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그러니 이유를 치고 선왕을 복위시키자는 것이 아니오.
-이 자가 미친 게로구나. 네 정녕 목숨을 내놓고 싶지 않다면 어이 내게 와 폐왕 복위를 운운하는 것이냐?
공신인 홍윤성을 찾아와 재야 사림의 남효온은 당당한 것인지 미친 것인지 폐왕이 된 이홍위의 복권을 논하고 있었다. 홍윤성은 남효온의 주장보다도 자신을 찾아온 것 자체가 이후 자신에게 문제 삼을 이들이 있을 것이 자명하기에 '이 자를 어찌 처리해야 할 것인가' 고민했다. 하지만 그 고민도 그리 오래 할 고민이 아니었다.
-이 중차대한 문제를 내가 왜 공을 찾아와 논하는 것인지 정녕 모르겠소?
남효온은 홍윤성을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는 다소 짧은 그 시간 동안에도 계속 얼굴을 쓸어내리고 점점 땀을 흘리며 눈은 점점 충혈되어 갔다. 그가 그런 낯색으로 발작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몇 차례나 꺾으며 홍윤성에게 묻자 홍윤성은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는 방 한편에 장식된 사인검을 조용히 들었다.
하지만 그가 등을 돌린 사이 남효온은 어느새 온 얼굴의 혈관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르며 땀구멍으로 피를 흘리는 듯 붉은 기가 가득한 낯빛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뜻을 내 알 필요가 있겠는가.. 공이야말로 오늘이 공의 마지막 날임을...
홍윤성은 말을 하며 남효온이었던 이 생명체인지 귀신인지 모를 것을 향해 돌아서며 사인검을 휘두르려다가 흠칫 놀라 말을 잊고 말았다.
-무엇이냐... 네 정녕 무엇이란 말이야?
붉은 피를 덮어쓴 듯한 그것을 향해 소리치는 홍윤성에게 그것이 달려들었다. 혈안이 터질 듯이 크게 뜬 눈으로 보랏빛 입술 사이의 흰 이빨을 드러내며 그것이 자신에게 달려들자 그는 검을 들어 그것의 배를 관통하였다. 하지만 배가 뚫리면서도 그 기세 그대로 달려든 그것은 홍윤성의 양팔을 부여잡고 선 미친 듯이 홍윤성의 목을 물어뜯었다.
5
-여기서 좀 쉬어 가시지요. 다리도 아플 텐데...
아직 해가 서산마루에 있을 때쯤 가마꾼 네 명이 메고 있는 호피로 덮여있는 가마와 그 옆에 가마를 지친 듯 따라오는 지민을 돌아보며 흑마를 탄 신랑 동영이 말했다. 가마 안의 예탁은 가마를 타고 있는 자신이 다리 저릴까 봐 걱정해 주는 동영의 세심함에 가슴 깊이 '참으로 다정하신 분이구나' 생각했다.
-아니옵니다. 서방님 어찌 이 늦은 시각에 지체하겠사옵니까?
-그래도 오랜 신행길이니 잠시 쉬어 가는 것이 맞겠지요. 아픈 다리도 좀 풀어야 하지 않겠소.
신부인 예탁의 말에 대꾸하는 듯했지만 동영의 눈은 지민을 향하고 있었다.
-예. 아기씨 아니.. 마님 가마꾼들도 지칠 터이니 잠시 쉬어가시지요?
-잠시들 쉬시게나.
동영 곁의 종자인 지성이 동영의 눈치를 보고는 가마꾼들에게 지시했다.
가마에서 내린 예탁은 가마를 향하고 있는 동영의 눈길을 보았다. 자신의 아버지인 영 대감을 찾아온 동영의 모습을 보고 잘생긴 도령이구나 하는 생각에 내심 호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1년 사이 사주단자가 오가고 혼사에 이르기까지 말도 제대로 나눠보지 못한 사이였다. 게다가 첫날밤에도 합환주 몇 잔 마시고 곯아떨어져 첫날밤도 치르지 못한 사이였기에 신랑에 대한 커다란 호감 같은 건 없었는데 가마 안의 자신이 피로할까까지 걱정해 주는 따스함에 소록소록 정이 생겨나는 것만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나무에 말을 메어둔 신랑이 웃으면서 다가오고 있다. 예탁은 낭군의 배려와 애정만 있다면 시집에서의 삶도 견딜만 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예탁은 그를 보며 마주 미소 짓고 있는 지민을 보지 못했다.
-힘들지는 않으셨소.
-제가 힘든 것보다 가마꾼과 이 아이가 힘이 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저기 저 바위에 앉아 조금 쉬시겠소?
널따란 바위 위에 예탁과 동영이 앉자 예탁의 앞에 지민이 동영의 곁에 지성이 서있었다.
-정아, 너도 예 앉거라.
-제가 어찌..
예탁이 지민을 보고 권하였으나 지민은 짐짓 사양하는 체 했다.
-어서 앉으라는데두.. 나야 예까지 앉아 왔지만 넌 그 먼 거리를 꼬박 걷지 않았느냐?
-예, 마님...
-부인 잠깐 쉬고 계시오. 요깃거리라도 구해 오겠소. 가자 지성아!
지민이 바위 위에 앉자 동영이 사냥을 하려는 것인지 열매라도 따오려는 것인지 지성과 함께 가자고 재촉했다. 지성은 조금 가다가 자신도 모르게 예탁과 지민이 있는 바위를 돌아보고 말았다.
-정아. 저 지성이라는 이가 너를 맘에 있어 하는 모양이구나.
-마님, 망측한 말씀 마셔요.
지민은 예탁의 말에 짐짓 화가 났지만 용케 참으며 대답했다.
-어이. 뿔이 난 게야. 너와 내가 나이가 같은데 이제 나도 혼인을 하였으니. 너도 짝을 찾아야 할 게 아니냐? 지성이라는 자가 나이도 너와 비슷하고 용모도 저리 출중하니 네 짝으로 어떻겠느냐?
지민은 이미 자신에게 마음을 보인 동영에게 남은 생을 의탁할 생각이다. 비록 자신의 본래 신분을 회복할 수는 없겠지만 앞길이 창창할 대제학 자제의 첩이 되어 남은 생을 여유롭게 보내고픈 욕심이 있었다. 그런데 저런 종자놈과 짝을 이뤄야 한다니... 순간 예탁의 입을 찢어버리고 싶은 분노가 일었다.
-그런 흉한 소리 마셔요. 저는 그냥 혼자 살겠습니다.
-하하.. 알았다. 알았어. 네 마음이 정해지면 그때 얘기하자꾸나.
6
-도련님, 이제 이 산만 넘으면 마을인데 길을 재촉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너는 다리도 안 아픈 게냐? 네 말마따나 산만 넘으면 마을인 것을 좀 쉬어간들 어떻겠느냐?
동영이 말하는 찰나 지성은 나무들 사이에서 빛 좋은 무언가를 발견하고 다행이다 싶어 소리쳤다.
-도련님 개복숭아 열매가 있습니다. 저것으로 마님 쉬시는 동안 잠시 요기는 되겠습니다.
-이놈아 너는 어찌 같이 걸어서 온 소녀 배주린 것은 걱정 안 하고 마님 걱정만 한단 말이냐?
개복숭아를 열심히 따고 있던 지성은 뭔가 들킨듯해 서둘러 둘러댔다.
-저희 같은 종들이야. 조금만 먹어도 힘이 나겠지만 마님은 귀하디 귀하게 자라신 분이라 금새 배가 주리면 어쩌나 걱정을 했을 뿐입죠.
-뛸 일도 없고 걸을 일도 적던 규수와 뛰어야 살 수 있고 허드렛일에 힘겨운 소녀 중 더 주린 이가 뉘겠느냐?
7
동영과 지성이 개복숭아를 싸 들고 오는 사이, 산 넘어 마을에서 일련의 사람들이 호랑이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듯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