 뫼르소가 느꼈듯, 특권을 지닌 것으로 느끼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런 이들은 심각한 고문 휴유증에 시달릴 것이다.

 

"... ... 그런데 우리의 명령은 '너희들은 이러이러하다.'이네.

우리가 이곳에 끌고 온 사람 가운데 우리에게 끝까지 맞선 자는 아무도 없었네.

모두 깨끗이 치료되었네. ... ...

난 그들이 점점 약해져서 흐느끼며 바닥을 기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았네.

그것은 고통이나 공포로 인해 흘린 게 아니라 진정으로 참회하며 흘린 눈물이었네.

심문이 끝났을 때 그들은 단지 인간의 껍데기에 지나지 않았지"

 

[1984] 중 오브라이언이 윈스턴을 고문하며 한 이 말처럼 대중의 대다수는 끝내 깊은 고문 속에서 인간의 껍데기가 되어 살아남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남지 못하는 이들은 결국에 사형 판결을 일찍이 받을 수밖에는 없다. 사형 판결을 받는 이들 역시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예수도 뫼르소도 진정 그들을 이해한 이들로 부터 사형을 당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사형을 판결하고 교화시키려는 어느 누구도 그들을 오해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무엇보다 판결을 하고 교화를 하려는 어느 누구도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이 소송의 모습이 이렇습니다. 

전부 사실이면서 사실인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뫼르소의 변호인에 변론 중에서

 

사람들은 사실을 본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의 눈에 담기는 것은 오해 이상인 것이 없다. 2+2가 5가 되는 현실에 익숙해져 버린 이들에게는 2+2는 5뿐만이 아니라 1도 2도 3도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더이상 사실을 판별할 의지를 잃어간다. 그러니 자연히 자유는 구속도 억압도 되고마는 것이다. 서로가 이렇다는 것을 분별하고나면 누구나가 서로에게 이방인이 되고 서로에게 사형을 판결하고야 말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악순환은 영원히 지속될수도 있다. [1984]에서 오브라이언이 윈스턴에게 했던 말처럼 말이다. 개인에게서도 사회에게서도 영원히...

 

"여기에서 자네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든지 간에 앞으로 영원히 계속될 걸세"

 

나는 재판정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싶지도 않고 어느 사제에게 교화의 대상이 되고 싶지도 않다. 그렇다고 오해 아닌 이해를 받고자 애원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당당히 이방인이 될 것이다. 그런채 떠날 것이다. 세상에 머물더라도 세상을 떠나있고 싶다. 그러게 이방인임을 떳떳히 밝힐 것이다. 

 

뫼르소에게서 '나'를 찾은이들은 결국엔 자신이 이방인이었음을 언제나 자각하던 이들일 거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깨닫게 된 이일지도 모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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