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84 ㅣ 더클래식 세계문학 컬렉션 (한글판) 19
조지 오웰 지음, 정영수 옮김 / 더클래식 / 2020년 5월
평점 :
전쟁은 평화
자유는 구속
무지는 힘
디스토피아... 이 소설은 반 유토피아를 그리고 있는 앞서간 시대의 창조적 소설이다. 소설이 출간된 시대가 1949년이기에 조지 오웰이 바라본 미래 1984년은 우리에게는 이미 과거이다. 하지만 그가 전망한 시대가 과연 소설가의 공상에서 그치지만은 않다는 걸 느낄 수도 있는 소설이다.
조지 오웰은 몇 차례의 전쟁들을 거치며 전체주의에 대한 반감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생몰연대(1903.6.25.~ 1950.1.21)를 보면 그가 어떤 전쟁들을 거쳤을지 짐작 가능하다. 그가 목도한 시대를 이 시대에는 소설이나 영화로 즐기는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지 몰라도 조지 오웰 자신에게는 겪어내지 않고는 지나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굴레였을 것이다.
그러한 시대를 겪으면서 조지 오웰은 개인의 자유와 사상의 힘에 주목하게 되었다고 한다. 전체주의는 인간에게 부여된 천성을 제한하고 국가나 공동체의 부속물로 인간을 폄훼하는 제도로 인식했던 듯하다.
이 글 맨 위의 슬로건은 그가 그리고 있는 1984 속 오세아니아라는 국가의 대중적 구호로서 모든 것이 전도되어 있고 대중을 심리통제의 대상으로 여기는 소설 속 정부와 지배층의 속살을 도입부부터 엿보게 하는 매개이다. 이런 얼토당토 않은 구호로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통제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소설 종반에 이르러서는 이것은 가능하고 남는 체제이구나 하는 갑갑함이 일고 만다.
1984의 시대는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동아시아 3개의 대륙 국가로 나뉘어 전쟁이 끊이지 않는 시대이다. 주인공 윈스턴은 오세아니아에 속한 정부 공무원으로 출판되거나 보도되는 모든 문장들을 검열하는 부서에서 일하고 있다. 그 시대에는 신어라고 해서 신조어들을 계속 만들어내고 기존의 어휘들을 대대적으로 폐기하고 있는 때이기도 하다. 윈스턴은 신조어들도 다수 만들어내 그 시대의 창의성과 자기주도성을 완전히 억압받는 기조에서 나름의 자유를 영유하고 있는 지식인이기도 하다.
소설 중후반에서 그의 동료가 구속된 상황에서도 자신의 딸이 잠든 자신이 반국가적 잠꼬대를 한 것을 고발해서 구속되었다며 자신의 딸을 자랑스러워 할 정도로 개개인들의 깊은 세뇌가 일상이기도 한 시대이다. 조지 오웰은 이렇게 전쟁과 구속과 세뇌와 함께 언제 폭격받을지 모르는 황폐한 시절을 그리고 있다.
그 상황에 윈스턴은 지식인다운 것인지 국가에 반하는 의식을 지닌 채 살아가다가 형제단이라는 혁명단체에 끌리기 시작한다. 그와 함께 결혼과 출산까지 강제하는 국가에서 원치도 않던 결혼을 하여 형식적인 결혼 생활을 했던 그는 아내와 사별 후인지 이혼 후인지 명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혼자가 되어있다. 그는 줄리아라는 아름다운 여성을 보고 강간을 하고 죽일 마음을 먹었는데 어찌 줄리아는 그에게 반해 그와 내연의 사이가 된다. 국가는 결혼과 출산 뿐만이 아니라 섹스와 사랑까지도 통제하고 있기에 그들의 관계는 다만 몰래 하는 간통으로 간주되고 비밀리에 이어진다.
반국가 단체 형제단에 매료되어 있던 윈스턴은 정부요인 오브라이언을 권력에서 밀려나 형제단에 가입한 사람으로 착각하고 그에게 접근하지만 그와의 대화를 받아주던 오브라이언은 알고 보니 언제나 정부의 핵심인물이었을 뿐이다.
몰래 일탈이되던 줄리아와의 만남 중 윈스턴과 줄리아는 결국 구속되어 끌려간다. 여기까지가 시대 상황과 윈스턴의 내면을 탁월하게도 묘사한 장면들이다. 이후 구속되어 심문 받는 윈스턴과 취조한달까 사상교육이라는 세뇌를 한달까 하는 오브라이언과의 장면들이 이 소설의 백미이자 진미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들이 할 수 없는 게 하나 있어요.
그들은 당신이 무엇이든 말하게 할 수 있어요. 뭐든지요.
하지만 믿게 할 수는 없어요. 당신의 마음속에까지 들어갈 수는 없으니까요"
윈스턴과 줄리아의 밀회 장면에서 혹시라도 당에 발각되면 어떡하나 두려워 하는 윈스턴에게 줄리아가 하는 말이다. 그녀의 말이 일리가 있어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소설의 대미에서 윈스턴의 말로末路는 너무도 설득력있으면서도 치밀하고 완숙한 소설가 조지 오웰의 이 소설에 깊은 침묵이 일게 할 정도다. 결국 오브라이언의 말대로 그는 '치료'된 것이다. '온전한 정신을 지닌 사람'으로 말이다. 끝내 '인간의 껍데기'가 되고 만 것이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출간 1932년)와 조지 오웰의 '1984'는 자주 비교되며 지금의 시대는 1984와 유사하다 또는 멋진 신세계와 더 가깝다는 평들을 흔히 들을 수 있다. 내가 보기에 그 둘 사이를 오가는 것이 현시대가 아닌가 한다.
빅브라더와 텔레스크린이 겉으로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하기에는 세계 도처가 감시역량이 완연하고 우리의 손이나 호주머니에서는 언제든 우리의 개인정보가 노출될 수 있는 아이폰이나 스마트폰이 우리를 옭죄고 있다. 간단한 해킹만으로도 우리의 일상은 발가벗겨질 수 있는 시대다. 더더군다나 아직은 미미한 저항이 있다고는 하지만 AI나 빅데이터를 통한 맞춤광고가 일반화된다면 우리의 기호마저도 노출될 수도 유도될 수도 있는 시대이다.
태어나면서 부터 세뇌되어 아무런 저항없이 정형화되어 살아가는 '멋진 신세계'적인 세계상도 우리 사회에서 일상적이고, 감시되고 제어되며 강제 세뇌 당하는 '1984'적인 세계상도 우리의 일상 중 하나이다.
현시대의 교육제도는 각 가정의 개성있는 양육 환경을 단일한 교육으로 무력화 한 후 보편적인 사고를 하는 인간 군상들을 대량 양산해내고 있으니 '멋진 신세계'적이랄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정치성향이나 사회생활에서의 정보들을 각기의 색깔을 지닌 해석으로 정제된 언론 매체를 통해 전달 받기에 '1984'적이랄 수 있다. '1984'적인데 자신이 흔쾌히 맞추어 따라가기에 '멋진 신세계'적이랄까.
"니 편 내 편으로 분열적인 사회상이 그렇게 전체주의적인 것은 아니잖아!" 라고 보는 이에게는 해줄 말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세계는 단지 백신 의무화 하나만으로도 이 세계가 얼마나 전체주의적인지를 말해 주고 있다.
인간을 부속물로 보는 것이 아니라면 접종 이후 반드시 몇 %는 부작용을 앓고 몇 %는 반드시 죽는 백신을 강제 접종하겠다는 판단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도 국민의 80% 이상이 접종하고도 거듭 확진자들이 나오고 사망자들이 즐비한 상황에서 효용이 의심스러운 그것을 강제접종하겠다는 것은 일부가 죽거나 불구가 되더라도 공동체를 위해서라면 그 정도 희생은 감수해야 한다는 전체주의적인 사고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것이다.
전체주의는 나치즘이나 파시즘, 공산주의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 시대 상황이 말해주고 있다. 너희는 전체주의 세상에서 달콤하게 세뇌되어 쌉쌀하게 통제받으며 살아가다가 불맛을 보며 죽어갈 것이라고 말이다.
이번 20대 대선의 결과는 윤석열 당선인의 당선으로 완만하게 결정났지만 그 과정에서 민주당의 부정선거 증거들이 속속 등장했다. 그래서 500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의를 제기하고 소송을 걸고 유투브를 올리고 sns에 기록을 남기고 리트윗을 했다. 결과는 400명하고도 몇 십명의 사람들이 기소된 것이다. 기소 이후의 뉴스는 보지 못했으나 기소가 취하된다고 하더라도 증거들 마저 있는 사안들에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려 드는 현상황은 1984가 그리고 있는 시대 상황 보다 나은 것인가 싶기도 하다. 박근혜 대통령 때 이미 당시 여당의 부정선거가 논란이 되었었다. 정권이 교체 되고는 총선을 부정선거로 물들였고 대선에서도 시도 하다가 탄로나자 국민을 난동자와 범죄자로 둔갑시키고 있다. 여야가 모두 돌아가며 부정선거 전적이 있기에 부정선거 사범은 사형인 한국법의 준엄함 앞에서 결코 여야 정치인 중 그 누구도 부정선거를 문제 삼지 않고 있는 것이 현상황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대중은 모두가 그러려니 하고 있다. 설마 설마 하고 있다. 부정선거로 우리의 권리가 침해 당하고 있고 이번에도 침해 당할 뻔 했다. 그런데도 설마 설마 한다. 전세계가 백신 의무화를 강제하기 시작하고 있고 한국도 그러자는 후보가 단일화를 하더니 인수위에 앉아 있는데 이 역시 그러려니 설마 설마다. 모든 것이 온전히 세뇌 받아온 현실이었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그래 아직은 백신 의무화나 미접종자에 대한 규제가 드러나지 않으니 그럴 수 있다고 본다. 헌데 백신 의무화 이후에도 대중이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면 이 나라 대중들에게는 답이 없는게 아닌가 한다. 아직은 깨어날 수 있을 여유가 있을 때다. 이 시기에 깨어나지 못한다면 다음이 있으리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을까?
나는 달콤하고 쌉쌀한 게 싫다. 그리고 끝까지 불맛을 보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