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태양이 따사로운 날이었다. 와합 마을과 지단 마을의 경계 근처에 있는 이젠 폐가가 된 건물 앞에서 떠오른 태양 아래 지브릴과 자밀라가 있었다. 지브릴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늘만 같은 날이면 되지 않을까 바랬다. 하지만 자밀라는 의견이 달랐다. 그녀는 굳이 와합 마을을 떠나 멀고 먼 사우디아라비아까지 도망가자며 지브릴을 설득하고 있었다. 아니 날 좋은 오늘뿐만이 아니라 흐린 날도 비오는 날도 이곳에서는 드물게 번개가 치는 날까지도 그런 설득을 멈추지 않았다. 지브릴은 처음엔 망설였지만 자밀라가 이렇게 말하던 날 그만 설득 당하고 말았다.
-지브릴 너 지참금은 있는 거야?
-조금만 더 모으면 아브라힘 어르신께서 말씀하시는 적정선이 되지 않을까 싶어.
-우리 아빠 욕심을 니가 충족 시킬 수 있을 것 같아? 그분이 말하는 적정선이라는 건 니가 벌어올 수 없는 정도의 지참금을 말하는 거야. 넌 나 없이도 잘 살아가겠지? 그러니까 이러는 거지?
그녀의 말에 지브릴은 설득 당할 수밖에 없었다. 태어나 처음 바라본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지브릴에겐 그녀였다. 이젠 자밀라 없는 내일을 생각할 수도 없을 것만 같았다. 게다가 이미 두 사람은 손까지 잡지 않았던가? 마을 사람들에게 들킨다면 이미 입맞춤까지 한 것으로 오해받고 자밀라는 그녀 아버지의 손이나 친척들의 손에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지브릴은 자밀라와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와 함께 새로운 시작을 위해 사우디로 떠나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지브릴은 그녀의 말이 아니었어도 매일을 그렇게 자신을 설득하고 있었다.
-지브릴 우리에겐 새로운 날이 기다리고 있어. 너와 내가 함께라면 우리는 곧 새로운 날을 맞이할 거야.
지브릴은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지 하면서도 자꾸만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새로운 날이 꼭 필요할까? 오늘 같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닐까?
이런 생각은 늘 망설임을 불러들였고 그 망설임은 두려움이 원인인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지브릴로서는 두려움의 근거가 무언지 짐작되지 않았다.
-여기서 지금 뭐하고 있는 거예요.
마을 일이면 큰일이던 작은 일이던 빠지지 않고 알리고 다니는 하싼이란 소년이 그들을 향해 달려오면서 다급히 소리쳤다.
-아! 지단 마을 놈들이 무슨 꿍꿍인지 흔적도 안 보이기에 무슨 일인가 알아보려고 나왔어.
-지금이야 당연히 여기에 사람들이 보이지 않겠죠. 모두 와합과 지단의 경계로에 다들 모여있으니까요.
-왜? 무슨 일인데..?
-그게.. 말로 듣는 것보단 얼른 가보는 게 빨라요.
자밀라는 히잡을 다시 매무새를 고쳐 쓰고는 하싼과 지브릴을 조금 거리를 두고 뒤따랐다.
2
와합과 지단의 경계로에 다다르자 압둘라 씨의 딸 라니아와 지단 마을 카림이 두손을 뒤로 묶이고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와합 마을 사람들과 지단 마을 사람들이 각각 모여 그들에게 조금 떨어져 둘러싸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죠?
지브릴이 압둘라 씨에게 물었다. 압둘라 씨는 설명하기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다가 돌아섰고 라니아의 오빠 무자히드가 나섰다.
-라니아와 카림이 두 마을의 경계에서 손을 잡고 있다가 내 눈에 띄었네. 나는 라니아를 죽이고 그만 그것으로 끝내려고 했는데 마침 슬레이만 씨와 마주쳐서 그분이 시아파 남자와 통정한 것은 그저 여자 한 명만 죽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하셔서 일이 좀 커지게 됐어.
무자히드는 그다지 신심이 유별나게 깊다거나 한 인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가문의 명예가 달린 상황에 여동생의 목숨 따위는 안중에 없었던 모양이었다.
-우리가 뭘 그렇게 잘 못했나요. 그냥 잠시 손만 스쳤을 뿐인데요.
-더러운 변명 필요 없다. 너는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고 게다가 시아파 난봉꾼과 사통한 요사스러운 년일뿐이야.
라니아의 아버지 압둘라 씨가 단호한 어조로 모든 마을 사람들이 들으라는 듯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아버지 지금은 21세기에요. 어느 도시에선 여자들도 운전을 하고 있고 몇 해전 사우디에선 여성에게 투표권도 줬다고요. 아버지도 그러셨잖아요. '세상이 변하고 있나 보다'라고.
-아무리 세상이 변한다 해도 변하지 않는 원칙이란 게 있는 거야. 무슬림은 꾸란과 하디스에 의존해 살아가는 거야. 너는 지저분한 행동으로 너희 가문과 율법을 더럽히고자 했다. 게다가 배도자의 자손인 시아파 무리의 하나와 말이다. 그러니 오늘의 죽음을 달게 받거라.
율법학자 슬레이만 씨가 근엄한 어조로 선고를 하듯 선언했다.
-이게 뭐예요. 우린 그냥 사랑하는 사이일 뿐이라고요. 사랑이 죄가 되나요. 그게 그렇게 죽을 죄예... 악!
사랑을 입에 담으며 변명을 하는 라니아의 얼굴에 사정없이 돌을 던진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의 아버지 압둘라 씨였다. 조금만 더 입을 놀리게 두었다가는 자신의 가문에 평생 수치스러울 치욕의 날로 기억되리라 여긴 압둘라 씨는 망설이지 않고 딸의 얼굴에 돌을 집어던졌다.
-종교가 무슬림을 살게 한다면 오늘의 우리를 죽이는 것은 종교가 아니고 뭐란 말입니까? 변하지 않는 원칙이 있다지만 세상은 다 변하고 있어요. 변하지 않는 건 인간들의 잔인함과 야만성뿐일 겁니다. 자신의 딸을 죽이게 만드는 종교. 사랑에 죽음으로 답하는 종교가 도대체 무슨 의미라는 말입니까?
라니아와 손을 잡았다가 들킨 죄로 함께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카림이 유언처럼 남기는 이 말에 치를 떠는 것은 비단 와합 마을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그의 고향 지단 마을 사람들은 평소 사람 좋은 카림이라 여기고 있던 그가 이따위 불경스러운 말을 내뱉자 미친 듯이 격분해 너나 할 것 없이 돌을 던졌다. 와합마을 사람들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순식간에 돌을 던지는 그들은 카림과 라니아가 피투성이가 되어 형체를 분간하기 어려울 지경이 되고서야 분이 풀린 듯 돌 던지기를 멈췄다.
지브릴은 그 광경을 보고 자신의 두려움의 근거가 무엇인지 마주한 것만 같았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잔인하고 야만적이게 변모할 수 있는 인간의 실상 그것이 자신을 그렇게도 두렵게 만들고 망설이게 만든 것이다.
3
사람들은 그러고도 하루 다섯 번의 기도 시간을 지키려 다들 정오 기도를 하러 사원에 갔다. 지브릴도 기도를 하고 있었지만 기도를 하는 중에도 그의 내면에서는 무언가에 대한 부정과 거절의 의사가 샘솟는듯했다.
=이건 아니다. 그래 이건 아니야. 난 이곳을 떠나야겠다. 지금도 두렵고 망설여지지만 이 속에서 살고 싶지 않다. 이런 그늘 속에서 살아가고 싶지 않아.
그는 아무도 모르게 자밀라를 찾아가 말했다.
-우리 바로 떠나자. 니가 말한 새로운 날을 위해서 말야.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