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시선(The way he looks, 2014)'_다니엘 리베이로 作 


  여름이 끝나가는 오후, 창문으로 햇볕이 밀려온다. 방 안 가득 벨 앤 세바스찬의 건반 소리가 울린다. 명랑한 연주에 맞춰 몸을 일으킨다. 온몸으로 햇살을 받으며 팔을 젓고 고개를 까닥인다. 눈을 지그시 감고 음악에, 나른한 공기에 몸을 맡긴다. 가만히 앉아 손가락만 두드리다가도 문득 일어나 마주 선다. 서로 어깨를 맞잡고 쑥스러운 듯 조심스럽게 상체를 흔든다. 발을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호흡을 맞춘다. 눈부시게 노란 햇빛이 사이의 공간을 메운다. 싱그러운 웃음이 따스한 기류를 타고 전달된다. 한 발, 한 발 서로에게 가까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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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은 서서히 피어난다. 꽃잎이 벌어져 만개하는 속도만큼,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의 시간만큼 느리고 조용하게 색을 입는다. 이제는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은, 무심코 넘어간 수많은 사건들은 켜켜이 쌓여 마음의 뼈대를 이룬다. 가령 이런 시가 있다. “너와 나와는 / 그 무심한 스침이 빚어놓은 / 순간의 꽃이기 때문이다 (복효근, ‘순간의 꽃’ 中)” 눈이 마주치는 찰나, 짧은 대화에서 전해온 목소리의 공명, 우연히 스친 옷깃에서 전해지는 옅은 비누 향. 무심히 스쳐가는 사소한 만남, 예사로운 순간들은 몰래 숨어들어 피부 아래 스민다.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무럭무럭 자라 마음을 피워낸다.

  언제부터 너를 좋아하게 되었지? 되짚어보면 명징하게 떠오르는 장면도, 뚜렷한 계기가 되었던 순간도 없다. 그저 어느 밤, 문득 깨달았을 뿐이다. 창문턱에 앉아 물끄러미 바깥을 바라보다, 침대에 누워 천장의 무늬를 눈으로 쫓다가, 친구에게 전화로 무엇인가 하소연을 늘어놓다, 그러다 발견한다. 선연한 빛으로 구석진 데 피어 있는 그 마음을. 그 순간 꽃은 머금고 있던 씨앗을 한껏 터뜨린다. 혈관을 타고 퍼져나간 씨앗은 가슴 언저리를 지나 손끝까지 자리를 잡고 움을 틔운다. 마음은 서서히 피어나지만, 무엇보다도 급격하게 몸 전체를 장악한다. 가령 이런 구절.

 
그 목소리에 처음 가슴이 두근거린 게 언제인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처음 당신을 사랑하게 된 것이 언제인지도 구별할 수 없습니다. 언젠가부터 당신의 얼굴이 내 눈앞 어딘가에 어렴풋한 그림자처럼 자리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 이미 모든 사물 위로 아련히 어려 있고, 놀라 눈을 감으면 어두운 눈꺼풀 위로 더욱 선명해졌습니다. 
(한강, 「파란 돌」 中)


  레오가 피어난 마음을 알아차렸을 때 이미 그것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단단히 굳어 있는 마음을 경작하고 씨앗을 심은 것은 역시 무심하고 무수한 스침이었다. 앞뒤로 앉게 된 우연과 지우개를 빌린 기회로 물꼬를 튼 관계는 시간에 빗금을 그으며 만남을 쌓았다. 시각장애인과 전학생, 달리 발붙일 데가 없던 두 사람은 절로 가까워졌다. 별이 서로에게 빛을 향해 별자리를 만들 듯, 나무가 서로에게 뿌리를 뻗어 숲을 형성하듯 둘의 결핍과 공허는 서로를 응시하는 시선, 그 위에 핀 순간의 꽃으로 채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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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이 보이지 않는 레오는 맹목적인 연민과 배려를 원하지 않았다. 가시거리에 놓여 있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부모님에게 염증을 느끼고 화를 내기도 한다. 다만 원하는 것은 보호도, 자기를 완전히 지탱할 기둥도 아닌 적당한 방임과 자유의지였다. 자기를 평범하게 대해주는 것이었다. 자기를 완전히 파악하고 있는 오랜 단짝 지오바나가 아닌 어수룩하고 낯선 가브리엘에게 마음의 터를 내어놓은 것은 어쩌면 그것이 진정 레오가 원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앉아 있는 것이 싫어 의자를 뒤로 젖혀 위태롭게 버티는 것을 좋아하는, 때로 턱에 걸려 넘어지는 위험마저도 겪어보고 싶은, 외국으로 멀리 떠나는 것이 두렵지 않은 당찬 마음을 억누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브리엘은 넌지시 다가와 레오의 문을 두드린다. 보지 못하는 레오를 영화관에 데려가 직접 내용을 설명해주고, 레오의 권유에 못 이겨 점자를 배운다. 음악을 틀고 춤추는 법을 알려준다. 마침내는 두 사람, 새벽에 몰래 집을 빠져나와 월식을 보러간다. 야트막한 언덕에서 가브리엘은 바닥에 누워 하늘을 보고 레오는 가브리엘을 본다. 밤은 차갑고 마음은 깊다. 그러다 발견하게 된다. 자기에게도 피어 있던 군락을. 막을 수 없는 개화(開花)의 연속을.

  그러나 매화의 향기가 결코 지독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 마음도 고약하거나 답답하지 않다. 오히려 그들의 시선은 더 풋풋해진다. 늦은 밤 무턱대고 입술을 갖다 대고는 한동안 말을 붙이지 못하는 쑥스러움, 벗어 놓은 옷가지의 냄새를 맡으며 수음하는 내밀한 흥분, 보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옷을 벗을 때 고개를 돌리는 존중. 너무도 깨끗한 빛으로, 순수한 열망으로 두 꽃무리는 서로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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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아, 왜 몰랐던가 / 당신이 와서야 비로소 만개할 수 있는 것 / 주지 못해 고통스러운 그것이 바로 / 사랑이라는 것을 (이정하, ‘꽃잎의 사랑’ 中)

  사랑은 서서히 피어난다.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친 꽃이 걸어온 길에 한 아름 쌓여 있다. 더는 휘청거릴 것이 없는 때, 뒤로 걸으며 시든 잎을 주워본다. 각인처럼 남아 있는 그의 시선을 손결로 쓸어본다. 이 밤도 무심히 스쳐 보낸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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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Weekend, 2011)'_앤드류 헤이 作


Spark 1.[명사] 불꽃, 기폭제
           2.[명사] 건강하고 명랑한 남자
멋진 젊은이
           3.[동사] 구애하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을, 나는 그 사람과 대화하면서 느끼곤 한다. 돌아보면 어렴풋이 남아 있는 첫사랑의 기억은 모두 그와 나눈 대화뿐이다. 갓 말리고 와 붕 떠 있는 머리카락을 두고 놀리듯 웃어댔던 어느 주말의 오전과 늦도록 도서관에서 시험공부를 끝내고 주황색 가로등 아래를 두런두런 하잘것없는 말로 채웠던 밤, 그 끝 그의 집 앞 자그마한 다리에서 끊어질 듯 한 시간이 넘게 이어가던 대화가 아직 귓가에 울리는 것 같다. 이제는 시간의 무게를 덧입어 애틋하게 다가오지만 당시에는 설레고 조금은 긴장도 되며, 위태롭기도 했다. 혹시 실수하지는 않을까, 내 말이 거슬리지는 않을까 염려하며 다음 말을 조심스레 골랐던 마음이 우리의 대화를, 관계를 더욱 깊게 만들었으리라.

  사랑은 어쩌면 주고받는 대화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격정적인 섹스보다는 관계가 끝나고 침대에 누워 맥없이 늘어놓는 이야기에 더 이끌릴지 모른다. 인적 없는 골목길에서 거칠게 입술을 맞부딪히는 것보다 고요를 깨뜨리며 한 발 한 발 내딛는 것이 더 빠르게 사랑을 피워낼지 모른다. 말은 곧 생각을 담아내고 감정을 전달하는 일종의 호소이다. 타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우리는 그의 마음을 한 겹 한 겹 들여다보게 된다. 그토록 농밀하고 내밀한 감정의 교류는 다른 어떠한 것으로도 재현하지 못하고, 도달할 수도 없다. 따라서 대화는 때에 따라 시각적 포르노그래피보다 선정적일 수 있고, 서로에 대한 완전한 탐닉으로 사람을 유혹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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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명의 남자가 있다. 러셀 글렌. 늦은 밤 게이바(Gay Bar)에서 만난 둘은 짐짓 서로의 마음을 떠보다 결국 관계를 가지게 된다. 원 나잇 스탠드(One-night Stand). 당장의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다른 요소를 완전히 배제하고 육체적 관계를 나누는 행위. 여기에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다. 한 번의 만남은 한 번으로 끝낼 것. 번호를 교환하거나 먼저 연락하는 것은 구차하고 지질하게 여겨진다. 쾌락을 위해 조성된 일시적이고 인조적인 시공간, 두 사람이 거할 수밖에 없는 좁은 공간이다. 문란하고 도착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이 행위는 실은 거의 유일한 만남과 교류의 수단일 수 있다.

  하룻밤의 정사와 아침의 커피 한 잔으로 가볍게 끝날 수 있던 이들 관계는 글렌이 녹음기를 꺼내들면서 상황을 달리하게 된다. 그는 러셀에게 섹스의 대가로 어젯밤부터 지금까지의 일, 정확히는 두 사람이 처음 마주쳤을 때의 감정에서 시작해 현재의 기분까지 구체적으로 말해 달라고 요구한다. 민망히 여겨 거절하던 러셀은 지속되는 주문에 하는 수없이 입을 연다. 클럽에서의 정황, 섹스의 세부적인 과정은 물론 자신한테서 땀 냄새가 날까봐 걱정했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까지도. 외설에 가깝도록 은밀한 이야기를 소곤거릴 뿐인데 이 장면은 에로틱하면서도 동시에 낭만적이다. 스쳐가는 감정을 포착함으로써 둘은 일시에 그쳐야 했던 관계를 영구적으로 붙들어 두었다. 그렇게 둘은 서서히 서로에 대한 탐닉으로 잠기어 갔다.

  영화는 함부로 감정을 재단하지 않겠다는 듯 배경음악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다만 두 사람의 대화, 숨결, 주변의 소음에 집중한다. 동성애자에 대한, 넓게는 연애에 대한 어떠한 낭만이나 환상을 욱여넣지 않고 일상의 단면을 뚝 잘라내어 편집해 묶어 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인위적이거나 도식적이지 않다. 영화의 톤에 맞추어 차분하고 때론 지나치게 건조한 느낌마저 준다. 이는 영화 군데군데 놓여 있는 스케치에도 이어진다. 거리와 건물을 오래 비추는 카메라에는 한 명의 사람조차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쓸쓸하고 황량한 영상과 연출은 영화가 관조적인 시선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 영화에서 대화의 주체는 둘로 나뉜다. 글렌과 러셀, 그리고 보통의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 글렌과 러셀의 대화가 관계의 기반을 다지는 감정적 성질을 띤다면 후자의 것은 소모적이고 가볍다. 특히 그들에게 동성애자는 흔한 농담거리이자 조롱의 대상이다. “넌 항상 계집애 같아” 혹은 게이 친구를 두고 비방하는 대사들은 상당히 폭력적이다. 이들에게 만연해 있는 만성적 혐오는 글렌과 러셀, 둘의 생활을 본격적으로 침해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과 사상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다. 러셀은 집 안에서는 게이인 게 행복하다고 말하면서도 밖에만 나가면 소화불량인 듯 속이 답답하다고 고백한다. 현대 사회에서 게이로 살아간다는 것은 스스로 침전하고 은닉하는 것이라는 것을 역시 ‘대화’로 풀어내고 있다.

  연장선상에서, 글렌은 부모에게 커밍아웃하는 것을 ‘게이들의 통과의례’라고 정의한다. 집에서 쫓겨나든, 스스로 집을 나오든, 드물게는 인정 받든 그것은 세상의 폭력을 가늠해보는 첫 시도이자 외침이다. 열여섯 살에 집을 나온 글렌이 고아인 러셀에게 “고아들은 꽤 섹시”하다고 언급하는 장면은 그가 가진 상처의 크기를 대변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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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난히 어딘가에 비친 모습이 많은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찾아볼 수 있다. 거울, 창문, 타일 벽 등 둘은 본래의 모습 그 자체만큼 반영으로 보일 때가 많다. 자기 존재 자체보다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더 중요한 그들, 남들의 기준에 맞추고 스스로를 감추는 사람들. 글렌은 분석하듯 이렇게 말한다.


그건 마치 네가 빈 종이가 되는 것과 같아. 그리고 네가 되고자 하는 것을 그 캔버스 위에 투영시키기 위한 기회가 주어지지.


  이렇듯 존재를 흔드는 외풍에 관해 이야기하면서도 영화는 존재 자체, 관계의 본질에 더 눈길을 준다. 주말이 지나면 글렌은 외국으로 떠나야 했고, 따라서 그들에게는 이틀이라는 시간만이 주어졌다. 이 시간 동안 그들은 세 번 만난다. 처음 돌아가는 길에는 무심했던 글렌이 두 번째 한두 번 러셀의 집을 뒤돌아본다. 만남이 거듭될수록 관계는 깊어지고 마음은 두터워진다. 그러나 전 남자친구로 인해 생긴 관계에 대한 두려움은 글렌의 마음을 자꾸만 닫으려 한다.

  키스할 듯, 팔을 뻗어 포옹할 듯 다가가지만 둘은 쉬이 가까워지지 못한다. 결코 진하게 입술을 맞추지도 몸을 껴안지도 않고 다만 나란히 창가에 선다. 같이 담배를 피우고 어깨에 손을 얹는다. 이 아슬아슬한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도 결국은 대화였다. 밤 새워 대화를 나눈다는 것, 하물며 내일이면 떠나는 사람과 마지막 대화를 주고받는다는 것. 둘은 마침내 완전히 속내를 뒤엎고 몸을 밀착시킨다. 천천히 부드럽게 서로를 애무하고, 관계를 가진다.

  서로의 이름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이, 만난 지 이틀밖에 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그 감정이 과연 진정한 사랑일까? 이성적으로 우리는 불가하다고, 말이 되지 않는다며 단정할 수 있다. 순간의 호감을, 스치는 감정을 착각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 단순히 서로의 외로움과 욕구가 강한 자석처럼 상대를 끌어온 것일 수도 있으니까. 물론 그 관계는 영원하지 않다. 진정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완벽한 사랑을 꿈꾸며 우리에게 찾아온 주말을 이대로 흘려보내고 있지는 않을까. 순간의 감정을 무시한 채 영원도 함께 지워버리는 것은 아닐까.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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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프라이드(Pride, 2014)'_매튜 워처스 作
 

  우리에게 80년대는 아프고도 벅찬 승리와 역동으로 기억된다. 청년들의 죽음이 기폭제가 되어 오래 곪은 화농이 터지듯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졌다. 그들은 인간으로서 권리를 지키기 위해, 국민으로서 민주를 쟁취하기 위해 싸우고 피 흘렸다. 정부의 유혈 진압에 맞서 그들은 오히려 뭉치는 것을 택했다. 견고히 몸을 맞대어 쉽게 넘어지지 않게 서로를 잡아매고 붙들었다. 다른 계층의 사람들의 이해(利害)가 하나로 모여 형성되는 것, 스스로 손목에 묶인 결박을 풀기 위해 태동하는 것, 그래서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이것을 우리는 ‘연대’라고 정의한다.

  사회학자 뒤르켐은 연대를 이렇게 설명한다.


 "어떤 역사적 시기에 상당히 커다란 집단 충격 하에서, 사회적 상호작용들은 더욱 빈번해지고 활발해진다. 개인들은 더욱 서로를 찾으며 함께 모인다. 그 결과, 혁명적 혹은 창조적 시기의 특징인 일반적인 열광이 초래된다.1)"


  연대는 곧 열광이다. 시대적 상처를 극복하고 위로받고자 사람이 사람을 갈구하게 되는, 인간적이고도 어딘가 슬픈 현상인 것이다.

  우리가 외침으로 거리를 장악하던 무렵, 영국에서는 대규모 파업 사태가 일어났다. 복지 정책을 축소하고 석탄 산업을 홀대한 대처 정부에 반(反)하여 전국 광산 노조에서 일제히 파업을 실시했다. 사양 산업으로 전락하긴 했으나 여전히 석탄의 활용이 중요한 시대였음에도 정부는 경찰력을 도입해 탄광 산업 자체를 포기할 각오로2) 강경하게 대응했다. 파업에 가담한 노동자는 물론 그 가족들까지 국가적 지원을 받지 못했고, 싸움이 길어지자 곤궁은 심해졌다. 영화 < 빌리 엘리어트 > 역시 광산 노동자 파업을 다루고 있는데, 죽은 아내가 아끼던 피아노를 부수어 땔감으로 사용하는 장면에서 그 궁핍의 정도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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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그들은 끈질기고 집요하게 권력에 맞섰다. 영화는 이들의 실제 영상 클립을 나열하며 시작한다. 투쟁의 선언은 확고하고 의연하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자존심과 자긍심뿐이고, 그것을 간직한 채 투쟁해 나갈 것입니다.” 물질적 이점을 모두 잃어버리고도 자존과 자긍을,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고 말한다. 이어지는 대처의 말. 옅은 미소를 머금은 그녀의 얼굴은 냉담하게 그들을 짓밟는다. TV를 보던 마크는 그 길로 바가지를 챙겨 거리로 뛰쳐나간다.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일인 듯 경쾌하고도 강건하게.

  런던에서는 그 해의 프라이드 행진(Pride Parade)이 열리고 있었다. 행진이 끝난 후, 마크는 무리를 모아 ‘LGSM’ 결성을 주도한다. Lesbians and Gays Support the Miners, 광부를 지지하는 레즈비언과 게이들. 마크는 마뜩잖아 하는 무리에게 ‘연대’를 설파한다. 끊임없는 투쟁으로 겪을 고통을 알기에, 자신들을 괴롭히던 권력과 무력이 그들에게로 옮겨간 것만 같은 죄책감에, 마크는 더욱 뜻을 굽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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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결에 무리에 끼게 된 스무 살의 브롬리 청년 조까지 합류해 열 명 남짓한 인원으로 초기 LGSM이 성립된다. 그들은 바가지를 챙겨 모금 운동을 벌인다. 그들의 강령은 단순하다. 혼자 모금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기. 누군가 거리에 나가면 다른 이도 뒤따라 나갈 것. 그것은 폭력적인 사회에서 퀴어(Queer)로 살아남는 법이기도 하겠지만 곧 연대의 실현이었다. 함께 하는 것의 잠재력을 그들은 믿고 따랐다.

  그러나 그들은 게이였고, 레즈비언이었으며, 퀴어였다.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이단적 존재였으며 차별과 억압은 당연시되었다. 그것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존재 자체에 대한 거부였고 배척이었다. 당시 대처 정부는 동성애자 차별 정책에도 힘을 쏟았다. 에이즈의 위험성을 역설하며 동성애를 질병 창궐의 원인으로 규정하고 공론화를 금지하는 ‘섹션 28(Section 28)’을 입법하여 동성애를 규제했다. 국가 차원의 혐오 인식은 널리 확산되어 동성애자의 인권을 완전히 실추시키기에 이른다.

  어떠한 광부 노조도 LGSM의 도움을 거부하고, 그들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웨일즈의 한 탄광촌에 전화를 건다. 오래 전화벨이 울리고, 전화를 받은 노파는 LGSM이 무슨 단체인지 정확히 알아듣지 못했기에 그들의 원조를 승낙한다. 그들은 서로 어깨를 부둥켜안고 연대를 외친다. 연대여, 영원하라! 연대여, 영원하라! 그렇게 시골의 광부들과 LGSM의 당찬 게이들 간의 갈등이 시작된다. 결코 좁혀지지 않을 것만 같은, 첨예하고도 냉랭한.

  LGSM이 레즈비언과 게이가 조직한 단체란 것을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초대하고도 반기지 못한다. 마을 강당 무대에 마크가 서서 연설을 하자 갖가지 혐오와 증오, 께름칙한 감정을 담은 눈길이 쏟아진다. 너무도 차갑고, 극도로 두려워하는 그 시선. 저주에 가까운 반응을 겪고 그들은 흔들리지만 마크만은 굳건하다. "숨지도, 도망가지도, 사과하지도 않"을 것이라며 차별과 편견의 벽에 맞선다.

  꽤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사람들은 LGSM을, 레즈비언과 게이들을 점차 수용한다. 그들이 가진 연대 의식을, 같은 약자로서 뭉쳐야 한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는다. 광산촌의 이장 격인 다이는 마크에게 말한다.

"당신이 날 지지하면 나도 당신을 지지하고, 당신이 누구이든, 어디서 왔든 간에. 어깨를 맞대고, 손을 맞잡고."

  마음을 열고 손을 맞잡으면서 ‘연대’는 피어난다. 이것의 잠재력은 마을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화합을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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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연대란 소통이자 개방의 창구이다.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만으로 교류는 완성된다.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광산촌에 LGSM이 전파한 것은 함께 어울리는 것, 하나로 뭉치는 것, 그러니까 연대의 힘이었다. 조나단의 춤과 제프의 아이들을 향한 선물은 ‘빵과 장미’의 합창으로, 환한 웃음으로 되돌아왔다. 진심은 통한다는 것은, 어쩌면 일방적인 것일 수도 있다. 영화는 그런 단순한 법칙보다 개인적 상호 작용의 힘을, 집단적 열광의 빛을 노래한다.

  너무 거대해서 도무지 이길 것 같지 않은 상대와 싸우는 것은 존재의 부정(否定)과 소멸의 위협을 감내하는 일이다. 같은 적을 둔 광부와 성소수자들은 사회적 약자로 한 뜻을 모은다. 'Victory to the miners'의 구호가 'Victory to the minors'로 바뀌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그들의 연대는 확립되고 발산된다. 소위 세상을 변화시킬 만한 힘을 갖추게 된다. 서로를 인정하고 갈구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렇듯 큰 힘을 발현할 수 있다.

  누군가는 사회 운동이 축제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분석한다. 탄광의 유무에 의식주 문제가 달린 광부들에게 파업은 생명 존속을 건 중대한 투쟁이었다. 성소수자들에게 퀴어 퍼레이드는 그들의 존엄을 어떻게든 붙들고자 하는 최후의 인권적 사투였다. 그러나 연대가 존재하는 한, 이들의 싸움은 혈투보다는 축제에 가깝다. '모두 하나가 되어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고, 환호하3)'는 순간은 그들을 투견이 아닌 인간으로 몸을 지탱하게 한다. 비록 승리하지 못했더라도 그 열광의 잔상이 남아 스스로 구원하여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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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대를 기도한다. 서로의 손을 맞잡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우리. 함께할 때 꿈을 키울 수 있고, 함께할 때에야 꿈을 이룰 수 있기에.





1) 박선웅, 「의례와 사회운동」, 학술저널, 한국사회학회, 2007, p.6
2) 원종근, 「대처리즘과 영국의 경제개혁」, 학술저널, 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학종합연구센터 EU연구소, 2000, p.14
3) 박선웅, 위의 논문, p.2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http://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31466

(아트인사이트에 게재한 글입니다.)

 

 

문화예술을 다루는 '아트인사이트'에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저는 세 달간 퀴어 영화에 관련한 글을 올릴 예정입니다.

여전히 부족하고 또 갈수록 미진해지는 저의 글로나마 힘을 보태고자,

주어진 일에 책임을 다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써보겠습니다.

 

칼럼의 제목은 [프레이폴(Pray for)]입니다.

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담아내는 마음으로,

이 기도가 그들에게까지 들리도록 크고 진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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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7-10-31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이진이닷! 잘 지내니?
군바리 됐잖지? 생활은 잘하고 있는 거야?

거의 논문 수준이구나. 대단해.^^

이진 2017-11-08 18:30   좋아요 0 | URL
네 이모~ 이제 적응 다 끝내서 글도 좀 써보려구요 ㅎㅎ
논문 수준은 아닙니다 ㅠㅠ... 아직 너무 부족해요.
 

 

 

 

 

 

   진정한 아픔을 맛보지 못해서 그래. 조앤 롤링을 봐. 극한 고통의 나뭇가지 끝에 열매가 열리잖아. 네가 느끼는 갑갑함은 아직은 사치야. 자신이 처한 현실이야말로 고통이라고 생각하는 지혜는 확신에 차 그렇게 말하곤 했다. 현실적 고통 없는 지루함. 그래서 인형 작업에도 이렇게 진척이 없는 걸까? 나른한 한 나절, 커피 한 잔을 마셔도, 시든 난꽃의 대궁을 잘라봐도, 더께 낀 창틀을 닦아 봐도, 한껏 미뤄둔 작업대에 앉아 봐도 갑갑함은 언제나 친구처럼 가까이 있었다. 어쩌다 손재주는 있어, 종이 인형을 만들기는 하지만 죽도록 다 하는 열정이 아니었으므로 완전한 프로가 되기도 힘들었다. 허영일 뿐이었다. 뭔가를 부여잡고 제 살아있음을 증명하고픈 허욕의 뿌리이자 부질없는 욕망일 뿐이었다.

(…)

  아무리 자식이라도 너무 엎어지진 마. 무릇, 관계는 담백하고 부담이 없어야 오래간다. 부모 자식 간인들 다르겠니. 고슴도치 딜레마라고 있잖아. 고슴도치가 제 날카로운 털은 생각하지 않고 사랑스럽다고 서로 가까이 가 봐. 생채기만 나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오래 갈 수 있어. 독사 스무 마리 쯤 길들이는 마음으로 견뎌내야 해. 즐기는 날보다 치욕을 견디는 날이 많은 이유가 뭐겠니. 갈망하는 관계는 오래 못 가. 누군가 말했잖아. 타인이야말로 진정한 감옥이라고. 가족이라고 예외일 수 있겠니? 사무침이 없으면 원망도 없잖아. 누가 뭐래도 그 말은 진리야. 지혜에게 횡설수설 떠들어댔지만 그것들은 모두 여자 스스로에게 필요한 말이었다. (「왼손엔 달강꽃」 229-230, 241,242 p)

 

 

 

  인연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 관계에서 오는 하나의 축복일 것이다. 다른 말로, 모든 지속되는 관계는 그 자체로 아름답고 감사한 일이다. 나에게 인연이란 것이 남아 있다면 단연 알라딘일 것이다. 중학 시절, 멋 모르고 책과 사랑에 빠져 모자란 글로 생각을 써내려가고 남들이 SNS를 하듯 서재를 휘젓고 다녔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댓글을 주고받으며 교류했던 이 공간. 수 년을 함께 하며 수많은 칭찬과 격려를 받았고 과분하게도 선물까지 받아왔다. 글을 배우겠노라 주저없이 선택할 수 있게 한 기반이자 이유 중 하나가 이곳이었을 정도니, 상당한 의미를 가진다.

 

  대학에 올라 다른 인간 관계가 중첩되고, 전혀 다른 환경에 적응하려다보니 자연히 발길이 뜸해졌다. 그즈음 나는 영화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고, 대학 방송국 활동을 하며 글과는 무관한 생활에 시간을 주로 들였다. 띄엄띄엄 쓰던 일기마저도 완전히 쓰지 않게 되었을 무렵, 서재 활동도 함께 그만두었다. 의지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순리적인 것이라고 할까. 시간이 지나면 누군가와 이별을 맞게 되듯, 그런 이별이 속절없이 있듯이 나는 이곳과 멀어졌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더이상 조용하고 감상적이던 문학 청년이 아니었으므로.

 

  그러나 글을 지우고 난 나, 나의 삶은 아름다울 리 없었다. 어떠한 흔들림도, 마음속 울림도 느끼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보냈다. 과제를 위한 글, 독서만으로 할당량을 채우듯 읽고 썼을 뿐이었다. 한 번 놓으니 다시 끈을 잡으려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나는 나태해졌고, 무덤덤해졌으며, 감정에 무관심해졌다. 비극의 파편 같은 순간이 찾아와도, 다리가 휘청거리는 무게가 덮쳐와도 나는 펜을 들지 않았다. 노력없이, 고통없이 그 감정을 들여다보지 않고 덮어버렸다. 그렇게 남들처럼, 요즘 세대의 시류에 편승한 채, 무심히 창밖을 바라보는 버스 안의 승객이 된 채, 그렇게 흘러갔다.

 

  무언가 해야겠다는 생각만으로 무작정 교육 봉사를 신청하고, 동아리 활동과 공모전에 열중했다. 뚜렷한 목표 의식이나 열정, 마음 없이 흘러가듯 그렇게. 스스로도 이런 활동은, 이렇게 살아가는 삶은 무의미하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있었다. 자주 그런 생각은 들었다. 그러나 당장의 피로가 더 무거웠으므로, 앞으로 삶의 방향보다 내일의 길을 걸어가는 일이 더 급하고 어려워보였으므로 나는 무시했다. 자각과 성찰을 거부했다. 그런 나를 이 책은 꾸짖었다. 아무 감정 없이, 성찰도 없이, 급급하게 살아가는 것은 부질없는 욕망일 뿐이라고. 너에게 의미를 주지 못하는 하루는 허영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래, 어쩌면 이 책은 운명처럼 다가왔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지 모른다. 인연을 잊고 살던 나에게, 글의 의미와 하루의 가치를 무시하며 흘려보낸 나에게 질책처럼, 계언처럼, 그리고 계시처럼 울려 왔다. 감사히 책을 받아들고 기쁜 마음으로, 오랜 시간을 들여 책을 읽었다. 한강을 너무도 좋아하는 내게 혹 맞지 않을까 염려하시던 마음이 남아 더 애틋하고 따듯하게 느껴졌다. 출퇴근길에 지하철에 앉아서, 근무하는 동안 틈틈이 읽어내려간 소설은 재미있었다. 한 편 한 편의 기록을 모아 리뷰를 쓸까 하다, 이 마음은 리뷰로 남기면 안 될 것 같아 페이퍼를 쓰게 됐다.


  이 소설들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작가의 시선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인간이라는 범주, 넓게는 종족을 결코 예단하지 않는 작가의 염세적이라 할 만한 시선을. 우리가 사람들이라고 통칭하는 것은 곧 보통 혹은 평범이라는 단어와 연결된다. 이데아적 형상, 표상이 인간 전체를 대표한다. 그것은 아주 건강하고 이상적인 형체다. 이것이 하나의 거대한 오류라는 사실은 역설하지 않아도 자명할 것이다. 이 사회적으로 만연한 통념을 작가는 강하게, 그러나 아프지 않게 파고든다. 옷이 젖어가듯 조용히 인간 무리에 스미어든다. 그 안에서 객체를 이루고 있는 개체 하나하나를 일일히 만져본다. 얼굴을 들여다보고, 손등을 쓸어보고, 이야기를 들어본다.


  그렇게 작가는 발견한다. 어긋나고 흐트러진 지점을. '보통'이라 칭해지는 이들이 넘겨짚고 지나치기 쉬운 그 지점을. 타인에게 내보이고 싶지 않아 묵묵히 숨기고 살아가던, 입밖으로 꺼내기 민망하고 또 추레하여 속으로 참고 참았던 결점을. 통점처럼 진피 아래 자리를 잡고 앉아 자꾸만 우리의 볼을 붉히던 부끄러운 그 통각을. 그것이 어떻게 발화하였는지, 어떤 방식으로 표출되는지,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집요하고도 무덤하게 뒤쫓는다. 이 건조한 시선이 오히려 무섭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마치 인간 모두를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아서. 일상과 생각을 모두 파악당한 것 같은 느낌이어서.


  정통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단편들을 읽고 있으면 어쩐지 나 자신까지도 돌아보게 된다. 소설들에서 사회의 어긋난 지점, 일반적이지 않은 부분 혹은 추악한 지점은 주로 객체이고 누군가 그것을 관찰하고 서술하는 형식으로 쓰인다. 관찰자는 단어 그대로 관조적인 시각만을 가진다. 감정이 메마른 사람처럼, 단지 조금의 짜증과 본능만을 가진 채. 자연히 우리도 이 사회의 틈을 바라보는 자세를 취하게 된다. 그렇게 인도되는 것이다. 주변의 사건을 바라보듯, 벌어진 틈새로 자행되는 사회의 민낯을 직시하는 것이다. 내가 저 주인공은 아니었는지, 객체로서 종속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러나 어떤 위치이든 바뀔 수 있는 것은 없다. 여전히 우리는 내키지 않는 섹스를 하고, 실행될 수 없는 가정만을 하고,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린다. 냉정하고 또 염세적인 시선으로 작가는 사회를 통찰한다.


  

  



  인연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단연 축복일 것이다. 달빛 같은 축복의 빛살 아래서 따스하게 한 겨울 보낸다.


  저번 주말은 가족이 총출동하여 일본 오키나와에 다녀왔다. 할아버지 팔순을 기념한 가족 여행이었다. 아이들이 많아 번잡스럽고 정신 없었지만 이렇게 다같이 모여 어딘가로 떠날 수 있다는 것, 다투지 않고 마음을 모아 시간을 보낸다는 것, 참으로 행복하고 즐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곤이 더 커 보였지만 할아버지도 재밌어하셨고. 나의 현재와 과거를 곱씹어보면 인간 관계만은 참으로 축복받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너무도 좋은 사람들만 내 곁에 있어왔고, 또 그들이 곁에 남아주었기 때문이다. 이곳 알라딘도 언제까지고 내 서재 한 켠 차지하는 공간이었으면 좋겠다. 힘들 때 언제든 와서 쉴 수 있고,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그런 공간. 대나무숲.


  그렇게, 인연이라는 것은 쌓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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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2 19: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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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11 00: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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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는 것은 우리 쪽이다.

그저 시간에 실린 채 흘러가지 못하고 우리는 늘 비켜 간다.

오랜만에 알라딘에 들어와 글을 훑어보니 생경한 느낌이 강하다.

이제는 이곳도 많이 바뀐 듯하다. 돌아갈 수 없는 과거로부터.


예전의 모습을 기억 속에 남겨둘 것인지,

그 행복과 기쁜 감정을 다시금 꺼내 마주할 것인지.

어느 것이 더 나은 선택일는지, 나는 요즘 이 고민에 집중해 있다.

소통과 만남의 문제. 나를 지탱하고 이끌어주는 주추에 관련한 문제.


이곳에 다시 발을 들여놓는 것도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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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4 19: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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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7 14: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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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7 14: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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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7 15: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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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7 16: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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