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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438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1월
평점 :
한강의 글을 읽는 데에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한강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곧 마음의 흔들림을 뜻하기 때문이다. 소설에 있어서 글을 이끌어나가는 주체는 대부분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흐름이 주가 되어 소설은 크게 굴곡지거나 평탄하거나 하는 다양한 형태를 띤다. 한강에게 있어 주는 감정이다. 혹은 감각. 한강의 글에 유독 이탤릭체의 독백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강의 인물들은 하나 같이 어두운 사람이다. 지병을 가지고 있거나 몸이 허약하거나 그도 아니면 정신적으로 스트레스가 많은 사람이다. 이들에게 삶은 견디기 힘들 정도의 무게를 가진다. 척추가 바닥까지 닿을 정도로 휘어진 채 한강의 인물들은 한 발 한 발 힘겹게 나아간다(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아간다, 이지만 지금은 힘겹게, 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겠다). 전술했다시피 한강은 이들의 내면의 흐름을 좇아 글을 써내려간다. 이들의 행보보다는 내면과 독백, 회상과 깨달음에 집중하기에 한강의 글에서는 인간의 감정들이 뚝뚝 묻어난다. 거대한 고통에 맞닥뜨려 고뇌하고 사념하는 인물들의 사유(思流)를 따라가는 것은 독자에게조차 힘겨운 나락에 빠진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그들의 소리 없는 절규를 읽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한강의 글을 읽음이 곧 마음의 흔들림이라는 말의 연유는 이것이다.
따라서 한강을 분석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것은 인물들이다. 한강의 인물들을 정의해본 적이 있다. 갓 태어난 어린 새의 팔딱팔딱 뛰는 심장 같은 사람들,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광원을 감싸고 있는 유리막, 그 유리막을 그려낸다면 바로 한강의 인물들이라고 끼적인 기억이 난다. 한강의 인물들은 병들고 허약한 사람들이니만큼 연약하다. 삶의 무게를 견디는 것만으로도 힘겹고 지쳐 도무지 다른 것에는 신경 쓰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지만 삶은 결코 그들의 소망처럼 쉽지 않다. 부닥친 사건을 견뎌내는 사이 그들은 생기를 잃고 야위어간다. 손으로 움켜쥐면 곧바로 터질 듯 약한 아기새의 심장처럼, 스치기만 해도 상처를 입을 얇디얇은 유리막처럼. 이렇게 소설을 끝내었다면 평론가들은 한강을 허무주의자의 허세쯤으로 취급해 하대했을 것이고 독자들은 꺼림칙하다는 이유로 관심을 거두었을 것이다. 한강의 인물들은 자신을 짓누르고 앞을 가로막은 삶에 투쟁한다. 김수영의 풀처럼 쓰러지고 짓밟혀도 일어난다. 당장의 부족한 월세 때문에 전전긍긍하면서도, 세면대의 컵을 들어 올리지 못할 정도로 허약해져 있으면서도 그들은 삶에 대한 의지를 주장한다. “살려고 그렇게 몸부림을(한강, 『바람이 분다, 가라』)” 치고 “아등바등 살(같은 책)”아간다. 삶이 무엇이기에 그들은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쟁취하려고 하는 것일까. 한강의 소설들은 이에 관한 질문의 제출과 자답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쯤 되면 우리는 아등바등 살아가는 주체가 한강의 인물들이 아닌 바로 한강 자신임을 알아챌 수 있다. 한강이 그려내는 비슷한 이미지의 여성들은 한강 자신과 놀랍도록 일치하는 면이 많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한강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는 개성론의 시로 거론할 수 있다. 개성론이란 작가와 시적 화자가 일치하는 경우를 일컫는데 고백적이며 자전적인 성격을 띤다. 한강의 이 첫 시집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시집이 개성론의 성격을 가진다는 사실에 동의할 것이다. 한강의 소설에서 늘 보였던 연약하지만 투쟁하려는 사람들의 모습, 즉 작가 자신의 형체가 시에서도 드러난다. 「자화상. 2000. 겨울」이라는 시로써 이 시집의 시적 화자들은 곧 작가 한강을 투영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시집은 총 5부로 나뉘어 있는데, 각 부를 관통하는 큰 주제는 인간 존재에 관한 성찰이다. 한강에게 인간이란 살아감의 고통을 안고 있는 생물이다. 살아가는 것은 언제나 아프고 고통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만 하는, 살아가면서 의미를 얻는 존재로 인식된다. 고로 시집의 화자들은 하나같이 삶의 고통을 노래한다. “그렇게 부서지고도”(「피 흐르는 눈 3」) 살아 있다는 사실에 절망하며 차라리 담벼락 밑에 뒹구는 돌멩이나 사물, 죽어 해골이 되기를 소망한다. 인간 존재의 근원적 고통을 끌어올리며 한강은 “어떤 칼로도 연마되지 않는 원석과 같”(「몇 개의 이야기 12」)은 단단한 슬픔을 적어낸다.
살아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환멸이지만, 특히 한강은 언어적 고통에 마음을 쓰는 듯 보인다.
나에게
혀와 입술이 있다
그걸 견디기 어려울 때가 있다.
―「해부극장 2」 부분
이 시의 화자는 자기가 선천적으로 소유한 혀와 입술을 혐오한다. 화자는 혀와 입술에서 발화되는 말, 즉 언어에 대한 불신을 품고 있다. 인간의 고통은 어쩌면 최초의 언어에서 기원한 것일지도 모른다. 언어가 창조되고 제대로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사고하게 되었고 여기에서 고통이 발아한 것이다. 언어 자체에서 드러나는 고통도 있다. 언어란 칼보다 폭력적인 무기가 될 수 있고 가면보다 두터운 가림막이 될 수 있다. 이를 깨달은 화자는 언어를 두려워하는 듯 보인다.
한편, 언어라는 것은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기준이다. 언어를 가졌기에 발생하는 고통은 곧 인간이라는 존재로서 느끼는 고통인 것이다. 인간 존재로서의 고통은 또 어떠한가. 한강은 정확히 시집에서 드러내고 있지 않지만, 추측건대, 그것은 상실로 인한 고통이다. `「어느 늦은 저녁 나는」에서 화자는 저녁밥을 먹으려다 말고 “흰 공기에 당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그때 화자는 “무언가 영원히 지나가버”린 것을 깨닫는다.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는 그것의 정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지속적인 상실로 인한 마음의 공허와 고독이 고통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우리는 읽어낼 수 있다. 살아간다는 것은 무언가를 영원히 흘려버리거나 지나쳐버리는 행위임으로 인간은 결코 완전해질 수 없고 부족한 상태로 남아 있게 된다. 그러한 불균일의 삶은 인간을 두 동강 내고, 세 동강 내고, 종내에는 조각들로 어긋나게 한다.
그래서 한강은 은연중에 살아간다는 것에서 탈피하고 싶은 욕구를 드러내기도 한다. “아, 죽어서 좋았는데 환했는데 솜털처럼 가벼웠는데”(「파란 돌」)라는 고단한 현실의 삶을 견디다 못한 화자의 하소연은 당연한 순서일 것이다. 그러나 이때 한강은 한 가지 놀라운 법칙을 발견한다.
십 년 전 꿈에서 본
파란 돌
아직 그 냇물 아래 있을까
(…)
나도 모르게 팔 뻗어 줍고 싶었지
그때 알았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그때 처음 아팠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파란 돌」 부분
죽어서 본 예쁜 파란 돌을 줍기 위해선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죽음의 홀가분함은 실체가 없으며 아름다움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 결국 인간이란 살아가면서 인간으로서의 가치와 의미를 얻고, 살아가면서 아름다움을 만질 수 있는 존재라는 것.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살아내야 하는 것. 가장 환한 것과 가장 어두운 것이 공존할 때에야 인간은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
이때부터 한강은 살아간다는 것에 매력을 느꼈던 것일까. 화자들의 입을 빌려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의지를 표한 것일까. 아니, 어쩌면 그 꿈으로 인해 한강은 죽음에서 살아난 것일지도 모른다. 두 번째의 삶, 덤으로서의 삶을 살게된 것일지도 모른다. 긴 제목의 시 「이천오년 오월 삼십일, 제주의 봄바다는 햇빛이 반, 물고기 비늘 같은 바람은 소금기를 힘차게 내 몸에 끼얹으며, 이제부터 네 삶은 덤이라고」에서 한강의 거듭남을 볼 수 있다. 화자는 살아 있음의 고통을 느끼는 도중 “어슴푸레 빛”(「피 흐르는 눈 3」)나는 살려줘, 라는 말을 떠올리는 것에서 시작하여 점차 삶의 고통을 견디거나 극복하려는 면모를 보인다. 강원래의 공연을 보고 쓴 시 「휠체어 댄스」의 화자는 눈물도, 악몽도 자신을 좌절시킬 수 없다고 고백하며 삶 앞에 의연한 태도를 드러냈다. 가장 격렬한 투쟁은 「조용한 날들 2」에 쓰여져 있다.
찌르지 말아요 // 짓이기지 말아요
1초 만에 / 으스러뜨리지 말아요
(하지만 상관없어, 네가 찌르든 부숴뜨리든)
그렇게 조금 더
나아갔다
―「조용한 날들 2」 부분(강조는 작가)
이 시의 화자는 한강의 모습이 투영된 여성일 테지만 말하고 있는 것은 달팽이다. 비오는 날 창문을 열심히 가로지르는 달팽이는 다가오는 화자에게 부탁의 말을 던진다. 마치 아등바등 살아가는 인간들이 신에게 자비를 구하듯 달팽이는 자신의 안위를 화자에게 강구한다. 주어진 삶, 운명에 구속되어 타자 혹은 초월적 존재에게 의존하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나약한 존재. 그러나 달팽이는 내면의 말을 덧붙인다. “하지만 상관없어. 네가 찌르든 부숴뜨리든.” 투쟁, 달팽이는 극복하여 싸움으로서 한 발 나아갈 수 있었다. 한강이 바라보는 인간 존재 또한 그런 것일까. 삶의 고통에 주저앉지 않고 투쟁할 때 성장할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인 것일까.
인간이 나약한 존재임에는 변화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고통과 투쟁해야 하는가. 한강은 그 방법으로 침묵을 제시한다. 인간의 고통을 잉태하는 혀와 입술을 제거하여 “단단한 밀봉”(「저녁의 소묘 3―유리창」)을 배우는 것이 고통을 견뎌내고 고통과 투쟁할 수 있는 방법인 것이다. 언어의 절제로서 고통의 기원을 절단하는 것.
그리고 인간은 고통과 투쟁하기 위해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오래 성찰해야 한다.
한강의 시에는 ‘당신’이나‘너’와 같은 청자가 종종 등장한다. 이는 한강이 충고의 말을 건네는 특별한 대상처럼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당신’이나 ‘너’는 한강의 운명, 곧 한강 자신이다. 한강의 시들을 결국 자기 자신에게 보내는 메시지였고, 그것은 자기반성이 된다. 자기를 돌아보고 자기를 연구하면서 한강은, 시의 화자들은 살아간다는 것의 본질에 파고들게 된다. 그 경지에서 한강은, 시의 화자들은 희망의 부재를 체화하고 삶이 휘두르는 칼날에 오히려 몸을 내던진다. 이는 인간으로서 고통을 초월한 것으로도 보이지만 작가로서의 사명으로 읽히기도 한다.
한강도 물론 시로 등단한 어엿한 시인이지만 역시 나는 소설을 쓰는 한강이 좋다. 그러나 한강의 시에는 한강의 소설에 조금 부족한 고요와 평온이 있다. “다시 견디기 힘든 달이” (「새벽에 들은 노래 3」) 떠도 “이렇게 한 계절 더 피 흘려도 좋다.”고 읊조리는 한강은 어쩐지 숭고해보이기도 한다. 한강이 이 숭고한 작업을 계속 해주었으면 좋겠다. 아무도 몰래, 천천히, 한 글자씩 써내려가다가 십 몇 년 후, 아무렇지도 않게 묶어 두 번째 시집을 내주었으면 좋겠다. 그때에는 좀더 원숙한 한강의 시를 접할 수 있을까. 삼십 대, 그 반짝일 순간을 기대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