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머님, 소녀이옵니다.
예탁이 대청에 올라 옷매무새를 바로잡더니 사분합문을 향하며 고하였다.
-예탁이냐. 어서 들어오거라.
예탁의 어머니 정 씨 부인은 새삼 반갑고 안쓰러움을 느끼며 예탁을 불렀다.
예탁이 들어오자 정 씨 부인은 다잡던 마음과는 다르게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예탁의 손을 잡았다.
-얘야,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구나. 시댁에 가면 언제 다시 볼지 모르는데 이 어미가 매일을 너에게 살가운 말보다 규방 예절 따위나 운운했구나?
-어머니, 이제 시댁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 소녀에게 시댁에서 사랑받으며 저희 가문에도 누를 끼치지 않는 삶을 살라는 말씀의 의미를 소녀가 어이 모르겠사옵니까?
정 씨 부인은 예탁의 말에 꾹 참던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아니다. 얘야. 너는 이제 김 씨 문중의 사람이 되나 언제나 영 씨일 게다. 어찌 시댁 문중의 사람으로만 살아가겠느냐? 그리고 우리 가문이던 김 씨 문중이던 네가 어찌 조금이라도 누를 끼칠 아이겠느냐? 멀리 떠나보내는 너에게 무슨 말이던 해야겠기에.. 정말 해야 할 말을 못했구나.
-예?
예탁은 자신이 아직 모르는 무언가에 대해 어머니께서 또 가르침을 주시려는 거구나 싶은 마음과 자신이 이렇게 모르는 게 많다는 데 대한 답답함이 일었다.
-언제든 행복해야 한다. 참고 참는 것이 다가 아니란다. 네 나름의 행복을 찾으려 하고 의미를 찾아야 살아낼 수 있는 것이 삶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하느니라.
2
같은 시간, 곳간에서 내일 요리할 곡물을 꺼내던 정이 어멈이 마침 자신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고 있던 딸을 불러 세웠다.
-정아, 이리 조용히 오거라.
정이 어멈의 딸은 조금 숙연한 심정으로 곳간에 들어섰다.
-엄마 이제 나는 가야 할 것 같수. 이제 엄마 혼자 예서 어찌 살지 걱정 이우.
-지민아. 이제 네게 할 당부도 마지막일지 모르겠구나. 우리 가문이 역모의 죄를 뒤집어쓰고 멸문 당한지 벌써 11년이다. 이 한을 풀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그저 죽은 듯이 살려 했으나, 관노가 되지 않으려 이 시골 유학자의 집에 숨어들어 추노꾼의 눈을 피하고자 노비가 되기를 자처한지도 그렇게 흘렀구나. 이제 네가 아기씨의 몸종이 되어 안산까지 가야 하니 걱정은 된다만, 6살 때의 너를 기억하고 지금의 너를 찾으려는 이들은 없을 것 같아 다행이구나. 다만 이젠 아기씨의 신랑이 된 동영 도령이 너를 몰라보는 것이 의아하구나?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정말 감쪽같이 모르는 것인지 두렵기도 하구나... 얘야, 우리 여기서도 도망가야 하지 않나도 생각했지만...
-어머니, 그럼 관노가 되었어야 할 어머니와 저를 찾는 추노꾼에 영 씨 대감님이 보낼 추노꾼까지 어머니와 소녀가 다 피해 살 수 있을까요?
영 씨 대감집과 이 마을에서 언제나 정이라 불리던 지민은 어느새 본래 자신의 신분에 맞는 말씨로 어머니에게 피한다고 피해질 수 없다는 걸 납득시키려 했다.
-하지만 동영 도령이 끝내 너를 알아보면 어쩐다는 말이냐?
-어머니, 동영 도령은 기껏 6살의 저를 두어 번 봤을 뿐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린 시절의 당상관 영감의 어린 여식이던 저와 이제 자신에 처의 몸종으로 마주하는 여종이 같은이라고 어찌 여기겠습니까?
지민이 자신의 어머니에게 하는 말은 제법 그럴듯했으나 사실 어머니에게 사실을 고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동영 도령은 그녀를 알아봤기 때문이다.
3
아직 예탁 아기씨와 혼담이 오가기도 전인 작년 봄, 유학자로서 명망 높은 영보겸 대감댁에 동영 도령은 아버지 김해인 대제학의 분부로 대국에서 건너온 희귀서적을 선물하고자 온 적이 있다. 그때 사랑방으로 안내받은 동영은 마침 사랑방 마루를 닦고 있던 지민을 한참 동안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뭘 그리 보십니까, 도련님? 그저 저희 댁 아기씨 몸종입니다요.
안내를 마친 행랑아범은 점잖게 생긴 도령이 생긴 것과 다르게 정이를 미심쩍게 계속해 쳐다보니 걱정되는 마음에 지민을 보며 말했다.
-정아, 뭘 그리 열심히 해. 오늘 오신 대감마님의 손님이시다. 도령께서 들어가셔야 하니 너는 어서 물러가거라.
그리 말하고 행랑아범은 정이가 자신을 따라나서라는 듯 앞서 사랑채에서 물러갔다. 그를 뒤따라 가려는 지민의 팔을 잡으며 동영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 눈을 피해 오늘 저녁 내게 오시오. 내 낭자의 오라비 벗으로서 부탁하오.
그리 말하고 동영은 지민의 팔을 놓았다. 지민은 설레는 듯 두려운 듯 알 수 없는 심정을 감추며 걸음을 재촉하며 물러갔다. 그런 지민을 동영은 따듯한 눈빛인지 일렁이는 눈빛인지 가늠할 수없는 빛으로 지켜보았다.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