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음>
야자 시간은 언제나 그렇듯 조용하다. 나는 주머니에서 MP3 플레이어를 꺼내 재생시켰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펜을 들려던 차에, 옆자리에 앉아 공책에 수식을 잔뜩 적어가며 수학 문제를 풀던 짝이 어깨를 두드렸다. 오른쪽 이어폰을 빼며 돌아본 그의 얼굴은 살짝 일그러져 있었다. 검정색 뿔테 안경을 썼는데, 그 때문에 커다란 코가 더욱 돋보였다. “시끄러워.” 짝은 자신의 말이 들리는 것도 싫은 듯이 입술만 움직여서 말했다. 이어폰에서 새어나간 소리이리라 생각한 나는 그의 눈앞에다 대고 MP3 음량을 두 단계 낮추었다. 그는 만족하며, 하지만 어떠한 표현 없이 다시 수식 적어내기에 열중했다. 살짝 내려다 본 그 수식들이란, 보기만 해도 눈이 빙글 도는 것들이었다. 나는 감탄하며 박수를 쳐 주고픈 충동을 느꼈다가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여기, 한결같이 앉아 바삐 손을 놀리고 있는 모두가 이쯤은 적어낼 수 있을 터였다. 나는 땅을 재게 차며 의자 앞다리를 들어올렸다. 책상을 붙잡은 손아귀 힘에 의지하며 의자를 흔들었다. 책상 위에는 얼마 전 친구에게 헐값에 구매한 스프링 노트와 수학 문제집 한 권이 펼쳐져 있었다. 스프링 노트는 내 머릿속처럼 깔끔했다. 입에 물었던 연필을 손에 들고 문제를 하나 읽었다. 무슨 함수에 관한 문제인 건 알겠는데 도무지 손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문제집을 덮었다. 종이 울릴 때까지 스프링 노트 한 면에 낙서를 했다.
날씨가 그무레해서 가져온 우산을 챙겨 교실을 나가니 두나가 서 있었다. 단발머리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어여쁜 소녀였다. 나는 두나를 향해 부드러운 아이스크림을 한 입 크게 문 소년처럼 방긋 웃어주었다. 두나도 미소 지었다. 우리는 어두운 밤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두나의 고요함은 따듯했고, 달콤했다. 이 고요함을 나는 즐겼다. 내가 싱글 웃으면서 걸어가고 있으면 언제나 두나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대개 학교생활에 관한 질문들이었다. 두나의 고요함만큼이나 두나의 목소리도 좋아했던 나는 반가워하며 질문에 답했다. 그 날은, 두나가 어느덧 이 주일 앞으로 다가온 시험 이야기를 꺼냈다. “수현아, 시험 준비는 잘 되가?” 선뜻 답하기 어려웠던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 자그마한 돌을 발끝으로 차며 말했다. “이번 시험은 준비 안 하려고.” “왜?” “공부가 하기 싫어. 혼란스러워, 모든 게. 같은 교복을 입고, 공부를 하고,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닮아가는 학생들과 같아져야 한다는 사실이 정말 싫어.” 나는 억눌려 있던 속내를 빠르게 뱉어냈다. 두나는 고개를 두 번 끄덕이더니 잠잠히 걸었다. 저 멀리 가로등이 보였다. 주황색 빛이 은은하게 거리를 비추고 있었다.
두나의 집까지 그녀를 바래다주었다. 묵묵히 걷던 그녀는 대문을 열기 전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수현아, 네 마음은 충분히 이해해. 나도 언젠가 그런 생각을 했었어. 일종의 슬럼프같이 찾아오는 생각들 말이야. 하지만 이 생각들에 사로잡혀서 너의 오늘들을 헛되이 보낸다면, 너는 소중한 시간들을 잃는 거야.” 나는 두나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내 고민을 쓸데없는 것이라 생각하는구나. 말없이 두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실망스러웠다. 그녀를 그냥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보내고, 골목길. 고양이 두 마리가 세력싸움을 하는지 크게 울어댄다. 공기를 할퀴어대는 울음소리를 들으며 집에 가는 길. 나는 닮아가는 것이 정말 싫었다. 학생들의 개성을 존중해 주지 않는 학교, 교육 환경. 빡빡 깎은 머리로 등교를 해서 가방을 벗어놓고, 시작하는 오전 자율 학습, 수업, 점심, 야자, 하교, 그리고 학원. 학생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도 알지 못한 채 무작정 공부에만 매진하고 있다. 한때는 나도 그랬다. 어딜 가든 들려오는 공부해라, 이제 고등학생이 되었으니, 하는 소리들……. 질려서라도 공부를 해야 했다. 억지로 수학 공식을 외우고, 고난이도 문제를 찾아 풀고,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의 년도를 외워야 했고, 성층권과 열권의 특징을 알아야 했다. 어느 날 야자 시간이었다. 나는 수학 문제를 풀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교실을 한 바퀴 빙 둘러보았다. 그리고 눈에 비치는 그 모습에 충격 받았다. 정형화된 모두들, 정형화되지 않으면 안 되는 모두들, 정형화될 수밖에 없는 사회에 살아가는 모두들. 그 모두에 나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현관문을 여니 엄마가 소파에 기대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11시가 훌쩍 넘은 늦은 시간이었다. 엄마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이쪽을 흘깃 보더니 환하게 웃으며 일어섰다. “수현이 왔구나. 옷 갈아입어, 엄마가 계란 하나 구워줄게.” 먹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응, 크게 대답한 후 방으로 들어갔다. 블라인드 틈으로 가로등 불빛이 새어 들어와 방 안 공기를 휘감았다. 아예 블라인드를 걷어버리니 방이 불을 켠 듯 밝아졌다. 교복을 벗고 손에 들었다. 축 처진 교복을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파란 색의 체크 무늬가 예쁘게 짜인 교복이었다. 직선이 위로 갔다가, 아래로 갔다가, 횡으로 움직였다가, 복잡하게 엉켜 있었다. 모두가 교복을 벗고, 걸고, 아침이 되면 다시 입고 학교를 가겠지. 엄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교복을 던져두고 방을 나섰다.
2012. 7. 19 (원고지 12.5장)
---------------------------------------------------------------
인간적으로, 이 글은 정말 못 썼다.
한 문단, 첫 문단을 쓰는데 사흘이 걸렸다.
두 시간만에 다 썼다. 7시부터 9시 반 넘어까지.
단편이라고 안 했으니 콩트를 써 본다. 반전 없는 가짜 콩트.
심지어는 퇴고도 제대로 안 했다. 맞춤법을 보고 안 맞는 문장 다듬은 게 전부다. (으이구, 자랑이다.)
대산 청소년 문학상 백일장에서 쓴 글이라고 생각하며 읽어주길 바랬다. 질은 같지 않지만, 그래도.
긴 것보다는 짧은 게 읽기 편하니까... 그렇지, 그래.
수현이를 머릿속에 그리는 게 정말 힘들었다. 소설 속의 세계를 머릿속으로 만들고, 머릿속에 집어넣는 작업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해야만 했고, 나는 그 집중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런 졸작이 탄생했다. 솔직히 알라딘에 올리기도 부끄러운 소설이다. 부끄럽다. 어서 다음 편을 써서 이 소설을 덮어야 겠다.
원래는 수현이가 폭력 서클에 가입하여 싸움판에 나가기도 하고, 즉 꽤나 판이 큰 소설을 구상했다.
하지만 마감 시간이 5시간 앞으로 다가온 오늘, 현재 그런 글을 쓸 수 있을만한 힘도, 용기도 없기에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대로 써내려갔다.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까지 멋드러지게 짜 놓은 소설이었는데 이렇게 끝내는 것이 아쉽기도 하다. 첫 문장은 '모두 닮아간다' 였고, 마지막 문장은 '나는 닮음을 탈피했다' 였다. 수현이가 싸움판에 들어가서, 누군가를 때리고, 누르며 이제 자신은 남과 다르다고 착각하며 소설을 끝내려고 했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하니 좋은 아이디어였던 것 같다.
첫 문장부터 사로잡지 못해서 죄송하다.
손가락이 움직이지를 않았다. 글 쓰는게 이토록 피곤하고 힘든 일인지 '닮음'을 구상하고 쓰면서 깨달았다.
쉽게만 보아왔던 소설 구상과 작문이 뼈저리게 힘들다는 것도 깨달았다. 다음 주제는 이토록 허술하고 멍청하게 쓰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한다. 방학이 되었다보니 생각하는 시간도 좀 더 길어질 것이다. 적어도 이 작품보다는 훨씬 좋은 질의 글이 나오겠지, 생각해본다. - 글을 못 쓰다 보니 자연스레 잡담이 길어진다. 소설 본문 보다 잡담이 더 긴 것 같다.
만약 끝까지 읽어주신 분이 계신다면, 정말 감사하면서도 죄송스럽습니다. 글을 읽으셨다면 조금의 기대라도 있으셨단 뜻인데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다음에는 꼭 잘 쓰겠습니다. 잘 써서 놀라게 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