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짝사랑하는 여자가 좋아하는 남자가 사실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안 남자.
꼬리 없는 도마뱀 같은 의자는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불빛 없는 소슬한 공간을 꾸물거리면서 타고 오를 듯한 몸체에 올라탄다. 내려앉은 무게만큼의 소리가 한쪽 벽까지 달려가 부딪혀 반대쪽 벽으로 날아간다. 눈 한 번 깜빡일 동안 곰돌이 하더니 크기가 작아지고, 얼마 안 가 사라진다. 나는 두 손 깍지 끼고 눈을 감는다. 성당 유리창을 장식했을 법한 형체 희미한 물체가 일그러진 채 아래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미끄러진다. 앞니가 조금 보일 정도로 입술을 열고 아버지, 하고 낮게 중얼거린다. 그러자 심장 박동이 편해지면서 덮인 눈꺼풀 안으로 광원이 불분명한 빛이 황황히 비친다. 구원의 핏방울처럼 성스럽게.
밤이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보이지 않는 실존적인 존재에게 밤을 패가며 속에서 펄펄 끓여야 했던 것을 토로한다. 기도는 일종의 외침 같은 것이어서 오랜 시간을 하다 보면 몸도 목도 피로해지기는 하지만 고되게 땀 흘려 태산의 정상에 오른 등산가가 느낄, 사위가 뻥 뚫린 듯 시원한 기분이 몸을 장악한다. 그러나 가끔은 눈물을 흘리며 몇 시간이고 여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때도 있다. 나는 어제의 일을 반추하면 할수록 곰비임비 쌓여가는 혼란 때문에 목소리를 달달 떤다. 떨림은 예배당 문을 나서는 순간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
얼굴을 쭉 내민 달덩이가 앞을 환하게 밝힌다. 올려다본 달의 형상이 웃는 하회탈 같다. 흘리는 빛이 인자하고 포근하다. 나는 할머니의 품에 안기듯 지상에 펼쳐진 달빛으로 걸어 들어간다.
*
별똥이다!
류빈은 저 혼자 고개를 쳐들고 걷더니 내 팔을 붙잡고 발놀림을 멈추었다.
어디?
벌써 산 너머 내려갔지.
조금 달뜨는지 미소가 활짝 피었다. 나는 시삐 발길을 돌렸다. 거짓말이네, 라고 비꼬아 말하자 류빈은 발끈하며 재빨리 나의 뒤를 따라잡는다.
거짓말 아니라, 진짜 있었어.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걸었다. 류빈도 잠자코 따랐다. 간간이 그의 흥얼거림이 들려왔다. 교과서며 필통이며 갖가지 문구들 가득 든 가방이 무겁게 어깨를 짓눌렀다. 차가운 바람이 앞을 막아서서 한 발짝 떼기도 어려웠다. 그와 대조적으로 살이 통통하게 오른 달은 입을 달싹이며 따듯하고 부드럽게 빛살을 노래했다. 류빈은 자꾸 고개를 들어 달을 보며 해갈을 갓 한 사람처럼 탄성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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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공원 산책로에 접어들었고, 마녀의 입김 같은 바람에 지친 나는 잠시 쉬었다 가자고 했다. 눈에 뜨이는 벤치를 잡고 우리는 나란히 앉았다. 류빈은 털실로 짠 두터운 목도리를 감고 있었다. 진한 초록색과 검정 실이 뒤엉키어 하나의 긴 형체를 만들어가는 것이 꽤 멋졌다. 류빈은 그 목도리를 자신이 직접 짰다고 호언장담했으나 평소 손재주로 보아 필시 다른 사람의 손길이 거치지 않았을 리 없었다.
소원 빌어야겠다.
류빈은 깍지 낀 손을 앞으로 뻗어 기지개를 켜는가 싶더니 입을 열었다.
웬 소원?
별똥 봤으면 소원을 빌어야지.
류빈은 내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히죽 웃는다.
무슨 소원 빌게.
나는 그의 머리 너머로 솟은 나무의 우듬지를 공연히 지켜보며 말했다. 류빈은 잠시 고개를 숙이더니 곧 생각났다며 주먹을 꽉 쥔다. 무엇이냐고 묻자 말이 없어 그러려니 했다.
*
까만 도화지에서 투명하게 반짝이던 점 하나가 스키를 타듯 미끄러져 내려간다. 하도 짧은 시간에 벌어진 일이라 나는 그것을 놓칠 뻔했지만 용케 포착해냈다. 크기도 규모도 작은 별똥이나 나는 그 자리에 잠시 멈추어 선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보일 듯한 별똥의 자국을 눈으로 훑어간다. 류빈을 알지 못하던 때에, 유성우가 내린다는 인터넷 기사를 읽고 설렌 마음으로 기다린 적이 있다. 나의 상기된 모습은 마치 첫 소풍을 앞둔 아동의 뒤척임 같았다. 창가에 의자를 두고 앉아 머그잔에 녹차를 탔다. 차분하게 차를 마시며 밤하늘을 지켜보았다. 마음까지 흠뻑 적셔줄 것을 기대하며 한참을 꼿꼿이 앉아 있었는데 유성우는커녕 별조차 깜빡이지 않아 나는 화를 내며 의자를 치웠다. 그렇게 잠이 들었다. 다음 날 뉴스를 보니 새벽 4시경에 별의 눈물이 떼로 내렸다고 했다.
나무들에게서 옷을 빼앗아 입은 땅을 때리며 걸어간다. 정해진 목적지는 없고, 그저 배회한다. 아직 한구석이 먹먹하다. 그러나 절대자에게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이제는 내가 풀어내는 수밖에 없다. 영 자신이 없다. 류빈이 뜬금없이 내뱉은-장난이라고 믿고 싶은 말이 머리카락 되어 한 올 한 올 몸 안으로 흡수되는 양 찝찝하다. 그 말이란, 내가 류빈의 팔을 감싸 쥐자마자 마치 계획이라도 한 듯 기계적으로 튀어나온 것이었다.
*
우리는 변두리에 있는 후미진 요양원에서 팔다리를 사용하지 못해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 노인들의 식사를 도왔다. 잘게 다져진 장조림을 밥과 비벼 힘없이 고개를 뒤로 젖힌 한 노부인의 입에 밀어 넣었다. 남의나이는 족히 드셨을 고목 같은 노부인의 얼굴에는 검버섯이 자라고 있었다. 겨우 세 숟가락을 떠먹였을 즈음에 류빈은 어느새 식사 보조를 끝내고 뒤에 서 있었다. 힘들지, 라고 물으며 어깨를 토닥여주는 류빈을 보며 소박하게 웃었다.
밥이 반 정도 줄어들자 노부인은 수저를 아무리 갖다 대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노부인의 목을 조르던 음식받이를 떼고 휠체어를 밀어 밖으로 모셨다. 수저를 쥐던 비닐장갑을 낀 채로 류빈에게 다가갔다. 작은 바퀴가 구르는 사이 불쑥 떠오른 우스운 이야기를 그에게 해줄 요량이었다. 요양원 내(內)가 보일러와 히터 등으로 상당히 더워서 이마에는 땀이 송글 흐르고 있었다. 아직 노인 몇이 식사를 마치지 않았기에 목소리를 낮추었다. 정확히 말이 전달되지 않을 듯싶어 나는 류빈을 안다시피 가까이 다가섰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흠칫 몸을 떨었다.
*
류빈은 나의 손을 밀쳤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을 꺼냈다.
미안, 호성아.
짧은 두 단어를 먼저 뱉은 다음, 몇 마디를 더하더니 초조하게 서 있었다. 류빈의 말이 끝나고 사실 그보다 더 식은땀을 흘린 사람은 나였다. 나는 이곳에서 일어난 발화에 꿈만하여 일단 궁따고 보았다. 그러나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나는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고개를 휘저으며, 숟가락을 바르르 떨고 있는 백발의 노인에게 달리듯 걸어갔다.
*
호성아, 너는 아니?
너의 웃음에 나는 엄청난 고통을 느낀다는 걸.
너의 행동에 나는 망령되이 떨린다는 걸.
매일 나를 억누르고 가두느라 마음의 사슬이 닳아 끊어질 지경이라는 걸.
헤진 심장 조각 사이로 농축된 눈물이 빼짓이 흐른다는 걸.
낮이고 밤이고 얼마나 많이 고민했는지 몰라.
그저 친한 친구 사이의 우정이나 동경인 줄 알았어.
그런 거라면 그런 거라고 믿고 싶었어.
그런데 너의 웃음과 손길에 아파하는 나를 보며 그런 게 아니란 걸 알았어.
…부정하고 싶지만 부정할 수 없어.
*
류빈은 한쪽 눈을 가릴 정도로 앞머리를 길렀다. 직모요 갈색이 은근히 묻어나는 머리칼은 그와 퍽 잘 어울렸다. 눈이 가려짐으로써 류빈에게는 달무리 같은 기품 퍼져 나왔다. 대부분의 반 친구들은 그 기품 때문에 류빈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렇다고 류빈이 사교적이거나 활발한 중세적인 성격도 아니어서 그에게는 친구가 없었다. 그러나 여자들의 입에는 자주 오르락거렸다. 매초롬한 이목구비 덕도 있겠고, 류빈 특유의 멋도 한몫했겠다.
류빈은 원색의 포장지로 싸인 선물상자를 자주 받았다. 그것은 간접적인 고백―아니, 구애의 행동이었다. 여자들은 제 어미의 화장품들까지 총동원하여 가장 예쁘게 분칠을 한 상태로 류빈의 앞에 나타났다. 한 번 흘낏 본 그 상판들은 허옇게 뜬 것이 척 보아도 부담스러웠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내 생각과 같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류빈 역시 모든 선물과 고백을 거절했다. 하지만 여자들은 굴복하지 않고 끈질기게 구애했다. 그중에는 K도 있었다. 윤기가 나는 머리카락을 날개뼈 밑으로 늘어뜨린 여자였다. 박속같은 피부 위로 곧게 솟은 콧날에 반해 한동안 K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열 번 찍어 넘어가지 않는 나무 없다던 속담은 나와 K에게 적용되지 않았다. K는 뭇 여학생들처럼 류빈에게 쫓아가서는 꼬리를 홰홰 쳤다.
K를 떠나보낸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다. 류빈은 커다랗게 접힌 종이를 흔들며 나에게 왔다.
선물은 거절해도, 편지는 거절 못 하겠어.
혀를 내밀며 류빈은 웃어 보였다. 하트가 조그맣게 붙은 걸 보아 러브테러 비스름한 것이리라. 류빈에게서 편지를 건네어 받아 찬찬히 살펴보니 K가 쓴 것이었다. 나는 앞에 서서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류빈을 때려주고 싶다는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곧 사그라지긴 했지만, 꽤 강렬한 감정이어서 오래 잔상에 남아 있었다.
매번 거절만 하지 말고 아무라도 잡고 한 번 사귀어 봐.
애써 웃으며 K의 편지를 돌려주었다. 류빈은 어깨를 으쓱였다.
잘 모르겠어. 마음에 드는 애가 없네.
나는 그 순간만큼은 류빈이 정말 미웠다.
*
류빈은 어머니와 갓 교복을 사 입은 여동생을 데리고 살았다.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자였고, 이태 전에 저혈압으로 죽었다. 류빈은 그토록 자신을 괴롭혔던 아버지가 죽자 마음이 편해졌다고 좋아했다. 아버지는 류빈과 그의 가족들에게 하나의 골칫덩이에 불과했다. 벌어오는 돈마다 술과 담배, 도박에 탕진하는 몰상식한 인간이었기에 류빈은 단 한 번도 아버지의 사랑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었다. 되레 대접붙이의 욕설과 폭행 하에서 늘 억압받고 살아왔다. 친구 하나 집에 데리고 와 본 적 없었고, 집에서 저녁 한 끼를 맛있게 먹지 못했다. 류빈은 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난 날, 상당히 거리가 있는 우리 집에 왔다. 현관에 서서 피곤한지 눈그늘이 내린 눈을 둥글게 휘며 씁쓸하게 웃었다.
…아니, 괜찮아. 오히려 좋은걸.
고맙게 가족들이 자리를 피해주어서 나는 류빈과 둘이서만 밥을 먹었다. 류빈은 밥알 하나하나를 깨작거리며 젓가락을 놀렸다. 연신 괜찮다고 말했지만 끝마나 흐려지는 목소리에서 슬픔이 확연히 묻어났다. 그 슬픔은 밤이 되자 결국 눈물로서 흘러내렸고, 나는 류빈이 울음을 그칠 때까지 그의 곁에서 숨죽이고 있었다.
*
나는 하는 둥 마는 둥 청소를 끝내고 서둘러서 요양원 건물을 빠져나왔다. 류빈은 입을 꼭 다물고 뒤를 따랐다―말을 하거나 붙잡으려 뛰지 않았다. 짧아진 해는 벌써 얼굴을 숨겼다. 주차장에 차가 넘쳐 시간을 못 맞춘 운전자들은 길거리에 주차해야 했다. 죽은 사람이 인맥이 넓은 사람인 듯 수많은 차는 일제히 장례식장을 향해 있었다. 저녁 공기는 차가웠고, 그래서 나는 빠르게 달렸다.
*
별똥 하나가 또 떨어진다. 나는 소원을 빈다. 소원이라기보다 다시 기도한다.
제 주제에 한강을 한 번 흉내 내보았습니다. 그러니까 한강의 감정이라던가 문장을 따라해보았다기보다 철저히 형식만을 흉내 냈습니다. 그래도 생각보다 괜찮은 작품이 나온 것 같아서 기분 좋네요. 지금껏 써온 작품 중에 가장 마음에 들고, 또 오래 붙들고 있던 작품이에요. 류빈에게 한동안 빠져서 지금도 눈물이 빼짓이 새어나오네요. 마무리를 급하게 하느라 생각한대로는 나오지 않았지만, 사실 더 적을 만한 글도 떠오르질 않네요. 한 이주 뒤나 떠오를 때 이어보려구요. 원래 이 글 올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느새 방문자 수가 3만 명을 넘었더라구요. 3만 명 넘으면 하나의 리뷰를 올리려고 했는데, 책을 다 읽지 못했기에 소설로 대신합니다. 곧 한강이나 황정은의 리뷰도 올릴 게요. 폭풍 리뷰가 예상된답니다. 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