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에 한 번씩 찾아오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저번 달엔가 꽤 긴 글을 썼는데 순식간에 그것들이 날아가버려서 다시 쓸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여전히 책보다는 영화를 자주 접하는 요즘이다. 저번 학기에 시창작입문을 들었다면 이번 학기는 소설창작입문인데, 마지막 전 주까지 단편소설 한 편을 써서 제출해야 한다. 단편소설을 쓰겠다고 손을 번쩍 들긴 했지만 고백건대 단편 분량의 소설을 써 본 적이 없다. 써봐야 미니픽션. 나는 주로 소설보다는 시나 서평을 주로 써왔기 때문에 소설 쓰는 것이 어렵게만 느껴진다. 너무 한강의 소설만 독파한 것 같아 도움을 얻고자 김중혁의 신간을 꺼냈다. [가짜 팔로 하는 포옹]. 그의 소설집 [일 층, 지하 일 층]을 인상 깊게 읽었기에 기대가 컸다. 내 기억에 김중혁은 진지한 이야기를 가볍게 풀어내는 작가였다. 가볍다는 것은 깊이가 얕거나 하찮게 보일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재치 있고 부드럽게 읽히도록 꾸며간다는 뜻이다. 




  경찰관님, 고통 같은 것은 말입니다. 절대 얼굴에 드러나지 않습니다. 아십니까? 그게 다 어디 붙는지 아십니까? 알코올에 달라붙어서 말입니다, 살에도 붙고, 조각조각 나서 뇌에도 붙고, 또 내보내려고 해도 손톱 발톱 그렇게 안 보이는 데 숨어살면서요, 조용히 있다가 중요한 순간이 되면요, 제 뒤통수를 후려치고요, 그러는 겁니다.

  피존이 그렇게 말한 거야, 아니면 지금 자기가 취해서 혀가 꼬이는 거야?

  정윤이 규호의 눈을 들여다봤다. 규호의 눈은 발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규호가 고개를 숙이며 정윤의 눈을 피했다.

  맺힌다는 게 뭔지 알아?

  맺힌다고?

  아, 아니지, 피존 말투로 해야지. 흐, 미안, 정윤아, 다시 물어볼게.

  맺힌다는 게 어떤 건지 아십니까? 자, 여기 술잔을 잡아봅니다.

  규호가 헛손질을 하다가 겨우 술잔을 잡았다.

  여기에 왜 맺히는지 압니까? 이것은 온도 차이 때문입니다. 나는 차가운데, 바깥은 차갑지 않아서, 나는 아픈데, 바깥은 하나도 아프질 않아서, 그래서 이렇게 맺히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요, 술을 마십니다.


「가짜 팔로 하는 포옹」 p.117-8




김중혁은 인간의 감정을 말로 정의하는 데 뛰어나다. 단어 하나를 사용하기 위해, 그 인물을 소설에 그려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민을 거쳤는지 소설의 한 대목만을 읽어도 알 수 있다. 소설집의 표제작은 굉장히 특이한 구성을 하고 있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구성인데, 한 장소에서 인물들의 대사만으로 소설이 이루어진다. 비포 시리즈나, 작가주의 영화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전개라고 할 수 있다. 알코올에 중독된 남자 규호와 그에 의해 불려나온 전 여자친구 정윤, 두 사람은 어느 밤 호프집에 앉아 있다. 자꾸만 술을 시키려고 하는 규호와 그를 막는 정윤. 정윤의 태도에는 규호를 대하는 피곤함이 녹아 있다. 자리를 벗어나려고 하는 정윤에게 규호는 알코올중독자 모임에서 만난 피존씨 이야기를 꺼낸다. 전술한 대목에서 경찰관에게 읍소하는 목소리가 피존씨의 것이다. 술을 마신다는 것은, 뻔하지만 그래도, 고통을 감내하는 방법 중 한 가지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존재 이유가 될 지도 모르겠다. 술을 마시지 않고서는 자신의 존재를 견뎌낼 수 없으니. 너무나도 비참하고 외로운 몸뚱어리를 지탱해줄 마음이 없으니. 술이 내미는 가짜 팔의 포옹이라도 있어야 그나마 비틀거리며 일어설 수 있으니. 어쩌면 그 가짜 팔의 포옹이 진짜 팔의 포옹보다도 행복할 수 있으니.


김중혁의 장점 혹은 단점, 장단점을 넘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끝맺음이다. 전작들을 모두 읽어보지 못했지만 내가 읽은 몇 편의 단편 소설을 종합해보면 김중혁은 항상 이상한 지점에서 소설을 끝맺는다. 이상하다, 라는 단어가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 말하자면, 소설을 더 전개시킬 수 있을 법한 곳에서 그는 으레 손을 뗀다. 이제 이야기의 윤곽이 어느 정도 잡혔다 싶을 때, 그는 그 이야기를 독자에게 떠넘긴다. 떠넘긴다, 보다는 맡긴다, 고 하는 게 낫겠다. 김중혁의 소설을 읽고 난 후에 오히려 힘이 더 드는 이유이다. 김중혁은 이제 대사의 힘을 완전히 깨달은 것 같다. 황정은이 대사를 다루는 것처럼 그는 대사를 다룬다. 아니 링클레이터 감독이 대사를 다루는 것처럼 그는 대사를 사용한다. 젊은 연인의 대사, 남자 고등학생의 대사, 포르노 업체 직원의 대사 등 모두가 몹시 현실적이다. 씨발, 개새끼야, 새끼야, 이것들은 남자 고등학생들의 대사이고, 씨발, 애무, 정액은 포르노 업체 사람들의 대사이다. 처음에는 솔직히 직설적인 대사들에 거부감이 들었다. 지나치게 현실적이어서 이번 소설집은 좀 갔다, 하고 책을 덮었다. 그런데 뭐랄까, 이게 김중혁이지 싶다. 펑키하다, 고 해야 할까. 적당한 단어가 갑자기 떠오르질 않는다. 그냥 말 그대로 젊은 작가. 발전해나갈 길이 창창한 작가. 데뷔한 지 꽤 되었으나 후가 더 기대되는 작가. 빨간책방에서도 좋고.




[그을린 사랑],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







영화를 보다가 숨이 턱 막혀 가슴을 움켜쥐는 순간이 있다. 그런 순간이 있을 때 나는 그 영화를 사랑하게 된다. 올드보이가 그랬고, 밀양이 그랬다. 슬픔이 맺히고 맺혀 돌처럼 단단하게 변하여 그 돌이 진동하며 심장을 쿵쿵 내리치는 자학적인 고통. 그 고통이 명치 끄트머리에 마쳐오면 나는 몸을 내려놓고 휘둘릴 준비를 한다. 나를 또다시 주저앉게 한 영화, [그을린 사랑]이다. 


영화관에 너무 일찍 찾아가 카페에 가 눈을 붙였다. 잠이 깨고 나서도 노곤하여 영화를 보면서도 졸았다. 압구정이었고, 필름 상영이었다. 영화는, 어두운 화면으로 시작했다. 세 명의 사람이 앉아 있고 중년의 남자는 젊은 남매를 앞에 두고 앉아 무엇인가 이야기 중이다. 남매의 어머니가 남긴 유언이다. 어머니의 유언으로 남매에게는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가 생겼고, 없던 형이 생겼다. 그 둘을 찾아 편지를 전해주고, 그 후에야 자신을 제대로 장례하여 달라는 것이 어머니의 유언이었다. 영화는 이제 한 편의 스릴러, 추리극이 된다. 자신의 아버지와 오빠라고 칭해진 사람을 찾아 떠나는 여자의 모습과 그녀 어머니의 과거가 교차되며 이야기는 전개된다. 사람에 사람을 거쳐 어머니의 고향에 다다르자 여자는 좀더 내밀한 어머니의 진실을 마주하기 시작한다. 그야말로 진실이었다. 속으로 꼭꼭 다져 눌러두었을, 속을 그토록 헤집어 놓았을 어머니의 진실. 그 비극에 남매는 몸을 떨며 운다. 


그녀 어머니 나왈이 살았던 때는 레바논 분쟁이 한창이었다. 기독교 신자였던 나왈은 무슬림 남자와 사랑을 나눴고, 아이를 가졌다. 가족들의 반대로 나왈은 아이를 떠나보내야 했다. 발뒤꿈치에 점 세 개의 표식을 남기고 언젠가 너를 꼭 찾으리라는 약속과 함께. 바로 이 약속, 분쟁이라는 분노와 갈등, 그리고 어머니라는 이름의 사랑이 빚은 약속이었다. 이 약속은 나아가 위에 보이는 장면을 만들어낸다. 나왈은 집을 나와 학교에 다니던 중 떠나보냈던 아이를 찾아 무슬림 지역의 고아원을 찾아간다. 그곳에서 나왈은 자신의 아이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스카프를 머리에 둘러쓰고 버스에 오른다. 몽롱하게 졸고 있을 때 나왈이 탄 버스를 기독교 민병대가 습격한다. 모두가 죽고 나왈과 한 모녀만 남았을 때, 나왈은 감춰둔 십자가 목걸이를 꺼내보이며 자기는 기독교인이라고 소리친다. 민병대원 중 하나가 나왈을 버스에서 끌어내리던 중 나왈은 황황히 되돌아가 무슬림 여인이 안고 있던 아이를 내 아이, 라며 끌어당긴다. 주저하다 슬픈 눈으로 아이를 놓는 여인, 아이를 품에 안고 걸어나가는 나왈, 품에 안긴 채 엄마를 보며 절규하는 아이. 아이는 발버둥치다 결국 나왈에 품에서 벗어나 버스로 달려간다. 그 아이를 총으로 쏘는 민병대원. 그리고 나왈, 주저앉아 멍한 표정을 짓는 나왈. 영상의 강렬한 인상을 글로 담아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기만 하다. 모두가 떠나고 황량한 벌판에 홀로 주저앉아 저런 표정을 짓는 나왈을 보고,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그녀가 앞으로 겪게 될 비극의 시발점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밀도 있는 각본과 연출이 큰 공을 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영상이 훌륭했다. 모래폭풍이 영상 전체를 뒤덮은 듯, 영상을 손으로 쓸면 뿌연 먼지가 조금 묻어날 듯한 영상미였다. 중동의 느낌, 몸을 사로잡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아, 이토록 그을린 운명, 그을린 사랑이 또 있을까. 역사가 빚은, 세상이 태워버린 너무나도 안타까운 약속에 관한, 사랑에 관한 영화. 이동진 평론가는 이 영화를 두고 그리스 비극이 떠오른다고 했다. 비극. 나왈의 삶은 그 자체로 비극이었다. 혼자 감당했다고 짐작조차 하기 힘든 비극적인 비극. 그녀는 위대한 여인이었다. 비극을 견뎌내고, 비극을 승화시킨 사랑의 여인이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김기덕 감독의 영화.







이런 영화를 만들어야지, 하고 얼마전부터 생각해오던 게 있었다. 스토리보다는 촬영 구도나 연출 등에 초점에 맞춰진 생각이었다. 멋진 영화가 만들어질 것 같다고 혼자 즐거워하곤 했는데, 오늘 기대가 와장창 깨졌다. 김기덕 감독 때문이었다. 얼마전 고전문학 수업 중 교수님께서 김영임 명창이 부른 정선 아리랑을 틀어주셨다. 나는 시큰둥한 마음으로 그걸 듣다가 김영임 명창이 아리랑을 내지르는 부분에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속에서 폭죽이 터져 그 연기가 밖으로 배출된 것이었다. 기숙사에 와서도 정선 아리랑을 계속 들었다. 김기덕 감독이 영화에서 이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오늘에서야 영화를 보게 되었다. 웬걸, 내가 생각해오던 장면들이 영화에 모조리 담겨 있었다. 좌우대칭적인 구도, 한 곳을 오래 응시하는 카메라, 롱샷과 클로즈샷의 사용, 모든 것이 내 상상 속의, 기대 속에서만 품고 있던 것들이었다. 나는 내 것을 빼앗긴 듯 억울하면서도 영화의 훌륭함에 감탄했다. 내 생각이 이런 영화로 발현될 수 있다는 건 꽤 기분 좋은 일이었다.


임권택의 [서편제]가 한국적인 영화였다면 이것은 동양적인 영화이다. [서편제]보다 더 한국적인 영화라고도 할 수 있겠다. 영화의 장면은 오로지 단 한 곳, 저수지 위를 부유하는 절에서만 이어진다. 절과, 절을 둘러싸고 있는 산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인물도 최소한이다. 노스님과 그 아래서 수행하는 승, 여자 이외의 몇몇뿐이다. 화선지 위에 잎을 내리는 난처럼 유려한 이야기이면서 아름답게 침묵을 지킬 줄 아는 영화이다. 때로 그 여백이 지나치게 아름다워 심장을 벨 듯 날카롭게 다가올 때도 있다. 누군가 이창동을 작가라고 말했고 김기덕을 화가라고 표현했다. 김기덕의 작품을 아직 둘밖에는 보지 못했지만 이 작품으로 나는 이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박찬욱의 영상이 화려하다면 김기덕의 영상은 묵직하다. 묵직하게 눈으로 기어들어와 마음에 큰 파동을 주고서야 배출된다. 고양이의 꼬리를 붓 삼아 반야심경을 써내려가는 노스님과 그것을 칼로 파내는 승의 모습은 놀라운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김기덕 감독은 할당된 두 시간으로 완벽하게 인생이라는 것을 그려냈다. 산다는 건, 그래, 이런 거라고 나직하게 들려준다. 좀더 인생을 더 살아낸 뒤에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되면 그때의 느낌은 어떠할까. 지금처럼 여운에 젖어 감상적으로만 영화를 바라보지는 않을 것 같다. 가슴을 움켜쥐고는 그 승의 인생에 공감하고 있지 않을까. 산다는 건, 그래, 그런 거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고백하고 있지 않을까. 그때의 울림은 돌멩이가 전하는 파동이 아니라 바윗덩이가 만들어내는 커다란 떨림이겠지. 몸 속 군데군데로 침투하는 떨림의 파도를 그때는 느껴볼 수 있지 않을까.




이제, 아니 쭉 밤이었다. 영화를 찍으려는 사람을 두고 소설을 써볼까 한다. 그를 어떻게 만나야 할까. 




그가 다가와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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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5-10-29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소이진님 보면 소이진님이 떠올라야 하는데 자꾸 변요한이 떠올라가지고.. 그런데 이상하게 육룡이 나르샤에 땅새가 나오면 또 우와..잘생겼다..하면서 소이진님이 떠오르고..^^ 가끔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아요. 분명 미생볼 때는 안 그랬는데...

소이진님, 어디야, 나와라, 오바. 빨리 나와..처들어간다..

보슬비 2015-10-29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변요한 하면 소이진 생각하는 사람. 저도 추가요...^^
 
어느 시인의 죽음 - 자전적 에세이, 단편소설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지음, 안정효 옮김 / 까치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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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린의 산문집을 읽은 적이 있다. 장석주의 추천사를 읽은 것이 계기였다. 수시 접수가 모두 끝나 수능을 앞둔 시기에 산문집의 첫 장을 펼쳤다. 어려운 어휘와 낯선 문장, 집결되지 않는 내용에 나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한 번도 접해보지 못했던 이국땅의 묘사를 눈앞에 그려내기 힘들었고 전혜린이라는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마치 그림을 보듯 글자를 읽어 내려가기 일쑤였고 책 자체도 지루하다고 판단해서 독서를 중지했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는데, 책의 글귀들은 물론 인터넷에서 일별한 전혜린의 흑백 사진까지 자꾸 떠오른다는 것이다. 이 기묘한 현상에 이끌려 수능을 치르고 나서 산문집을 다시 읽었다. 그렇게 하여 내가 내린 전혜린에 관한 결론은 그녀가 천재가 맞다는 것이다. 천재란 누구를 칭하는 단어인가. 아무도 풀지 못한 수학 문제를 몇 분 만에 풀어내는 사람 혹은 아인슈타인처럼 세계의 사고를 바꾸어 놓을 과학적 발견을 성취한 사람이 천재인가. 아니다. 그들은 그저 수재일 뿐이다. 천재는, 좁게 말해, 문학에서의 천재는 깨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에, 문학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깨어 있는 자가 천재인 것이다. 전혜린은 세 가지 요건 중 특히 마지막에 충실했던 자였다. 갇혀 있지 않고 외국으로, 이국으로 자꾸만 떠나는 그녀는 떠나는 이유를 떠나기 위해서라고 밝힌다. 독일 청년들의 패기, 오만한 젊음, 순수한 정신을 부러워하는 마음과 알프스에 올라 둥근 달을 보며 경탄을 표하는 감성. 그녀의 이상적인 뜨거움과 열정은 가히 아름답다. 사실 그녀의 글이 다듬어져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녀의 글이 가치 있는 이유는 이상과 감각에 솔직하기 때문이다. 가감 없이 감정을 글로 풀어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고 있기에 그녀가 더욱 멋있어 보인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산문집을 읽으며 전혜린에게서 느꼈던 것을 다시 겪게 될 줄은 몰랐다. 아니 나는 이 산문집을 읽으려는 계획조차 세우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내게 완전히 생소한 작품은 아니었는데, 한강 덕분이다. 한강은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기획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서재와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끝에 그녀 인생의 책 몇 권을 소개했다. 도스토예프스키나 임철우 등의 저명한 작가를 꼽던 그녀는 외국인 남자의 얼굴이 크게 인쇄된 책 한 권을 들어 보이며 나직하게 이야기했다. 매력이 있는 작품이구나, 하고 넘겼던 기억뿐이다. 한강이 인상적이었던 대목으로 꼽은 장면만은 오래 남아 있었는데 이 때문에 이 책을 과제 도서로 만났을 때 꽤 기뻤다. 그리고 그 때문에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크게 실망하기도 했다. 파스테르나크의 글은 몹시 어려웠다. 번역된 지 오래 되어 글이 딱딱하기도 했고 파스테르나크가 읊조리는 이야기들이 생소한 탓도 컸다. 문장 자체는 상당히 유려하면서 생생했으나 묘사 위주의 스타일에 애를 먹었다. 나는 감정선을 따라 글을 읽어내는 데 익숙해 있기에 묘사적인 글에 취약하다. 즉 파스테르나크의 산문집은 여러모로 내게 불편했고, 이는 전혜린을 처음 접했을 때와 비슷했다. 그래도 과제를 해야 했기에, 라는 형식적인 이유로 억지로 붙들고 읽었더니 난해함이 차츰 걷히며 파스테르나크의 감각이 보이기 시작했다. 검게 죽은 피부 조직에 빨간 점의 핏기가 돌 듯 글이 내게서 살아나고 있음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느 시인의 죽음을 요약하면서 한강은 만남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만큼 이 글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파스테르나크가 만난 사람들이다. 작곡가 스크리아빈,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첫사랑의 여자, 친구 G, 그리고 마야코프스키까지. 파스테르나크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반추하며 순행적으로 자기가 겪어온 기억의 길을 밟아나간다. 한강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나는 만남보다는 이별에 더 눈길을 주었다. 파스테르나크가 이별을 대하는 방식은, 그러니까, 참 아름답다. 파스테르나크가 전혜린과 비슷한 범주의 천재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가 여기 있는 것 같다. 그는 음악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었으나 스크리아빈을 통해 자신이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밤, 파스테르나크는 모스크바의 밤거리를 한참동안 걷고 또 걸으면서 음악과 작별을 고한다. 한강의 표현대로 깨끗한 마음의 움직임, 어떻게 보면 숭고함까지도 드러나는 장면이다. 스크리아빈의 조언을 듣고 그는 독일에 가 철학 공부를 시작한다. 거기서 첫사랑의 여자와 재회해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무턱대고 청혼의 말을 던지지만 작별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헤어지게 된다. 여자를 보내고 돌아오는 기차에서 그는 생각한다. 철학 또한 내 길이 아니구나. 내가 철학이라는 명목으로 하고 있는 것은 문학이구나. 그렇게 그는 첫사랑의 여자와도, 철학과도, 독일과도 이별했다. 독일을 떠나며 그가 한 말이 내 마음을 크게 울렸다. 철학이여 안녕, 젊음이여, 안녕. 독일이여, 안녕. 이처럼 파스테르나크도 이별에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다. 갇혀 있지 않고 자신을 자꾸 돌아보며 더 나은 길을 추구하는 모습. 그 과정에서 비치는 순수하고 깨끗한 감각들.


파스테르나크에게 가장 강렬했던 사람은 미래파 시인이었던 마야코프스키였다. 파스테르나크는 마야코프스키의 단어 하나하나에 감탄했고 정신을 잃을 정도로 열광했다. 삶을 바치고 싶었노라 기술했을 정도로 마야코프스키를 숭배하다시피 대한 것을 보면 애정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천재는 공존할 수 없다는 법칙에 의해 두 사람은 조금씩 어긋난다. 파스테르나크가 마야코프스키에게서 이해하기 힘든 점을 몇 가지 발견하면서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두 개의 개성이 치열하게 맞붙는 동안에도 마야코프스키의 시는 그를 감격하게 했고 그런 의미에서 파스테르나크는 결코 그에게서 분리될 수 없었다. 파스테르나크가 마야코프스키를 탐닉했던 또 다른 이유는 정치성이었다. 마야코프스키는 혁명 시인으로 평가될 만큼 사회 변혁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고 파스테르나크는 그것을 두려워했다. 이는 파스테르나크가 마야코프스키를 우러러보는 이유가 되기도 했으며 그 반대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들의 관계는 마야코프스키의 권총 자살로 끝난다.


파스테르나크에게 이별은 슬픔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절망이었다. 파스테르나크는 절망에 잠식하지 않고 그것을 글로 승화했다. 시적이면서도 유려한 글은 파스테르나크의 마음이 이리저리 흐르는 듯 느껴진다. 파스테르나크에게 이러한 수식어를 붙여주고 싶다. 절망을 노래한 작가. 거창한가? 아니, 적당하다.


마지막으로, 파스테르나크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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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E-9 2015-08-28 0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왕! 소이진님이다!! 어찌나 반가운지 선댓글 후감상 하게 되네요^^ 잘 지내죠?
파스테르나크에게서 왠지 오도가도 못하는 우울한 지식인의 초상이 엿보이는 것 같네요.
(첫줄과 뒷줄의 시차는 리뷰를 읽은 시간만큼 있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아이리시스 2015-10-29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응, 뒤늦게 와서..알겠..저도 이 책 읽어보겠습니다! (손 번쩍!)
아.....................학교는 어때요, 잘지내는 거죠?^^

사랑이 2016-08-27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어본에 이어 최근에 러시아본 번역《안전 통행증. 사람들과 상황》이 나왔다. 모르고들있는걸까?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438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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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글을 읽는 데에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한강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곧 마음의 흔들림을 뜻하기 때문이다. 소설에 있어서 글을 이끌어나가는 주체는 대부분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흐름이 주가 되어 소설은 크게 굴곡지거나 평탄하거나 하는 다양한 형태를 띤다. 한강에게 있어 주는 감정이다. 혹은 감각. 한강의 글에 유독 이탤릭체의 독백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강의 인물들은 하나 같이 어두운 사람이다. 지병을 가지고 있거나 몸이 허약하거나 그도 아니면 정신적으로 스트레스가 많은 사람이다. 이들에게 삶은 견디기 힘들 정도의 무게를 가진다. 척추가 바닥까지 닿을 정도로 휘어진 채 한강의 인물들은 한 발 한 발 힘겹게 나아간다(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아간다, 이지만 지금은 힘겹게, 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겠다). 전술했다시피 한강은 이들의 내면의 흐름을 좇아 글을 써내려간다. 이들의 행보보다는 내면과 독백, 회상과 깨달음에 집중하기에 한강의 글에서는 인간의 감정들이 뚝뚝 묻어난다. 거대한 고통에 맞닥뜨려 고뇌하고 사념하는 인물들의 사유(思流)를 따라가는 것은 독자에게조차 힘겨운 나락에 빠진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그들의 소리 없는 절규를 읽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한강의 글을 읽음이 곧 마음의 흔들림이라는 말의 연유는 이것이다.


따라서 한강을 분석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것은 인물들이다. 한강의 인물들을 정의해본 적이 있다. 갓 태어난 어린 새의 팔딱팔딱 뛰는 심장 같은 사람들,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광원을 감싸고 있는 유리막, 그 유리막을 그려낸다면 바로 한강의 인물들이라고 끼적인 기억이 난다. 한강의 인물들은 병들고 허약한 사람들이니만큼 연약하다. 삶의 무게를 견디는 것만으로도 힘겹고 지쳐 도무지 다른 것에는 신경 쓰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지만 삶은 결코 그들의 소망처럼 쉽지 않다. 부닥친 사건을 견뎌내는 사이 그들은 생기를 잃고 야위어간다. 손으로 움켜쥐면 곧바로 터질 듯 약한 아기새의 심장처럼, 스치기만 해도 상처를 입을 얇디얇은 유리막처럼. 이렇게 소설을 끝내었다면 평론가들은 한강을 허무주의자의 허세쯤으로 취급해 하대했을 것이고 독자들은 꺼림칙하다는 이유로 관심을 거두었을 것이다. 한강의 인물들은 자신을 짓누르고 앞을 가로막은 삶에 투쟁한다. 김수영의 풀처럼 쓰러지고 짓밟혀도 일어난다. 당장의 부족한 월세 때문에 전전긍긍하면서도, 세면대의 컵을 들어 올리지 못할 정도로 허약해져 있으면서도 그들은 삶에 대한 의지를 주장한다. “살려고 그렇게 몸부림을(한강, 바람이 분다, 가라)” 치고 아등바등 살(같은 책)”아간다. 삶이 무엇이기에 그들은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쟁취하려고 하는 것일까. 한강의 소설들은 이에 관한 질문의 제출과 자답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쯤 되면 우리는 아등바등 살아가는 주체가 한강의 인물들이 아닌 바로 한강 자신임을 알아챌 수 있다. 한강이 그려내는 비슷한 이미지의 여성들은 한강 자신과 놀랍도록 일치하는 면이 많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한강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는 개성론의 시로 거론할 수 있다. 개성론이란 작가와 시적 화자가 일치하는 경우를 일컫는데 고백적이며 자전적인 성격을 띤다. 한강의 이 첫 시집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시집이 개성론의 성격을 가진다는 사실에 동의할 것이다. 한강의 소설에서 늘 보였던 연약하지만 투쟁하려는 사람들의 모습, 즉 작가 자신의 형체가 시에서도 드러난다. 자화상. 2000. 겨울이라는 시로써 이 시집의 시적 화자들은 곧 작가 한강을 투영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시집은 총 5부로 나뉘어 있는데, 각 부를 관통하는 큰 주제는 인간 존재에 관한 성찰이다. 한강에게 인간이란 살아감의 고통을 안고 있는 생물이다. 살아가는 것은 언제나 아프고 고통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만 하는, 살아가면서 의미를 얻는 존재로 인식된다. 고로 시집의 화자들은 하나같이 삶의 고통을 노래한다. “그렇게 부서지고도”(피 흐르는 눈 3) 살아 있다는 사실에 절망하며 차라리 담벼락 밑에 뒹구는 돌멩이나 사물, 죽어 해골이 되기를 소망한다. 인간 존재의 근원적 고통을 끌어올리며 한강은 어떤 칼로도 연마되지 않는 원석과 같”(몇 개의 이야기 12)은 단단한 슬픔을 적어낸다.


살아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환멸이지만, 특히 한강은 언어적 고통에 마음을 쓰는 듯 보인다.

 


나에게

혀와 입술이 있다


 

그걸 견디기 어려울 때가 있다.


 

―「해부극장 2부분


 

이 시의 화자는 자기가 선천적으로 소유한 혀와 입술을 혐오한다. 화자는 혀와 입술에서 발화되는 말, 즉 언어에 대한 불신을 품고 있다. 인간의 고통은 어쩌면 최초의 언어에서 기원한 것일지도 모른다. 언어가 창조되고 제대로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사고하게 되었고 여기에서 고통이 발아한 것이다. 언어 자체에서 드러나는 고통도 있다. 언어란 칼보다 폭력적인 무기가 될 수 있고 가면보다 두터운 가림막이 될 수 있다. 이를 깨달은 화자는 언어를 두려워하는 듯 보인다.


한편, 언어라는 것은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기준이다. 언어를 가졌기에 발생하는 고통은 곧 인간이라는 존재로서 느끼는 고통인 것이다. 인간 존재로서의 고통은 또 어떠한가. 한강은 정확히 시집에서 드러내고 있지 않지만, 추측건대, 그것은 상실로 인한 고통이다. `어느 늦은 저녁 나는에서 화자는 저녁밥을 먹으려다 말고 흰 공기에 당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그때 화자는 무언가 영원히 지나가버린 것을 깨닫는다.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는 그것의 정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지속적인 상실로 인한 마음의 공허와 고독이 고통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우리는 읽어낼 수 있다. 살아간다는 것은 무언가를 영원히 흘려버리거나 지나쳐버리는 행위임으로 인간은 결코 완전해질 수 없고 부족한 상태로 남아 있게 된다. 그러한 불균일의 삶은 인간을 두 동강 내고, 세 동강 내고, 종내에는 조각들로 어긋나게 한다.


그래서 한강은 은연중에 살아간다는 것에서 탈피하고 싶은 욕구를 드러내기도 한다. “, 죽어서 좋았는데 환했는데 솜털처럼 가벼웠는데”(파란 돌)라는 고단한 현실의 삶을 견디다 못한 화자의 하소연은 당연한 순서일 것이다. 그러나 이때 한강은 한 가지 놀라운 법칙을 발견한다.


 

십 년 전 꿈에서 본

파란 돌

아직 그 냇물 아래 있을까


 

()


 

나도 모르게 팔 뻗어 줍고 싶었지

그때 알았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그때 처음 아팠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파란 돌부분


 

죽어서 본 예쁜 파란 돌을 줍기 위해선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죽음의 홀가분함은 실체가 없으며 아름다움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 결국 인간이란 살아가면서 인간으로서의 가치와 의미를 얻고, 살아가면서 아름다움을 만질 수 있는 존재라는 것.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살아내야 하는 것. 가장 환한 것과 가장 어두운 것이 공존할 때에야 인간은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


이때부터 한강은 살아간다는 것에 매력을 느꼈던 것일까. 화자들의 입을 빌려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의지를 표한 것일까. 아니, 어쩌면 그 꿈으로 인해 한강은 죽음에서 살아난 것일지도 모른다. 두 번째의 삶, 덤으로서의 삶을 살게된 것일지도 모른다. 긴 제목의 시 이천오년 오월 삼십일, 제주의 봄바다는 햇빛이 반, 물고기 비늘 같은 바람은 소금기를 힘차게 내 몸에 끼얹으며, 이제부터 네 삶은 덤이라고에서 한강의 거듭남을 볼 수 있다. 화자는 살아 있음의 고통을 느끼는 도중 어슴푸레 빛”(피 흐르는 눈 3)나는 살려줘, 라는 말을 떠올리는 것에서 시작하여 점차 삶의 고통을 견디거나 극복하려는 면모를 보인다. 강원래의 공연을 보고 쓴 시 휠체어 댄스의 화자는 눈물도, 악몽도 자신을 좌절시킬 수 없다고 고백하며 삶 앞에 의연한 태도를 드러냈다. 가장 격렬한 투쟁은 조용한 날들 2에 쓰여져 있다.


 

찌르지 말아요 // 짓이기지 말아요


 

1초 만에 / 으스러뜨리지 말아요


 

(하지만 상관없어, 네가 찌르든 부숴뜨리든)


 

그렇게 조금 더

나아갔다


 

―「조용한 날들 2부분(강조는 작가)


 

이 시의 화자는 한강의 모습이 투영된 여성일 테지만 말하고 있는 것은 달팽이다. 비오는 날 창문을 열심히 가로지르는 달팽이는 다가오는 화자에게 부탁의 말을 던진다. 마치 아등바등 살아가는 인간들이 신에게 자비를 구하듯 달팽이는 자신의 안위를 화자에게 강구한다. 주어진 삶, 운명에 구속되어 타자 혹은 초월적 존재에게 의존하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나약한 존재. 그러나 달팽이는 내면의 말을 덧붙인다. “하지만 상관없어. 네가 찌르든 부숴뜨리든.” 투쟁, 달팽이는 극복하여 싸움으로서 한 발 나아갈 수 있었다. 한강이 바라보는 인간 존재 또한 그런 것일까. 삶의 고통에 주저앉지 않고 투쟁할 때 성장할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인 것일까.


인간이 나약한 존재임에는 변화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고통과 투쟁해야 하는가. 한강은 그 방법으로 침묵을 제시한다. 인간의 고통을 잉태하는 혀와 입술을 제거하여 단단한 밀봉”(저녁의 소묘 3유리창)을 배우는 것이 고통을 견뎌내고 고통과 투쟁할 수 있는 방법인 것이다. 언어의 절제로서 고통의 기원을 절단하는 것.


그리고 인간은 고통과 투쟁하기 위해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오래 성찰해야 한다.


한강의 시에는 당신이나와 같은 청자가 종종 등장한다. 이는 한강이 충고의 말을 건네는 특별한 대상처럼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당신이나 는 한강의 운명, 곧 한강 자신이다. 한강의 시들을 결국 자기 자신에게 보내는 메시지였고, 그것은 자기반성이 된다. 자기를 돌아보고 자기를 연구하면서 한강은, 시의 화자들은 살아간다는 것의 본질에 파고들게 된다. 그 경지에서 한강은, 시의 화자들은 희망의 부재를 체화하고 삶이 휘두르는 칼날에 오히려 몸을 내던진다. 이는 인간으로서 고통을 초월한 것으로도 보이지만 작가로서의 사명으로 읽히기도 한다.


한강도 물론 시로 등단한 어엿한 시인이지만 역시 나는 소설을 쓰는 한강이 좋다. 그러나 한강의 시에는 한강의 소설에 조금 부족한 고요와 평온이 있다. “다시 견디기 힘든 달이” (새벽에 들은 노래 3) 떠도 이렇게 한 계절 더 피 흘려도 좋다.”고 읊조리는 한강은 어쩐지 숭고해보이기도 한다. 한강이 이 숭고한 작업을 계속 해주었으면 좋겠다. 아무도 몰래, 천천히, 한 글자씩 써내려가다가 십 몇 년 후, 아무렇지도 않게 묶어 두 번째 시집을 내주었으면 좋겠다. 그때에는 좀더 원숙한 한강의 시를 접할 수 있을까. 삼십 대, 그 반짝일 순간을 기대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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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 2015-08-27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에요! 소이진님의 글은 진짜 감동이에요. 저도 고등학생이 되면 이진님처럼 글을 쓸 수 있게 될 줄 알았는데, 전혀요. 고등학교 들어오고 제대로 된 책을 완독한게 정말 얼마 안되요. 막막하기만 하죠 뭐 즐거운 대학생활 하고 계시길 바라요. 보고싶었어요 이진님 ㅠ
 





사람들은 저마다의 상처를 가지고 살아간다. 어쩌면 사람이란 상처로써 지탱되고 상처가 있으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살아간다는 건 또 다른 상처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고, 다른 상처를 몸 어딘가에 새김으로써 이전에 자신을 괴롭히던 상처를 아물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때론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커다란 상처와 맞닥뜨리기도 한다. 그 상처를 우리 몸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휘게 한다. 마치 식물의 줄기처럼 여리게 줄 서 있는 자그마한 상처들을 짓누르면서 삶의 전진을 더디게 만드는 것이다. ‘다르마 2치료의 사람들은 모두가 삶의 휘어짐을 경험했거나 겪고 있는 자들이다. 그들에게는 삶이 버겁기만 하다. 그들의 상처를 형성한 것은 가까운 이의 죽음이다. 아들이 죽은 후로 꿈에서조차 아들을 만나볼 수 없었다고 고백하며 울음을 터뜨린 여자, 어린 나이의 손자가 살해당하고 그 아이의 어미이자 자신의 딸도 암으로 타계한 노파. 이들의 고통을 달래주는 것은 약물도, 정신과 치료도 아닌 그저 명상이었다. 내쉬고 들이마시는 숨을 코끝으로 혹은 폐로 느끼는 것, 디디고 있는 바닥의 느낌을 발바닥으로 알아채는 것, 그리고 내가 존재하는 것을 깨닫는 것. 얼핏 보기에 하잘것없어 보이는 간단한 행위를 하는 것이 그들에게 놀라운 위로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나는 명상 치료를 받기 위해 방 안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유 모를 동질감을 느꼈다. 한 명 한 명의 얼굴이 낯익었고 그들이 내뱉는 고통의 언어가 가슴에 비수로 꽂히는 듯했다. 사실 내 삶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휘어진 삶이었다. 고통스러워하거나 내색하지는 않지만 얼마간, 남들이 보기에는 상당히 휘어져 있음을 알고 있다. 내가 교회를 다니는 것도 머리 위에 얹힌 짐의 무게를 덜어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확실히 절대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도움이 되었다. 나는 엇나가지도 특별히 바르지도 않은 삶을 살아왔고 그것이 내 휘어짐에 비하면 꽤 준수하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고백건대, 내게 충만하다고 생각했던 믿음이라는 것이 완전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믿음이라는 자체에 대한 부정이 아닌 그것이 내게 수용되었을 때의 완전함을 일컫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의 주인공 싯다르타가 느꼈던 갈증과 같은 것을 나도 느끼고 있었다. 그때 내 정신 언저리를 깨운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었다. 얽매이지 말라는, 모든 존재를 소중히 대하라는 교리를 공부하며 매력을 느꼈던 것 같다. 그토록 배척하던 불교에 호의를 가지기 시작했으니. 불교의 가르침이란 영상에도 나왔듯 시간을 초월하고 현세에도 미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우리의 몸을 이루는 상처 전부는 시간이라는 틀 안에 갇혀 있다. 상처란 곧 과거의 사건으로부터 새겨진,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그려지는 허상에 불과하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자꾸만 앞으로 나아가려고 서두르지 않는다면 우리 삶은 한층 안정되고 편안하다고 불교는 가르치고 있다. 소설 [싯다르타]의 싯다르타가 마지막에 도달한, 시간을 초월하고 자유를 품은 그 깨달음의 상태가 불교의 이상향인 것이다. 우리 삶이 고통과 상처, 휘어짐에서 벗어나 올곧게 서기까지는 아주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동안 누려왔던 것의 일부를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자유의 상태는 달콤할 것이다. 명상 수업이 끝난 후 그들이 눈물로 상처를 씻어내고 포옹으로 따듯함을 나누는 모습에서 나는 큰 위로를 느꼈다. 어쩌면 치유라는 것은 덜어내는 행위가 아닐까. 너를, 우리를, 그리고 나까지도.



















이 순간에 싯다르타는 운명과 싸우기를 그치고 번뇌를 잊었다. 그의 얼굴에는 일체 아욕의 기반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완성을 이루는 경지를 터득한 기쁨의 꽃이 피었다. 거기에는 생기의 강물과 그리고 생명의 흐름과 일체가 되었다는 환희의 꽃이 피어 있었다. 그 얼굴에는 남과도 희노를 같이 할 수 있을뿐더러 흐름에 몸을 맡겨 통일에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청량한 예지의 꽃이 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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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5-05-26 0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싯다르타 너무 좋죠 ㅋ 소이진님 오랜만이에요 수능은 잘 보셨나요라고 묻고 싶지만(?) 이미 대학생이시거나 아니거나 둘 중 하니이기 때문에 굳이 물어 보지는 않겠습니다. ㅋㅋㅋ
전 여전히 공부 중이고 ㅋ 아예 신림동이라는 고시촌에 들어와서 많은 고시생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살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이렇게 글을 올린 걸 보니 참 좋군요 ㅋㅋㅋㅋ 반가워요 ㅋ

페크(pek0501) 2015-05-27 14:57   좋아요 0 | URL
루쉰 님도 오랜만이에요. 고시촌에 계시는군요. 가끔이라도 소식을 접할 수 있길 바랍니다.
반갑습니다.

페크(pek0501) 2015-05-27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이진 님이 이젠 대학생이 되어 있겠군요. 대학 생활은 어떤가요?
곧 여름 방학이 시작되겠군요. 방학이 시작되면 자주 글 올릴 수 있는 거죠?

싯다르타, 저도 오래전 읽었어요. 오늘 이 글을 읽으니 다시 이 책을 들춰 봐야겠단 생각이 드네요.

모든 욕심, 모든 기대. 이런 것들을 내려 놓으면 걱정을 없앨 수 있을 텐데, 쉽지 않네요.
현재에만 집중하기도 쉽지 않아요. 그래도 노력은 하겠습니다.

반가웠어요. 좋은 젊은 시절을 보내시길... ^^

이진 2015-06-21 18:36   좋아요 0 | URL
페크님! 이제 여름 방학이 시작했지만 오히려 방학에 더 바쁘네요.
싯다르타는, 나중에 더 나이가 들어서 한 번 더 읽어봐야할 것 같아요.
아직은 어려운 면이 있어서.
페크님도 시원한 여름보내시길 바랍니다~
 

 

 

 

 

심장 한 켠을 난자하는 잔혹한 사건은 끊일 생각을 않는다. 윤 일병이 사망한 날도 벌써 일 년이 지났다. 무감각하게 관련 기사를 읽어내려가던 나는 어느 구절에서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구타 당하는 병사가 의식을 잃으면 수액까지 맞게 하며 때렸다는 것이다. 심장이 반으로 쪼개지는 듯했다. 기사를 읽어내려가며 나는 정신을 거의 잃었고 마침내는 온몸에 힘이 빠져 잠시 누워 있어야 했다. 윤 일병이 쓰러지기 전에 읍소했던 한 마디가 살려달라, 였다고 한다. 대체 왜. 나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고통을 견디고 또 견뎌야 했을 그가 너무도 억울하고 미안해서 속절없이 손으로 얼굴을 막고 흐느꼈다. 그 사건이 있고 일 년 사이 군 내에서는 무수한 사건사고가 일어났다. 끊임없는 가혹행위, 탈영 후 총기난사를 자행한 임 병장 사건, 그리고 지금의 예비군 총기 사건. 군대에서 일어나는 사망 사고는 늘 어딘가 먹먹하다. 군대란 남자들에게 있어 제대로 된 인생을 꽃피우기 위한 통과의례라고 할 수 있다. 아직 날개 한 번 활짝 펼쳐보지 못한 자들이기에 그들의 죽음은 더 안타깝고 슬프게 들린다. 이번 사건에서 최 씨가 어떤 과정을 통해 이 끔직한 사건을 저지르게 되었는지는 차치하고 가장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무고한 청년들이 또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번에도 아침을 먹으며 대수롭지 않게 기사를 읽었는데 하나의 사실을 깨닫고는 경악하며 숟가락을 놓았다. 중상을 입거나 사망한 이들이 모두 엎드린 채로 최 씨의 총을 맞았다는 점이다. 그들의 등을 겨누는 최 씨의 모습이 뇌리에 번득 그려졌다. 그리고 피와 어둠. 나는 이 상황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을까.


글을 손에서 놓고 지낸 지도 석 달이 가까워간다. 국문과에 오면 질릴 정도로 책을 많이 읽고 하다못해 글을 쓰는 데에 통달하게 될 줄 알았는데 놀라울 정도로 글과 멀어지고 있다. 전공 수업을 두 개 듣는데 국어학과 시창작 수업이 그것이다. 국어학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어렵고 난해해서 일단은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그것을 내가 끝까지 완수해낼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시창작 수업이 내가 고대했던 것인데 그 실상은 무척 실망스럽다. 나는 시창작 수업에 들어가기에 앞서 오래전에 활동했던 합평 카페에 들어가서 예대 선배들이 어떻게 합평을 주고 받았는지를 톺아보았다. 시를 굉장히 잘 쓰는 누나가 한 명 있었고, 그 누나가 날카로우면서도 오류를 정확히 짚어내는 평가를 해주었던 기억이 있어 주로 그를 위주로 시합평의 방법을 내게 주입했다. 그러나 학생들의 시는 전부 내 기대에 못 미쳤다. 실기로 들어온 학생들이 소수인데다 대부분은 글을 한 번도 써보지 않았거나 가까이 하지 않았던 정시생들이었기 때문인지 시의 수준이 썩 좋지는 않았다. 내게 주입한 시합평의 방법으로는 이건 시가 아니다, 갖다 버려, 라고 외치고 싶을 정도로 한심하게 느껴진 적이 많았다. 나도 관념적인 시를 쓰기 때문에 학생들의 관념적인 부분을 건드리는 것에는 너그럽지만 그들의 시는 내 아량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4주 정도 지났을까 나는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조차 괴로웠다. 마음 같아서는 이건 아니다, 이건 쳐내라, 하고 쏘아주고 싶지만 주위에서는 다들 따듯한 말씨로 조곤조곤하게 합평을 진행하고 있었고 내 주제에 다른 이의 시를 주무른다는 것도 학생에 대한, 시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느껴졌다. 결국 나는 끓어오르는 마음을 억누르며 최대한 장점 위주로 쏟아내듯 비평을 건네곤 했는데, 도무지 읽어줄 수도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시에는 눈길조차 줄 수 없었다. 그런 시가 지금껏 두 편 있었다.

 

시창작 수업에서 나는 첫 주 차 발표를 맡았고 그걸 끝내고 나니 한가로워졌다. 다른 수업도 널널한 편이어서 여가 시간이 상당해졌는데 나는 그 시간을 허투루 보내왔다. 게다가 공강일도 이틀이나 되어서 휴일이 나흘이나 된다. 엄청난 시간이 주어졌음에도 효과적으로 쓰지 못한 것이다. 도서관이 기숙사 바로 옆에 있는데 자주 나가지 않았고 책을 한 무더기나 싸들고 왔지만 몇 번 펴보지 않았다. 대신 내가 열중한 것은 영화였다. 어느 때였던가 나는 영화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되짚어 보건대, 지적 자존심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와 함께 지내던 방짝 친구가 영화를 무척 좋아했기 때문에 하교 후에는 으레 영화를 보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나는 친구가 본 영화 편수를 넘어서고자 했다. 알량한 자존심이었다. 나는 어떠한 분야에서 남들보다 조예가 깊고자 하는 사람인데 그 대상이 그전까지는 책이었다면 책에서 영화로 옮겨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하고자 하는 욕구만 충만하지 제대로 미치지는 못하여서 그저 말로만 영화 너무 좋아! 하고 내뱉기 일쑤였다. 그러다 수첩을 하나 사서 영화 노트라고 이름 붙이고 거기에 본 영화를 혼자만의 별점을 달아 기록하기 시작하면서 영화 보기에 본격적인 흥미를 붙였다. 작년 12월부터 입때껏 본 영화가 90편에 달하는데 언제 이만큼 봤지 싶으면서도 내심 아쉬웠다. 좀더 미치도록 볼 수 있었을 텐데, 더 열중할 수 있었을 텐데. 내 열의의 한계를 눈으로 목격한 것 같아서 미웠다.

 

 

 

 

가장 최근에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울음을 비오듯 쏟아냈다. 보통 영화를 보고 흘리는 눈물은 한시적에 불과한데 나는 이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한참동안 멈추지 않는 울음 때문에 마음이 괴로웠다. 마침 룸메이트도 나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속죄하는 마음으로 엉엉 울었다. 나중에는 마츠코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조차 마음이 아려 생각을 접어버리고 침대에 누웠다. 나는 분명히 마츠코의 일생에 대해 잘못을 범한 사람이고 그에 대한 죄책감을 항상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창과 입시 준비를 할 때 한 남자 아이에 관한 이야기를 구상한 적이 있었다. 주마다 다른 주제를 두고 글을 썼는데 그 주의 주제는 사진을 보고 그 사진에 맞게 이야기를 꾸리는 것이었다. 담당자가 내어 놓은 사진은 몽환적인 느낌이 물씬한 사진이었다. 푸른 빛깔이 사진을 덮고 있었고 중앙에 놓인 푸른 침대 위에 남자 아이가 누워 있었다. 아이는 너무 하얘서 푸른 빛이 났다. 침대 주위로 금붕어가 몇 마리 부유하고 있었다. 마치 그 공간이 어항 속인 듯했다. 나는 속에서 푸르게 누워 있는 아이에게 눈길이 갔다. 그 아이가 시리도록 푸르러서 그 아이를 정말 시리게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내가 꾸린 이야기는 남자 아이를 불행의 극치까지 몰아붙이는 것이었다. 늘 그랬듯 남자 아이는 성소수자였고 그 사실을 고백한 후 아버지와 의절하게 된다. 아이의 어머니는 이미 어릴 적 죽었고 아버지는 폭력적인 사람이었다. 아이는 고등학교 때 친구에게서 이상한 감정을 느낀 후로 성정체성을 확신하게 되었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크게 마음을 쓰지 않았었다. 집에서 쫓겨난 아이는 갈 곳이 없어지자 자연스럽게 사창가로 흘러들게 되었다. 피부가 푸르게 하얬던 아이는 한 창부에 눈에 들어 남창으로 활동하게 된다. 작은 체구였던 아이는 오랜 기간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푸르게 하얬던 아이의 몸은 갈수록 푸르게 물들었다. 그 뒤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아이에 관한 소설은 결국 쓰지 못했지만 아이의 잔상은 자꾸만 남아 나를 쿡쿡 찔러댄다. 푸른 멍자국과 물이 가득 고인 눈동자가 두개골 어딘가에 갇혀 증발하지 못한 채 나를 덮고 있다. 이 아이의 삶을 내가 망쳤다는 생각에, 내가 무슨 권리로 이 아이를 비참으로 몰아세운 것인가, 하는 자책감에 나는 불행한 사람을 보면 죄송함에 눈물만을 흘린다. 테스가 그랬고, 마츠코가 그랬다. 테스, 오 테스. 테스의 삶을 하나의 단어로 정의해야 한다면 그것은 물론 비통일 것이다. 테스의 삶은 하나의 비극이다. 테스는 사랑했지만 사랑 때문에 죽은 여자다. 아버지의 말을 죽인 후로 테스의 삶은 꼬이기 시작했다. 가정부로 일을 나간 집의 아들에게 처녀성을 빼앗긴 뒤, 그녀는 에인젤이라는 남자를 사랑했지만 정조를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버림받았다. 그러나 테스는 에인젤을 잊지 못했고 에인젤 또한 그녀의 마음을 뒤늦게서야 깨달았지만 그 때문에 테스는 자신의 처녀성을 빼앗은 남자를 죽이게 된다. 테스의 가혹한 삶은 처형으로 종지부를 찍는다. 마츠코의 삶은 테스와 얼마나 닮아 있는가. 그토록 사람을 사랑했지만 결국 그녀를 사랑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가 의지하고 사랑했던 사람들은 그녀의 헌신을 이용하거나 짓밟기 일쑤였다. 친구로서 사랑을 주었던 이들은 그녀를 이해해주지 못했고 마츠코는 외로움에 찌들어 갔다. 여러 남자에게 차이고 구타 당하는 마츠코의 비참한 모습만으로도 족할 텐데, 감독은 재기하려는 마츠코의 가련한 싹까지 쥐어뜯어버린다. 마츠코의 죽음은 서럽다. 분하다. 이렇게까지 마츠코를 짓눌러야 하는가. 이렇게까지 마츠코를 밀어붙여야 하는가. 



여수, 그 앞바다의 녹슨 철선들은 지금도 상처 입은 목소리로 울부짖어 대고 있을 것이다. 여수만의 서늘한 해류는 멍든 속살 같은 푸릇푸릇한 섬들과 몸 섞으며 굽이돌고 있을 것이다. 저무는 선착장마다 주황빛 알전구들이 밝혀질 것이다. 부두 가건물 사이로 검붉은 노을이 불타오를 것이다. 찝찔한 바닷바람은 격렬하게 우산을 까뒤집고 여자들의 치마를, 머리칼을 솟구치게 할 것이다. 얼마만큼 왔을까. 통곡하는 여자의 눈에서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은 빗물이 객실 차창에 여러 줄기의 빗금을 내리긋고 있었다. 간간이 벼락이 빛났다. 무엇인가를 연달아 부수고 무너뜨리는 듯한 기차 바퀴 소리, 누군가의 가슴이 찢어지고 그것이 영원히 아물지 않는 것 같은 빗소리가 아련한 뇌성을 삼켰다. 음산한 하늘 아래 나무들은 비바람에 뿌리 뽑히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젖은 줄기와 가지가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휘어졌다. 노랗고 붉게 탈색된 낙엽들이 무수한 불티처럼 바람 부는 방향으로 흩날렸다. 조금 큰 활엽수들은 의연하게, 줄기가 여린 묘목들과 갈대 숲은 송두리째 제 몸을 고통에 바치며 흔들리고 있었다. 그들도, 그들의 뿌리를 움켜 안은 대지도 놀라운 힘으로 인내하고 있었다. 무수한 보릿잎 같은 빗자국들이 차창과 내 충혈된 눈을 할퀴었다.




자투리 시간에 도서관에 가 한강의 책을 집어 들었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자연스럽게 책을 꺼내어 자리를 잡았다. 한강의 소설은 어떠한 적막이 인물들을 짓누르고 있는 듯 답답한 느낌을 주는데 이 작품은 특히 그렇다. 이 적막한 중편 소설을 읽는 데에 굉장한 시간이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읽어내는 데에 든 시간보다 첫 장을 넘기기까지의 시간이 길었다. 첫 구절부터 감정 소모가 상당했기 때문에 나는 자신이 없었다. 겨우 읽어낸 소설은, 역시 아팠다. 두 여자의 이야기를 읽어가는 동안 나는 내가 예민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자흔을 신경질적으로 대하는 정선처럼 나는 이 소설을 히스테릭하게 읽어내고 있었다. 이것은 경험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데 나는 이 경험이 불쾌하게 느껴졌다. 따라서 나는 이 소설에 대한 감상을 심장 저편 어딘가에 꽁꽁 숨겨두었으나 다시 읽으며 그것이 혈관 위로 떠오르는 것을 알아차렸다. 불쾌와 적막이 묵직하게 가슴이 마쳐 연거푸 한숨을 내쉬지 않고선 책장을 넘기기 힘들었다. 자흔은 한강이 추구하는 여성상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한강의 인물들이 대체적으로 불쾌하게 그려지는 반면 자흔은 발랄하고 여리다. 여름이 가까워 오는 날씨에 두꺼운 코트를 입고 짐보따리를 가득 들고서도 온화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자흔은 그럼에도 자전거와 부딪히는 사고가 있었을 때 고통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강경함을 지니고 있다. 아기새의 모습 같다. 나는 언젠가 한강의 장편 소설을 감상하며 한강의 인물들은 아기 새 같다고 표현한 적이 있는데 자흔이 이를 대표한다. 여리지만 생에 관한 한 누구보다도 강직한. 때문에 자흔이 정선에게 내민 손길이 거절당했을 때 나또한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자흔이 받아냈을 상처의 무게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갔기 때문에.


결국 자흔은 떠나고 정선은 혼자 남는다. 자흔은 여수로 떠났을 것이다. 정선 또한 여수로 향했다.


두 여인이 만났을까. 소망컨대, 두 여인이 만났으면 좋겠다. 그러나 만나지 않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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