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에 한 번씩 찾아오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저번 달엔가 꽤 긴 글을 썼는데 순식간에 그것들이 날아가버려서 다시 쓸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여전히 책보다는 영화를 자주 접하는 요즘이다. 저번 학기에 시창작입문을 들었다면 이번 학기는 소설창작입문인데, 마지막 전 주까지 단편소설 한 편을 써서 제출해야 한다. 단편소설을 쓰겠다고 손을 번쩍 들긴 했지만 고백건대 단편 분량의 소설을 써 본 적이 없다. 써봐야 미니픽션. 나는 주로 소설보다는 시나 서평을 주로 써왔기 때문에 소설 쓰는 것이 어렵게만 느껴진다. 너무 한강의 소설만 독파한 것 같아 도움을 얻고자 김중혁의 신간을 꺼냈다. [가짜 팔로 하는 포옹]. 그의 소설집 [일 층, 지하 일 층]을 인상 깊게 읽었기에 기대가 컸다. 내 기억에 김중혁은 진지한 이야기를 가볍게 풀어내는 작가였다. 가볍다는 것은 깊이가 얕거나 하찮게 보일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재치 있고 부드럽게 읽히도록 꾸며간다는 뜻이다. 




  경찰관님, 고통 같은 것은 말입니다. 절대 얼굴에 드러나지 않습니다. 아십니까? 그게 다 어디 붙는지 아십니까? 알코올에 달라붙어서 말입니다, 살에도 붙고, 조각조각 나서 뇌에도 붙고, 또 내보내려고 해도 손톱 발톱 그렇게 안 보이는 데 숨어살면서요, 조용히 있다가 중요한 순간이 되면요, 제 뒤통수를 후려치고요, 그러는 겁니다.

  피존이 그렇게 말한 거야, 아니면 지금 자기가 취해서 혀가 꼬이는 거야?

  정윤이 규호의 눈을 들여다봤다. 규호의 눈은 발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규호가 고개를 숙이며 정윤의 눈을 피했다.

  맺힌다는 게 뭔지 알아?

  맺힌다고?

  아, 아니지, 피존 말투로 해야지. 흐, 미안, 정윤아, 다시 물어볼게.

  맺힌다는 게 어떤 건지 아십니까? 자, 여기 술잔을 잡아봅니다.

  규호가 헛손질을 하다가 겨우 술잔을 잡았다.

  여기에 왜 맺히는지 압니까? 이것은 온도 차이 때문입니다. 나는 차가운데, 바깥은 차갑지 않아서, 나는 아픈데, 바깥은 하나도 아프질 않아서, 그래서 이렇게 맺히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요, 술을 마십니다.


「가짜 팔로 하는 포옹」 p.117-8




김중혁은 인간의 감정을 말로 정의하는 데 뛰어나다. 단어 하나를 사용하기 위해, 그 인물을 소설에 그려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민을 거쳤는지 소설의 한 대목만을 읽어도 알 수 있다. 소설집의 표제작은 굉장히 특이한 구성을 하고 있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구성인데, 한 장소에서 인물들의 대사만으로 소설이 이루어진다. 비포 시리즈나, 작가주의 영화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전개라고 할 수 있다. 알코올에 중독된 남자 규호와 그에 의해 불려나온 전 여자친구 정윤, 두 사람은 어느 밤 호프집에 앉아 있다. 자꾸만 술을 시키려고 하는 규호와 그를 막는 정윤. 정윤의 태도에는 규호를 대하는 피곤함이 녹아 있다. 자리를 벗어나려고 하는 정윤에게 규호는 알코올중독자 모임에서 만난 피존씨 이야기를 꺼낸다. 전술한 대목에서 경찰관에게 읍소하는 목소리가 피존씨의 것이다. 술을 마신다는 것은, 뻔하지만 그래도, 고통을 감내하는 방법 중 한 가지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존재 이유가 될 지도 모르겠다. 술을 마시지 않고서는 자신의 존재를 견뎌낼 수 없으니. 너무나도 비참하고 외로운 몸뚱어리를 지탱해줄 마음이 없으니. 술이 내미는 가짜 팔의 포옹이라도 있어야 그나마 비틀거리며 일어설 수 있으니. 어쩌면 그 가짜 팔의 포옹이 진짜 팔의 포옹보다도 행복할 수 있으니.


김중혁의 장점 혹은 단점, 장단점을 넘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끝맺음이다. 전작들을 모두 읽어보지 못했지만 내가 읽은 몇 편의 단편 소설을 종합해보면 김중혁은 항상 이상한 지점에서 소설을 끝맺는다. 이상하다, 라는 단어가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 말하자면, 소설을 더 전개시킬 수 있을 법한 곳에서 그는 으레 손을 뗀다. 이제 이야기의 윤곽이 어느 정도 잡혔다 싶을 때, 그는 그 이야기를 독자에게 떠넘긴다. 떠넘긴다, 보다는 맡긴다, 고 하는 게 낫겠다. 김중혁의 소설을 읽고 난 후에 오히려 힘이 더 드는 이유이다. 김중혁은 이제 대사의 힘을 완전히 깨달은 것 같다. 황정은이 대사를 다루는 것처럼 그는 대사를 다룬다. 아니 링클레이터 감독이 대사를 다루는 것처럼 그는 대사를 사용한다. 젊은 연인의 대사, 남자 고등학생의 대사, 포르노 업체 직원의 대사 등 모두가 몹시 현실적이다. 씨발, 개새끼야, 새끼야, 이것들은 남자 고등학생들의 대사이고, 씨발, 애무, 정액은 포르노 업체 사람들의 대사이다. 처음에는 솔직히 직설적인 대사들에 거부감이 들었다. 지나치게 현실적이어서 이번 소설집은 좀 갔다, 하고 책을 덮었다. 그런데 뭐랄까, 이게 김중혁이지 싶다. 펑키하다, 고 해야 할까. 적당한 단어가 갑자기 떠오르질 않는다. 그냥 말 그대로 젊은 작가. 발전해나갈 길이 창창한 작가. 데뷔한 지 꽤 되었으나 후가 더 기대되는 작가. 빨간책방에서도 좋고.




[그을린 사랑],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







영화를 보다가 숨이 턱 막혀 가슴을 움켜쥐는 순간이 있다. 그런 순간이 있을 때 나는 그 영화를 사랑하게 된다. 올드보이가 그랬고, 밀양이 그랬다. 슬픔이 맺히고 맺혀 돌처럼 단단하게 변하여 그 돌이 진동하며 심장을 쿵쿵 내리치는 자학적인 고통. 그 고통이 명치 끄트머리에 마쳐오면 나는 몸을 내려놓고 휘둘릴 준비를 한다. 나를 또다시 주저앉게 한 영화, [그을린 사랑]이다. 


영화관에 너무 일찍 찾아가 카페에 가 눈을 붙였다. 잠이 깨고 나서도 노곤하여 영화를 보면서도 졸았다. 압구정이었고, 필름 상영이었다. 영화는, 어두운 화면으로 시작했다. 세 명의 사람이 앉아 있고 중년의 남자는 젊은 남매를 앞에 두고 앉아 무엇인가 이야기 중이다. 남매의 어머니가 남긴 유언이다. 어머니의 유언으로 남매에게는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가 생겼고, 없던 형이 생겼다. 그 둘을 찾아 편지를 전해주고, 그 후에야 자신을 제대로 장례하여 달라는 것이 어머니의 유언이었다. 영화는 이제 한 편의 스릴러, 추리극이 된다. 자신의 아버지와 오빠라고 칭해진 사람을 찾아 떠나는 여자의 모습과 그녀 어머니의 과거가 교차되며 이야기는 전개된다. 사람에 사람을 거쳐 어머니의 고향에 다다르자 여자는 좀더 내밀한 어머니의 진실을 마주하기 시작한다. 그야말로 진실이었다. 속으로 꼭꼭 다져 눌러두었을, 속을 그토록 헤집어 놓았을 어머니의 진실. 그 비극에 남매는 몸을 떨며 운다. 


그녀 어머니 나왈이 살았던 때는 레바논 분쟁이 한창이었다. 기독교 신자였던 나왈은 무슬림 남자와 사랑을 나눴고, 아이를 가졌다. 가족들의 반대로 나왈은 아이를 떠나보내야 했다. 발뒤꿈치에 점 세 개의 표식을 남기고 언젠가 너를 꼭 찾으리라는 약속과 함께. 바로 이 약속, 분쟁이라는 분노와 갈등, 그리고 어머니라는 이름의 사랑이 빚은 약속이었다. 이 약속은 나아가 위에 보이는 장면을 만들어낸다. 나왈은 집을 나와 학교에 다니던 중 떠나보냈던 아이를 찾아 무슬림 지역의 고아원을 찾아간다. 그곳에서 나왈은 자신의 아이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스카프를 머리에 둘러쓰고 버스에 오른다. 몽롱하게 졸고 있을 때 나왈이 탄 버스를 기독교 민병대가 습격한다. 모두가 죽고 나왈과 한 모녀만 남았을 때, 나왈은 감춰둔 십자가 목걸이를 꺼내보이며 자기는 기독교인이라고 소리친다. 민병대원 중 하나가 나왈을 버스에서 끌어내리던 중 나왈은 황황히 되돌아가 무슬림 여인이 안고 있던 아이를 내 아이, 라며 끌어당긴다. 주저하다 슬픈 눈으로 아이를 놓는 여인, 아이를 품에 안고 걸어나가는 나왈, 품에 안긴 채 엄마를 보며 절규하는 아이. 아이는 발버둥치다 결국 나왈에 품에서 벗어나 버스로 달려간다. 그 아이를 총으로 쏘는 민병대원. 그리고 나왈, 주저앉아 멍한 표정을 짓는 나왈. 영상의 강렬한 인상을 글로 담아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기만 하다. 모두가 떠나고 황량한 벌판에 홀로 주저앉아 저런 표정을 짓는 나왈을 보고,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그녀가 앞으로 겪게 될 비극의 시발점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밀도 있는 각본과 연출이 큰 공을 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영상이 훌륭했다. 모래폭풍이 영상 전체를 뒤덮은 듯, 영상을 손으로 쓸면 뿌연 먼지가 조금 묻어날 듯한 영상미였다. 중동의 느낌, 몸을 사로잡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아, 이토록 그을린 운명, 그을린 사랑이 또 있을까. 역사가 빚은, 세상이 태워버린 너무나도 안타까운 약속에 관한, 사랑에 관한 영화. 이동진 평론가는 이 영화를 두고 그리스 비극이 떠오른다고 했다. 비극. 나왈의 삶은 그 자체로 비극이었다. 혼자 감당했다고 짐작조차 하기 힘든 비극적인 비극. 그녀는 위대한 여인이었다. 비극을 견뎌내고, 비극을 승화시킨 사랑의 여인이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김기덕 감독의 영화.







이런 영화를 만들어야지, 하고 얼마전부터 생각해오던 게 있었다. 스토리보다는 촬영 구도나 연출 등에 초점에 맞춰진 생각이었다. 멋진 영화가 만들어질 것 같다고 혼자 즐거워하곤 했는데, 오늘 기대가 와장창 깨졌다. 김기덕 감독 때문이었다. 얼마전 고전문학 수업 중 교수님께서 김영임 명창이 부른 정선 아리랑을 틀어주셨다. 나는 시큰둥한 마음으로 그걸 듣다가 김영임 명창이 아리랑을 내지르는 부분에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속에서 폭죽이 터져 그 연기가 밖으로 배출된 것이었다. 기숙사에 와서도 정선 아리랑을 계속 들었다. 김기덕 감독이 영화에서 이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오늘에서야 영화를 보게 되었다. 웬걸, 내가 생각해오던 장면들이 영화에 모조리 담겨 있었다. 좌우대칭적인 구도, 한 곳을 오래 응시하는 카메라, 롱샷과 클로즈샷의 사용, 모든 것이 내 상상 속의, 기대 속에서만 품고 있던 것들이었다. 나는 내 것을 빼앗긴 듯 억울하면서도 영화의 훌륭함에 감탄했다. 내 생각이 이런 영화로 발현될 수 있다는 건 꽤 기분 좋은 일이었다.


임권택의 [서편제]가 한국적인 영화였다면 이것은 동양적인 영화이다. [서편제]보다 더 한국적인 영화라고도 할 수 있겠다. 영화의 장면은 오로지 단 한 곳, 저수지 위를 부유하는 절에서만 이어진다. 절과, 절을 둘러싸고 있는 산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인물도 최소한이다. 노스님과 그 아래서 수행하는 승, 여자 이외의 몇몇뿐이다. 화선지 위에 잎을 내리는 난처럼 유려한 이야기이면서 아름답게 침묵을 지킬 줄 아는 영화이다. 때로 그 여백이 지나치게 아름다워 심장을 벨 듯 날카롭게 다가올 때도 있다. 누군가 이창동을 작가라고 말했고 김기덕을 화가라고 표현했다. 김기덕의 작품을 아직 둘밖에는 보지 못했지만 이 작품으로 나는 이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박찬욱의 영상이 화려하다면 김기덕의 영상은 묵직하다. 묵직하게 눈으로 기어들어와 마음에 큰 파동을 주고서야 배출된다. 고양이의 꼬리를 붓 삼아 반야심경을 써내려가는 노스님과 그것을 칼로 파내는 승의 모습은 놀라운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김기덕 감독은 할당된 두 시간으로 완벽하게 인생이라는 것을 그려냈다. 산다는 건, 그래, 이런 거라고 나직하게 들려준다. 좀더 인생을 더 살아낸 뒤에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되면 그때의 느낌은 어떠할까. 지금처럼 여운에 젖어 감상적으로만 영화를 바라보지는 않을 것 같다. 가슴을 움켜쥐고는 그 승의 인생에 공감하고 있지 않을까. 산다는 건, 그래, 그런 거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고백하고 있지 않을까. 그때의 울림은 돌멩이가 전하는 파동이 아니라 바윗덩이가 만들어내는 커다란 떨림이겠지. 몸 속 군데군데로 침투하는 떨림의 파도를 그때는 느껴볼 수 있지 않을까.




이제, 아니 쭉 밤이었다. 영화를 찍으려는 사람을 두고 소설을 써볼까 한다. 그를 어떻게 만나야 할까. 




그가 다가와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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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5-10-29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소이진님 보면 소이진님이 떠올라야 하는데 자꾸 변요한이 떠올라가지고.. 그런데 이상하게 육룡이 나르샤에 땅새가 나오면 또 우와..잘생겼다..하면서 소이진님이 떠오르고..^^ 가끔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아요. 분명 미생볼 때는 안 그랬는데...

소이진님, 어디야, 나와라, 오바. 빨리 나와..처들어간다..

보슬비 2015-10-29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변요한 하면 소이진 생각하는 사람. 저도 추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