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438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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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글을 읽는 데에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한강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곧 마음의 흔들림을 뜻하기 때문이다. 소설에 있어서 글을 이끌어나가는 주체는 대부분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흐름이 주가 되어 소설은 크게 굴곡지거나 평탄하거나 하는 다양한 형태를 띤다. 한강에게 있어 주는 감정이다. 혹은 감각. 한강의 글에 유독 이탤릭체의 독백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강의 인물들은 하나 같이 어두운 사람이다. 지병을 가지고 있거나 몸이 허약하거나 그도 아니면 정신적으로 스트레스가 많은 사람이다. 이들에게 삶은 견디기 힘들 정도의 무게를 가진다. 척추가 바닥까지 닿을 정도로 휘어진 채 한강의 인물들은 한 발 한 발 힘겹게 나아간다(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아간다, 이지만 지금은 힘겹게, 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겠다). 전술했다시피 한강은 이들의 내면의 흐름을 좇아 글을 써내려간다. 이들의 행보보다는 내면과 독백, 회상과 깨달음에 집중하기에 한강의 글에서는 인간의 감정들이 뚝뚝 묻어난다. 거대한 고통에 맞닥뜨려 고뇌하고 사념하는 인물들의 사유(思流)를 따라가는 것은 독자에게조차 힘겨운 나락에 빠진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그들의 소리 없는 절규를 읽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한강의 글을 읽음이 곧 마음의 흔들림이라는 말의 연유는 이것이다.


따라서 한강을 분석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것은 인물들이다. 한강의 인물들을 정의해본 적이 있다. 갓 태어난 어린 새의 팔딱팔딱 뛰는 심장 같은 사람들,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광원을 감싸고 있는 유리막, 그 유리막을 그려낸다면 바로 한강의 인물들이라고 끼적인 기억이 난다. 한강의 인물들은 병들고 허약한 사람들이니만큼 연약하다. 삶의 무게를 견디는 것만으로도 힘겹고 지쳐 도무지 다른 것에는 신경 쓰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지만 삶은 결코 그들의 소망처럼 쉽지 않다. 부닥친 사건을 견뎌내는 사이 그들은 생기를 잃고 야위어간다. 손으로 움켜쥐면 곧바로 터질 듯 약한 아기새의 심장처럼, 스치기만 해도 상처를 입을 얇디얇은 유리막처럼. 이렇게 소설을 끝내었다면 평론가들은 한강을 허무주의자의 허세쯤으로 취급해 하대했을 것이고 독자들은 꺼림칙하다는 이유로 관심을 거두었을 것이다. 한강의 인물들은 자신을 짓누르고 앞을 가로막은 삶에 투쟁한다. 김수영의 풀처럼 쓰러지고 짓밟혀도 일어난다. 당장의 부족한 월세 때문에 전전긍긍하면서도, 세면대의 컵을 들어 올리지 못할 정도로 허약해져 있으면서도 그들은 삶에 대한 의지를 주장한다. “살려고 그렇게 몸부림을(한강, 바람이 분다, 가라)” 치고 아등바등 살(같은 책)”아간다. 삶이 무엇이기에 그들은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쟁취하려고 하는 것일까. 한강의 소설들은 이에 관한 질문의 제출과 자답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쯤 되면 우리는 아등바등 살아가는 주체가 한강의 인물들이 아닌 바로 한강 자신임을 알아챌 수 있다. 한강이 그려내는 비슷한 이미지의 여성들은 한강 자신과 놀랍도록 일치하는 면이 많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한강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는 개성론의 시로 거론할 수 있다. 개성론이란 작가와 시적 화자가 일치하는 경우를 일컫는데 고백적이며 자전적인 성격을 띤다. 한강의 이 첫 시집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시집이 개성론의 성격을 가진다는 사실에 동의할 것이다. 한강의 소설에서 늘 보였던 연약하지만 투쟁하려는 사람들의 모습, 즉 작가 자신의 형체가 시에서도 드러난다. 자화상. 2000. 겨울이라는 시로써 이 시집의 시적 화자들은 곧 작가 한강을 투영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시집은 총 5부로 나뉘어 있는데, 각 부를 관통하는 큰 주제는 인간 존재에 관한 성찰이다. 한강에게 인간이란 살아감의 고통을 안고 있는 생물이다. 살아가는 것은 언제나 아프고 고통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만 하는, 살아가면서 의미를 얻는 존재로 인식된다. 고로 시집의 화자들은 하나같이 삶의 고통을 노래한다. “그렇게 부서지고도”(피 흐르는 눈 3) 살아 있다는 사실에 절망하며 차라리 담벼락 밑에 뒹구는 돌멩이나 사물, 죽어 해골이 되기를 소망한다. 인간 존재의 근원적 고통을 끌어올리며 한강은 어떤 칼로도 연마되지 않는 원석과 같”(몇 개의 이야기 12)은 단단한 슬픔을 적어낸다.


살아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환멸이지만, 특히 한강은 언어적 고통에 마음을 쓰는 듯 보인다.

 


나에게

혀와 입술이 있다


 

그걸 견디기 어려울 때가 있다.


 

―「해부극장 2부분


 

이 시의 화자는 자기가 선천적으로 소유한 혀와 입술을 혐오한다. 화자는 혀와 입술에서 발화되는 말, 즉 언어에 대한 불신을 품고 있다. 인간의 고통은 어쩌면 최초의 언어에서 기원한 것일지도 모른다. 언어가 창조되고 제대로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사고하게 되었고 여기에서 고통이 발아한 것이다. 언어 자체에서 드러나는 고통도 있다. 언어란 칼보다 폭력적인 무기가 될 수 있고 가면보다 두터운 가림막이 될 수 있다. 이를 깨달은 화자는 언어를 두려워하는 듯 보인다.


한편, 언어라는 것은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기준이다. 언어를 가졌기에 발생하는 고통은 곧 인간이라는 존재로서 느끼는 고통인 것이다. 인간 존재로서의 고통은 또 어떠한가. 한강은 정확히 시집에서 드러내고 있지 않지만, 추측건대, 그것은 상실로 인한 고통이다. `어느 늦은 저녁 나는에서 화자는 저녁밥을 먹으려다 말고 흰 공기에 당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그때 화자는 무언가 영원히 지나가버린 것을 깨닫는다.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는 그것의 정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지속적인 상실로 인한 마음의 공허와 고독이 고통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우리는 읽어낼 수 있다. 살아간다는 것은 무언가를 영원히 흘려버리거나 지나쳐버리는 행위임으로 인간은 결코 완전해질 수 없고 부족한 상태로 남아 있게 된다. 그러한 불균일의 삶은 인간을 두 동강 내고, 세 동강 내고, 종내에는 조각들로 어긋나게 한다.


그래서 한강은 은연중에 살아간다는 것에서 탈피하고 싶은 욕구를 드러내기도 한다. “, 죽어서 좋았는데 환했는데 솜털처럼 가벼웠는데”(파란 돌)라는 고단한 현실의 삶을 견디다 못한 화자의 하소연은 당연한 순서일 것이다. 그러나 이때 한강은 한 가지 놀라운 법칙을 발견한다.


 

십 년 전 꿈에서 본

파란 돌

아직 그 냇물 아래 있을까


 

()


 

나도 모르게 팔 뻗어 줍고 싶었지

그때 알았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그때 처음 아팠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파란 돌부분


 

죽어서 본 예쁜 파란 돌을 줍기 위해선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죽음의 홀가분함은 실체가 없으며 아름다움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 결국 인간이란 살아가면서 인간으로서의 가치와 의미를 얻고, 살아가면서 아름다움을 만질 수 있는 존재라는 것.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살아내야 하는 것. 가장 환한 것과 가장 어두운 것이 공존할 때에야 인간은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


이때부터 한강은 살아간다는 것에 매력을 느꼈던 것일까. 화자들의 입을 빌려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의지를 표한 것일까. 아니, 어쩌면 그 꿈으로 인해 한강은 죽음에서 살아난 것일지도 모른다. 두 번째의 삶, 덤으로서의 삶을 살게된 것일지도 모른다. 긴 제목의 시 이천오년 오월 삼십일, 제주의 봄바다는 햇빛이 반, 물고기 비늘 같은 바람은 소금기를 힘차게 내 몸에 끼얹으며, 이제부터 네 삶은 덤이라고에서 한강의 거듭남을 볼 수 있다. 화자는 살아 있음의 고통을 느끼는 도중 어슴푸레 빛”(피 흐르는 눈 3)나는 살려줘, 라는 말을 떠올리는 것에서 시작하여 점차 삶의 고통을 견디거나 극복하려는 면모를 보인다. 강원래의 공연을 보고 쓴 시 휠체어 댄스의 화자는 눈물도, 악몽도 자신을 좌절시킬 수 없다고 고백하며 삶 앞에 의연한 태도를 드러냈다. 가장 격렬한 투쟁은 조용한 날들 2에 쓰여져 있다.


 

찌르지 말아요 // 짓이기지 말아요


 

1초 만에 / 으스러뜨리지 말아요


 

(하지만 상관없어, 네가 찌르든 부숴뜨리든)


 

그렇게 조금 더

나아갔다


 

―「조용한 날들 2부분(강조는 작가)


 

이 시의 화자는 한강의 모습이 투영된 여성일 테지만 말하고 있는 것은 달팽이다. 비오는 날 창문을 열심히 가로지르는 달팽이는 다가오는 화자에게 부탁의 말을 던진다. 마치 아등바등 살아가는 인간들이 신에게 자비를 구하듯 달팽이는 자신의 안위를 화자에게 강구한다. 주어진 삶, 운명에 구속되어 타자 혹은 초월적 존재에게 의존하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나약한 존재. 그러나 달팽이는 내면의 말을 덧붙인다. “하지만 상관없어. 네가 찌르든 부숴뜨리든.” 투쟁, 달팽이는 극복하여 싸움으로서 한 발 나아갈 수 있었다. 한강이 바라보는 인간 존재 또한 그런 것일까. 삶의 고통에 주저앉지 않고 투쟁할 때 성장할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인 것일까.


인간이 나약한 존재임에는 변화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고통과 투쟁해야 하는가. 한강은 그 방법으로 침묵을 제시한다. 인간의 고통을 잉태하는 혀와 입술을 제거하여 단단한 밀봉”(저녁의 소묘 3유리창)을 배우는 것이 고통을 견뎌내고 고통과 투쟁할 수 있는 방법인 것이다. 언어의 절제로서 고통의 기원을 절단하는 것.


그리고 인간은 고통과 투쟁하기 위해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오래 성찰해야 한다.


한강의 시에는 당신이나와 같은 청자가 종종 등장한다. 이는 한강이 충고의 말을 건네는 특별한 대상처럼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당신이나 는 한강의 운명, 곧 한강 자신이다. 한강의 시들을 결국 자기 자신에게 보내는 메시지였고, 그것은 자기반성이 된다. 자기를 돌아보고 자기를 연구하면서 한강은, 시의 화자들은 살아간다는 것의 본질에 파고들게 된다. 그 경지에서 한강은, 시의 화자들은 희망의 부재를 체화하고 삶이 휘두르는 칼날에 오히려 몸을 내던진다. 이는 인간으로서 고통을 초월한 것으로도 보이지만 작가로서의 사명으로 읽히기도 한다.


한강도 물론 시로 등단한 어엿한 시인이지만 역시 나는 소설을 쓰는 한강이 좋다. 그러나 한강의 시에는 한강의 소설에 조금 부족한 고요와 평온이 있다. “다시 견디기 힘든 달이” (새벽에 들은 노래 3) 떠도 이렇게 한 계절 더 피 흘려도 좋다.”고 읊조리는 한강은 어쩐지 숭고해보이기도 한다. 한강이 이 숭고한 작업을 계속 해주었으면 좋겠다. 아무도 몰래, 천천히, 한 글자씩 써내려가다가 십 몇 년 후, 아무렇지도 않게 묶어 두 번째 시집을 내주었으면 좋겠다. 그때에는 좀더 원숙한 한강의 시를 접할 수 있을까. 삼십 대, 그 반짝일 순간을 기대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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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 2015-08-27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에요! 소이진님의 글은 진짜 감동이에요. 저도 고등학생이 되면 이진님처럼 글을 쓸 수 있게 될 줄 알았는데, 전혀요. 고등학교 들어오고 제대로 된 책을 완독한게 정말 얼마 안되요. 막막하기만 하죠 뭐 즐거운 대학생활 하고 계시길 바라요. 보고싶었어요 이진님 ㅠ
 





사람들은 저마다의 상처를 가지고 살아간다. 어쩌면 사람이란 상처로써 지탱되고 상처가 있으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살아간다는 건 또 다른 상처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고, 다른 상처를 몸 어딘가에 새김으로써 이전에 자신을 괴롭히던 상처를 아물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때론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커다란 상처와 맞닥뜨리기도 한다. 그 상처를 우리 몸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휘게 한다. 마치 식물의 줄기처럼 여리게 줄 서 있는 자그마한 상처들을 짓누르면서 삶의 전진을 더디게 만드는 것이다. ‘다르마 2치료의 사람들은 모두가 삶의 휘어짐을 경험했거나 겪고 있는 자들이다. 그들에게는 삶이 버겁기만 하다. 그들의 상처를 형성한 것은 가까운 이의 죽음이다. 아들이 죽은 후로 꿈에서조차 아들을 만나볼 수 없었다고 고백하며 울음을 터뜨린 여자, 어린 나이의 손자가 살해당하고 그 아이의 어미이자 자신의 딸도 암으로 타계한 노파. 이들의 고통을 달래주는 것은 약물도, 정신과 치료도 아닌 그저 명상이었다. 내쉬고 들이마시는 숨을 코끝으로 혹은 폐로 느끼는 것, 디디고 있는 바닥의 느낌을 발바닥으로 알아채는 것, 그리고 내가 존재하는 것을 깨닫는 것. 얼핏 보기에 하잘것없어 보이는 간단한 행위를 하는 것이 그들에게 놀라운 위로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나는 명상 치료를 받기 위해 방 안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유 모를 동질감을 느꼈다. 한 명 한 명의 얼굴이 낯익었고 그들이 내뱉는 고통의 언어가 가슴에 비수로 꽂히는 듯했다. 사실 내 삶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휘어진 삶이었다. 고통스러워하거나 내색하지는 않지만 얼마간, 남들이 보기에는 상당히 휘어져 있음을 알고 있다. 내가 교회를 다니는 것도 머리 위에 얹힌 짐의 무게를 덜어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확실히 절대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도움이 되었다. 나는 엇나가지도 특별히 바르지도 않은 삶을 살아왔고 그것이 내 휘어짐에 비하면 꽤 준수하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고백건대, 내게 충만하다고 생각했던 믿음이라는 것이 완전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믿음이라는 자체에 대한 부정이 아닌 그것이 내게 수용되었을 때의 완전함을 일컫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의 주인공 싯다르타가 느꼈던 갈증과 같은 것을 나도 느끼고 있었다. 그때 내 정신 언저리를 깨운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었다. 얽매이지 말라는, 모든 존재를 소중히 대하라는 교리를 공부하며 매력을 느꼈던 것 같다. 그토록 배척하던 불교에 호의를 가지기 시작했으니. 불교의 가르침이란 영상에도 나왔듯 시간을 초월하고 현세에도 미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우리의 몸을 이루는 상처 전부는 시간이라는 틀 안에 갇혀 있다. 상처란 곧 과거의 사건으로부터 새겨진,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그려지는 허상에 불과하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자꾸만 앞으로 나아가려고 서두르지 않는다면 우리 삶은 한층 안정되고 편안하다고 불교는 가르치고 있다. 소설 [싯다르타]의 싯다르타가 마지막에 도달한, 시간을 초월하고 자유를 품은 그 깨달음의 상태가 불교의 이상향인 것이다. 우리 삶이 고통과 상처, 휘어짐에서 벗어나 올곧게 서기까지는 아주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동안 누려왔던 것의 일부를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자유의 상태는 달콤할 것이다. 명상 수업이 끝난 후 그들이 눈물로 상처를 씻어내고 포옹으로 따듯함을 나누는 모습에서 나는 큰 위로를 느꼈다. 어쩌면 치유라는 것은 덜어내는 행위가 아닐까. 너를, 우리를, 그리고 나까지도.



















이 순간에 싯다르타는 운명과 싸우기를 그치고 번뇌를 잊었다. 그의 얼굴에는 일체 아욕의 기반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완성을 이루는 경지를 터득한 기쁨의 꽃이 피었다. 거기에는 생기의 강물과 그리고 생명의 흐름과 일체가 되었다는 환희의 꽃이 피어 있었다. 그 얼굴에는 남과도 희노를 같이 할 수 있을뿐더러 흐름에 몸을 맡겨 통일에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청량한 예지의 꽃이 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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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5-05-26 0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싯다르타 너무 좋죠 ㅋ 소이진님 오랜만이에요 수능은 잘 보셨나요라고 묻고 싶지만(?) 이미 대학생이시거나 아니거나 둘 중 하니이기 때문에 굳이 물어 보지는 않겠습니다. ㅋㅋㅋ
전 여전히 공부 중이고 ㅋ 아예 신림동이라는 고시촌에 들어와서 많은 고시생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살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이렇게 글을 올린 걸 보니 참 좋군요 ㅋㅋㅋㅋ 반가워요 ㅋ

페크pek0501 2015-05-27 14:57   좋아요 0 | URL
루쉰 님도 오랜만이에요. 고시촌에 계시는군요. 가끔이라도 소식을 접할 수 있길 바랍니다.
반갑습니다.

페크pek0501 2015-05-27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이진 님이 이젠 대학생이 되어 있겠군요. 대학 생활은 어떤가요?
곧 여름 방학이 시작되겠군요. 방학이 시작되면 자주 글 올릴 수 있는 거죠?

싯다르타, 저도 오래전 읽었어요. 오늘 이 글을 읽으니 다시 이 책을 들춰 봐야겠단 생각이 드네요.

모든 욕심, 모든 기대. 이런 것들을 내려 놓으면 걱정을 없앨 수 있을 텐데, 쉽지 않네요.
현재에만 집중하기도 쉽지 않아요. 그래도 노력은 하겠습니다.

반가웠어요. 좋은 젊은 시절을 보내시길... ^^

이진 2015-06-21 18:36   좋아요 0 | URL
페크님! 이제 여름 방학이 시작했지만 오히려 방학에 더 바쁘네요.
싯다르타는, 나중에 더 나이가 들어서 한 번 더 읽어봐야할 것 같아요.
아직은 어려운 면이 있어서.
페크님도 시원한 여름보내시길 바랍니다~
 

 

 

 

 

심장 한 켠을 난자하는 잔혹한 사건은 끊일 생각을 않는다. 윤 일병이 사망한 날도 벌써 일 년이 지났다. 무감각하게 관련 기사를 읽어내려가던 나는 어느 구절에서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구타 당하는 병사가 의식을 잃으면 수액까지 맞게 하며 때렸다는 것이다. 심장이 반으로 쪼개지는 듯했다. 기사를 읽어내려가며 나는 정신을 거의 잃었고 마침내는 온몸에 힘이 빠져 잠시 누워 있어야 했다. 윤 일병이 쓰러지기 전에 읍소했던 한 마디가 살려달라, 였다고 한다. 대체 왜. 나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고통을 견디고 또 견뎌야 했을 그가 너무도 억울하고 미안해서 속절없이 손으로 얼굴을 막고 흐느꼈다. 그 사건이 있고 일 년 사이 군 내에서는 무수한 사건사고가 일어났다. 끊임없는 가혹행위, 탈영 후 총기난사를 자행한 임 병장 사건, 그리고 지금의 예비군 총기 사건. 군대에서 일어나는 사망 사고는 늘 어딘가 먹먹하다. 군대란 남자들에게 있어 제대로 된 인생을 꽃피우기 위한 통과의례라고 할 수 있다. 아직 날개 한 번 활짝 펼쳐보지 못한 자들이기에 그들의 죽음은 더 안타깝고 슬프게 들린다. 이번 사건에서 최 씨가 어떤 과정을 통해 이 끔직한 사건을 저지르게 되었는지는 차치하고 가장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무고한 청년들이 또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번에도 아침을 먹으며 대수롭지 않게 기사를 읽었는데 하나의 사실을 깨닫고는 경악하며 숟가락을 놓았다. 중상을 입거나 사망한 이들이 모두 엎드린 채로 최 씨의 총을 맞았다는 점이다. 그들의 등을 겨누는 최 씨의 모습이 뇌리에 번득 그려졌다. 그리고 피와 어둠. 나는 이 상황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을까.


글을 손에서 놓고 지낸 지도 석 달이 가까워간다. 국문과에 오면 질릴 정도로 책을 많이 읽고 하다못해 글을 쓰는 데에 통달하게 될 줄 알았는데 놀라울 정도로 글과 멀어지고 있다. 전공 수업을 두 개 듣는데 국어학과 시창작 수업이 그것이다. 국어학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어렵고 난해해서 일단은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그것을 내가 끝까지 완수해낼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시창작 수업이 내가 고대했던 것인데 그 실상은 무척 실망스럽다. 나는 시창작 수업에 들어가기에 앞서 오래전에 활동했던 합평 카페에 들어가서 예대 선배들이 어떻게 합평을 주고 받았는지를 톺아보았다. 시를 굉장히 잘 쓰는 누나가 한 명 있었고, 그 누나가 날카로우면서도 오류를 정확히 짚어내는 평가를 해주었던 기억이 있어 주로 그를 위주로 시합평의 방법을 내게 주입했다. 그러나 학생들의 시는 전부 내 기대에 못 미쳤다. 실기로 들어온 학생들이 소수인데다 대부분은 글을 한 번도 써보지 않았거나 가까이 하지 않았던 정시생들이었기 때문인지 시의 수준이 썩 좋지는 않았다. 내게 주입한 시합평의 방법으로는 이건 시가 아니다, 갖다 버려, 라고 외치고 싶을 정도로 한심하게 느껴진 적이 많았다. 나도 관념적인 시를 쓰기 때문에 학생들의 관념적인 부분을 건드리는 것에는 너그럽지만 그들의 시는 내 아량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4주 정도 지났을까 나는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조차 괴로웠다. 마음 같아서는 이건 아니다, 이건 쳐내라, 하고 쏘아주고 싶지만 주위에서는 다들 따듯한 말씨로 조곤조곤하게 합평을 진행하고 있었고 내 주제에 다른 이의 시를 주무른다는 것도 학생에 대한, 시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느껴졌다. 결국 나는 끓어오르는 마음을 억누르며 최대한 장점 위주로 쏟아내듯 비평을 건네곤 했는데, 도무지 읽어줄 수도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시에는 눈길조차 줄 수 없었다. 그런 시가 지금껏 두 편 있었다.

 

시창작 수업에서 나는 첫 주 차 발표를 맡았고 그걸 끝내고 나니 한가로워졌다. 다른 수업도 널널한 편이어서 여가 시간이 상당해졌는데 나는 그 시간을 허투루 보내왔다. 게다가 공강일도 이틀이나 되어서 휴일이 나흘이나 된다. 엄청난 시간이 주어졌음에도 효과적으로 쓰지 못한 것이다. 도서관이 기숙사 바로 옆에 있는데 자주 나가지 않았고 책을 한 무더기나 싸들고 왔지만 몇 번 펴보지 않았다. 대신 내가 열중한 것은 영화였다. 어느 때였던가 나는 영화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되짚어 보건대, 지적 자존심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와 함께 지내던 방짝 친구가 영화를 무척 좋아했기 때문에 하교 후에는 으레 영화를 보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나는 친구가 본 영화 편수를 넘어서고자 했다. 알량한 자존심이었다. 나는 어떠한 분야에서 남들보다 조예가 깊고자 하는 사람인데 그 대상이 그전까지는 책이었다면 책에서 영화로 옮겨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하고자 하는 욕구만 충만하지 제대로 미치지는 못하여서 그저 말로만 영화 너무 좋아! 하고 내뱉기 일쑤였다. 그러다 수첩을 하나 사서 영화 노트라고 이름 붙이고 거기에 본 영화를 혼자만의 별점을 달아 기록하기 시작하면서 영화 보기에 본격적인 흥미를 붙였다. 작년 12월부터 입때껏 본 영화가 90편에 달하는데 언제 이만큼 봤지 싶으면서도 내심 아쉬웠다. 좀더 미치도록 볼 수 있었을 텐데, 더 열중할 수 있었을 텐데. 내 열의의 한계를 눈으로 목격한 것 같아서 미웠다.

 

 

 

 

가장 최근에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울음을 비오듯 쏟아냈다. 보통 영화를 보고 흘리는 눈물은 한시적에 불과한데 나는 이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한참동안 멈추지 않는 울음 때문에 마음이 괴로웠다. 마침 룸메이트도 나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속죄하는 마음으로 엉엉 울었다. 나중에는 마츠코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아려 생각을 접어버리고 침대에 누웠다. 나는 분명히 마츠코의 일생에 대해 잘못을 범한 사람이고 그에 대한 죄책감을 항상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창과 입시 준비를 할 때 한 남자 아이에 관한 이야기를 구상한 적이 있었다. 주마다 다른 주제를 두고 글을 썼는데 그 주의 주제는 사진을 보고 그 사진에 맞게 이야기를 꾸리는 것이었다. 담당자가 내어 놓은 사진은 몽환적인 느낌이 물씬한 사진이었다. 푸른 빛깔이 사진을 덮고 있었고 중앙에 놓인 푸른 침대 위에 남자 아이가 누워 있었다. 아이는 너무 하얘서 푸른 빛이 났다. 침대 주위로 금붕어가 몇 마리 부유하고 있었다. 마치 그 공간이 어항 속인 듯했다. 나는 속에서 푸르게 누워 있는 아이에게 눈길이 갔다. 그 아이가 시리도록 푸르러서 그 아이를 정말 시리게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내가 꾸린 이야기는 남자 아이를 불행의 극치까지 몰아붙이는 것이었다. 늘 그랬듯 남자 아이는 성소수자였고 그 사실을 고백한 후 아버지와 의절하게 된다. 아이의 어머니는 이미 어릴 적 죽었고 아버지는 폭력적인 사람이었다. 아이는 고등학교 때 친구에게서 이상한 감정을 느낀 후로 성정체성을 확신하게 되었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크게 마음을 쓰지 않았었다. 집에서 쫓겨난 아이는 갈 곳이 없어지자 자연스럽게 사창가로 흘러들게 되었다. 피부가 푸르게 하얬던 아이는 한 창부에 눈에 들어 남창으로 활동하게 된다. 작은 체구였던 아이는 오랜 기간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푸르게 하얬던 아이의 몸은 갈수록 푸르게 물들었다. 그 뒤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아이에 관한 소설은 결국 쓰지 못했지만 아이의 잔상은 자꾸만 남아 나를 쿡쿡 찔러댄다. 푸른 멍자국과 물이 가득 고인 눈동자가 두개골 어딘가에 갇혀 증발하지 못한 채 나를 덮고 있다. 이 아이의 삶을 내가 망쳤다는 생각에, 내가 무슨 권리로 이 아이를 비참으로 몰아세운 것인가, 하는 자책감에 나는 불행한 사람을 보면 죄송함에 눈물만을 흘린다. 테스가 그랬고, 마츠코가 그랬다. 테스, 오 테스. 테스의 삶을 하나의 단어로 정의해야 한다면 그것은 물론 비통일 것이다. 테스의 삶은 하나의 비극이다. 테스는 사랑했지만 사랑 때문에 죽은 여자다. 아버지의 말을 죽인 후로 테스의 삶은 꼬이기 시작했다. 가정부로 일을 나간 집의 아들에게 처녀성을 빼앗긴 뒤, 그녀는 에인젤이라는 남자를 사랑했지만 정조를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버림받았다. 그러나 테스는 에인젤을 잊지 못했고 에인젤 또한 그녀의 마음을 뒤늦게서야 깨달았지만 그 때문에 테스는 자신의 처녀성을 빼앗은 남자를 죽이게 된다. 테스의 가혹한 삶은 처형으로 종지부를 찍는다. 마츠코의 삶은 테스와 얼마나 닮아 있는가. 그토록 사람을 사랑했지만 결국 그녀를 사랑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가 의지하고 사랑했던 사람들은 그녀의 헌신을 이용하거나 짓밟기 일쑤였다. 친구로서 사랑을 주었던 이들은 그녀를 이해해주지 못했고 마츠코는 외로움에 찌들어 갔다. 여러 남자에게 차이고 구타 당하는 마츠코의 비참한 모습만으로도 족할 텐데, 감독은 재기하려는 마츠코의 가련한 싹까지 쥐어뜯어버린다. 마츠코의 죽음은 서럽다. 분하다. 이렇게까지 마츠코를 짓눌러야 하는가. 이렇게까지 마츠코를 밀어붙여야 하는가. 



여수, 그 앞바다의 녹슨 철선들은 지금도 상처 입은 목소리로 울부짖어 대고 있을 것이다. 여수만의 서늘한 해류는 멍든 속살 같은 푸릇푸릇한 섬들과 몸 섞으며 굽이돌고 있을 것이다. 저무는 선착장마다 주황빛 알전구들이 밝혀질 것이다. 부두 가건물 사이로 검붉은 노을이 불타오를 것이다. 찝찔한 바닷바람은 격렬하게 우산을 까뒤집고 여자들의 치마를, 머리칼을 솟구치게 할 것이다. 얼마만큼 왔을까. 통곡하는 여자의 눈에서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은 빗물이 객실 차창에 여러 줄기의 빗금을 내리긋고 있었다. 간간이 벼락이 빛났다. 무엇인가를 연달아 부수고 무너뜨리는 듯한 기차 바퀴 소리, 누군가의 가슴이 찢어지고 그것이 영원히 아물지 않는 것 같은 빗소리가 아련한 뇌성을 삼켰다. 음산한 하늘 아래 나무들은 비바람에 뿌리 뽑히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젖은 줄기와 가지가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휘어졌다. 노랗고 붉게 탈색된 낙엽들이 무수한 불티처럼 바람 부는 방향으로 흩날렸다. 조금 큰 활엽수들은 의연하게, 줄기가 여린 묘목들과 갈대 숲은 송두리째 제 몸을 고통에 바치며 흔들리고 있었다. 그들도, 그들의 뿌리를 움켜 안은 대지도 놀라운 힘으로 인내하고 있었다. 무수한 보릿잎 같은 빗자국들이 차창과 내 충혈된 눈을 할퀴었다.




자투리 시간에 도서관에 가 한강의 책을 집어 들었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자연스럽게 책을 꺼내어 자리를 잡았다. 한강의 소설은 어떠한 적막이 인물들을 짓누르고 있는 듯 답답한 느낌을 주는데 이 작품은 특히 그렇다. 이 적막한 중편 소설을 읽는 데에 굉장한 시간이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읽어내는 데에 든 시간보다 첫 장을 넘기기까지의 시간이 길었다. 첫 구절부터 감정 소모가 상당했기 때문에 나는 자신이 없었다. 겨우 읽어낸 소설은, 역시 아팠다. 두 여자의 이야기를 읽어가는 동안 나는 내가 예민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자흔을 신경질적으로 대하는 정선처럼 나는 이 소설을 히스테릭하게 읽어내고 있었다. 이것은 경험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데 나는 이 경험이 불쾌하게 느껴졌다. 따라서 나는 이 소설에 대한 감상을 심장 저편 어딘가에 꽁꽁 숨겨두었으나 다시 읽으며 그것이 혈관 위로 떠오르는 것을 알아차렸다. 불쾌와 적막이 묵직하게 가슴이 마쳐 연거푸 한숨을 내쉬지 않고선 책장을 넘기기 힘들었다. 자흔은 한강이 추구하는 여성상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한강의 인물들이 대체적으로 불쾌하게 그려지는 반면 자흔은 발랄하고 여리다. 여름이 가까워 오는 날씨에 두꺼운 코트를 입고 짐보따리를 가득 들고서도 온화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자흔은 그럼에도 자전거와 부딪히는 사고가 있었을 때 고통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강경함을 지니고 있다. 아기새의 모습 같다. 나는 언젠가 한강의 장편 소설을 감상하며 한강의 인물들은 아기 새 같다고 표현한 적이 있는데 자흔이 이를 대표한다. 여리지만 생에 관한 한 누구보다도 강직한. 때문에 자흔이 정선에게 내민 손길이 거절당했을 때 나또한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자흔이 받아냈을 상처의 무게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갔기 때문에.


결국 자흔은 떠나고 정선은 혼자 남는다. 자흔은 여수로 떠났을 것이다. 정선 또한 여수로 향했다.


두 여인이 만났을까. 소망컨대, 두 여인이 만났으면 좋겠다. 그러나 만나지 않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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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분석글을 쓰고 있다. 과제다.

놀랍다. 내가 이렇게나 이 공간을 잊고 있었던가.

어쩌면 내 토대를 다져 주었을 이 소중한 공간을.

이제는 내가 글을 쓰는 것에 소홀해진 것이겠지.

조만간 한강의 시집을 분석해야 한다.

물론 그것은 나의 선택이었다. 영화 분석도 나의 선택이다.

대학에 와서 내가 배운 것은 글을 완성하는 법이다.

물론 그것은 내가 스스로 배운 것이다.

글로서 돌아오겠노라 자꾸만 다짐했건만 쉽지 않다.

하잘 것 없는 단상이나 끼적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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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06 2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5-06 2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무개 2015-05-06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진군 와락~~^^

이진 2015-05-08 02:22   좋아요 0 | URL
아무개님!! 와락~:D

프레이야 2015-05-06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이진님, 반가워요. 어엿한 대학생이신거죠. ^^
열심히 글과 동거동락하고 있군요. 조만간 분석하신 글도 읽을 수 있는 기회가 있길 ..

이진 2015-05-08 02:22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정말 반가워요. 어엿한 대학생으로 돌아온 소이진이에요!
조만간 분석한 글도 다듬어서 올리고 싶어요. 물론 잘 쓰지는 못했지만 기회가 된다면요.

stella.K 2015-05-07 14: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학교생활이 재밌나 보군. 여기를 잊고 지내리만큼...ㅋ
열심히 해.^^

이진 2015-05-08 02:23   좋아요 1 | URL
재밌다기보다 바쁘고, 바쁘다기보다 정신없는 시간들인 것 같아요.
그래도 글을 써야겠죠.

transient-guest 2015-05-13 03: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아는 형님이 그렇게 하다가 씨네 21기자생활을 했었죠. 좋아하는걸 자꾸 찾다보면 커리어로도 연결될 수 있을 거에요. 읽고 보고 쓰자구요 다같이..ㅎ

이진 2015-05-24 23:12   좋아요 1 | URL
우와 저도... 영화 기자 하고싶어요.
사실 영화 평론가 해볼까, 하는 생각을 안 한건 아니에요 ㅋㅋ..
열심히 읽고 보고 쓰다보면 언젠간 열리겠죠!

2015-05-14 1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5-24 23: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밀회'를 다 보는 데 두 주가 걸렸다. 음악과 사랑, 뒷세계가 치명적으로 녹아든 수작이었다.

연기와 음악 그리고 이 드라마만의 분위기를 오랜 기간 탐닉하는 나를 친구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불륜 드라마니 재미없는 드라마니 하면서 드라마 자체를 폄하하기 바빴고 나는 아니라며 손사래쳤다.

초반의 무아지경의 사랑에 빠져 마치 물 속에 잠긴 듯 허우적거리던 김희애와 유아인의 모습이 좋았다.

비상등의 붉은 조명이 그들을 선정적으로 비추고 있는 주차장 안에서 한참 서로의 눈망울을 탐하다 기습적으로 입술을 부딪히던 장면과 자신에게 맹랑하게 다가오던 유아인을 혼내듯 노려보다 와락 키스하던 김희애의 표정, 자신에게 항상 당당하고 올곧던 김희애의 약한 모습을 지켜본 유아인의 약간 벌어진 입술이 잊히지 않는다.

푸른 물방울 속 세계의 아득하고 몽롱한 분위기가 클래식과 만나 한층 확장되고 증폭되었다.

후반으로 가면서 극은 퇴폐적이고 범접하기 힘든 내용으로 더욱 무게를 더해갔다.

대기업 회장, 예술재단의 이사장과 사장의 충견 노릇을 하던 김희애가 몰락해가면서부터 극은 휘청거렸다.

과한 밀도와 단단하게 응집된 공기가 극이 진전하는 속도를 저해했다. 무겁게 짓누르면서.


끝을 보긴 봤다.

긴 여운이 유아인의 음성과 김희애의 머리카락에서 묻어났다.

이토록 뜨겁고 강렬한 사랑이라. 나는 이 드라마를 어쩐지 아끼는 소설처럼 오래 간직할 것 같다.

허리를 숙이는 것이 직업인 나에게 누군가 신발을 신겨준다면 나 또한 허우적거리며 그에게 빠져들지 않을까.

맹목적이고 무엇이든 버릴 수 있는 사랑의 감정이 다시 내게 찾아와준다면 좋겠다.

사랑이 없는 삶은 건조하다. 김희애에게 사랑이란 곧 자기 자신으로의 회귀였다. 

유아인은 자기의 20대의 열정과 꿈으로 가득했던 과거이자 젊음이자 잃어버린 본래 모습이었다.

그토록 빈틈없이 치열하던 그리고 치밀하던 김희애에게도 부족한 점이 있던 것이다.

치명적인 사랑, 곧 되찾음의 과정. 김희애가 연기를 참 잘했고 대본이 참 잘 쓰여졌다.

대사가 참 좋았다는 기억이 크다. 악기를 연주하듯 분위기를 뚫고 울리던 아름다운 대사들.


다음 두 주를 '워킹 데드'를 보면서 허비했다. 

좀비 드라마는 정말이지 시간 낭비 그 이상이 아니다. 

하지만 재밌었다. 두 주 동안 미쳐 있던 게 아깝지 않을 정도로 재밌었다.


그리고, 미생.






간단하게 평가를 내리자면, 정직한 드라마라는 것이다.


어쭙잖은 애정선과 부실한 갈등을 억지로 끼워맞추는 게 아니라 정면 돌파, 직구를 던지는 느낌이었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읽을 때 이런 감정을 느꼈었다. 삶을 잃은, 기억을 놓친 사람들에 대한 위로와 헌사.

그녀의 과거의 조각에서 시작된 집필은 종국에서 역사적 사건과 감정의 환생으로 이어졌다.

비망록과 같은 그녀의 소설은 최명희의 말처럼 천형이 되어 작가와 독자들의 마음에 각인을 새겼다.

나는 굉장히 폭력에 강한 사람인데, 그래서 잔인한 영화와 소설을 쉽게 읽어내지만 유독 이 작품은 힘들었다.

정부의 무자비한 무혈진압에 속절없이 쓰러진 시민들의 고통과 패배가 쓴맛으로 단어에 물들어 있었다.

단어와 문장, 작가의 호흡을 곱씹으며 무참히 쏟아진 그들의 장기를 만지고 있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이것은 한강이 담담하게, 그러나 최선을 다해 역사를 그려냈기 때문이었다.

한강은 작가의 말에서 스스로 자신이 '소년이 온다'를 어떻게 썼는지 밝히고 있다.

광주와 죽어간 사람들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최대한 잘 써야겠다는 마음으로 펜을 들었다고 한다.

사실적으로 고통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것, 그것도 작가의 역량이고 힘이다. 한강을 힘을 가진 작가다.


미생을 그린 윤태호 만화가도 상당한 힘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미생 만화 원작은 보지 못했고 드라마와 만화 후기를 보았을 뿐임에도 윤태호 만화가의 노력이 생생히 만져졌다.

윤태호 만화가는 회사원의 직급조차, 즉 부장과 차장의 계급 위치조차 알지 못했다고 운을 뗐다.

바둑과 회사 생활을 접목시키기 위해 회사원을 취재하고 요르단까지 찾아간 그의 수고를 후기에서 읽었다.

나는 이 후기가 어쩌면 만화의 감동을 증폭시키기 위한 거짓말이 아닐까 생각했다.

아니 어떻게 회사의 구조조차 모르던 사람이 이런 작품을 그려낸단 말인가.

그만큼 미생이라는 작품이 띠고 있는 현실성과 현재성이 뛰어나다는 말을 하고 싶다.

내가 회사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것쯤은 짐작하고 느낄 수 있다.


無에서 有를 만들어내는 것, 작가의 힘이다. 엄청난 힘.


드라마를 보는 내내 윤태호 작가가 작정하고 그렸고 감독이 작정하고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한 편 한 편 버릴 만한 장면이 없었고 드라마가 아닌 취업에 성공한 선배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듯했다.

그러니까 막막하고 아득한 기분이 닥쳐왔다는 것이다. 내가 서 있는, 곧 직면하게 될 현실이라는 절벽.

장그래가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바둑을 버리고 생계를 짊어져야 했을 때 나는 그를 동정했고,

낙하산으로 대기업 인턴으로 들어가 주변 동료들에게 온갖 멸시와 괴롭힘을 당할 때 나는 그들을 이해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이 멍하게 앉아만 있던 장그래가 회사에 적응하고 일에 능숙해질 때 나는 벅찼고 그를 측은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이입하여 나도 그를 측은하게 쳐다보았다.

장그래는 계약직이었다. 2년 뒤면 재계약을 해야 했고 정규직으로 전환될 가능성은 없어보였다.


계약직.

드라마 '직장의 신'이 떠오른다. 전지전능의 자처 계약직 김혜수가 열연했던 드라마.

미생 이전에 회사원과 계약직의 비애, 회의, 외로움을 잘 그려낸 수작이었다고 나는 평가한다.

그러나 조금은 불필요해 보이는 애정선의 개입으로 나는 흥미를 잃고 드라마를 끝까지 보지 않았다.

이것이 미생과 직장의 신의 차이다. 명작과 명작이 될 뻔했던 작품의 차이. (공중파와 케이블의 차이.)

직장의 신에서는 김혜수 말고도 정유미가 계약직 사원으로 연기를 했었는데, 여기서 정유미 참 많이도 울었다.

곧 계약직이란 회사의 놀잇감이라는 거다. 혹은 진딧물.

필요할 때 일을 시키고 모든 걸 빼먹고는 내킬 때 내치기 위해 채용하는 인물.

직장의 신에서 계약직은 세상에서 제일 불쌍하고 처절한 사람으로 그려졌다.


미생에서 계약직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렇게 크지 않다.

미생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직 완성되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저마다의 사연과 이야기를 안고 어떤 인연을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우리의 인생, 삶.

항상 기쁘지도 항상 슬프지도, 웃고만 있을 수도 울고만 있을 수도 없는 우리의 인생, 삶.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서로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

상대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고 함께 다음 수를 고민하고, 모두가 더불러 책임지는.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은 곧 모든 인간은 미생의 존재라는 말과 동일하다.

또 우리는 아직 완벽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든 변할 수 있다.

우리가 나아가고자 하는 대로 나아갈 수도 있고 그러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날아보는 거다. 도전하는 거다. 앞으로 성큼성큼 나아가보는 거다.

어떤 날개가 우리를 날게 해주고, 어떤 미래가 우리의 발 밑을 받쳐주고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나는 미생을 본 후 가끔 울적해지는 때가 잦아졌다.

취업이라는 단어가 이제 본격적으로 살갗에 뼛마디에 와닿기 시작한다.

내 미래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모르겠다. 까마득하고 깜깜하다.

그러나 양과 질이 다른 노력으로 땀 흘리고 부딪혀 생채기를 입다보면 어느새 서 있는 내 미래가 있겠지.

그 자리에서 미생의 사람들과 소통하고 웃으며 적응해가는 내 자신이 있겠지.

완생을 향해 날아가는 내가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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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5-01-15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뭘 벌써부터 취업을 생각해? 학교 입학식도 갖기 전에.
그저 학교 들어가서 열심히 공부할 생각부터 해.
나도 밀회는 재밌게 봤는데 결국 작년에 남는 드라마는 저 미생과 정도전이었던 것 같다.
변요한이던가? 쟤 연기 잘하는 것 같아 기대가 되더군.
조만간 공중파에서 보게되지 않을까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