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자는 동시에 둘이나 그 이상의 장소에 존재할 수 있다. 최근 실험에서 입자는 3,000군데 이상의 장소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또 한장소에 위치하는 '물체'는 입자로도 나타났다가 파동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시간과 공간을 넘어 퍼져 나가기도 한다.

아원자 입자들은 공간 속에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동시에 정보를 교환할 수 있다.

양자 물리학은 확률론적이다. 특정 물체가 어떻게 변할지 결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양자 물리학이 그려내는 우주는 모든 부분이 서로 상호작용하며 영향을 주는 통일된 우주이다.

 

1. 빈공간 

핵과 전자 사이는 빈 공간이다.

수소 원자의 핵을 농구 공 크기로 놓고 보면 전자들은 약 32 Km 주변에서 그 주위를 돌고 있다.

이렇게 '텅 비어' 있는 곳도 실제로는 전혀 비어 있지 않다. 그 공간은 미묘하고 엄청나게 강한 에너지로 꽉 차 있다. 물질의 미세한 부분으로 내려갈 수록 에너지의 양은 증가한다.(예를 들어 핵에너지는 화학 에너지보다 백만 배 더 강력하다)

1센티미터의 구슬 크기에 존재하는 '빈 공간의 에너지'는 전 우주의 모든 '물질의 에너지'보다 더 크다.

 

2. 입자, 파동

아원자 입자는 전혀 고체의 성질을 띠지 않으며 두 가지 성질로 나타난다. (입자와 파동)

파동으로 나타나는 전자나 광자(빛 입자)는 특정한 장소를 점하지 않고 '확률의 장'으로 존재한다. 

 

아원자 '물체'가 파동의 상태에 있을 때 그것이 관찰 후 무엇으로 변하고 어디에 위치할지는 불명확하다. 이 상태를 중첩(superposition)이라고 한다.

-불 꺼진 방에서 동전 하나를 던지고 바닥에 떨어진 동전이 앞면일지 뒷면일지는 알 수가 없다. 불을 켜는 순간 우리는 중첩을 '붕괴시키고' 그때서야 동전의 앞 뒤가 결정된다.-

불을 켜는 행위처럼 파동을 관찰하는 행위가 양자 중첩을 무너뜨리고, 입자는 '고전적인' 상태에서 측정 가능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3. 양자 도약과 확률

원자를 연구하면서 과학자들은 전자가 원자 핵 주위의 궤도에서 다른 궤도로 이동하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전자들은 일반적인 물체가 움직이는 것처럼 궤도 사이의 공간을 거치지 않고 순간적으로 이동한다. 즉 하나의 장소, 궤도에서 사라졌다가 갑자기 다른 곳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을 양자 도약이라고 부른다.

 

이것만으로 상식적인 물리 법칙을 깨뜨리기에는 충분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이 도약의 과정에서 언제 어디서 전자가 나타날 것인지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4. 불확정성의 원리 

불확정성의 원리는 양자 물리학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인 베르너 하이젠베르그에 의해 체계화되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물체의 운동량(속도)과 위치를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 하나에 초첨을 맞출수록 다른 하나의 불확정성은 더욱 증가한다.

 

5. 비국소성... 양자 얽힘 현상

아인슈타인, 포돌스키, 로젠의 사고思考 실험 (EPR실험)

원래 의도는 양자물리학의 모순을 지적하려던 실험이다.

~ 우선 같은 시간에 만들어진 두 개의 입자를 준비... 이때 두 입자는 얽힘 상태에 있거나 중첩 상태에 있게 된다. 하나의 입자를 아주 먼 거리를 두고(우주 반대쪽까지) 이상태에서 하나의 입자에 자극을 주어 그 상태를 변화시키자 멀리 떨어져 있던 입자 역시 동시에 자극에 반응했다 동시에!

 

1964년 존 벨은 EPR실험의 주장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이론을 발표했다. 즉 모든 것은 비국소성(non-lcoal)의 성질을 가지며 시간과 공간을 넘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기반은 시간과 공간이다. 하지만 양자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들이 항상 연결되어 있다는 개념이 시공간의 개념을 앞선다.

 

여기까지가 양자 물리학이라는 단원을 요약한 것이다.

양자 물리학 단원은 뒤이은 관찰자라는 단원의 주장을 더 명확히 보여주기 위한 전제 같은 장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양자 물리학에서는 관찰자가 없이 관찰대상의 특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과 물질세계를 관찰하며 우리의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는 것이 이 단원의 주장이다. 한마디로 현실을 창조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더 신속하게 관찰자인 우리의 영향력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우리가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을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들의 주장이다.

 

현재 책의 절반 정도 읽었고 절반까지의 우리가 우리의 현실을 창조하는 주도자이자 마법사이며 그것을 부정하거나 왜곡하는 패러다임들에 좌우되어서는 안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저자가 간과한 것은 나라는 한 명의 개인만 관찰자이고 관찰행위를 하는 것이냐 하는 문제다. 우리 모두가 관찰자이며 관찰 대상이다. 각자가 관찰 행위를 하고 있기에 나 하나의 영향력만으로는 우주나 세계, 자신이 속한 국가나 자신의 가정... 하다 못해 자기자신 하나 조차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혼자만 행사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기들과 아이들의 뇌파는 깊은 최면상태의 뇌파와 같다. 그 아이들에게 현실에 대한 관점을 심어주는 것은 마법사들이 아니라 모두가 평범한 머글들이고 문제 많은 사람들도 그 아이를 향한 관찰행위를 하고 있을 수 있다. 이제 변화의 주체가 자신이라는 주제로 아이들의 관심이 이동하기 전까지는 자신이 보고 배우고 반응해 왔던(최면에 걸려 암시를 받은) 머글적 사고방식이 그 아이를 주도하게 되는 건 당연한 전개일 것이다. 

 

집단적인 규모의 패러다임의 전환이 뒤따르기 전까지는 아이에게 배우고 반응해온 익숙해진 패러다임과 자신의 굴레일 수도 있는 사회규범이나 편견들이 장애가 될 것은 너무도 명백하다. 너는 너의 창조자이다까지는 몰라도 너는 모든 현실의 창조자다라는 건 변화의 여건이 하나하나 완성되어 가는 과정 중에 아이에게 심각한 부담이 될 부분이 아닐까 싶다.

 

예수님께서도 겨자씨 한톨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나보다 더한 일도 할 수 있으며 산을 바다에 던지우라해도 던져질 것이다라고 말씀 하셨지만, 예수님과 사도들 이후로 천주교와 기독교 신앙인들이 바다를 걸었다거나 죽은 자를 살리고 장님을 눈 뜨게하고 앉은뱅이를 일으켰다거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몇 천명을 먹였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산을 바다로 던졌다는 이야기는 더더욱이나 들어보지 못했고 말이다.

 

본서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을 자기계발의 일환으로 사용하겠다는 분들을 비하하려는 의도는 없고 인간에게는 구속과 한계가 분명히 있으며 그것을 타파하는 것은 그런 구속과 한계란 애초에 없다고 부정하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한다는 건 알아야 한다고 생각된다. 

 

트라우마를 앓고 있는 이에게 트라우마란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라 그러면 넌 바로 나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넌센스도 없다는 걸 말하고 싶은 것이다.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것은 내가 트라우마 상태라는 것을 인식하고 그에서 벗어나는 과정과 단계를 거쳤을 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관찰행위로 현실을 바꾸는 데도 이와 같이 거쳐야 할 과정과 단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무턱대고 나는 현실을 창조한다라는 주장은 창조를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섣부른 판단으로 현실을 창조할 동인을 잃게 만들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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